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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박정희 1 (중일일보사)
2006/05/1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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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박정희 1 (중일일보사)
1.북 중화학 우위 선전영화에 자존심 손상
'10월 유신(維新)'이라는 대정변을 몇달 앞둔 72년 2월 하순 어느날 오후 중앙정보부 회의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을 비롯한 내각. 청와대비서관. 공화당 간부등 정부. 여당 관계자 30여명이 북한 선전용 산업영화 한편을 관람하고 있었다.
북한이 자체 제작해 해외공관에 배포한 필름 가운데 3편을 중앙정보부가 입수,3시간짜리로 재편집한 것이었다. 영화는 벼농사 장면부터 열리고 있었다.
바둑판 같이 경지정리가 잘 된 논에서 부녀자들이 트랙터로 논을 갈고 자동기계로 모를 이앙하고 있었다. 곡식수확도 모두 기계로 했는데 마치 미국의 농촌인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화면은 북한 최대규모의 김책(金策)제철소로 이어졌다.
자동화된 거대한 기계가 석탄을 채굴해 컨베이어벨트로 운반하고 용광로에서는 쇳물이 쏟아져 나와 곧바로 철강재가 돼 흘러내리고 있었다.
각종 크고 작은 기계들이 제작돼 나오는 장면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자동차. 트랙터. TV. 냉장고. 세탁기등이 다량 생산되고 있었다.
비료.시멘트공장에는 제품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비날론. 직물공장에서는 각종 섬유제품들이 쉴새없이 흘러나왔다. 조선소에서는 거대한 선박이 진수되고 전기기관차와 심지어 5만KW 발전기까지 자체 생산하고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朴대통령도 줄담배를 피워 상영도중 세차례나 재떨이를 갈아야만 했다.
참석자들 모두 영화에 압도됐다.3시간의 영화상영이 모두 끝났는데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모두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참에 朴대통령이 입을 열었다.그의 표정은 다소 일그러져 보였고 목소리 또한 퉁명스럽게 들렸다.
“崔장관,어떻게 생각하시오?” 질문을 받은 사람은 당시 과학기술처장관 최형섭(崔亨燮.77.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씨였다.그는 얼떨결에 우선“예”하고 대답한 다음“대단합니다…”라고 말하고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영화에서 받은 충격과 실망감을 표현하는 朴대통령 특유의 몸짓이었을까.崔장관의 짧은 답변을 듣고난 朴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혼자 회의실을 떠나버렸다.
사실 朴대통령은 이날 시사회를 통해 우리 경제가 북한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확인해 보려는 생각을 내심 가지고 있었다.朴대통령은 70년 이후부터는 한국경제가 북한을 완전히 따돌리기 시작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시사회에 당정(黨政)주요 인사들을 대거 참석시킨 것도 대통령의 그런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시사회는'경제 대통령 박정희'의 믿음의 탑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말았다.말하자면 북한의 실상을 통해 우리 경제의 상대적 우위를 확인해 보려고 판을 벌였다가 거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돼버린 것이었다.
이것이 이날의 시사회 풍경이었다.훗날 최형섭 전 장관은“북한의 산업기술이 이론적 바탕 위에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 보다 다분히 기능적 측면을 강화시킨 것이었지만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당시 영화소감을 털어놓았다.김정렴(金正濂.73)당시 대통령비서실장도“화면에 비춰진 북한의 군수산업은 확실히 우리보다 앞서 있었다.자체 생산하는 장거리포.탱크.AK소총.다발총 등이 무기공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당시 우리의 중화학공업은 기껏해야 포항종합제철과 울산 석유화학공장 등을 짓고있는 정도였는데 북한은 김책제철소를 비롯해 상당한 규모의 중화학공업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여타 공업시설이나 공장 규모도 외관상으로는 대단해 영화를 관람한 대다수 사람들이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게 사실”이라고 말했다.그러나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朴대통령이어서 그 파장이 쉬 가라앉지 않았다.당시 청와대 경제제2수석 비서관이던 오원철(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씨의 증언.“다음날 결재를 받으러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다.朴대통령은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임자,어제 본 영화 어떻게 생각해'하며 질문을 던졌다.
나는'각하,영화는 잘 찍었습니다만 내용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대부분의 분야에서 우리가 훨씬 앞서 있습니다.중공업분야가 좀 뒤졌는데 2~3년내에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朴대통령은'그래?'하고는 나를 쳐다보았다.무척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다.내가 설명을 계속하려고 하자'吳수석,다른 사람들도 모두 알아야 돼.요 다음 안보대책회의때 임자가 직접 설명하도록 해!'하는 것이었다.”
안보대책회의는 朴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회의로 행정부측에서는 국무총리.외무부장관.중앙정보부장등이,청와대측에서는 비서실장.대통령 특별보좌관.수석비서관등이 참석했다.
갑자기 임무를 부여받은 吳수석은 대통령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김광모(金光模.64.테크노서비스 사장)비서관을 급히 불렀다.그는 당시 경제제2비서관으로 吳수석을 직접 보좌한 핵심 참모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吳수석이 황급히 나를 찾더니 급히 안보대책회의에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서둘렀다.吳수석은'어제 각하께서 북한영화를 보고 대단히 실망하신 것같다.내가 보기에 그 영화는 지나치게 과장됐다.우리가 두차례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우리 산업이 북한에 비해 그렇게 뒤지지 않았는데 이것을 모르는 것같다.우리가 대통령께 용기를 주자'고 했다.”
두사람은 서둘러 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했다.마침내 안보회의가 소집되고 북한경제가 의제에 올랐다.제목은'북한의 자력갱생및 자급자족 정책'. 브리핑은 吳수석이 맡았다.그의 브리핑 요지.“북한 경제정책의 기본 이념은 자력갱생이다.여기에는 자급자족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북한의 산업기반은 남한에 비해 다소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우선 전력생산이 많았고 석탄.철광석.비철금속등 광산자원도 남한에 비해 풍부하다.이들 자원을 활용한 중화학공장들이 1930년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북한의 동해안 일대는 일제말기엔 거의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의 공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김일성(金日成)은 이런 기반 위에서 자력갱생 정책을 밀고 나갔다는 결론이 된다.” 이어 吳수석은 북한 경제가 안고 있는 취약점을 지적해 나갔다.
“북한 산업의 기초는 전력.석탄.철광석.기존공장,그리고 인력등 다섯가지다.자력갱생의 원리에 따르면 이들 자원을 가지고 거의 모든 제품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그리 되면 기존자원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그러나 부존자원에는 한계가 있고 기초자원이 고갈돼 공급차질이 생기면 경제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거기다 다섯가지 원천자원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물건도 허다하고,만든다 해도 비효율적일 때가 많다.그 한 예가 석유화학 제품이다.” 브리핑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긴장은 여전했다.침울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김일성도 수출이 급해진 것 같습니다.원수로 생각하던 일본으로부터 돈을 꾸어 섬유기계들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북한으로 진격하고 있는 일본의 게다짝(일본판 나막신)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朴대통령은 파안대소,소리를 내어 웃었다.
“자력갱생은 소련.중국은 시도할 수 있겠지만 북한에는 맞지 않다.또 기술이나 경영의 자력갱생은 불가능하다.억지로 강행한다면 세계 수준과 격차가 벌어질 것이고 세계 수준과 격차가 벌어지면 경쟁력이 없게 된다.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북한도 수입해야 할 물품이 늘어날 것인데 수출이 이뤄지지 않으면 외화는 바닥나고 경제가 파산하게 된다.” 2시간에 걸친 브리핑을 끝내자 朴대통령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吳수석의 증언은 계속됐다.
“내가 브리핑을 마치자 朴대통령은'북한경제도 알고 보면 별것 아니네'하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러고는'吳수석,북한의 수출상태가 어떤가?'라고 물었다.내가'76년에 약 5억~6억달러가 될 것으로 추측한다'고 답변하자 朴대통령은'북한인구가 우리의 약 절반이니 우리나라 70년도 수준이 되겠구먼'하고 말했다.
이어 참석자들을 둘러보며'남북한 대결이라는 것은 국력대결입니다.국력신장만이 북한에 승리하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우리가 지금과 같은 상태로 5~6년간만 노력한다면 우리나라 경제는 모든 면에서 북한을 완전히 압도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2.경제개발 시간벌기 위한 북 발목잡기
1970년 8월15일 광복 제25주년 경축행사가 열리고 있는 중앙청 앞 광장. 3만여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평화통일의 기반조성을 위한 접근방법에 관한 구상을 밝히겠다" 고 운을 뗀 뒤 이렇게 역설했다.
"…긴장상태의 완화 없이는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에의 접근은 불가능한 것이므로 무엇보다 먼저 이를 보장하는 북괴의 명확한 태도표시와 그 실천이 선행돼야 합니다. <중략> 이러한 우리의 요구를 북괴가 수락,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인정할 수 있을 때 나는 인도적 견지와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으며 남북간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도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 시행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는 바 입니다. "
朴대통령은 이날 경축행사 직후 있을 서울 남산 제1호 터널 준공식 참석을 앞두고 가벼운 흥분을 가라앉히며 준비된 연설문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는 다음 대목에서 한껏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중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며 그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용의는 없는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
박정희의 이같은 경축사는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는 셈이 됐다.
뿐만 아니라 휴전선상의 장벽철폐 용의를 조건부로나마 밝히고 평화적인 선의의 경쟁을 공식제의했다는 점에서 국내외에 엄청난 충격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선의의 체제경쟁 제의 매클로스키 미국무부 대변인은 8월20일자 성명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취해지는 모든 조치를 환영한다" 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밝혔다. 당시 국내 상황에 비춰볼 때 이같은 획기적인 발표는 실정법상 형사소추의 대상이 되지 않는, 오직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초헌법적인 통치행위였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등 대공 (對共) 방위를 위한 법적 장치가 시퍼렇게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병사들은 아침 점호때마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을 외치며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朴대통령 자신도 "통일노력의 본격화는 70년대 후반에나 가능할 것" 이라는 점을 수차에 걸쳐 역설해왔고 통일은 '승공이나 멸공' 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일관되게 견지해왔던 터였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왜 이처럼 자기모순적인 평화통일 구상을 결심하게 됐을까. 그것은 과연 朴대통령의 독자적인 구상이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사전 협의아래 이뤄진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8.15선언은 미국의 의도와 대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朴대통령의 전략이 맞아 떨어져 추진된 일종의 '시간벌기 전략' 인 셈이었다. 그러나 선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겸 대변인이었던 강상욱 (姜尙郁.70.육사9기.한국물류센터회장) 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70년 1월초 각하께서 나와 비서실장을 불러 갔더니 '분야별로 70년대 전망과 비전을 제시해 올리라' 고 지시하셨습니다. 특히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여는 방안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후 4월께 제가 '올해 광복절 때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과감한 제안을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라고 제안을 했지요. 그랬더니 '8월이면 너무 빠른 것 아닌가' 하시면서 관계기관과 상의해 만들어보라고 하셨습니다. " 강상욱씨는 우선 초안을 만들기 위해 윤석헌 (尹錫憲) 외무차관과 강인덕 (康仁德.65.극동문제연구소장) 중앙정보부 해외정보국장을 자택으로 불러 朴대통령의 구상을 전달하고 기획안 작성에 착수했다.
며칠후 오전10시 청와대 비서실장실에서 실무자회의가 소집됐다. 그러나 회의는 처음부터 거센 반발에 부닥치고 말았다.
이날 회의 상황을 강인덕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가장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것은 법무부 쪽 사람들이었어요. 이호 (李澔.97년 작고) 법무장관, 신직수 (申稙秀.70.전 중앙정보부장) 검찰총장, 한옥신 (韓沃申).이종원 (李鐘元.71.전 법무장관) 씨등 쟁쟁한 검사들이 '어떻게 북괴를 대화 상대로 인정할 수 있느냐' 며 반론을 폈습니다. '현행 반공법상 남북대화 제안은 위법인데 대통령께서 대화선언을 하게 되면 당국의 통제력이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는 거였죠.
뜻밖의 상황에 부닥친 강상욱 대변인은 "남북문제를 풀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법이야 결심만 하면 바꿀 수 있는 것 아니냐. 현행법 테두리만 자꾸 고집하면 영원히 대화가 안된다" 며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및 법무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姜대변인의 사상이 의심스러워…" 하며 사뭇 감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는등 분위기가 살벌했다고 姜씨는 당시를 회고했다.
오전 내내 결론이 나지 않자 실무진은 국수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장소를 대통령 집무실로 옮겼다. 朴대통령은 시종일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姜씨의 계속된 증언. "외무부쪽에서는 대통령의 결단이 중요하다고 했고 법무부쪽에서는 여전히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고집했습니다.
중앙정보부쪽에서는 '할수도 있는 시기가 되지 않았는가' 라고 다소 모호한 입장을 표시했어요. " 결국 오후 6시가 넘어도 진전이 없자 이윽고 朴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이번 광복절날 남북관계에 물꼬를 트는 모종의 선언을 꼭 하고 싶다. 현행법상 문제가 있지만 내 결심이 서면 가능하지 않겠나. 대화를 구체화하는 쪽으로 조치를 취해 달라" 고 참석한 장관들에게 당부했다.
"대화 물꼬트고 싶다" 8.15선언은 무엇보다 1, 2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수에서 얻은 朴대통령의 대북 (對北)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무렵 朴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지속적인 고도성장과 남북간 긴장완화였다. 고도성장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남북간 긴장이 해소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대남 적화노선을 어떻게든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김일성을 모종의 미끼로 유인해 일단 시간을 확보해 놓은 다음 경제력을 월등하게 키워 놓으면 통일은 싸우지 않고도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이 朴대통령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박정희를 가장 괴롭힌 것은 북한의 빈번한 무력도발과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측 군사력의 상대적인 열세였다.
▶청와대 기습사건 (68년1월21일) 과 그 이틀후 발생한 ▶미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울진.삼척 무장공비사건 (68년11월2일) 등 대규모 무력도발이 68년 한햇동안 집중 발생했다. 바로 이 1968년을 김일성은 '전쟁준비의 해' 로 정했고 박정희는 '대 (大) 국토건설의 해' 로 결정했다. 그만큼 68년을 보는 남북 두 정상의 시각은 달랐고 목표 또한 대조적이었다.
여기에 또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북한이 68년부터 종전의 남한출신 고정간첩 남파라는 고전적인 방법 대신 1.21사태처럼 본격적인 대남침투 유격전술로 바꾼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朴대통령은 8.15선언을 통해 70년대를 '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 로 공언하고 있는 김일성의 발목을 어떤 방법으로든 묶어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8.15선언을 김일성은 과연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였을까. 오랫동안 대남사업에 관계하다 망명한 전 노동당 간부 황일호 (黃日鎬.75.해외거주) 씨는 당시 김일성의 첫마디가 "8.15선언은 우리의 발목을 잡아두자는 속셈이야" 라며 그 의도를 꿰뚫어 보았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김일성은 8.15선언이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미국과 박정희의 시간벌기 술책이라고 봤으며 '선의의 경쟁 제의' 에 대해서도 닉슨의 평화주의 노선에 편승, 평화의 너울을 쓰고 민족을 영구 분열시키려는 책동으로 규정했다" 고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했다. 黃씨는 망명전 북한에서 차관급까지 지낸 김일성의 측근으로 지금까지 망명한 사람들중 황장엽 (黃長燁) 다음 가는 최고위급 인사다.
北, 주한미군 철수 고집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듯이 그 당시까지 김일성은 통일을 위해서는 주한미군 철수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언급되지 않은 8.15선언에 대해 처음부터 이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만큼 북한측이 이를 거부하고 나온 것은 예견된 결과였다. 8.15선언 1주일 후인 8월22일 북한은 당기관지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남조선에 인민정권이 수립되거나 혁신세력이 집권하지 않는한 여하한 대화도 불가능하다" 며 거부의사를 공식으로 밝혔다.
아무튼 8.15선언은 남북 분단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으며 2년후 있을 이후락 (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의 역사적인 평양방문과 7.4남북공동성명등 남북간 대화국면으로의 일대 전환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3.김일성 박정희 속셈 읽고 선수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권좌에서 밀려나 주일 (駐日) 대사로 나가있던 이후락 (李厚洛) 을 70년 12월21일 중앙정보부장으로 불러들여 두가지 과제를 맡겼다.
첫째는 국내 정치체제의 대변혁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과 대화를 열 수 있는가를 타진하라는 것이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북한의 무력도발도 다소 주춤해진 것으로 보아 북한 내부에도 무엇인가 변화가 있는 것같다. 대화가 가능할 것인지 연구해 보라" 는 대통령 지시는 결연했다.
이후락은 "중앙정보부는 국가안보의 보루다. 국가안보는 대통령의 안보다. 대통령을 보위하는 것은 바로 국가를 보위하는 것이다. 우리는 朴대통령을 보위하는 전위대다" 고 선언했다.
취임인사라기보다 3선개헌의 와중에서 일시 밀렸던 이후락의 대통령 '그림자 자리' 복귀선언이었다.
김형욱 (金炯旭) 정보부장 실각후 김계원 (金桂元) 부장 아래서 침체해 있던 남산 (정보부) 이 새로운 실력자를 맞아 힘의 회복을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음날 확대간부회의에서 이후락은 좀더 구체적인 북한 연구과제를 제시했다.
"지금 북한부서의 활동이 느슨하다. 朴대통령의 8.15선언이 넉달이나 지났음에도 아직 북한의 대응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북한의 사정은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다. 북한을 이기기 위해서는 북한을 알아야 한다. 한부서에 예산지원을 늘리겠다. 예산은 걱정마라.
앞으로 간부회의 때는 북한동향 보고를 반드시 하도록 하라. 북한부서만 아니고 정보부 모든 간부는 북한전문가가 돼야 한다. "
그는 북한부서를 따로 불러 "대북 (對北) 협상을 제안하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연구.제시하라" 는 극비지시를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이었던 정홍진 (鄭洪鎭.63.현 송원장학회 이사장) 씨의 증언.
"이후락부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중정 북한국을 중심으로 특수임무팀이 구성됐어요. 김달술 (金達述) 부국장.정운학 (鄭雲鶴) 과장등이 핵심 실무자였지요. 보안유지를 위해 서울 이문동 인근의 호텔을 잡아 놓고 극비리에 연구작업을 진행했습니다. "
특수임무팀은 체육.문화.경제교류등 남북한간의 갖가지 교류방안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격론 끝에 당시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남북 이산가족찾기사업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또 남북적십자회담이란 대화방식을 채택키로했다.
정홍진씨는 "적십자회담이 인도주의적 회담이기 때문에 서로 체면이 설 수 있고 국제관례도 있다는 점이 감안됐다" 고 설명했다.
이산가족문제라면 우리측에 불리할게 없고 국민으로부터 폭넓은 호응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도 나왔다.
특수임무팀이 이산가족찾기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할 것을 건의하자 이후락부장은 곧바로 구체적인 계획과 준비를 지시했다.
7월초 최종안이 마련됐고 李부장은 이를 朴대통령에게 브리핑했다.
朴대통령은 정치적 파장을 우려해 "극비리에 신중하게 추진하라" 고 지시했다.
최두선 (崔斗善)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제안연설문 초안 준비를 마친 것은 7월 하순. 제의의 D데이는 71년 8월15일 광복절. 그러나 뜻밖의 일이 생겼다.
우리의 준비가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북한이 먼저 선수를 치고 나왔던 것이다.
8월6일 김일성 (金日成.북한수상) 은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를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모든 정당.사회단체및 개별인사들과 아무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다" 고 선언했다.
집권여당을 대화 상대로 포함시켜 "대화를 하자" 는 메시지였다.
북한의 이같은 기습제의는 어떻게 나왔을까. 우연일까 아니면 남쪽의 준비를 간파한 것일까. 당시 남북관계에 관여했다가 해외로 망명한 황일호 (黃日鎬.75.해외거주) 씨는 그 비밀을 26년만에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71년 미국 중앙정보국 (CIA) 과 선이 닿아있는 한국인 재미학자 여러명이 북한을 방문했어요. 그들이 북의 생각을 떠보면서 남쪽이 적십자회담 제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려주었지요. 7월 하순에는 재일조총련으로부터 적십자회담 제의가 8월15일로 잡혔다는 정보가 평양에 날아들었어요. "
북한당국이 8월15일 서울측의 적십자회담제의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먼저 대화제의에 나섰다는 증언이다.
그런데 김일성은 68년 청와대 기습사건을 정점으로 한 강경 무력도발에서 왜 갑자기 남북대화로 선회했을까. 남측의 적십자회담 제의에 관한 정보를 사전 입수하고 선수를 쳤다는 증언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김일성의 의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부분을 88년 귀순한 김정민 (金正敏.50.전노동당조직지도부 직속 대양무역상사장) 씨의 증언을 통해 실마리를 찾아보자.
"69년 1월6일부터 14일까지 열린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회의에서 대남무력도발의 책임을 지고 민족보위상 김창봉 (金昌奉.대장).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 (許鳳學.대장) 등 군핵심인사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습니다.
이에 앞서 68년 8월 남쪽에서 '통일혁명당사건' 이 터져 북한이 남조선혁명의 주력으로 상정해 심혈을 기울여 조직한 지하당이 붕괴됐어요. 통일이 멀지 않았다고 판단되던 시기에 북한의 군최고위층에 구멍이 뚫리고, 남쪽의 '혁명역량' 이 붕괴된 겁니다. 당연히 내부를 정비할 시간이 필요하게 된 겁니다. "
당시 북한정세를 이해하는데는 69년 1월 인민군 당위원회 회의를 비중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70년대를 적화통일의 연대로 설정하고 60년대부터 4대 군사노선을 앞세워 군비증강에 대대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기습공격을 위한 특수게릴라부대를 양성하고 사회혼란과 거점확보를 위해 남한에 빈번히 침투시켰다.
통일을 대비해 남쪽에서 활동할 10만여명의 당원교육도 끝마친 상태였다.
북한은 미군이 베트남전쟁에 깊숙이 빠져들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더라도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한.일협정 반대운동, 6.8부정선거 반대투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68년의 1.21사태나 울진.삼척 무장공비사건은 이런 분위기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 청와대기습은 노동당에 충격을 주었던 것같다.
황일호씨의 증언. "1.21사태가 알려지자 허봉학은 자기 부서는 관계없다며 '특수정찰국쪽에서 한 것같다' 고 김일성에게 보고했어요. 즉각 김창봉에게 사건 내막을 조사,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지요. 그는 1월23일 푸에블로호사건이 터져 긴장이 고조되자 보고를 차일피일 미뤘어요. 한달쯤 뒤 그는 '1명 체포, 3명 복귀, 나머지는 다 희생당했다' 고 보고했어요. 김일성은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다' 고 질책하며 '다시는 이같은 사태가 없도록 하라' 고 지시했어요. "
그런 일이 있고 몇달 뒤 김일성은 김창봉등이 김영주 (金英柱) 당조직부장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김영주에게 군검열을 지시했다.
당 핵심간부 2백여명으로 구성된 군 검열단의 두달에 걸친 검열결과 김창봉등 군강경파들이 김영주를 밀어내고 2인자 자리를 차지하려 했음이 드러났다.
그 마스터 플랜은 '남조선 해방과 통일전략계획' 과 연관돼 있었다.
이 계획에는 '제2의 6.25계획' 으로 불릴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남한의 사회혼란과 통치기구 마비를 틈타 대중폭동을 일으켜 '임시혁명정부' 를 선포하고 이를 기반으로 총선거를 실시, 적화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어요. 1.21사태나 울진.삼척사건등은 바로 남쪽의 통치기구를 마비시키려는 것이었죠. 그들은 결정적인 공을 세운뒤 김영주를 몰아내고 김일성 다음의 2인자, 즉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어요. "
당시 북한 군검열단에서 활동했던 黃씨의 증언이다.
이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자 김일성은 인민군 당위원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회의 첫날 보고자로 나선 오진우 (吳振宇.대장) 총정치국장은 자신의 상관인 김창봉.허봉학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吳는 이들이 군내부의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방해했고 당의 4대 군사노선을 지연시켰으며 군내기강을 문란케 했다고 공격했다.
김창봉은 이런 비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공작선이 붙들리거나 격파당하기도 했지만 이웃집 드나들듯이 성공한 공작사례가 더 많았다. 무장소조활동에서도 체포된 것 못지않게 무사귀환한 예가 더 많다.
우리는 남조선의 내부허점을 이용하려고 했다. 이 계획은 옳다" 고 항변했다.
회의 마지막날 김일성은 '군에 대한 당통제 강화' 란 연설을 했다. 매우 화가 난 목소리였다고 한다.
그는 "김창봉.허봉학등은 군대 내에서 당의 정책과 당의 노선.사상을 다 뒤집어 놓았다" 며 "당을 무기력하게 만든 놈들은 이유불문하고 모가지를 떼야 한다" 고 열을 냈다.
김일성은 아직 적기 (適期)가 아닌데 무장게릴라를 대거 남쪽에 내려보내 특수부대의 상당부분을 희생시켰던 사실에 화가 났던 것이다.
김일성은 김창봉등 군강경파들을 대거 숙청하고 내부정비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대화와 전쟁준비를 병행하는 화전 (和戰) 양면전략으로 선회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4.김일성 이후락 불러 박정희 의중 타진
72년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마침내 냉각된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여는 결단을 내렸다.
4월26일 그동안 극비리에 진행된 북한과의 접촉 결과를 보고받고 이후락 (李厚洛) 정보부장에게 특수지역 출장에 관한 친필훈령을 내린 것이다.
"남쪽정세가 절대 우위라는 자신으로 대화에 임함으로써 북이 우위라는 환상적 기 (氣) 를 꺾고 평화통일을 위한 여러 의견을 교환해 볼 것. 이번 여행에서는 주로 상대방 요로 (要路) 의 사고방식과 북한의 실정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둘 것" 이 그 요지였다.
