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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사 건국신화~한나라
중국의 창조신화 반고(盤古)
알에서부터 나온 반고가 혼돈된 세계를 가르고 해와 달과 자연을 창조하였다는 중국의 창조 신화 이야기다. 하지만 반고 신화는 오나라의 서정이 쓴 삼오역기에선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 알 속의 내용과 같이 혼돈된 상태에서 반고가 출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양나라의 임방이 쓴 술이기에선 천지의 형태가 만들어진 뒤 반고는 죽어 그 시체로부터 만물이 생성되었다고 하였다.
가령 반고의 왼쪽 눈으로부터는 태양이, 오른쪽 눈으로부터는 달이, 머리와 몸으로부터는 중국의 오악(다섯개의 산)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이처럼 반고는 천지창조의 신이기 때문에 연대로 보면 인류를 창조한 신인 복희, 여와보다 이전에 존재한다. 그러나 문헌으로서 반고의 존재는 사기(전한)나 풍속통의(후한)으로, 삼황오제가 거론된 시대보다 훨씬 후대이다.
중국의 건국신화 삼황(三皇)오제(五帝)
삼황오제 신화의 기본 틀이 되는 시조 설화는 상나라부터 있었는데, 춘추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가 각종 사상을 주창하면서 삼황오제 신화가 틀을 갖추어 갔다. 오제 신화는 음양오행설이 유행한 이후 5명의 제왕이 신화로서 정립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재창조된 신화이므로 삼황과 오제는 제자백가의 주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춘추 전국 시대에서 위진남북조 시대 까지 삼황오제 신화는 재창조되었다.
황제와 요, 순 임금이 이상적인 천자로서 근대 이전 중국의 역사적 사실로 추앙된 삼황오제는 청나라 말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의 연구를 통해 삼황오제 기록이 꾸며진 신화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국의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강화되면서 중국 정부에서 역사의 기원을 상향 조정하고 신화 속 제왕들의 연대를 정하는 등 신화 속 인물을 실존 인물로 주장하는 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삼황(三皇)
삼황은 일반적으로 7종의 설이 있다.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 사기(史記)
천황, 지황, 태황(泰皇) : 사기(史記)
복희(伏羲), 여와(女媧), 신농(神農) : 풍속통의(風俗通義)
수인(燧人), 복희, 신농 : 풍속통의(風俗通義)
복희, 신농, 공공(共工) : 통감외기(通鑒外紀)
복희, 신농, 축융(祝融) : 백호통(白虎通)
복희, 신농, 황제(黃帝) : 십팔사략, 제왕세기(帝王世紀)
십팔사략에 나온 삼황
삼황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을 말하는데, 여기서 삼황은 세 명의 왕이 아니다. 그들은 문명에 필요한 획기적 발명을 통해 후세에 큰 모범이 되었기에 삼황(三皇)으로 불렸다.
삼황의 첫 째 복희는 태호(太昊 : 큰 하늘)라 불리며, 뱀 몸에 사람 머리를 하고 사람들에게 처음 사냥법과 불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쳤으며 복희의 뒤를 이어 몇 명의 왕이 자리를 잇다가 두 번째 삼황인 신농이 나타났는데 그는 염제(炎帝 : 불꽃 임금)라고도 불리며 사람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다. 신농은 태양신이자 농업신으로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쳤으며,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시간에는 상업을 가르쳤다.
염제 신농 바로 뒤에 황제 헌원(軒轅)이 있었는데, 헌원은 집짓는 법, 옷 짜는 법과 수레와 글자를 발명하여 천문과 역산을 하고, 의료술도 가르쳤다.
황제 때에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자, 황제는 태산(泰山)에 행차하여 천지 사방의 신을 불렀는데, 그때 황제는 큰 코끼리가 끄는 보물로 된 수레를 타자 위세를 본 신들은 그의 위력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천지 사방의 신 중에서 황제에 따르지 않는 무리는 치우(蚩尤)를 따라 반란을 꾀했는데, 치우는 눈이 넷, 손이 여섯이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쇠와 돌을 즐겨 먹는 신으로 72명의 형제와 함께 싸움에 매우 능했다. 치우의 모반을 하자 황제는 군사를 모아 판천과 탁록에서 치우를 격파하여, 치우는 부하인 풍백, 우사와 함께 황제에게 항복했다.
치우의 난을 평정한 황제는 백 살 되던 때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하늘로 돌아가기를 간청하자, 많은 사람이 황제의 치세가 계속되길 기원했지만, 황제는 중신들과 함께 용을 타고 승천하고, 이후 황제의 다섯 자손인 오제가 세상을 다스렸다.
오제(五帝)
오제에 대해서는 대략 다섯가지 설이 있다.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당요(唐堯),우순(虞舜) - 황왕대기(皇王大紀)
황제(黃帝),전욱(顓頊),제곡(帝嚳),당요(唐堯),우순(虞舜) - 사기(史記),오제본기
태고(太皋:복희),염제(炎帝:신농),황제(黃帝),소고(少皋),전욱(顓頊) - 예기(禮記)
황제(黃帝),소고(少皋),제곡(帝嚳),제지(帝摯),제요(帝堯) - 도장(道藏)
소호(少昊),전욱(顓頊),고신(高辛),당요(唐堯),우순(虞舜) - 상서서(尙書序), 제왕세기, 십팔사략
십팔사략에 나온 오제
오제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으로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제요 도당, 제순 유우이다. 뒤의 두 명을 따로 '성군'을 칭송할 때 관용적으로 쓰이는 요순임금이라 부르기도 한다.
소호 금천(少昊 金天)은 황제의 아들로 황제가 승천한 후 왕위에 올랐는데 봉황이 날아들어 소호의 정치를 도왔다.
소호의 뒤를 이은 전욱 고양(顓頊 高陽)은 소호의 형의 아들이었는데, 이 때는 아직 반고의 천지 창조가 얼마 되지 않아서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음으로, 전욱은 엄격한 법을 세워 하늘과 땅의 구별을 하고, 인간 세상에서도 주종관계, 남녀관계 등을 확실히 세웠다.
전욱의 뒤엔 소호의 아들 제곡 고신(帝嚳 高辛)이 이었다. 그는 음악의 신으로 각종 악기와 음악을 만들어 백성을 즐겁게 하였다.
요(堯), 순(舜)임금
제요(帝堯)는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신화 가운데 오제의 하나로 다음 대의 군주인 순(舜)과 함께 성군(聖君)의 대명사다.
요의 역사적 실존성은 밝혀진 바가 없으며 우왕과의 관계에서 하나라 이전에 국가 비슷한 실체가 형성되어 있을 자료로 사용된다.
요는 제곡 고신의 아들로 이름은 방훈(放勳)이고 당요(唐堯) 또는 제요도당(帝堯陶唐)으로도 부르는데, 이는 요가 당(唐)지방을 다스렸기 때문에 붙은 칭호로서 도당씨(陶唐氏)라고도 하며, 요가 처음에 도(陶)라는 지역에 살다가 당(唐)이라는 지역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는 20살에 왕위에 올라 덕으로 나라를 다스려 가족들이 화합하고 백관의 직분이 공명정대하여 모든 제후국이 화목하였다.
요는 희씨(羲氏)와 화씨(和氏) 일족에게 계절에 따라 농사의 적기를 가르쳐 주게 하였고, 1년을 366일로 정하고 백관을 정비하였으며, 자신이 독단적인 정치를 하지 않게 하려고 궁전 입구에 감간고(敢諫鼓:감히 간언 드리는 북)를 두었다. 요의 만년에 황하가 범람하여 큰 홍수가 남으로 이를 다스리려고 곤(鯀)을 시켜 9년간 치수공사를 했지만 실패했다.
요가 왕위에 오른 지 70년이 지난 후 신하들에게 후계자를 추천할 것을 명하자, 신하들은 전욱 고양의 후손으로 효성이 지극한 순(舜)을 추천하였다.
요는 순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고 여러 가지 일을 맡겨 사람됨과 능력을 시험하였으며, 3년 후 순을 등용하여 천하의 일을 맡겼다. 그 후 20년이 지나 요는 순을 섭정으로 삼고 은거하여 8년 뒤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죽서기년’에는 순이 쿠데타를 일으켜 요를 폐위 감금했다고 나온다.
일부 학자들은 요 시대에 황하 유역에 중앙집권적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고 추정한다.
순은 요와 함께 상고시대의 대표적인 성군(聖君)으로 손꼽히면서 중국 문화권에서 훌륭한 군주를 가리켜 요순과 같다고 찬양하는 관용표현이 사용되었는데, 하나라의 우왕, 은나라의 탕왕을 합쳐 요순우탕(堯舜禹湯)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뛰어난 치세를 일컬어 요순시대(堯舜時代)라 부르기도 한다. 요순시대는 태평성대와 같은 의미의 관용 표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좋은 옛 시절”을 나타내며, 각종 시, 노래, 민요, 상소문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한편 역성혁명을 꾀하던 자들은 요순임금의 예를 들며 자신이 백성의 신망을 받는 지도자라고 이용하기도 하였다.
하(夏)나라(수도는 미상, 우禹씨 왕조) 2070~BC 1600년 ; 472년간 존속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왕위를 이양하다가 우임금 때에 그의 아들 계(啓)에게 계승하여 마지막 걸왕(사이계)까지 17왕 472년간 우씨 왕조를 존속하였다.
고고학적으로는 최근에 몇몇 유물이 발굴되었지만 아직 명확하지 않으며, 10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으나 위치는 미상으로 마지막 17대 왕 걸왕은 애첩 말희와 장야궁(長夜宮)을 짓고 성적으로 문란하고,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방탕을 일삼다 상족의 탕왕에게 멸망하였다.
상商or 은殷나라(수도는 은허, 왕조의 성씨가 없음) 1600~BC 1046년 ; 554년간 존속
수도는 여러 번 옮겼다가 마지막에 은허殷墟에 정착하였고, 실제의 시조는 탕왕(湯王)이지만 전설상의 시조는 설(契)로서, 그가 순 임금에게 子씨의 성을 하사 받았다지만 상왕조의 왕들은 이름만 있다.
은殷은 상왕조의 수도 이름인데 새 왕조인 주(周)나라에서 상나라를 낮추어 호칭한 것이다.
은허에서는 귀갑, 우골, 갑골문자 등을 다량 발굴하여 고고학적으로 실제 왕조로 판명되었다.
마지막 주왕은 달기라는 여인을 사랑하여 하나라의 걸왕처럼 주지육림으로 남녀가 벌거벗고 밤낮 술을 마시고 즐겼으며, 충신들은 포락지형(包烙之刑)으로 죽였다.
서백의 아들 발(무왕)과 여상 태공망(강태공 ; 육도삼략 저술)에게 토벌되어 호화궁전인 녹대에 불을 질러서 자살하였다.
하나라 수도 : ? / 상(은)나라 수도 : 은허
서주 수도 : 서안(시안, 호경, 풍, 장안) 동주 수도 : 낙읍(낙안, 뤄양)
주(周)나라 1046~BC 221년 ; 825년간 존속, 희(姬)씨 왕조
서주시대(1046~BC 770년 ; 276년간)의 수도는 풍, 호(호경鎬京) or 서안西安시안)이며, 동주시대(771~BC 221년 ; 550년간)의 수도는 낙읍(洛邑낙양, 뤄양)이다.
825년간 존속한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왕조이지만, 12대 유왕의 실정에 의한 반역으로 수도를 낙읍으로 이주한 동주시대(춘추전국시대)부터는 각 지방의 호족들이 왕으로 지역을 다스려 통치하기보다 상징적인 황제의 권위만 갖고 있었다.
원래 주나라는 상나라의 서부에 있던 제후국으로 상나라의 주왕 시절에 제후국인 주나라의 문왕은 상의 서쪽 제후들에 대한 총 책임권을 가지고 있던 서백의 지위에 있었다(그의 이름인 희창(姬昌)을 붙여 '서백 창'이라고 부름).
당시 주왕의 폭정으로 상나라의 인심이 흉흉하였는데, 서백 창은 주왕의 측근으로 주왕에게 반역하는 다른 제후들을 여러 번 평정하였다. 하지만 부하들과 백성들은 그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서백 창은 끝까지 주왕에 대해 충성하다 죽었다.
