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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산줄기에서 가장 빼어난 여덟산(금강산,오대산,태백산,소백산,대야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중의 하나인 지리산
시장에서 산 싸구려 신발인데 접지력이 얼마나 좋은지 아이젠이 필요가 없는 등산화다.
전날 지리주능에서 축축하게 젖어있었지만 간밤에 대피소에서 뽀송 뽀송하게 말려왔으니
편안하고,눈길, 낙엽길, 마사토길,바위에도 접지력이 좋고 단, 하나 흠이라면 뭐 사소한 흠도 아닌 방수가 전혀 안된다는...
싸구려 등산화 신고 지리산 화-대 종주와 이후 우두산, 가야산 눈길에 한 번도 미끄러지거나 넘어지지 않았으니
접지력이 얼마나 좋은지 알겠죠.
천왕에서 중봉으로 가는길에 눈이 아주 많고
아따 !춥다
주능선에 비해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눈은 생각보다 많이 쌓여있고 지난밤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 눈이 등로에 가득하여 길 찾기도 애매하다.
하지만 철벽의 등산화로 인해 신발속은 조금 축축하였지만
길고 지루한 대원사길을 6시간 정도 걸려 방장산 대원사에 도착하고
비구니 사찰인 대원사는 멀리 해인사 말사의 절이죠
대웅전에 들러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음에 감사드리고
올해도 지리 주능선을 지나게 될 수많은 회원님들의 안전산행을 기원드린다
때는 점심 공양 시간이 지났으나 코로나 여파로 일반인에 공양은 안하신다며 내려가다가 보면
벽송식당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보라고 하신다.
벽송 식당에 들러
아침 겸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시키니 주인 어르신께서 너무 친절하시더군요
달달한 막걸리 석 잔 연거푸 마시고
행여나 화-대종주하시고 난 후 이곳을 지나게 되면 꼭 한번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생기지 않던 물집이 터지고 터져서 바늘로 물을 빼고 약을 바르고 했지만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수행길에 이 정도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죠
멀리 밤머리재가 보이는데 도로 따라 밤머리재로 진행하면 약 8KM
새로 생긴 터널로 진행하면 3KM 조금 넘는다.
진주 산꾼 영스님께서 찾아오셔서 달달하고 따뜻한 음료와 붕어빵까지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영스님께서는 언제나 깜짝 방문을 해주시는데 어찌 알고 찾아오시는지
다른곳의 터널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별도의 통로가 있는 밤머리재 터널
터널 끝난 후 필봉과 왕산과 넘을까 했지만 지리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두산은 그대로 통과
백두대간 남덕유에서 발원해서 흘러온 남강을 건너며
남강은 역사가 흐르는 강으로 남덕유에서 발원해 함양, 진주를 의령군 지정면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국가하천이다
멀리 산청군 오부면의 구인산이 고개를 내미는군요
남강에서 본 왕산과 봉화산
영스님께서 가지고 오신 전투 식량으로 한 끼 때우는데 맛은 그럴듯합니다.
성질급한 사람은 10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개봉하면 덜 익어 맛이 없을 수도 있고
영스님이 제가 노숙한다고 하니 배낭에다가 핫팩 7개를 넣어 주셨는데 양으로 따진다면 흙 한삽이랑 맞먹네요
아주 죽어라 합니다.^^
멀리서 찾아오신 영스님은 이제 댁으로 가야할시간이고 영스님 감사드리고요 댁으로 잘 들어가셨죠
산청군 차탄리 장재마을로 올라가며 본 필봉과 왕산
장재마을 고갯마루의 마을 버스서는 곳인데 잠자기 딱 좋은곳이지만 아직 시간이 많아 좀 더 가보기로 하고
잠자기 좋은곳은 늘 주간에 지나니 야간에는 또 어디서 잠을 자야할지 바람 막을곳만 있다면야 어디든 좋은데
산청군 오부면 올라가는 선들재를 지나 워낙 시골마을이다 보니 해가 빠지자 차량이동이 거의 없고
오부면 중촌마을
"참는것은 마음의 보배요
참을성을 얻는 것은 몸의 능력이다
설해 법사가 76세가 되신 것을 기려 여기에 쓰다"라고...
해석은 클럽의 한문학 박사이신 공주의 팔개님께 부탁해서...