"김영주가 만나잡니다"
이후락의 북행은 남북적십자회담의 막후 비밀접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측 정홍진 (鄭洪鎭.중정 협의조정국장) , 북측 김덕현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지도원) 은 비밀교섭을 통해 고위급 회담을 위한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양측은 교섭 4개월만인 72년 3월20일 이후락과 김영주 (金英柱) 간의 고위급 직접회담에 완전합의했다. 정홍진은 3월28일 고위급 회담의 실현을 위한 실무작업을 위해 먼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했다. 그는 노동당 조직부장 김영주와 두차례 만났다. 김영주는 鄭을 한껏 치켜세우며 朴대통령과 당시 김일성 (金日成) 수상 (72년11월이후 주석으로 승격) 의 정상회담까지 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31일 오후 서울 도착 즉시 정홍진은 이후락과 함께 청와대로 달려갔다. 鄭씨가 전하는 그날의 대화내용. "대통령각하, 북쪽의 반응이 대단히 적극적입니다. 김영주가 이후락부장과 평양 또는 원산에서 만나자고 제안했습니다. 다음달에 김영주의 친서를 가진 사람이 서울에 올 것입니다.
" "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로) 수고했어. 그래 평양을 가본 느낌이 어떤가?" "전반적으로 주민들이 느릿느릿하고 측은해 보였습니다. 사진에서 본 노농적위대의 생기있는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고 저런 사람들이 총을 메고 있으면 별로 무서울 것이 없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회담이든 뭐든 밀어붙이면 자신이 있습니다. "
"鄭군, 공산당을 너무 얕잡아 봐선 안돼. 공산당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신중하게 추진하라구. 고생이 많았어. 오늘은 마음 푹 놓고 술 한잔 하게. "
다음달 19일 예정대로 김덕현은 김영주의 친서를 휴대하고 3일동안 서울을 비밀리에 방문하고 돌아갔다. 이후락과 김영주간의 고위급회담 준비가 막바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로부터 6일이 지난 5월2일 이후락은 판문점을 넘어 평양에 도착했다.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 낸 이후락의 3박4일간 평양밀행중 클라이맥스는 이후락과 김일성의 회담.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밤중 갑작스럽게 이뤄진 두사람의 회담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후락도 입을 열지 않고 있고 김일성은 죽었다. 이 미스터리를 푸는데 망명한 황일호 (黃日鎬.75.해외거주) 씨가 25년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후락이 5월3일 저녁 평양대극장에서 혁명가극을 관람한 후 김영주와의 2차회담을 마치고 모란봉초대소에 돌아온 것은 밤 10시10분. 같은 시각 김일성은 김영주를 참석시킨 가운데 당 정치위원회 확대상무위원회 회의를 열고 있었다.
대남 (對南) 관계를 다시 총체적으로 검토하는 자리였다. 그날 밤 김일성이 왜 예고없이 12시가 넘어서야 이후락을 만났는지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김영주는 이후락과의 두차례 회담결과와 그동안 지켜본 행적에 대해 보고했다.
회의참가자는 김일성.김일 (金一).최용건 (崔庸健).최현 (崔賢) 등 정치위원과 김영주.김중린 (金仲麟).유장식 (柳章植) 등 대남 실무책임자들이었고, 황일호씨도 실무자로 배석했다. ...
黃씨의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본다.
김일성 : 회담 진행상황은 어떤가.
김영주 : 이후락이 미국의 사주를 받은 것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곳을 관람하는 태도를 보니 특별히 책잡을 데가 없습니다.
유장식 : 남쪽 대표단의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수상동지를 '최고의 애국자' 라고 말했습니다. 대극장에 가서 혁명가극을 관람할 때는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이번에 뭔가 성과를 내려고 조바심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진지합니다.
김동규 : (화가 난 목소리로) 당신 그 사람 속에 들어갔다 나왔소. 그가 무슨 마음을 품고 왔는지 그 사람 말만 듣고 어떻게 알아. 만경대.농업전람관.가극 관람태도가 좋다고 거기에 넘어가 좋다고 하지 마시오.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인데 우리 동지를 얼마나 죽였는지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독침이나 폭탄을 갖고 오지 않았다고 자네가 보장할 수 있는가.
유장식 : 제가 경솔했습니다.
최용건 : 그래도 오늘 저녁에 만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옛날 빨치산할 때 적과 싸울 때도 담판을 하지 않았습니까.
김일성 :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나타난 태도로 봐선 나무랄 것이 없는 것같군. 이후락이 "남북이 싸우지 말고 통일하자. 조선문제에 3자가 개입해선 안된다" 고 얘기하지 않았는가. 이번에 우리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제안하면 저들이 받을 것같다. 이번에 이 원칙을 매기자. 그러기 위해선 두번 정도는 만나야 하니 시간이 별로 없다. 오늘 밤에 만나는 것이 좋겠다.
회의는 1시간30분 정도 걸렸고 이후락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가 집중 토의됐다. 이후락을 어리둥절하게 했던 한밤중의 회담은 이렇게 상무위원회 회의를 열어 전격적으로 결정됐던 것이다. 일단 이후락을 만나기로 결정한 김일성은 유장식을 불러 이후락을 데려오라고 하자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황일호씨의 증언. "김일성은 유장식을 직접 불러 '네가 직접 가서 데려오라. 이후락이 준비하기 전에 직접 들어가서 데려오라. 그래야 몸에 뭐를 지니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데리고 올 때 모란봉 뒷길로 돌아서 오되 절대로 목적지를 말하지 말고 그의 행동을 주시하라' 고 지시했어요. "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유장식은 바로 모란봉초대소로 가 다짜고짜 문을 두들겨 이후락을 깨웠다.
"부장선생,빨리 옷을 입으시오. 갈 데가 있소" 라며 법석을 떨어 정신을 못 차리게 했다.
이후락은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가져간 청산가리가 들어있는 양복을 입고 따라 나섰다.
이후락이 김일성관저에 이르는 대목에서는 증언이 엇갈린다.
"죽이려면 술이나…"
이후락을 수행했던 정홍진씨는 "李부장과 동승했고 차안에서는 말이 없었다" 고 말했다.
그러나 황일호씨의 증언은 다르다.
"관저에 갈 때 유장식과 이후락만 타고 갔어요. 정홍진씨가 항의해 다른 수행원들은 함께 따라갔지요. 이후락은 모란봉 오솔길로 돌아갔기 때문에 오히려 鄭씨 일행이 먼저 관저에 도착해 기다렸지요. " 겁을 주기 위해 평소 가던 대동강변 포장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모란봉 뒤쪽 산길을 이용했던 것이다.
황일호씨는 李.金회담이 끝난 후 유장식으로부터 이후락과 나눈 대화내용에 대해서도 들었다고 전했다.
계속되는 그의 증언. "이후락은 유장식이 갑자기 들이닥쳐 목적지도 말하지 않고 데려 가자 오싹했던 모양입니다.
李가 떨고 있는 기색을 보자 柳는 운전사에게 '기사동무, 부장선생이 추우신 모양이니 난방을 넣어' 라고 지시했어요. 그러자 李가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가 쌀쌀하군요' 라고 대답했어요. 조금 가다가 李가 '죽이려면 술이나 한잔 줬으면 좋겠소' 하니, 柳가 '죽을 사람이 무슨 술이오' 라고 겁을 줬어요. 차가 서고 내린 다음에야 '부장선생, 여기가 수상관저입니다' 라고 가르쳐줬어요. "
유장식이 했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이후락이 그날 밤 관저로 가는 동안 상당히 위축됐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5.이후락 북에서 놀림당하고 온것 같아
이후락 (李厚洛.중앙정보부장) 은 김일성 (金日成.북한 수상) 의 '겁주기 전략' 에 당한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에게 기어이 한 건 올리겠다는 개인적 정치야망이 표출된 것인가. 72년 5월4일 0시15분 한밤중에 갑작스레 이뤄진 이후락과 김일성의 첫 만남은 아직도 이같은 의혹을 씻지 못하고 있다. 당일 李가 金이 제시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 3대원칙을 서울과 상의없이 덜컥 받은 것은 너무 많은 후유증을 남겼기 때문이다.
후일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회담에서 金은 李를 데리고 논 흔적이 있다. 김일성은 이후락을 '영웅이오' '최고의 애국자요' 하며 치켜세웠다가 "당신들,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가 아닌가" 라고 몰아붙이는등 노련한 술수를 구사했다. 이에 대해 李는 "우리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 朴대통령의 뜻" 이라며 "결코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가 아니다" 는등 방어적 자세를 취했던 것같다.
이런 과정에서 金은 "외세배격하고 싸움하지 말며 민족이 단결하고 그밖에 공산주의.자본주의, 이런 것은 다 덮어두자" 고 불쑥 제안했고, 李는 깊은 생각없이 "세가지가 가장 기본" 이라고 맞장구쳤다는 것이 정설이다. 李가 金과 전격 회동하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중앙정보부 간부들이 李의 신변안전문제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朴대통령도 李의 신변안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朴대통령 입장에서 李의 방북 (訪北) 은 신중한 판단과 용단 (勇斷) 이 필요했다. 반공법 (反共法) 등 법적 문제는 대통령의 통치권 차원에서 해명될 수 있다고 해도 국가의 정보책임자를 극비리에 북한에 보냈다가 억류되면 자칫 정권자체가 흔들릴 악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야회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협의조정국장 정홍진 (鄭洪鎭.63.송원장학회이사장) 은 즉시 서울로 상황보고를 했다. 회담이 무사히 끝났다는 전화연락에 서울은 일단 안도했다. 오전9시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수고 많이 한다고 전해라" 는 짤막한 한마디뿐이었다.
북한 역시 전날에 이어 다시 노동당 정치위원회 확대상무위원회가 열렸다. 김일성.최용건 (崔庸健).김일 (金一) 등 정치위원과 김중린 (金仲麟.대남 사업담당비서) 등 대남 실무자들이 참석해 金과 李의 회담결과를 토의하는 자리였다. 당시 이 회의에 실무진의 한사람으로 배석한 전 북한 고위관리 (차관급) 황일호 (黃日鎬.75.해외거주) 씨의 증언은 이날 오고간 대화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박정희 알고보니 괜찮군”
김일성 : (미소지으며) 이후락이 나보고 영웅이라고 하고 말이야. 애국심을 따라 배우겠다고 하며 아주 좋아했어. 그를 직접 만나 들어보니 朴대통령이란 사람이 우리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민족적 양심이 있어 보이더만.
김중린 : 朴대통령의 형이 남로당 (南勞黨) 출신인데 46년 대구 '10월봉기' 때 죽었습니다. 수상님 탄생 60주년인 올해안에 통일의 돌파구가 열리고 남북관계가 굉장히 잘 될 것같습니다.
최용건 : 신중하지 못하구만요. 대남 사업부문 간부들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같아. 어제는 유장식동무가 호들갑 떨더니 오늘은 대남 사업담당비서까지 그러면 어쩝니까.
김일 : 분위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남쪽이 적극적으로 나오고 아주 우호적이라 하니 대남사업 간부들이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최용건 : 다른 사람들이야 이후락의 말을 듣고 그런다지만 대남 담당자들은 호들갑을 떨어선 안돼요.
김일성 : 분위기는 괜찮은 것같아. 통일 3대원칙을 제안해 한방 먹였어. 오후에 다시 만날 때 3대원칙에 기초해 공동성명을 작성하는 문제를 논의하는게 좋겠어.
李.金회담에서 李가 통일 3대원칙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북한 수뇌부가 대단히 고무됐음을 알수있는 대목이다. 李가 돌아와 회담의 자초지종을 들은 서울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어두웠다. 특히 평양과의 연락을 주관하고 있던 중정 북한국 간부들이 합의내용에 반발했다.
당시 중정 협의조정부국장이었던 김달술 (金達述.67.통일원 비상임연구위원) 씨의 증언.
"정홍진씨가 경과보고를 하자 일부 간부들은 '평화야 우리의 안이고 자주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민족대단결까지 받아들인 것은 북한의 전략에 넘어간 것 아닌가' 라고 비판했어요. 정보부장이 합의한 사항이라 공개적으로 반대가 표출되지는 않았지만 우려가 적지 않았어요. "
당시 가장 강력히 반발했던 중정 북한국장 강인덕 (康仁德.65.극동문제연구소장) 씨의 증언.
"미군철수를 의미하는 '자주' 가 3대원칙의 첫머리로 합의됐다길래 대단히 화를 냈어요. 북한 대남전술의 기본이 남한을 미제 (美帝) 의 괴뢰정부로 규정, 주한 (駐韓)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공동문안을 작성할 때는 차선책으로 자주보다 평화를 앞세우자고 얘기했어요. 평화가 보장되면 미군이 나가도 될테니까요. 그러나 그점은 벌써 결정됐다고 하길래 할 수 없구나 생각했어요. "
실제로 중앙정보부의 실무팀이 작성한 이후락 방북대비 준비안에는 평화통일만을 제안하도록 돼 있었다. 朴대통령이 李의 방북을 승인하면서 내린 친필훈령에도 "조국의 통일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회담을 통한 평화적 통일이어야 한다" 는 원칙만이 제시돼 있었다. 당시 朴대통령이 지시한 내용의 핵심은 '단계적 접근을 통한 평화통일론' 이었다.
"우선 남북적십자회담을 촉진시켜 이산가족찾기등 인도적 문제를 빠른 시일안에 해결한다. 다음 단계로 경제.문화등 비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회담을 연다. 최종단계로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남북간 정치회담을 갖는다" 는 것이 朴대통령의 복안이었다.
朴대통령의 친필훈령에는 '제반 (諸般) 문제의 단계적 해결' 이란 부분에 밑줄까지 쳐져 있었다. 그런데 李는 金과의 첫날 회담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자주.민족대단결의 원칙에 합의하고 사후적으로 서울에 연락해 추인받은 것이다.중앙정보부 북한국의 실무간부들이 당황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李와 金은 5월4일 점심식사후 또 한차례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李는 3대원칙을 다시한번 확인한 후 상대방을 중상.비방하지 말고 일방적 대외선전적 통일제안을 하지 않으며, 무력으로 상대방을 괴롭히지 말자고 요구했다.
金은 "서로 비방 안해야지요. 그것 없앱시다" 라고 응수했다.
이날 저녁 '적지 (敵地)' 에서 빠져나와 서울에 도착한 李는 곧바로 청와대로 가 朴대통령에게 두차례 회담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朴대통령은 합의사항에 자주.민족 대단결원칙이 포함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7.4남북공동성명 직후 朴대통령으로부터 당시의 심정을 직접 들은 이동원 (李東元.71.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전외무장관의 증언.
"朴대통령은 '이북이 얘기하는 자주라는 것은 미국 나가라는 소리 아닌가. 아무래도 이후락이 이북에 가서 놀림당하고 온 것같아' 라며 李가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을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어요. 7.4남북공동성명에 朴대통령이 사인하지 않고 李가 사인한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
朴대통령은 5월31일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한 박성철 (朴成哲) 북한부수상을 만난 자리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부터 잘 해 남북간에 쌓인 장벽과 불신감을 해소해야 한다" 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북쪽의 주장을 일단 수용하면서도 신뢰회복이 선행돼야 한다는 단서를 단 것이다. 朴대통령은 경제개발을 하고 평화를 지킬 힘을 기르는데 시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대화를 열길 원했다.
“김일성은 못 믿을 사람”
그때문에 李의 평양밀행 성과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게 분명하다. 박성철의 서울 방문때 김일성에게 줄 선물로 비서진은 전자제품을 선택하려 했으나 朴대통령은 그럴 것 없다면서 흔한 조선자기 하나를 선택했다.
그러면서 朴대통령은 혼자 말하듯 "김일성은 믿을 수 없어" 라고 했다는 것이 당시 경제2수석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씨의 증언이다.
그뿐 아니다. 그후 朴대통령은 남북회담에 관해 李에게 주었던 전권을 거둬들였다. 7.4공동성명에 의거한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면서 朴대통령은 李의 의견을 묻지 않고 李가 버거워하는 장기영 (張基榮) 전부총리.최규하 (崔圭夏) 대통령특별보좌관을 대표에 임명했다. 李의 평양밀행은 朴대통령이 李에게 맡긴 마지막 비밀과제가 됐다. 이런 곡절속에서도 통일 3대원칙은 7.4남북공동성명으로 발표됐다.
그 배경에 대해 강인덕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부분적으로 흡족하진 않았지만 이 성명이 쓸모있다는 쌍방 모두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통일 3대원칙만 합의한다면 남한안에 광범위한 반미.반정부 통일전선 형성이 용이해질 것이라고 확신했어요. 반면 우리 정부는 북한측의 대남 (對南) 무력도발을 일단 억제할 수 있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어요. "
남북한의 동상이몽 (同床異夢) 으로 시작된 남북대화는 1년도 채 안돼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됐다.
그러나 70년 8.15평화통일선언 이후 4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朴대통령은 일단 대화의 통로를 열어 60년대 후반 최고조에 달했던 북한의 무력도발을 막고 경제성장을 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6.북 5.16나자 "박정희 연구" 긴급회의
박정희 (朴正熙) 는 누구인가.
1961년 5월16일 새벽 서울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에서 던진 의문이다. 쿠데타 세력은 좌우 어느쪽인가, 친미 (親美) 적인가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쿠데타군의 지휘자 박정희의 좌익경력 때문이었다. 서울과 워싱턴은 물론 도쿄 (東京) 의 정가 (政街) 까지도 긴장했다. 쿠데타군은 공약에서 반공 (反共) 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한국군 일부 장성과 주한 (駐韓) 미군은 쿠데타의 성격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더구나 16일 오후7시 "한국장교 스스로 일으킨 의거에 대해 왜 미군이 간섭하는가" 라는 평양방송 보도는 박정희를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평양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이 무렵 평양은 한국 정세에 고무돼 있었다. 5.16 1년전인 60년 6월13일 김일성 (金日成.북한수상) 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평양주재 소련대사 푸자노프에게 '남조선혁명' 에 대해 희망적인 견해를 피력했었다. 본사 (本社)가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에서 단독 입수한 푸자노프 대사의 '비망록' (6월13일자)에 기록돼 있는 金의 발언내용.
"남조선에는 노동당 지하당원이 1천~2천명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대남 (對南) 노선은 새로운 진보정당과 단체들의 창설을 고무하는 것이다. 현재 그런 당으로는 한국사회당과 사회대중당등이 있다. 우리는 이 당들의 지도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남조선 정부의 일부 주요 지위에는 우리 사람들이 박혀 있다. "
김일성의 이런 견해는 소련에 대한 허장성세 (虛張聲勢)가 섞인 다소 과장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혁신계 정당과 사회단체, 그리고 학생들의 급진적 통일운동등 61년의 한국정세는 金의 견해를 받쳐주는 일면이 있다. 그 무렵 평양은 남쪽 진보세력의 통일논의를 지원하는 평화공세를 더 한층 강화하고 있었다. 서울의 쿠데타는 그들의 평화공세를 일거에 차단한 사태였다. 그런데 평양당국은 朴의 경력에 주목했고 급기야 무역성차관을 지낸 황태성 (黃泰成) 을 밀파 (密派) , 朴의 의중을 타진하고 평화통일을 논의하려 했다. 이것은 북한이 朴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었음을 말해준다.
朴이 권력의 자리에 다가서기까지 어떤 길을 걸어온 것인가. 그의 생애중 어떤 대목들이 북한의 환상을 불러온 것인가. 도대체 박정희는 누구인가. 그런 질문을 되짚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좌익경력을 포함한 그의 과거로 다가가기 전에 먼저 5.16인식에 대한 평양의 혼란상을 살펴볼 만하다. 5.16 소식에 평양도 발칵 뒤집혔다.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날 김일성은 함흥지역에 현지지도를 나가 있다가 뒤늦게 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金은 즉시 대남 공작총본부인 3호청사의 정보망을 총 동원해 쿠데타의 진상과 사태추이를 알아보고, 정치위원회를 긴급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오후4시쯤 金이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노동당 중앙당사에서는 긴급 정치위원회가 열렸다. 3호청사 문화부장 김중린 (金仲麟.현 노동당 근로단체담당비서) 이 "박정희소장과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의 소장장교들이 움직였다는 정보가 있다" 며 사태발생에 대한 윤곽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는 질문에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김일성은 즉시 그동안 3호청사에 수집돼 있는 朴의 신상자료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날의 증언.
朴 관련정보 모두 수집
"金의 지시로 朴을 포함해 쿠데타 주요간부 8명에 대한 신상자료가 회의에 제출됐어요. 당시 한국군 장성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개개인에 대한 세세한 신상자료가 마련돼 있었어요. 박정희 자료는 주로 경북출신의 남로당원, 한국군 장교였다가 월북한 사람들이 쓴 것이었지요. 그중 70%정도가 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어요. "
당시 3호청사의 간부로 있으면서 회의자료를 준비했던 전 북한고위관리 (차관급) 황일호 (黃日鎬.75.해외거주) 의 증언이다.
그러나 박정희 자료는 과거경력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정작 필요한 최신 자료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4.19이후 북한은 대대적인 평화통일 공세에 주력하느라 한국군의 동향에 소홀했기 때문이었다. 金은 빠른 시일안에 정책토론회를 열어 4.19후 정세와 쿠데타 발발의 배경을 총괄.정리하고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5월20일과 21일 양일간 노동당 본청사 회의실에서 정책토론회가 벌어졌다. 이 정책토론회에는 책임지도원급 이상 3호청사 사람과 당 국제부.내각 외무성의 중요간부, 주요 연구소의 책임연구원등 3백50여명이 참가했다.
이 토론회에 참석했던 황일호씨의 증언.
"토론과정에서 군사쿠데타가 미국의 조종에 따른 것이냐, 아니면 민족지향적인 청년장교들의 자발적인 행동이냐를 놓고 상당히 옥신각신했어요.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됐다고 결론이 났지만 주체세력의 면면을 볼 때 진상을 보다 신중히 조사해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많았어요. 그래서 朴과 김종필 (金鍾泌) 이 어떤 인물인지를 파악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어요. "
3호청사는 즉각 박정희.김종필.유원식 (柳原植) 등 '혁명주체' 세력의 핵심들에 대한 성향조사에 착수했다.
대남연락부는 5월26일 평양여관 특호실에 朴을 어려서부터 지켜봤던 황태성과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으로 49년 대대장으로 있다가 월북한 강태무 (姜泰武) 등 14명을 소환했다. 이들은 주량.버릇등 사소한 것에서부터 주변인물.정치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사항을 기록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모인 보고서와 토론자료를 쌓아보니 1에 달했다.
북한의 박정희연구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朴이 해방 직후 박헌영 (朴憲永) 이 이끈 남로당 (南勞黨)에 관계했고, 그의 친형인 박상희 (朴相熙) 역시 '대구 10월폭동' 에 참여했다가 희생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때 제출된 보고서들은 대부분 朴을 민족성향이 강한 인물로 평가했다.
민족성향 강한 인물 평가
북한 수뇌부는 박정희.김종필등의 인물파악 과정에서 "뭔가 대화가 될 수 있다" 는 희망적인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물론 반론도 없지 않았다.
전 북한 최고검찰소 검사였던 김중종 (金中鍾.71.서울거주) 씨의 증언.
"북한은 쿠데타 주도세력 내부에 좌익경력을 가진 인물이 많다는 점에 고무됐어요. 그러나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혁신계인사등이 대거 체포되자 노동당 내부에서도 과거경력만 가지고 朴을 호의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회의론이 제기됐어요. "
그러나 황태성.강태무등이 계속 협상론을 제기하고 어윤갑 부장을 비롯해 대남연락부의 간부들도 이에 동조했다. 북한은 61년7월 중순 정치위원회를 다시 열고 "朴이 반공을 표방하고 있고 혁신계를 탄압하고 있지만 우리와 통일문제를 협의할 수도 있다. 평화통일을 제안하는 비밀협상대표를 파견키로 하자" 는 결론을 내렸다.
朴에 대해 가장 우호적으로 평가했던 黃이 자진해 나섰다.
"북한은 박정희 접촉의 성공여부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보내더라도 절대 다치지 않을 인물을 보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이때 黃이 '내가 한번 가 보겠다' 고 자원했답니다. "
이 증언은 김중종이 61년 남파됐다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그곳에 수감돼 있던 黃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후일담이다. 최소한의 안전보장을 믿었다는 황태성. 그러나 그의 서울 잠입은 가뜩이나 사상문제로 곤란에 처해있던 박정희장군을 궁지로 몰아넣고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 로 등장하게 된다.
7.박정희 황태성 제물삼아 색깔시비 탈출
황태성 (黃泰成) 사건은 한때 간첩사건으로 발표됐던 북 (北) 의 밀사 (密使)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朴正熙) 의 좌익경력에 연유한 특이한 사건으로 민정이양 (民政移讓) 을 앞두고 군부와 민간정치세력 사이에 사상논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북은 黃을 밀파해 박정희의 북에 대한 친향성을 떠보려 했고, 朴은 그의 인생을 걸고 단호하게 북과의 절연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이 사건은 냉전의 첨단지대 한반도에서 일어난 60년대의 각박한 정치환경을 설명해준다.
黃을 박정희장군과 만나게 내려 보내면서 북한노동당은 둘의 지난 인연에 비춰 黃이 설사 잘못돼더라도 무사히 돌아오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黃은 朴을 면담도 못한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먼저 사건의 대강을 간추려보자. 61년 9월1일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잠입한 黃은 중앙대강사로 있던 김민하 (金玟河.63.현 교총회장) 를 찾았다.
고향 후배 (경북 상주) 라는 인연뿐 첫 대면이었지만 그를 통해 6.25때 헤어진 조카딸도 만났으며 박정희나 김종필 (金鍾泌)에게 다리를 놓아줄 것을 부탁했다.
黃은 金에게 "나하고 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남북 양쪽에서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을 때 통일문제를 협의케 해보자고 해서 내려온 것" 이라고 털어놓았다 黃의 조카사위로 사형 후 시신을 직접 확인.인수했던 권상릉 (權相凌.63.조선화랑사장) 의 증언은 색다르다.
"黃은 朴의장을 만나 상호비방 중지, 남북 양체제 인정, 남북 무역대표부 설치등을 협의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어요. " 金은 朴의장의 대구사범 동기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고문을 맡고 있던 왕학수 (王學洙.작고.당시 고려대 교수) 를 만나 黃의 얘기를 전했다.