그러나 서백 창의 태자인 희발(무왕)은 아우인 희단, 제상인 강태공 등과 주왕에 반역할 뜻을 세우고 군사를 모았다. 즉위 9년 반란을 위해 총사령관인 강태공이 제후를 소집케 하여 많은 제후가 모이자 아버지 희창의 위패를 모시고 황하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널 나루터인 맹진까지 원정하였다. 이때 무왕의 진지에 두 가지의 길조가 있었는데, 맹진을 도하하는 무왕의 배에 상나라를 상징하는 흰 물고기가 날아들어 잡아서 제사를 지냈으며, 또한 강 상류에서 불길이 일더니 무왕의 앞에서 빨간 까마귀로 변했는데 빨간색은 주나라의 상징색이었다. 하지만 이 길조에도 무왕은 때가 되지 않았다며 제후들을 해산시켰다. 이는 점을 통해 길흉을 따지는 상나라의 전통과 달리 무왕은 철저한 계획에 의해 일을 판단한 것이다.
2년 후 무왕은 다시 아버지 문왕의 위패와 함께 주왕에게 2차 반란을 일으켜 군대가 은허의 남쪽인 목야에 도착하자, 주왕도 여력을 짜내어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이때 무왕의 진영에 있던 점쟁이가 갑골로 점을 쳤는데 큰 흉조가 나타났지만 강태공은 “길흉의 점괘와 상관없이 전투에서 이기면 된다.”고 주장하여 계속해서 원정을 했다.
목야에서 주나라의 무왕이 상나라 병사들을 향한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는데, 음탕한 달기와 놀면서 정사를 멀리한 주왕을 탓하고 하늘이 뜻이 자신에게 있음을 밝히자, 상나라의 군사가 흔들리면서 목야의 싸움에서 쉽게 이겼다.
전투에 패한 상의 주왕이 자살하여 은허에 입성한 주나라의 무왕은 상나라 주왕의 시체에 활을 세 번 쏘고 검으로 벤 후 상나라를 상징하는 하얀 깃발 위에 주왕의 머리를 높이 내걸었다. 이어 후궁으로 들어가 달기를 비롯한 주왕의 비들을 베고, 역시 상나라를 상징하는 깃발 위에 효수하였다.
무왕이 주나라의 개국을 선언한 후 공신들을 포상하여 강태공은 제나라,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은 노나라에 봉했으며, 주왕의 태자인 녹보에게도 온정을 베풀어 작은 땅을 다스리게 하고, 삼황오제 및 하나라의 후손들도 작은 영지에 봉하였다.
당시 주나라는 상나라를 멸망시켰지만 녹보에게 상나라 유민들을 맡기고 무왕의 동생들에게 녹보의 감시와 보좌를 맡기며, 상나라 사람들의 거주지를 서너 구획으로 나누었을 뿐 상나라의 주민을 옮기는 사민정책까지는 실시하지 못했다.
주나라를 개국한 무왕이 일찍 죽자, 개국공신이며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이 무왕의 아들인 성왕을 보좌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왕조 초기에 어린 왕이 등장하자 옛 상나라의 잔존 세력은 부활을 노렸고, 또 섭정을 맡은 주공을 형제들이 모함하여 집권세력 간의 불화가 일어나, 상나라 주왕의 태자였던 무경 녹보가 자신의 감시역인 무왕의 형제 관숙 선, 채숙 도 등과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삼감의 난이다.
이에 주공 단은 연나라의 시조이자 일가인 소공 석과 연합한 토벌군을 강태공이 이끌게 하여 반란을 일으킨 지 3년째에 진압하였다.
녹보와 관숙 선은 주살되고 기타 녹보에 협력했던 자들은 모두 쫓겨났다. 또 토벌군은 녹보의 반란에 동조한 회이와 서융까지 정벌했다(주공의 동정). 하지만 상나라의 제사는 유지시켜 녹보의 숙부인 미자계를 송나라에 봉했으며, 상나라의 유신들을 송나라에 살게 하였다.
이것은 주나라에서 상나라 유민들을 원거주지에 남기고 감시자를 파견한 정책을 바꾸어 상나라 유민들에 대한 사민정책(주민을 거주지에서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옮김)을 행한 것이다.
기존의 상나라 유민 일부를 송나라로 옮긴 것 외에도, 노나라에는 상나라의 주민을 여섯 족으로 나누어 수여하고, 옛 상나라의 주요지역을 분봉 받은 위나라에는 상나라의 주민을 일곱 족으로 나누어 수여했다.
이외에도 서주시대의 청동기들 중 상나라의 양식이 보이는 도상문자가 명문에 남은 청동기의 분포를 보면, 서로는 간쑤 성, 북으로는 랴오닝 성까지 나타나 주나라에서 상나라 유민들을 주나라의 통제가 닿는 구역의 각 지역으로 이주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산시 성에서 많이 나왔는데, 이는 상대의 상문화와 주문화의 분계가 시안 근방에 형성된 것을 감안하면 주나라에서 상나라 유민 상당수를 주나라의 중심지에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주공 단이 성왕을 대리하여 통치한 지 7년에 성왕이 성인이 되자 단은 성왕이 직접 통치하도록 하였다.
안정기에 접어든 주나라는 본격적인 팽창을 하여 4대 소왕 때는 허난 성 지방의 묘족이 공물을 진상하였으며, 소왕의 아들인 목왕 때는 원래 주나라의 기원인 서방지역으로 팽창했다.
목왕은 전설의 서방 군주인 서왕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서북쪽 이민족인 견융을 공격하여 그들의 흰 꿩, 흰 여우, 흰 사슴 등을 잡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런 외정의 소득은 크지 않았으며, 이로 인한 지출로 점점 주나라의 재정이 약해졌다.
목왕의 손자인 7대 의왕에 대해 사기에는 "왕실이 드디어 쇠락하여 시인이 풍자하는 시를 짓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의왕의 뒤를 이은자는 숙부인 효왕이며, 효왕의 다음은 다시 의왕의 아들인 이왕으로 정치적 혼란을 보였다.
이왕의 아들인 10대 여왕은 혼란을 극복하고 주나라의 재건에 힘쓰려고 강력한 중앙통제를 시행하여 재정의 건실화를 추구하고, 형법을 제정하여 불안한 치안상황을 개선하려 했지만, 백성들의 불만이 일자 옛 상나라 출신의 무당을 불러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을 잡아들이게 했다.
사기에는 이 때를 "백성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며, 도로에서 눈으로 대화한다."고 표현했다.
여왕의 강압적인 재건정책에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결국 여왕이 쫓겨나 BC 841~828년은 '공화기'가 되었는데, 반란군에 의해 여왕이 궁을 버리고 도망간 후 정치는 주공 단과 소공 석의 후손인 두 재상이 맡아 다스렸으며 여왕이 망명지에서 죽자, 여왕의 아들이 선왕으로 등극했다. 이 14년간을 '공화'라고 부르는 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죽서기년에는 공나라의 화라는 자가 14년간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공화'라고 불렀다지만, 여씨춘추에는 여왕의 정치가 가혹했기에 공화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가 높았다 한다.
이후 이 표현은 왕정에 반대되는 체제를 뜻하는 공화주의라는 표현으로 쓰이게 되었다.
여왕의 아들 선왕이 등극 후 주나라는 서방 민족과의 대결에 들어가 선왕 39년 티베트 계통 강족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자, 선왕은 백성의 호구 조사를 실시하여 국가 재건을 기했으나 빛을 보지 못하고 재위 46년에 죽었다.
주나라 유왕의 몰락으로, 서안에서 낙양으로 옮겨 춘추전국시대(동주시대) 도래
그런데 선왕의 뒤를 이은 12대 유왕은 포사라는 미녀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는데, 유왕에게는 원래 정부인 신씨에게서 낳은 태자가 있었지만, 포사가 온 뒤로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삼고 원래의 태자를 폐하였다.
포사는 미인이지만 웃는 일이 없어 유왕은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고민하다 왕궁에서 실수로 봉화를 올린 일이 있었는데, 각지의 제후는 서둘러 전쟁 준비를 갖추고 왕궁에 도착했다. 하지만 실수로 봉화가 올려 진 걸 알게 된 제후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군대를 돌이켰다. 그때 이를 본 포사가 크게 웃자 유왕은 그 뒤로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일부러 여러 번 봉화를 올렸는데, 이 때문에 제후들은 왕에 대해 신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을 유래로 "천금으로 웃음을 산다(천금매소)"라는 사자성어가 생겼다.
유왕이 포사와 어울리며 정치를 소홀히 하자, 유왕의 정부인 신씨의 친정은 하나라의 후손인 증, 이민족인 서이, 견융과 더불어 왕궁을 습격하여 유왕은 다급히 봉화를 올렸으나, 봉화를 보고 달려온 제후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BC 771년 유왕은 여산(驪山) 근처에서 반란군에게 죽고, 포사와 그녀의 아들이자 태자인 백복도 살해당했다.
견융은 그 뒤 호경에 눌러앉아 약탈을 벌였고, 이에 진, 정 등의 제후국들이 와서 견융을 토벌하고 호경을 되찾으면서 신, 증 등의 제후들은 신씨의 아들이자 원래 태자였던 의구(평왕)를 옹립한 후 왕실을 되찾은 공적을 통해 힘없는 왕실에 대해 권한을 늘리면서 각 제후국이 독립된 나라로 진행하였다.
그 뒤로도 견융의 침략 위협에 시달리다가 BC 771년 주나라는 제후들과 낙읍(낙양 or뤄양)으로 천도함으로 서주시대가 끝나고 동주 시대가 시작되었다.
수도를 시안에서 낙읍으로 옮긴 후 주나라 왕실은 유명무실해져 제후들이 독립국이 되었고, 지방 제후들의 권력이 강해져 수많은 지방 국가들이 난립하여 왕조의 년대기는 상징적인 주황제(왕) 아래에 있었지만, 이전과 다른 정치형태를 보여 동주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고도 하며, 그중에서도 제후국인 진(晉)나라가 삼진(晉 ;한ㆍ위ㆍ조)으로 나뉘기 전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춘추시대(770~BC 403년 ; 376년간)라 하고, 이후의 진(秦)나라에 의해 통일되기 전까지 전쟁으로 혼란한 시대를 전국시대(403~BC 221년 ; 182년간)라 한다.
제후국 진(晉)나라의 내분과 삼진(三晉 한ㆍ위ㆍ조) 출현으로 전국시대의 도래
진(晉)나라는 제 28대 경공(景公) 12년(BC 515년)부터 주나라 황제(왕)의 6군을 본떠 6명의 귀족〔한ㆍ위ㆍ조ㆍ지ㆍ범ㆍ중항씨 智ㆍ趙ㆍ韓ㆍ魏ㆍ范·中行氏)을 경(卿 ; 당주堂主)에 임명하여 군권(軍權)을 주고 진의 공실(公室 ; 군주의 집안)을 보좌하게 했는데, 뒤에 가서는 이들에 의해 국가가 분열되어 공실이 멸망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31대 평공(平公) 말년에는 공실에서 조세를 과다하게 걷어 누대(樓臺)나 연못을 조성하는 등 사치에 빠진 채 정사를 돌보지 않아 32대 소공(昭公 BC 532~526)이 죽었을 때는 6경의 세력이 공실보다 더 강해졌다.
경공(頃公 BC 526~512) 6년, 주(周)나라 황제(왕)인 경왕(景王) 사후에 왕자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이들 6경이 난을 평정하고, 새 천자인 경왕(敬王)을 옹립한 것을 보아도 그 세력이 어떠했는지 알 만하다.
경공 12년 진(晉)의 종실들이 경공 앞에서 서로 헐뜯는 추태를 벌이자 6경은 이를 기화로 종실의 일족을 멸하고 그 봉읍을 빼앗아 나눠 가져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다.
그러나 BC 458년 6경 사이에 갈등이 생겨 범씨와 중항씨가 반란을 일으키자, 다른 4명의 당주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내쫓고, 지씨의 당주인 지백(智伯) 요(瑤)의 주도 하에 한ㆍ위ㆍ조의 당주들이 결탁하여 범씨와 중항씨의 영토를 분할해 차지해버렸다.
화가 난 진(晉)의 출공(出公 BC 475~458)이 노(魯)나라와 제나라에 구원을 청해 그들을 토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받고 사망함으로 진나라는 완전히 지ㆍ조ㆍ한ㆍ위 4경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지백은 새로 애공(哀公 BC 458~440)을 세워 군주로 삼은 뒤에 여세를 몰아 이제는 창끝을 한ㆍ위ㆍ조 3경에게 돌려 그들에게 각각 영토를 할양(割讓)하라고 요구했지만, 오히려 한ㆍ위ㆍ조 3경이 연합하여 지백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진(晉)나라는 6경 가운데 한ㆍ위ㆍ조 3경의 천하가 되었다.