저녁 9시무렵 잠은 이곳 마을 회관 인근 정자에서 몇 시간 노숙하고 새벽 일찍 진행 하기로
영스님이 주신 핫팩 3개 침낭에 넣었지만 덜~덜~덜....서해 바다에서 새우잡는 꿈을 꾸고
새벽 2시 조금 넘어 길을 이어가며
중촌마을과 소룡산 임진왜란 역사 체험길
소룡산은 경남 산청과 거창의 경계인산인데 오래전에는 우봉산이라 불렀으며 멀리 백두대간 남덕유에서 이어온 산줄기로 남강의
우측 지맥길이다.
바랑산 등산로 방향으로
때는 음력 12월 보름 무렵이라 달은 무지 밝고 공허한 밤하늘에 그 무엇도 내게 다가오거나 말하지 않는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까마득한 공간속은 인간을 허락하지 않은 절대적인 공간이라
욕심을 내본들 어느 것 하나 들어줄 리도 없고,심해보다 더 검은빛 속에 떨어져 있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가끔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리기는 하나 분위지만는 아주 그만이고
시멘트 임도길에 잠시 누워 달을 올려다 보다가 모자라는 잠을 잠시 청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기가 찾아들어 일어선다
누웠다가 일어서면 무릅이 뻐근하니 어디가서 기름칠이라도 해야하나 생각도 들고
거창군 신원면 중유마을과 지맥길 철마산
바람을 막아주던 지맥길에서 거창땅으로 들어오니 바람을 막을 산은 멀리 있고
잠이나 자야할 동네개들이 벌써 짖기 시작한다.
시멘트 임도길은 얼음으로 중무장하고 있어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걸으며 신원면으로 향하며
몸은 움츠려 들고 밤에 썻던 핫팩 세개를 양쪽과 안쪽주머니에 넣고 만지작 거린다.
어둠이 가고 날이 언제쯤 밝으려나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장소로 발걸음을 이동한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장소인 박산골
1951년 육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견벽청야(말썽의 소지가 있는 곳은 초토화시킨다) 작전'에 따라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무고한 양민 700명을 학살한 사건이며
이 사건은 대한민국과 국군에 길이 남을 수치로 남음
게릴라 토벌 과정에서 우리 국민을 지켜야 함에도, 적국 국민으로 취급하는 어처구니없이 주민을 몽땅 살해한 것이
11사단 사단장의 토벌 방침이라 한다.
이후 양민 학살사건 이후 11사단은 전방으로 보내지고 다른 부대가 게릴라 작전에 투입된다.
사건의 주모자인 11 사단장 최덕신은 86년도에 월북해서 김일성 곁으로 감
내용
사건 1차
1951년 2월 9일 청연 마을에 들어와 빨치산 토벌 명목으로 가옥에 방화
주민 84명 학살
2차 사건
2월 10일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 주민을 강제로 신원 국민학교에 몰고 감
이 과정에서 노약자와 주민 일부 탄량골짜기로 끌고 가 100명 학살
3차 사건
신원면 신원 초등학교에 모인 주민 천여명중 경찰, 공무원 가족을 형식적으로 골라내고 남은 사람들을
박산골 계곡으로 끌고 가 517명 집단학살
다시 2시간에 걸쳐 확인사살 하고 시신 위에 나무를 올려놓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름
이때 3명의 젊은 주민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그 당시를 증언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됨.
아래 사진은 지난날 이곳을 찾으며 담아둔 사진으로
박산골에서 희생된 분들 중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 남자. 어린 여자 무덤이 각각 있는 곳이다.
아래는 여자 위에는 남자.
그리고 쓰러진 위령비
女子合同之墓
여자분들만 화장해서 묘지를 만듬
男子合同之墓
남자분들만 화장해서 묘를 만듬
여자묘 뒤에 작은 봉분 어린 여자애들만 한꺼번에 만든 무덤
남자 무덤옆 작은 봉분은 어린 남자애들 무덤
행여나 이곳을 지난다면 꼭 한번 찾아가 보시기를 권하며
거창군 신원면에 들어오니 아직 이른 새벽이라 문을 연 가게는 없고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없다
편의점 어디 없나 두리번거리며 찾다보니 어느덧 면소재지를 지나 밖으로 나와있다
신원면 구사리 마을 간이 버스 정류장의 전기의자가 너무 따뜻하다
전투식량에 물 부어 놓고 잠시 기다리는데
10분을 못 기다리고 개봉하여 맛을 보니 아직 덜 익었고 새벽에 이런 것 먹으려니 마치 거친모래를 삼키는 기분이라
대충 먹어도 되지만 입이 워낙 고급진관계로 동네 고양이들 먹으라며 쓰레기 통에서 조그만 그릇을 찾아와 부어 놓고 나온다.
