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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아이거 북벽이 초등된 지 70년이 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각종 행사들이 이어지고 있다. 초등 당시 자신의 장비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어느 업체에서는 각국의 산악인들을 초청해 함께 아이거 북벽을 오르기도 했으며, 한국에서도 관련 산악영화를 상영했다고 하니 30년 뒤인 초등 100주년에는 더한 행사가 치러지리라.
아이거 북벽이 어떤 벽이기에 이처럼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끄는가. 베르너 오버란트의 그린델발트(Grindelwald) 계곡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아이거는 실상 해발고도가 4,000m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1,800m 높이의 검붉은 북벽은 알프스의 다른 어느 봉우리들도 갖추지 못한 위엄과 위험을 갖추고 있어 알피니스트들의 시험무대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알피니즘의 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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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슬땀을 흘리며 크라이네 샤이데그로 오르는 산악자전거 마니아 뒤로 베터호른이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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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계적으로 단일 암벽에서 희생된 산악인의 수가 아이거 북벽보다 많은 벽도 없을 뿐더러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행 산악열차로 인해 세인들이 쉽게 이 북벽을 지켜볼 수 있는 등, 특히 초등 당시인 1930년대에는 북벽에서 행해지는 알피니스트들의 활동상이 연일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고 하니 아이거의 영광은 지난날의 일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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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피글렌으로 이어지는 길은 완만한 동선을 그리며 풀밭 사이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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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아이거 북벽 아래를 가로지르는 아이거 트레일(Eiger Trail)을 걸을 기회가 있었다. 2박3일간 느긋이 아이거를 지켜보며 북벽 초등기인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1912-2006)의 <하얀거미>와 북벽 직등기인 예르그 레네와 페터 하아그 공저의 <아이거>를 읽어보기로 했다. 하인리히 하러는 <티벳에서의 7년>으로 영화화까지 된 인물로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레네와 하아그는 생소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1966년 겨울에 존 할린과 함께 아이거 북벽에 직등루트를 개척한 독일팀의 주역들이다.
두 책 다 정확히 30년 전인 1978년 여름에 공동문화사에서 발간한 문고판이다. 지난번 한국에 다녀올 때 알프스가 좋아 몇 번이나 찾은 조효현 선배가 자신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며 자랑하는 것을 부탁해 이곳 아이거 북벽 아래까지 지니고 온 것이다. 아이거 트레일에 동행한 이는 이태리 볼자노에 거주하는 임덕용 선배와 한국서 온 산악회 후배 나현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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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거 북벽 초등기인 <하얀 거미>와 북벽 직등기인 <아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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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델발트에서 점심때가 지나 걷기 시작한다. 한낮의 열기가 절정에 달하지만 계곡 아래의 하천을 지날 때는 빙하 녹은 급류의 시원한 기운에 잠시 땀을 식힌다. 이것도 잠시뿐, 본격적인 오르막이다. 우선 알피글렌(Alpiglen)으로 향한다. 산비탈에 점점이 둥지를 틀고 있는 샬레들 사이의 풀밭에서는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6월 말이지만 이미 웃자란 풀들을 베어 건초를 말리고 있다. 오르막이 연이어져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며칠간 묵을 잠자리며 식량을 잔뜩 짊어진 탓이다. 눈앞에 펼쳐진 목가적인 풍경이 눈을 시원하게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유행가의 가사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픈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싶다.
세상만사 자기본위이듯 이곳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눈에도 과연 천국일까 싶다. 작업복 주머니에서 꺼낸 숫돌로 큰 낫을 갈고 있는 초로의 남자와 집 앞 작은 풀밭에서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혼자 풀을 베고 있는 어린 아이, 그리고 저 멀리 드넓은 초원을 트랙터로 이발을 시키고 있는 농부의 눈으로도 이곳이 낙원일까. 그들은 캠핑장비를 둘러메고 산을 오르는 우리를 더 부러워하지 않을까.