그 후 애공의 아들 유공(幽公 BC 440~422)은 명목상의 군주일 뿐, 왕이 오히려 신하인 3경을 알현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열공(烈公 BC 442~395) 19년에는 드디어 주 천자까지도 삼경에게 봉작을 내리고 제후로 임명했다.
BC 376년 삼경들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진의 40대왕 정공(靜公 BC 378~376)을 폐위하고 영토를 삼분함으로써 진(晉)나라는 멸망하고, 새로이 한(韓)ㆍ위(魏)ㆍ조(趙)의 세 나라가 생겨났는데, 이를 삼진(三晉)이라 불렀다.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주나라의 왕(황제)은 왕의 권위만 있는 상태(춘추전국시대)였지만, 그래도 각 제후들은 나름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그들 위에 있는 주나라의 승인이 있어야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제후국인 진(晉)나라가 스스로 교만하여 주 왕실을 흉내 내어 6경 제도를 만들었다가 내분으로 나라가 3개로 쪼개졌는데도 주나라가 승인해 주는 걸 보고, 그나마 형식적인 주나라의 권위마저 다 무너지면서 세력만 있으면 누구든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후로 제후국간의 영토 쟁탈전이 벌어져 182년간 하루도 전쟁이 없는 날이 없는 전국시대가 되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들
아래의 국가는 역사 문헌에 활약이 있었던 나라들로서 이외에도 지방의 작은 봉건국가가 많이 존재 했다.
동주(東周) : 낙읍(雒邑 : 하남성 낙양洛陽),
진(秦) : 옹(雍 : 섬서성 봉상현(鳳翔縣)),
초(楚) : 영(郢 : 호북성 강릉시(江陵市)),
월(越) : 회계(會稽 : 절강성 소흥시(紹興市)),
오(吳) : 고소(姑蘇 : 강소성 소주시(蘇州市)),
제(齊) : 임치(臨淄 :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노(魯) : 곡부(曲阜 : 산동성 곡부시),
연(燕) : 계(薊 : 북경(北京)),
진(晉) : 강(絳 : 산서성 후마시(侯馬市)),
진(陳) : 하남성 진현(陳縣)),
채(蔡) : 하남성 상채시(上蔡市)),
위(衛) : 복양(濮陽 : 하남성 복양시)
정(鄭) : 신정(新鄭 : 하남성 신정시)
< 춘추오패 ///// 전국칠웅 가운데 흰색 부분이 동주이며, 수도는 낙양이다. >
춘추오패
춘추 오패(春秋五覇)는 춘추시대 제후 간 회맹의 맹주 또는 5대 강국을 일컫기도 한다.
이들 패자는 모두 존왕양이(尊王攘夷 ; 왕(주나라의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함)를 내세웠다.
5의 수는 오행 사상(나무·불·흙·쇠·물의 다섯 원소의 운행에 의해 만물이 성립한다고 하는 사상)에 의한 것으로, 특별히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춘추오패는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오나라의 왕 합려, 월나라의 왕 구천을 가리키며, 기록에 따라서 진나라의 목공, 송나라의 양공 또는 오나라 왕 부차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제의 환공(齊 桓公 재위기간 BC 685~643년)
제나라는 주를 도와 은을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운 태공망 여상(呂尙)이 문왕(文王)으로부터 산동성 임치(臨淄)에 영지를 받아 세운 나라로, BC 7세기에 환공이 왕이 되자 부강하게 되었다.
환공의 이름은 소백(小白)이며, 이복형 규(糾)와 싸워 즉위하고 재상으로 관중(管仲)을 등용했다.
관중의 헌책에 의해 어업·제염업·양잠업 등의 경제 정책을 장려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BC 679년 제후(諸侯)와 견(甄)에서 회맹하여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가 되었다.
BC 651년 규구(葵丘)의 회에서 패업을 자랑했지만, 관중 사후에 3총(三寵)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사후 내란에 의해 두 달 동안이나 시체를 매장하지 못했다.
진의 문공 (晋文公 재위기간 BC 636∼628년)
진나라의 제24대 공작으로 성은 희(姬), 휘는 중이(重耳),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중이의 가계는 원래 진(晉)나라의 방계 왕족이었지만 무공(武公) 때 직계 왕족을 멸하고 스스로 진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중이는 무공의 아들 헌공(獻公)과 적족의 여인 호희(狐姬)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헌공의 아들 중에 중이 외에, 태자였던 형 신생(申生 중이의 이복형), 남동생인 이오(夷吾 후의 혜공, 중이의 친동생)등이 있다.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진(晋)나라 무공(武公)에게 우호의 징표로 딸인 제강을 바쳤다.
무공은 제강을 측실로 삼았는데, 무공(武公)의 아들 헌공(獻公)이 아버지의 측실인 제강과 사랑에 빠져 아버지 무공이 살아 있을 때부터 눈이 맞았다가 아버지가 죽자, 바로 아버지의 여인인 제강을 정실로 맞아 들였다. 그 후 사랑하던 부인인 제강이 죽었는데, 그가 죽은 지 1년 뒤에 헌공이 여융을 토벌하면서 여융 왕의 딸 여희와 그의 여동생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이때 헌공에겐 신생, 중이, 이오라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여융에서 포로로 잡혀온 여희는 이들 보다 10살이나 더 어렸지만 헌공은 포로로 잡혀온 여희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다.
포로로 잡혀온 1년 뒤에 여희는 헌공의 악사 우시와 정을 나눴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헌공은 여전히 여희를 사랑했으나 여희는 헌공의 아들에게도 추파를 던졌는데, 첫째와 둘째는 응하지 않았지만 막내 이오는 여희와 정을 통했다.
여희가 진(晋)나라에 잡혀 온지 7년째에 아들을 낳자, 헌공은 늦둥이인데다 자기가 총애하는 여인이 아들을 낳아서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실제 이 아이는 누구의 씨인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면서 여희는 악사인 우시와 계속 사랑을 나누고, 자신이 낳은 아들인 혜제에게 왕위를 계승할 음모를 꾸몄다.
육체로 헌공의 혼을 다 빼앗은 여희는 세자인 첫째 아들 신생을 죽이려고 꾀를 내어, 야유회에 신생을 초청한 후, 몸에 꿀을 발라 벌과 나비가 몰려들게 하였다. 그때 옆에 있던 신생에게 벌을 쫓아 달라고 하자, 신생이 여희의 몸에 달려드는 벌을 쫒는 손짓이 아버지의 측실을 사랑해서 아내로 취했던 헌공이 멀리서 바라볼 땐, 개 눈에 똥만 보이듯 아들인 신생이 여희를 희롱하는 것 같이만 보였다. 이 후로 헌공은 신생을 의심하게 되었는데, 결국 여희는 함정을 파서 신생에게 아버지 헌공의 독살 미수라는 누명을 씌워 신생을 자살시켰다.
그리고 이미 수고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쫒아낸 중이에 대해서도 환관을 파견하여 자살을 강요했다. 이에 중이가 망명길에 올랐는데, 중이는 젊을 때부터 인재를 좋아하여 17세 때에 조쇠(趙衰), 호언(狐偃), 가타(賈佗), 선진(先軫), 위주(魏犨)를 부하로 삼았으며, 또 몸집이 커 아버지가 태자였을 무렵부터 이미 성인의 체격이었는데, 망명을 나설 때엔 서신, 호사고, 개자추 등이 따랐고, 어머니의 출신지인 적(狄)으로 망명하였다.
적에 망명했을 때, 중이는 이미 43세였으며, 망명 기간 때 적의 자매 중 언니(누나)는 중이에게 동생은 조쇠에게 시집을 왔다.
이오도 측근과 함께 국외에 망명했다.
적으로의 망명 5년째 헌공이 죽고 여희 등에 의해서 해제와 그 동생 탁자가 진나라 군위에 오르지만, 민심이 이반하자, 이극(里克)등의 대부들이 들고 일어나 여희 일파들은 몰살하였다.
이극은 중이를 진나라의 임금으로서 맞아들이려고 사자를 보냈지만, 중이는 살해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오지 않았다. 그러자 막내 이오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진(晉)의 혜공(惠公)인데, 혜공은 천성이 악하여 백성과 신하를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혜공은 망명한 형 중이가 자기의 왕위를 뺏을까 두려워하여 이극 등 중이를 좋아하는 인물들을 숙청하고, 발제라는 자객을 보내어 암살하려 하였으나 호돌이라는 사람이 중이에게 알려주자 중이는 "진(晉)과 가까운 소국에 몸을 의지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동방의 대국인 제나라로 가자. 명재상인 관중도 죽었으니 반드시 인재가 필요할 것이다." 하고 동쪽으로 제나라로 떠났다.
출발에 임하여 중이는 아내(적족)에게, "나를 25년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으면 재혼하시오." 라고 하였는데, 아내는 웃으며 "25년 정도 기다리면 나의 무덤에 심은 측백나무도 커지고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일행은 우선 위나라(衛)를 목표로 했지만 위나라의 공은 일행을 환영하지 않았고, 일행은 오록(五鹿)이라고 하는 땅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현지의 농민에게 음식을 구걸하였는데, 농민이 그릇에 흙을 담아 주자 중이는 격노했지만, 조쇠는 "흙을 얻었다는 것은 이 땅을 얻은 것입니다. 참으십시오." 라고 하여 중이는 그대로 했다.
제나라로 도망하는 길이 너무 험난하여 중이를 따르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일행은 고사리로 겨우 연명하였으나, 귀하게 자란 중이는 먹을 수가 없자, 그를 따르던 개자추(介子推)가 어디서 고깃국 한 그릇을 가져와서 먹게 하였다.
중이가 고깃국을 맛있게 먹은 후 개자추에게 어디서 고기를 구했는지 물으니 “공자께선 고사리도 못 잡수시니 신의 다리 살을 한 점 떼어 국을 끓였나이다. 효자는 몸을 죽여 어버이를 섬기고, 충신은 몸을 죽여 임금을 섬긴다 하오니, 지금 공자가 굶주리시니 부득이 신의 몸을 진상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감동한 중이가 “아! 망명객의 신세는 한이 없도다.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하니, 개자추가 “공자께선 하루 빨리 뜻을 이루소서, 신이 어찌 보답을 바라오리까?” 했다.
그러한 일이 있으면서도 여행을 계속하여 일행은 동쪽의 제나라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환공은 초라한 망명 공자에 지나지 않는 중이에게 20승의 마차를 주고, 또 딸을 중이에게 시집보내고 많은 환대를 했다.
이때 제나라는 ‘관표지교’의 한 인물인 관중이 재상으로 있던 때였다. 그러나 제나라에 있은 지 5년이 지나 환공이 죽고 후계를 둘러싸고 격렬한 내란이 일어나 제나라가 어수선했지만, 그 중에 중이는 이미 제나라의 아내를 얻어서 제나라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호언, 조쇠 등은 중이를 모시고 제나라를 떠날 계획을 하는데, 이 계획을 중이 아내(제나라)의 시녀가 몰래 엿들어 그녀에게 알렸지만, 그녀는 오히려 중이의 탈출 계획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시녀를 죽이고, 중이에게 빨리 제나라를 떠나도록 재촉했다.
그러나 중이가 듣지 않자 중이의 제나라 아내는 호언 일행과 도모하여, 중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여 수레에 억지로 싣고 제나라를 도망쳤다.
술이 깬 중이는 격노해서 호언을 죽이려고 하자, 호언은 "저를 죽여 공자의 대업이 완성된다면 바라던 바입니다." 라고 했다. 이에 중이가 "일이 완성되지 않으면 자네를 죽이고 그 고기를 먹을 거야."라고 하자, 호언은 "일이 완성되지 않으면 제 고기는 썩어서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중이는 다시 조국 진(晉)나라에 잠시 들렀으나 위험할 것 같아 조나라(曹)에 들어갔지만, 또 다시 무례한 취급을 받아 바로 출국해 송나라에 들어갔다.
송나라는 당시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진 직후지만, 양공(襄公)은 중이에게 국군의 예로 맞이하여 환공과 같이 80 마리의 말을 주어 환대 했다.
그러나 현재의 송나라는 나라가 적어서 조력 할 여유가 없을 것 같아, 일행은 초나라를 의지하기로 하고 길을 나서면서 도중에 정나라에 들렀지만 푸대접을 받았다.
초나라에 이르자 초의 성왕(成王)은 망명 공자 중이를 제후와 같은 격식으로 대접했지만, 희롱하는 마음에 "만약 당신이 돌아가서 진(晉)의 군주가 되면 나에게 무엇을 답례로 줄 수 있겠소?" 라고 물었다. 이에 중이는 "만약 훗날 왕과 싸우는 일이 있다면 군을 3사(군이 3일에 행군 하는 거리) 물리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성왕의 부하 자옥(子玉)은 망명 공자에 지나지 않는 주제에 초나라 왕을 향해 건방지다고 분노하여 중이를 죽이려 했지만, 성왕은 "하늘이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제지하리요?" 라고 하며 자옥을 멈추게 했다.
