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處暑) 무렵
내 사랑에게 시비 걸지 않겠노라
마음먹었다
서늘한 기운이 나를
잠잠케 했다
늦장마에 눅눅해진 옷을 말리며
남루한 생활의 흔적이겠거니
생각한다
한낮, 햇살에게
대추알이 잘 여물도록
더 따가워도 괜찮아
괜찮다고 속삭여 주었다
귀뚜라미 소리 나즈막히 내려앉는
초저녁
달과 별이 유난히 반짝인다
겨우살이넝쿨 향이
바람을 타고 마당으로
내려온다
접힌 자국 선명한 가디건을 걸치고
길을 나섰다
뽀송뽀송한 구름 융단위를 거닐다가
가디건을 벗어 허리춤에 메고
사뿐사뿐
집으로 돌아온다
작은 뿌리 하나로
늠름한 덤불을 뻗치던 환삼넝쿨이
더 나아가야할지 말아야할지
주춤거리는
한낮
사랑
눈물 글썽이며,
넘어진 아이를
멀찍이 바라보고 있을 때
나의 등 뒤에서
그분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너를 위해 목숨까지 버렸노라고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렸노라고
끝까지 사랑하겠노라고
저녁, 밥물 끓는 소리
오래전 집 떠난
그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집 안 가득
밥물香
고래할머니
중년아낙 서너명씩 팀을 만들어 사과봉지 척척 씌울 때 혼자 사과나무 아래 잡초 뽑는 고래할머니, 감나무아래 빙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다. 설끓여진 것 같다며 누군가 슬쩍 옆으로 밀어놓은 국까지 털썩 붓고도 국이 좀 짜다며 공기밥 하나 더 얹는다. 서비스로 식당에서 나온 식혜통이 아직 밥이 끝나지 않은 고래만 쏙 빼놓고 옆으로 돌자 대접을 쭉 빼들고 희번득 따라가는 눈, 한공기씩 나눠 먹고 제법 남은 식혜통 돌아오자 대접에 후루룩 비워 마지막 밥알 하나까지 긁어드신다
밤새도록 비오고 난 뒤 우리집에 들깨모종을 해주러 오셨다. 거시기, 득남이네집 말이여, 보일라 기름이 똑 떨어져서 이십만원 땡겨쓰고 냉중에 품값 계산할 때 보니까 날수가 안 맞어. 이틀이나 모자라더라고... 젊은 연놈 둘이 똑같이 그러는데 당헐수가 있어야제. 봐, 나는 이가 선찮아 고기도 필요없고 그저 딘장국 하나만 있으면 되니께 냉중에 웃돈으로 쪼매 얹어줘. 어느집에 가면 옷 사 입으라고 섭섭잖게 얹어주고 맛난거 사먹으란 집도 있었어. 그게 고기 반찬보담 열배 낫지, 암... 하시며 뻑뻑하게 갈앉은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키신다
내력
그저께, 구멍가게 뒷문으로 들어가 외출에서 돌아온 안주인과 맞닥뜨려 십원짜리 하나 못 만져보고 덜미 잡힌 안동양반, 삼년전에는 큰 길 건너 심어놓은지 닷새쯤 되는 남의 밭 복숭아나무 쉰 여 그루를 한밤중 술김에 자기네 밭에 옮겨 심었다가 인물을 알아본 주인에게 들켜 삼백만원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이웃집에 가서 안동댁 말하기를, 그까짓 나무 몇 가져다 심은게 뭘 어쨌다고, 돈도 못 빌리고 쫓겨났다
그 집, 여상에 다니는 큰딸은 버스 탈 때 기사가 한눈 팔면 버스비를 속인다. 대형문구점에서 소소한 물건을 훔치다가 50배를 변상하기도 했다. 몇해전, 안동댁과 크게 다투고 작은 아들네로 가버린 시어머니는 고향에 살 때 습관적인 좀도둑질 때문에 이웃에게 따돌림을 당해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봉화 춘양, 깊은 산골에서 이사온 안동집에는 이웃이 놀러가면 식혜에 고춧가루를 뿌려준다는 소문이 공연히 돌았다
걱정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빨리 잠들어야지 생각할수록
말똥말똥해지는 눈