알피글렌의 소떼들
길은 완만한 동선을 그리며 이어져 있다.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몇몇 언덕을 넘어 브란데그(Brandegg)역을 지난다. 오후지만 크라이네 샤이데그(Kleine Scheidegg·2,061m)로 오르는 산악열차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타고 있다. 서로 손을 흔들고서 톱니바퀴 기차선로를 가로지른다. 또다시 오르막이다. 경사가 완만한 풀밭에서는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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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날밤을 묵은 알피글렌의 목가적인 풍경 뒤로 아이거 북벽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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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한 지 1시간이 되어 길가에 배낭을 놓고 쉰다. 마침 산악자전거 마니아가 구슬땀을 흘리며 우리 앞을 지나쳐 오른다. 그 뒤로 저 멀리 아이거 북벽이 솟아 있건만 구름에 가려 있다. 아쉽다. 다시 배낭을 메고 걷는다. 오늘의 목적지인 알피글렌으로 이어지는 이정표를 따른다. 한동안 기차선로 좌우를 따르더니 이제부터 숲길로 접어든다. 조용해서 좋다.
한적한 산길을 걷다가 마침 폭포가 나타난다. 무더위에 지친 우리에겐 반갑지 않을 수 없다. 큰길에 배낭을 내려놓고 달려간다. 무겁게 지고 온 맥주와 함께. 약 50m의 폭포수는 그 기운만으로도 땀을 식히기에 충분했다. 임 선배는 그것도 부족해 팬티만 입고 물속에 뛰어든다. 아이거 북벽에서 발원한 이 차디찬 빙하물에 정신이 팔린 형은 그만 맥주 한 캔을 빠뜨리고 말았다.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며 땀을 식히겠다는 바람일랑 단숨에 날려버리며 또다시 산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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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피글렌에서부터 본격적인 아이거 트레일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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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야생화밭을 지나 굴곡진 산길을 오른다. 마침 산악자전거 한 대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웃으며 지나간 그는 1시간 전에 우리를 지나쳐 오른 이였다. 알피글렌까지 가서 그린델발트로 내려가는 모양이다. 이제 고도가 제법 높아져 나무들의 키가 낮다. 저 멀리 풀밭 언덕에 알피글렌이 자리 잡고 있다. 농가 몇 채와 기차역, 그리고 레스토랑이 전부다. 축사 한 켠에 딸린 창고에서는 거대한 솥단지 아래에 장작불이 이글거린다. 열댓 살 먹은 아이가 장화를 신고 그 주변을 오간다. 저 멀리 풀밭에선 젖소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들은 마을 위 풀밭 언덕에 짐을 푼다. 알피글렌뿐 아니라 그린델발트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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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벽 아래서 그린델바트를 내려다보며 점심을 먹을 때에야 우리를 지나쳐 오르는 트레커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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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를 치고 각자 자유시간을 가진다. <아이거>를 먼저 펼쳐든다. <하얀 거미>는 이미 읽었기 때문이다. 아이거 북벽의 존 할린 루트에 얽힌 이야기는 북벽 초등이야기만큼 드라마틱해 널리 알려져 있다. 익히 아는 내용이지만 이제껏 <아이거>를 읽은 기억은 없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타나는 북벽 사진에 거의 일직선으로 그어진 직등선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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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페이지는 직등 완등 후, ‘존 할린을 추모하기 위해 아이거 북벽 디레티시마를 존 할린 클라이밍이라 명명하고 이 책을 그의 부인에게 바친다’는 문구가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그렇다. 페이지들을 넘길수록 바로 이 직등루트 개척에 대해 존 할린보다 큰 관심과 애정을 쏟았던 이는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그는 크리스 보닝턴, 돈 윌런스, 듀갈 해스턴, 레이튼 코어와 같은 걸출한 산악인으로 구성된 영미 합동대의 리더였다. 이 책의 저자들이 참여한 독일팀과 함께 나란히 북벽을 오르다 하얀 거미 아래의 바위턱에서 고정자일이 끊겨 자기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북벽에서 일직선을 그어버린 이가 존 할린이다.
