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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 (1896-1968) 스님
1896년 7월 23일 전남 강진에서 출생.
1991년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서 도암을 은사로 득도.
1935년 직지사 조실을 시작으로 석왕사 망월사 쌍계사 칠불 선원 동화사 조실 역임.
1953년 서울 선학원 조실.
1954년 정화 불사 선도.
1955년 조계종 부 종정 추대.
1968년 10월 8일 세수 73세, 법랍 57세로 입적.
없고 없는 게
없는 것 또한 없구나.
선사(禪師)의 행적을 보았는가? 어떤 때는 평상에 올라가 앉고, 어떤때는 주장자를 들어 보이며 불자(拂子)를 들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창천창천(蒼天蒼天) 허허(噓噓) 소리를 치고, 어떤 때는 방(捧)을 휘두르고 할(喝)을 하며, 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혹은 놓아주기도 하고 잡아당기기도 한다.
또 기(機)와 용(用)을 보이고, 정(定)에 들기도 하고 경행(經行)하기도 하며, 당전(當前)에서 가가대소(呵呵大笑)하기도 하며, 묵묵히 방장(方丈)으로 돌아가고, 홀로 산을 걷기도 하고 골짜기를 왔다갔다한다. 그리고 앉아야 할 때면 앉고, 가야 할 때면 가고, 머물러야 할 때면 머무르고, 일어나야 할 때면 일어난다. 밥이 있으면 밥을 먹고 차가 있으면 차를 마시고, 어떤 때는 마음을 설하고 성품을 설하며, 현(玄)을 설하고 묘(妙)을 설한다.
구름이나 비와 같이 기(機)를 당해 걸림이 없고, 주고 빼앗음이 자유롭다.
『금오집』 서문에 실린 후학 향곡(香谷)이 금오(金烏)를 기리는 글이다.
금오의 살림살이가 어느 곳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였으며 언제나 기민했음을 이 서문은 알려주고 있다.
사실 금오은 기발한 운수행(雲水行)과 민첩한 경행(經行)으로 자신의 일대사(一大事)를 한바탕 멋들어지게 경영했던 인물이다. 법호를 금오, 즉 금까마귀라고 한 것도 필시 이러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중국에는 태양 속에 금까마귀(金鳥)가 있고, 달 속에 옥토끼가 있다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이 전설에서 금오는 태양을, 옥토끼는 달을 의미하는데, 그 의미는 해와 달이 바뀌듯 시간이 바쁘게 흘러 간다는 것이다. 『벽암록』에 이 전설을 인용한 본칙(本則)이 있는데, 이 본칙 역시 금오가 갖는 의미를 확연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한 운수 납자가 동산(洞山)화상을 찾아와 「어느 것이 부처인가」를 묻자, 즉시 답하기를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삼베가 세근 일세」라고 했다.
그 답이 어찌나 기발하고 빨랐던지 마치 금까마귀 옥토끼가 날고 치닫는 듯 하다는 의미로, 설두(雪竇)화상은 「금오급옥토속(金烏急玉兎速)」이라는 노래를 지어 붙였다.
상서로운 조짐이라고 해야 할지, 성인(聖人)들의 인생을 살펴보면 대개 출생부터가 남다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인물이 탄생할 때면 마치 소설의 복선처럼 범인(凡人)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일정한 암시가 있게 마련인데, 현대 한국 불교사에 하나의 거대한 산맥을 일으켜 세운 태전(太田) 금오(金烏)의 출생 인연도 예외는 아니다. 기이한 태몽이나 생김새의 특이함, 그리고 남다른 영민함이 마치 석가세존의 그것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어머니 조씨는 금오을 잉태하기 전 기이한 태몽을 꾸었다. 풍채도 좋고 묭모도 말쑥한 한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그릇을 내어주면서 도중에 뚜껑을 열지 말고 반드시 집에 가서 열어보라고 했다. 조씨는 노인이 시키는 대로 치마폭으로 소중히 그릇을 감싸안고 집에 와서 뚜껑을 열었다. 그릇 안에는 흰 학이 한 마리 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날아오르더니 오색이 영롱한 짐승으로 변하여 치마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날 이후 태기가 있어 금오를 낳았다.
