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의 크루즈 낭만 여행
제17화 예술의 도시 비엔나(Vienna) 2016년 6월 28일
크렘스를 출발하여 밤새 달려온 우리 선박은 아침 일찍이
비엔나에 도착했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고 오전 시내 관광을 나왔다
관광버스를 타고 시내에 들어오니 거리 전체가 예술의 도시답게
보여지는 관경은 건물 하나 하나가 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Wien)은 영어로 비엔나(Viena)라고도 불린다
다뉴브 강변의 자리잡은 유서 깊은 예술도시로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요한 스트라우스 브람스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활동했든 도시이다
우린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박물관 광장( 마리아 테레자광장)이다
두개의 쌍둥이 건물이 광장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건축가 코트프라투 젬퍼의 복고풍 르네상스식 건물로 건축한 남쪽편 건물은
미술사 박물관 북쪽편의 건물은 자연사 박물관이라고 한다
광장한 한 가운데는 이 나라의 국모로 추앙받는 위대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동상이 온화하게 앉아 있었다
카롤 6세로부터 합스브르그 왕국을 상속받았으나 신성 로마제국의 법에 따라
여황제가 되지 못하고 남편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그녀는
황녀가 되었지만 여자도 황제가 될수 있다는 국사조칙에 따라 1740년 그녀는
오스트리아와 항거리의 왕으로 이곳을 통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 합스브르드가의 재정은 파탄이 날정도로 악화되었고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햐여 합스브르그 가를 침공하니 23세의 여제
마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헝거리로 건너가 헝거리 제후들의 협조를 얻어
프로이센을 물리치고 선정을 베푼 여왕으로 오스트리아의 국모로 추앙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계몽전제 군주로써의 지혜를 가진 여제는 통치 기간중 농민 착취 금지법, 초등학교
의무 교육실시법 징병제를 정비하여 튼튼한 국방력을 만든 군주로써의 덕목을
기리기 위하여 국모로 추앙하고 이곳에 좌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4개의 기마상이 여제를 보호 하고 있으며 4면에는 여제 주변에 있든 인물들을
조각해 농았는데 한 면에는 여제의 주치의 인 스비텐(Van Swieten)이 앞면에
서 있고 뒤에는 당시 활동하든 예술가들을 조각해 놓았는데 글록, 하이든,
어린 모차르트까지 조각되어 있었으며
기념상의 높이는 19M이며 여제의 좌상은 6M나 된다고 한다
여제는 자기가 테여 나고 자란 왕궁 흐프 브르그(Hof Brug)을 바라보고 있으며
여제의 왼손에는 두루마리 문서를 쥐고 있는데 그 문서가 바로 유명한 국사 조칙
(Pragmartische Sanktion)이다 아버지 카롤 6세가 만든 것으로 여자라도
합스브르그 가의 상속권을 가질 수 있다고 명시한 조칙인 것이다
이 동상은 1888년 시민 1만명의 축하를 받으면서 프란츠 요세프 1세와
황후 엘리자베트가 참석한 가운데 제막되었다고 한다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는 5남 11녀 16남매를 낳았으며 공식 직함이
1. 신성로마제국 황후 (남편 프란츠 1세가 마리아대신 황제가 됨)
2. 독일의 왕비 (남편 프란츠1세가 왕으로 독일 통치)
3. 이탈리아 왕비 (프란츠1세가 이탈리아도 통치)
4. 오스트리아 왕이자 여대공
5. 항거리의 왕(항거리도 오스트리아의 속국)
6. 보헤미안의 여왕
7. 토스카나 대공작 부인이라는 공식 직함을 가졌으니
합스부르그 가의 위상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것은 합스브르그 가가 통치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가
650년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 있는 나라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우린 바로 앞의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을 찾았다
파리의 루브르, 마드리드의 프라도 그리고 비엔나의 미술사 박물관을 유롭의
3대 미술관이라고 한다
합스부르그 가의 방대한 전시품을 전시하기 위하여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의
후기 르네상스식 건축으로 지은 미술관은 1891년 개관하여 합스브르그 가의
궁정 화가 루벤스를 비롯하여 뒤러 라파엘로 벨라스케스등의 거장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입구 천정홀과 계단에는 프레스코 화와 조각들로 웅장하고 매력적인
그리스 로마의 역사적인 조각들과 벽화들은 구스타프 클림트가 28세때
그린 초기 작품으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1층은 그리스 로마 에집트에서 수집한 골동품과 조각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루벤스 브뤼헬등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고 하여 우린 2층을
중심으로 미술관을 관람하였다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 작품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라는
이 그림은 합스부르그 가의 레오폴드1세의 예비 신부감으로 지목된 스페인 공주인
마르가리타 공주의 8세때 모습이다 3세 때부터 초상화를 그려 매년 합스브르그 가로
보내졌으며 이 그림을 그리고 2년 후에 벨라스케스가 세상을 떠났으며 15세 때
레오폴드 1세와 결혼한 마르가리타 공주는 23세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바로크 시대의 거장 루벤스 파올 루벤스의 작품 “모피를 두른 엘렌 푸르망”이라는
작품은 루벤스가 개인 소장품으로 그린 작품이며 모피를 걸치고 갓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것처럼 보이는 두번째 부인 엘렌의 관능적인 시선은 37살 연상의 화가 루벤스가
모든 사랑을 담아 만든 작품으로 절대 팔지 말라는 유언으로 남긴 작품으로 그의
사후 엘렌에게 상속됐고 엘렌 역시 다른 작품은 팔아도 이 그림은 계속 소유했다고 한다.