물론 대규모 인원과 물자, 고정로프를 깔며 장기간에 걸쳐 이룩해낸 아이거 직등에 대해 당시에도 많은 논쟁이 일었다. 무분별한 직등행위는 분명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알피니즘의 저변을 확대하고 고무시켰음은 인정해야겠다. 바로 이 아이거 디레티시마에서 행해진 등반방식이 그대로 히말라야로 옮겨져 그 몇 년 후에 행해진 안나푸르나 남벽 초등 등 수많은 히말라야의 거벽등반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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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름 아래의 중앙침봉 오른편에서 아이거 북벽 초등루트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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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 구름이 자욱이 내려앉아 어둠이 일찍 찾아왔다. 맛있게 저녁을 지어먹고 차 한 잔씩 마시며 제발 내일은 날이 맑아 아이거 북벽을 훤히 올려다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제 잠자리를 펴고 헤드랜턴을 켜서라도 <아이거>를 마저 읽으려 한다. 한데 갑자기 소 방울소리가 요란하다. 이런, 10여 마리의 젖소가 우리가 있는 풀밭 언덕으로 기어오르고 있다. 책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심지어 몇몇 소들은 뜨거운 콧김까지 뿜어내며 텐트 주변을 서성인다. 한 놈은 텐트 플라이까지 물어뜯는다. 나중에 보니 스키스틱의 손목끈까지 그 강한 이빨로 녹여 놓다시피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가 스키스틱으로 얄미운 놈의 소 엉덩이를 후려친다. 따끔한 맛에 10여m 도망가지만 녀석들은 또 되돌아본다. 하여 계란만한 돌까지 집어 녀석의 엉덩이에 던져도 본다. 이러한 실랑이를 몇 번이나 하다 보니 지쳐버린다. 소들이 왜 텐트 주변을 맴도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본다. 노란 색 텐트 때문이다, 아니 텐트에 둔 빵 냄새 때문이다 등등 의견이 분분하다. 결론은 우리가 먹을 빵에서 나는 냄새라는 생각에 빵을 침낭 깊숙이 감추고 그것도 모자라 그 냄새를 제거한다고 쓰레기를 태우는 등 별짓을 다 한다. 그래도 두 녀석만은 밤새 텐트 주변을 서성인다. 모두에게 피곤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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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거 트레일 마지막 구간에는 북벽에서 흘러내리는 눈밭을 가로지르는 구간이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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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에 이곳 알피글렌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아이거 북벽을 오른 선배들이 소떼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게 이제 실감이 난다. 1990년에 바로 이 북벽을 오른 필자는 크라이네 샤이데그에 머물렀기에 이런 고초를 겪진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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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벽이 잘 보이는 언덕에 아이거 북벽 초등루트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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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의 소떼에 잠을 설쳐 느지막이 일어나지만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천천히 짐을 꾸려 알피글렌으로 내려가 본격적인 아이거 트레일을 걷는다. 한동안 키 작은 소나무 사이로 난 지그재그 길을 걸어 오른다. 그런 후, 고도가 높아지자 나무들은 없어지고 풀밭에 각종 야생화들이 피어있다. 발아래 그린델발트 분지에는 햇살이 닿아 있지만 아이거 북벽은 짙은 구름에 휩싸여 있다. 북벽 하단부의 출발지점만 겨우 분간할 수 있을 뿐이다. 북벽에서 흘러내린 급류도 건너고 거대한 물줄기의 폭포도 지나친다. 이것만 보아도 북벽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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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머 샤이데그에서 내려서는 이도 여럿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위에서 내려오고 있다. 아이거글레처(Eigergletscher·2,320m)역에서 출발한 것이다. 헤크마이어와 하러의 초등루트 아래쪽 풀밭에서 점심을 먹을 때에야 밑에서 올라오는 트레커 둘이 지나간다. 잠시 후 트레커 2명이 위에서 내려오며 지나간다. 그 중 한 명이 아이스스크류 케이스를 작은 배낭에 달고 내려가다 30m쯤 거리에서 쉬고 있다. 며칠 전 뮌히 산장으로 가는 설원에서 그것을 잃어버린 생각이 언뜻 든 임 선배가 그들에게 가 물어보니 바로 그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그 산악인은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그렇게 달고 다닌 거였다며 물건을 찾아주는 그가 더 반가워했다. 알피니스트들만의 우정이다.
또 길을 걷는다. 북벽 아래의 너덜 사면을 가르는 아래 위 풀밭에는 흰 꽃들이 펼쳐져 있다. 얼마 후에는 눈밭도 나타난다. 마지막 언덕 하나를 오르니 큰 안내판에 아이거 북벽 초등루트가 그려져 있다. 정확히 70년 전에 <하얀 거미>에 등장하는 4명의 주인공이 1,800m의 이 큰 북벽을 좌우로 오가며 길을 찾아 오른 자체만도 대단하게 여겨졌다. 초등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예는 당연했다. 물론 <아이거> 직등의 주인공 존 할린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영예가 남았지만 말이다.