이상한 꿈인지라 조씨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품에 앉고 있으면서도 항상 두려운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마치 2,600여 년 전 마야 부인이 흰 코끼리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후 태기를 느낀 것과 매우 유사해 흥미롭다. <흰 학이 까마귀의 몸을 받아 마음껏 염부수하(閻浮樹下,사바세계)를 희롱한 살림살이>는 이렇게 시작됐다.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금오는 당시 대개의 어린이가 그러했듯 서숙(書塾)에서 교육을 받았다. 학동 중에서도 가장 성적이 뛰어나 늘 앞자리를 차지했다.
16세 되던 해 출가를 했는데, 출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영민하기 이를 데 없는 그는 성장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을 것이고 자신이 처한 척박한 시대적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보다 큰길을 찾던 중 자연스럽게 불문(佛門)을 찾았을 것이다.
집을 나온 금오는 금강산 마하연 선원을 찾아 도암 긍현(道菴 亘玄) 선사를 은사로 불문에 들었다. 출가 이후 10여 년 간 주로 금강산과 안변 석왕사에서 참선 정진을 거듭했다. 출가 후 10년째인 26세때부터는 오대산 월정사와 경허 선사가 있던 통도사 보광전, 혜월 선사의 회상인 천성산 미타암 등지에서 수행하며 선지식과 교유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금오는 이미 향상일로(向上一路), 성전일구(聲前一句)의 묘한 이치를 맛보고 있었으니, 돌이켜보면 이 모두가 스승 보월(寶月)과의 줄탁(啐啄) 인연을 향한 여정이었던 것이다.
28세 되던 금오는 예천 보덕사로 가 당시 만공의 수제자로서 투철한 안목으로 회중을 이루고 있던 보월 선사를 친견했다. 두 사람은 보자마자 서로 한눈에 의기가 통했으니, 가히 맹귀우목(盲龜遇木), 그러니까 눈먼 거북이 숨을 쉬기 위해 바다 위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우연히 구멍 뚫린 나무토막에 목이 꿰는 경우에 견줄 만큼 희유(稀有)한 반연(絆緣)이 아닐 수 없었다. 금오는 보월 화상에게 그동안 공부한 경계, 즉 득처(得處)와 견처(見處)를 털어 놓았다.
시방 세계 투철하고 나니
없고 없는 게 없는 것 또한 없구나.
낱낱이 모두 그러하기에
아무리 뿌리를 찾아봐도 없고 없을 뿐이네.
透出十方界 無無無亦無 個個只此爾 覓本亦無無
보월 화상은 이미 금오가 경계에 올랐음을 한눈에 간파하고, 그 자리에서 인가한 후 사법(嗣法) 제자, 즉 자신의 법을 이은 상수(上首)제자로 삼았다. 그 후 2년간 만덕사에서 일체의 번뇌를 여읜 완벽한 깨달음을 위한 정진을 거듭하며 엄격한 지도를 받던 중 보월이 갑작스럽게 입적을 했다. 스승의 갑작스런 입적으로 인해 부법(付法) 제자의 의식, 즉 사법 의식을 갖지 못하게 되자, 문손(門孫) 금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만공(滿空) 노사가 친히 제자 보월을 대신해 덕숭산 정혜사에서 금오가 보월의 사법임을 증명하는 건당식을 열어주고 전법 증명의 게송을 내렸다.
덕숭산맥 아래
무늬 없는 인을 지금 전하노라.
보월은 계수나무 아래 내리고
금오는 하늘 끝까지 나네.