王교수는 金에겐 대구사범 선배이자 후견인이기도 했다.
王교수도 면담을 주선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黃은 두번째 통로로 고인이 된 옛친구 박상희 (朴相熙) 의 미망인 趙여사를 택했다.
박정희의 형수이자 김종필의 장모인 趙여사에게 그는 간곡한 편지를 써 보냈다.
반응은 며칠만에 엉뚱하게 왔다.
"中情에 잡혀 JP 만나" 10월20일 黃은 들이닥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연행돼 반도호텔 (현 롯데호텔 자리)에서 조사받았다.
그는 밀사임을 밝히면서 朴의장이나 김종필 아니고는 말할 수 없다고 버텼다.
黃이 金을 만났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중정은 金과 닮은 요원을 내세워 진술을 받아냈다고 한다.
어쨌든 黃은 金을 만나 朴의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녹음했다고 술회했다.
서대문구치소에서 같은 수감자로 黃을 만났던 김중종 (金中鍾.71) 의 후일담. "黃은 반도호텔 8층 객실에서 김종필과 단 둘이 대좌했다고 말했어요. 金이 녹음기를 내밀며 '朴의장이 직접 오시기가 곤란해 제가 대신 왔습니다.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하시면 朴의장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黃은 '요즘 북의 방송에서 朴의장 비난을 안하고 있잖느냐. 민족의 번영을 위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대치상태를 거두고 평화통일 하자' 는 요지의 얘기를 했다고 합디다. "
녹음은 마지막 대화였다....
黃은 62년 11월 간첩죄로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黃은 상고했다.
대법원은 간첩죄란 법적용이 잘못됐다해서 파기환송했다.
검찰은 불법 월경죄 (越境罪) 로 바꿨고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사형을 확정했다.
黃은 46년 대구 10월폭동의 배후로 지목돼 수배되자 월북한 후 북한 정권에서 무역성 부상 (차관에 해당) 도 지낸 인물이다.
그가 朴은 결코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근거는 두사람간의 오랜 인연에 연유했다.
黃은 김천에서, 朴의 친형 박상희는 구미에서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엔 남로당 (南勞黨) 을 함께 했다.
둘은 친구고 동지였다.
黃은 김민하에게 朴의 소년시절부터 지켜보며 지도도 했다고 했다.
다음은 김민하의 증언. "朴은 여간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지. 가난한 집안형편이었지만 그의 향학열은 대단했다네. 대구사범 시절 고민에 싸이기만 하면 나를 찾아왔었지. '선생님 내가 뭘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거야.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무엇을 하든 우리한테도 언제고 때가 올거다' 라고 조언했지. 그가 만주군관학교를 지원하게 됐던 것도 내 조언의 힘이 컸던 걸세. " 이런 인연에 의지했던 黃의 계산은 빗나갔다.
朴은 왜 면담도 거부하고 사건을 서둘러 묻으려했을까. 군정의 색깔에 대해 의심하는 국내외의 눈길이 그 배경이었던 것같다.
미국은 쿠데타 주역들의 좌경화에 대한 우려를 재빨리 거둔듯 했다.
미국 CIA는 쿠데타 3일 후인 18일 "朴은 48년 이후는 북한공산주의자들과 연루됐거나 한국의 좌익세력과 연계됐다는 사실이 전혀 알려진 바 없다" 는 보고서를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올렸다.
그러나 의혹은 계속 제기됐다.
6월 중순 허정 (許政) 과도내각 때 육참총장을 지낸 예비역중장 최경록 (崔慶祿) 은 미 대사관을 찾아가 "朴소장은 확실치 않으나 쿠데타군 핵심에 적어도 7~8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 고 제보했다.
22일 미국 국가안보회의 한국팀회의가 이 문제를 논의한 뒤 '가능성 희박' 이라는 판정을 했다.
그러나 버거 주한 (駐韓) 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낸 7월15일자 전문은 여전한 경보 (警報) 였다.
그 일부. 美선 여전히 軍政 의심 "朴소장과 김종필중령을 비롯한 몇몇 혐의자에 대한 공산주의자 여부는 평가가 끝났지만 쿠데타의 신속함과 치밀한 계획성, 소련.북한등의 반응에 비춰보면 쿠데타군 내부에 공산주의자가 잠복해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
이렇듯 미국과 국내 일부의 의심의 눈길은 군사정권을 내내 압박했다.
이런 압박이 黃의 극비처리를 재촉했으리라는 건 짐작이 간다.
그러나 사건은 묻히지 않고 朴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63년 9월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 유세가 시작되자 민주당정권 시절의 대통령이던 윤보선 (尹潽善) 후보는 박정희후보의 좌익경력을 들추는 사상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잇따라 9월15일 민간 정당은 공명선거 투쟁위원회 집회를 열면서 집회장인 서울 교동초등학교 교정에 "간첩 황태성이 공화당 사전조직 요원의 밀봉교육을 담당했다" 며 공화당을 좌경집단으로 모는 삐라를 뿌렸다.
黃사건이 대통령선거의 쟁점으로 등장한 것이다.
군정당국은 이 사건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9월28일 김형욱 (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은 "黃은 반미 (反美) 운동을 지령받고 남하해 고위층과 접촉하려다 실패한 자" 라며 "간첩 黃이 朴의장과 만났다거나 친면 (親面) 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 라고 해명했다.
朴후보도 10월10일 유세를 위해 안동으로 가던 열차안에서 계속되는 민간후보의 공세에 대해 해명했다.
"일제 때부터 황태성은 형과 친구였다.
해방 후에 보니 黃은 빨갱이였고 그가 이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5.16이 나던 해 9월께 김종필이 黃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간첩으로 남하해온 것을 체포했다고 보고해 왔다. " 직접 해명도 쟁점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다행스런 것은 여론의 무반응이었다.
곤란한 것은 국민여론이 아니라 黃을 넘겨달라는 미국의 강력한 요구였다.
결국 당국은 黃을 2주간 미측수사관에게 인계했다.
63년 12월 김형욱정보부장은 사형이 확정된 黃의 사형집행 승인서류를 내밀었다.
당시 黃은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 심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朴의장은 "이 사람은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인해야 하나" 라며 망설였다.
金은 강한 어조로 "각하, 우리가 미국과 야당에 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사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라며 결단을 재촉했다.
잠시 침묵하던 朴의장은 체념한듯 그 서류에 사인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12월14일 토요일 오전11시20분. 黃은 인천 근교의 한 육군부대안에서 총살형이 집행됐고 이례적으로 정부는 형집행을 발표했다.
그런데도 야당은 황태성의 오키나와 (沖繩) 생존설을 제기해 이듬해인 64년 정치쟁점으로 되살리고 끝내 국정감사로까지 몰아갔다.
감사에선 문서.사진외에 입회한 군목 (軍牧) 과 기자의 증언까지 듣고도 미심쩍은 점이 있다는 소수의견을 남겼다.
황태성사건은 본질에서 벗어난 야당의 정치공세를 포함해 가장 한국적으로 처리된 사례였다.
8.동기 불분명한 군인으로의 변신
1942년 3월23일. 만주국 수도 신징 (新京) , 지금의 창춘 (長春) 교외 남강대 (南崗臺)에서는 만주군관학교 제2기 예과졸업식이 성대히 열리고 있었다. 만주국 황제 푸이 (溥儀)가 왜소한 체구에 까무잡잡한 얼굴의 졸업생도 대표에게 금시계를 하사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박정희 (朴正熙) 였다.
교사 박정희가 돌연 만주행 (滿洲行) 열차에 오른 것은 1939년 9월 하순. 10월 초순 있을 군관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조선땅을 지나 봉천 (奉天.현 瀋陽)~신징~지린 (吉林) 을 거쳐 수험지인 무단장 (牧丹江) 시에 도착했다. 아직 학교를 사직하지 않았고 합격도 자신할 수 없어 그로서는 다소 불안한 발걸음이었다.
평소 말 앞세우기를 좋아하지 않던 그는 주위사람들에게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다' 고 떠나왔다. 어쨌든 박정희는 1940년부터 해방 이듬해까지 6년간 만주에서 '군인 박정희' 로 성장했다. 아니 '군인 다카키 마사오 (高木正雄.박정희의 창씨개명 이름)' 가 탄생한 것이다.
문경보통학교 '교사 박정희' 는 왜 갑자기 만주로 떠나 군인이 되었는가. 당시 수재들이나 들어가던 명문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그가 얻은 훈도 (訓導.현 초등학교 교사) 자리는 대단한 것이었다. 시골에선 군 (郡) 내 몇 안되는 유지 (有志) 급 인사였고 안정된 생활과 지위, 미래가 보장된 '자리' 였다.
그가 이같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만주행을 결행한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그동안 많은 '박정희 연구자' 들은 이 점에 의문을 갖고 '교사 박정희' 의 변신 (變身) 이 장차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다. 생전에 박정희 자신은 단 한번 측근에게 "긴 칼 차고 싶어서" 라고 군인이 된 동기를 밝혔다. 그다운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70년 4월 한림출판사 요청으로 직접 집필한 '나의 소년시절' 에선 "소년시절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이라고 적었다. 그렇지만 교사 박정희가 택한 군인의 길은 불우한 식민지시대 조선청년의 가슴에 성냥불을 그어댄 그 무엇이 없었으면 설명이 잘 안된다.
"순옥이라고 불러도"
그는 당시 가장 아낀 여제자 정순옥 (鄭順玉.72) 씨에게 20년뒤 야릇한 연정을 담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1군참모장으로 있던 1959년 5월1일 당시 3남매의 어머니가 된 정순옥씨에게 보낸 편지. "20년전의 추억을 더듬으면 천진난만한 순옥이의 소녀시절 모습이 떠오르지만 3남매의 어머니가 된 순옥이를 순옥이라고 불러 어떨는지" 라며 초등학교 6년 시절의 제자를 애틋한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
박정희가 만주로 간 직접적인 계기로 교사시절의 '장발 (長髮) 사건' 이 널리 인용되고 있다. 87년 1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대구사범 동기생 권상하 (權尙河.81) 씨가 증언했기 때문이다. 權씨의 증언 요지.
"중일전쟁 (中日戰爭) 이 한창이던 1939년 당시 일제는 국민들에게 전의 (戰意) 를 고양하기 위해 교사들도 군인들처럼 머리를 빡빡 깎게 했었다. 복장도 국민복.국민모 (帽)에 각반을 차고 다녔다. 바로 그 시절 그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이 해 가을 마침 연구수업 시찰을 나온 데라도 (寺戶) 시학 (視學.장학사) 은 그의 긴 머리를 보고 "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 이것은 황민화 정책이 철저하지 못한 증거" 라며 그를 강하게 비판했다. 냉랭한 공기는 그날 밤까지 계속됐다. 시학을 위해 아리마 (有馬) 교장이 관사 (官舍)에서 마련한 술자리에서 교장과 시학이 그의 긴 머리를 다시 문제삼았다. 술에 취한 그는 두 사람을 상대로 언쟁을 벌이다 술잔을 던지는등 소란을 피웠다. 그날 밤은 그냥 넘어갔다. 문제는 이튿날이었다. 교장이 다시 그를 교장실로 불러 간밤의 행동을 질책하자 울컥한 끝에 그는 교장을 두들겨패고는 그 길로 짐을 챙겨 문경을 떴다. 그는 보따리를 싸 만주로 가기 전 나를 찾아와 이같은 전후사정 얘기를 했다. "
이같은 權씨의 증언은 몇가지 점에서 검증을 요한다. 우선 당시 시국아래서 평교사가 교장이나 시학 앞에서 논쟁을 벌였다거나 술자리에서 이들에게 술잔을 던졌다는 부분, 그리고 교장을 두들겨팼다는 대목등은 이해하기 힘들다. 당시를 산 사람들은 하나같이 '있을 수 없는 일' 이라고 입을 모은다.
식민지 설움 푼 싸움대장
그렇다면 확실한 물증을 보자. 이번 취재과정에서 입수한 교사시절 박정희의 사진은 열장 내외. 그러나 그 어느 사진에서도 그의 장발 모습은 없다.
그렇다면 '장발사건' 은 어딘가 와전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바로 그 '오해' 를 70대를 바라보는 노제자가 증언하고 있다. 朴교사 부임 당시 2학년이었던 이순희 (李順姬.여.69) 씨는 당시 朴교사의 모습을 "자그마한 키에 얼굴이 까무잡잡한 분이 눈만 반짝거렸어요" 라고 기억했다.
얘기가 '장발' 대목에 이르자 李씨는 목소리를 높인다.
"저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우선 朴선생님에게 있어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머리가 긴 것은 朴선생님이 아니라 학생들이었어요. 당시는 학생이나 교사 할 것 없이 모두 머리를 빡빡 깎았습니다. 그런데 동네에 바리캉이 한두개 뿐인데다 그걸 빌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돈주고 이발소에 가기도 쉽지 않았구요. 그래서 제때에 머리를 못깎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교사들은 이런 사정은 제쳐놓고 무조건 머리가 긴 학생들은 귀를 잡아 질질 끌고가서는 복도에 벌을 세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朴선생님이 지나가다가 벌선 학생들을 보고는 '너 왜 여기서 벌받고 있느냐' 고 물어봅니다. 얘기를 다 듣고 朴선생님은 교무실로 달려가 '돈이 없어서 머리 못깎는 아이들을 왜 벌주느냐' 며 일본인 교사들과 다투곤 했어요. 다투는 소리가 교무실 밖에까지 들린 적도 자주 있었습니다. "
다른 제자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제자 정순옥씨도 "朴선생님은 항상 단정한 분이었다" 고 증언한다. 당시 朴교사는 자주 일본인 교사들과 싸움을 하는 바람에 '겐카 다이쇼' (싸움대장) 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했다. '겐카 다이쇼' 란 별명은 교사 박정희의 젊음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 소처럼 일하면서도 언제나 배고픔과 억눌림의 삶을 체념하고 있는 조선민중에 대한 한없는 비애, 그도 그런 조선인의 한 사람이 돼 식민통치에 순응하고 일본인보다 한 단계 낮은 국민으로 살면서 조선의 소년소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인가.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그런 울분과 번민이 가슴에 불길이 되어 타올랐던 것은 아닐까.
얼마후 군관학교로 간 박정희가 "왜 여기 왔느냐" 고 묻는 선배의 질문에 "왜놈이 보기 싫어서 왔소" 라고 대답했다는 것도 박정희의 심리 저변에 깔린 민족적 감정의 일단을 설명해 준다.
9.첫결혼 실패가 '군인의길' 재촉
살을 에는 늦겨울 바람이 문경 (聞慶) 골짜기를 휘몰아치던 1940년 2월 중순 어느 날. 문경보통학교 바로 옆 버스정류장 자리에선 만주 (滿洲) 로 군인 (軍人)가는 한 젊은이를 위한 환송회가 열렸다.
행사의 주인공은 바로 직전까지 이 학교 교사로 있던 박정희 (朴正熙) 였다.
동료교사와 학생.주민등 10여명은 길 양옆으로 도열해 만주로 떠나는 朴교사를 환송했다.
朴교사는 환송나온 동료교사들에게 "전사 (戰死) 소식을 접하면 향 (香) 한 대나 피워 주게" 라며 짧고도 비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훌쩍이는 제자들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섭섭해 하지 말아라. 긴 칼 차고 대장이 돼 돌아오겠다" 고 위로했다.
이로부터 한달뒤 발신지가 '만주 신징 (新京) 육군군관학교' 로 된 편지가 제자들에게 날아왔다.
“大將되어 돌아오겠다”
박정희가 안정된 교사직을 팽개치고 만주로 떠난 원인은 여러가지다.
그중 하나는 집안사정 때문이었다.
대구사범 4년때 (1935년) 교칙을 어기고 비밀결혼을 한 그는 교사 부임당시 이미 결혼 3년째를 맞고 있었다.
부임하던 해 가을엔 첫딸 재옥 (在玉.60.韓丙起 전유엔대사 부인) 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첫째 부인 김호남 (金浩南.작고) 씨와 딸을 구미 본가에 놔둔 채 문경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신혼생활은 결혼 직후 한달이 전부였다.
문제는 두사람이 떨어져 산데 있었던게 아니라 朴교사의 마음이 멀어졌다는데 있었다.
방학을 맞아서도 朴교사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않고 하숙방에서 뒹굴며 지냈다.
그와 함께 하숙했던 허동식 (許東植) 씨는 "방학해도 집에 가지 않았고 평소 집안얘기를 잘 하지도 않아 결혼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 고 증언했다.
동료교사들도 물론 눈치채지 못했다.
이 때문에 '가짜 총각선생님' 朴교사와 동네 처녀들 사이엔 혼담 (婚談) 도 더러 오갔다.
당시 이 학교엔 그와 한자이름까지 같은 여교사가 있었다.
그녀는 朴교사에게 연모의 정을 보였으나 朴교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못이룬 사랑이 병이 됐는지, 여교사 박정희는 마침내 실성해 동네아이들의 놀림감이 됐다.
朴교사가 자신의 결혼사실을 감춘 이유는 아내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불만은 그가 만주로 간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았다.
교사시절 그가 묵었던 하숙집 여주인에게 임창발 (林昌發) 이란 아들이 있었다.
그는 朴교사 보다 한살 아래로 그시절 두사람은 친구로 지냈다.
문경에서 취재팀과 만난 林씨 (79) 의 증언. "朴선생은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방학때면 우리집에 와 머물다가 구미 본가엔 들르지도 않고 만주로 돌아갔다.
朴선생과 부인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했다. "
첫부인 한글 겨우 깨쳐
朴교사가 아내와 정이 없었던 배경을 두고 김재학 (金載學.71.朴대통령 생가보존회장) 씨는 "첫 부인은 키도 크고 미인이었으나 겨우 한글을 깨우친 정도여서 두분 사이에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던 것같다" 고 말했다.
정을 안준 쪽은 박정희였다.
피붙이 형제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바로 위 누님 박재희 (朴在熙.작고) 씨도 생전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동생은 왜 그런지 (재옥이 어머니에게) 정이 들지 않는다고 가까이하려들지 않았어요. 문경에도 혼자 가 있었고, 간혹 고향에 다니러 와도 따로 자곤 했습니다. "
그러나 이 정도 이유론 朴교사의 만주행이 설명되지 않는다.
억지결혼이었지만 그래도 부친의 뜻을 외면하지 못하고 결혼했던 그였다.
이 의문에 대해 그와 지근거리에 있었던 두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Q씨의 증언. "언젠가 朴대통령과 단 둘이 술자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만주얘기를 한동안 하던 그가 갑자기 첫째 부인 얘기를 꺼냈지요. '내가 없는 사이에… (생략)' 하시더니 말문을 닫더군요. 그 얘기를 하는 동안 朴대통령의 표정은 보기에도 안타까울 만큼 일그러졌습니다.
그때 朴대통령이 한 얘기는 듣기 민망한 내용이었습니다. "
또다른 증언자 Z씨의 증언도 비슷한 내용이다.
두 증언자는 朴대통령의 측근이자 술친구였다.
이 사건이 朴교사가 만주행을 결심한 직접적 계기였다고 이들은 확신했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한몫했다.
1939년 당시 만주는 폭력과 무질서가 난무한 신개척지였다.
반면 일본인과의 차별대우로 야망을 좌절당한 조선청년들에게 이런 무법지대 만주는 오히려 '희망의 땅' 이었다.
출세욕에 불타는 군인과 지식인, 일확천금을 노린 모략가들이 이 기회의 땅을 놓칠리 없었다.
그당시 만주는 '동양의 서부 (西部)' 였다.
일본 조치 (上智) 대 졸업후 만주고등고시에 합격, 안둥성 (安東省) 미산 (密山)에서 관리로 근무했던 원로경제학자 조기준 (趙璣濬.79.고려대 명예교수) 씨는 "조선에선 숨이 막혀 살 수 없었다.
당시 만주행은 마치 해방후의 미국행과 마찬가지로 조선청년들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고 회고했다.
마찬가지로 만주고등고시 출신으로 만주국 관리를 지낸 백상건 (白尙健.78.전 중앙선관위 상임위원) 씨도 "불경기 탓에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돼 면서기 되기도 어려웠다.
이들에게 만주는 유일한 대안이자 신천지 (新天地) 였다" 고 했다.
軍國주의 최첨병으로
특히 박정희와 같은 교사자격증 소지자들은 너나없이 만주행을 꿈꿨다.
朴대통령의 사범학교 동기생 이득우 (李得雨.82.경남창원시 거주) 씨는 "만주에선 교사들이 민족차별 없이 최고대우를 받는다는 소문이 돌아 만주는 조선인 교사들의 선망의 땅이었다" 고 증언한다.
교사시절 일본인과의 마찰, 불행한 결혼생활, 그리고 시대적 분위기와 만주의 유혹. 그러나 이런 주변상황들은 교사 박정희의 만주행을 설명하는 외형적 요인이긴 하지만 군인의 길을 선택한데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박정희의 내면엔 그 자신이 밝힌 대로 '긴 칼 찬 군인' 이 되려는 욕구로 가득 차 있었던 것같다.
그는 태생적으로 군인이었다.
부친이 무반 (武班) 출신인데다 형제들도 모두 무골 (武骨) 이었다.
그 역시 단단하고 다부진 기골의 소유자였다.
그가 교사가 된 것은 순전히 가난 때문이었다.
당시 가난한 집안의 머리좋은 자식이 보통학교를 나와 갈 곳은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사범학교 뿐이었다.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만주군관학교 수석이나 일본육사 3등이란 졸업성적은 그의 두뇌가 비상함을 보여준다.
산수문제를 풀고 풍금치는 법을 배우던 사범학교 교과는 그의 욕구와 갈증을 채우기엔 크게 미흡했다.
사범학교 시절의 그는 유독 교련과 군사훈련 과목을 좋아해 교련시간에 항상 시범 조교 (助敎) 를 했던 것으로 동기생들은 기억하고 있다.
'왜놈 보기 싫다' 며 그가 찾아간 곳은 광복군이 아니라 뜻밖에도 일본 군국주의의 최첨병 역할을 맡던 만주군대였다.
박정희에게 만주행이 없었더라면 대통령 박정희도 없었을지 모른다.
5.16의 주역으로서 근대화와 군사독재의 명암을 우리 현대사에 남겼던 풍운아 박정희의 삶은 만주행으로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10.광복군 참여 경력날조자에 대노
한해가 저물던 1967년 12월 어느날 저녁. 서울의 중심가 명동거리에서 한 이방인이 당시 최고권력자 박정희 (朴正熙) 의 이름을 들먹이며 일본어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가 한 골목길 모퉁이를 지날 무렵 경찰 두명이 나타나 그의 양팔을 낚아챘다.
대통령의 이름을 입에 담는 자체로 곤욕을 치르던 시절이었다.
그가 끌려간 곳은 인근 명동파출소. 이 외국인은 서투른 한국말로 다짜고짜 "나는 박정희의 친구다. 박정희를 불러오기 전에는 할 얘기가 없다" 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난감해진 파출소측은 자신들이 처리할 사안이 아님을 직감하고는 급히 모처로 전화를 걸었다.
두어시간 지난 후 한 인사가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국세청장 이낙선 (李洛善.전상공부장관.작고) 씨였다.
李씨는 5.16 초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비서관을 지내면서 朴의장의 신변자료를 챙긴 인물이었다.
李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니 高선생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
"어찌 되다니요. 당신들이 나를 제멋대로 이용해 먹고 이제와서는 나를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 겁니까. "
"제멋대로 이용해 먹고…"
李청장은 이 이방인을 파출소에서 데리고 나와 반도호텔에 방을 잡아주고는 며칠 뒤 대만행 비행기에 태워 떼밀다시피해 보내 버렸다.
1962년 11월 한 유력 중앙지에 '16년전의 박정희 학우 (學友)' 라는 제목의 글이 11일자부터 5회 연속으로 게재된 적이 있다.
'특별기고' 형식의 이 글은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중국인 동기생 가오칭인 (高慶印) 의 명의로 돼있다.
명동에서 술에 취해 박정희를 마구 욕해대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 박정희의 만주시절을 상당부분 미화 (美化) 하고 있었다.
"애국지사들을 규합하고 반공.항일.광복의 지하공작에 골몰했다" 거나 "조선땅에 돌아가 건국사업에 봉사하지 못함을 한탄했다" 는 부분 등이다.
박정희와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동료들은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고 주장한다.
이 글은 박정희의 주도로 이뤄졌다기보다 이낙선씨등 朴대통령 핵심측근들의 과잉충성의 결과로 봐야 할 것같다.
이 때는 박정희가 민정이양과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기 불과 3개월전이란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당시는 박정희, 나아가 그를 둘러싼 세력들은 정치적으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섰던 사활적 상황이었다.
특히 박정희가 민정이양및 원대복귀를 선언했다가 다시 이를 번복, 민정참여를 결정한 뒤여서 미국은 쿠데타 세력의 원대복귀를 강력히 압박하고 있었다.
혁명세력은 박정희의 경력을 미화할 필요성이 높던 시기였다.
高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올해 75세의 高씨는 미국의 도박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작은 모텔을 운영하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현지 자택에서 취재팀과 만난 高씨는 "옛날얘기 해서 뭣 하겠느냐" 면서도 막상 얘기가 나오자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5.16직후 이낙선씨한테서 편지가 한번 왔더군요. 박정희가 혁명을 일으켜 최고권력자가 됐다구요. 그러면서 동기생으로서 朴의 군관학교 시절 얘기를 좀 써달라고 하더군요. 반갑기도 해 몇자 적어보낸 적이 있습니다.
" 그가 李씨에게 적어 보낸 분량은 종이 한장 정도의 '메모' 에 불과했다.
이 메모 몇자가 원고지 40쪽 분량의 5회짜리 연재물로 둔갑한 셈이다.
계속되는 高씨의 증언. "나는 내 편지내용이 한국신문에 난 줄도 몰랐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얘기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갔더니 만주군관학교 동기생 이재기 (李再起.작고)가 '신문에 난 네 글 잘 봤다' 고 그래요. '무슨 글?' 했더니 모 일간지에 내 글이 다섯번이나 실렸다고 하더군요.