카라바조의 작품 “골리앗 머리를 든 다윗”은 이 그림을 그릴 때에는 화가가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하는 시기였기에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여 그린 그림으로
전체적으로 어둡고 두려움이 느껴지는 구상이다
이태리 화가 카라바조는 전재적인 재능으로 많은 교회의 성화들을 그렸으나
타락한 생활을 하여 결국 살인하고 사형을 선고 받고 사면권을 가진 교황을
설득하기 위하여어린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잘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어
올리는 그림 "골리앗 머리를 든 다윗" 을 완성하여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속죄를
하는 그림으로 그림 속의 다윗은 어렸을 때의 순수했던 자기 모습이고 목이 잘린
흉측한 골리앗의 머리는 지금까지 거짓으로 살았던 자신을 나타냈다고 한다
르내상스 시대를 이끈 미켈란제로, 다빈치, 라파엘로을 3대 천재 예술가로
추앙받고 있으며 라파엘로의 “초원의 성모상“은 그 시대의 성모자상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 그림으로 어린 요한이 그려져 있으며 뒤 배경의
넓은 초원은 평화와 안정을 나타내며 원근법과 인물의 삼각형 구도가
돋보이는 그림이라고 한다
1563년 르네상스의 대표화가 피테르 브뢰헬이 그린 “바벨탑”은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탑을 부지런히 건설하는 노동자들과 닥쳐올 멸망도 모르고
일상에 빠져 있는 바벨탑 주위 시민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했다고 하며
특히 브뢰휄은 교회에 간적이 없으며 교회를 위한 그림을 그린 적이 없지만
신화 민화 성경등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인간의 욕망과 좌절감등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특히 돋보이는 벽화는 크림트의 작품으로 금빛 장식과 화려한 조각이 미술관을
압도하고 모자이크 벽 장식 그리고 안토니오 카노바의 "켄타우로스를 이긴
테세우스 조각“이 계단 복도를 웅장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미술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입구에 미술관 소속 아름다운 카페가 Open
하고 있었으며 여유롭게 차 한잔을 하고 피로를 풀 수 있었으나 우리 팀은
시간이 없어 그대로 패스하여 맞은편에 있는 영웅의 광장으로 이동하였다
브르그 문(BrugTor)을 지나면 넓다란 헬덴광장(Heldenplaza)이 나온다
영웅광장 주위로 10개의 건물은 13세기부터 이곳을 통치헀든 합스브르그 가의
왕궁으로 16세기 완공한 구 궁전과 19세기 완공한 신 궁전등 합스브르그 가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하여 매번 화려한 건축물을 신축 증축하여 왕족이
거주했든 왕궁이다
신궁전은 19세기 기존 왕궁에 더하여 지은 황궁으로 왕궁 중에서 제일 크고
아름다운 왕궁이라고 한다 아취형으로 된 건축물은 마치 오목거울처럼
보이며 오목거울의 정 중앙에 이 서있다
오이겐 공(1663-1736)은 1697년 터키의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고 1716년
에는 헝거리에서 터키의 오스만 투르크 군을 몰아내니 오스트리아는 눈부신
발전을 할 수기 있었다
그는 3대(레오폴드1세,요세프1세,카롤6세)에 걸쳐 오스트리아 총사령관으로
무적의 오스트리아로 만든 영웅으로 추앙받아 “무대 뒤의 또 다른 황제”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전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광장 맞은편에는 깃발을 든 카롤 대공의 동상도 서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카롤 대원수(1771-1847)는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2세의
3째 아들로 태어나 1792년 프랑스군과 싸워 이기고 1813-15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과 싸워 이긴 장군으로 오스트리아의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국민개병의 원칙“
세우고 사관학교도 설립한 영웅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동상을 세웠다고 하며
이 두 영웅들이 마주보고 세워져 있으며 그들을 있는 이곳을 영웅광장이라고 한다
신왕궁을 오른쪽에 두고 지나 내려가니 역대 황제들이 살았고 황제 프란츠
요셉1세와 엘리자베스황후가 68년이나 거주한 황실 아파트가 보인다
아파트 안에는 서제, 회의실 황제의 흡연실등이 있고 바로 옆에 임페라얼 스페샬
룸이 있어 황제 가족들이 사용하든 은제 용품들을 볼 수가 있으며
