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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공동체 실현.... [광주승리]이끌어
각종 물자 자발적 지원 시위적극 동참
기독.적십자병원등 헌혈행렬 줄이어
주부들도 시내 전역서 시위대에 김밥.음료수 나눠주며 "격려"
51 시민참여 <상>
광주 민주항쟁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것인가. 무자비한 폭력에 대항. 시민항쟁을 10일동안이나 끌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에대한 대답은 21일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헌혈운동]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물자지원으로 모아진다.
[민주항쟁의 전과정에서 광주시민들은 모두가 항쟁의 참여자였다. 그것은 바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의 결과에서 얻어진 전체의 성과이기도 했다. 헌혈활동과 시민들의 물적제공은 민주항쟁을 10일간이라는 오랜 시간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
[광주의 오월이 남겨준 위대한 실천적 교훈중의 하나는 생활공동체를 실현했다는 것이다. 이는 곧바로 광주 항쟁의 주역들이 광주 시민 전체였음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며 10일간의 항쟁이 결코 패배로 끝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시사해준다. ]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편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지])
21일 하룻동안 광주지역에서 전개된 헌혈운동과 물자 지원과정을 당시 상황과 참여자의 증언순으로 나눠 싣는다. <편집자주>
21일 아침 광주시내에는 지난밤 사이의 참상을 알리고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홍보팀]들이 활동을 시작한다. 10-20명단위로 구성된 시민 홍보팀은 아시아자동차등에서 유출된 차량을 이용, 시내 전역을 누비며 21일 새벽 광주역앞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살인행위를 알리고 [도청으로][전남대로]그리고 [조선대앞으로]모일것을 호소한다.
동별로 봉사대 조직
배고픔을 까마득히 잊고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던 차량시위대의 행렬이 잠시 멈춰선다. 차량을 세우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올려 보내준 것은 주먹밥. 식었지만 식초를 치고 김가루를 뿌려 정성스럽게 만든 주먹밥앞에 시위대 모두는 숙연해진다.
시위차량에는 비록 10여명이 타고 있었지만 주먹밥을 만든 아주머니,음료수를 실어 보낸 아저씨. 물을길러온 소녀까지 수십여명의 정신적 참여가 함께한다.
당시 서석1동의 반장을 맡고 있던 김경애씨(당시 51세)의 증언. [선배언니의 제안으로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성의껏 쌀을 가져오라고 말을 하자 4되 3되씩 들고 와 한집에서 8명의 부인들이 모여 주먹밥을 만들었다.
주먹밥 50인분 정도를 라면 박스에 담아 전남대치대옆으로 지나가는 차량들에게 전달했다. 몸조심할 것을 당부하며 주먹밥을 올려주면 젊은 애들은 [수고가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염려 마세요]하고 대답하며 지나갔다. ]
전남대 정문 인근에 살고 있던 김현녀씨(21일 사망한 가정주부 최미애씨의 어머니)는 음식제공은 비록 몸은 참여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항상 함께하고 있다는 정성의 표시였다고 회고한다.
[아침식사를 마친후 동네분몇이 집으로 오더니 젊은 사람들 걱정을 했다. 밤을 꼬박 새고 아침까지 굶고 저러고 있을텐데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나와 각자 집에 있는 식은밥이라도 모으기로 했다.
몇몇 집에서 모은 식은밥에 식초를 치고 소금 ,김가루 등을 뿌려 주먹밥을 만든뒤 때마침 전남대 정문쪽에 집결해 있던 차량들에 전달했다. ]
손에 손에 주먹밥을 들고 음료수 상자를 들고 시위차량을 기다리는 시민들의 행렬은 시내 곳곳에서 발견된다. 풍향동 백림약국인근과 산수 1동 지산동,원산동등에서는 일부 주민들이 서툰솜씨로 [봉사대]라는 현수막을 만들어 붙인뒤 아예 대형 솥을 가지고 나와 직접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시위대들에게 제공한다.
낭동. 대인 시장 상인들 또한 [며칠 장사 망치는 것이 대수냐 ]며 몇시간동안의 수입금을 모아 음식을 장만한다. 10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인 금남로에는 직접 음식을 싸들고 나온 시민들로 인해 흡사 [맛자랑대회]를 연상케했다.
노인들 현수막 제작 참여
[전투가 치열했던 금남로 에는 동별로 나온 수백명의 가정주부들이 김밥을,함지에 담아 도로에 펼쳐놓고 시위대에게 나눠주었다. 김밥 주먹밥 달걀 김치 음료수 빵등으로 각양각색음식들의 맛자랑이 벌어졌다. 아주머니들은 간밤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아들 동생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이들 시위대 모두를 식구처럼 여겨 그들에게 요기를 시켜주는 일은 곧 자기의 혈육을 먹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듯 했다] (풀빛 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는 각종시위용품 제공으로 이어진다. 시위에 필요한 종이와 페인트 빈병 천등. 21일 오전 양동시장 인근에서 현수막 등 홍보물을 제작했던 이광영씨의 증언.