그 길로 그를 앞세우고 신문사를 찾아갔지요. 가서 보니 사실이더군요. 순간 이낙선씨 생각이 났습니다. "
흥미있는 것은 5대 대통령 취임식때 정작 신세를 진 高씨는 빠지고 차이충량 (蔡崇樑) 이라는 친 (親) 朴 성향의 동기생이 대만에서 초청됐다는 점이다.
60년대 중반 대만에서 사업하던 高씨는 한국과 합작으로 사업을 해보려고 방한, 박정희측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면회는 거절당했고 청와대 비서진도 하나같이 외면했다.
高씨의 '명동사건' 은 바로 이런 속사정에서 비롯한 해프닝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만주경력 미화작업' 은 한껍질 벗겨졌다.
'독립운동가담' 조작
5.16 당시 육사생도들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유도하고, 혁명군사정부에서 검찰부장을 지낸 박창암 (朴蒼岩.74. '自由' 발행인) 씨. 그가 '반혁명사건' 에 연루돼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나 의정부에서 개간을 하면서 쉬고 있을 무렵 한 불청객의 방문을 받았다.
자신을 독립운동가라고 소개한 이 인물의 이름은 박영만 (朴英晩.작고) .그는 대뜸 朴씨에게 "같이 朴대통령을 한번 도와보자" 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朴씨에게 "여운형 (呂運亨) 의 건국동맹 지하운동의 리더였던 박승환 (朴承煥.봉천6기.만군 항공장교 출신) 의 공적 (功績) 을 朴대통령의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 좀 도와달라" 고 부탁했다.
해방후 평양에서 사망한 박승환의 공적을 박정희 것으로 조작하는 일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작업에는 박승환과 함께 활동했던 朴씨의 협조가 불가피했다.
朴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967년 세번째 찾아온 그를 朴씨는 미아리 인근 술집에서 만났다.
똑같은 요청에 참다못한 朴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술상을 뒤엎어 버리고는 그를 두들겨패 돌려 보냈다.
이런 제의를 받은 사람은 한 사람 더 있었다.
朴씨와 같이 건국동맹 군사부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했던 박준호 (朴俊浩.만군 공군중위 출신.작고) 였다.
박정희 경력미화작업의 전위대 역할을 했던 박영만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를 아는 광복군 출신들은 한마디로 그를 "사람같지 않은 사람" 이라고 말한다.
그는 독립운동 경력이 없는 사람도 돈만 주면 제마음대로 붓을 놀려 독립운동가로 둔갑시켰다고 한다.
김승곤 (金勝坤.82) 전광복회장은 언젠가 명동 넘버원 다방에 앉아 있다가 "선배님도 책 한권 내셔야죠" 라며 접근해온 그에게 "닭다리나 같이 뜯자고 한다면 몰라도 그런 얘기 하려거든 나타나지도 말라" 며 호통을 쳐 쫓아낸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67년 2월 박영만은 '광복군' 이라는 상.하 두권짜리 논픽션 소설을 출간했다.
상권은 광복군 3지대장 출신 백파 (白波) 김학규 (金學奎.작고) 를 주인공으로 한 것이고, 하권은 놀랍게도 박정희가 주인공이다.
하권의 골자는 박정희가 이미 해방전부터 광복군과 비밀리에 내통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 이 책에는 당시 박정희와 같이 만주군 장교로 있었던 신현준 (申鉉俊.82.봉천5기.해병중장 예편) 씨까지 가담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정작 申씨는 "해방전엔 광복군이 있는 줄도 몰랐다" 고 증언했다.
광복군 출신들 격렬 항의
이 책의 출간 경위에 대해 박창암씨는 "박정희 아부세력이 이 책 집필을 부탁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박정희와 박영만은 해방후부터 귀국할 때까지 광복군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알만한 사이" 라고 했다.
박정희는 일본패망후 만주에서 베이징 (北京) 으로 나와 귀국할 때까지 한때 광복군에 몸을 담은 적이 있었다.
金전회장은 "당시 박영만이 청와대에서 30만원을 받기로 하고 이 책을 썼다.
그러나 막상 책이 나온 후 朴대통령이 내용을 훑어보고는 '내가 어디 (일제시대의 진짜)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느냐' 며 노발대발했다.
그래서 돈 한푼 못받고 출판기념회도 못했다" 고 증언하고 있다.
金씨의 증언대로라면 박정희는 자신에 대한 근거없는 미화작업에 오히려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듯하다.
이를 미뤄 보면 高씨의 박정희 미화 연재물을 박정희 본인이 시켰다고 하기는 무리라고 볼 수 있다.
이 책도 박영만이 돈을 노리고 자작 (自作) 했거나 측근들의 박정희에 대한 과잉충성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인지 이 책은 한동안 자취를 감춰 광복군 사회에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책이 돌연 세간에 화제가 된 것은 1990년 KBS에서 실록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 을 방영하면서부터였다.
작가 김교식 (金敎植.63) 씨는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극중에서 박정희가 해방전부터 광복군과 내통한 것으로 묘사했다. 방송이 나가자 광복군출신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박정희를 아주 '광복군 챔피언' 으로 만들어 놓았다" 는 것이다.
박정희의 만주행적은 아직도 상당수 베일에 가려져 있다.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자도 대부분 역사의 그늘 속에 사라졌고, 그를 깎아 내리려고 애쓰던 당시 정적 (政敵) 들도 미움을 거두고 있다.
민정참여를 노린 경력 '미화' 작업도 밝혀져야 하지만 박정희를 흠집내려는 근거없는 '격하' 도 이제 바로잡아져야 한다.
11.독립군 토벌 기회조차 없었다
박정희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것은 친일및 좌익연루 시비다. 친일성 논쟁의 발단이 된 때가 바로 1940년 2월부터 46년 5월까지의 6년3개월이다. 이 시절 그는 광복군과 관련된 비밀 광복군이었는가, 아니면 독립군 토벌에 참여한 친일파였는가.
이를 검증하기 위해 박정희의 이 시절 경력을 간단히 훑어보자. 40년 봄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한 박정희는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 (1942년) 하고 성적 우수자의 특전으로 일본 육사 (57기)에 편입, 본과 2년을 마쳤다. 임관에 앞서 3개월간의 현지 부대 근무를 마치고 44년 7월1일자로 소위에 임관됐다. 임관한지 1년만에 그는 중위로 진급했고 한달뒤 소련군의 참전으로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여기까지 박정희의 경력에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소위 임관후부터 귀국때까지의 구체적인 행적이다. 당시 박정희와 같은 부대에 있었던 한국인 동료장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해보자.
일선서 작전한 적 없어
부대이끌고 작전안해 만주군내 조선인부대인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다가 44년 8월1일자로 보병8단 (團.연대급) 으로 옮긴 신현준 (申鉉俊.82.해병중장 예편) 상위 (대위) 는 "朴소위는 나보다 한달 전에 부임해 있었다.8단 근무기간중 朴소위가 부대를 이끌고 일선에 나가 작전을 한 적은 없었다" 고 회고했다.
같은 부대 7중대 선임장교로 있다가 44년 7월께부터 박격포중대 선임장교 (중위) 로 근무했던 방원철 (方圓哲.77.육군대령 예편) 씨는 "朴소위는 단본부에서 갑종부관을 보좌하면서 비교적 편히 지냈다. 그는 지휘관이 아니어서 중국인 사병이나 민간인들과 어울릴 기회가 적어 중국말도 서툴렀다" 고 증언했다.
박정희가 소위로 임관해 첫 부임한 곳은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보병8단. 단장은 탕지룽 (唐際榮) 이란 중국인 상교 (대령) 였고 그 밑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장교들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 장교는 朴소위를 포함해 4명. 그를 제외한 나머지 3명 (신현준.방원철.이주일) 은 현재 생존해 있다.
朴소위의 첫 직책은 단장 부관이었다. 당시 이 부대 부관부에는 갑.을 각 4명의 장교가 근무했다. 부관 책임자는 시모노 (下野) 대위. 을종부관은 인사와 작전을 담당했는데 중국인 중위 두명 (潘.李) 과 朴소위등 모두 세사람이었다. 朴소위는 예하부대에 작전명령을 하달하고 단기 (團旗) 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해방 전야인 45년 8월14일 저녁. 관동군과 합동으로 팔로군 토벌작전을 나갔다가 온 方중위는 목욕을 시작하려다 단본부 朴중위 (45년 7월1일자로 중위 진급) 의 전화를 받았다.
통화내용을 方씨의 증언으로 들어보자. "첫마디에 朴중위는 처음에는 일본말로 '명령을 하달하겠습니다' 라고 했다가 '지금부터는 기밀상 조선어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며 다시 조선말로 얘기했다. 전달내용은 8월9일 소련군 참전으로 우리부대 (8단) 는 흥륭 (興隆) 을 거쳐 둬룬 (多倫) 방향으로 이동할 계획이니 내일 (15일) 새벽 3시30분까지 병력을 이끌고 단본부가 있는 반비산 (半璧山) 으로 집결하라는 것이었다.
" 박정희는 임관때부터 해방때까지 이 부대 부관으로 있었다는 얘기다.따라서 "박정희가 정보장교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 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한편 60년대에 나온 박정희의 광복군 관련설은 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84년 장창국 (張昌國.전 합참의장.작고) 씨는 '육사졸업생' 이란 책에서 "신태양악극단 (新太陽樂劇團) 이 철석 (鐵石) 부대로 위문갔을 때 이 악극단의 잡역부로 위장한 비밀광복군 이용기 (李龍基)가 박정희와 접촉, 광복군 비밀요원으로 만들었다" 고 주장했다.
또 86년 한 월간지는 한술 더떠 박정희가 신현준 상위, 이주일 (李周一.79.전 감사원장) 중위등 뜻맞는 장교들과 비밀 광복군 조직에 착수했으며 45년 5월부터는 사병들을 광복군으로 훈련시킨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申씨는 "그런 사실이 없으며 우리는 당시 광복군이 있는 줄도 몰랐다" 고 부인했다.
정보장교 주장 사실무근
또 위 두곳에서는 당시 박정희의 소속부대가 보병8단이 아닌 '철석부대' 로 돼 있다. 철석부대란 39년 3월 간도 (間島) 명월구 (明月溝)에서 창설된 간도특설대가 러허 (熱河) 성에 파견돼 있을 때의 별칭이다. 부대장 이하 일부 장교는 일본인이지만 대부분의 장교와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이 부대에 근무했던 송석하 (宋錫夏.82.육군소장 예편).박창암 (朴蒼岩.74. '자유' 발행인) 씨등은 한결같이 "박정희는 이 부대에 근무한 적이 없다" 고 잘라 말했다. 박정희가 철석부대에 근무했다는 기본 전제부터 허위인 셈이다. 당시 철석부대에 위문간 것으로 돼 있는 신태양악극단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이 악극단의 단장이었던 원로작곡가 손목인 (孫牧仁.84) 씨는 "더러 군대위문도 갔지만 철석부대의 이름은 기억에 없고 (단원중 잡역부로 가장해 박정희를 만났다는) 이용기라는 인물은 모르겠다" 고 말했다.
단원이었던 원로가수 申카나리아 (79) 씨와 원로배우 황해 (黃海.77) 씨도 "이용기라는 이름은 기억에 없다" 고 밝혔다.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비밀 광복군 이용기' 는 실존조차 의문스럽다. 이밖에도 박정희가 해방전 광복군과 은밀히 관련됐다는 주장을 뒤엎을만한 증언과 근거는 많다.
그가 해방을 안 시점, 광복군 편입및 귀국과정을 보면 그렇다. 8월9일 소련군의 참전으로 그가 속했던 8단은 14일 저녁부터 5군관구 사령부가 있던 청더 (承德) 를 향해 이동중이었다. 박정희의 군관학교 동기생인 중국인 가오칭인 (高慶印.75.재미) 은 "우리 일행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8월16일이었다. 그날 오후 박정희를 만났는데 그는 '이제 일본이 망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며 앞일을 걱정했다" 고 전한다.
이후 조선인 장교들은 중국인 장교들에 의해 무장해제당한후 베이징 (北京) 으로 가는 길목의 미윈 (密雲)에서 1개월 정도 머무르다 추석이 지난후 마차로 베이징에 갔다 (高씨 증언) . 해방후 베이징에 가 뒤늦게 광복군에 편입된 조선인 출신 만주군 장교는 朴중위를 포함해 신현준 상위, 이주일 중위등 3명. 이들은 해방후 재편성된 광복군 3지대 평진 (平津 ; 北平과 天津) 대대에 편입됐다.
만군 계급순으로 신현준 상위가 제1대대장을 맡고 이주일 중위와 박정희 중위가 각각 1, 2중대장을 맡았다. 당시 상황을 신현준씨는 "베이징에 갈 때까지도 우리는 광복군의 존재를 몰랐다. 8단에 있으면서 광복군과 비밀리에 관련을 맺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다. 우리는 베이징에 가서도 광복군에 들어갈 것인지 의논한후 '해방도 되고 했으니 일단 들어가보자' 고 해 들어갔다" 고 증언했다. 따라서 박정희가 광복군의 존재를 안 것도, 광복군에 편입된 것도 모두 해방후의 일이라는 얘기다.
광복군 존재 해방후 알아
이듬해 5월6일 박정희는 일행과 함께 톈진 (天津)에서 LST선을 타고 출발, 5월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이 배에는 귀국하는 조선인들로 가득찼고 그 속에는 신용호 (愼鏞虎.80.교보생명 명예회장) 씨도 끼어있었다.愼회장은 "朴대통령과 한 배에 타고 온 것은 사실이나 자세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 고 전했다.신현준씨도 "당시 분명히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고 강조했다.
그의 귀국 과정에 대해 박정희의 일본육사 동기인 '조선군사령부' 의 저자 후루노 나오야 (古野直也.73) 는 본사에 편지를 보내와 "박정희가 만주에서 썩기는 아깝다고 생각, 일본 관동군 참모 선배들의 주선으로 육군 전투기를 동원해 서울로 귀환시켰다" 고 주장했다. 일본육사 동창회 소식지 '가이코 (偕行)' (95년 8월호)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일본측의 이런 움직임은 일본 우익들의 '신대동아공영권' 구상과 일맥 상통한다.
朴전대통령과 대만의 장제스 (蔣介石) 전총통이 일본육사 출신이란 점에 착안, "아시아의 지도자 상당수는 일본식 장교양성 교육을 받았다" 거나 "종전의 혼란기 속에서도 일본은 미래를 내다보고 인물을 키우고 보호했다" 는 등의 논리를 내세우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들조차 후송하지 못해 포로가 되는 것을 방치했던 패전의 와중에 식민지 출신 만군 중위를 특별대우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제 박정희의 만주 경력을 둘러싼 근거없는 미화나 의도적인 격하 (格下) 는 막을 내려야 한다.그는 해방전 광복군과 관계를 맺은 적도 없지만 만군시절 독립군 토벌에 나설 기회조차 없었다.그의 만주시절은 어릴 때부터의 꿈인 군인을 이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2.5.16 도왔지만 끝내 토사구팽
여순 (麗順) 사건 발생 직전인 1948년 여름 서울 안국동의 요릿집 아향 (雅香) .30대 전후 청년장교들이 모여 단합대회를 갖고 있었다.
방 가운데 길게 놓인 술상을 마주보고 앉은 이들은 모두 만주군 장교 출신들이었다.
술잔이 오가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고성이 터져 나왔다.
윤태일 (尹泰日.만주 신경군관학교 1기.전서울시장.작고) , 이한림 (李翰林.76.신경 2기.전건설부장관) 씨가 시국현안이었던 이데올로기 문제로 얘기를 나누다가 언성이 높아진 것이다.
언쟁이 계속되면서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다.
이때 구석자리에 앉아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던 조선경비대 사관학교 (육사의 전신) 중대장 박정희 (신경 2기) 소령이 갑자기 맥주잔을 와작 씹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는 순식간에 선혈이 낭자했다.
주위의 시선이 일순 그에게로 쏠렸다.
입속의 유리조각을 내뱉고는 벌떡 일어나 술상 위에 올라선 그는 "후배가 선배에게 그렇게 대들어도 되는 거야" 라고 소리쳤다.
이날 술자리는 박정희의 돌출행동으로 판이 깨지고 말았다.
5.16 직후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 명단에는 육군 소장 박정희를 비롯해 육군 중장 박임항 (朴林恒.신경 1기) , 육군소장 이주일 (李周一.신경 2기) , 육군 준장 최주종 (崔周鍾.신경 3기) , 해병 준장 김윤근 (金潤根.신경 6기) 등 신경군관학교 출신 4명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 외무국방위원장에 선임된 김동하 (金東河.해병대 중장 예편) 씨도 신경군관학교 1기 출신이다.
이들은 5.16 당시 병력을 동원하거나 거사준비 과정에서부터 참여한 핵심이었다.
신경군관학교 출신들 가운데서도 1기생들과 2기생들이 가장 가까웠다.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등 2기생은 1기생 선배들로부터 가혹한 '얼차려' 를 받았다.
박임항 (전건설부장관.작고) , 최창륜 (崔昌崙.6.25때 전사) , 방원철 (方圓哲.77.육본 초대 전사감) 씨등은 이들을 잘 키워 보겠다며 엄하게 다뤘다.
이때 다져진 선.후배간의 인간적인 유대는 5.16 거사의 밑거름이 됐다.
5.16은 병력 동원과 기획을 맡았던 육사 5기와 8기생, 즉 박정희가 육본 정보국과 육사 중대장 시절에 인연을 맺었던 부하들이 중심이었다.
여기에 신경군관학교 선.후배들은 오랜 인연을 맺은 벗이자 동지였다.
5.16 당일 박정희와 군관학교.일본 육사 동기생인 이한림 1군사령관은 해병대에 전화를 걸어 "여단장 (김윤근.70.해병 중장 예편) 도 나갔어?
확실히 나갔어?" 하면서 확인전화를 건 적이 있다.
뒷날 李씨는 "해병대의 김윤근 부대가 가담한 것을 알고는 진압을 포기했다" 고 술회했다.
당시 해병대는 군 내부에서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군관학교 인맥의 또 한 갈래는 신경군관학교 전신인 봉천군관학교 출신들이다.
朴정권하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丁一權) 씨, 초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신현준 (申鉉俊.82.해병 중장 예편) 씨등은 5기생이고 백선엽 (白善燁.77.육군 대장 예편) 씨는 이 학교 마지막 기수인 9기생 출신이다.
5.16 당시 이들은 대부분 예편해 있었다.
만군인맥의 선배그룹인 이들은 박정희가 여순사건 직후인 48년 11월 좌익 연루 혐의로 구속됐을 때 구명운동을 펴 그를 살려낸 주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5.16을 기점으로 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 선.후배들은 서로 등을 돌린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5.16에 참여한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개 장성급이었다는 점에서 5.16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그러나 권력의 생리는 냉혹했다.
토끼 사냥이 끝나니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는 토사구팽 (兎死狗烹) 의 논리가 이들을 덮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김윤근씨는 "박정희는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동문중에서 단 한명도 육참총장을 배출하지 않았다" 며 "이는 박정희가 동문 선.후배를 경계했던 것" 이라고 풀이했다.
사석에서 "어이, 박정희 (또는 朴소장)" 라고 부르며 朴의장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이들이 언제부터인가 부담스러워졌던 것이다.
박정희와 군관학교 출신들의 사이가 뒤틀어진 결정적인 계기는 민정이양을 둘러싼 충돌 때문이었다.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빚어진 잡음으로 김종필 (金鍾泌) 씨가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나기 1주일 전인 1963년 2월18일.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박정희 의장은 조건부 민정 불참을 골자로 한 '시국수습에 관한 9개 방안' (2.18선언) 을 내놓았다.
이 선언이 발표된 직후 1기생 김동하.윤태일.박임항은 서울 약수동 비밀요정에서 박정희를 만나 "혁명공약 6항에는 우리의 과업이 완수되면 군대로 복귀한다고 돼 있다.
우리는 이 공약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만약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우리는 빠지겠다" 며 으름장을 놓았고 박정희는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 며 굴복했다.
박정희는 돌아와 이 문제를 김종필과 상의했는데 金씨는 "등기문서는 처음부터 내 이름으로 해야지 제3자 이름으로 했다가 다시 내 이름으로 하자면 어렵다" 며 朴의장의 민정 참여를 강력히 주장했다고 한다 (군관학교 출신 Q씨 증언) . 이 일이 있은지 한달도 지나지 않은 그해 3월11일 김동하.박임항.박창암 (朴蒼岩) 등이 포함된 소위 '군 (軍) 일부 쿠데타사건' 이 발표됐다.
5일 뒤인 3월16일 朴의장은 군정 4년 연장을 제의하면서 정국을 다시 긴장상태로 몰고 갔다.
결국 박정희로서는 생사를 함께 한 혁명동지이자 선.후배들의 목을 자르면서 민정 참여의 명분을 축적한 셈이다.
당시 재판부는 '사건 아닌 사건' 을 처리하면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결국 이 사건은 피의자들이 기소사실을 시인하고 곧이어 보석.사면.복권되는 수순으로 처리됐다.
이 사건은 박정희와 김종필계가 주체세력 내부에서 민정이양과 군의 원대복귀를 주장하는 껄끄러운 존재들을 거세한 작전이었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알래스카 토벌작전' 이라고 꼬집었다.
이들 대다수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함경도 출신인 점을 지칭한 것이었다.
이로써 만군인맥은 군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만군인맥 중에서 박정희와 가까워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온 이주일씨까지도 몇 차례 고비를 넘어야 했다.
74년 6월 5.16 주체중 한사람인 홍종철 (洪鍾哲.전최고위원) 씨가 작고했을 때 李씨는 洪씨 상가에 들렀다가 귀가길에 일행과 명동에서 술을 한잔 마시며 "그 사람 대통령감인데…. 일찍 죽어 안됐다" 고 洪씨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그런데 이 얘기는 다음날 '李씨가 洪씨를 대통령으로 밀려고 했다' 고 보고됐다.
'요주의 인물' 로 낙인 찍힌 만군인맥들은 이른바 '반혁명사건' 때마다 거명됐다.
김동하씨는 "반혁명은 내가 '전매특허' 를 받아놓았나. 왜 내 이름이 항상 거론되는지 모르겠다" 고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64년 5월 총리로 취임한 정일권씨가 겪은 일화 한 토막은 박정희의 만군인맥에 대한 경계심을 잘 드러내준다.
丁총리는 어느날 5.16후 군에 복귀해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던 후배 최주종씨로부터 "형님, 저 이번에 중장 진급을 앞두고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라는 인사를 겸한 부탁을 받았다.
평소 崔장군을 좋게 봐오던 丁총리는 박정희를 찾아가 "이번 장군 진급에 崔장군을 선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2주일 후 崔장군에게는 예편 통지서가 전달됐다.
한편 박정희는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거나 불우한 동창생들에 대해선 비교적 온정을 베풀었다.
술자리에서 노래를 잘해 기생들도 혀를 내둘렀다는 예관수 (芮琯壽.신경 4기) 씨의 경우가 한 예다.
박정희는 '예관수는 정치성이 없지' 라며 사업을 돌봐줘 한때 그의 소득이 재벌 대열에 든 적도 있다고 동창생들은 말했다.
5.16 주체 가운데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날개 꺾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국영기업체 임원자리를 주거나 사업을 돌봐주기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정희는 권력에 도전할 위험성이 있는 인물에 대해선 서릿발 같은 냉혹함으로 대했지만 권력욕을 포기한 사람에 대해선 최소한의 인간적인 의리를 지키려고 했던 것같다.
청년장교 시절을 만주에서 같이 보냈고 5.16 때는 목숨을 걸고 거사를 같이 했던 만군인맥. 그들은 朴정권 하에서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맛봤다.
박정희와 애증을 경험한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고인이 됐고 생존자들도 80세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그들 역시 박정희와 함께 역사속의 인물로 사라져 가고 있다.
13.가난 추방은 천명 필생의 업 간주
민간인이면서 '5.16 혁명주체세력' 으로 통하는 김용태 (金龍泰.72.전의원) 씨는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의 오랜 술친구였다.
그는 김종필 (金鍾泌.JP) 자민련총재의 서울대 사대 동창이자 같은 충남 출신이며 6.25 당시 대구로 피난갔다 JP의 주선으로 박정희중령의 집에 한달여 기식했다.
호주가인 金씨는 이때부터 술친구의 연 (緣) 을 쌓았고, 5.16당시에는 JP와 함께 혁명을 알리는 포고문 인쇄작업을 맡아 주체세력의 반열에 올랐다.
박정희가 술을 마시다 얼큰히 취하면 항상 빼먹지 않고 되풀이하는 바람에 그의 귀에 박힌 얘기 한토막. "임자, 임자는 배고픈게 어떤건지 아나. " 자문자답 (自問自答) 형식의 회상이기에 대답은 필요없었다.
"난 어릴 때 말이야 벤또 (도시락의 일본어) 를 못싸갔어. 점심시간에는 운동장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점심시간 끝날 때쯤 배가 터지게 냉수를 들이켜고 교실로 되돌아 가곤 했지…. 학교 끝나고 집에 가도 먹을게 있을리 있나. 솥뚜껑도 열어 보고 찬장도 뒤져보다 아무 것도 없으니까 손가락으로 간장 한번 찍어 먹고 또 물 마시고…. " 朴대통령의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를 잉태한 어머니가 식구의 입을 늘리지 않기 위해 간장을 마시고 언덕에서 뒹굴기도 했다.
朴대통령은 이렇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가난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을 '하늘의 뜻' 으로 해석하며 자신을 추슬렀다.
"세상 만물에는 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데, 내가 태어난 데에는 필시 하늘의 뜻이 있었지 않았겠나…. 내게 주어진 하늘의 뜻은 이 민족의 가난을 추방하는 기적을 창조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가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한맺힌 삶을 살아왔는가.
" 朴대통령이 71년 12월 자신이 존경했던 군선배 이용문 (李龍文) 장군의 아들 이건개 (李健介.자민련의원) 검사를 수도 경찰의 총수 (서울시경국장) 로 임명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다.
