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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형복 교수의 ‘한국문학의 필화사건’
이산하는 1960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나 영일상옥초등학교, 상옥중학교 중퇴 후 부산경남중학교(편입․졸업), 부산 혜광고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본명은 이상백이다. 필명 ‘이산하’는 ‘이 땅’ 혹은 ‘이강토’라는 뜻으로 지어 사용했다고 한다. 1982년 ‘이륭’이라는 필명으로 <시운동>에 연작시 <존재의 놀이> 등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다. 1987년 제주4․3사건을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으로 구속되어 필화를 겪는다. 출소 후 10년 간 절필했다가 1998년 <문학동네>에 ‘날지 않고 울지 않는 새처럼’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복귀했다.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문학동네), 산사기행집 <적멸보궁가는 길>(이룸), <피었으므로, 진다>(쌤앤파커스), 편역서로 <체 게바라 시집>(노마드북스), <살아남은 자의 아픔>(노마드북스) 등 여러 권의 시집과 저서가 있다. |
4. 문학으로 법 읽기, 법으로 문학 읽기
이산하의 ‘한라산’이 어떤 이유로 공안당국에 의해 필화를 겪어야 했는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주4·3사건’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산하 시인
「4․3사건법」에 의하면,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 법은 사건의 발생 시기를 기준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이 사건의 발생원인과 그 진상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양한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의결행위취소등”에 관한 결정에서 헌법재판소(헌재 2001.9.27. 선고 2000헌마238․302(병합))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제주4·3사건(명칭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으나 법률에서 정한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다)의 발생원인에 대하여는 사건을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제주4·3사건은 '공산계열의 사주에 의한 무장폭동'으로 알려져 왔고, 일부 급진적 견해를 가진 측에서도 '궁극적인 목표는 반미 구국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에 두고, 단기적 목표는 남한의 단독정부와 단독선거를 저지하려는 투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는 1947. 3. 1. 봉기시 민간인 피해가 직접적인 원인이라던가, 미군정수립을 반대하는 것이 그 직접적인 동기라던가, 육지출신 공무원들에 대한 반감과 제주도에서 복무하는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그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고, 이러한 인자들이 종합된 민중항쟁이라고 보거나, 좌익계열의 모험적 도발과 미군정과 한국민주당의 과잉진압이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는 등 다각적인 각도에서 제주4·3사건에 접근하여 그 원인을 분석하는 경향이 새롭게 나타났다. 결국 해방전후의 역사에 대한 인식차이와 당시 제주도의 여러 특수상황에 대한 고려정도에 따라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 및 성격을 달리 보고 있는 것이다.”
제주4·3사건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배경은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결부되어 있어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4․3사건법」에 의해 설치된 ‘제주4·3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했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광복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고,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터져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경찰에 의한 3․1절 발포사건으로 시위군중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그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다. 이 사건은 제주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고,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조직적 반경(反警)활동과 관공서와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퍼센트 이상이 참여한 총파업(3․10총파업)이 일어났다.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어 일선 지서에서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났고, 무장대와 군경-우익단체들 간 무력충돌이 전개됐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를 출동시켜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1948년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계엄군은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대대적인 강경진압작전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주민들도 무차별 학살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돼 죽임을 당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난 때로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제주4·3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까? 1994년 2월부터 1999년 12월 31일까지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피해신고를 받아 조사한 희생자의 수는 14,841명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 희생자의 규모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여러 추정들이 있다.
<4․3사건법>이 제정되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헌재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4·3’의 문제는 모두 해결됐을까? “지금 ‘4․3의 현주소’는 어디쯤이라고 생각하십니까?”란 이산하의 질문에 소설 <순이삼촌>을 쓴 소설가 현기영은 이렇게 대답했다.
“과연 4․3이 어느 중턱을 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완전한 해결에 이르기 위해서는 한라산 정상을 넘어야 한다고 보면, 어리목쯤이나 사재비 동산쯤 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정도 왔겠지 하면 어느새 수구세력이 끌어내려 나락으로 떨어진다. 진척된 것은 사실이지만 갈 길이 멀고 험하다. ‘4․3특별법’을 보면 불이익처분 금지조항이 있다. 4․3에 대해 얘기해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이다. ‘4․3특별법’ 제정 당시 초안 작성 과정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이 조항만큼은 넣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두려움 없이 자기 기억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현기영 선생은, “두려움 없이 자기 기억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제주도민들에게 4․3은 단순한 ‘사건’이나 흘러가고 잊혀진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 중인 ‘지옥’이다. 이산하가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쓴 것도 ‘4․3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이를 기억하고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기억투쟁이자 기록투쟁이다. 실제로 이산하가 ‘한라산’을 발표하기 전까지 제주4․3사건은 정부당국에 의해 은폐되어 일반대중들에게 그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산하의 ‘한라산’은 제주4․3사건을 세간의 주목을 끌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됐으며, 또한 4․3문학과 4․3운동에서 ‘큰 업적’을 남긴 작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긍정적 평가에 대해 ‘한라산’이 4․3문학이나 4․3운동에 긍정적인 작용만 한 것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이에 대해 김동윤은 이렇게 말한다.