德崇山脈下 今付無文印 寶月下桂樹 金烏徹天飛
서른의 나이에 보월의 법계를 이은 금오는 보임의 운수행에 들어갔다.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거량을 나누고 때로는 승속의 경계를 넘나들며 확철대오를 공고히 하기 위한 만행을 걸림 없이 감행했다.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해 거지들과 섞여 걸인 생활을 하는 등 젊은 시절 금오의 구도 행각은 독특했다. 거지 행세를 할 때엔, 밥은 어떤 밥이든 트집을 잡지 않을 것과 옷이 해져 맨살이 드러나도 탓을 하지 않을 것, 그리고 잠자리를 가리지 않을 것 등의 거지들의 세가지 원칙을 솔선해 지켜 어느 거지보다도 더 거지다운 거지가 됐다. 금오는 거지생활이야말로 고행과 걸식의 교훈을 배우는 수행이라는 생각으로 전주에서 약2년간 거지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스님이라는 신분이 들통나 거지들로부터 <움중>, <움막중>이라는 별칭을 들으며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이는 심산유곡의 산사가 아닌 어느 곳에서든 얼마든지 수행을 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었다.
이윽고 나이 마흔에 김천 직지사 조실을 맡아 전법의 회상(會上)을 여니 전국의 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 후에도 금오는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지리산 쌍계사와 칠불 선원, 서울 선학원 등 전국 유수의 선방에서 조실로 주석하며 후학을 제접했다.
금오는 법을 구하기 위해서 오로지 참선 정진과 선풍 진작을 본분으로 삼고 있었지만 눈앞에 닥친 승단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1954년 정화불사가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전국 비구승 대회 준비 위원회 추진위원장을 맡은 것은 그의 승단 재건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금오는 추진위원장을 맡아 전국의 비구승들을 서울로 집결하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정화 불사를 선봉에서 이끌던 도중 잠시 틈을 내어 수원 팔달사에 상좌들을 모아놓고 간곡한 당부의 말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정화의 당위성이 잘 나타나 있다.
「부처님 법에 승단은 청정한 것인데, 대처승이 생겨 청정 승단이 없어졌다. 이것을 제불 보살과 역대 조사 앞에서 항상 부끄럽게 생각했다. 이 부끄러움을 면하자는 것이 정화 불사이다. 또 승단을 재건, 이나라 불교를 정화해서 참다운 부처님의 자비 정신을 구현해 보자는 것이다. 이번 정화 불사에 실패하면 무슨 면목으로 승복 차림을 하고 다닐 것인가. 잘되면 떳떳이 승단 재건에 진력하고, 그렇지 못하면 세상에서 떨어져 있는 섬으로 가서 다시는 세상을 보지 말고 이 생이 끝날 때까지 참선 공부만 하자.」
정화 불사가 마무리된 후 10여년이 흐른 1964년 7월, 정화의 정신이 후지부지되고 참선을 하려는 풍토가 쇠락의 기미를 보이자 금오는 당시 조계종의 기관지인 《대한불교》에 통탄의 글을 게재했는데, 이글에는 참선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돌이켜 살펴보라. 정화를 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근래에 와서 주지를 사는 것으로 장기를 삼는 승려가 있는가 하면 사무승, 무사방일승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승려의 이름이 생겨났다. 이런 승려도 필요하겠지만 이로 인하여 승려된 본지풍광을 잃는다면 주지의 직무와 사무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말하거니와 삼천대천세계와 황하의 모래알이 다할지라도 선밖에 없다.
이제 정화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3천 여 명을 넘는 대 처자를 내쫓은 우리가 지금 공부에 마음이 없다면 내쫓긴 그들에 비해 무엇이 더 나을 게 있는가?
금오의 이 구구절절한 일성은 당시 많은 불자들에게 반성과 쇄신의 계기를 제공했다.