BC 637년 진 혜공이 죽자 진의 인질이던 태자 어(圉)가 도망가 회공(懷公)이 되었다.
진목공(秦穆公)은 인질이던 어(圉)가 자기 마음대로 도망치자, 전에 진 혜공에게 은혜를 원수로 받은 적도 있어 크게 화를 내며 중이를 진나라 공으로 세우기 위해 초나라로 부터 불렀다.
BC 637년 12월 진(晉)의 중신들로 부터도 귀국하길 바라는 청을 받은 중이는, 진나라 군(秦軍)을 등에 업고 진(晉)나라에 들어오는데, 진(晉)나라 군은 평판이 나쁜 혜공과 그 아들 회공을 따라가려는 이는 적고, 회공의 측근만이 그를 따르고 대부분의 진(晉)나라 군은 오히려 중이를 쫒음으로 진나라군(秦軍)과 함께 회공의 진나라 군(晉軍)을 쉽게 격퇴했다.
이로써 중이는 진나라의 문공이 되었는데, 그때 나이 62세였다.
그리고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힘을 빌어서 진(晉)나라 혜공을 공격할 때, 중이를 모시던 호언이라는 장수가 중이에게 이르기를, "고생을 함께 할 때는 그 신하의 고마움을 알지만, 임금의 지위를 얻어 편안해지면 함께 고생하던 신하의 고마움도 잊혀집니다."하고 우려하면서 중이에게 다짐을 받으려 하자, 중이는 항상 귀하게 몸에 차고 다니던 백옥을 강물에 던지면서 "나는 그렇지 않겠노"라고 맹세를 했다. 이를 본 개자추는 일신의 부귀만을 탐하는 호언 같은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없다하여 은퇴를 결심했다.
마침내 진(晉)의 혜공이 중이와 秦(진)의 목공과 연합한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폐하여 죽고, 드디어 중이가 진(晉)의 왕이 된 후, 망명 시에 따르던 신하는 1등 공신, 반역을 알린 신하는 2등 공신, 항복한 신하는 3등 공신으로 땅과 포상을 했다. 또한 “공이 있고 상을 못 탄 사람은 누구든지 알리라”고 했으나, 망명 시에 문공에게 자기의 살을 베어 먹였던 개자추는, 공이 있다하여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자들에게 불평을 품고, 병을 핑계로 하여 고향에 내려가서 짚신을 삼으며 노모를 봉양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걸 본 이웃들이 개자추에게 "그대는 공이 막대하거늘 어찌 알리지 않느냐?" 하니, 개자추는 “문공이 왕이 된 것은 그가 덕이 있어서 이거늘, 차라리 짚신을 삼을 지언정 감히 하늘의 공을 자기의 공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내가 임금에게 구할 것이 없는데 무엇을 찾으오리까?” 하니, 이를 들은 개차추의 어머니는 “네가 진정 청렴한 선비가 되길 원한다면, 내가 청렴한 선비의 어미가 못될 것이 없다. 그러면 우리 모자는 깊은 산속에 숨어서 혼탁한 세상을 피하자” 하니, 개자추가 산속에 집을 짓고 일생을 보내려고 노모를 업고 면산(綿山)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제 아무도 개자추의 행방을 아는 이 없었으나, 평소 그를 존경하는 해강만이 알았는데, 해강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조문(朝門)에 붙였다.
“용맹스런 용이 슬프게도 처소를 잃어버려서 뱀 몇 마리가 따라서 천하를 떠돌았다. 용이 굶주릴 때 한 뱀이 다리를 절었으며, 용이 연못으로 돌아와서 흙 속에 안정하여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몇 뱀은 구멍에 들어가 모두 편한 집을 얻었으나, 한 뱀은 여전히 들 가운데 부르짖고 있구나”
이 시를 읽게 된 문공이 개자추의 원사(怨詞)라 하여 크게 후회하며 사람을 시켜 찾으니, 해강이 나서서 “주공께서 본 것은 사실은 제가 개자추의 공로가 영영 없어질 것이 두려워하여 대신 적은 글입니다. 개자추는 상을 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노모를 업고 면산으로 가서 숨었나이다.” 하여, 문공이 개자추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면산은 산세가 험준하여 그의 종적을 찾을 수 없다가 어떤 농부를 만나 물으니, “수일 전 한 사람이 노파를 업고 이 산 밑에 쉬며 물을 떠서 마시고 다시 산을 넘어 갔사온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나이다.”하였다. 그 말을 듣고 몇날을 다시 개자추를 찾았으나, 끝내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낙심한 문공은 “개자추는 과인을 원망할 것이다. 내가 듣건데 그는 효도가 극진하다 하니, 만약 이 산에 불을 지르면 반드시 노모를 업고 나올 것이다.”하여 산에 불을 지르자, 불길은 수리에 퍼졌고 나흘 동안이나 산을 태웠다.
산이 불에 다 타고 온 산이 시커멓게 민둥산이 되자, 다시 산을 수색하였는데 결국 모자가 타 죽은 시체를 발견하였다. 이를 본 문공은 눈물을 흘리며 면산 아래에 장례를 치르고, 사당을 지어서 사시(四時)로 제사를 드리고, 면산을 개(介)산이라하고, 개자추가 잠시 쉰곳을 介休(개휴)라고 했다.
면산에 불을 질렀던 날이 청명(淸明)이었는데, 이를 알게 된 백성들은 그 때 부터 청명날에 불에 타 죽은 개자추를 추모하여 청명 후 한 달간 냉식(冷食)을 했다. 그 뒤로는 냉식 기일이 점차 줄어들어 삼일 간으로 줄었는데, 이것이 한식절(寒食節)이 되었다.
그 후 태원, 서하, 안문 각처에서 매년 동지가 지난 105일 후 냉수를 먹고, 불과 연기를 내지 않는 금화(禁火) 또는 금연(禁烟)의 의식을 치뤘으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청명 전 1일은 한식절 또는 우절(遇節)이라 하여, 집집마다 문 뒤에 버드나무 가지를 매달아서 개자추의 혼을 부르며 제사를 지내고, 종이돈을 태워 개자추를 추모했으며, 이 풍습은 현재까지도 중국에서 전해져 오고 있다.
한식절의 유교적 관례는 충효지도의 본인데, 이 시대에서 볼 땐 개자추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노모까지 죽인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라 싶다.
진문공(晉文公)은 왕이 되고나서 BC 635년 반란이 일어나 주나라 양왕(周襄王)이 도망해 오자 그를 보호하고 반란을 토벌 하였다.
BC 632년엔 초나라에 공격받은 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성왕과 대적하였는데, 성왕은 운이 나쁘다며 군을 퇴각하였으나, 초나라군 중에서 자옥만은 물러나지 않고 진(晉)나라 군과 결전했다.
싸움이 개시되자 진문공(晉文公)은 약속대로 전군을 3사 비켜 주었는데, 이를 본 초나라의 군 자옥은 오히려 진문공(晉文公)이 도망가는 줄로 여겨 쫒다가 성복의 땅에서 대결하여 크게 패배하였다. 이것을 성복전투라고 부르며 이로써 문공은 패자의 지위를 얻었다.
진문공(晉文公)은 패자에 오른 지 3년 만인 BC 628년에 사망하였는데, 재위기간은 9년이다.
혼란이 계속 된 진나라를 안정시키고 패업을 이룬 공적을 얻어 시호 중에서 최상급인 문(文)을 시호를 얻어 문공이 되었으며, 은원 관계가 철저하여 유랑시절 자신을 박대했던 정(鄭), 위(衛), 조(曺)에게 복수하였다.
초의 장왕
(楚 莊王 재위기간 BC 614~591년)
은 초나라의 제 23대 왕으로,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여(侶)이다.
성왕의 손자이자 목왕의 아들로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초나라의 목왕이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죽고 그의 아들이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춘추 오패로 유명한 장왕이다. 하지만 장왕이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왕족 섭(燮)이 모반을 일으켰다.
섭은 수도와 왕실을 장악하여 왕을 자칭했으나, 반대 세력의 확대로 신변의 위험을 느껴 장왕을 데리고 북방으로 도망쳤다. 섭은 진(晉)나라와 진(秦)나라, 초나라 국경 가까이의 상밀(商密)이라는 곳에서 반격을 개시했으나, 도중에 노(盧)라는 마을에서 살해당하자 풀려난 장왕은 수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장왕은 즉위한 후 삼 년 동안 주색에 빠져 있으면서 “감히 나에게 간언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이겠다.”는 영(令)까지 내렸다.
어느 날 장왕은 왼쪽에 정나라 여자를, 오른쪽에는 월나라 여자를 껴안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 오거(伍擧)가 간언을 했다.
“왕께 묻겠습니다. 언덕 위에 새가 있는데, 삼년 동안 전혀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이 새는 무슨 새입니까?”
장왕이 대답했다.
“삼년을 날지 않았으니 한번 날아오르면 하늘을 찌를 것이고, 삼년을 울지 않았으니 한번 울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여러 달이 지났으나 장왕은 더욱 방탕해졌다. 이에 대부 소종(蘇從)이 간언하니, 장왕이 말했다.
“내가 영을 내렸던 것을 듣지 못했는가?”
소종이 대답했다.
“이 한몸 죽어서 왕을 깨우치는 것이 신의 바램입니다.”
그러자 장왕은 놀이를 그만두고 정사를 살피면서 이때까지 봐왔던 간신 들을 주살하고, 또 현명하고 충성스런 신하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오거와 소종에게 정무를 맡기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 사건에서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
이렇게 국정을 정비한 장왕은 용(庸)나라를 공략한 것을 시작으로 주변 국가를 압박했고, 영토를 넓히며 패자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BC 606년에는 중원을 제패할 야심을 품고 동주의 영토 근처에 군사를 주둔시킨 후, 주나라가 사자로 왕손만을 보내자, 장왕은 그에게 구정(九鼎 하나라의 시조 우왕이 아홉 주의 제후들이 바친 청동을 모아 만든 아홉개의 솥으로 중국 전체를 다스리는 천자의 상징)의 무게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구정의 무게를 묻는 것은 주나라의 왕위를 빼앗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장왕의 속내를 알아차린 주나라의 사자 왕손만은 솥의 크기와 무게보다는 덕이 중요하며 천명은 아직 주나라에 있다고 대답하자 장왕은 철군하였다. 여기서 문정경중(問鼎輕重)의 성어가 유래하였다.
어느 날 장왕이 신하들을 위해 연회에 베풀었는데, 많은 사람이 취한 가운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 촛불이 꺼져 버렸다. 그 때, 장웅(蔣雄)이라는 장수가 장왕의 총희를 껴안았는데, 그녀는 곧바로 장웅의 갓끈을 잡아 뜯고 장왕에게 이를 알렸다.
그러나 장왕은 오히려 모든 신하들에게 꺼진 불을 다시 켜기 전에 갓끈을 뜯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하여, 곤경에 처한 장웅을 용서해 주었다.
그 후 초나라가 진(秦)나라에게 공격당하여 장왕이 진나라의 군대에 포위를 당했는데, 홀연히 나타난 장수 하나가 목숨을 걸고 싸워 진나라의 포위망을 뚫었다.
목숨을 구한 장왕이 장수를 부르니 그가 장웅이었다.
장왕이 장웅에게 물었다. “그대의 과한 충성으로 내가 살았으니 내가 그대에게 어떤 상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도다.”하고 하자, 장웅이 말했다.
“주군이여, 저를 죽여주소서, 저는 이미 죽을 목숨이었는데 왕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았을 뿐입니다.”
장왕이 다시 물었다, “내가 너를 아낀 기억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네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한 것이냐?”
장웅은 당시 연회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며 그때 총희를 껴안은 자가 자신임을 말했다.
여기서 유래한 성어가 절영지연(絶纓之宴)이다.
장왕은 진(陳)나라의 내란을 틈타 진(陳)나라를 일시에 병합하고, 정(鄭)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와 함께 속국으로 삼았다.
그리고 BC 597년엔 정나라의 원군으로 온 진(晉)나라 군을 격파했다. 이 때 진(晉)나라군은 허겁지겁 배를 타고 후퇴했는데, 배가 뒤집힐 것을 두려워한 병사가 배에 매달려 있는 병사의 손을 잘라 떨어뜨리면서, 배 안에는 손가락이 수북히 쌓였다고 한다.