아참 이곳 구사리 마을은 조선초 연산군의 비(妃) 거창 신씨가 폐비되어 낙향하여 사셨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10대왕 연산군과 장녹수 잘 아시죠
연산군과 장녹수 사이에서 늘 지켜봐야만 했던 비(妃) 였지만 연산군 폐위때 같이 폐위되어 유배를 떠날때도 연산군을 꼭 모시게
해달라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녀는 명문가 집안의 후손으로 성품이 바르고 착했다는... 이후에 나이가 들어 연산군 옆에 묻힌 비운의 비로 남아있다.
가는세월 구름타고 !~~흘러가는 저구름아!~ 어쩌구 저쩌구 노래가 생각나고
장녹수는 이후에 참형으로 이슬로 사라지고
거창군 신원면과 남상면을 이어주는 고갯마루인데
높이가 꽤 높다.
아이고!~ 배는 고프고 어깨는 끊어질 듯 아프고
허리는 벌써 꼬꾸라 지고, 발바닥의 물집은 몇 개 더 생겨 고통을 준다.
거창군 초점산 남쪽계곡에서 발원해 흘러온 황강과 남덕유산 북쪽계곡에서 발원해 흘러온 아름다운 거창 위천이 합류해
합천댐으로 흘러드는 황강
남상면과 남하를 잇는 일원교를 건너면서
황강을 건너가니 kcc 샷시 건물이 보여 들어가 어여쁜 아가씨한테 따뜻한 물에 커피 한잔 얻어들고 나온다.
겨울에는 역시 커피가 제일이야
길고긴 오르막길에 발바닥은 물집으로 인해 통증이 계속되어 쉬었다가 걷기를 반복하지만
오늘 중으로 해인사에 도착해야 하기에 마음만 바쁘다.
지맥길에 만나는 오가마을
다섯 번 피난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오가마을이란다.
거창군 남하면 자하마을
호랑이를 피해서 자리를 옮긴 마을이라는데
아주머니 두분께 다가가서 물 좀 달라고 하니 마을회관 있는데 한대(밖에)있다고...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사투리
수돗물 한병 보충하고
드디어 거창군 가조와 우두산 의상봉 라인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시간은 점심 무렵이지만 저곳을 넘어야 하니 일부러 식당을 찾을 수는 없고
가는 길에 길가에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말고"라며 가다 보니 길가에 소고기 식당이 눈에 들어와 소고기 비빔밥으로 한 끼 때운다
편의점에 들러 빵 몇 개 보충하고
장군봉과 의상봉이 지척이다.
저산을 넘어 가야산 아래 "신들이 만들고 기록했을"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을 모신 해인사까지 저녁 무렵에
도착할 수 있을지...
장거리 수행길에
여름보다 겨울이 더 좋은 이유는 땀냄새가 나지 않고 물도 많이 필요 없고 잠자기 좋고?
핫팩 8개, 휴대폰 밧데리 4개, 여러 벌의 겨울옷과 양말이 무게가 좀 나간다.
양말은 하루 신고 버리기에 평소에 안 신던 양말을 가지고 왔으나
산청에서 영스님이 사 오신 양말과 핫팩이 배낭에 들어서 더 무거움
무게로 따진다면 생수가 만이 필요한 여름과 별반 다르지 않음
그래서 허리는 꼬부러지기 직전이다
Y자 출렁다리가 보이고
저곳으로 가지 않으니
하늘 다리가 있어 입장료를 받는데 고견사로 올라간다고 하면 입장료 없이 그대로 보내준다.
우두산 고견사 일주문을 지나며
의상봉 아래 자리 잡은 고견사는 해인사 말사의 절이며 신라 문무왕시대에 원효가 창건했다고 한다.
대웅전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잠시 들어가 부처님께 절하고 나와
고견사 한편에 서 계시는 석불
오랜 풍상(風霜)의 세월을 견딜 수 없어 마모가 심해 석불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두 손 모아 합장하고 고견사 대웅전 옆 맑은 약수 한 모금 마시고 의상봉으로 오른다.
긴 철계단을 오르면 만나는 의상봉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참선한 곳이라 전하는 곳
원효와 의상 두 분은 단짝이셨나 어딜 가나 두 분 이야기니...
