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읽는 기쁨] <20> 제2편 제2장 불심인의 진리 ④
만다라회 기획, 박희택 집필
「실행론」 제2편 제2장 제3절 ‘심성진리’는 심인진리를 달리 표현한 회당대종사의 자증교설이다. 심성(心性)은 마음과 성품을 아울러 표현한 것인데, 성품은 자성과 동의어이기에(제16회 참조) 심성은 자성본심이며 자성본심은 심인과 동의어가 된다. 그래서 대종사께서는 심성(심인)에 관하여 이렇게 설하셨다.
“우리의 마음은 미묘하여 몸 가운데에 있지만, 신체를 해부하여 보아도 마음이 들어 있는 곳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심인은 형상 없이 활동하는 위없는 진리법이다. 형상이 없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우주로부터 내 마음 가운데 충만하여 있으므로, 지극히 인간을 돕고 두호(斗護)하는 진리가 있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실행론 2-2-3).”
형상 없이 활동하는 위없는 진리법으로서 심인(심성)이 우리 몸 가운데 내재해 있다. 이런 기적이 없다. 인간에게 기적이 있다면 이 점이 기적이다. 자성심인(자성본심)의 기적이다. 이를 ‘우주로부터 내 마음 가운데 충만하여 있다’고 표현하셨는데, 이것이 제14회 등에서 고찰한 법계법신이 내재한 당체로서의 자성법신을 일컫는다. 이 점은 이어지는 제4절에서도 재고찰될 것이다.
진리에 관해서는 “진리를 아는 것을 어떤 사람은 지혜라 하고, 귀신이라 하고, 하나님이라 하고, 부처라 하는데, 이는 꼭 지정된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실행론 2-2-3)”라 하셨다. 진리를 지혜성(智慧性)으로 표현하신 대종사의 말씀이다. 이는 마치 간디께서 자서전 「진리와 함께한 나의 실험 이야기」(1927~1929)에서 “하느님이 진리이기보다는 진리가 하느님이다”고 하신 바와 궤를 같이한다. 이와 같은 이해가 종교를 교조화하지(to dogmatize) 않는 진실하고 보편적인 진리와 진리의 당체에 대한 접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종사께서는 “진리란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통하여 언제나 있는 것(실행론 2-2-1-다)”이라든지, “진리는 변함없는 것(실행론 2-2-1-라)”이라든지, “진리는 변함없는 만유 실체 본성(실행론 3-2-1)”과 같이 주로 불변성(不變性)으로 표현해 오셨는데, 심성진리절에서 지혜성으로 표현의 결을 달리하신 점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심성진리의 미묘함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병들거나 귀신 들고 미친 중생들은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첨단의학의 혜택을 받고 있어도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이들이 부처님의 법에 귀명하여 심성진리의 실천으로 해탈하고 있다. 보고 듣지 못하였느냐? 이것이 부처님의 진리이며 묘법이다(실행론 2-2-3-가)”의 말씀과 같이, 문명시대의 과학으로도 해탈할 수 없는 고통을 해탈하게 하는 부처님의 심성진리에, 다시 말하면 고통 해탈의 지혜에 초점을 맞춘 말씀이라서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라 하겠다.
제4절 ‘깨달음과 향상’을 독송하기로 한다. 대종사께서 깨달음에 관하여 교설하신 말씀이다. 인상적인 점은 깨달음을 전통불교처럼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설하지 않고 ‘향상(向上)’에 초점을 맞추어 설하셨다는 점이다. 그러시면서 이 향상을 생명의 실상을 개현(開顯)하는 것으로 정의하셨다. ‘생명의 실상을 개현하는 것’ 또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자성법신을 말씀한 것임을 안다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말씀임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향상이란 생명의 실상을 개현하는 것이다. 우주를 움직이는 힘과 내 속에 살고 있는 힘이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세우는 것은 법계에서 세우지 않고, 사람이 세우지 않은 것은 법계에서 세우게 된다. 중생이 있는 곳에 부처님이 계시며, 복잡한 곳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을 알아야 그것이 대승적이며,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부처님을 존중할 줄 알게 된다(실행론 2-2-4-다).”
깨달음은 생명의 실상을 개현하는 향상이라는 교설을 펴신 것이다. 생명의 실상을 향상적으로 개현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향상적으로 개현하는 것은 다름아닌 자성법신을 인식하는 것이다고 설하고 계신다. ‘우주를 움직이는 힘’은 법계법신을 지칭하고, ‘내 속에 살고 있는 힘’은 자성법신을 지칭한다. 이 둘이 다른 것이 아니다고 설하셨다.
참으로 귀중한 말씀인 “내 자성이 법신임을 깨달아야 대도를 얻게 된다(실행론 2-1-1-다)”를 제12회에서 독송하여 보았거니와, 바로 이 점을 여기서는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이 귀중한 말씀은 위 제3절에서도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제3편 제10장 제3절 ‘참회공부’에서도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 참회하고 실천하는 것이 정도이다. 내 자성이 법신임을 깨달아야 대도를 얻게 될 것이다”로 설해지고 있다.
또한 ‘사람이 세우는 것은 법계에서 세우지 않고, 사람이 세우지 않은 것은 법계에서 세우게 된다’는 말씀은 법계법신과 자성법신의 하나됨 곧 깨달음을 뜻한다. 이 깨달음은 곧 대승의 깨달음이다. 중생이 있는 곳 곧 복잡한 곳(사바세계, 고해, 화택)에 깨달음의 당체인 부처님이 계신다고 아는 것이 대승이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대승의 부처님을 중생은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대종사께서는 법계법신과 자성법신이 하나됨을 깨달음이라 설하신 외에 두 가지를 더 말씀하셨는 바, 하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고, 다른 하나는 심즉불(心卽佛)이다. 곧 “깨달음이란 무엇을 깨닫는 것인가? 첫째는 일체유심조를 깨달음이요, 둘째는 심즉불을 깨달음이요, 셋째는 법계법신불과 자성법신이 하나임을 깨달음이니라(실행론 2-2-4-가)”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들 세 가지는 동일한 것이다. 심즉불이나 일체유심조는 법계법신과 자성법신이 하나됨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일체유심조에 관한 대종사의 말씀을 들어보기로 한다. ‘삼계는 유심소현의 모형이다’는 명제가 명료한 바, 삼계(법계법신)를 유심(자성법신)으로 인식하신 것이다. 이 인식공부에서는 방편도 진실이 된다. 심즉불 또한 심(자성법신)이 불(법계법신)임을 직절(直截)하신 가르침이다.
“마음의 주체성이 우주만물에 미치므로 일체유심조라 한다. 일체유심조란 마음이 환경을 만든다는 뜻이므로, 방편으로 남을 복되게 하면 내가 복되게 된다. 삼계는 유심소현(唯心所現)의 모형이다(실행론 2-2-4-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