대승한 뒤 신하들은 경관(京觀)을 만들 것을 상소했지만 장왕은 물리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武)'라는 글자는 무기를 멈추어 쓰고, 난폭함을 막고 전을 세우고 대를 유지하며, 공을 정하고 백성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화합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자신이 한 것은 이 무덕에 들어맞지 않으며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한 진나라 병사들의 사체로 경관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초장왕은 춘추의 패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진나라를 패퇴시키고 패업을 이룬 장왕은, 그 다음에 진나라를 따르는 송나라를 표적으로 정했다. 장왕이 제나라에 보낸 사신이 송나라를 지나가다가 피살당하자, 전광석화 같이 송나라에 쳐들어가 그 수도 상구(商丘)를 포위했다.
이전에 노나라도 초나라의 맹하에 들어가는 등 착실하게 장왕의 패업은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화원(華元)을 비롯한 송나라군의 저항에 의해 BC 594년 5월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상구를 함락하지 못하여 장왕은 결국 퇴각했다.
후에 송나라는 초나라에게 항복했다.
오왕 부차 (吳王 夫差 재위기간 BC 495~473년)
부차의 아버지 합려(闔廬)는 초의 망명 신하 오자서(伍子胥)를 기용하여 BC 506년 초의 서울 영을 함락시켰는데, 월의 윤상(允常)의 침입에 의해 이후 오·월의 다툼이 시작됐다.
합려는 윤상의 사후 월을 공격했지만, 월왕 구천(句踐)에 의해 참패당하고 그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서약시켰다.
부차는 구천을 BC 494년 회계(會稽)에서 격파하고 남방을 정복했다.
계속해서 북상하여 기원전 482년 진나라(晉)을 맹주로 하는 중원 여러 나라를 무력으로 누르고 패자(覇者)가 되었다.
강남 세력의 중원 진출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지만, 그 사이 월왕 구천은 오의 수도 쑤저우(蘇州)를 공격하여, BC 473년에 부차는 구천에게 대패하여 자살하고 오나라는 월에 병합되었다.
월왕 구천(越王 勾踐 재위기간 BC 496~465년)
오왕 합려는 월에 침입했지만 구천은 그를 격파했다. 그 후 합려의 아들 오왕 부차는 와신(臥薪)하여 2년 후 회계에서 그를 항복시켰다.
구천은 명신 범려와 상담(嘗膽;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해 돼지의 쓸깨를 씹음)하고 BC 477년 부차를 고소(姑蘇)에서 포위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월왕 구천은 북상하여 산둥의 서주에 제후를 모이게 하여 춘추시대 최후의 패자가 되었다.
진목공(秦穆公 재위기간 BC 659~621년)
목공은 선공(宣公)의 아들이며 성공(成公)의 동생으로 형제 상속에 의해 진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이웃나라인 진(晉) 헌공의 딸을 아내로 맏이하면서 사신으로 백리해가 따라 온 백리해를 신임하고, 이후는 백리해에게 국정을 맡겼으며, 그 외에도 건숙(蹇叔), 비표(丕豹) 등 많은 조력자가 있어서 군주로서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BC 651년 진(晉)의 헌공이 죽으면서, 후계 싸움으로 진(晉)나라는 혼란 상태가 되자 진(晉)의 공자 이오는 진(晉)나라 제후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목공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목공은 이오의 형 중이를 인격적으로 호감이 있었지만, 이오가 진(晉)나라 제후로 즉위하면 자신에게 유리할 것으로 여겨, 이오를 진(晉)나라로 보내 진(晉) 혜공으로 즉위시켰다.
이 때 이오는 목공에게 예로서 영토의 할양을 약속하였으나 진(晉)나라에 들어온 혜공은 약속을 깨트리고 악정을 행하였다.
BC 647년 진(晉)나라는 흉작이 들어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진(秦)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는데, 가신들은 망은 한 혜공에게 식료를 보내 줄 필요가 없다며 반대했지만, 목공은 "혜공의 일은 미워하지만, 백성에게는 죄가 없다"고 하여 진나라에 대량의 식량을 보내주었다.
그 다음 해에는 진(秦)나라가 흉작이 들므로 목공이 진(晉)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혜공은 식량을 보내지 않고, 식량이 없어니까 이제 진(秦)나라의 국력이 약해졌을 것이라 보고 진(秦)나라에 쳐들어 갔다. 이에 대노한 목공은 다음 해에 출병하여 진(晉)나라군과 한원(韓原)에서 격돌하여 대승하여 혜공을 포로로 잡았다. 개선하여 돌아온 목공은 혜공을 죽이려 하였지만, 아내(혜공의 누나)에게 제지당했다. 거기서 혜공의 태자 어(圉)를 인질로 하고, 혜공을 귀국 시켜주었다.
이때 목공은 그의 딸 회영(懷嬴)을 어(圉 ; 晉懷公)에게 시집가게 했으나, BC 638년 진(晉) 혜공이 중병이 들자 태자 어는 진(秦)나라에서 도망쳤다.
태자 어가 도망가자 화가 난 목공은 초나라에 있던 중이를 맞아들이고, 어(회공)에게 시집갔다가 홀로 된 딸 회영(懷嬴)을 다시 중이와 재혼시켜 신영(辰嬴)으로 불렀다. 그리고 목공은 군사를 내어 중이를 도와 성복전투(城濮之戰)에서 초나라를 격파한 후 중이를 진(晉)나라의 제후(진문공 晉文公)로 삼았다.
진목공(秦穆公은 또한 서융(西戎)을 토벌하여 서융의 패자라고 불렸지만 살았을 당시에 제후들의 회맹에 의해 주나라 왕실이 인정한 패주(覇柱)는 되지 못했다.
BC 621년 진(秦)목공이 사망하자 가신 177명이 순장을 당했는데, 중심이 된 가신들이 많이 순장 당하면서 이후 진나라의 국력이 크게 저하하였다.
송양공(宋襄公 재위기간 BC 651~637년)
작위는 공작이며, 성은 자(子), 휘는 자보(茲父), 시호는 양공으로 환공의 아들이다.
양공은 목이(目夷)라고 하는 이복형이 있어 왕위를 목이에 양보하려 했지만, 목이는 거절하여 양공이 송나라 제후가 된 뒤에 목이를 재상에 임명하였다.
즉위 직 후 제나라의 환공이 주최하는 회맹(會盟)에 참가하고, 그 후도 종종 회맹에 참가했다.
양공은 사사로운 일보다 예를 중시하는 이상주의자였다.
BC 643년에 환공이 사망하자 제나라 국내에서는 후계를 둘러싸 내란 상태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 양공은 회맹을 열어 조나라(曹),위나라(衛),주나라(邾)등 소국들을 거느려 일찍이 송에 망명해 왔던 태자 소(昭)를 제나라로 보내고, 제나라의 내란을 진압하여 소를 제나라 효공이 되게 하였다. 또 회맹에 오지 않았던 등나라의 선공(滕 宣公)을 잡고 뒤이어 늦게 온 증나라 임금을 삶아 죽여 제물로 바쳤다.
BC 639년 제나라, 초나라와 회맹하여 맹주가 되는 것을 초나라에게 인정받았다.
양공의 형 목이는 송나라가 맹주가 되는 것은 해롭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충고하였지만, 양공은 듣지 않았다. 더욱 양공은 초나라, 진나라, 채나라, 허나라, 조나라를 모아 회맹을 실시하지만, 이 자리에서 초나라에 의해 감금되어 맹주로서의 면목이 손상되었다.
다음 해 양공은 굴욕을 풀기 위해 위나라, 허나라, 등나라 등을 거느려 초나라의 맹하에 있던 정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목이가 또 충고했지만 양공은 듣지 않았다. 이에 초나라 성왕은 군을 일으켜 정나라를 구원하러 나서서 송나라 내의 홍수(泓水)의 논두렁에서 싸우는데 초나라군은 송나라 군에 비해 압도적 대군이었다. 거기서 양공의 신하들은 적이 도하하고 있는 동안에 공격해야 한다고 했지만, 양공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초나라군은 도하를 다 했지만 아직도 전투 대형이 갖춰지지 않았는데, 목이는 다시 바로 지금 공격해야 한다고 했지만, 양공은 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초군은 전투 대형을 정돈해 양군은 격돌하자, 당연히 대군인 초나라의 압승하고 양공은 넓적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 그 때에 공격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양공은 "군자는 사람이 곤궁할 때 어렵게 하지 않는다." 라고 대답하여, 목이는 이 말을 듣고 기가 막혀 "전쟁 때는 보통 때의 당연하다고 하는 상황과는 다릅니다." 라고 했다.
그 후 진의 망명 공자 중이(重耳 후의 문공)가 송나라를 방문하자, 양공은 크게 환대 하여 마차 20승을 주었다.
BC 637년 초나라와의 홍수 전투에서 입은 넓적다리의 상처에 의해 사망하였다.
전국시대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전국 시대는 진(晉)나라의 대부 조(趙), 위(魏), 한(韓) 3가문이 주(周)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공인받으면서 시작되었다.
한·위·조가 후(侯)라 칭해졌다는 것은 단순히 하극상을 의미한 것만이 아니라, 주왕이 이를 인정하고 스스로 종법제(宗法制)를 번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이 배경에 있다.
이윽고 강력한 제후들은 스스로 왕(王)을 칭하게 됨으로 이 때부터 명실공이 주왕조의 권위가 떨어지고, 그 시기까지 중원에서 나름대로의 사회적 질서와 정치적 균형을 유지시켜오던 봉건제도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결국 붕괴되어 버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얼마 후 제(齊)나라도 기존의 강씨(姜氏)를 대신하여 전씨(田氏)가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이 시기부터 각 제후들이 주나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지향해 제각기 왕을 칭하였다.
이로써 춘추시대 초에 140여 개국이던 도시국가의 거의 모두가 이 때에 와서 7개 강대국 중 어느 한 영토에 편입되어 버렸다.
처음 강력했던 나라는 위나라로 문후(文侯)·혜왕(惠王)은 널리 인재를 구하여 대규모 관개사업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지배한 지역을 군현화(郡縣化)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연(燕)이 강대해져 세력을 팽창함으로 인해 비로소 중원은 진· 초· 연· 제· 한· 위· 조의 7웅이 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그 중 진은 효공(孝公) 때 상앙의 변법에 의하여 크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성과를 올려 다른 나라를 누를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다.
합종연횡(合從連衡)이 제창된 것도, 또 전국4군(君 또는 4공자)의 활약이 있었던 것도 이 시기다. 이윽고 6국이 진(秦)에 굴복당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전국시대는 봉건제에 따르는 읍제국가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에 의한 고대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전국시대가 되자, 사(士)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의 정치를 장악하게 되어, 그 최고 지위에 상(相)이 놓이고, 그 임무는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의 전반을 총리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대부 등과는 달라서 세습이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군제(軍制)에 있어서도 이 때까지는 대부가 세습적으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반하여 장군이라는 직위가 신설되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군주에 의해 장군이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서주(西周)로부터 춘추시대에 걸쳐서는 정치·군사 양면에 있어서 대부가 세습적으로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에 반하여, 전국시대가 되자 정치·군사가 분리되고 저 마다의 책임자가 필요에 따라서 군주에 의해서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군주권이 강화되는 한편, 능력에 따른 관료군이 형성되었다. 특히 진에서는 다른 나라의 출신자도 적극적으로 관료로 채용하여, 내정개혁을 단행한 상앙,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장의(張儀), 시황제의 승상이 된 여불위(呂不韋) 등이 있었다.
춘추 말기에 나온 공자(孔子)는 노(魯)의 고관이 되어 개혁에 실패한 후, 여러 나라의 군주에게 그 정치학설을 설(說)하고 다니면서 그 학설이 실현되도록 운동했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고 하나하나의 나라를 초월해 중원 전체의 공감대와 유대감을 조성하는 공통된 문화·사상이 전반적으로 형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오로지 자기의 영지(領地)와 그 이익관계 속에서만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제한되고 단절된 당시 대부 계층의 보수적 시대관 내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철기(鐵器)의 보급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기 시작한 농업 생산력이 이 변동기의 자극을 받아 상공업의 발달을 재촉하면서 사회 경제의 여러 양상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시기였다.
국경을 초월한 대상인의 활발한 교류로 국경을 넘어 여러 나라에 판로를 가진 대상인들은 사치품을 판매하여 큰돈을 벌었다.