朴대통령은 어린 시절부터 귀여워 해온 李검사였기에 임명장을 준뒤 따로 불러 이런 속생각을 독백하듯 털어놓은 바 있다.
가난 추방은 박정희 스스로의 삶속에서 확신한 하늘의 뜻, 즉 '천명 (天命)' 이었으며 전생애를 통해 변함없이 일관한 철학이었다.
朴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경제개발의 신화를 가꾸었던 김정렴 (金正濂.74.전대통령비서실장) 씨는 "朴대통령의 경제개발에 대한 집념은 단순히 경제차원이 아니라 국가안보와 통일, 정치적 민주주의와 인권까지 모두 경제에서 나온다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기에 사실 그의 통치철학 전부나 마찬가지" 라고 설명했다.
구체적인 예로 朴대통령은 "농촌의 빈농과 도시의 노무자들이 배를 곯지 않아야 북한에 먹히지 않는다" 고 역설하곤 했다....
소련식 공산혁명 이론의 주인공인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와 중국식 공산혁명의 주인공인 빈농이 없어져야 공산화를 막을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朴대통령은 이를 위해 "빈농은 자작농으로, 도시 노무자들은 기능공으로 안정된 소득의 중산층이 돼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새마을운동과 직업훈련이란 형태로 구체화됐다.
朴대통령은 또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 가장 중요한 인권보장이며, 건전한 중산층이 형성된 뒤에야 정치적 민주주의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런 입장이 정치에는 철권통치로, 경제에서는 경제 제일주의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나아가 통일 역시 남한이 부강한 나라가 됐을 때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지,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가졌다.
이같은 경제개발에의 집념과 경제중심 철학은 박정희라는 인물이 군인.혁명가.대통령으로 걸어온 여러 길목, 주요 고비에서 그 스스로의 육성을 통해 확인된다.
군인 박정희는 6.25 와중에서 전쟁의 참상마저 가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구 피난시절 소금을 안주삼아 깡소주를 마시던 朴중령이 술친구 김용태씨에게 토로했다.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할텐데…. 참 비극이야. 전쟁을 막으려면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하는거야. 공산주의 침투를 막으려면 빈곤을 없애는 길 밖에는 없어. " 박정희는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술을 좋아했던 그는 술기운을 빌려서야 감춰진 속마음을 드러내곤 했다.
어쨌든 당시 술자리의 결론은 "군대가 너무 썩었어" 였다.
군시절 그는 군의 당면과제로 군내의 부정부패 추방을 생각했다.
57년 6군단 부군단장 시절 박정희준장은 전방에 설치할 철조망을 빼내 동대문시장에 팔아 먹으려던 방첩 부대원을 붙잡은 산하부대 중대장에게 "잘했어. 그런 도둑놈들은 모두 다 잡아넣어야 돼. 장제스 (蔣介石) 군대가 왜 망했는줄 아나. 총 나눠주면 팔로군 (毛澤東의 공산군)에 팔아먹은 도둑놈들 때문이야. 썩은 군을 바로잡지 못하면 나라를 바로잡지 못해" 라며 격려했다.
그러나 朴장군의 소극적 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대담하게, 그리고 보다 정치적으로 변해갔다.
4.19 직후 부산 군수사령부 사령관 박정희소장은 송요찬 (宋堯讚) 참모총장에게 군의 부정선거 협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용퇴하라는 내용의 친필편지를 보냈다.
宋총장은 박정희장군이 5사단장 시절 폭설로 수십명의 부하를 잃은 사고를 당했던 당시 직속상관이던 군단장으로, 朴장군을 문책하는 대신 표창을 준 은인이다.
朴소장의 편지사건을 계기로 김종필대령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생들은 정군 (整軍) 을 주장한 연판장을 만들어 돌렸고, 결국 宋총장은 전역할 수밖에 없었다.
朴장군의 정군운동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朴장군의 정치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미뤄볼 때 당연한 수순이다.
무능한 정치인이 이 백성을 가난 속에서 허덕이게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군수사령관 박정희의 술친구였던 이병주 (李炳注.소설가.작고.당시 부산 국제신보 주필) 씨는 朴장군의 정치관을 시사하는 일화를 글로 남겼다.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이 하야한 얼마후 송도 바닷가에서 朴장군.李주필, 그리고 朴장군의 대구사범 동기인 황용주 (黃龍珠.당시 부산일보 주필) 씨등이 술판을 벌였다.
朴장군은 李주필이 李대통령 하야에 대해 쓴 사설에 대해 논평했다.
"李주필이 너무 정이 많은 것 아니오. 미국에서 교포 모아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린게 독립운동입니까. 독립운동 했다는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 대구사범 동기인 黃주필이 "싸잡아 그렇게 말하면 안돼. 진짜 독립운동한 사람들도 많아" 라고 하자 朴장군은 더 흥분했다.
"해방 직후 우후죽순처럼 정당을 만들어 나라를 망친 자들이 누군데. 독립운동 했습네 하고 나선 자들 아닌가.
" 이날의 결론은 군대신 '정치판이 썩었다' 였다.
그로부터 1년 뒤 마침내 군인 박정희는 5.16을 통해 혁명가로 변신했고, 그의 생각을 요약해 국민 앞에 내놓은 것이 혁명공약 6개항이다.
그중 제4항이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이다.
혁명의 청사진을 만들었던 제1참모 김종필 자민련총재는 최근 인터뷰에서 공약중 4항, 그중에서도 '재건 (再建)' 이란 표현을 강조했다.
"혁명 전부터 朴대통령과 항상 얘기하던 것이 경제 제일주의였어요. 경제력없이는 아무 것도 안된다는 거였죠. 그래서 나온 말이 '나라를 새로 만든다' 는 의미의 '재건' 이었습니다.
그래서 혁명 지휘부를 국가재건최고회의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 그런데 '천명' 을 받아 목숨을 걸고 정권을 잡았다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얼마 후부터 "괜히 혁명했다" 고 후회하곤 했다.
62년 박정희 대통령권한대행의 비서실장이었던 이동원 (李東元.71.국민회의) 의원 역시 호주가.
朴대통령과 밤을 새우며 통음하던중 직접 朴대통령의 탄식을 들었다.
"李실장, 내 아무래도 혁명 잘못한 것같소. 멋진 나라 만들려는 꿈이 있어 나섰는데…. 돈이 있어야 뭘 좀 해보지, 맨 몸으로 뭘 하겠소. " 이날 朴대통령은 가난한 나라 꼴을 "한겨울에 문풍지조차 없어 찬 바람은 들어오는데 땔감이 없어 벌벌 떨어야하는 초가집, 그것도 세간마저 싹 도둑맞은 초가집" 으로 비유했다.
그런데 혀를 차다가 술잔을 휙 비운 그의 눈에서 갑자기 독기가 뿜어나왔다.
14.발전 모델은 일본 추진은 군대식
대통령 박정희 (朴正熙)에게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의 경제치적에 매료돼 있다. 박정희의 대통령 재임시 보인 경제개발에 대한 열정과 목표달성을 위한 숨돌릴 틈 없는 밀어붙이기,치밀한 사후 점검등의 독특한 스타일은 그의 사후 (死後)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박정희의 경제관은 어떻게 형성됐으며, 경제개발의 모델은 어느 나라였을까. 그 저변에는 어떤 의식이 깔려 있었을까. 그와 지근거리에 있었던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 해보자. 62년 박정희 대통령권한대행이 가난한 조국을 한탄하던 술자리에서 대작하던 이동원 (李東元.71.현국민회의의원) 비서실장은 위로겸 아이디어를 냈다.
"각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영국도 우리처럼 국토가 좁고 자원도 없었지만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자원.자본.노동력을 외국에서 끌어들여와 오늘의 영국을 만들었습니다. 영국에서 배워야합니다. "
그러자 듣고 있던 朴대통령이 한마디 했다.
"뭐 영국까지 갈 필요가 있겠소. 가까운 일본에서도 배울게 많은데…. " 李실장은 해방후 연세대 학생회장으로 우익 학생운동을 하다가 유학,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수학한 인물. 朴대통령은 알다시피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일본육사로 유학했던 일본군인 출신이다.
두 사람이 각각 영국과 일본을 생각한 것은 이런 유학경험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사실 朴대통령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을 모델로 생각하고 있었다. 李실장에 앞서 5.16 직후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시절 비서실장은 최근 포항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정치권으로 돌아온 '철의 사나이' 박태준 (朴泰俊.70.육사6기.당시 대령) 씨였다.
당시 朴의장은 朴비서실장을 불러 은근히 한마디 건넸다.
"朴실장, 거 말이야, 야스오카 (安岡) 라고 알지. 어떻게 연락이 안될까. "
야스오카 마사히로 (安岡正篤) .그는 당시 일본의 국사 (國師.나라의 큰 스승) 로 통하던 우익 한학자였다. 그는 도쿄 (東京) 대 정치학과를 나왔지만 동양철학, 특히 실학인 양명학에 깊이 심취했던 인물로 '동양중심 = 일본중심' 사상으로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 인명사전에 (1927년 당시 29세였던 그가) '금계 (金鷄) 학원을 설립해 일본정신을 고취했다' 고 나올 정도로 일찍부터 유명해진 그는 83년 숨질 때까지 일본 정계.재계의 막후실력자로 통했다. 46년, 48년 두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낸 일본정계의 거물 요시다 (吉田) 총리도 취임연설문등 주요문안을 만들 때면 그에게 자문을 했고, 심지어 일왕 히로히토 (裕仁) 의 미국에 대한 항복문도 그의 검토를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朴비서실장 역시 일본 와세다 (早稻田) 대학에 유학한 일본통. 朴의장이 밀명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부연설명을 했다.
"야스오카는 유학 (儒學) 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아시아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있거든. 한번 그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 "
박태준의원은 최근 인터뷰에서 "일본에 있던 대학동창등 인맥을 동원해 야스오카와 선이 닿아 편지를 몇번 전달했으며, 나중에는 이용희 (李用熙.81.전통일원장관) 서울대교수가 메신저 역할을 맡았다" 고 밝혔다. 일본의 국사로 추앙받던 야스오카가 한국의 대통령 박정희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朴대통령이 정권을 잡자마자 일본의 국사를 떠올렸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5.16 이전 박정희라는 인물은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왔기에 경제정책에 대한 별다른 구상은 없었다. 혁명주체의 한사람인 朴의원이 대령시절 쿠데타를 모의하던 朴장군으로부터 들었다는 경제구상.
"나야 경제가 뭔지 잘 모르지만 일제시대부터 관리했던 사람, 은행에서 부장했던 사람도 있고, 미국에서 경제공부하고 온 사람도 있잖아. 다 끌어모아 하면 돼. " 구체성은 없고 왕성한 혈기만 느껴진다. 朴대통령이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괜히 쿠데타했다' 고 후회했음직하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이 있다고 주저앉는 성격이 아니었다. 61년 후반기의 어느날 그가 특유의 독기를 뱉으며 당시 최고회의 경제고문이었던 민간인 혁명주체 김용태 (金龍泰.72.전의원) 씨에게 한 말이 있다. "앞으로 난 경제공부만 할거야. "
朴대통령은 특히 일본경제 공부에 열심이었다. '일본경제사' 라는 딱딱한 책도 읽었고, 일본신문을 공수받아 스크랩하면서 꼼꼼히 읽었다. 일본의 역사책이나 역사 다큐멘터리 영화, 심지어 사무라이 영화까지 직접 대사관에 특명을 내려 가져다 봤다. 그중에서도 朴대통령이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은 일본의 근대화를 가능케 했던 메이지 (明治) 유신이다.
김정렴 (金正濂.73.전대통령비서실장) 씨는 朴대통령의 경제철학에 깔린 역사관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朴대통령은 일본육사시절 배웠던 일본사와 전사 (戰史)에 해박했어요. 朴대통령은 19세기 서구의 문물이 동방으로 유입되고 한국과 일본이 구미열강의 개방압력을 받았을 때 일본은 개방정책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강대국이 됐는데, 우리 지도자들은 쇄국정책으로 문을 걸어닫은채 당파싸움만 일삼는 바람에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
당시 일본의 지도자들은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19세기 사무라이 지사들이다. 결론은 간단해진다. 金씨는 "당파싸움 같은 내분을 일으키지 않고 메이지유신의 지사처럼 조국근대화에 나서 민족중흥을 이루는 것" 이 곧 朴대통령의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경제철학이라고 말했다. 10월유신 (維新) 의 뿌리이기도 하다.
朴대통령의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더 필요하다.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전경제2수석) 씨는 "朴대통령은 중요한 일을 할 때면 군인으로 돌아간다" 고 말했다.
간단명료한 지시, 부연설명이 없는 상명하달,치밀한 점검, 그리고 숨돌릴 틈 없는 밀어붙이기등. 일본식 발전 모델에다 군인식 스타일이 덧붙여져야 박정희라는 인물의 경제관과 경제 운용방식이 제모습을 드러낸다. 일본식 발전모델의 특징은 자본주의체제이면서도 서구와 달리 민간사업이 국가사업처럼 민관 일체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일본 주식회사' 라고 부른다.
朴대통령은 '주식회사 대한민국' 의 사장, 또는 '경제개발전쟁' 의 총사령관같이 일했다. 60년대초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집행되고 있을 당시 朴대통령의 집무실에는 각 사업 (주로 1백여개 민간공장 건설) 의 진행상황을 기록한 대형 패널을 회전기둥에 묶어 한장씩 넘기면서 볼 수 있는 장치가 놓여 있었다. 군대의 상황판 같은 것이다.
매주 상공부 담당국장이 진행상황에 맞춰 상황판을 수정했는데, 朴대통령은 한장씩 넘겨보다가 예정보다 부진한 곳이 있으면 당장 전화기를 들어 기업인과 해당부서를 다그쳤다. 고도성장이 시작된 70년대초 "중화학공업추진자금을 만들라" 는 朴대통령의 지시에 남덕우 (南悳祐.73.전국무총리) 당시 재무장관이 인플레이션의 우려를 들어 반대했다.
이때 朴대통령이 한 얘기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을 보시오. 일본은 나라의 운명을 걸고 대동아전쟁을 일으켰어요. 전쟁에 졌는데도 오늘날 경제대국이잖소. 돈을 푸는 것은 나라의 운명을 거는 것도 아니고 경제의 일부를 거는 건데, 한번 해봅시다. "
다시 일본얘기고, 전쟁얘기다.
朴대통령의 비장한 각오를 듣고 외면할 수 있는 장관은 없을 것이다. 南장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朴대통령은 이런 경제장관들을 매우 오랫동안 중용했다. 필요에 따라 썼다가 사정없이 연을 끊어버리는 정치권 인사들에 대한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경제학자 출신인 南장관은 69년부터 74년까지 재무장관, 78년까지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다. 78년 12월22일 南장관이 공직을 물러나던 날 5.16직후 화폐개혁에 참여한 이후 17년간 朴대통령의 경제개발을 도왔던 김정렴 당시 대통령비서실장도 함께 물러났다. 朴대통령은 이들을 그대로 떠나보내지 않았다.
金실장은 바로 주일대사로, 8일후 南씨는 朴대통령의 경제특보로 임명됐다. 오원철 경제2수석은 5.16직후부터 朴대통령과 연을 맺어 10.26 때까지 경제수석으로 청와대에 남아 있었다. 이 또한 일본식 '오야붕' 기질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예인은 자신의 음 (音) 을 들어줄 벗을 찾아 평생을 헤매고, 장부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던가.
이들 경제관료는 목숨을 걸고 메이지유신을 일으켰던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지휘관의 명령에 사지로 뛰어드는 병사들처럼 '주군 (主君) 이자 사령관' 인 朴대통령의 개발신화에 사로잡혔다.
15.맨손의 재건 두달만에 청사진 완성
"나는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을 애국자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두가지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첫째, 민주주의라는게 좋긴 한데 미국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도입했어요. 우리 실정에 맞지 않습니다. 둘째, 그 분은 경제개발에 대해 너무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국민을 계속 가난 속에서 허덕이게 내버려뒀어요. "
5.16 직후인 1961년 5월20일을 전후한 어느날. 당시 산업은행 조사부에서 일하고 있던 김성범 (金聖範.73.전효성중공업 상임감사) 씨는 박정희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의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시만 해도 민주주의와 미국식 민주주의는 동의어로 여겨지던 때였다.
이후 金씨는 朴정권 18년동안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적 민주주의' 와 '10월 유신' 등의 발표가 있을 때마다 朴부의장의 이날 발언을 되씹어보곤 했다.
朴부의장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혁명을 한 것은 5천년 묵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소. 그러려면 우선 계획이 있어야만 합니다. 8.15 광복절 이전에 작업을 마쳐주세요. "
30代 민간엘리트에 맡겨
朴부의장은 金씨를 포함한 민간인 3명에게 특유의 단호한 어투로 경제개발계획을 만들어 줄 것을 당부했다. 이 자리가 건국이후 최초로 시행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만들기 위한 첫 모임이었다. 金씨등 3인은 서울퇴계로로 옮긴 최고회의 건물 (옛 참의원 자리.코리아 헤럴드사 건너편) 한 구석방에서 곧바로 밤샘작업에 돌입했다. 물론 자유당과 민주당 시절에 만들어졌다가 4.19와 5.16의 발생으로 햇빛을 보지 못한 경제개발계획안이 참조가 됐다.
이날 朴부의장을 만난 3인은 金씨외에 정소영 (鄭韶永.65.고려종합연구소 회장).백용찬 (白鏞粲.68.전농업경제연구소장) 씨. 워싱턴 주립대 경제학박사 출신인 鄭씨는 5.16 다음날 재무부 사세국 토지조사과장직을 내던지고 미국에 대학교수로 가기 위해 준비하던중 최고회의의 소환전화를 받았다.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 보좌위원 (과장급) 으로 1, 2공화국때 경제개발 7개년계획과 5개년계획을 직접 짠 경험이 있는 白씨는 경력때문에 발탁된 경우. 김성범씨는 5.16 주체세력들에 거사자금을 지원했던 민간인 남상옥 (南相沃.전타워호텔 회장.작고) 씨의 추천으로 작업팀에 합류했다. 당시 鄭씨는 29세, 白씨는 32세였고 가장 연장자인 金씨가 37세였다.
결국 1차 5개년계획의 밑그림을 그리는 임무가 이들 20, 30대 젊은 인재들의 손에 맡겨진 것이다. 1차산업 분야는 白씨가, 2차산업은 金씨가, 3차산업은 鄭씨가 각각 맡았다. 이들은 "내 일생에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 며 지금까지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군사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서두른 이유는 무엇일까. 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장이었던 유원식 (柳原植.전협화실업회장.작고) 대령의 증언 (회고록) .
"우리가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도 있고 근대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세울 수 있는 지적수준을 갖고 있다는 것을 국내외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경제개발계획을 만든 것은 5.16 주체세력들의 자존심 때문이었다는 얘기다. 자존심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거사계획에 처음부터 참여하고 주도한 김종필 (金鍾泌) 자민련총재의 얘기는 다르다.
"혁명할 때부터 경제개발에 치중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시작했습니다. 혁명 직후 나온 '재건' 이니 '근대화' 니 하는 용어가 바로 경제를 염두에 둔 것이었지요. 朴대통령도 거사 전부터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고, 논의도 많이 했습니다."
혁명주체들 사이에서도 핵심과 주변의 사고는 이처럼 달랐는지 모른다. 군사정변에 의혹을 품은 미국이 한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도 박정희를 다급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7월 하순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대한 기본안이 마련됐다. 10년내에 소득을 비롯한 경제규모를 두배로 늘린다는 것이 골자였다.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7.1%.폐허나 다름없던 그 당시의 경제상황에서 경제성장률 7.1%는 구름잡는 얘기로 들렸다. 어떤 근거에서 그런 수치를 설정했는지 물어보았다. "10년안에 국민총생산 (GNP) 과 국민소득을 두배로 늘린다는 목표를 먼저 세웠습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률이 그만큼은 돼야 했지요. "
말聯.인도 경험도 참고
목표치를 먼저 세워놓고 경제성장률을 역산 (逆算) 했다는 뜻이다. 다분히 주먹구구식이다. 80일내로 국가의 장래를 끌고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세우라는 박정희. 이 역사적인 작업을 주어진 기한보다 20일 앞당겨 60일만에 해낸 작업팀.
그런데 묘한 것은 60년 19억5천만달러에 불과하던 남한의 GNP가 10년 뒤인 70년엔 79억9천만달러로 4배로 늘어났고, 1인당 GNP도 60년 94달러에서 70년 2백48달러로 2.6배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통일원 '분단 45년 남북한 경제의 종합적 비교연구' 참조) . 우여곡절 끝에 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되면서 당초 계획자들조차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두배 성장을 훨씬 상회하는 결과가 나온 셈이다.
어쨌든 작업팀은 먼저 朴의장 (61년 7월3일부터 최고회의 의장이 됐다)에게 기본안을 브리핑했다. 백용찬씨의 증언. "朴의장은 계획안이 잘 됐다며 굉장히 만족해 하셨어요. 작업팀에 금일봉도 주셨지요. " 이틀후 朴의장은 군사정부내 고위급 인사 1백50여명을 최고회의 1층 회의실에 모았다. 브리핑에 앞서 박희범 (朴喜範.작고) 당시 서울대 교수가 사회간접자본.GNP등 경제용어를 간단히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용어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정소영씨의 증언.
"朴의장은 맨 앞자리에 앉아 1시간30분동안 자세를 꼿꼿이 하고 경청했어요. 브리핑이 끝나자 朴의장은 '진짜 혁명은 이 계획의 성공여부에 달려 있다' 고 총평을 하셨어요. " 그러나 일부 최고위원들은 5개년계획안에 대해 시큰둥했다.
작업팀의 일원이었던 김성범씨의 증언.
"며칠후 유원식 대령이 분을 삭이지 못한 표정으로 작업팀 방에 들어왔어요. 글쎄, 일부 최고위원들이 '지금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태평스럽게 무슨 5개년계획이냐' 며 빈정댄다는 거예요. "
朴의장은 이런 비아냥을 묵살했다. 군사정부는 61년 7월22일 경제기획원의 신설과 함께 '종합경제재건 5개년계획' 을 발표했다. 1, 2공화국때 두차례의 경제계획안이 마련되긴 했지만 집권자의 의지가 담긴 주요 국가목표로 추진되기는 처음이었다.
朴의장은 이 계획을 토대로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짜라고 경제기획원에 지시했다. 송정범 (宋正範.74.경제기획원 초대 부원장) 씨는 "말레이시아와 인도의 5개년계획 등을 참조했다" 고 말했다.
그러나 이 계획안 수립때 자문교수단의 일원이었던 성창환 (成昌煥.80.고려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씨는 흥미있는 증언을 했다. "당시 경제기획원에서 만든 실행계획안은 세월이 많이 흘러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나치게 계획경제 쪽으로 기울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경제계획과 계획경제는 분명히 다르다' 고 지적했지요. 결국 혼합경제를 주조로 한 수정안이 만들어졌습니다."
財源달려 2년못돼 수정
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발표됐다. 계획경제와 경제계획의 개념조차 불확실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이 계획은 미국으로부터 '쇼핑 리스트' 라는 혹평을 받았다. 제철.정유.조선.시멘트.비료 생산을 위한 공장건설의 재원등은 고려치 않고 의욕만 앞세워 실현불가능한 계획을 짰다는 얘기였다.
세계은행도 "연평균 7% 성장은 선진국에서도 유례가 없다" 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공장건설 계획안은 오원철 (吳源哲.69) 당시 상공부 화학과장등 상공부 관리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안은 재원부족때문에 건설순위의 조정은 있었지만 결국 朴정권 18년의 경제를 지탱하는 초석이 됐다. 朴의장은 61년 11월 미국을 방문,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원조를 요청했지만 미국측은 "모두 세우려면 약 20억달러가 들텐데 한국같이 가난한 나라에 누가 투자하겠느냐" 며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경제개발은 의욕만으로는 되지 않았다. 63년 사업을 한창 추진하던 참에 돈이 떨어졌다. 그해 9월말 달러 보유고는 고작 9천3백만달러. 사업추진에 커다란 차질이 빚어졌다. 朴의장은 5개년계획 사업 진척상황을 거의 매일 체크해가며 전화로 장관들을 독려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대로 5개년계획을 계속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침내 사업 축소작업이 시작됐다. 연평균 경제성장률도 당초 7.1%에서 5%로 낮췄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때 대안으로 대두된 것이 바로 수출제일주의였다.
16.좌초한 경재개발 수출로 돌파구
늦여름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64년 8월 어느날 오후 부산시범일동의 신발 생산업체 국제고무 사장실. 공장 한 구석에 칸막이를 세워 만든 공간은 요란한 기계소리와 한증막을 방불케 하는 무더위로 가득찼다. 허름한 탁자에 세 사람이 둘러앉아 사이다로 목을 축이며 입씨름을 계속했다.
양태진 (梁泰振.작고) 사장과 수출 독려차 서울에서 내려온 박충훈 (朴忠勳.78.산업개발연구원장) 상공부장관,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공업1국장이었다.
"梁사장, 금년에 얼마까지 수출할 수 있다는 거요. " 吳국장이 추궁하듯 물었다. "우리 회사 사정상 도저히 30만달러는 불가능합니다. 5만달러 이상은 어려울 것같습니다. " 梁사장이 하소연하듯 대답했다. 두 사람의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자 가만히 듣고 있던 朴장관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梁사장, 회사 사정도 있지만 정부 방침도 있고 하니 금년에는 10만달러 수출하는 걸로 합시다. " (오원철씨 증언)
대통령은 수출 총사령관
64년 5월 상공부장관에 임명된 朴장관은 '수출만이 살 길' 이라며 수출증대를 독려하기 위해 전국 주요 수출업체들을 직접 방문하고 나섰다. 朴대통령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달러 부족으로 좌초될 위기에 몰리자 달러 확보를 위해 수출관계 장관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당시 상공부장관 박충훈씨는 "朴대통령은 수출전선의 총사령관이었고, 나는 그 밑의 참모장격이었다" 고 회고했다. 그가 언제부터 수출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는지, 그의 이런 태도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였는지 증언을 통해 점검해 보자.
