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방송 PD, 박화목 시인
홍 윤 기
일본 도쿄센슈대학 대학원 문학박사, 국제뇌교육대학 석좌교수, 국제PEN 한국본부 고문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 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보며 쌩긋.”
하는 〈과수원길〉하면 한국의 대표적인 동요이다.
해마다 이 노래(김공선 작곡)가 울려 퍼지는 봄날이면 떠오르는 도수 높은 근시안경의 얼굴, 그것은 박화목(朴和穆, 아호 銀鐘, 1921~2005) 시인의 인자한 모습이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평양신학교를 거쳐 만주 하르빈 영어학교와 봉천신학교를 졸업했다. 일찍이 박화목은 일제하인 1941년에 동시 〈피라미드〉를 《아이생활》에 투고 발표했다. 당시 소년 시인, 박화목의 나이는 약관 18세.
8.15 해방 직후 38선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월남한 박화목 시인은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의 문화촌에 주거를 두고, 그 무렵 서울 남산에 있었던 ‘서울중앙방송국’의 문예담당 PD(1947~50)로서 방송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서울신문사 문화부장(1950)도 역임했다. 이 무렵 청년문학가협회 아동문학 위원 등으로 활발하게 문단 생활을 했고, 동인지 《죽순竹筍》과 시지(詩誌) 《등불》의 동인으로도 활동하였다. 이때 〈신부新婦〉를 비롯하여 〈애가哀歌 삼장〉 등 역작을 발표하여 계속 주목받았다. 이 당시 《백민白民》(18호, 49.3월호)에 발표한 〈옛날에〉도 높게 평가되었다.
박화목 시인이 자선한 대표작의 하나로는 그의 순수하고도 선량한 성품이 잘 들어나는 〈미소〉라는 작품이 있다. 박화목은 평소 필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내 작품들 중에서 〈미소〉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평안도 사투리가 시어로서 쓰인 〈미소〉는 다음과 같다.
내가 길을 걸어갈 때
저 맞은편에서 남자 하나이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걸어온다
괜히 마음이 섬찍해지고 이럴 때
나는 미소를 보이며 등꼴엔 땀이 밴다
그 남자와 나는 아는 사이가 아니다
그 남자는 그대로 제 갈 길을 가고
나는 면괘스런 마음에 젖는다
너무 높아진 빌딩 때문일까
아니면 눈발치듯 하는 자동차의 질주 때문일까
현기眩氣스런 눈을 쉬일 겸 이번엔
넥타이 진열창 앞에 잠시 선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일까
최신식 무늬의 넥타이들이
나의 모가지를 바짝 조여매려는 것이 아닌가
나의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는데
여점원 아가씨가 함뿍 미소를 풍긴다
나의 모가지가 나의 것이 아니었고
마네킹의 모가지가 나의 것이었음을
깨달은 나는 실없이 미소를 짓는다.
-〈미소〉
항상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 박화목 시인의 인자한 얼굴이 지금도 뚜렷이 연상되는 직품 〈미소〉는 서정적이면서도 위트 넘치는 새타이어의 풍자적 자유시다. 그 뿐 아니고 기독교적 이상주의 사상이 깔렸다고 평가받았던 박화목 시인의 아동 작품은 이미 8.15 광복 이전 일제하부터 발표되어 주목받았다.
또한 8.15 해방 이후, 《소학생》, 《소년》 등에 쓴 동시작품 발표작들도 널리 알려졌다. 예컨대 동시로 〈창〉《소학생》(48.2), 〈초가집〉《소학생》(48.9), 〈진달래〉《소년》(49.4) 등이 6.25 이전에 쓰였다. 그는 동시, 동요 뿐 만이 아니고, 동화며 아동소설 등 기독교 사상을 저변에 까는 아동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면서 아동문단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 무렵 박화목은 시인 이인석(1917~1979)의 권유로 6.25 이후 《자유문학》 편집장(1952~53)을 역임했고, 크리스천문학가협회 부회장,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문단의 지도적인 아동문인으로 활동했다. 한 때, 미국에 건너가 뉴욕주 시러큐스대학에서 방송학도 수학했다.
박화목 시인의 대표작은 두 말할 여지없이 〈보리밭〉을 꼽는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이 〈보리밭〉이 한국의 대표적 명가곡이 된 것은 작곡가 윤용하의 작곡으로 KBS 방송의 전파를 타면서 날로 애창되었다. 그 당시 윤용하는 ‘서울중앙방송국’ 작가실에서 1961년부터 근무하고 있었던 필자(홍윤기)에게 찾아와 직접 말하길, “박화목의 노래는 가장 꾸밈없는 깨끗한 마음의 울림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고 칭송했다. 필자는 30년 전의 졸저 《한국현대시-이해와 감상》(1987, 한림출판사 발행)에서, 〈보리밭〉을 다음처럼 분석 평가했다.
“〈보리밭〉은 윤용하의 곡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거니와 그 외에도 〈망향〉, 〈과수원 길〉 등의 작품과 더불어 (박화목의)대표적인 서정시다. 그는 초기에 목가적 전원시를 썼고 서정적 시세계를 거쳐 인생과 사상事象에 대한 관조적인 시, 나아가 주지적인 시로서 폭을 넓혀왔다. 〈보리밭〉은 서정의 정화精華라 하여도 과언 아닌 명시이다. 시어의 함축과 절제, 이미지의 절도 있는 전이轉移 속에 조형적인 심상心象의 균제미를 느끼게 한다.”
필자가 방송 PD이기도 했던 박화목을 처음 만난 것은 1960년대 초였다. 그 당시 필자는 서울종로 2가 화신빌딩 5층에 있었던 전국 출판사의 총 단체였던 사단법인 ‘대한출판문화협회’ 사무실에서 편집원으로서 시인이며 아동문학가였던 석용원(1930∼1994)과 함께 역시 시인 이 중, 성춘복 등과 함께 근무했다. 우리가 대한출판문화협회에 근무하던 무렵 석용원이 내게 박화목을 소개해 주었다. 아동문학가 박화목하면, “무슨 길?”하고 묻지 않아도 “과수원 길”. 하는 대답과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가 (뒤따라 나올 정도로)한국의 대표적인 동요로 애송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명시 〈과수원 길〉의 박화목은 피양(평양) 출신의 서울 문화촌 주택가 터줏대감이었다. 아니 종로2가 YMCA 기독교방송 유일의 PD요 디스크쟈키 였다.
내 책상에 놓인 전화가 따르릉......울려, 수화기 쳐들면
“홍형, 詩 한편 들고 건너와서 시낭송 해주구레” (하던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홍윤기의 〈박화목 선생 추억〉 인용)
홍윤기 약력
日本 도쿄센슈대학 대학원 문학박사/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역임/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석좌교수(2019년 현재)/《現代文學》(1959.8월호) 詩3회 추천(박두진 선생) 완료/서울신문 1959.[신춘문예] 詩 〈해바라기〉 당선/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고문. 국제PEN한국본부 고문. 월탄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한국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