금오의 선지(禪旨)는 타고난 것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선 이외의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제자나 후학들이 화두를 드는 데 소홀할 것 같으면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참선하는 자는 화두 하나만 챙기면 된다며 다른 경을 보거나 율을 거론한다거나, 주력을 하는 따위의 행위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생사 문제가 화급한데 그런 잡사(雜事)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일단 정진에 들어가면 회향을 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대중의 사정은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말로 되지 않으면 두들겨 패는 무리를 해서라도 정진을 마치는 것이 최상의 자비라는 게 그의 일관 된 입장이었다.
금오는 선지식이 있으면 그가 어디에 있건 개의치 않고 찾아 나섰다. 이미 경계를 이룬 후인지라 보임(保任)의 과정에 있었지만 스승을 구하는 그의 모습은 견성(見性)을 향한 초발심 납자의 뜨거운 구법 의지를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당대의 선지식으로 이름이 높았던 수월(水月)선사를 친견하기 위해 금오는 당시 험로 중의 험로인 만주 봉천으로 향했다. 만주에 들어서기 위해 막 압록강을 건널 즈음, 경비병이 출국 허가 증명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수행 정진만 해 온 그에게 출국증이 있었을 리가 없었다. 얼떨결에 안거증(安居證)을 보여주며 「이것이야 말로 국가가 인정하는 제1급 출국증이다」라며 둘러댔다. 어찌나 임기응변이 뛰어났던지 경비병은 그만 묵묵부답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다.
금오는 또 구도 만행을 할 때 늘 천막을 들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날이 저물거나 교화의 인연이 다하면 어디든 천막을 치고 며칠이든 묵으면서 정진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리산 꼭대기에 천막을 쳤는가 하면 어떤 때는 서해안의 백사장에 정진의 천막이 모습을 드러내는 등, 그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만행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금오가 시자를 데리고 지리산 칠불 선원 아자방에 도착했을 때, 마침 10여명의 납자들이 곧 각처로 흩어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금오는 이러한 낌새를 즉시 알아채고 납자들에게 함께 정진해 우리종단의 선풍을 드날리자고 설득했다. 결제 기간의 절반은 탁발을 하고, 나머지는 용맹 정진을 하자고 다짐한 후 정진에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정진을 게을리 한 한 납자가 죽비로 맞다가 반발한 사건이 벌어졌다. 완력까지 쓰는 통에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게 되자 금오가 벼락같이 소리를 쳤다.
「누구를 위해 경책하는데 도리어 반항을 하고 있는가. 대중들은 모두 저 업장을 때려 부숴라. 저놈이 항복할 때까지 사정없이 쳐라」
추상같은 고함 소리에 대중들은 그제야 들고일어나 그 납자를 제압했다.
이후 대중들의 용맹 정진이 차질 없이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대중들은 모두 정진에 열중했다. 이 정진과정에서 안목을 얻은 몇몇 납자들은 두고두고 금오를 정신적 스승으로 받들어 모셨다. 당시 칠불 선원에서 금오의 지도로 용맹 정진을 했던 승찬(전 조계총림 방장)은 금오를 <무섭도록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움이 충만했던 어른>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강력한 지도가 아니었다면 45일 간의 칠불 용맹 정진은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금오는 전국 선방을 두루 돌며 정진을 했었기에 자연 많은 납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은사나 법사 관계가 아니더라도 조계종의 내놔라하는 선승들은 대개 금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계종 10대 종정에 추대된 혜암은 금오를 <그 기개가 가히 장부 중의 장부였던 어른>으로 기억하고 있다.