먼저 60년대에 상공부차관과 두차례의 상공부장관, 부총리겸 기획원장관을 지낸 박충훈씨의 증언.
"61년 8월 내가 상공부차관에 임명됐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상당수 최고위원들은 수입대체산업 육성방안을 선호했고 상공부는 수출에 역점을 두자는 입장이어서 충돌이 있었습니다. 朴의장 앞에서 이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을 때 朴의장은 상공부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
5.16직후부터 수출에 중점을 뒀다는 얘기다. 60년대 재무.상공부 장.차관을 지냈고 69년부터 78년까지 최장수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하면서 경제를 챙긴 김정렴 (金正濂.73) 씨의 증언은 다르다.
"64년 6월 내가 상공부차관에 취임했을 당시에는 고평가 된 환율과 차별관세.저금리등에 의한 안이한 이득 때문에 수출보다 수입이나 수입대체산업이 유리해 수출산업은 부진한 상태였습니다. 상공부 국장단회의 때마다 수입대체공업에 대한 보호정책에서 벗어나 수출지향공업화의 길로 가자고 역설했습니다. "
60년대에 상공부 화학과장.공업1국장.차관보를 거쳐 청와대 경제2수석을 역임한 오원철씨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박충훈장관이 취임 하루전에 나를 불러 중점을 둬야 할 업무에 대해 묻기에 '외화고갈과 경제파탄을 막기 위해서는 수출밖에 해결책이 없다' 고 말했습니다. 朴장관은 취임직후 나를 경공업담당인 공업1국장에 임명했지요. 그래서 수출 주종품목이 될 수 있는 경공업으로 공업구조를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지요. "..
이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박정희는 5.16직후부터 수출에 관심을 둔 것은 사실인 것같다. 그러나 공장건설을 위한 재원고갈과 수입대체산업 중심의 공업구조에 대한 한계등을 절감하면서 64년을 기점으로 수입대체에서 수출로 무게중심을 옮겨간 것이다. 경제개발과 공장건설에 쓰일 재원조달을 위해 군사정부는 5.16직후 부정축재자로 몰아 헌병사령부에 수감했던 대부분의 기업인들을 활용할 궁리를 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고문이었던 김용태 (金龍泰.71.전공화당 원내총무) 씨의 증언.
"최고회의에서는 기업인들이 국민의 혈세를 착취했다며 사형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나마 생산경험.자본.기술이 있는 이들을 활용해야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이런 우여곡절 끝에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 는 각서를 쓰고 기업인들이 7월14일 풀려났다.
이어지는 김용태씨의 증언.
"울산공업센터를 만들기 전인 62년 1월2일로 기억합니다. '박정희의장과 나는 경비행기를 타고 갈테니 당신들이 먼저 가서 타당성을 조사해 브리핑 자료를 만들라' 며 기업인들을 내려보냈지요. 그런데 이들은 천안에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경찰은 이들의 울산행을 '부정축재자들의 집단 탈출' 로 알았던 겁니다. "
이런 과정을 거쳐 군사정부에 의해 '부정축재자' 로 규정된 기업인들은 점차 수출과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탈바꿈한다. 이 시기의 박정희의 초조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은 또 있다. 61년 7월부터 64년 5월까지 2년10개월동안 경제기획원장관을 일곱번이나 갈아치운 것이다. 경제총수의 수명이 평균 5개월을 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 후의 경제장관이나 참모들이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장관을 교체해 보고 국내 기업인을 동원해 봐도 부족한 재원을 메울 수는 없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돼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힌 朴대통령은 취임 이듬해인 64년 5월 경제기획원장관에 장기영 (張基榮.작고.전한국일보 회장) 씨, 상공부장관에 박충훈씨를 각각 임명했다.
장기영장관은 뱃심이 좋아 별명이 왕초였다. 그는 취임 직전 朴대통령을 찾아가 "경제는 일사불란해야 합니다. 부처별로 고집을 세우면 배가 산으로 올라갑니다. 경제기획원장관은 인사권을 갖고 경제관계 장관들을 관장해야 합니다" 고 건의해 실질권한을 갖는 부총리가 됐다.
朴장관은 9개월만에 상공부장관에 재기용됐다. 그 무렵 상공부 수출진흥과장을 지낸 문기상 (文基祥.71.문기상 합동특허법률사무소 소장) 씨의 증언.
"제가 어느 날 朴장관께 '수출제일주의라는 용어를 어떻게 생각해 내셨나요' 라고 물어보았죠. 그랬더니 朴장관께서 '그거 내가 만든 것 아니야. 허정 (許政) 과도정부 때 상공부장관하던 전택보 (全澤珤.작고) 씨 알지. 천우사 사장 말이야. 그 양반이 제일 먼저 사용했어. 들어보니까 좋은 것같아 내가 쓴 거지' 라고 대답하더군요. "
이 무렵 朴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 어느 날 朴장관은 朴대통령의 지방순시에 동행했다가 기차안에서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다. "朴장관, 우리나라 옛말에 사농공상 (士農工商) 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 가 돼야 할 것같아. 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당황한 朴장관은 얼떨결에 "각하, '상' 이 '공' 보다 앞서야 한다구요" 하고 되물으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 "제 생각에는 '공상농사' 가 더 맞을 것같은데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물건만 만들면 뭣해요. 팔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소용없어요. 수출이 제일이야" 라고 설명했다. 당장 수출을 하려고 해도 수출용 원자재를 구입할 달러가 없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자나깨나 문제는 항상 달러였다. 64년 당시 미국은 무상원조를 받는 나라에 차관을 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으며 기존의 원조자금마저 급격히 줄여나갔다. 일본과는 국교수립조차 안된 상태였다.
朴대통령은 할 수 없이 눈을 유럽으로 돌렸다. 64년 12월 朴대통령은 수출용 원자재 구입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달러를 구하러 서독을 방문했다. 전세기를 동원한다는 것은 꿈도 못꿨다. 서독에서 보내준 루프트 한자 여객기를 60여명의 일반승객과 함께 타고 일곱곳의 경유지를 거쳐 28시간만에 서독에 도착했다.
수출진흥회의 15년 개근
국빈방문이었지만 朴대통령에 대한 대접은 초라했다. 연도에 걸린 태극기는 스무개 남짓. 숙소인 스위트룸은 10평도 되지 않았다. 약소국의 설움을 절감해야 했다. 한국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준 대가로 서독으로부터 얻은 차관은 4천만달러.
귀국한 朴대통령은 눈에 불을 켜고 수출문제를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당장 수출진흥회의를 만들어 관계장관들과 경제4단체장을 참석시켜 매달 수출문제 전반을 검토케 했다. 첫 회의는 65년 1월 열렸다. 朴대통령은 79년 10월 사망 때까지 이 회의를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
17.수출업자 특별대우...밀수에 걸려도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1969년 1월20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제1차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했다.
한번 더 수출전선에 박차를 가할 필요성이 있던 시기였다.
정부기록보존소에 있는 회의록 내용. "68년도 지역별 수출목표 달성실적을 분석해 보면 상주공관이 없는 지역의 수출이 오히려 잘되고 있습니다.
…수출목표가 미달된 공관에는 경고장을 보내고 앞으로 인사에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 분위기는 한순간에 냉각됐다.
"첫 회의라 상견례 수준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잖아" 라는 긴장의 빛이 참석자들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해외공관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한다면 하는' 朴대통령이 아니던가.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당시 상공부 기획관리실장의 증언.
"해마다 열리던 외무부 해외공관장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보고사항은 주재국에 대한 수출실적이었어요. 수출 성적표가 좋으면 유능한 대사로 인정받고, 그렇지 못한 대사는 정말 죽을 맛이었죠. 그래서 당시 대사를 '수출대사' 라고 불렀습니다."
수출진흥확대회의는 65년 1월부터 매달 열리던 수출진흥회의가 확대 개편된 것이다.
4년만에 정계.관계.경제계.학계.법조계등 각계 주요 인사 1백명 안팎이 참석하는 대규모 회의로 탈바꿈했다.
朴대통령은 이 회의를 다목적용으로 활용했다.
민간학자들을 초청, 관료들로부터 듣지 못하는 바깥의 얘기를 듣는 한편 각계에 수출관련 긴장도를 전파하는 장 (場) 으로 삼았다.
또 "대통령은 우리 편" 이란 인식을 기업인들에게 심어줘 '수출 기업인의 기 (氣) 살려주기' 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당시 회의장에서 가장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사람은 69년부터 74년까지 재무장관을 지낸 남덕우 (南悳祐.72) 씨.
수출증진과 고도성장을 주문하는 朴대통령에게 기업인들은 항상 돈부족을 호소하게 마련이었고, 돈줄을 쥐고 있는 재무장관이 집중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회고.
"회의가 열리면 나는 늘 피고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어요.
경제4단체장과 기업인들은 재무부가 돈줄을 죄어 사업을 할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지요.
나는 통화량이 늘어나면 인플레가 오고 물가도 뛰는 악순환이 되풀이 돼 경제안정을 이룰 수 없다고 반박했지요.
그러면 朴대통령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회의 후에 청와대로 따로 불러 '南장관, 쥐어짜지만 말고 돈 좀 풀어'라고 지시하곤 했죠.
아, 그러면 별 수 있나요.
대통령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실무자를 불러 중소기업 자금 50억원만 풀라고 지시를 내렸죠. "
기업인들 입장에서는 신나는 회의였다.
고민거리를 한 보따리 준비해 왔다가 朴대통령 앞에 모두 풀러놔 '즉석 결재' 를 받는 셈이었다.
당시 朴대통령과 정부가 어느 정도 수출기업에 특혜를 주었는지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일화 한 토막.
정부는 당시 수출기업에 대해 '소요량 증명에 의한 기술소득제도' 를 적용했다.
원자재 수입때 수출에 소요될 물량보다 더 들여오는 것을 인정해줘 수출하고 남은 원자재를 국내시장에 팔 수 있게 특혜를 준 것이다.
관세를 물지 않아도 되고 국내에선 구경도 못해본 제품을 내다팔기 때문에 수출업자들에겐 큰 이권이었다.
당시 상공부에서는 원자재 소요량의 18% 정도를 더 수입할 수 있도록 인정해주었다.
상공부 수출진흥과장을 지낸 문기상 (文基祥.71.문기상합동특허법률사무소 소장) 씨의 증언.
"수출업자들이 당시 인기품목이던 나일론등 원자재를 마구 들여오다가 66년 가을 검찰 밀수합동수사반에 적발됐지요.
내가 朴대통령께 '지금 수출붐이 일고 있는데 이들을 구속하면 안됩니다' 라며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朴대통령께서 잠자코 들으시더니 이후락 (李厚洛.73) 비서실장에게 '신직수 (申稙秀.70) 검찰총장에게 전화해 당장 수사를 중단하라고 해' 라고 지시하시더군요.
그러더니 나에게 '기업인들을 너무 많이 봐준 것 아니야' 라고 말씀하시기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12%로 낮추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대통령이 기업인 편을 들어주니 기업인들은 거리낄게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모든 길은 수출로 통한다' 는 말이 유행했다.
수출만 하면 대통령이 뒤를 봐준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상당수 기업인들이 아직도 朴대통령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朴대통령은 또 집무실에 기업별 수출현황을 막대그래프로 그려놓게 해 수출실적을 매달 체크하고 목표에 미달하면 관계부처와 기업을 독려했다.
그러다보니 수출업무를 직접 담당한 상공부는 '수출 스트레스' 를 가장 심하게 받았다.
오원철씨의 증언.
"朴대통령은 국력의 척도를 수출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수출목표 만큼은 손수 책정했어요.
64년 1억달러 수출 때도 그랬고, 71년 10억달러 수출 때도 朴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어요. "
대통령이 세운 수출목표를 실무부서가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문기상씨는 "그때는 수출업자보다 상공부 관리들이 더 설쳤다" 며 "수출목표 달성을 위해 야근을 밥먹듯이 했다" 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관료주도형 경제성장이 '한강의 기적' 을 낳는데 단단히 한 몫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후유증은 아직 남아 있다.
60년대와 70년대 경제개발의 중심축을 담당한 경제관료들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새 경제모델을 필요로 한 시기에도 '과거의 영화' 에 집착해 변신에 실패했다.
그 결과 지금은 "세계화시대에 갖가지 규제로 묶어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발목잡는" 존재쯤으로 인식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朴대통령의 제일 관심사가 수출이다 보니 수출업무를 담당하는 상공부의 발언권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상공부는 수출업자들에게 갖가지 혜택을 주었다. 일반대출 이자율이 25%였던 68년의 경우 수출 기업인에 대한 수출특융 이자율은 6%였다.
수출용 원자재 수입에는 세금을 전액 면제했다.
또 수출소득에 대해서는 80%까지 소득세를 감면해 주었다.
그 당시 하늘의 별 따기였던 해외여행도 수출업자에게는 예외였다.
60년대 운동화와 고무제품등을 수출하던 동신화학 전무였던 임호 (林虎.68.삼보주식회사 대표이사) 씨의 증언.
"당시 수출회사라고 하면 관청이나 은행에 가서 목에 힘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정부가 수출업체를 배려해 주었죠. 그러니 뭐든지 만들어 수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특혜는 정부의 선정대상에 포함된 소수 기업에 해당되는 얘기였다.
당연히 특혜를 받지 못하는 기업들은 특혜대상에 포함되기 위해 로비를 벌였다.
특혜대상 기업은 물론 특혜를 받으려는 기업들도 때론 입막음과 감사의 표시로, 때론 로비를 위해 기회있을 때마다 관료와 정치인들에게 '작은 뜻 (微意 또는 寸志)' 과 '성금' 을 건넸다.
이 부정부패의 고리는 지금까지 우리사회 발전에 큰 짐이 되고 있다.
이런 부작용을 남기면서도 수출제일주의 정책은 결실을 거둬 66~70년 연평균 수출성장률은 36.8%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70년대초 정부에서 내걸었을 때 코방귀의 대상이었던 '80년 1인당 국민소득 1천달러, 수출 1백억달러 달성' 이란 목표도 3년 앞당겨 77년에 달성했다.
朴대통령은 지방순시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현장방문을 즐겼다고 한다.
오원철씨의 증언.
"하루는 朴대통령께서 수출용 스웨터를 만드는 마산 한일합섬 섬유공장에 들렀습니다.
朴대통령이 어느 여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여공은 '공부 못한게 한입니다.
영어를 모르니 감독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어요' 하며 눈물을 글썽거렸어요. "
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朴대통령의 시선이 옆에서 안내하던 김한수 (金翰壽.작고) 사장의 눈과 마주쳤다.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한 金사장은 '당장 야간학교를 개설하겠습니다'고 朴대통령께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공들의 야간학교가 생겨났어요.
朴대통령은 나중에 문교부장관을 불러 정규학교와 동등한 졸업장을 주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경이적인 '고도성장과 수출신화' 가 있기까지 근로자들이 치른 희생은 컸다.
대통령의 일회적인 온정주의 시책으로 근로환경이 개선될리 없었다.
70년 11월 평화시장 근로자 전태일 (全泰壹) 씨가 동료들의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수출제일주의와 고도성장의 화려함 뒤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한 단면이었다.
18.중앙정보부
절대기아 (饑餓) 로부터의 해방은 5.16직후부터 박정희 (朴正熙)에게 주어진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먹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무렵 그가 집착했던 대목은 한국땅에서 나는 석유였다.
바람이 간절하면 때론 꿈으로도 나타난다던가.
과묵.신중.침착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박정희가 이 때문에 지나치게 흥분, 결과적으로 우스갯감이 된 적이 있다.
76년 1월 '영일만 석유' 얘기는 대표적으로 알려진 케이스. 이 보다 10년 앞서 그는 석유사건때 못지않게 흥분한 적이 있다.
쌀 (볍씨) 때문이었다.
보릿고개와 보릿고개 사이에 산다는 자조 속에 65년도 저물어가던 무렵의 대통령 접견실. "우리 이제 보릿고개 넘길 효자 하나 생겼어. " 박정희는 시간이 좀 남는다 싶으면 '손님들' 에게 으레 이렇게 볍씨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한쪽에 나란히 세워둔 유리상자 속의 볍씨를 가리키며 "이게 그거야, 희농 (熙農) 1호. 알도 많고 병충해에도 강하고" 라는등 칭찬에 열을 올렸다.
희농1호는 당시 언론에 '기적의 볍씨' 라고 소개됐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64년 이집트에서 훔쳐온 나다 (Nahda) 를 박정희의 '희 (熙)' 자를 따 희농1호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65년 실험재배에서 광주등 다른 곳은 실패했으나 서울대농대 이태현 (李台現.작고) 교수 책임하에 이뤄진 수원에서만 일반벼보다 30%이상 다수확 가능 판정을 받았다.
당시 중정3국장 보좌관 김영광 (金永光.66.전국회의원) 씨의 증언. 그는 수원농고 출신이란 이유로 차출돼 실험재배 경과를 1주일에 한번꼴로 박정희에게 보고하느라 수원시험포에 살다시피 했다.
"쌀, 쌀 하던 땐데 얼마나 좋아하셨겠습니까. 일반벼도 함께 가져오라시길래 국광등 다섯가지를 따로 담아 갖다드렸어요. 그걸 비교해 가며 자랑하시는 거예요. "
박정희는 그때 걷힌 30가마를 "한톨도 먹지 말고 종자로 쓰라" 고 지시하는 한편 李교수를 이듬해 2월 농업진흥청장에 임명한다.
김형욱 (金炯旭) 정보부장은 한술 더 떴다.
'제2의 문익점' 이라고 자랑이 늘어졌다.
훔쳐온 사실을 알게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중정에 대한 국회내무위의 국정감사장에서도 희농 견본을 내놓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희농1호는 실패했다.
67년 일반농가에 보급, 재배결과 씨받이마저 어려운 흉작에 그쳤다.
때마침 닥친 극심한 가뭄 탓도 있었지만 한국의 기후나 풍토에 맞지 않는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박정희의 반응에 대한 증언은 드물다.
희농실패에 대한 시비가 잦아들고 새농사가 시작될 즈음인 이듬해 5월 조용히 '희농 청장' 이태현의 사표를 받은 것이 고작이다.
박정희의 실망은 컸던 것같다.
70년 연두회견에서 '진짜 기적의 볍씨' 통일벼 (당시 명칭 IR667) 를 소개하면서도 "과거 (희농)에 안됐기 때문에 이것도 되겠느냐고 의심할지 모르지만 틀림없이 될 것" 이라고 사족을 달았다.
희농 이후 박정희는 어떤 '상품' 에도 자신의 이름을 붙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통일벼의 대성공 덕분에 덮여진 희농1호 에피소드는 식량자급에 대한 박정희의 열망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는 식량자급을 가난추방의 첫걸음으로 간주했다.
식량문제 해결없이는 국가안보 또한 없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이른바 '박정희식' 은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좌우 살피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사고방식.행동양식을 말한다.
통일벼 보급과정에서도 박정희식이 적용됐다.
통일벼는 국내연구진과 국제미작연구소 (IRRI.필리핀 소재)가 5년 연구끝에 개발한 다수확품종으로 70년 일반농가에 실험적으로 보급,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맛이 없다, 찰기가 부족해 식으면 푸석푸석해진다, 모양이 길쭉해 이상하다는등 시비가 잇따랐다.
71년 2월5일 월례 경제동향보고회의가 끝난 뒤 가진 통일쌀밥 시식회. 대통령으로부터 퇴짜를 맞으면 어쩌나 하는 심정에서 김인환 (金寅煥.작고) 농진청장이 무기명으로 써달라며 'IR667 (통일벼는 그해말 공모를 통해 결정된 이름) 검정조사표' 를 배포했다.
朴대통령은 굳이 날짜와 사인을 적어놓고는 ▶색깔 = 좋음▶차진 정도 = 보통▶밥맛 = 좋음이라고 응답했다 (사진 참조) .박정희의 일갈. "누가 이걸 맛없다고 그래. 비싼 돈주고 외미 (外米) 사먹는 처지에 밥맛 따지게 됐어?" 더이상 다른 참석자들의 답변은 들어볼 필요가 없었다.
당시 농림장관 김보현 (金甫炫.73) 씨의 증언. "통일벼는 일반벼보다 키가 작아 지붕이엉을 엮는데 나쁘다는 얘기가 나왔지요. 朴대통령께서 '지붕을 개량하면 되지 무슨 소리냐' 고 일축하데요. 농촌 지붕개량이 신속하게 이뤄진데는 통일벼 영향도 클 겁니다. " 박정희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독설가' 김학렬 (金鶴烈.작고) 전부총리는 열성적인 통일벼 옹호론자였다.
박정희의 시식을 며칠 앞두고 농업진흥청에서 예비시식을 하는 도중 섬뜩한 독설을 퍼붓는다.
'통일벼 박사' 허문회 (許文會.70.서울대농대 명예교수) 씨의 증언. "누군가 밥맛 얘기를 꺼내면서 조기보급 신중론을 폈지요. 그런데 그 양반 '이게 어디가 어때. 배부른 놈들이구만. 맛없다는 놈들 칼로 배를 찔러버려야 돼' 라고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 통일벼가 일반농가에 본격 보급된 72년부터 일반벼를 고집하는 농민들의 저항 때문에 소동이 벌어졌다.
일부 농촌지도원들은 통일벼 보급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일반벼 모판을 밟아버리거나 모내기를 끝낸 일반벼를 뽑아내고 통일벼를 심도록 강요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당시 농진청 식량작물과장 이효근 (李孝近.72) 씨는 "사후관리를 잘못해 피해를 본 경우에도 농민들이 농촌지도소로 몰려가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보상을 요구하곤 했다" 고 회고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뿌리내린 통일벼는 74년 3천만섬, 77년 4천만섬 돌파등 기록적 쌀증산을 주도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그 덕분에 77년 1월 대북 (對北) 쌀지원을 제의할 수 있게 됐다.
그는 그해 12월 농진청을 방문, 그 뿌듯한 마음을 '녹색혁명성취' 라는 휘호로 남겼다.
그러나 통일벼는 박정희 사후 다시 맛 시비에 휘말리고 쌀이 남아돌면서 91년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박정희는 식량증산운동과 더불어 잡곡혼식.분식.무미일 (無米日.1주일에 한번씩 각종 음식에서 쌀을 쓰지 않는 날) 등 절미 (節米.쌀 덜먹기) 운동을 강행했다.
72년 12월22일 김종필 (金鍾泌) 국무총리를 경유, 김보현농림장관에게 보낸 16절지 6장 분량의 친서 일부. '…주2회 쌀 안먹기를 5회정도로 증가하여 절미를 강행하고 벌칙을 강화하여 미곡상.음식점등 위반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도록 하여…. ' 이렇듯 박정희는 절미운동 위반을 중대한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그러다 보니 식당에는 암행단속반이 들이닥쳐 솥단지를 뒤지는가 하면 각급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를 벌이는등 진풍경이 속출했다.
그중 압권은 잡곡을 섞은 생선초밥 (스시) .주요 관광수입원인 일본인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스시에도 잡곡을 섞도록 한 것이다.
관광협회는 73년초 보리로 만든 스시를 들고 김보현농림장관을 찾아가 "먹어보라" 며 항의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순 쌀로 만드는 것을 인정해준 유일한 사례는 경주법주. 청와대 외빈 접대용을 제외하고 전량 수출하는 조건이었다.
당시 서울 P호텔 일식코너에서 근무한 이병환 (李柄丸.50) 씨가 "처음에는 비웃던 일본사람들도 차츰 고개를 숙이더라" 며 들려주는 잡곡 스시 제조담. "보리는 식으면 찰기가 없는데다 조금만 넣어도 검은색이 번져요. 그래서 보리는 조금 넣고 콩.팥.차조로 대신했지요. 국수 삶은 물을 남겨뒀다 생선에다 살살 묻혀가며 말고, 별 꾀를 다 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차조가 골치예요. 이게 초하고는 안 어울리는 거라. 할 수 없이 미리 초를 손에다 묻혀 차조를 피해 비비느라 손이 벌겋게 헤어지고요. 하루 반가마를 그렇게 만드니 배겨납니까. " 우여곡절끝에 달성한 식량자급에 대한 비판도 있다.
농약을 많이 써야 하는 통일벼 때문에 농약중독 피해가 급증하고 메뚜기.미꾸라지등이 들판에서 사라지는등 박정희시대에 농촌의 생태계 파괴가 시작됐다며 "그 피해는 식량자급을 몇년 앞당긴 이상의 후유증을 남겼다" 는 지적이다.
그러나 농업진흥청 전세창 (田世昌.50) 지도관은 "배부르니까 나오는 소리" 라며 "굶주림 때문에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북한의 참상을 보면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느냐" 고 반문한다.
19.가전제품
'가난은 나라도 못구한다' 는 말 대신 '가난은 나라만이 구할 수 있다' 는 것을 신념으로 안고 살아간 박정희 (朴正熙) .그런 그가 끝내 미심쩍어 한 분야가 전자산업이다. 60년대 후반부터 전자산업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어 가기는 했지만 '전자제품 = 사치품' 이란 그의 근본 생각은 말년까지 큰 변화가 없었던 것같다.
61년 수출 실적이 전무 (全無) 했던 전자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 88년부터 분야별 수출 실적 1위를 고수하며 한국을 세계 6대 전자 메이저로 올려놓았다. 지난해만 해도 총수출액의 32%에 해당하는 4백12억달러를 전자산업이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의 손길은 얼른 느껴지지 않는다. '박정희 경제' 를 다룰 때 감초처럼 등장하는 석유화학.중화학.고속도로.포항제철등과 달리 그가 현장을 누비며 남겨 놓은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거의 없다. 절약이 최대의 미덕이었던 시대의 지도자로서 먹고 입는 문제와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전자산업에 대해 그런 편견을 가졌음직 하다.