멀리 가야할 작은 가야와 석화성인 가야산이 지척에 보이고
비계산과 미녀산 숙성산이 이어지는 지맥길
의상봉에서 내려와 본 의상봉
우두산에서
이제 산객이 찾지않아 눈길인 지맥길로 이어간다.
작은 가야에서 본 의상봉과 장군봉
해는 20분 정도있으면 넘어갈듯하다
지맥길이야 다 이렇고
지맥길 큰재에서 해인사 방향인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로
내일은 경북땅으로 입성할 것 같다.
치인리는 가야천(안림천) 발원지가 있는곳이라 오래전에 지났던 곳이다.
해는 서산으로 완전히 넘어가고 어둠이 찾아와 곁에 있지만
사람사는 동네 근처를 지나니 마음은 편안하다.
해인사가 지척이지만 내일 새벽 예불시간에 찾기로 하고
인근 식당과 여관에 들러 4일 만에 처음 씻어본다.
무엇보다 살다보니 하루에 두 끼를 먹게 되는군요
여관방에 들어와 배낭에 든 것 꺼내 말리는데 특히 등산화 방수전혀 안되어 물이 흥건합니다.
4일 만에 머리 감고 씻고 나오니 살 것 같고
주인 할매가 제가 식사하는 동안 이부자리를 봐주신덕에 방이 너무 따뜻하다
통증을 알게헤준 발바닥의 물집은 바늘에 실꿰어 물을 모두 제거하고 바르는 반창고로 기초 공사를 마치고
누워 있으니 등짝이 따뜻해 잠이 스르르 찾아온다.
지난밤에 눈이 5CM가량 내렸으며
새벽 예불시간에 찾은 해인사
중앙탑과 대적광전
한국 불교의 성지인 해인사는 불보종찰로써 우리나라 삼보 종찰을 대표하는 곳이다.
해동 화엄종인 초조 의상대사와 법손인 순응화상과 그의 제자인 이정화상에 의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대적광전 자리에 창건되었으며
삼보는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세가지 보물이란 뜻이며 불보 법보 승보를 가리킨다.
불보는 중생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석가모니불을 뜻하고
법보는 부처가 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중생을 위해 설교한 교법을 말하고
승보는 부처의 교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제자 집단을 말한다.
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에 들러 108배를 하고 나오니 스님께서 아침 공양하고 가라고 하신다.
고려 백성들의 간절한 마음인 팔만대장경(81,352매)
백성들의 간절했던 그 마음은 이뤄졌을까?
80년 동안 8차례나 몽고가 침입했으며 전체 인구 4분의 1이 죽었고 7년 뒤 몽골의 침략을 부추기던 최씨 무신정권의 암살로
전쟁은 끝이난다
몽고의 침략을 불심으로 맞서기 위해 제작된 팔만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 불사의 힘으로 16년 동안 연인원 50만 명이 만들었으며
지금까지 760년을 보관 중이다.
1,398년까지 강화도의 선원사에 있던 것을 서울 시청 맞은편 용산 지친사로 운반하였고,문경새재, 고령 개경포를 거쳐
그해 가을에 해인사로 이사했는데 두 개의 건물인 수다라장과(법보전), 사간 판전에 보관 중이다
대장경은 8만 1,352매로 길이로 따지면 3,200km, 전체 글자 5천2백만 자 중 오타는 158 자라고 하니 대단한 것이며
직접 부처님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정도로 웅장한 장경 판전에는 8만 4천 가지 법문이 기록되어 있다.
책으로 만들면 6천8백2권이며 한문에 능통한 사람이 하루 한 권을 읽는다 해도 18년이 걸리는데
어느 스님께서 30년을 보다가 그만두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있는 방대한 법문이다.
팔만대장경의 5천2백만 자를 단 한 글자로 버무리고 요약하다면 어떤 글자일까
心 이 글자 하나로 요약이 된다고 하니 깊이를 모르는 마음자리가 어디있는지 팔만대장경 속에 숨겨놓았다.
추사 선생께서 판전의 글을 보시고 "신선이 내려와 썼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한 사람이 쓴 글씨체로 무려 팔만장을 기록했다니...