서민의 필수품인 철기나 소금 등을 제조·판매하는 대상업 수공업자들의 재산은 때로는 왕후(王侯)와도 필적한다고 일컬어진,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일이 통관세를 필요로 하는 국경이라는 것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점차적으로 국경이 없는 중원의 통일을 이면에서 추구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고 보여 진다. 이는 대상인들이 전국을 유세하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에서 보는바와 같이, 분립한 강국들이 서로 대립·항쟁하는 와중에서도 문화, 경제의 면에 있어서는 이미 중원이 하나의 세계로 성립되어 있었다는 점을 예시하고 있다.
춘추시대의 후반 이래, 청동기의 명문(銘文) 같은 장식성이 강한 문자에는 지방색이 엿보이지만, 평소에 죽간(竹簡) 등에 씌어 진 문자에는 상당한 통일성이 엿보이는 것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사회의 일대 변혁 및 눈부신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은 이 시기에 있어서의 생산력의 현저한 발달이었는데, 이 생산력의 발달 요인은 춘추시대에 시작된 우경(牛耕)의 보급과 전국시대에 보급된 철제농구의 사용이었다.
철제농구 이전의 농구는 거의가 석제나 목제였으며, 그것은 토질이 부드러운 황토지대에서의 경작에는 그런대로 쓸 수가 있었지만 수목을 베어내고 새로 경지(耕地)를 일굴 때는 극히 비능률적인 농구였다. 이 곤란을 타개하며 개간을 용이하게 하고 심경(深耕 깊이 파기)에 의한 토지의 생산력을 증대시켜 준 것이 철제농구이며, 그 사용을 계기로 농업은 놀랍게 진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에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춘추시대의 전반(BC 6~7세기)이며, 이때 제나라 동종(銅鐘)의 명문(銘文)에 ‘제철 노예 4천명’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영 제철사업은 꽤 대규모였다. 또 괭이, 삽, 가래 같은 농구의 주조는 전국시대에 들어와서 발달되었다.
우경(소를 이용한 경작)과 철기가 보급되어 생산이 부국강병의 근본으로 장려되자 이제까지 돌보지 않던 황무지까지 개척되며, 그로 인하여 관개용수로나 제방을 쌓는 토목공사가 일어났는데, 이것도 또한 철기에 의지하게 되어 농업생산은 한층 더 발달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춘추시대에는 나라의 제사를 끊으면 나라의 조상으로부터 저주 받는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나라를 점령해도 완전하게 멸망시키는 일은 많지 않고, 또 멸망해도 부흥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용서가 없어져, 한번 전쟁에 지는 일은 나라의 멸망에 직접 연결되었다. 그러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점차 7개의 대국들이 강자로 부상되어 갔다.
그 7개의 나라인 진(秦), 초(楚), 제(齊), 연(燕), 한(韓), 위(魏), 조(趙)를 지칭하여 후대에서 전국 칠웅(戰國七雄)이라 부른다.
진(秦)나라 (수도는 함양(咸陽), 영嬴씨 왕조) ? 년 or 221~BC 206년 ; ? 년간 or 15년간 존속
BC 16~11세기에 감숙성 동부의 천수 감곡에서 일어나, 서주초기에 서견구(西犬口) 일대에서 성을 쌓고 주 왕조에 속하여 주나라 변방 수비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서주말기인 BC 8세기에 지금의 감숙성 천수현 일대에 성을 쌓고 도읍으로 삼았다. 이후로 견수 근방의 미아원으로 이주했다가, 견수와 위수가 합류되는 곳에 있다가, 평양으로 옮겼다.
BC 677년엔 진목공의 아버지 덕공이 옹을 도읍으로 삼아 294년간 지내다, BC 350년 상앙의 건의로 효공이 함양(咸陽)으로 천도하여 BC 206년 항우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144년간 있었다.
함양은 관중지방의 중심지로 비옥한 토지에 풍부한 산물과 함께 삼면이 높은 산악으로, 북쪽으로는 400km에 달하는 황토구원이 있는 천혜의 요새다. 함양의 궁궐은 사방 200리에 달하는 회랑을 모두 연결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웅장한 도성이었다.
진나라의 선조 조보와 비자는 산시성 지역의 진(秦)땅에서 주왕을 위해 말을 기른 공을 인정받아, 주나라의 8대 왕인 효왕의 재위기간에 이곳의 진정에 봉해졌다 하지만 진은 말을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돈을 받는 속국이었다. 이후 주선왕은 진장공을 서수(西垂)의 대부로 봉했다.
BC 700년대 서융의 방위를 맡으며 주나라가 견융의 공격을 받을 때 유왕을 도왔고, BC 771년 주나라가 낙읍으로 천도할 때, 평왕을 호위한 공으로 산시성 서부지역의 제후로 승격되었다.
전국시대인 BC 4세기 중반 진효공은 상앙이 제시한 법가 사상에 따른 변법의 시행으로 행정개혁, 토지 지주제 폐지에 의한 중앙정부의 지방을 직접 통치방식으로의 전환 등으로 많은 개혁을 하여 군사적으로도 전술이나 무기, 운송체계 등이 발전하였다.
BC 247년 즉위한 영정은 이사(李斯)를 승상에 임명하고 국력을 증강시켰다.
BC 223년 최대의 적인 초나라를 멸망시켜, BC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여 스스로 전설상의 성왕인 삼황오제로부터 따온 이름인 황제(첫 황제이므로 시황제라 함)를 자칭했다.
시황제는 도량형과 문자의 통일, 군현제의 실시 등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또, 흉노 등의 북방족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각 나라가 독자적으로 만들던 장성을 정비해 만리장성을 건설했다. 만리장성은 강제노동으로 진행하여, 가혹한 노동과 극도의 법치주의로 불만이 높아져 반란의 싹을 길렀다. 흉노의 침략에 대항하여 북쪽을 공격하여 백성에게 입혀지는 피해를 최소화시켰고, 남쪽에도 원정대를 보내 현재의 베트남 북부까지 영토를 넓혔는데, 이것은 중국 왕조가 행한 남방 지배의 시작이 되었다.
진시황은 6국을 정복하여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후, 36군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며, 주변정복에 따라 군을 추가하여 46개군(郡)의 행정구역을 이뤘다.(42군 설과 48군 설도 있음) 또한 복속된 예전 나라에 대한 흔적을 지우려고 분서갱유도 일으켰다.
BC 210년 시황제가 사망하자, 환관 조고가 태자 부소, 승상 이사, 시황제의 혈족자 등, 권력자를 차례로 암살해, 어린 2세 황제를 세워 폭정을 하였다. 이로써 혼란해진 진나라는 진승, 오광의 반란이 발발하여 전국으로 퍼지면서 소란 상태가 되었다. 이에 2세 황제와 조고는 장한을 장군으로 토벌군을 보내자, 장한은 군사적 능력을 발휘해 진승과 초나라의 항량군을 격파했으나, 항량의 조카 항우와의 결전에 져서 포로가 되어, 함양으로 향하는 도중 반역의 기색을 보인다하여 항우는 진나라 병사 20만을 죽여 버렸다.
장한이 패하자 조고는 2세 황제에게 폭정의 오명을 씌워 암살하고, 자영을 세워 안정을 도모했지만 오히려 자영에게 주살 당했다. 그 후 유방이 함양에 들어가면서 자영이 항복하여 진은 멸망했다. 유방은 자영을 죽이지 않았지만, 나중에 함양에 온 항우가 자영을 죽이고 함양의 미녀와 재보를 약탈하고 불을 질러 함양은 폐허가 되었다.
초(楚)나라 (수도는 영(郢) →진(陳)→거양(巨陽)→수춘(壽春) ? ∼ BC 223년 ; ? or 19년간 존속
후베이성[湖北省]을 중심으로 활약한 나라로, 시조는 제(帝) 전욱(顓頊)의 자손 계련(季連). 웅역(熊繹) 때에 주나라의 성왕(成王)으로부터 초의 제후로 봉해져, 단양(丹陽)에 정착한 뒤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초나라 백성은 중원제국(中原諸國)의 백성과는 종족을 달리하는 남방의 만이(蠻夷:荊蠻)로 불려 멸시를 받았다. BC 704년 웅통(熊通)은 스스로 무왕(武王)이라 칭하였는데, 아들 문왕(文王)이 영(郢)으로 천도한 뒤, 더욱 국세가 신장하였다.
특히 장왕(莊王)은 BC 597년 진(晉)나라 군대를 필(邲:河南省 鄭縣)에서 격파하여 결국 중원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이로부터 초는 진나라와 남북으로 대립하여 약 1세기에 걸쳐 싸움을 계속하였는데, 그 사이에 양쯔강 하류에서 오(吳) ·월(越)이 일어나자 한때 초나라의 소왕(昭王)은 오나라에 밀려 도읍을 약(鄀)으로 옮겼다.
그 후 오나라가 월나라에 망하고, 또 월나라가 쇠퇴해지자 초는 다시 세력을 회복, 양쯔강 중 ·하류를 모두 차지하는 강국으로서 전국칠웅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위왕(威王)은 BC 334년 월나라를 멸하고 저장성[浙江省] 서쪽의 땅을 차지하였는데, 다시 제(齊)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세력을 중원으로 뻗치는 동시에, 영토를 사방으로 확대하였다.
이 무렵에 초는 7웅 가운데서 영토가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가장 많았다. 그러나 점차 진(秦)의 압박을 받아 BC 278년 수도 영이 함락되자 진(陳)으로 천도하였고, 다시 BC 241년 수춘(壽春:安徽省 壽縣)으로 옮겼으나 BC 223년 결국 진에게 망하고 말았다.
여기서 유래한 부복납간(剖腹納肝)은 “배를 가르고 간을 넣어 관을 삼는다.”는 말로서 죽어서 까지 동행하는 충성심을 뜻하며 지극한 충성심을 표현하는 고사성어다.
제(齊)나라 (수도는 임치臨淄) 1046~BC 221년 ; 826년간 존속
현재의 산둥지방으로 주의 무왕이 강태공에게 봉토로 지급한 나라이지만, 실제는 당시 이 지역의 이민족을 제압하고 다스렸다.
15대의 환공 때에 주나라의 혜왕으로부터 패자로 인정받았다.
25대의 장공이 재상인 최저의 아내와 사통하여 최저가 장공을 죽이고 그의 동생인 경공을 세웠지만 그도 후에 경공에게 죽었다.
경공은 안영을 재상으로 사마양저를 장군으로 등용했다.
여러 힘 있는 대부들이 있었으며 후대에는 진(秦)라에서 유민으로 들어온 전씨가 대부로 있다가 왕의 자리까지 뺏어서 마지막까지 대물림 하였다.
전씨 왕조의 6대 민왕은 팽창정책으로 이에 반발한 연나라를 주축으로 한 연합국이 악의를 사령관으로 대항하여 민왕이 죽고 거와 즉묵을 제외한 제나라 전국이 함락되었으나, 양왕이 즉위하여 계속 항전하여 제나라의 백성들이 추대한 장군 전단이 악의와 연나라를 이간하고 새로운 장수 기겁에게 승리하여 회복하였다.
그러나 양왕의 뒤를 이은 건왕은 진(秦)나라가 주변국을 점령해 가는데도 수수방관하다가 성읍국가에 불과한 위나라와 함께 BC 221년 진의 시황제에게 항복했다.
연(燕)나라 (수도는 계(薊) 1046~BC 222년 ; 824 년간 존속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외에도 오호 십육국 시대의 전연, 후연, 남연, 서연, 북연이 있다.
주나라의 시조 무왕 희발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의 동생 석(奭)을 연(燕)의 제후에 봉했다.
그러나 하남성(河南省) 지역에 동명의 연나라가 있어서 구별하기 위해 하남성 지역의 연나라를 남연(南燕)이라 하고, 소공석의 연나라를 북연(北燕)이라 하였으며, 또한 당시에는 연(燕)이 아닌 언(匽, 郾)으로 표기하였다.
소공석의 후손은 산동성 지역의 제후로 봉해졌지만, 주 성왕의 치세에 현재의 북경 부근으로 옮겼다. 이 때 현지에 있던 섬서성(陝西省) 출신의 한후(韓侯)라 칭하던 세력이 동쪽으로 옮겨졌데, 그들은 대부분 한씨(韓氏)였다. 그리고 연나라 동부에 기후(箕侯)라는 세력이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연나라의 속국이었다가 곧 멸망했으며, 연나라의 사대부 층엔 한씨와 기씨가 많았다.