그런 박정희가 자신도 모르는 새 한국 전자산업의 기초를 닦는 획기적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5.16의 해, 61년 일이다. 58년 10월 문을 연 금성사는 적자를 면치 못해 돈줄인 락희화학으로부터 폐업을 종용받고 있었다.
그런데 군사정부가 사치품 (특정외래품.밀수품) 단속령을 발표하고 외제 라디오 거래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창고속에 묻힌 금성 라디오들이 빛을 보게 됐다. 두달 뒤 (61년 7월) 부터 '혁명홍보' 를 목적으로 대대적으로 벌어진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은 금성사의 회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금성 라디오는 5.16이후 넉달만인 9월 전년대비 50만대 늘어난 89만3천대나 팔려 나갔다.
근혜씨 전자공학과 진학
박정희는 뒤이어 61년 9월 텔레비전방송국 설립을 허락, 또한번 전자산업 발전에 기여한다. 한창 개국 준비중이던 KBS (12월31일 개국) 와는 별개로 새로운 TV방송국 (TBC) 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전자산업의 발전을 염두에 둔 건 물론 아니었다.
일본 TV방송의 영향권에 들어있던 부산.경남 일대에 일본바람의 차단이 목적이었다. 전자산업에 대한 박정희의 무관심에 첫 충격을 던진 인물은 초대 과학기술처장관 (67년 4월~71년 6월) 김기형 (金基衡.72) 씨. 세라믹공학 권위자로 미국 뉴욕 에야리덕션 전자요업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한국 정부의 해외 두뇌 유치 케이스로 66년 8월 하순 귀국한 金박사는 곧 朴대통령을 만났다.
金박사는 1시간 가량의 대화시간을 주로 전자공업 (전자산업은 최근의 용어) 과 세라믹공업의 육성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할애했다. "노동집약적인 산업이어서 유휴노동력이 많은 한국에 유리하다" 는 요지였다.
대화가 끝날 무렵 金박사가 "선물로 가져왔다" 며 손수 만든 인조 다이아몬드 목걸이등 액세서리와 저항체 소자 (素子) 한 세트를 불쑥 내밀었다.
"그게 뭡니까?"
"제가 개발한 겁니다. 여기 (플라스틱)에 붙은 이게 저항체 소자라는 건데 하나에 1달러짜리입니다. 주로 전자제품을 만들 때 쓰이지요. "
"아니, 그 손톱만한 걸 1달러나 받아요?"
박정희는 그때까지 전자라는 용어조차 몰랐다....
그는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한 전자업계에 대해 "사치품이나 만들면서…" 라고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상당수의 언론인.정치인.식자층까지 TV 국산화를 "사치풍조를 조장한다" 고 반대하던 시절이었다. 66년 당시 19인치 국산TV 가격은 8만7천원. 대통령 월급 (7만8천원) 보다 많았다.
在美 김완희박사 영입
그 시대의 전자공업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하나. 한국 전자산업 산파역중 한사람인 이만희 (李晩熙.71) 씨는 상공부 사무관 시절이던 62년 3월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개최된 국제무역박람회 한국관 관리책임자로 파견됐다.
1개월 뒤 귀국, 정부관리로는 최초로 전자공업 육성을 건의하는 리포트를 제출했다. "뚱딴지 같은 소리 한다고 핀잔만 들었지요. 명색이 상공부에서…. " 李씨의 수난은 66년 2월 전기공업과장 때도 계속된다.
"몇군데 업체에서 TV 국산화를 위해 샘플로 TV를 수입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상역과 (商易課)에 가서 얘기를 꺼내는데 한 사무관 (李씨는 그때 서기관) 이 대뜸 '이 자식 정신 나갔어? 업자의 앞잡이냐' 고 소리를 치더니 '국산화 좋아하네' 하면서 벌떡 일어나 오른 뺨을 올려붙이더라고요. 우리 국장 (공업2국장)에게 얘기했더니 위로는커녕 '당신 같은 사람은 국가에 보탬이 안되니 한강물에나 빠져 죽으시오' 하면서 어떻게나 기합을 주던지…. "
李씨는 그러나 당시 오원철 (吳源哲) 공업1국장의 주선으로 박충훈 (朴忠勳) 상공장관으로부터 직접 OK 사인을 받아냈다. 김향수 (金向洙.85) 아남그룹 명예회장의 회고는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68년 반도체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입니다. 간신히 김정렴 (金正濂) 상공장관에게 대부 추천을 받고 은행문이 닳도록 뛰어다니는데 (반도체의) 부피가 작다고 사업으로 쳐주질 않아. 어렵게 대부받아 기자재를 수입해 오니까 이번에는 세관이 골치야. 반도체 칩과 리드 프레임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금줄이 있는데 금을 밀수하는 줄 알고 통과시켜 주질 않는 거야. "
아무튼 김기형 박사로부터 '손톱만한 돈보따리' 를 선물받은 박정희는 그것을 봉투에 담아 친필로 '요검토 (要檢討)' 라고 써서 박충훈 장관에게 내려 보낸다. 이것이 박정희의 전자산업 관련 최초의 지시였다.
그해 12월 朴장관은 전자산업을 수출전략산업으로 발표하고 朴대통령은 이듬해 연두교서에서 전자산업 중점 육성을 선언하게 된다. 박정희의 인식 변화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은 훗날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 로 불리게 된 김완희 (金玩熙.70.미국 거주) 박사. 그는 박정희의 초청으로 67년 9월4일 귀국, 국내업계 현황을 둘러본 뒤 9월16일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건의서' 라는 제목의 브리핑 차트를 들고 청와대로 갔다.
막 들어서는 그를 향해 박정희가 말했다.
"金박사, 우리도 이런 걸 만들어 팔아야 되지 않겠소. (주력상품인) 섬유는 창고 가득해 봐야 10만달러도 받기 어려운데 이런 건 손가방 하나 만큼이 30만달러, 50만달러 하니 말이야. "
당시 박정희가 보여준 것은 그해 3월 한국에 진출한 미국 모토로라사가 샘플로 제출한 트랜지스터 회로세트였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전자.컴퓨터공학과 주임교수이던 金박사는 "곁에서 도와달라" 는 朴대통령의 요청을 가족들의 반대 때문에 고사했지만 방학 때마다 귀국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박정희와 1백여통의 편지를 주고 받는 '전자산업 개인교수'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金박사를 '상공.체신.과기처장관 특별고문' 이란 기묘한 직함을 주어 활용했다. 70년 1월 조선호텔에 머무르던 金박사는 육영수 (陸英修) 여사의 전화를 받았다.
陸여사는 "박사님 때문에 우리애 (맏딸 槿惠.46.정수장학회 이사장) 를 전자공학과에 보내게 됐어요. 저는 가사과에 보내려고 했는데…" 라면서 전자공학과 장래성에 대해 물어봤다. 박정희의 고향 구미에 들어선 전자수출공단과 함께 전자산업에 대한 그의 인식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컬러TV는 끝내 不許
그러나 박정희는 70년대 중반 컬러TV방송 허용 논란이 일자 '절대불허' 방침을 내린다. 허용론자였던 김완희 박사가 전하는 박정희의 불허 논리.
"내가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잘 사는 놈만 더 잘 살게 된다' 는 거요. 컬러도 흑백 가진 놈들이나 살 것 아니오. 청계천 밑이나 농촌에 가보시오. 흑백도 없는데 어떤 ×은 컬러를 본다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소. "
컬러TV는 74년 한국나쇼날이 국내 최초로 조립 생산한데 이어 77년 삼성과 금성사가 잇따라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본격 궤도에 오른다. 그러나 박정희의 불허 방침 때문에 국내수요 없이 전량 수출하는 기형적 현상을 이어가다 78년부터 미국등 선진국으로부터 덤핑 판정을 받고 수입 규제에 직면하게 된다.
20.한뼘 땅도 열외 불허 '그린벨트'
외국에선 "20세기 각국의 국토계획중 대표적 성공사례로 환경보전정책의 백미 (白眉)" 라는 극찬을 받고, 국내에선 "대도시 주민들의 숨쉴 공간을 마련했다" 는 얘기와 함께 '박정희 (朴正熙) 의 최대 걸작' 이란 평가를 받은 그린벨트. 이 그린벨트는 71년 7월30일 건설부 고시 제447호로 수도권 일부를 묶는 것을 시작으로 77년 4월18일 전남 여천 일부를 지정하기까지 전국토의 5.4%인 5천3백97.1평방㎞를 휘감은 뒤 단 한뼘도 줄어들지 않은채 오늘에 이르렀다.
대선.총선.개각.차기대선 불출마 선언등 정국이 숨가쁘게 돌아가던 71년 6월12일 오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그리고 金국장. " 노타이에 검정 양복차림의 박정희는 김의원 (金儀遠.66.경원대 총장) 건설부 국토계획종합담당관 (부국장) 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16절지에 그림을 그려가며 양택식 (梁鐸植) 서울시장.김태경 (金泰卿) 경기도지사.김용석 (金容奭) 건설부 도로국장에게 도로 재정비 지시를 막 끝낸 참이었다.
"그린벨트란 거 있지, 그린벨트. " 영어로 'Green Belt' 라고 쓴 박정희는 자신이 금방 스케치한 수도권 도로망 외곽에 두줄로 띠를 두른 뒤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한번 빙 둘러쳐봐. 빨리 계획짜서 가져와. " 이것이 박정희의 그린벨트와 관련한 첫 지시였다.
박정희의 그린벨트 구상을 누가 건의했는지는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린벨트는 행정.법률용어가 아닌 학술용어에 불과했다.
영국 런던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제도였다.
건설부 국토계획국장.도시국장등을 거치면서 박정희시대 그린벨트 업무를 주도했던 金씨는 "이한빈 (李漢彬) 전부총리.주원 (朱源) 전건설부장관등 알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봤으나 모른다고 했다" 고 말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金正濂.73) 씨 역시 "주영 (駐英) 대사들로부터 그린벨트 얘기를 들으시고 관심을 보이신 적은 있다" 며 '박정희 아이디어' 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동훈 (董勳.63) 전통일원차관은 "69년말인가 70년초 청와대 정무비서관 시절 朴대통령으로부터 '수도권 인구억제 대책을 연구, 보고하라' 는 지시를 받고 그린벨트 제도 도입을 건의했다" 고 밝혔다.
그의 증언.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런던의 사례등을 참고해 비밀리에 만들었습니다.
미관과 환경등을 고려해 도시 주위에 녹지를 일정한 둘레로 돌리면 좋겠다는 착상이었지요. 그때 성남이 생겨나고 있었는데 서울과 성남 사이에 그린벨트를 설치해 격리함으로써 성남을 위성도시, 베드타운으로 만들자는 식이었습니다.
" 박정희의 반응은 한마디로 OK였다.
"그걸 보고한게 70년 가을입니다.
개발제한구역이란 말은 나중에 붙인 것이고 그냥 그린벨트라고 했지요. 朴대통령께서 '그린벨트, 그거 분명히 영어지' 하시면서 '욕 먹더라도 강력한 조치 한번 해보지' 라고 하데요. " 급속한 도시화.공업화로 71년 7월 서울 인구가 5백43만명에 달하는등 인구의 대도시 집중화현상은 당시 정부의 골칫거리였다.
변두리에 즐비한 판자촌은 안양.의정부등으로 마구 뻗어나가고 있었다.
일부 기업과 부유층에 의한 부동산 투기 열풍은 백약이 무효였다.
그러나 그린벨트란 기상천외한 조치로 수도권 일대의 부동산 투기는 가라앉았다.
박정희는 김의원 부국장이 며칠 뒤 가져온 초안을 퇴짜놓는다.
구파발 검문소와 삼송리 검문소 사이에 북한산을 끼고 흐르는 창릉천 주변.불광동 기자촌 일대등 몇군데를 빠뜨렸다는 이유였다.
축척 5만분의1 지도 위에 그린 초안을 훑어본 박정희는 책상 서랍을 열어 뭔가 유심히 들여다 보고는 돌아 앉아 "여기는 왜 뺐어" 라며 일일이 지적했다.
金부국장이 "집없는 기자들이 집을 짓겠다고 터를 닦고 있는데 그린벨트에 포함시키면 난리가 날 겁니다" 라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래도 포함시켜" 라고 일축했다.
며칠 뒤 2차 초안에서도 창릉천 주변은 빠져 있었다.
"서울이 북쪽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라며 이유를 설명하려는 金부국장의 말을 가로막은 박정희. "참 답답한 친구들이네" 라며 비로소 속마음을 털어놨다.
金씨가 "탄복하고 물러 나왔다" 며 전해주는 박정희의 그린벨트 안보관. "남북이 다시 맞붙어 불행히도 우리가 서울까지 후퇴했다고 치자. 그러면 (인민군) 2, 3개 사단을 이 계곡에 몰아넣고 북한산에서 공격하면 섬멸시킬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에 시가지를 조성하면 안돼. " 그린벨트에는 일절 예외가 없었다.
그린벨트 주무장관인 태완선 (太完善.작고) 당시 건설장관은 취임후 첫 작품인 그린벨트 때문에 재산을 날렸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서울 남태령고개 부근 임야 5천평이 1차 그린벨트 지정고시에 묶여버린 것이다.
실무진이 작성해온 최종안을 보고난 그는 "허허, 난 망했군, 망했어" 라고 쓴웃음을 짓다가 "그래도 공정해야지" 라며 결재했다.
국세청 내사를 통해 고위공직자들의 재산상태를 손바닥보듯 알고 있던 박정희는 太장관을 두고 "그사람 참 양심적인 사람이야" 라고 칭찬했다 (당시 대통령 경제2수석 吳源哲씨 증언) .대통령 박정희가 꼬치꼬치 '주사 노릇' 을 한 분야가 그린벨트다.
그는 건설부령 그린벨트 관리규정을 처음 결재할 때부터 겉표지에 "건설부장관이 개정할 수 있으되 개정시에는 반드시 대통령의 결재를 득 (得) 할 것" 이라고 써놓아 주무장관의 재량권을 사실상 봉쇄했다.
'작은 구멍 하나가 큰 둑을 허문다' 는 소신을 가졌던 그의 그린벨트에 대한 의지는 가위 냉혹할 정도였다.
77년 여름문턱으로 접어들던 때의 일이다.
"저, 각하, 참으로 딱한 사연이 있습니다만. " 6척 거구에 화통한 성격의 신형식 (申泂植) 건설장관이 그답지 않게 조심조심 이어나간 얘기. 사람들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경기도화성군반월면 수리산 기슭에 천주교측이 전국의 수녀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수영장을 마련했다.
그런데 화성군청은 76년 12월4일 그곳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자 불도저를 동원해 메워버렸다.
"수녀들이 남들처럼 해변에서 수영할 수도 없고…. " 박정희는 단호했다.
"이 사람아, 수녀들에게 그렇게 해주면 스님들은 가만 있나. 종교가 어디 한 두개야?" 박정희는 또 그린벨트내 군부대 초소의 기왓장 몇개 바꾸는 것까지 건설부의 사전허락을 받도록 했다.
자존심이 상했던지 한 국방장관이 박정희에게 "부대안 그린벨트는 군이 관리토록 해달라" 고 건의했다가 "군인들은 법 잘 지키나? 건설부 통해서 해!" 라고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김의원씨 증언) . 딱 하나의 예외가 64년부터 67년까지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낸 장기영 (張基榮) 의 장지 (葬地) .집권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있다가 77년 4월 사망한 張씨의 장지는 팔당댐 부근인 경기도광주군동부면창우리 선영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윤세달 (尹世達) 광주군수가 직원들과 함께 장지 입구를 가로막고는 "그린벨트내 불법묘지이니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오라" 고 버텼다.
결국 장기영은 건설부.보사부 공동발의로 국무회의 의결이란 '엄청난' 과정을 거쳐 선영에 묻혔다.
진해 별장에 내려가 있던 박정희는 이 보고에 몹시 언짢아했다고 한다.
72년부터 79년까지 2천5백26명의 공직자가 그린벨트 관리 잘못으로 징계를 받았다.
파면 1백91명, 감봉 1백14명, 견책 2백29명, 직위해제 2명, 경고.주의.훈계 1천9백90명. 그린벨트지역 공직자들 사이에서는 "사표를 내놓고 일한다" " (그린벨트 감사에 비하면) 감사원 감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는 말이 나돌았다.
박정희 생존시 '신성 불가침' 이었던 그린벨트. 그러나 박정희 사후 해당지역 주민들의 반발에 밀려 선거철등 민감한 시기마다 조금씩 느슨해지다가 지난 11일 건설부의 파격적인 규제완화 예고로 이제는 존립의 근거마저 위협받고 있다.
일본 국토청차관을 지낸 시모고베 아츠시 (下河邊淳) 는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 (鄧小平) 의 경제자문관으로 있던 80년대초 "베이징 (北京) 과 상하이 (上海) 같은 대도시 주변에 그린벨트를 두르는 것이 후일을 위해 바람직하다" 며 "상세한 것은 한국에 알아보시라" 고 건의했다고 한다.
21.산림녹화
미국의 한 하원의원이 지난 초여름 특별기로 북한을 방문한 후 바로 공해를 거쳐 한국땅에 진입하면서 "지옥에서 천당으로 들어왔군" 이라는 탄성을 발했다고 한다.
그가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쪽에서 상대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한국 영토로 들어왔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측면도 있지만 실은 남북한간의 천양지차인 산림녹화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산하는 온통 붉은 빛을 띤 반면 남한은 녹색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朴正熙)가 5.16을 일으킬 때만 하더라도 남북한 사정은 정반대였다.
한국의 산이 오늘의 북한처럼 벌거벗은 상태에서 푸른 옷을 입게 된 것도 불과 20년 안팎의 일이다.
통계로도 입증된다.
'84년 임업통계요람' 에 따르면 남한 전체 임목면적의 84%가 20년생 이하, 즉 나무 10그루중 8그루 이상이 박정희시대에 심어진 것이다.
그래서 유엔은 한국을 이스라엘과 함께 20세기의 대표적 녹화사업 성공국으로 꼽고 있다.
산림녹화에 대한 박정희의 의지는 64년 12월 서독 방문을 마치고 산림관계자들에게 한 오기어린 말 속에 배어 있다.
"산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 구라파 (유럽)에 안간다.
" 경제개발자금을 얻기 위해 잔뜩 기대를 걸었던 서독 방문에서 기대 이하의 차관을 약속받은 이유가 가장 컸지만 그는 이후 다시는 유럽을 방문하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 경제고문으로 서독 방문때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 (白永勳.67.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씨는 "朴대통령은 서독의 정돈된 농촌과 푸른 산을 보면서 '우리도 언제 저렇게 될 수 있겠느냐' 며 안타까워 했다" 고 회고한다.
그러나 집권초의 박정희는 산림녹화 의욕에 비해 지식과 경험이 못미쳤던 듯하다.
어쩌면 이 시기 그의 머리는 수출과 산업화등으로 가득 차 있어 산림녹화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는지 모른다.
박정희가 산림녹화에 다소 소홀했음을 인정하는 듯한 대목은 73년 1월16일 손수익 (孫守益.65.한국경제사회연구원 회장) 경기지사를 산림청장으로 임명하면서 던진 '당부의 말씀' 에서 어렴풋이 확인된다.
"고속도로.공업화.새마을운동은 성과를 거뒀는데 치산녹화가 잘 안되고 있어. 임자가 맡아 치산녹화를 이룩해봐. " 孫청장은 5년8개월간 재임하면서 집무실 입구에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 라고 써붙여 놓고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 (73~82년) 을 진두지휘, 예정보다 4년 앞당겨 목표를 달성했다.
孫씨가 지난해 9월 산림청이 주최한 '치산녹화 현지순례' 에서 밝힌 회고담. "75년 朴대통령의 경기.경북 연두순시때 수원에서 대구까지 대통령 전용차에 동승했습니다.
가시는 동안 경부고속도로 양편을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1백50분동안 무려 50건, 3분마다 한건꼴로 지시했습니다.
받아적느라 손이 저릴 정도였지요. " 임도 (林道.산불진화나 병충해 방지작업등을 위해 만든 산길) 를 횡으로 내도록 한 이른바 '추풍령식 조림' 도 "큰비가 올 때 한꺼번에 흘러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에서 볼 때 빽빽이 심어져 있는 것같아 보기에도 좋다" 는 박정희의 아이디어였다.
77년부터 11월 첫째 토요일이 육림일로 지정된 것 역시 그해 식목일 박정희가 "가을에는 자기가 심은 나무가 잘 자라는지 반드시 확인하라" 고 지시한데서 비롯됐다.
박정희의 산림보호 열성은 수천년 이어온 한우 (韓牛) 들의 식성까지 바꿔놓았다.
농림장관과 초대 농수산부장관을 지낸 김보현 (金甫炫.73.백제문화개발연구원장) 씨의 증언. "72년 여름 경제동향 보고회의때 朴대통령께서 '소에게 끓인 여물을 먹이느라 땔감이 많이 들어가니 생풀을 먹이는 방안을 강구해보라' 고 합디다.
실험결과 끓여주는 것 보다 영양가가 높게 나와요. 그때부터 전국적으로 소에게 생풀 먹이기 운동을 벌였지요. " 73년부터 벌어진 농가 아궁이 개량사업, 75년부터 나무와 수자원 보호를 위해 취해진 낙엽채취 금지령도 그의 지시였다.
연탄 사용을 장려한 것도 이즈음이다.
당시 건설부 국토계획국장 김의원 (金儀遠.66.경원대총장) 씨는 "무연탄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朴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탄광에서 인근 철도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우선적으로 닦았다" 고 회고한다.
조림과 함께 진행된 사방사업은 당시 산림녹화의 핵심 사업이었다.
영일지구 사방사업은 박정희시대 가장 특기할 만한 국토 개조사업이다.
71년 9월17일 우수 새마을 시찰차 이곳을 지나던 박정희가 "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다 보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이곳" 이라며 완전 복구를 지시함에 따라 73년부터 막올린 이 사업은 77년까지 총공사비 38억2천8백만원, 연인원 3백60만명이 투입돼 황폐지 4천5백38㏊를 녹지대로 탈바꿈시켰다.
소요 묘목만 2천4백만그루, 돌과 뗏장은 각 2백30만개. 박정희는 일에 대한 초인적 열정으로 주위를 사로잡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당시 경북도청 산림국장을 지낸 박상현 (朴商鉉.80) 옹의 증언. "75년 4월17일 그날은 폭풍우가 엄청나게 몰아쳤어요. 그런데 朴대통령께서 해병대 지프를 가져오게 해 현지로 가자는 거예요. 영일군청에서 브리핑 장소까지 헬기로 2~3분이면 되는데 세시간이나 걸렸지요. 폭 3m 미만의 비포장도로를 기어가다시피 하는 동안 김수학 (金壽鶴) 경북지사는 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쳐 피멍이 들고 난리인데도 굳이 현장을 보시겠다니…. " 朴대통령은 곡강초등학교 앞을 지나다 주변 플라타너스 10여그루가 2~3m 높이로 잘려나간 것을 발견한다.
전봇대를 세우면서 전깃줄에 닿을 위험이 있다며 잘라버린 것이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金지사에게 "저거 누가 잘랐어? 20~30년 걸려야 저런 나무 하나 키워내는데 그래 3만원짜리 전봇대 때문에 그걸 잘라냈단 말이야. 당장 조치해 보고하시오" 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교장은 곧 직위해제됐다.
朴옹은 "그런 열성이 아니었던들 일제가 1907년부터 50차례나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을 성공시킬 수 있었겠느냐" 고 말한다.
화전 정리사업도 산림녹화에 한몫 했다.
74년부터 78년까지 5개년계획으로 펼쳐진 이 사업은 공비소탕작전 하듯 군용 헬기까지 동원, 강원.경북.충북등 깊은 산간지방에 흩어져 있던 30여만가구를 정리했다.
당시 강원도 철원.화천군 산림과장을 지낸 김금철 (金琴哲.61) 씨는 "화전부락에 들어갔다가 술취한 화전민이 낫을 들고 쫓아오는 바람에 혼비백산해 도망간 적도 있다" 고 회고했다.
전남 승주.경북 상주 등지에서 대형 산불이 잇따르자 78년 4월 '산불예방에 관한 대통령 특별담화문' 을 발표한 것 역시 박정희의 산림녹화 집념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산불담화문의 일부. '…산불을 낸 사람은 규모의 대소를 불문하고 구속토록 하는 동시에 산불이 발생한 지역의 군수등 각급 행정책임자를 엄중 문책할 것이며…. ' 이같은 집념이 빚은 에피소드 하나. 박정희는 78년 3월24일 제주도 순시중 "조랑말을 산림 순산 (巡山)에 활용할 방안을 강구하라" 는 지시를 내린다.
영농기계 보급으로 조랑말의 쓰임새가 줄어들자 산간지방의 묘목.비료등 자재 운반에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산림청 녹화조림계장 김영달 (金永達.60.임업연구원장) 씨의 회고.
"조랑말 24마리를 마리당 약 40만원에 긴급 구입, 원주에 있는 군마 (軍馬)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게 한 뒤 '실전' 에 투입 (세마리는 훈련도중 죽음) 했지요. 그런데 배보다 배꼽이 더 커요. 사육하랴 병치레하랴 관리비가 이만저만 아니에요. 사육사한테는 고분고분하다 산림공무원이 타려고 하면 덤벼들어 제대로 활용도 못하고 결국 82년에 포기했지요. " 산림청 조연환 (曺連煥.49) 임정과장은 지난해 발생한 고성 산불을 예로 들며 "과거에는 진화작업중 인명피해가 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이제는 집단 이재민이 발생하는등 산불도 미국.캐나다처럼 선진국형으로 변했다" 고 말한다.
그러나 일부 육종전문가들은 녹화에 급급, 리기다소나무.아카시아.오리나무등 지질을 산성화하는 수종을 너무 많이 심었다고 비판한다.
오동나무 단지가 판로개척 부진으로 눈요기에 그친 사례등을 들어 녹화사업이 입체적이지 못했다고 토를 달기도 한다.