이른 시간이라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간절했던 고려인들을 생각하며 발길을 옮긴다
경내를 구경하고 나와 공양간으로 가니 스님들은 전부 공양 중이시고 일반 신도분들 몇몇 분이 공양간에서 식사를 하고 계신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공양을 많이 하면 죄가 될 것 같아 몇 숟가락 분량으로 담고 멀건 김치와 물김치만 담아 식사를 마친다.
팔만대장경 모습
문 없는 문 속에 마음자리가 어딘지
팔만대장경의 법은 결국 부처님과 동격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소중하게 모셔져 있다.
해인사에서 아침 공양하고 산문(山門)을 나와 가야산으로 오르는데 새벽에 내린 눈이 제법 많이 쌓여있다.
눈이 내린 등산로 따라 오르며
가야산 중턱에 자리 잡은 석조여래 입상
통일 산라 말이나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세월이 흘러서일까
얼굴의 원형을 잃은지 오래이나 그 형상은 풍상에도 고이간직하고 서 계신다
삼배하고 가야로 오르며
가야로 오르니 바람은 차갑지만 겨울바람과 봄바람이 고루 불어오는듯
해인사 코스는 잔잔한 오름길이 이어지며 비교적 쉬운 코스로 많은 산객들이 찾는곳
상황봉에서
어느 고운 날 '다시는 세속의 어지러움 속에 뛰어들지 않겠노라"며
신발과 갓만 남겨두고 홀연히 가야산 깊은 골로 사라진 고운 최치원 선생
"스님네여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소
산이 좋다면 왜 산을 나오는가
먼 훗날 내 종적을 눈여겨 보소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고운 최치원-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경상도땅의 신라인들
너무나 큰 사람이었기에 알아보지 못했던 건 당연한 게 아니었나... 그래 그랬겠지
칠불봉 방향
올라온곳
상고대와 상황봉
백두의 여덟 명산이 있다면 그에게서 벗어난 4산이 있으니
그것은 북한 함경도의 칠보산, 평안도의 묘향산,이곳 합천땅의 가야산 그리고 경북 봉화땅 청량산이 있다. 4산 역시 모두가 빼어난 풍경과 산아래 보현사,해인사,청량사 같은 이름난 명찰이 있다
아무도 없는 산정에서 잔잔한 바다위의 명상이라는 해인(海印)에서 산호 같은 상고대를 만나
그러고 보니 오늘 꽤 춥구나
지난날 무주군 무풍에서 턱 아래에 고드름이 얼 것 같은 날씨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겨울이 소리내어 우는 날씨는 틀림없다.
경상북도 성주땅으로 들어와
칠불봉의 멋진 소나무들
아무도 없는 칠불봉에서
이제 산객분들이 하나, 둘 올라오는군요
가야에서 내려오니 진주산꾼 영스님이 찾아 주셔서 아침부터 잔치 국수로 배를 채우고
영스님 감사했습니다.
경북 고령땅으로 들어와
점심 무렵이라 길가의 잔치국수로 점심해결한다.
다소 쌀쌀하지만 반바지 차림으로 진행하며 오늘 저녁은 현풍을 지나니 누나네 집에서 저녁 먹고 자야 할 것 같다.
가야산 뒷쪽에서 흘러온 회천을 건너 고령군 운수면을 지나
팔산리 경사진 고갯마루에 도착하니 해질 무렵이라 찬바람만 불어오고
지맥길에 만나는 고갯길
멀리 희미한곳은 비슬산이구요
내일 저곳에서 일출을 볼까 합니다.
전라남도 화순에서 쉼 없이 걸어왔더니 대구가 지척이네요
제가 가끔 운동하러 오는 낙동강을 건너며
달성보에 도착하고
현풍에 도착하여 누나 내외분이 살고 계시는곳에 찾아가니 다슬기탕과 물미역무침을 해놓았다.
모처럼 맛있는 집밥을먹고 일어나 내일 일정상 오늘 유가사까지 10KM정도 더 진행해야 할것 같아
이곳에 살고 계시는 지빠귀님을 불러 비슬산 아래 유가사까지 진행한다.
지빠귀님은 매형분과는 같은 집안사람이네요
유가사까지 진행한후 택시로 누나집에 다시 가서 잠을 자고
새벽에 누나 내외분의 도움으로 새벽에 이곳에 다시 와서
어둠 속으로 동생이 사라지는 걸 보시더니 마음이 아프셨나 매일 전화가 옵니다
고만하고 집으로 가라고...
