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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4,200 미터 드날리 시티, ranger tent 앞에 있는 일기예보. 이게 우리의 목숨과도 같은 일기예보이다. 5월 26일 목요일 예보에의하면, 5월 27일 금요일에는 14K 캠프에서 부터 17K 캠프까지 대부분 Sunny, 28일 (토) 과 29일 (일) 에 정상부근의 바람이 15 mph 로 잦아든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27일 (금)에 17K (5,200 미터) Denali Village 로 올라가고, 28일 (토)에 정상에 도전한다. 이는 Denali City (14K Camp, 4,200 미터) 있는 모든 팀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5월 15일 (일) 오후에 카힐트나 빙하에 랜딩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 5월 22일 (일) 에 14K Camp 그러니까 해발 4,200 미터에 있는 드날리 시티라고 불리우는 곳에 온전히 도착했다. 22일에 도착해서, 27일 (금) 에나 드날리 빌리지라 불리우는 17K Camp 로 이동했으니, 4일이나 한 캠프에 있었던 것이다. 처음 하루는 어짜피 쉬기로 한 날이었지만, 그 이후로 계속 정상부근에 바람이 25에서 30 mph 이상 분다는 예보가 있어서, 올라갈 수가 없었다.
15일 일요일에 랜딩포인트 (7.5K ft, 2200 미터)서 자고, 16일에 Camp 1 에 도착했다. Camp 1 도 역시 렌딩포인트와 비슷한 고도이다. 비행기가 착륙, 이륙이 쉽게 1마일쯤 경사진 곳에 랜딩포인트를 만들어 처음에 첫날 1마일을 쭉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서 Camp 1 이 된다. 처음 내려오는 언덕이 이름하야 Heartbreak Hill! 그 이름이 왜 생겼는지, 등반마치고 다시 비행기타러 랜딩포인트로 오면서 절실하게 알게되었다. Camp 1 부터 드날리 시티까지 아니 정상까지, 처음으로 밀로만 듣던 극지법이라는 방법으로 등반했다.
1909년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달할 때 썼다는 polar method, 아문젠과 스캇이 남극점에 갈 때도 썼고, 에드워드 힐러리경이 에베레스트를 초등할 때도 썼다는 polar method 를 난 드날리에서 처음 써 봤다. 나는 이 방법을 노가다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Camp 1 에서 Camp 2, 11K ft 에 갈때 3일이 걸렸다. 17일에 이틀먹을 식량과 연료, 텐트 등만 나두고 짐을 Camp 1.5 (9.5K ft) 까지 올려서 눈속에 파묻어 두고 다시 Camp 1 으로 내려온다. 다음날, 18일에, 나머지 모든 짐을 배낭과 썰매에 담아 11K Camp 까지 간다. 중간에 파묻어 논 식량, 장비 등은 그 다음날 다시 내려와서 찾아가기로 하고 스킾. 19일은 반공일이다. 잠깐 Camp 1.5 로 내려가서 파묻어놓은 것들만 가지고 올라오면 된다. Camp 3, 드날리 시티까지 입성하기까지 Camp 2 로 부터 또 3일이 걸렸다. 그래서, 총 7일에 걸쳐서 고도 2200 미터에서 4200 미터까지 올라갔다. 7일동안 오르락 내리락... 몸은 좀 고달펐지만, 고소적응은 순조롭게 되고 있었다.
일기예보대로 5월 28일 토요일 맑고 맑은 하늘에 바람이 없다. 정상도전하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 박상윤대장님이 "이 날씨에도 못 올라가면, 그것는 우리의 능력부족이다" 라고 혼자말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전날 14K Camp 에서 올라오는 것이 힘들었다. 고도차 970 미터를 막영, 등반장비 및 2박 2일 식량을 지고 올라왔다. 하도 날이 밝아서 감은 안잡히지만, 밤 10시가 넘어서야 도착한 것 같다. 그리고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그 다음날 다시 고도 938 미터를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니, 젊지않은 몸뚱아리가 당해낼지 걱정이다.
근화형에게 빌린 Rab 우모바지를 배낭에다, 고이 고이 모시고 여기까지 올라와서 정상가는 아침날 입었다. 너무도 가볍고, 너무도 따뜻하다. 배낭에는 양환주에게 빌린 North Face Fill Power 1000 짜리 우모복을 잘 싸서 넣어 두었다. 혹시 정상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비박이라도 해야 한다면, 우모바지입고 우모복입고 헤르만 불처럼 추위를 이겨보리라...