22.경제적 극일 집착 '경공업으로 승부수'
박정희 (朴正熙)가 경제발전의 모델로 일본을 선택하고 일본으로부터 배우려 했던 궁극적 목적은 일본을 따라잡고 넘어서겠다는 '극일 (克日)' 의 야망 때문이었다. 그 야망의 첫 단추가 끼워진 것이 허허벌판인 울산 부곡동 일대 1백여만평 대지 위에 조성된 석유화학단지다. 68년 3월22일 합동 기공식장에서 박정희는 처음으로 일본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졌다.
일본과 한판 승부를 벌여보겠다는 오기가 장내를 압도했다. "일본만 하더라도 12~13년 앞선 1955년에 비로소 석유화학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경제가 급격한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은 석유화학공업에 크게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석유한방울 안나는데…”
석유화학공업을 추진한 목적은 경공업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상공장관을 지냈던 박충훈 (朴忠勳.78.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씨와 김정렴 (金正濂.73.전대통령비서실장) 씨는 모두 석유화학공업 성공의 1등공신으로 오원철 (吳源哲.69.전청와대 경제2수석) 당시 공업1국장을 꼽았다. 석유화학공업의 육성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65년 1월. 상공부 연두순시때 오원철씨가 朴대통령에게 브리핑하는 자리에서였다.
"우리나라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제품의 수출에 전력하고 있지만 원료는 전적으로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습니다. 고생은 우리가 하고 단물은 일본이 다 빼먹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일본에 예속돼 있는 상태입니다. 석유화학공업이 완성되면 원료에서 제품까지 모두 국산화할 수 있어 경공업 분야는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습니다."
朴대통령은 뚫어지게 브리핑 자료를 보고 있었다. 무슨 중요한 결심을 할 때 나타나던 바로 그 자세였다.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다" 는 말이 그의 귓전에 맴돌았다. 吳국장의 등에서는 땀이 소나기처럼 흘러내렸다. 10여초쯤 지났을까. 朴대통령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상공장관, 석유화학 추진계획을 짜보시오. " 66년 3월 석유화학공업은 포항제철 건설사업과 함께 제2차 5개년계획의 핵심사업으로 선정됐다. 석유화학공업이란 석유나 천연가스를 원료로 합성수지.합성고무.합성섬유원료, 기타 화학제품등을 만들어내는 산업이다. 나일론.비료.농약.페인트.펄프.장난감.의약.합성세제.타이어등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각종 제품들이 여기서 만들어진다.
吳국장은 복잡한 석유화학계통도를 朴대통령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림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석유화학공장이 들어서기까지는 세차례의 고비를 넘어야 했다. 첫번째가 朴대통령 설득 부분. 朴대통령은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를 이용해 제품을 만든다는 사실을 찜찜해 했다.
66년 초가을 어느날 朴대통령은 전민제 (全民濟.75.全인터내셔널 사장) 당시 대한석유공사 이사를 불러 브리핑을 들었다. 全씨는 62년 울산정유공장을 건설할 당시 실무 책임을 맡았던 인물. 全씨의 증언. "朴대통령께서 일일이 메모해가며 아주 진지하게 듣더군요. 브리핑을 마치자 대통령께서 '全이사, 석유화학공업을 한다고 기름을 마구 써도 되는거요' 하고 물으셨어요. " 全씨는 朴대통령의 걱정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全씨의 계속되는 증언. "2차대전중 일본은 '석유 한방울이 피 한방울' 이라고 떠들어댔거든요. 朴대통령께서도 일제시대 군대에서 이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자신있게 말씀드렸죠. 석유를 원료로 한 제품을 만들어 수출할 경우 생산가격에서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3%밖에 되지 않는다고요. 그제서야 朴대통령 얼굴이 밝아지데요. "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해소되자 朴대통령은 석유화학사업에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입지선정과 차관도입이 걸림돌로 등장했다. 이 때문에 사업추진 결정후 1년반동안 구체적인 진척이 없었다. 경제기획원과 상공부는 핵심사업인 나프타 분해공장의 입지선정 문제로 충돌했다....
상공부·기획원 힘겨루기
기획원은 용수 부족을 이유로 울산 대신 인천을 내세웠다. 공장을 가동할 때 자연소모되는 물의 양을 일정 부분 계속 보충해줘야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는데 보충수의 비율이 10%나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반면 상공부는 보충수의 비율이 3%면 충분하다고 반박했다. 기획원의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유니언 오일사의 인도네시아 산 (産) 기름 판매전략이 숨어 있었을 것이란 의혹이 있다.
마침내 朴대통령이 나섰다. 67년 10월1일 두 부처의 책임자들이 청와대로 불려왔다. 김희술 (金熙述.62.전 대한도시가스협회 부회장) 당시 상공부 석유화학계장의 증언. "청와대 회의 전날 저녁 이택순 (李鐸淳.64.한국제지공업연합회 부회장) 기사 (주사급)가 '일본의 화학경제' 라는 잡지에서 보충수의 비율이 3%면 충분하다는 글을 발견했어요. 기획원이 꼼짝없이 당했지요. " 회의 이틀후 朴대통령은 장기영 (張基榮.작고) 기획원장관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박충훈 상공장관을 임명했다.
상공장관에는 상공차관을 지낸 김정렴씨를 앉혔다. 석유화학공업 추진을 둘러싼 불협화음을 일거에 제거한 것이었다. 석유화학의 특성상 12개 관련 공장을 동시에 지어야 했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총 소요자금은 2억4천2백만달러. 그중 3분의2 정도를 차관으로 해결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당시 상공부 석유화학과장 김광모 (金光模.64.테크노서비스 사장) 씨는 차관도입의 어려움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국내 수요가 2만t인데 10만t짜리 공장을 지으려고 했죠. 계획서를 가지고 세계은행에 갔더니 수요도 없는데 새로 짓지 말고 외국에서 사서 쓰라는 거예요. 그나마 호의적인 외국회사들도 대부분 투자보장을 요구했지요. 그래서 내가 석유화학과장 명의로 투자보장을 해주는 월권 (越權) 행위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朴대통령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사업추진 현황을 매월 보고하도록 다그쳤다. 상공부 관계자들은 초조감에 휩싸였다.
오원철씨의 증언.
"朴부총리와 金장관은 나만 보면 어떻게 돼가느냐고 물어요. 두분이 청와대 보고차 올라갈 때마다 으레 朴대통령이 석유화학의 추진상황을 물어보니 나를 재촉할 수밖에요. " 吳국장은 석유화학공장 합동기공식 직후인 68년 4월초 가방 하나만 덜렁 들고 혼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합작선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천신만고 끝에 다우 케미컬.스켈리 오일.걸프등 굴지의 회사들을 합작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吳국장은 귀국 즉시 朴부총리와 함께 청와대에 올라갔다. 朴대통령의 기쁨은 대단했다.
"다우 케미컬같은 미국의 큰 회사가 우리나라에 진출하는 것은 미군 1개 사단이 주둔하는 것과 맞먹는 효과가 있다. 미국 국회나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
설득끝 美회사와 합작
경제는 안보의 버팀목이고, 안보는 경제의 안전판이라는 朴대통령의 경제관.안보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장애는 그 후에 나타났다. 국산제품에 대한 불신과 일본의 반격이 그것이다. 타이어업계는 도로주행시험에 6개월 이상이 걸린다는 구실로 국산 합성고무 사용을 기피했다. 이 문제는 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국제적인 합성고무 부족상태가 되자 서로 가져가려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이택순씨의 증언. "모 타이어회사 사장이 국산 합성고무를 달라고 야단이기에 '아직 도로주행시험도 안끝났는데 왜 달라고 그러느냐' 고 핀잔을 줬더니 '그래서 장사꾼이라고 하는 것 아니냐' 고 넉살좋게 받기에 껄껄 웃고만 적이 있습니다." 71년 6월 합판접착제의 원료인 메탄올 공장이 준공돼 그 다음달부터 정상 가동되자 주공급선이던 일본은 t당 가격을 60~70달러에서 30달러로 낮춰 덤핑공세를 취했다. 국내업자들은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국산품을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의 역공세에 대한 朴대통령의 분노는 컸다. 이택순 당시 상공부 기사의 증언. "71년 9월께부터 朴대통령은 매달 한번씩 상공부에 지시각서를 내려보냈어요. 내용은 일본제 메탄올을 전면 수입금지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값싼 일본제 메탄올을 못쓰게 하느냐고 국내 기업인들이 상공부에 몰려와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대통령의 지시각서만 보여줬지요. "
朴대통령은 반격의 칼날을 곧추 세웠다. 특유의 오기가 발동했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선언과 함께 여천에 국제규모의 대단위 석유화학단지 건설에 착수한 것이다.
23.나 고속도로에 미쳤어 정치적 반대 묵살
고속도로는 이제 우리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레 자리잡고 있다.
지금 와서는 정부 최고결정권자의 식견이 국가발전에 미치는 영향력의 지대함을 거론할 때 대표적인 사례로 등장하는 박정희 (朴正熙) 의 고속도로 건설도 당시에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박정희는 67년 4월 제6대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구상을 처음 밝혔다.
그해 12월에는 국가기간 (基幹) 고속도로건설 계획조사단을 만들어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 로 일컬어진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반대는 거셌다.
야당과 언론은 사업검토가 불충분한 정치공사라고 몰아붙였다. '대원군 (大院君) 이 경복궁을 짓다가 쫓겨났듯이 박정희도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다가 망할 것' 이라는 저주어린 비난도 있었다. 여당과 정부의 고위인사 중에서도 국가재정등을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가장 비난전화를 많이 받은 사람은 당시 국가기간 고속도로건설 계획조사단장 안경모 (安京模.80) 씨. "오전7시만 넘으면 여야 국회의원들이 우리 집으로 전화해 '대통령을 똑바로 모셔라' 고 호통치는 거예요. 심지어 어떤 의원은 '재벌들 벤츠 타고 편히 놀러다니라고 고속도로를 만드느냐' 고 따지더군요. " 박정희는 여론과 정치권의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朴대통령의 열정은 계획 단계에서부터 대단했다.
安씨가 소개하는 일화 한토막. "계획조사단이 발족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거예요. 하루는 朴대통령이 불러 오전10시쯤 청와대에 갔더니 면도도 안해 꺼칠한 얼굴로 아침도 거른 채 2천5백분의1 지도에다 경부고속도로 노선을 긋고 계셨어요. 오전5시부터 작업을 하셨다는 거예요. 나를 보더니 '임자, 나 요즘 고속도로에 미쳤어' 하시는 거예요. " 朴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노선을 정하기 위해 지도를 직접 챙겨들고 헬리콥터로 전 구간을 일일이 현지답사했다.
獨 아우토반 보고 결심
朴대통령이 고속도로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64년 12월 서독 방문 때였다.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1932년 세계에서 처음 만든 본~쾰른간 아우토반 (고속도로) 을 시속 1백60~1백80㎞로 질주하며 고속도로의 경제적 효용성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 (白永勳.67.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 박사의 회고. "朴대통령은 쾰른에서 본으로 가던 중 차를 멈추게 하더니 갑자기 차문을 열고 도로에 내려서는 거예요. 약 10분간 노면과 중앙분리대.교차시설등을 주의깊게 살펴보시더니 안내역을 맡은 뤼브케 대통령 의전실장에게 고속도로 건설기간과 건설비등 이것저것을 자세히 물으셨죠. " 다시 차에 오른 朴대통령은 수첩과 펜을 꺼냈다.
계속되는 白씨의 증언. "朴대통령께서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시더니 서울과 부산.목포.강릉.인천을 각각 연결하는 선을 그으시대요. '고속도로를 구상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죠. 에르하르트 총리도 朴대통령에게 '경제개발을 하려면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해야 한다' 고 권고했습니다." 이런 결심은 귀국 즉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졌다.
계속되는 그의 증언. "귀국한지 석달만인 65년 3월께 朴대통령께서 나를 불러 고속도로 건설의 경제적 타당성을 조사하라고 지시했어요. 두달만에 올린 보고서에서 일본의 청구권 자금등을 이용,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이 좋을 것같다고 건의한 기억이 납니다." 물론 朴대통령이 고속도로 건설을 서두른 데에는 경제개발의 본격화에 따른 철도수송의 과포화와 울산정유공장 건설이후 공급과잉 상태에 놓인 아스팔트 처리라는 경제적 요인도 한몫 했다.
朴대통령은 서울~부산간 4백38㎞ (당시 추정)에 도로폭 24의 4차선 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드는 비용을 뽑아보라고 6개 기관에 지시했다.
결과는 건설부가 6백50억원으로 최고액, 서울시가 1백80억원으로 최저액을 산출해 냈다.
김정렴 (金正濂.73)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의 증언. "朴대통령은 6개기관에서 산출한 최고.최저액의 중간액과 현대건설이 제시한 2백80억원을 참고해 대략 3백억원, 여기에 예비비 10%를 가산해 일단 3백30억원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재무부 이재국 이재과장 직무대리로 건설비용 산출작업에 참여했던 홍인기 (洪寅基.59.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 씨의 얘기는 다르다.
"67년 11월께였을 거예요. 6개기관의 대표자들이 청와대에 들어가 오후2시부터 차례대로 브리핑했는데, 재무부는 맨 마지막 순서였어요. 그때 재무부가 보고한 금액은 3백30억원이었습니다." 브리핑이 끝난 시간은 대략 오후6시쯤. 서봉균 (徐奉均.71) 재무장관을 비롯한 5명의 재무부팀이 막 청와대 정문을 나서려는 순간 朴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朴대통령이 주는 저녁을 먹었다.
재무부팀의 보고에 만족했다는 표시였다.
東名고속도의 5분의1
정부는 처음 세계은행에 차관을 요청했다.
세계은행에서는 조사단을 파견해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에 1주일간 머무르며 자동차가 몇대나 지나가는지를 조사했다.
결론은 '경부고속도로는 정치적.군사적으로는 중요할지 모르나 경제적으로는 그 중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 27억원을 포함해 3백31억원의 자금을 자체 조달했다.
공사기간중 朴대통령이 특히 염려했던 부분은 감독관과 건설업자의 결탁으로 부실공사가 초래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육군본부 공병감실 공사장교 (대위) 로 있다가 현장감독으로 차출돼 2년 넘게 현장에서 일한 심완식 (沈完植.59.전 한국산업안전공단 국장) 씨. "朴대통령은 현장에 오시면 꼭 '업자들 하고 결탁해 엉터리 공사를 하지 말라' 는 말씀을 하셨어요. 업자에게 돈 받지말라고 매달 금일봉을 주셨지요. 요새로 치면 10만~20만원 정도 됐을 겁니다." 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朴대통령의 속전속결 전법이 단연 돋보이는 대목은 용지매입 대목이다.
김정렴씨의 증언. "朴대통령은 서울~수원간 노선을 대략 정한 후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를 불러 '용지 확보는 빠를수록 좋아. 시간을 끌면 땅값이 춤출 것 아니오. 1주일 이내에 끝내도록 하시오' 라고 지시했어요. 두 사람은 지시대로 완수했어요. 다른 구간도 같은 식이었습니다." 68년 12월17일자 박정희의 내각에 대한 지시각서 (정부기록보존소 소장) 는 그의 꼼꼼함을 잘 드러내 준다.
당시 고속도로는 국민에게 낯설었다 '고속도로상에 사람.동물등 교통장애물이 일절 없도록 할 것. 고속도로는 그 속도에 생명이 있는 만큼 사람이나 기타 장애물 때문에 자동차 속도를 제대로 못 내는 일이 없도록 일반 국민, 특히 국민학생들을 계몽할 것. ' 박정희는 고속도로 이용률과 친숙감을 높이기 위해 경인국도를 일부러 보수하지 못하게 했다.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 로 알려진 김완희 (金玩熙.70.미국 거주) 박사의 증언. "朴대통령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통행료 1백원을 아끼려고 경인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보수하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그랬어요' 하십디다." 68년 2월 착공한 경부고속도로는 완공목표를 거의 1년이나 앞당긴 70년 7월 개통됐다.
착공 2년5개월만이었다.
총 공사비 4백29억원에 연인원 약 9백만명이 동원된 공사였다.
㎞당 약 1억원이 든 셈으로 그 당시 건설중인 도쿄 (東京)~나고야 (名古屋) 고속도로 건설비의 5분의1밖에 들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값싸게 건설한 고속도로' 란 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선 (先) 개통 후 (後) 보완' 이란 원칙아래 서둘러 완공한 경부고속도로는 후에 땜질공사로 몸살을 앓았다. 90년말까지 경부고속도로 보수비는 약 1천5백27억원으로 건설비의 4배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
'누더기 고속도로' 란 별명도 이 때문에 얻어졌다.
경제논리 존중의 '모범'
하지만 당시 가난한 나라살림에 허술하나마 고속도로를 만든 덕분에 경제발전의 기틀이 마련됐다는 반론은 설득력을 가진다.
선진국 수준으로 건설하려 했다면 비용도 비용이려니와 12년의 세월은 소요됐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당시 현대건설 중기관리과장이었던 이명박 (李明博) 의원은 "중요한 것은 당시 경부고속도로가 정치논리를 철저히 배제하고 순수히 경제논리에 입각해 만들어진 것" 이라고 강조했다.
정치논리로 오염돼 시작부터 비틀거리고 있는 현재의 경부고속철도 건설과 관련, 반드시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24.밉지만 배울건 배우자
5.16 직후의 일본은 지금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될 정도로 우리에겐 깊은 심연의 '가깝고도 먼 나라' 였다. 짙게 깔린 반일감정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가로막고 있었으나 5.16 주체들로선 권력 유지와 '혁명공약' 인 경제개발을 위해 돈줄인 일본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일본을 돈줄로 생각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후 세계사의 주역으로 부상한 미국은 동북아를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식민지시대 배상금 (자기들은 보상금이라 불렀지만) 지불을 통한 국교정상화의 방법을 택했다.
더구나 박정희 (朴正熙) 는 일제시대 가장 일본식 교육에 철저했던 사범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 그런 탓이었던지 그는 일본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일본을 경제발전 모델로 삼았다. 당연히 박정희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일본통답게 효율적으로 일본과 일본인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쿠데타 6개월만인 61년 11월 최초의 외국 방문지로 일본을 찾았다. 11월11일 朴의장 일행이 일본에 도착한 후 첫 행사인 총리관저의 환영 만찬장. 한.일 양국의 정상급들이 마주보고 앉은 긴 테이블 끝에 조용히 앉아 있는 노인이 있었다.
朴의장의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 (南雲) 씨. '일본측이 스승의 나라라는 인상을 주어 박정희의 기세를 꺾기 위해 데려다 놓았다' 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정반대다. 당시 주일대표부 참사관이었던 최영택 (崔榮澤.69.육사 8기) 씨의 증언.
"朴의장의 방일 직전 군관학교 교장을 모시라는 특명이 떨어졌습니다. 일본 외무성에서는 '좋은 생각' 이라며 적극적으로 나와 시골에 칩거중인 나구모 교장을 찾아 모셨습니다. "
만찬은 축배로 시작됐다.
공식 축배가 끝나자마자 朴의장은 갑자기 술병을 들고 일어났다. 박정희의 돌출행동으로 좌중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둥그레진 눈들이 그를 따라갔다.
朴의장은 좌석 끝머리의 노인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가서는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 술을 따랐다. 그리고 유창한 일본어. 이승만정권 아래에서는 외교관이 일본말을 썼다고 대통령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었는데, 한국의 최고 권력자가 공식만찬에서 일본말을 서슴없이 뱉은 것이다.
공식석상서 일본말 사용
"교장선생님, 건강하십니까. 제가 일본정부의 초대를 받아 회담하러 왔는데 옛 은사를 잊을 수 없어 모셨습니다." 순간 엄숙하던 만찬장에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물론 일본측에서 먼저 터져나온 박수다.
더 놀라운 것은 교장의 대답.
"朴장군이 그동안 가끔 인삼을 보내주어 보시다시피 이렇게 건강합니다."
朴의장은 일본이 쫓겨간 뒤에도 일본의 은사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었다는 얘기다. 감동의 물결속에 이케다 하야토 (池田勇人) 총리가 한마디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은 (師恩) 의 미덕을 안다는 것은 우리 동양의 미덕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번 동양 미덕의 체득자이신 박정희선생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일본통 朴의장은 사무라이 나라 일본에서 가장 중시되는 신의 (信義) 를 직접 보여줌으로써 사무라이의 후손들을 감격케 한 것이다. 박정희의 일본 다루기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朴의장의 감격 행보는 이어진다.
일본 체류중 가장 중요한 일정인 다음날 일본 자민당 간부들과의 오찬. 일본 막후정치의 실세들이 모인 자리이기에 공식적인 만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朴의장은 도쿄 (東京) 중심가 아카사카 (赤坂) 의 요정 가와사키 (川崎)에 도착하자 참석자들에게 일본식으로 큰절을 했다.
다시 일본말. "잘 부탁드립니다. 저에겐 젊다는 것 외에 별다른 자산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저를 잘 지도.편달해주시기 바랍니다." 朴의장은 외교관례화된 서양식 예법 대신 일본식 예법을 통해 일본인들이 의 (義) 와 함께 중시하는 예 (禮) 를 보여준 것이다.
이같은 朴의장의 태도에 일본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일본인의 입을 빌려 확인해보자. 일본 정계 원로 이시이 미쓰지로 (石井光次郎) 는 몇년 뒤 이동원 (李東元.71.국민회의 의원) 당시 외무장관에게 그때의 느낌을 털어놓았다.
"몇가지에 놀랐습니다. 첫째는 인상인데, 쿠데타의 주인공이라 무섭게 생긴줄 알았는데 선글라스만 썼지 키도 작고 평범하게 생겼더군요. 둘째는 언변인데, 군인답지 않게 차분하고 논리적이더군요. 셋째로 성품인데, 겸손하고 솔직하더군요. 메이지 (明治) 시대 지사들이 그랬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일본인이 내린 결론, '메이지 지사' 는 극찬이다. 일본의 봉건막부를 무너뜨리고 근대일본을 만든 주인공에 비유한 것이다. 박정희의장이 생각한 근대화의 모델이기도 하다. 묘한 상응 (相應) 이 아닐 수 없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를 '쿠사레엥 (腐緣)' 이라고 불렀다. 과거 식민지시대의 좋은 인연이 썩어 불편한 관계가 됐다는 얘기다.
"군인답지않게 논리적
그래서 일본은 한국에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가장 먼저 박정희가 어떤 사람인지,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대상으로 좋은 인물인지를 알아보느라 분주했다.
그 결과 朴의장이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데 한숨 돌리면서도 좌익 연루설에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무렵 朴의장이 직접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朴의장의 태도에서 기대 이상의 동질감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좌익 연루설과 관련해선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시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의 좌익바람은 심각했다. 그래서 가와사키 모임에 참석했던 이시이는 朴의장의 인사가 끝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朴의장께서는 어떤 통치철학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
"…아무 것도 모르고 경험조차 없는 우리는 다만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재건하려는 의욕만 왕성합니다. 마치 일본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젊은 지사들과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가지고 그분들을 본받아 가난에서 벗어나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가려는 것입니다."
朴의장은 아예 '메이지유신의 지사를 본받아' 라고 못박았다. 그 자리에 있던 일본 정계 원로들이 얼마나 흐뭇하게 생각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해프닝은 그로부터 2년 뒤 한 망언 (妄言) 으로 나타난다. 朴의장의 이같은 적극적인 일본관은 이후 여러모로 확인된다.
李전장관의 기억.
"朴대통령은 '서양문물을 갓 도입한 일본이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해군을 쳐부순 얘기를 하면서 아시아중에서 서양을 이긴 것은 일본뿐' 이라는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서양의 문물을 배워 서양을 이긴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朴대통령은 '일본 배우기' 에 그치지 않았다. 60년대 중반 어느날 대통령 집무실로 올라온 李장관을 경호실장 방으로 인도한 박정희는 경호실장 방에 도착하자 이번엔 "옆방으로 가보자" 며 이끌었다.
브리핑용으로 만든 작은 방의 사방 벽에는 잔뜩 그래프가 그려진 차트가 걸려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을 분야별로 비교한 것들이었다. 李장관이 "각하, 왜 하필 일본과 비교하십니까" 라고 묻자 박정희의 명료한 대답. "일본을 따라잡아야 돼. " 박정희는 그래프를 보면서 연방 "됐어, 잘하는구만" 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한마디 덧붙였다.
"한국사람은 일본과 경쟁을 붙여야 해. 그래야 악착같이 달라붙어 본래 능력 이외의 알파 (α)가 나오거든. "
박정희의 일본관이나 그 시대의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에는 늘 일본을 배워 이겨야 한다는 극일 (克日) 의 투지가 숨어 있었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마치 일본이 서양을 배워 서양을 이긴 것처럼.
서양이긴 日 따라잡아야
그러나 맨손으로 일본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朴대통령은 쿠데타 직후 자신이 끌고가야 할 조국이 '도둑맞은 초가집' 처럼 가난함을 확인했다.
돈이 필요했다. 당시 정부 재정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그날 그날 입에 풀칠할 수준의 생존비가 아니라 개발투자비였다. 그런데 朴대통령은 5.16 직후 각 부처로부터 현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가난만 확인한게 아니라 가난을 떨칠 수 있는 가능성도 포착했다.
그는 61년 5월31일 엄영달 (嚴永達.69.전 신민당의원) 외무부 아주과장을 불러 한.일관계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당시 배석했던 김종필 (金鍾泌.JP) 자민련 총재의 기억.
"브리핑의 결론은 '10년간 협상했지만 제자리' 라는 거였어요. '왜 안되느냐' 고 물었더니 '청구권 문제가 걸려 안된다' 는 겁니다. 아무도 제2의 이완용 (李完用) 이 되고 싶지 않아 하니 일이 풀릴 수가 없죠. 그래서 제가 나서게 된 겁니다."
한.일관계 정상화의 특명이 JP에게 떨어진 셈이다. 당시 JP는 명실상부한 2인자로 중앙정보부를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지금의 한국프레스센터 자리인 국회 별관 2층 사무실에서 정보부 법안 마무리에 바쁘던 그 무렵 일본에서 진객 (珍客) 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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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실록 박정희 1 (중일일보사)|작성자 맘착한 토끼아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