ㅎㅎㅎ
멀리 송광사에서 고려때 국사가 열여섯 분(보조,진각,청진,충경진명,회당자진,자정,원감,자각,담당화상,혜감,자원,혜각,
각암,부암정혜,홍진,고봉화상)이 있었으나
이곳 비슬산 인근에는 비슬(琵瑟) 한자에서 보듯 왕(王) 자가 네 개나 되어 왕이 네명 나온다는 도참설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네분인데 내가 왕이될 관상인가? 그리고 정치를 잘하셨나...
고려 후기 일연스님께서 22년간 대견사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구상한? 산이기도 하다
유가사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인사 드리고
산길 따라 대견사로 향한다.
가끔 들리는 산새소리가 좋고 달빛이 좋아 랜턴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밝다
달은 밝고 현풍 시내가 환한 모습이다.
비슬산 천왕과 멀리 팔공산이 지척이고
비슬과 팔공의 중간은 대구와 영천 경산의 젓줄인 금호강이 흐르고 그사이로 2백30만 대구시민이 살고 있다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서쪽으로 보란 듯 해가 쉬지 않고 올라오는 모습이다.
멀리 운문산 그리고 가지산 보이는군요
그동안 지리에서 가야에서도 보이지 않던 일출이 멋지게 떠 오르려 하니
마음이 바빠진다.
오늘은 저 멀리 보이는 운문산 인근까지 가야 해서 일단 대견사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첫댓글 고행 찾아 떠난길!
ㅎㅎㅎ 고생 쪼매하고 왔어요
글을 읽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고 훅 지나갑니다 시간날때 한번더
읽어봐야 될것 같네요 삼보종찰 순레길을
읽다보면 역사공보 사찰 불교 문화에 대해
모르는 것을 알게되는 것같습니다
순례길 말그대로 고행길이죠
아무나 할수없는....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고생을 했으나 마음에 담아두었던 고행길 하나 마치고 나니 후련하네요
한국 최고의 절집인 통도사 이야기는 내일 올려 드릴께요 그리고
다음 길은 경주에서 탑정까지 길인데 오는 여름에 무지더운날 갈곳입니다.
추운 이 겨울에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2부도 잘읽고 갑니다.
수고하셨어요~
우두산에서 해인사까지 길정보 감사했구요
신발이 축축하도록 걸어 해인사에 잘 도착했었답니다.
정보 감사드려요
원효대서 의상대사
병만대사 역사에 남았있고 남을 대사님들 이십니다
방장님 호 하나 받으셔야 하는것 아닌지요
방장님 순례길 기록 글을 읽고있으면 같이 곁에서 겆고있는 느낌이 듭니다
순례후 이렇게 글로서 내놓는 것 조차 더 힘든 순례같습니다
부디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면서 사십시요
병만대사 한바탕 웃고 갑니다~
복많이 받으세요^^
ㅎㅎㅎ
불교 성지순례길 진신사리나 삼보종찰이 대표적이니
시간나실때 걸어 보시면 아주 좋을것 같습니다.
추운날 말구요
올한해도 잘 부탁드리겠구요 건강 하시기 바랍니다.
낼 모레가 퇴직이라 할일 없으니 방장님 산행기 읽는 재미
시간가는줄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불교 공부는 언제나 사람사는 이야기라 재미도 있고 좋아요
하나 하나 찾아가며 알아가는 재미
그동안 마음으로 생각하던 길을 찾아 떠나며 이제 또하나를 마쳤으니
다른것 하나 자료 공부를 하게됩니다.
ㅎ 이제 내일모레면 환갑입니다...
추운데 너무 다니면 골빙듭니다 면역력도 떨어지고요...
영감 회춘한줄알겠습니다 ㅎ
새해복많이 받으십시요
ㅠㅠ 잊을만 하면 상기 시켜 주시니...
발바닥의 물집 상처가 아물지 않으니 면력력 문제인가 봅니다.
사자평 지나는데 어떤 젊은 아주머니가 "어르신이라고 하더이다."
ㅋㅋㅋ 웃고 살아야죠
빵이 주식인가봐요ㅠㅜ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빵이 최고죠 빵없는 세상은 존재할수 없구요
시산때 뵙기로 하구요
많이 보고 싶네요
발로 쓰는 경전 입니다,,(),,
언제나 안전한 걸음 기원 합니다
삼보종찰길은 진신사리길과 비교하면 차이가 많이 납니다.
걸을때마다 찾아보는 사찰도 그렇구요
시산때 뵙겠습니다.