28일 아침만 해도, 지난 5일동안을 드날리 시티에서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고소적응도 잘되어 있어서, 어제 좀 무리는 했지만, 정상가는 아침에 대원들 중 한명도 고소증상을 호소하거나, 컨디션이 나쁘다는 얘기가 없었다. 더욱이 5월 초에 오스트리아에서 온 젊은 클라이머가 추락해서 죽었다는 드날리 패스 트래버스 구간이 그렇게 어렵게 보이지 않아서 전원 등정이라는 기쁜소식을 뉴저지, 뉴욕에 전할 수도 있다는 큰 희망을 가졌었다. 전원등정이 말이 쉽지, 우리 대원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 오기전에 드날리 패스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들었다. 17K Camp 에서 고도로 약 300 미터 위에있는 안부이다. 약 1마일 정도를 정확히 서쪽을 보고있는 가파른 설사면을 트래바스해야 도달할 수 있다. 20년전 신승모형님과 박상윤형님이 첫번째 정상도전하는 날, 드날리 패스를 넘어서자 강풍이 불어서 다시 17K Camp 로 돌아오는 도중 다른 대원 한명이 트래버스 구간에서 추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 5월 초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산악가이드를 하는 젊은 프로 산악인이 혼자서 등반하다, 이 트래바스 구간에서 추락하여 사망했다고 하니 듣기에도 무시 무시한 구간이다. 설사면이 정확히 서쪽을 향해서 정오가 되기 전까지 해가 비취지 않는,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추운 곳이라는 드날리 패스 트래버스 구간이다. 별명이 아우토반 (Autobahn)... 추락하면 독일의 아우토반 하이웨이에서 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바닥으로 쳐박힌다고 해서 웃픈별명 아우토반이다.
우리는 최에릭, 박승찬, 한상근 한조, 조성태, 박윤권, 박상윤 또 한조로 구성하여, 안자일렌을 하고 드날리 패스를 향하여, 12시쯤 출발했다. 이미 해는 동쪽에서 남쪽으로 많이 이동하여, 드날리 패스 트래바스 거의 전 구간에 따뜻한 해볕이 비취고 있었다. 한, 두 클라이머들을 제외하고, 우리팀이 가장 늦게 출발하였다. 박상윤형님의 20년전 기억에 이 트래버스 구간은 매우 추웠던 같다. 그래서 형님은 해가 들어온 다음 출발하기로 결정하셨던 것 같다. 드날리 패스의 고도가 5600미터정도 되니, 출발한 마지막 캠프에서 고도차는 약 400미터정도 되고, 가파른 경사면을 옆으로 1마일 넘게 올라가야하는 구간이다. 사실 캣츠킬이나 와잇마운틴에서라면, 금방 올라갈 수 있는 고도차와 거리지만, 우리는 네시간이나 걸렸다. 물론 고소적응차 천천히 운행한 점도 있지만, 역시 산소부족으로 그렇게 빨리 옮직이지 못했다.
드날리 패스에 올라서서 앞으로 올라갈 길을 쳐다보고는 망연자실했다. 드날리 패스 트래버스 구간이 춥고, 위험하고, 힘들다고 해서, 이곳만 올라서면 저절로 정상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훨씬 더 가파른 경사에 거의 얼음같은 설사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박상윤 형님이 언젠가 지나가는 말씀으로 드날리 패스 지나도 가파른 구간이 나온다고 하셨던게 기억이 났다. 나는 Google Earth 로 이 구간을 외우다 시피 쳐다 보았었는데, 아마 사진의 왜곡으로 그렇게 경사가 있게 보여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가쁜 숨을 쉬며, 황망한 마음으로 위를 쳐다보고 있는데, 어디서 본 듯한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조성태가 금방 알아보고 "종수형님"하고 소리를 질렀다. 박종수형님은 연세산악회 원정팀에서 두번째 연장자이신 선배님으로 나보다 10살 믾으신 분이다. 나는 연세산악회가 이렇게 일찍 정상 갔다가 내려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갑자기 희망이 생겼다. 이분들이 우리보다 두시간 앞서서 아침 10시에 출발하셨으니, 우리도 정상에 금방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힘이 생겼다.
그러나 서로 대화가 가능한 거리로 좁혀진 후 정호진 연산 원정 대장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를 아니 최소한 나를 패닉에 빠지게 했다. 정상이 보이는 곳까지 갔다왔다. 무리를 하면 정상에 갈 수는 있겠지만, 내려올 때 무슨일이 날 것 같아서 뒤돌아 섰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젊은 대원 네명은 정상을 향하여 계속 올라갔다고 하신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이 멍해졌다. 정호진 형님이 되돌아 설 줄이야. 그분은 물론 수십년전이지만 히말라야 로체봉을 한국인 최초로 등정하신 분이 아니신가? 그뿐만아니라 남가주 산악회 주영형님과 더불어 한국의 내노라하는 산악인이시고, 내가 거리낌없이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들 중에 가장 강력한 산악인이신데... 그때 정신이 들어 시간을 확인했더니, 오후 4시이다. 고도 400미터를 올리는데, 네시간 걸렸다. 앞으로 600 미터를 더 올려야 정상인데, 앞으로 점점 고도가 높아지니, 정상에 도달하는데, 8시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정상 도착이 밤 10시 이후... 무사히 정상에 간다고 해도, 내려오면서 어두워지면 그냥 조난이라는 생각이 났다.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바로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평소의 습관대로, 난 오늘은 안된다, 우리도 내려가서 재정비해서 내일 다시 올라오자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갑자기 거의 2년을 준비한 우리의 드날리 원정이 이렇게 끝날 것 같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진을 다 빼놓고, 어떻게 내일 다시 올라온단 말인가? 그럼 모레는? 내일 모레도 날씨가 좋다는 보장이 있나? 살아 돌아가면 성공적인 원정이라고 하지만, 정상을 가지 못하고, 5600 에서 뒤돌아 선다면, 또 다시와야 할 것 아닌가? 다시 와야 한다면, 진짜 성공적인 원정인가?
