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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 42세손 휘 봉재(全州李氏 諱 鳳載) 추모 약사
1. 태어남
성도께서는 전주이시 41세(완창대군파 21세)인 아버지 휘(諱) 병준(炳俊)과 어머니 의령남씨 (諱 乭岩釗-걸암쇠 父 세희)의 아들로 1911년(신해년) 음력 11월 3일(양력 12월 22일)에 태어나셨다. 태어나신 곳은 익산시 용동면 화실리 306번지(고창마을)이며, 누이동생{봉림(鳳林 1914년) 복애(福愛 1919년)}은 나중에 있었다.
태어난 시기는 성도의 증조할아버지(淳興:순흥)께서 돌아가신 해(음력 2월 22일)이기도 하며, 조선시대가 마감되는 불운한 시기였다.
그러나 만물이 생동하기 시작한다는 동짓날 출생은 의미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태어나실 적에는 성도의 증조할머니(문화유씨 1849~미확인), 할아버지(殷植:은식 1875~1960), 할머니(양성이씨, 諱 禎子 1875~1944), 아버지(1893~1921), 어머니(의령남씨 1890~1941)와 성도의 아버지 형제(병건 1895~1930), 병균(1909~1972) 등 가족의 축복 속에서 태어나셨다.
2. 집안 내력과 유년기
고창 마을에 있는 정려문(1680년 옮김)에서 가르침을 주는 효(孝)와 절(節)의 본보기를 받아 면면히 내려오는 집안 가문의 계통을 바탕으로 유년기 생활을 하셨다.
- 17대조인 진랑군(晉郞君) 휘 보(甫) 할아버지께서는 위중하신 진랑군의 아버지 휘 중방(重芳, 경양군)의 병 구환을 위하여 보 할아버지 자신의 살과 뼈로서 약을 지어 드리어 병환을 나았다는 효의 이야기는 동국신속삼강해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광해군시대)에 실리고,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이보할지'라는 항목으로 수록되어 젊은 청소년에게 효의 근본을 가르치고 있다. (보 할아버지는 고창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입향조이다)
- 또한, 15대조이신 휘 계수(桂遂) 할아버지께서는 천품이 온후하고 재질이 뛰어나 세종대왕 14년(1432년)에 문과 급제하여 중요한 자리의 벼슬을 거쳐 호조참판(지금 차관)에 있던 중 계모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가 노령 80세가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고창마을)으로 들어와서 정성껏 모시고 시묘9侍墓)를 하였다.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효(孝)를 시행한 일이 조정에 소문이 나서 정려문을 하사받았다.
- 12대조인 덕인(德仁)의 제수(막내동생 덕지(德智)의 처)이신 풍양조씨는 남편이 종성부사로 부임하자 따라가서 뒷바라지하라는 시부모의 권유를 사양하고 집에 남아 시부모를 극진히 섬겼는데, 이듬해 6얼에 현지에서 남편이 순직(병으로 작고)하자 그 소식에 의하여 여러 번 기절하였다. 종성에서 시신이 와서 장례를 하던 날 상여소리(해로가)를 듣고 기절하여 끝내 숨을 거두어 남편과 함께 묻혔다. 이로써 정려를 받았다.
(鐘城府使 : 3품 벼슬로 지방행정관직, 종성은 함경북도 종성군에 있는 국경 도시이며, 중국 간도 지방과 접하여 있으며 두만강 오른쪽 기슭에 있고, 군청 소재지이다.)
이러한 집안 내력의 가풍과 더불어 성도께서의 유년기 시절은 기본적인 학문을 쉽사리 깨우치니 어머니께서는 신동(神童)이라고 하시며 인근마을과 읍내까지도 자랑하실 정도였다.
지역 유력인사에 의하여 서장의 글공부를 마치고, 집안 환경으로 인하여 신식 학교진학을 하지 못하였음은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집안 어른의 지도와 스스로 경서(經書)를 익히어 세상의 깨우침을 얻었고 홀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3. 가정의 변화
성도의 11세인 1921년에는 아버지(炳俊)께서 병을 얻어 여러 가지 약을 구하여 극진히 보살폈으나 효험이 없고 위태로움에 이르자 성도의 어머니(의령남씨)께서는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구하여 남편의 입에 흘려 넣었으나 겨우 3일을 연명하고 끝내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다,(음력 8우러 10일, 29세, 1893~1921)
이 때 성도의 어머니께서는 남편 따라 죽으려 했으나 남편의 가르침(어린 아이 잘 키우라)과 친척의 만류로 예(禮)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 온 고을과 여러 기관(서원, 경성오륜행실소, 향교)에서 칭송과 초상을 하였다.
성년의 나이(19세)로 가정을 갖게 되어 1929년 결혼(회덕황씨, 諱 萬炫, 1909~1947) 하였으며, 1947년 재혼(여산송씨 諱 小禮 소윤공파 27세손, 1927~1988)으로 6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이에 따른 자손으로 친손(9남 10녀)과 외손(6남 2녀)을 합쳐 27명의 손자, 손녀를 보았다.
성도께서는 어두운 시기인 왜정시대에 어린 나이(11세)로 아버지를 여의옵고
가문의 중책과 훌륭한 집안을 계승 발전하기 위한 꾸준한 생활을 하시던 중에
- 20세 : 1930년 작은 아버지(병건, 은규 할아버지) 작고 (36세)
- 31세 : 1941년 9월 어머니께서 돌아가겼으며 (의령남씨 52세)
- 34세 : 1944년 12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양성이씨 70세)
- 38세 : 1947년 9월 첫 번째 부인과 사별 (회덕황씨 39세)함에 따라 73세의 할아버지와 아들, 막내 작은 아버지(병균, 대전 예재 父親) 내외분만 있게 되었다. 첫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여산송씨) 함으로써 73세 고령의 할아버지를 계속 봉양하였다.