“1980년대 중후반의 상황에서는 4․3이 아직 금기에서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전 국민적으로 정서적 공감을 얻는 일이 중요했다. 하지만 ‘한라산’이, 제주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양상이나 현실적인 분위기는 거의 감안하지 않은 채 반미와 이념의 문제를 노골적으로 내세움으로써 4․3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계적 접근을 어렵게 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냉전이데올로기가 만연한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4․3을 불온시하는 풍조를 더욱 강화시키지 않았나 한다. ‘인공의 깃발’(17쪽), ‘북한의 사회주의 발전’(24쪽), ‘공산주의 전통’(25쪽) 등 신중하지 못한 용어를 구사함으로써 공안당국이 4․3진상규명운동을 친북행위로 몰아 탄압하는 빌미를 주기도 하였다.”
김동윤은 ‘한라산’이 “4․3의 역사적 의미와 항쟁의 당위성을 부각하고 그 인식 틀을 확산시키는 가운데 문학의 영역을 넓히고 다양성을 도모한 성과”가 있다고 하면서도 이 시가 “반미와 이념적인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4․3을 불온시하는 풍조를 강화시키는 반작용도 있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로 그는 “현장취재가 결여되어 그 정서적 접근이 부족한 상태에서 작품화한 데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김동윤의 평가는 여러 면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첫째, 현장취재 결여로 인한 정서적 접근의 부족에 대한 것이다. <녹두서평1>에 ‘한라산’이 발표된 것은 1987년 봄(3월 25일)이다. 이 시기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공안정치가 극성을 피우던 시기다. 그로부터 3개월 후에 나온 6․29선언으로 해빙분위기가 조성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현저히 감소하지만 이 시가 발표된 당시에 수배 중인 이산하가 제주도 현지에 가서 ‘현장취재’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취재’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당시의 시대상황과 현장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한라산의 창작비화’에서 이산하는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라산을) 쓰기로 결단을 내린 다음부터는 4․3 주변 참고 자료준비 등 은밀하게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4․3에 대한 극우적 관변자료 외에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고 현대사 전공자들 역시 제대로 아는 이들이 드물었다. 더구나 1986년 전두환 독재정권의 살벌한 공안정국에서 수배자 신분으로 제주 현지까지 내려가 생존자들의 증언을 취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본래대로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저본으로 해서 시적으로 각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산하가 말한대로 ‘한라산’은 ‘조총련 코뮤니스트’ 김봉현·김민주가 공저한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이하, ‘4·3무장투쟁사‘)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쓴 것이다. 우연히 이 원고를 건네받고 ‘한라산’을 쓰기까지 이산하 자신이 느낀 감정에 대해서는 ‘복원판’ <한라산> 저자후기에 잘 드러나 있다.
그 당시 그는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 그리고 ‘무등산’을 중심으로 ‘민족해방 서사시 전 4부작’을 구상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4·3무장투쟁사를 건네받고 이것을 시로 각색할 것을 요청받은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폭탄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제안을 수락한다. 그 순간 이산하는 불현듯 ‘김지하의 오적’을 떠올린다. “아~ 씨발, 이런 시를 써야 진짜 시인이지!”
“그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기회가 하필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피하지는 말자. 피하지 말고 죽든 살든 한번 불 속으로 뛰어들어보기나 하자.”
“복잡하게 미래를 당겨서까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마침내 ‘한라산’을 쓰기로 수락해 버린다. 이산하는 “이것이 <한라산>을 쓰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의 자전적 성장소설 <양철북>에서 법운스님이 말한 대로 그는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펜 삼아 힘껏 양철북을 치고 만 것이다.