BC 664년 북방의 산융에게 연나라가 공격 받았을 때, 연나라의 장공(莊公)이 이웃인 제나라 환공(桓公)에게 원군을 청하여 산융을 격퇴했다. 산융과 전쟁 후 연의 장공은 제의 환공에게 감사하다는 표로써 자국의 군사를 주어 통솔하게 허락 하였다. 당시에 군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천자(天子)인 주나라 왕(周王) 만이 가질 수 있었으므로,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제의 환공에게 건의하여 제나라의 영토를 일부를 연나라에 할양해 주었다. 이 일로 인하여 제 환공은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명성을 크게 얻었다.
전국 시대인 BC 334년 당시 연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 조선, 남쪽으로 역수(易水)까지 이천여리에 달했으며, 갑병 수십만과 전차 6백승, 기병 6천기를 낼 수 있었으며, BC 323년엔 왕으로 자칭했다.
BC 315년 연나라의 왕 쾌는 재상인 자지(子之)를 총애하여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선양 하였던 예로 삼아 자지에게 선양을 하였고, 이로 인해 태자 평이 거병하여 내전이 일어났다. 이 틈을 타서 제나라가 태자의 원군을 자칭해 침공하였고, BC 313년 태자 평과 자지가 살해되고, 연왕 쾌는 자살하였다.
BC 312년에 한나라로 달아났던 연왕 쾌의 서자인 공자 직이 제나라의 속국이 되는 조건으로 연왕에 즉위하였는데, 그가 연 소왕(昭王)이다. 소왕 때에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古朝鮮)을 침략하여 랴오닝성 만번한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BC 285년에는 연나라의 총사령관인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공격해 수도와 대부분 지역을 함락시켰다.
BC 222년 연왕 희의 아들 태자 단은 위나라 장수 형가(荊軻)와 진개(秦開)의 손자 진무양을 진(秦)나라에 보내 진 시황제(秦始皇帝)의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연왕 희는 요서,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진나라 군대에 포위되자, 시황제의 암살 주모자인 그의 아들 태자 단을 죽여 그 목을 진시황제에게 바치며 선처를 구했지만 진시황제는 듣지 않고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진나라가 중국 통일 후 내분으로 잠시 후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건국 되어 한나라도 주나라와 같은 방식으로 공신 혹은 황족을 지방의 제후로 삼았는데, 한고조 유방은 같이 자란 고향 친구 노관을 장안후(長安侯)로 했다가 다시 연왕(燕王)에 봉했다.
그러나 노관은 한나라를 배반하고 동호족에 투항하여, 동호(東胡)의 노왕으로 살다가 죽었다.
이 무렵 연나라 장수 위만도 1,000여명을 이끌고 요동, 랴오닝성으로 도망치고 위만조선을 세웠다. 위만 조선이 멸망 할 때 우거왕의 아들 장이 한무제에게 투항하고 기후국(幾侯國)에 봉분되어 연나라 지역을 다스렸다.
한(韓)나라 (수도는 신정(新鄭) 403~BC 230년 ; 173년간 존속
춘추오패의 하나인 진에서 분리된 나라로 위, 조와 더불어 삼진이라 일컬어진다.
영토는 허난성과 후베이성 지역으로 BC 239년 진나라의 장군 몽오에게 13개의 성이 함락되고 BC 230년 다시 진나라의 대공세로 한왕 안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멸망했다.
한비자를 저술한 한비는 한의 공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법가 이론의 집대성자이며 공자의 문인인 자궁의 문도였던 순자의 문인이며 순자의 성악설에 심취하여 순자로부터 사서육경을 배웠다.
한의 군주인 안에게 法, 術, 勢를 핵심으로 하는 그의 이론을 끝없이 진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진왕 정이 활용하였다,
위(魏)나라 (수도는 안읍(安邑)→대량(大梁 : 하남성 개봉(開封) 403~BC 225년 ; 178년간 존속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한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 일컬어지고. 영토는 사방 일천리에 달했으며, 한 때는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가장 인구가 많았다. 갑병 20만과 노예병 20만, 말 오천 필을 낼 수 있었다.
변법(變法) 운동의 선구자 이회, 관개사업에서의 서문표(西門豹)의 활약이 유명하다.
문후(文侯)가 이회를 등용하여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토지제도와 농업기술의 개혁을 단행하여 열국(列國) 중에서 최초로 부국강병의 길을 열었다. 이회는 또한 법경(法經)이라는 새로운 법률서를 만든 법률학자로서 변법(變法 법체제를 바꾸는 개혁) 운동의 선구자였다.
원래 주나라의 봉건제 밑에서는 정치는 덕(德)의 이념에 의해서 뒷받침 되었다. 그러나 전국시대는 덕의 이념이 아무런 권위를 갖지 못하고 힘에 의한 법술(法術)이 권위 있는 이념이 되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부국강병의 정책으로 나타나, 법률이 그 수단으로 등장하였다.
위나라는 전국 초기에 있어서 이 같은 새로운 이념의 연구와 실천의 중심지였다.
문후(文侯)의 인재 등용에 의해 서문표(西門豹)의 관개사업 추진 등으로 다른 6국을 앞질러 세력을 얻어, 위나라 수도 안읍(安邑)은 전국 초기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BC 225년 결국 진(秦)나라가 수공으로 공격하여 수도인 대량성이 침수당하여 위나라는 멸망했다.
조(趙)나라 (수도는 한단(邯鄲 : 하북성 한단시) 1046~BC 487년 ; 560년간 존속
원래는 진(晉)나라의 유력한 귀족이었으나 BC 400년대에 초에 한, 위, 조의 3대부가 갈라져 3분 되면서, 403년 주나라 왕(황제)으로부터 제후(왕)로 공인 받았다.
조의 전성기는 무령왕(326~BC 299년) 때며, 혜문왕 때에 진(秦)의 침입이 격심해져 도읍을 진양에서 한단으로 옮겼으나, BC 228년 진(秦)나라 군대에게 점령당하고 망명 갔던 왕자 가도 붙잡혀서 멸망했다.
전국시대 4공자 : 맹상군, 평원군, 신릉군, 춘신군
맹상군 (孟嘗君 이름은 전문 BC ?~BC 279년)
제(齊)나라의 왕족으로 진(秦), 제(齊), 위(魏)의 재상을 역임하였으며, 맹상군은 시호이며, 설(薛)지역에 봉지를 가져서 설공이라고도 한다.
제(齊) 선왕(宣王)의 서제(庶弟)인 정곽군(靖郭君) 전영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5월 5일에 태어난 아이는 부모를 해친다는 속설 때문에 장성할 때까지 아버지 몰래 키워졌다.
40여명의 형제가 있었으나 그 총명함을 인정받아 전영(田嬰)의 후계자로 인정되어 전영이 죽은 뒤 설(薛)의 봉지(封地)를 물려받았다.
맹상군은 재산을 털어 인재를 후하게 대우하여 수천의 식객을 거느렸으며, 현명함으로 이름을 널리 떨쳤다. 그래서 진(秦)의 소왕(昭王)이 그를 초빙하였으나 처음엔 응하지 않다가 두 번째 초빙에는 응하여 진나라의 재상(宰相)이 되었다. 하지만 진의 신료들이 그가 제(齊)나라 사람이므로 진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 모함하여 감옥에 갇혔다. 맹상군은 식객의 도움을 받아 진을 탈출하여 제나라로 돌아가 제의 재상이 되었다. 여기서 계명구도(鷄鳴狗盜)의 성어가 비롯되었다.
그러나 맹상군은 제 민왕(湣王)이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설(薛) 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 민왕이 송(宋)을 멸망시킨 후 맹상군을 제거하려 하자 위(魏) 나라로 가서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진(秦), 조(趙), 연(燕)과 연합하여 제(齊)를 공격하여 민왕(湣王)을 몰아냈으마, 새로 즉위한 제(齊) 양왕(襄王)은 맹상군을 두려워하며 가깝게 지냈으나, 그가 죽은 뒤에 아들들이 자리를 다투자 위(魏)와 연합하여 설(薛) 땅을 정벌하여 맹상군의 후손을 제거하였다.
사마천이 사기(史記)에서 설(薛) 지역의 풍속을 경험한 바를 적으면서 “세상에 전하기를 맹상군이 손님을 좋아하고 스스로 즐거워하였다고 하니 그 이름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世之傳孟嘗君好客自喜 名不虛矣.”라고 하여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성어가 비롯되었다.
평원군 (平原君 이름은 조승 ? ~ BC 251년)
전국시대 말기 조(趙)나라 혜문왕의 동생이며, 혜문왕 ·효성왕(孝成王) 시대(BC 298∼BC 245)에 3차례에 걸쳐 재상이 되었으며, 현명하고 붙임성이 있어 식객 3,000명을 거느렸다.
조나라 효성왕(孝成王) 7년, 진(秦)나라 군대가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해 곤경에 처했는데, 조나라가 3년 동안 지켜냈다. 그가 위(魏)나라와 초(楚)나라에 가서 신릉군(信陵君)과 춘신군(春申君)의 원조를 얻어 진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한단의 포위를 풀었는데, 이때 활약한 식객 모수(毛遂)가 스스로를 천거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며,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을 폈던 궤변가 공손룡(公孫龍)도 평원군의 식객이었다.
이웃집에 사는 절름발이가 절뚝거리면서 걷는 것을 보고 평원군의 애첩이 웃자, 절름발이가 평원군을 찾아와 항의하자 애첩의 목을 벨 정도로 선비들을 좋아했다.
신릉군 (信陵君 이름은 무기 ? ~ BC 243년)
위(魏)나라 소왕(昭王)의 아들이며, 안리왕(安釐王, 安僖王)의 이복동생으로 안리왕이 즉위 뒤 신릉(지금의 河南省 寧陵縣)에 봉(封)해져 신릉군으로 불렸으며 수천 명의 식객을 두었다.
안리왕 때에 진(秦)의 군대가 여러번 위(魏)를 침공하였는데, BC 273년 백기(白起)가 이끄는 진(秦)의 군대가 위(魏)를 침공하자, 당시 위(魏)의 재상(宰相)인 맹상군 전문(田文)이 천거한 망묘(芒卯)가 이끌던 위(魏)의 군대는 화양(華陽)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 일로 맹상군은 실각하고, 신릉군이 위(魏)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신릉군은 어질고 인재를 아껴 식객을 대할 때 자신을 낮추어 교만하지 않아서 3,000명에 이르는 식객이 있었으며, 그의 세력을 두려워한 주변국은 10년 동안 위(魏)를 침공하지 못했다.
BC 260년 진(秦) 소양왕은 장평에서 조(趙) 나라 군대에 큰 승리를 거두고, 조(趙)의 도성인 한단을 포위했다. 위기에 빠진 조(趙) 나라는 초(楚), 위(魏) 등의 주변국에 도움을 청했다. 신릉군의 누이는 조(趙)나라 혜문왕의 동생인 평원군의 부인이었다. 그래서 평원군은 위(魏) 안리왕과 신릉군에게 여러 차례 사신과 편지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안리왕은 진비(晉鄙)를 장군으로 10만의 군사를 조(趙)나라에 파견은 했으나, 진(秦)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진비에게 업(鄴)에 머무르며 사태를 지켜보도록 하였다. 신릉군은 파견한 군대가 조(趙)에나라를 서둘러 구원해야 한다고 간언하였으나 안리왕은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신릉군은 후영(侯赢)의 계책으로 안리왕의 총애를 받는 여희(如姬)의 도움을 받아 병부(兵符)를 훔쳐 진비의 병권(兵權)을 빼앗았다. 이 과정에서 왕의 명령을 의심하는 진비를 살해하고, 진비가 이끌던 군대를 이끌고 초(楚), 조(趙)의 군대와 연합하여 진(秦)의 군대를 물리치고, 조(趙)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여기서 절부구조(竊符救趙)라는 성어(成語)가 비롯되었는데, 이는 ‘병부를 훔쳐 조(趙) 나라를 구하다’라는 뜻으로 ‘큰 목적을 위해 절차나 정리(情理) 등을 무시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사실을 안 안리왕이 격분하자, 신릉군은 병사들만 위(魏)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10년 간 조(趙)나라에 머물렀다. 조(趙) 효성왕(孝成王)은 신릉군에게 다섯 개의 성(城)을 봉토로 주려 했으나, 왕의 명령을 사칭해 조나라를 구했으니 조나라에는 공이 있지만, 위(魏)나라에는 충신이 아니므로 교만해선 안 된다는 식객의 충언을 받아 이를 사양했다. 결국 조의 효성왕은 신릉군에게 호(鄗) 지역을 식읍으로 주고, 위(魏) \나라도 신릉군을 다시 공자(公子)로 봉했다.