「동화사에서 정진을 할 당시 하루는 스님이 ‘너는 악행을 짓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를 맑게 하는 것이 여러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뜻을 아니냐’고 묻길래 다짜고짜 엄벼들어 화상의 목을 뒤로 확 젖혀 버렸지. 그러니까 ‘동화사도 사자새끼 같은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네’ 하시면서 얼마나 즐거워하시던지.....」
금오가 전월사(轉月寺)에 주석하고 있을 때, 뜰에서 한 납자가 만공 노사의 <반야란(般若蘭)이란 팻말을 붙인 화분을 보고 있었다. 이를 본 금오가 조용히 물었다. 「그 꽃 이름이 무엇인가?」「아악」납자는 대답 대신 고함을 질렀다. 이에 금오가 지체 없이 이르기를 「아직 절반밖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다. 곁에서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만공 노사는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늘 금오의 곁에서 공부했던 전법 상수 제자 월산은 금오를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을 자유자재로 시용(施(施用)하시는 분>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이처럼 금오가 후학을 대하는 모습은 <토끼를 보면 곧 매를 놓아주고, 불을 피우면 바람 방향을 보아 잘 타게 해주는 것〔見兎放鷹 因風吹火〕과 같았다.
금오는 후학들에게 대도를 이룬 후에는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반드시 세간에 나아가 법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늘
「선리(禪理)가 없었다면 불법의 명맥이 끊기는 것이다」,
「참선이 없는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선을 반대하는 자는 고기가 물 밖에 나간격이다」,
「자유를 찾아가는 길은 오직 선뿐이다」등의 이야기를 해주면 참선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중이 되면 하는 바가 무엇이냐? 대법(大法)을 위하는 것이기에 가는 것도 법을 위해, 밥짓는 것도 법을 위해, 일하는 것도 법을 위해 하는 것이다. 나날이 늙어가는 육신 앞에 무상이라는 살인귀가 엿보고 있질 않느냐? 집을 나와 중이 된 이상, 세상을 버리고 인연을 끊어 팔만세행(八萬細行)과 삼천위의(三千威儀)를 갖춘 여법한 승려가 되어야 신의가 서는 것이다. 신의를 얻은 뒤에 포교를 하여 중생을 제도함이 마땅하다」
선의 지도(至道)를 후학에 전하는 데 금오는 집요하다고 할 만큼 철저했다. 글이나 말로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 역대의 선사들도 설명하지 못한 채 그대로 남겨둔, 신비롭고 미묘한 궁극적인 진리가 선지일 것이지만 금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단 한 명의 후학이라도 선의 묘리를 깨우쳐 향상의 길로 들도록 다그치고, 강조하고, 때론 무섭게 야단치고, 때론 자애롭게 설명했다. 할과 방은 물론이요, 부처님의 5대 시교에 견줄 만한 노파법문(老婆法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친절한 가르침)도 결코 사양하는 법이 없었다.
금오의 이런 성품 때문에 그의 휘하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모든 것에 걸림이 없었던 그였지만 선리를 참구하는 것과 후학을 많이 제접하려는 욕심은 남달리 컸던 것이다. 상수 제자 월산 성림을 비롯하여, 범행, 월남, 탄성, 이두, 혜정, 월성, 월주, 월서, 월만, 월탄, 월조, 정일, 월태, 월포, 월담, 월룡, 천룡, 정월, 월나, 월고, 월선, 월복, 월은, 혜덕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정진을 한 후학들이다. 또 성타, 활안, 법달, 장주, 관우, 종상, 종광, 종후, 종수, 종우, 혜광, 성돈, 성덕, 성본, 도현, 도공, 명진, 지명, 도영, 도법, 평상, 원행, 각현 등문 손들도 종단의 중진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이들은 특별히 금오 문중(월자 문중)이라고 불리며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만년에 이르러 금오는 모든 일을 놓아버리고 석장을 떨치며 인연지를 따라 이 곳 저 곳 옮겨 다니면서 법열을 즐기다가 청계산 청계사에 이르러 석장을 멈추었다. 입적이 임박하자 법주사로 주석처를 옮긴 그는 월산 탄성 월성 월고 등 문도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후 상수 제자인 월산에게 제반사를 맡긴다는 부촉을 남긴 후 태연히 육신을 버렸으니, 금오의 70여 년 대도의 길은 오로지 불조의 심인을 전하는 것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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