둘째, “반미와 이념적인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4․3을 불온시하는 풍조를 강화시키는 반작용도 있었다”라는 평가에 대한 것이다. 김동윤의 ‘한라산’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위 첫 번째 견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한라산’의 반미적 성격은 서시의 처음부터 강하게 제기된다. 1980년대 중후반에 운동권을 중심으로 뜨겁게 전개되었던 반미의식이 이 작품을 통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라며 ‘한라산’이 가지는 반미적․운동적 성격에 대해 상당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 당시 공판조서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한라산’은 “4․3봉기를 짓밟은 미국과 그 추종세력”을 남한을 통치하는 주도세력으로 인식하고, 현실에서의 반미 혹은 5공 정권 퇴진투쟁이 바로 ‘한라산’의 지향점이다. 결국 이산하는 현장취재를 하지 못해 그 정서적 접근이 부족한 상태에서 ‘한라산’을 운동의 수단으로 작품화함으로써 반미와 이념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4․3을 금기시․불온시하는 풍조를 강화시키는 반작용을 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동윤의 이와 같은 평가는 오히려 문학작품이 가지는 그 고유한 성질인 창작성과 예술성을 ‘이념’과 ‘운동의 수단’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더욱이 문학가가 작품을 쓰면서 현실에 미치는 정치사회적 영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즉, 문학도 현실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김동윤의 견해보다는 ‘한라산’을 포함한 제주4·3사건을 다루는 시문학작품에 대한 문혜원의 비판이 더 적절하고, 균형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문혜원은, 제주4․3사건을 소재로 한 시문학작품이 넘어서야 할 것으로, ① 내용상의 동어반복과 그에 따른 시의 획일화, ② 4․3을 바라보는 시각의 평면성, ③ 시의 양만이 아니라 질적 수준의 확보를 제시한다. 그의 지적대로 <순이삼촌>을 비롯하여 제주4·3사건을 다룬 소설문학은 그 소재가 다양할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에 반해 4·3시문학에 있어서는 이산하의 ‘한라산’ 이후 그에 필적할만한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 앞으로 ‘4·3문학’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현기영은 이렇게 답한다.
“민중의 기억은 대학살에 대한 기억이다. 정권이 이 기억을 말살시키려 한다. 민중의 기억을 되살려서 정권의 불합리한 공식 기억을 물리쳐야 한다.”
그는 ‘관제 기억’에 대항한 ‘기억투쟁’을 촉구하면서 4.3을 제주만이 아닌 세계의 문제로 지평을 확장시킬 것을 주문한다.
“’순이삼촌’을 처음 발간했을 때 일부에선 4.3을 ‘제주의 풍토병’이라거나 ‘빨갱이’들이여서 당연한 것이란 반응을 나타내 분노했었다. 4.3은 육지 병사와 경찰, 토벌대가 섬땅을 짓밟은 것이다. 또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면 세계의 문제다. 세계 전략에 의해 4.3이 일어난 것이다. 앞으로의 4.3문학에는 거시적인 조망이 필요하다.”
현기영의 지적은 4·3소설문학만이 아니라 시문학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특히 “‘4·3문학’이 언제나 새롭고 영원”하기 위해서는 “4.3을 체험한 듯 감정이입을 해야만 성공한 작품이 나올 것”이라는 그의 말은 ‘4·3문학’을 하는 작가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한라산’의 마지막 원고를 녹두출판사의 김영호 사장에서 넘기며 이산하는 이렇게 말한다. “형, 이거 내 모가지 걸고 쓴 거요.” 그 말에, 김영호는, “아니 상백 씨, 시도 목숨 걸고 써요?”라고 되묻지만 이산하는 더 이상 답변하지 않는다.
이산하의 말은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언이라도 한 듯 했다. 공안당국은 국가보안법으로 그의 ‘모가지’를 옭죈다. 1987년 11월 그는 광화문의 어느 카페에서 서울시경체포조에게 검거된다. 그리고는 검은 승용차 속으로 끌려가 곧 얼굴에서 목까지 검은 주머니로 뒤덮인 채 근처 옥인동 대공분실에서 24시간 동안 관절꺾기와 물고문을 받는다. 물고문은 그의 온몸을 해체시켜 버린다. 그때의 악몽에 대해 이산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몸에 관절이 그렇게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하루에 평생 먹을 물을 다 먹으면 세포가 분열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인권변호사들 마저 변론을 맡지 않은 상황에서 이산하는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한다. 백낙청, 고은, 신경림 등 당시 진보적 문인들마저 법정증언을 거부한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당시의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한다.
“다른 사건도 아니고 ‘필화사건’이라 진보적인 문인들이 법정에 나와 작품을 놓고 검찰과 논쟁한다면, 그 자체가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장이자 4·3의 진실을 더욱 확산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비록 ‘선배문인들’은 법정증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은, 신경림, 황광수가 ‘한라산’에 대한 작품평가서를 작성하여 법정에 제출하여 서면 증언을 한 것이다. “여러 선배 작가들의 엄호가 있었기에 검찰과의 공방은 한결 유리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고 이산하가 평가하는 이유다.