원정내내 나는 일찍 텐트안에서 잠이 들었다. 밤에 드날리가 얼마나 밝은지 잘 몰랐다. 조성태와 한상근, 박윤권 형님들은 저녁을 먹고 나서도 뜨거운 물을 만들어 대원들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늦게까지 텐트밖에 계셨지만, 나는 내 보온병에 물을 받으면, 그대로 텐트안으로 들어 가버렸기 때문이다. 난 후배로서 밥하고 물만들며 형님들 써포트하는 것보다, 내 컨디션 관리가 더 중요했다. 왜냐면, 단연코 이번 원정에서 누군가는 정상에 가야 하고,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연히 정상에 갔다가 내려올 때 10시가 넘어 버리면, 엄청 깜깜해질 거라 생각했었다. 추위에 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지난 겨울내내 산이 아닌 곳에서는 다운자켓이나 패딩 자켓을 한번도 입어본 적이 없다. 맨하탄에 기온이 화씨로 18도 까지 떨어질 때도, 옛날 군대에서 입던 야전상의 같은 것 하나 입고 출퇴근을 했었다. 침낭안에서 떨지언정 4,200 미터 camp 로 올라올 때까지도 양환주에게 빌린 우모복을 한번도 안 입었었다. 그리고 100%로는 아니지만, 지난 겨울에 찬물로 샤워를 했고, 차디찬 새벽에 달리기도 많이 했다. 고소에 단련하기 위해 그랜드 티턴, 휘트니에서는 다이아막스도 한알 안먹으면서 버텼었다. 위험하다는 드날리 패스 트래버스도 잘 올라왔는데, 여기서 그만두어야 하나?
박상윤대장님은 내려가자고 하는 나의 외침에 대답대신 어떻게 할 거냐고 한명 한명에게 물어보았다. 처음 박윤권형님은 하산, 한상근 형님은 천천히 올라가보는데까지 올라가자, 조성태는 지금 내려가면 다시 못 올라온다, 백야라 밤에도 길을 찾을 수 있으니,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올라가야한다, 에릭형님은 지금 컨디션으로는 너무 늦어진다 하산하자... 의견이 분분하다. 결국 박상윤대장님은 조성태, 박승찬 둘이 올라갈 만큼 올라가다, 정 안되겠으면 내려와라. 날씨도 좋고, 밤 중에도 밝으니 football field 정도까지 올라간 뒤 판단해서 결정해라라는 오다를 내리셨다. football field 는 약 해발 5900 정도 되는 곳에 있는 정상 밑에 운동장같은 평평한 곳이다. 이곳에서 히말라야 14좌를 등정하신 고 김홍빈님이 폭풍우를 맞아 동상에 걸려 열손가락을 모두 잘라야 했다는 곳이다. 나와 조성태는 다른 대원들과 헤어져 정상을 향해 다시 올랐다. 고산 등반에서 사고보고서를 보면, 대개 이렇게 헤어져서 한팀은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내려와 헤어져서 위로 올라간 사람들을 밤새워 기다리다, 결국 구조대를 편성해서 찾으러 올라가는 스토리가 많다.
늦었다고 생각이 들어 황급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시간 쯤 올라갔을까? 이제 그냥 내려가는 것은 이미 옵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깜깜해지면, 우모복, 우모바지 입고 어디 구석진 곳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밝아지면 내려오리라는 각오를 하였다. 날씨가 그리 춥지않아 김홍빈님처럼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난 1월 와잇마운틴 등반때 한상근형님과 이비룡형님과 함께 올라가던 아담스봉때 보다도 안 추웠다. 스마트울로 만든 얇은 장갑위에 장갑종형님이 빌려주신 expedition 용 Rab 미튼만 끼고 있으면 손가락은 문제 없을 듯싶었다. 조성태는 뒤에서 계속 속도를 줄이라고 한다. 그러다 고소먹으면 안된다고. 결국 나는 football field 지나서 고소증세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만약 형님들과 헤어진 후 좀 더 천천히 올라갔으면, 고소증세가 덜 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