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우선사 이야기 4
최; 네, 월요일 「무명을 밝히고」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번 순서는 매주 월요일에 함께 하는 <옛 스님의 수행 이야기>죠.
금오정사 승오 스님 모셨습니다. 스님 어서 오십시오.
스님; 네, 청취하시는 불자여러분 반갑습니다.
최; 지난 시간엔 구미 금강사에 주석하시면서 이웃의 성주군에 사는 유생들에게까지 화두 참선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이어주시죠.
스님; 네, 지난주에 이어서 철우선사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생들에게까지 화두를 주면서 마음 찾기를 하도록 권하였던 철우스님의 또 다른 일화가 있습니다.
철우스님이 대구 동화사 금당에서 한철 정진을 마치고 시내에 있는 보현사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는 동화사 금당에서 함께 화두를 들었던 고송스님과 한송스님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두 스님은 보현사에서 원주와 별좌 소임을 보고 있었습니다. 절 살림을 책임지고 있던 두 스님은 소임을 제대로 보기 위해 ‘장바구니’를 들고 나서다가 철우스님을 만났습니다. 철우스님은 그 자리에서 ‘장바구니’를 뺏어들고 내동댕이쳤습니다. 깜짝 놀란 고송스님과 한송스님이
“스님! 왜 이러십니까?”
하면서 철우스님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볼 뿐 말이 없었습니다. 철우스님은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수좌들이 무슨 살림입니까. 제대로 공부하려면 한시도 화두를 놓아서는 안 되는데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스님 말씀이 옳습니다.”
철우스님의 호통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었지만, 고송스님과 한송스님은 곧바로 보현사로 돌아와 걸망을 챙겨들고 선방으로 갔다고 합니다.
철우스님의 행장과 법문을 담은〈철우선사법어집〉에는 당시 일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철우스님은 고송ㆍ한송스님 보다 법납이나 세속 나이가 10년 위로 요즈음 같으면 후학이라 하여도 경책을 받아들여 단번에 걸망을 짊어지는 스님은 보기 드문 일이며, 큰스님의 경책의 말씀을 스승과 같이 받아들이는 후학들의 자세가 아쉬워지는 시대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철우스님의 키는 대략 170cm 정도였는데, 당시로서는 작지 않은 법체를 지녔던 스님이었습니다. 늘 하심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수좌들을 보살폈다고 합니다. 때문에 스님을 따르는 수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후학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스님이었습니다.
조계종의 원로위원으로 계시다가 돌아가신 서운스님의 출가도 철우스님의 법문을 들은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합니다. 출가 이전 대구에서 전매서장(?)의 공직에 있었던 서운스님은 철우스님이 법회에서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활연 대장부가 돼야지!, 죽은 장부가 되서야 되겠는가? 활연대장부는 바로 대자유인이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라는 법문을 듣고 입산했다고 합니다.
또 김해 육조사에 주석했던 대의스님도 철우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 출가했다고 합니다. 성철(性徹)스님도 철우스님과 인연이 깊었다고 합니다. 해제 철에 성철스님이 오면
“그래 우리 철수좌가 공부한다고 애썼어”
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향곡(香谷)스님이 오면
“우리 향곡이 왔나”
라며 반갑게 맞이했던 어른이 철우스님이었습니다.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청담(靑潭)스님의 속명인 ‘순호’를 기억하고
“순호 수좌가 총무원장이 되었다지, 종단을 위해 큰일을 할 거야”라는 따뜻한 격려를 보냈다고 합니다.
철우스님의 상좌인 정우스님에게도 유독 참선을 강조했던 은사의 모습이 또렷하다고 합니다.
하루는 철우스님께서 정우스님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참선을 해야지, 참선을 안 하려면 뭐 하러 집을 나서 출가를 했나? 머리를 깎았으면 공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아들 농사지으며 사는 게 옳지. 참선을 않고 경을 아무리 보아도 소용없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도 방망이를 못 면한다. 알아들었나? 머리를 깎았으면 반드시 참선을 해야 해”
철우스님은 수좌들이 오면 언제나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해제 때 수좌들이 찾아오면
“공부하느라 힘들었지”라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어디서 살다온 수좌인고. 그래 어디로 가려고 하는고?”
라며 수좌들의 정진을 당부했던 철우스님은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수좌들에게는 반드시 여비를 챙겨 주었습니다. 여의치 않으면 당신의 의복이라도 건네주어야 마음이 편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빨랫줄에 걸어놓은 양말을 수좌의 걸망에 넣어주며
“열심히 참선 정진해라” 라고 하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스님이 1950년대 초반 이후 줄곧 주석했던 금강사와의 인연은 1945년 해방 이전으로 올라갑니다. 전국의 선방을 옮겨 다니며 정진하던 스님이 금오산 마애불에서 정진할 때의 일처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에도 참선을 하고 있다가 눈을 뜨면, 또 다시 근처에 호랑이가 다가와 꼬리를 보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상좌인 정우스님이 은사인 철우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해방 후 다시 구미를 찾은 철우스님은 해운사에 며칠 머물다 마애불을 친견하러 다녀오곤 했습니다. 그때 한 신도가 스님에게 현재의 금강사 자리에 절을 창건해 스님이 머물 것을 권했습니다.
“불자님의 마음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머물 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서 한사코 사양했지만, 신도들의 뜻을 저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지은 절이 1952년에 창건한 금강사인 것입니다.
철우스님의 하루 일과는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입적하기 며칠 전까지도 몽당 빗자루를 들고 도량을 깨끗이 했을 정도로 솔선수범을 보였다고 합니다.
모든 불자들에게 수행을 권하시던 철우스님은 1979년 양력 3월 12일 오후 11시 20분 원적에 들었습니다. 향년 84세를 일기로 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서광이 일어나면서 조용히 열반에 드셨던 것입니다.
스님의 영결식은 전국 수좌회장으로 모셔졌습니다. 전국 수좌회장으로 장례를 모시는 예는 드문 일입니다. 그만큼 수좌들 사이에서 존경받던 스님의 행장을 증명하는 사례입니다. 1979년 3월16일 오전 9시 구미 금강사에서 거행된 철우스님의 전국 수좌회장에는 400여명의 스님과 700여명의 신도가 운집했습니다. 발인에서는 석암스님이 추도문을, 성공스님이 독경을 했습니다. 이날 스님의 영결식은 금강사를 출발해 오전 11시 구미역에서 고별식을 갖고, 오후1시에 직지사 다비장에서 엄수됐습니다.
열반에 들자 다비를 위해 스님의 법구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서자 마른하늘에 오색 광명이 떴고, 영결식 때와 다비식장에서 법구에 불을 붙일 때 다시 이처럼 희유한 현상이 반복됐다고 합니다.
한 때는 소년조실이었고, 한 때는 노승이었던 철우선사는 이제 어디로 갔는가? 그의 오색광명을 기려 금강사에 제자들이 세운 ‘적조(寂照)탑’을 뒤로 하고 돌아서니, 철우선사가 열반 전에 읊으신 게송이 다시 노소와 생사의 꿈을 깨우고 있습니다.
“색신을 바꾸어서 법신으로 돌아가니
한 줄기 신묘한 광명이 오래오래 빛나는구나.”
최; 네, 마지막 생을 다하시는 날까지 솔선수범하시고 또 참선 수행을 강조하신 철우 스님 이야기, 이렇게 해서 4회에 걸친 이야기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의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음 시간엔 또 다른 스님의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스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