시집을 읽는다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인다
시편 23편을 읽는다
객지로 나간 아들들은 어찌 지내나
생각한다
아하! 빛들이 잠을 방해한다지
불을 끄고 잠을 청해보지만
도무지 깊이를 알수 없는 불안과
창피했던 지난 일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더 말똥말똥해진다
그만하면 잘 살아온 거지
그리고
한치앞도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은
그분께 맡기는 거야
오늘 하루도 잘 살아낸 거야
아침이면 한쪽 얼굴에 배겟자국이
오래 남아있기도 한다
*티베트 속담
그 때
(친구1)그 때 네가 서울에 와 있다는 소식을 고향친구를 통해 듣고 반가운 마음에 너를 찾아 갔었지. 휴게실에서 네가 주는 커피를 한잔 마시기는 했는데 나를 대하는 너의 태도가 예전같지 않아서 난 오랫동안 몹시도 불쾌했었어. 그 후 특급호텔에 근무하는 가까운 친구에게 너와의 일을 얘기했더니 아마 그런 작은 호텔에서 일하는 것을 친구에게 보인다는 것이 자존심 상해서 그랬을 거라는 얘기를 들은 후 널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어
(친구2)그 때 내가 웨이츄레스로 일하는 호텔에 네가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방방 뜬 목소리로 전화했을 때 만나기 싫어서 거절한 기억 때문에 난 미안하단 생각만 오래도록 했었지. 그러다가 얼마전 네 고향마을에 사는 너의 먼 친척들에게 수소문해서 널 다시 만나게 된 거야. 어쨌든...지금 네 얘길 듣고 보니 그리 미안해 할 일도 아니네. 그 때 내가 정말 너를 만나주기나 한 거니? 사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널 만난 기억이 없는데...
아지랑이에 실려 보냈던 봄날
해가 뜨는게 무서워요
오늘 하루도 길고 지루하겠지요
창문은 열지 말아요
밝은 빛이 싫어요
심장은 왜 쉼없이 뛸까요
바로 누워도 두근두근두근
오른쪽으로 누워도 두근두근두근
왼쪽으로 돌아누워도 두근두근두근
태앗적 자세를 해도 두근두근두근
서 있어도 앉아 있어도 두근두근두근
카페에서 차 한잔 할까요
다음에
같이 밥 먹자
아니야, 다음에
SNS에 뜨는 소식들이 나와는 다른 세상처럼 느껴져요
나는 그곳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인 거죠
하지만
삶과 죽음은 손바닥과 손등처럼
늘 붙어 있기에
살아 있음을 뼛속까지 느껴보고 싶었던
아지랑이에 실려 보냈던
그 해 봄날
아가
네 여린 손을 내밀어
창문을 열어보렴
문밖에 너를 위해 펼쳐놓은 세상이 있단다
햇빛과 바람
새순과 키낮은 풀꽃, 개울물소리
아카시아꽃을 보렴
저 하얀 꽃들의 향을 맡아 보렴
아지랑이에 실려 보냈던
그 어느 해
봄날
문득
1997년 외환위기 때, 남편의 사업실패로 밥도 먹지 않고 밤낮 피아노만 쳤다던
그 女子가 생각났다
나는 개발이 두렵다
아침이면
기계들의 쿵쾅쿵쾅 소리에
잠이 깬다
과수원 옆
외지인이 땅을 사서
집을 짓는다 한다
몇일째 굴삭기로 높은 땅을 낮추는
작업을 한다
사계절이 보이는
내 방 맞은편 야트막한 산
그 뒤편, 민둥산이다
태양광 시설을 하는 중이다
붉은 흙이 쏟아져 내릴듯
아찔하다
외지인에게 팔린 개울건너 묵정밭은
대형 영농법인 들어올 건물을 짓는다고 한다
콘크리트 구조물을
여기저기 높이 쌓아놓았다
가끔 야간작업으로 대낮같이
환하다
조용했던 동네가 공장처럼
매일 돌아간다
비가 와도, 끄떡없이
첫댓글 회장님~ 제목은 알아보기 쉽게 진하게 해 놨으니 옮기실 때 수정하시면 됩니다. 회원님들 작품을 예쁘게 정리하셨네요. 수고스럽지만 제 것도 부탁드려요.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