주말에 뵙겠습니다.
대사님이라 불러야 할지 방장님이라 불러야할지^^
새해복 많이 많이 받으시구요.
2부가 끝인줄 알았는데...
읽다 말았네요~ 저는 완결이 좋음~
3부도 기다립니당
완결 좋아하시네
골병 들겠구만
시산때 봐요
마음 공부하는 사람에게
道는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깨달음의 세계이기도 하고,
깨달음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길(道程)'이기도 합니다.
방장님의 길은 도를 향해 온몸으로 나아가는 도정,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발로 쓰는 경전'이라는 몽화님의 위 말씀에 공감합니다.
"걸어가는 자여! 크고 아름답도다."
삼보는 끝나고 이제 다음갈길을 그려보니
조선초 팔만 대장경 이운길과 신라에서 660년 신라가 황산벌로 갔던 그길을 찾아 볼까 하는데 생각보다 자료가 없습니다.
대장경 이운길은(350KM) 육지설과 바다설 두개가 있구요
육지설은 제가 한번쯤 걸었던 길이라 찾는데는 별문제가 없으나 바다설이 마음에 걸려 미루고 있고
황산벌 역시 경주에서 이천을 지나 황산벌로 간 것과
경주에서 대구- 영동--금산- 황산벌 경로(300KM)가 있어 어느게 맞을지 자료를 찾으면 올해 여름철 황산벌로 가볼까 합니다.
글 감사드리구요 시산때 뵙겠습니다.
@배병만 경주에서 이천으로 올라갔다가 황산벌로 내려온 건 김유신과 그 친위부대이고요
영동에서 직접 들어온 건 신라군 본진(주력부대)입니다.
그러니 두 길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당시 역사적 상황에 대해 제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여 올립니다.
신라군의 구체적인 이동 경로는 방장님께서 더 세밀하게 살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팔개 642년 대야성 전투 이후 무려 17년간 당나라와 끈질긴 외교를 하죠
단 한판의 전쟁을 각오한 신라가 의자왕을 잡으러 갈 그 무렵
고구려와 대치중이던 한강 이남의 수비 병력은 그대로 두고
서라벌 인근의 신라의 주력군을 모두 빼내면 수도 서라벌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을텐데...
대단한 각오였다고 봐야겠죠
한여름 음력 7월 쌀을 가득 실은 구르마 끌고 가는길에 백제군과의 전쟁을 피해가며 물길따라 영동을 거쳐
첫째,금산땅의 거친 대둔산을 지나 항산벌로 갔을 경우, 두번째로 진안군 대불리 협곡인 반일암을 지나 싸리재를 올라 논산천 따라 이동했을것 같습니다.
참고로 물길따라 간다는건 저의 생각입니다.
한여름에 5만의 병사들이 걷는다면 최고 30KM는 길게 늘어섰을테고 병사들에게 가장 필요한건 물이기 때문에
팔개님의 자료 감사드리구요 오는 음력 7월에 한번 걸어 보면 좀더 알것 같습니다.
@배병만 김유신은 원래 도박에 가까우리만치 대범함을 보이는 인물입니다.
물길 따라 이동했을 것으로 보시는 방장님의 탁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참에 한 가지 덧붙임.
오늘날 공주 공산과 부여 부소산을 연결하여 '사비천도'라는 길을 산꾼들이 걷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도를 산길로 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금강과 같은 수로가 있는데.
의자왕이 부여 함락 이후에 공주로 도망쳐온 길이 바로 그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길이 다 막힌 상태였다면.
금남정맥 안골산에서 그대로 북진, 철마산을 경유하면 공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비천도 ㅎㅎㅎ
성충이 하신말씀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은
험한지형을 이용해서 싸우라는 말씀이라
암릉의 대둔인가 물길따라 안일암인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쌀 구르마 끄실고 산은 힘들것 같구요
저라면 안일쪽으로 군대를 데리고 갈것 같구요
팔만대장경 오만이천자 = 心이라...
세상사 모든게 다 마음 먹기 나름이다 라는 뜻 인 듯하네요^^ 맞나ㅎㅎ
국난을 극복키 위한 민초들의 합심이 곧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ㅎㅎ
발바닥보니 그날의 고행이 맘을 아련케 하네요. 수고 많았습니다. ^^
인간탈을 쓴 인조인간이 아닌지 의구심이 듬.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늘밭 돌연변이종 입니다.
혹한기 순례 큰고생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