[현수막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몇사람을 모았다. 천과 페인트를 구하는게 급한 일이엇다. 때마침 인근에 있는 페인트가게를 찾았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난감해하고 있는데 동네 아저씨 몇분이 오셔서 자초지종을 묻더니 다짜고짜 열쇠를 뜯기 시작했다. 급하기는 하지만 주인의 허락없이 물건을 가져갈수 없다고 버티자 그분들이 오히려 화를 냈다.
주인과는 이웃사촌지간이고 주인의 성격 또한 흔쾌히 물건을 내줄 사람인만큼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만약 주인이 이해를 못한다면 자신들이 돈을 모아 변상을 해주겠다며 페인트 등을 가지고 나왔다. 천은 양동시장내 가게주인 한분이 얼마든지 제공하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서 당초 계획했던 목표물량을 초과확보했다.]
특히 이씨의 현수막제작 과정에서 인근에 살고 있던 붓글씨를 쓸줄 안다는 60,70 대 노인들이 자진해서 참여한다. 음식과 음료수를 싸들고 시위대들을 기다리던 시민들의 행렬이 오후 2시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전남대,조선대,적십자,기독병원등으로 향한다.
금남로에서 수백명의 시민들이 총에 맞아 사경을 헤메고 있다는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피 한방울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행렬들로 병원앞마당아 인산인해를 이룬다. 몸이 약해 헌혈이 불가능하다는 병원측의 설명에도 불고하고 [내 피를 저사람들에게 달라]는 애원이 곳곳에서 나온다.
일부 젊은이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이 계속될수록 피부족 사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며 헌혈차량을 몰고 나와 시내에서 헌혈활동을 벌인다. 부상자를 병원에 옮기던 도중 피부족 사태를 예감한 정무근씨 (당시 38세)는 병원관계자들과 함께 헌혈운동에 나선다.
[무등극장 앞모퉁이에 청년 한사람이 배를 움켜 쥐고 앉아 있었다. 총을 맞은 것 같았다. 그를 들쳐 메고 적십자병원으로 뛰었다. 적십자 병원은 병실은 물론 복도까지 총상환자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순간 피가 부족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평소 안면이 있는 기명서씨 간호원 2명과 함께 헌혈차를 몰고 나갔다. 양림동오거리에서 헌혈을 받는데 도착하자 마자 시민들이 몰려 나왔다. 사람이 많아 손이 부족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거들어 주었다. 3시간여동안 모은 혈액이 무려 4백여병에 달했다. ]
21일부터 헌혈운동등 부상자 구호활동을 벌이던 이 광영씨는 다음날 부상자를 싣던 도중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허리 중추신경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는다. [헬기기초소사로 부상당한 여학생을 싣고 적십자 병원으로 가니 피는 물론 약품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었다. 지프차를 몰고 시내 약국과 개인병원을 돌며 의약품을 실어 나르고 헌혈된 피를 시내 병원으로 분산공급하는 작업을 벌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궁수부대 주둔지까지 접근, 부상자를 실어나르려 했으나 공수부대는 매정하게 이를 거절했다. ]
부상자 구호 활동을 위해 시내 전역을 돌던 이씨는 이날 오후 6시께 양림동에서 헌혈을 하고 싶다는 여학생을 만나 기독병원으로 안내한다.
여고생 총격사망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헌혈을 하겠다고 졸라 기독병원으로 데려다준뒤 또 다시 부상자 수송작업에 나섰다. 잠시후 다시 기독병원에 와보니 많은 사람들이 웅성이며 울부짖고 있었다. 어느 여학생이 머리에 정통으로 총탄을 맞아 즉사했다는 것이다. 시체를 확인해보니 조금전에 내가 실어다 준 그 여학생이 었다. 헌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 공수부대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내가 병원으로 실어다 주지 않았다면 그 여학생은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지금도 괴롭다.]
시민군의 등장과 함께 광주 철수를 결정한 공수부대는 [원활한 철수]라는 미명아래 헌혈을 마치고 귀가하던 소녀에게까지 총탄을 퍼붓는다.
[21일 집을 나간 딸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22일 아침 도청등으로 딸을 찾아 나섰으나 실패하고 큰딸집에 가 있는데 이웃집 사람이 뛰어 들어오며 딸이 죽었다고 알려줬다. 학교 교장 교감선생님과 함께 기독병원으로 가보니 시체실 맨구석에 피를 흘린채 누어있었다. 하복부에 총탄을 맞았다는 것이다. ]
나중에 간호원한테 확인해보니 21일 오후 헌혈을 하고 다녀간뒤 1시간만에 시체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박금희(당시 춘태여상 3학년). 광주 시민들의 가슴에 영원히 17세 소녀로 남아있는 박금희의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