▲이산하 시인이 작성한 당시 항소이유서
최근 이산하는 인터넷언론 <민플러스>에 ‘세월호참사’의 현장 진도 팽목항을 찾은 심경에 대해 글을 썼다. “바다와 욕조”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말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다. 나에게도 있다. 난 생사가 오가던 ‘물’과의 깊은 악연이 두 번 있다. 10살 때 익사 직전에 살아난 출렁거리는 강과 27살 때 물고문으로 신체포기각서를 쓰던 찰랑거리는 좁은 욕조다. 수평으로 찰랑거리던 욕조의 물이 강처럼 수직으로 출렁거리는 순간, 빛은 꺾여 혼절한다. 난 그 혼절을 수없이 겪어 오랫동안 내 인생에는 아예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자기최면까지 걸었다. 물고문을 부정했다. 그것만이 물한테 박살난 내 몸과 정신을 내 스스로 구조할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였다.”
이번 글을 쓰면서 이산화와 직접 전화통화와 이메일 또는 페이스북 메신저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의 책 『피었으므로, 진다』가 출간됐을 때 대구에서 <채형복 교수와 함께 하는 이산하 시인 북 콘서트>를 열어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그와 대화하고, 또 그가 쓴 글을 읽으면서 느꼈다. 그는 아직도 ‘4․3트라우마’에서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실형을 살았고 몸은 감옥 밖이지만 그는 여전히 ‘과거의 감옥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신체포기각서를 쓰면서 자신이 당한 물고문을 자기최면까지 걸면서 부정하고 싶은 그에게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한라산 필화사건’을 담당한 ‘황교안 검사’가 법무장관이 되고, 국무총리가 되는 이 현실에 대해, 그는 ‘빨갱이’ 이데올로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이 사회에 대한 울분을 갖고 있다. 또한 위선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이 시대의 점진적인 양심들’에게 분노와 경멸의 침을 내뱉고 싶어 한다. 그리고 “시인은 시를 쓸 때마다 언제나 최후의 한 사람이므로 항상 백척간두에서 한발 대딛는 마음으로 쓰”고 싶어 한다. 무엇보다 그는 “네가 네 스스로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란 말에서 위로받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소하고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도 중심이 없는 삶 속에서는 한낱 위안거리에 불과하듯 어쩌면 내가 그럴지도 모른다”라고 자책한다.
그런 이산하에게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말’은 무엇일까?
“우리는 적들의 말보다 친구들의 침묵을 더 오래 기억한다.”
루터 킹 목사의 말이다. 이제 이산하는 친구들의 침묵보다 그들의 말을 듣고, 더 오래 기억하고 싶어 한다, 고 나는 느꼈다.
이산하의 항소이유서 본문 “척박한 이 땅의 역사는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 사이에서 언제나 끊임없이 피를 흘려왔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얼마나 더 이 땅을 붉은 피로 물들여야 새로운 세상이 올 수 있을지 아직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따뜻하고도 새로운 그러한 세상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 우리는 강철같이 믿고 있습니다. 본인의 ‘한라산’도, 다만, 그러한 믿음과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그러한 역사의 부름에 정직하게 대답하기 위하여 쓰여 졌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그 역사가 다시 나를 부른다면, 그래서 내가 대답해야 한다면 본인은 기꺼이 다시 큰 소리로 대답할 것입니다. 한번 잠든 자, 다시 깨어나지 않을 피투성이 이 땅이 산하에 꽃잎처럼 뿌려진 이 땅은 이름없는 천사들의 피를 결코 헛되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필코, 그 피의 댓가를 받아내야 합니다. 새벽은, 신새벽은 어둠 속에 앉아 기다리는 자에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새벽은, 그 어둠에 맞서 밤새도록 싸운 자에게만 신새벽은, 백만의 원군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똑같은 이슬을 먹고도 벌은 꿀을 만들지만 뱀은 독을 만듭니다. 그 독을 먹고 자라는 파쇼 하의 법정이란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판결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 장백산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기운조선 꽃다발 우에 점점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만주벌 눈바람아 이야기하라 밀림의 긴긴밤아 이야기하라 만고의 빨치산이 누구인가를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 |
* '이산하, 4.3항쟁의 시 <한라산> 필화'를 끝으로 채형복 교수의 ‘한국문학의 필화사건 연재를 마칩니다. '한국문학의 필화사건'은 '법정에 선 문학'(도서출판 한티재)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여졌습니다. '법정에 선 문학'은 한국문학의 필화를 엮어낸 '문학역사서'로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오랜 기간 옥고를 보내주신 채형복교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애독자 여러분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채형복 교수는 프랑스 엑스 마르세유 3대학에서 ‘유럽공동체법’을 전공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현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으며 시인이기도 하다. <늙은 아내의 마지막 기도>, <저승꽃>, <우리는 늘 혼자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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