- 50세가 되던 해 1960년에 86세의 할아버지(殷植, 1875년생)께서 돌아가셨다.
- 이후에도 어려움이 더 있었으나 실로 가슴 아픈 세월 속을 지내셨다.
4. 사회 활동
* 젊은 나이(39세)로 동네 이장을 맡아 일하시며 많은 고초를 겪었으며 1950년 6,25동란 때 공산 지배가 며칠 더 하였다면 집안 일족에 의하여 목숨을 빼앗길 위태로운 일도 겼으셨다.
* 지금까지의 전통문화는 윤리 도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는 예부터 인간 공존의 슬기인 인(仁)을 숭상(崇尙)하였고, 인간생활의 규범인 예(禮)를 행하도록 하였다.
- 1953년(44세)에 모든 사람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인성(人性)을 심어 주고, 지역민에게 선도할 수 있는 기반구축 확산에 노력하고자, 해방 이후 고창 마을에서 처음으로 용안 향교 임원(장의, 掌議)으로 활동하셨다.
집안 대대로 諱 만매(35세), 諱 정염(36세), 諱 신옥(37세), 諱 은식(40세, 1930년 掌議) 할아버지께서도 향교 임원으로 활동하셨는데 아마도 할아버지(殷植)를 모신 영향이 있어 일찍이 수업을 받은 듯하며, 1968년(59세)부터 2년 임기인 용안향교 전교(典校, 업무 책임자)를 1970년 4월까지 하셨다. (향교 운영위원장 1976~ 1982년)
* 교육 환경이 열악한 시기인 1958년에는 흥왕초등학교 사친회를 맡아 지역민 훈몽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후원회 1946~1952, 사친회 1953~1962, 기성회 1963~1970, 육성회 1970~ )
* 1960년 12월 26일에 실시된 용안면(현재 용안면과 용동면을 합친 지역)의 면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고배를 마시기도 하셨다.
* 1972년 전주이씨 경양손 도유사(종중일의 책임자)를 지내시며 우리 고창마을의 전주후인들이 전주이씨 후예임을 알리고 전주이씨 다른 파종과 넓은 교류를 하셨다.
* 물질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운 생활여건의 편리화, 물질과 정신의 갈등 시대에 살아 왔고, 저물어가는 선친들의 생활상이 구시대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시대에 살며 어쩌면 구식 문화와 신세대의 새로운 사고의 시대를 거치며, 태어난 시기와 죽음의 시대가 극명하게 다른 변화에 잘 대처하엿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5. 가정을 이끌어 감
* 대대로 양반 집안이라고는 하나 시대의 변화를 일찍이 깨우치고 함께 일하며 가족 부양에 겸손과 미덕으로 남부럽지 않으며 초라하지 않는 살림을 유지하였다.
* 1950년대부터 담배소매업을 가정에 두고 살림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셨으며,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인삼 판매에도 한동안 관심을 가져 보기도 하셨다.
* 1960년대 후반에는 시골생활(고창마을)을 정리하고 익산 시내로 이주하려는 마음고생을 하신적도 있었으나 나이 50대라는 멍에가 있어 이주를 접었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생각합니다.
* 적은 농토지만 새벽잠을 깨우고 이슬을 털어가며, 평생 60번밖에 못한다는 벼농사를 근면함과 강인한 생활력으로 농사를 지었으며, 더욱 경제적인 소득을 높이고 싶어 가축농사는 신통치 않았다.
* 가끔 약주를 드시고 오시는 알은 있었으나, 약주를 많이 드시는 편은 아니었으며, 담배는 피우시다 끊는 과정을 여러 번 하셨다.
* 구황 작물로 생활의 절약 정신을 심어 주고, 새벽의 선비체조로 건강을 항상 지켰으며, 인근 거리(함열, 용안, 강경)는 자전거로 일을 보아 건강과 절약을 실천하셨다.
선비체조는 "손을 비벼 열을 내고 몸 구석구석을 문질러 기운을 높이는 방법이다" 하셨는데, 우리가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선비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6. 세상을 떠남
* 75세의 노구(老驅)를 이끌고 노후생활을 하시던 중, 뼈 골절 사고가 발생되어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평소 병원출입이 없이 지내시던 터라 큰 사고였다.
1985년 9월 말에 일어난 이 사고로 바깥 출입이 어려워졌으며 상당 고생하셨습니다.
* 세상의 진리와 성현의 말씀이 더욱 좋은 것에 심취되어 기독교에 입문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 생활(새벽에도 교회에 가심)을 하시어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셨습니다.
* 1989년 음력7월 3일(양력 8월 4일, 금요일) 79세의 나이로 태어나신 곳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가셨습니다.
* 묘지는 익산시 용동면 화배리 산 11번지 등고령 동쪽 기슭(東麓-동록)에 모셨습니다.
(방향은 술좌, 12시가 북쪽이면 10시 방향)
* 이에 우리들은 숭고한 마음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가시 한 번 성도(聖徒)의 생애에 대하여 거듭 생각하고, 대대로 냐려오는 꿋꿋한 정신적 유산의 뜻을 이어 받아 자기에 대하여 알찬 생활을 기대합니다.
첫댓글 내년이면 아버님 탄생 100주년이 되네요... 다시한번 아버지 인자한 모습이 떠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