이제 아이거 트레일 마지막 구간이다. 우리는 아이거글레처로 오르지 않고 사면을 가로지른다. 마침 작은 오솔길이 있어 그 길을 따라 가니 크라이네 샤이데그로 이어지는 길과 만난다. 이제부터 너른 길이다. 길 양옆으로 노란 민들레가 밭을 이루고 있다. 곧이어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크라이네 샤이데그다. 융프라우요호에 다녀오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린델발트로 내려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있다. 우리는 기차역 서편 언덕에 오른다. 작은 언덕의 편편한 풀밭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친다. 1990년에 필자가 몇 주 동안 머물며 아이거 북벽을 오른 바로 그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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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셋째 날 드디어 아이거 북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단에 하얀 거미가 어렴풋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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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덕에는 소가 한 마리도 없어 전날 밤에 비해 조용하고 편한 밤을 맞이한다. 북벽에는 여전히 구름이 자욱이 머물러 있다. 아이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뮌히와 융프라우에도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어 이번 산행에는 날씨 운이 없나 보다 라며 텐트 문을 닫는다. 못 다 읽은 <아이거>를 펼쳐든다.
존 할린의 추락사 후 더욱 힘을 합친 독일인과 영미 등반가들은 혹독한 겨울추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성공을 이뤄낸다. 책을 덮고 그 여운을 즐기며 눈을 감았는데, 어느새 잠들었는지 깨어보니 새벽 1시가 넘었다. 혹시나 싶어 살며시 텐트 지퍼를 여니 놀랍게도 밤하늘에는 별들이 초롱초롱 빛난다. 그 많던 구름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하나도 없다. 거대한 검은 덩치의 아이거 북벽은 한층 더 위엄 있게 솟아 있다. 가만히 보니 북벽 중앙에 밝은 빛이 한 줄기 빛나고 있다. 아이거반트(Eigerwand·2,865m)에서 흘러나온 빛이지만 마치 존 할린이 그 높이에서 하늘을 가르며 빛을 발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만큼 그는 후세 산악인들의 가슴에 빛으로 남아 있다.
잠시 눈을 감고 얼마 후 밖을 보니 해가 뜨기 시작했다. 아이거, 뮌히, 융프라우의 삼두마차가 경쟁이라도 하듯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해가 뜨고 기온이 오르자 옅은 구름들이 다시 아이거 북벽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느긋하게 아침 시간을 보내며 <하얀 거미>를 뒤적이다 그린델발트로 긴긴 하산길에 접어든다. 오를 때와는 달리 알피글렌으로 가지 않고 전나무 숲길로 하여 곧장 내려간다. 왼편 하늘 위를 본다. 침엽수림 위로 응달진 북벽에는 하얀 거미의 거대한 형체가 드러나 있다. 아이거 북벽의 상징인 하얀 거미가 수많은 팔다리를 펼쳐 북벽 상단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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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라이네 샤이데그 언덕에서 바라본 아이거쪽 밤풍경. 오른편의 거대한 검은 형체 중앙에 아이거 북벽의 불빛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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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기인 <하얀 거미>의 절정은 바로 저 하얀 거미에서 하러 일행이 겪는 악전고투이다. 정상 설원에서 쏟아져 내리는 눈사태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끝내 이겨내는 분투장면이 눈에 선하다. 필자도 그 눈사태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최후의 역량을 투입한 자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냐’며 하러 일행 넷은 악천후에 맞선다. 이런 상황에서 하러는 ‘자기시련 자체가 등산행위의 동기가 될 순 없지만 최대의 위험에 봉착했을 때 동지의 처지를 근심하고 동료를 위해 자신을 헌신한다면 참된 도리를 다 하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그들은 악천후를 이겨내고 초등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늘진 전나무 숲길은 시원했다. 마침 주말이라 많은 산악자전거 마니아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오르고 있다.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들 뒤의 전나무숲 위로 우뚝 솟은 아이거 북벽에는 해가 솟아 기온이 오르자 다시 뭉게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과거의 숱한 알피니스트들 또한 바로 저 북벽의 마력에 끌려 몸과 마음을 바치지 않았던가.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 그게 바로 산을 오르는 이유요 즐거움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월간 산[466호] 2008.08
/ 허긍열 한국산악회 대구지부 회원·www.goal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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