BC 247년 세력을 회복한 진(秦)나라가 다시 위(魏)를 공격하자, 안리왕은 신릉군을 위(魏)나라로 돌아오게 하여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다. 신릉군은 초(楚), 연(燕), 조(趙), 한(韓) 등의 주변 나라와 연합하여 하외(河外)에서 몽오(蒙驁)가 이끄는 진(秦)의 군대를 물리치고, 함곡관까지 진군(秦軍)을 몰아냈다. 당시 5개국의 연합군을 이끌면서 신릉군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며, 또한 각 제후들의 식객들이 제시한 병법(兵法)을 정리하여, ‘위공자병법(魏公子兵法)’이라 불리는 이 병서는 25편이 엮었다지만 전해지지는 않는다.
신릉군을 없애려고 진(秦) 장양왕(莊襄王)은 신릉군에게 살해된 진비의 세력을 이용해 신릉군이 위나라의 왕이 되려 한다고 안리왕에게 모함하는 이간책을 썼다. 결국 상장군의 자리에서 물러난 신릉군은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 해 안리왕도 죽었다. 신릉군이 죽자 진(秦)은 몽오(蒙驁)를 보내 위나라를 공격해 20개성을 점령하고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그리고 위(魏)나라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여 BC 225년 도성인 대량(大梁, 지금의 河南省 開封)을 점령해 위(魏)를 멸망시켰다.
신릉군은 문지기나 백정의 신분도 구애하지 않고 인재를 아껴, 그들을 초빙할 때는 직접 수레를 끌고 상석을 양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도박하는 무리와 술집에 숨어 지내는 처사 모공(毛公)과 설공(薛公)을 초빙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숨어 만나지 않자 그들이 있는 도박장과 술집에 가서 함께 어울렸다. 때문에 사기(史記)에서는 신릉군에 대해 “천하의 여러 공자들도 선비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신릉군 만이 깊은 산과 골짜기에 숨어 사는 인물을 찾았고,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과의 사귐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제후들 사이에 그의 명성이 가장 높았던 것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평했다.
그리고 한(漢)고조 유방은 젊어서부터 신릉군을 존경하여 황제가 된 뒤에도 대량(大梁)을 지날 때면 신릉군에게 제사를 지냈고 高祖 12년엔 신릉군의 묘에 다섯 가호(家戶)의 묘지기를 두어 매년 4계절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춘신군 (春申君 이름은 황헐 ? ~ BC 238년)
사기(史記)에는 일찍이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배워서 견문이 넓었으며 변설(辨說)에 능했다고 했다.
초(楚) 경양왕(頃襄王)때에 진(秦)의 장수 백기(白起)가 초(楚)를 공격하자 사신으로 진(秦)에 파견되어 진(秦)의 소양왕을 설득하여 진(秦)과 초(楚)가 동맹을 맺게 하였다. 이후 태자 웅완(熊完)과 진(秦)에 볼모로 다시 파견되어 여러 해를 머물렀다. 초(楚)의 경양왕이 병들자 진(秦)의 재상인 범수(范睢)를 설득하여 웅완(熊完)을 초(楚)나라로 탈출시켰다.
얼마 뒤 경양왕(頃襄王)이 죽고 태자인 웅완이 고열왕(考烈王)으로 즉위하자, 재상인 영윤(令尹)이 되었으며, 춘신군(春申君)으로 봉해지며 회수(淮水) 북쪽의 12현(縣)을 봉읍으로 받았다.
BC 258년 진(秦)이 조(趙)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춘신군은 직접 원군을 이끌고 출병하여 진(秦)이 물러나게 하였다. BC 248년 회수(淮水) 북쪽 12현(縣)을 대신해 강동(江東)을 봉읍으로 받아 성(城)을 쌓았으며, 그 뒤 군사를 이끌고 노(魯)나라를 멸망시켰다. BC 240년엔 주변 나라들과 연합하여 진(秦)을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같은 해에는 수춘으로 천도(遷都)를 주도하였다.
춘신군(春申君)은 3,000명의 식객을 거느렸으며, 순자(荀子)도 춘신군에 의해 난릉현(蘭陵縣)의 령(令)으로 등용되었다.
사기에는 고열왕(考烈王)이 아들이 없었는데, 춘신군이 임신한 이원(李園)의 누이동생을 고열왕에게 바쳐 아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비밀이 밝혀질 것을 염려한 이원은 고열왕이 병으로 죽자 춘신군과 일족을 모두 살해하였다. 그리고 이원의 누이동생이 낳은 아들이 유왕(幽王)으로 즉위하였다.
한나라(漢 BC 206~220년)
전한(前漢) (수도는 섬서성 서안시 장안(長安), 유劉씨 왕조) BC 206년~AD 8년 ; 214년간 존속
중국의 첫 번째 제국인 진나라는 전국시대에 정복을 통해 통일을 이룩했으나, 첫번째 황제인 진 시황제가 죽은 뒤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다. 그 후 4년 동안 진 왕조는 반란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다.
두 명의 반란 주동자였던 초의 항우와 한의 유방은 18개의 제후국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의 패권을 잡기 위해 전쟁을 했다. 유방은 원래 정장(亭長)으로 의병을 일으켜 패공(沛公)의 자리에 올라, 초(楚)의 의제(義帝)를 섬기다가 세력이 커지면서 또 다른 거대 세력인 항우와 경쟁하였다.
처음에는 거듭 패배하였으나 한신(韓信), 장량(張良), 소하(蕭何)를 위시해 많은 인재를 기용하여 역전하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물리쳤다.
이로써 고조 유방이 신하들의 권유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진(秦)에 이어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하여 한(漢)왕조를 세웠다. 전한이 세운 첫 번째 수도인 장안은 뒤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 서쪽에 있어서 서한(西漢)이라고도 한다.
이후 한나라는 외척 세력으로 섭정하던 왕망이 세운 신에 의해 잠시 맥이 끊기면서, 전(서)한(BC 206~9년)과 후(동)한(BC 25~220년)으로 나뉜다.
한 왕조는 약 400년간 지속하였으며,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기 중의 하나로, 오늘날 중국인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한족 역시 이 왕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한나라는 중앙정부에 의해 직접 통치된 군과 몇 개의 제후국으로 나뉘었다.
전한 초기에는 서쪽지방은 수도를 포함하여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13개의 군으로 되어 있었고, 동쪽 지역은 10개의 제후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나라와의 전쟁을 도운 신하들을 달래기 위해 전한 고조는 그들을 왕으로 임명하고 봉토를 하사했다. 그러나 BC 157년까지 고조는 모든 제후왕을 유씨 일족으로 바꿔 버렸다.
BC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난 후 한나라는 BC 145년 제후국의 크기와 군사력을 제한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고, 제후국들을 더 작게 나누거나 새로운 군으로 만들었다.
제후국의 왕들은 더 이상 그들의 신하를 임명할 수 없었고, 오직 황제만이 임명할 수 있었다.
또한 제후국은 그들의 영지에서 이름뿐인 지배자로 세금의 일부만을 개인 수익으로 가질 수 있게 되어, 중앙정부에 의해 직접 통치된 군과 몇 개의 제후국으로 나뉘어졌던 것도, 서서히 세력이 감소되다가 오초칠국의 난 이후 제후국의 자치권이 아예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제후국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고 후한 때까지 이어졌다.
중국 대륙의 북쪽에서는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지도자였던 묵돌 선우(BC 209~174년)가 유라시아 초원의 동쪽지역의 민족들을 차례차례 정복하고 있었다. 그의 통치기 말에 그는 만주와 몽골 고원, 타림 분지 등을 지배했고, 사마르칸트 동쪽의 20개 이상의 지방을 예속 하에 두었다.
한 고조는 북쪽 국경을 통해 흉노와 거래되던 막대한 양의 한나라 산 철제 무기를 걱정했고, 결국 무역금지 조치를 내리고, 또한 국경지대에서 무역을 하던 흉노족을 공격했다. 그러자 흉노족은 BC 200년에 지금의 산시성 지방을 침입했고 백등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BC 198년에 흉노와 한은 화친조약을 맺고, 흉노의 지도자와 한의 황제는 결혼을 통해 동맹관계가 되었으나, 실제로 비단옷이나 음식 등의 공물을 흉노에게 바쳐야 했다.
비록 노상 선우(BC 174~160년)와 전한 문제(BC 180~157년)사이의 화친조약으로 무역시장은 다시 열렸으나, 많은 흉노족들은 조약을 무시하고 주기적으로 만리장성 남쪽의 한족 영토에 침입했다.
무제 때엔 다시 무역금지 조치가 내려졌지만, 흉노족은 그들에게 몰래 무기를 팔 상인을 찾았다. 이에 BC 121년 전한 무제는 흉노족과 무기 밀매를 계속해온 상인 500여명을 처형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무제는 대 흉노족에 대한 회의를 열었으나, 신하들의 의견은 화친을 이어가는 것이었고 무제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다음해 회의에서는 마읍에서의 매복 작전으로 선우를 암살하고 흉노족들을 물리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BC 133년 마읍에서의 매복 작전이 실패한 후, 무제는 흉노의 영토에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했다.
한나라 군대는 흉노의 요새를 차례로 점령해나갔고,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농업식민지를 만들었다.
BC 119년 한나라의 지휘관이었던 곽거병과 위청이 전투에서 승리해 흉노족들을 고비사막 북쪽으로 쫓아내고 전쟁은 끝이 났다.
무제의 통치기 이후에도 한나라 군대는 흉노를 상대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BC 51년 호한야 선우(BC 58~31년)가 한나라에 항복하고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호한야와 왕권을 놓고 다퉜던 질지 선우(BC 56~36년)는 현재 카자흐스탄의 타라즈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살해당했다.
BC 121년 한나라 군대는 흉노족을 하서주랑을 건너 뤄부포호 지역까지 쫓아냈다. 또한 BC 111년에 흉노족과 창족의 연합군이 북서쪽 지역에 침입하자 이를 물리쳤다. 그 해에 한나라 정부는 그 지역에 4개의 군(주천군, 장액군, 돈황군, 무위군)을 새로 만들었다.
국경지역의 대부분의 주민은 군인들이었다. 가끔씩 정부는 농부들을 국경지역의 정착지로 강제이주 시켰고, 또한 국가소속 노비들과 죄수들을 노역을 시키기 위해 보냈다. 또한 정부는 농민이나 상인, 지주, 고용된 노동자 등의 평민들이 자발적으로 이주하도록 권장했다.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흉노는 계속 패하여 급속히 피폐해졌지만, 한편 한나라도 한무제가 대외원정을 위해 개정한 법안을 악용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기 시작한 호족들에 의해 땅을 잃고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한나라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펼치기 이전인 BC 139년부터 BC 125년까지 행해진 외교관 장건의 탐험으로 한나라는 많은 이웃 국가들과 접촉을 했다.
장건은 대완 (페르가나), 강거(소그디아나), 대하(박트리아, 전에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등과 접촉했고, 이 국가들은 한나라의 사절단을 받았다. 이것은 로마 제국까지 연결된 실크로드의 기초가 되었고, 로마에 비단과 같은 한나라의 상품들을 수출하고 유리제품과 같은 로마의 상품들을 수입해왔다.
BC 115년경부터 BC 60년까지 한나라 군대는 타림 분지의 도시 국가의 지배권을 놓고 흉노와 전쟁을 벌였다. 한은 결국 승리했고, 기원전 60년 서역으로부터 실크로드를 지키기 위해 서역도호부를 설치했다.
BC 111년 남월국을 정복함으로써 한나라는 광둥, 광시, 베트남 북쪽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BC 109년에는 뎬국을 정복했고, BC 108년에는 현도군과 낙랑군을 설치했다. 2년에 전국적인 인구 조사가 행해졌고, 약 1,200만 가구에 5,700 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과 식민지 팽창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 위해 무제는 몇몇 사업을 국유화했다. 그가 독점한 것들에는 동전뿐만 아니라 소금, 철, 술 등이 있었다.
술의 독점은 BC 98년에서 BC 81년까지 지속되고 끝났지만, 소금과 철의 독점은 후한 초기가 되어서야 폐지되었다.
동전의 제조 독점은 한 왕조가 끝날 때 까지 지속되었다.
정부의 독점은 개혁적 정치를 펼치는 파벌들이 정권에 영향력을 얻고 나서야 폐지가 되었다.
개혁주의자들은 무제의 치세기간과 그 뒤를 이은 곽광의 섭정기간동안 정권을 잡기 위해 보수주의자들과 싸웠다.
보수주의자들은 민간사업에 개입해서 얻는 많은 수익을 바탕으로 외국에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길 주장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후 정책을 바꿔 외국을 상대로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예산을 줄였으며 사업가들에게 부과한 세금을 낮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