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the apostle Paul) 시기의 로마황제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23:11)
정통 바리새인 유대교도(Pharisaic Jewish) 바울은 기독교도를 박해하러 가다가 다메섹(Damascus)에서 그리스도의 출현을 경험하고 회심(The Conversion AD49년 추정)하여 전 생애를 기독교전도에 힘쓰고 각지에 교회를 세웠다. 그의 출생부터 로마에서의 순교까지 당시의 5명의 로마황제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서 바울 생애의 시대적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해 본다.
로마제국의 역사는 1. 왕정(Monarchy 753-509BC) 2. 공화정(Republic 509-27BC ) 3. 로마제정(Roman Empire)-전반기는 원수정(Principatus 27BC-284AD)과 후반기는 전제정(Dominatus 284-476AD)로 나뉜다.
1. 옥타비아누스(Octavian)
아우구스투스(Augustus 31BC-14AD)로 더 잘 알려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크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자살케한 악티움(Actium)해전에서 안토니우스군사를 물리친 후 무적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독재권력을 버리고 스스로를 「제1시민」이라는 뜻의 라틴어 「프린켑스」(princeps 원수)로 지칭한데서 원수정(Principatus)의 시대를 열었으며 원로원의 많은 기능을 부활시켰으며 황제가 직접 제국의 주(Imperial provinces)를 감독하고 이집트, 골(Gaul), 시리아, 스페인에서처럼 주에 대규모 군사파견대를 주둔케 했고 나머지 주는 원로원이 통제하였으니 실제적인 면에서 황제는 최고권력을 가진 군주이었다. 옥타비아누스시대는 황금시대이었고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고 이집트, 일리리쿰(Illyricum), 갈라티아(Galatia 소아시아 중부의 옛왕국)의 합병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2. 티베리우스(Tiberius 14-37AD)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그의 집권초기에 카파토시아(Cappadocia 소아시아 동부의 고대국가), 실리시아(Cilicia)를 포함한 동쪽 주에서의 불안소요 및 파르티아(Parthia)를 포함한 아르메니아에서의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였다. 대부분의 문제는 그의 탄탄한 외교로 해결하였지만 AD 20년 아프리카에서의 분규는 군사력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그의 죽음 당시에는 약 30억 sesterce(약1억5천만불 상당)의 국가재산을 남겼다.
3. 가이우스(Gaius 37-41AD)
칼리굴라(Caligula)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게르마니쿠스(Germanicus 티베리우스의 조카)의 아들이다. 병약하고 불안한 지배자로 티베리우스가 남긴 국가재정을 낭비하며 세금을 증세했고 황제로서의 신성함을 강조했다.
4. 클라우디우스(Claudius 41-54AD)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으로 티베리우스의 또 다른 조카로 가이우스의 삼촌이다.그는 가이우스의 잘못을 뜯어고치고자 시도하며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부활시켰다. 원로원의 무능한 귀족들을 능력있는 낮은 계층으로 대체했다. 그는 4번째 부인인 네로(Nero)의 어머니에게 독살당했다.
5. 네로(Nero 54-68AD)
17세에 황제에 오른 클라우디스의 아들. 그는 정치보다 쾌락에 더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의 군사전략가의 힘으로 브리튼지역(Britain)의 반란진압에 성공했고 아르메니아지역을 회복했다. 그의 2번째 부인은 유대교개종자 이었다. 또한 그는 군중을 멀리했고 AD64년 열흘간이나 계속된 로마 대화재의 진원지의 중심에 유독 기독교인의 거주지가 많은 점을 내세워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몰아 기독교인을 박해하였다. 그 결과 사도 바울과 베드로(Peter)도 이때 순교하였다. 네로는 AD68년에 자살에 이르렀다/
(『PAUL the apostle』 2017 Robert E. Picirilli 19-2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