광장에는 나폴레옹에게 정략 결혼시킨 요셉1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프란츠 요세프1세는 원래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인 삼촌 레오폴드 2세가 단명하자
1792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직위를 세습 받아 프란츠 2세로 명명하여 통치
하였으나 180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정복하면서 신상 로마제국은 완전히 해체
되고 황제 프린츠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프린츠 2세는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린츠 요셉 1세가 되어
나폴레옹과 격돌하였으나 계속 패배하자 1810년에는 그의 딸을 나폴레옹과
결혼을 시켜 일단 그와의 마찰을 피할 수 있었으며 나폴레옹과 정략 결혼시킨
딸은 아들을 낳았으며 1813년 나폴레옹이 패망하여 귀향길에 오르자 이혼을
하고 오스트리아 쉬브론 궁전에서 살다가 그녀의 아들은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또한 요세프 광장의 바른쪽에는 1552년에 만들어진 금색으로 단장된
슈바이츠토어라는아치형 아름다운 출입구가 보이며 문을 통과하면 오른쪽
계단은 외교관의 접견실이 있으며 왼쪽 계단은 매 주일 비엔나 소년합창단의
성가를 들을 수 있는 궁정 예배당이 있다고 한다
이곳은 당시 유럽에서 제일 용감한 스위스의 용병들이 야영했든 자리이며
문위의 붉은 판에는 신성 로마제국이 지배헀든 나라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우린 미하엘 광장으로 나가다가 황실 가족이 거주한 황실 아파트를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일부는 씨씨왕비의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어
우린 이 박물관을 관람했다 1층에는 황실에서 사용하든 생활 도구들을 전시해 놓고
2층은 호화로운 시씨의 생활상을 음미할수 있는 의상들과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었으나 사진 찰영은 금지되어 있었다
씨씨황녀 이야기
엘리자베스 아말리에 (Elisabeth Amalie)는 1837년 독일의 3대 귀족 가문의
하나인 바이에른가 비텔스바흐 가문의 왕손으로 슈타른베르크 호수마을에서
태여났으며 자유 분망하게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씨씨란 애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ㅇㆍ1853년8월 언니 헬레네 공주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자 프란츠 요셉1세와
약혼시키려는 여행에 동행하게 되었는데 요셉1세는 씨씨를 처음보고 바로 사랑에
빠져 3일 만에 약혼식을 하고 1년후에 결혼식을 올려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되었다
그녀의 미모는 유럽 왕실 여성 중 가장 아름다워서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한한 노력을 기우렸다고 한다
뮤지컬“엘리자베스”는 이 씨씨황녀의 이야기이며 그녀의 화려한 삶 뒤에는
많은 아픔과 아름다움이 존재하기에 지금도 오스트리아에서는 베토벤과
함께 씨씨 왕녀를 사랑한다고 한다
1854년 23세의 요셉1세외 17세의 씨씨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지만 시어머니인
조핀 대공에게 교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자녀들의 양육권을 빼앗겨 버리고 남편의
외도마져 감당하지 못하여 극도로 쇠약해자자 이를 탈피하기위하여 외모에
신경을 쓰고 휴양 여행을 자주 다니면서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헝거리도 통치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가 항거리를 홀대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처지와 같다는 입장에서 항거리어를 배우고 헝거리 전통의상을 즐겨입고
많은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틈만 있으면 헝거리 여행을 즐겼다고 한다
헝거리 여행시 그녀는 커피를 좋아해서 그 당시 오픈한 부다페스트의
아메리칸 커피 숍을 즐겨 찾았기에 그곳이 유명해지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지속되어 부다 여행자들은 꼭 한번 둘러보는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도 부다에 갔을 때 이곳을 찾아 가 커피 한잔을 먹으며 씨씨황녀의
외로운 심정도 헤아려 보았다
또한 헝거리가 오스트리아에서 독립하려고 하자 씨씨 황녀는 헝거리 체후들과
대타협을 이루어 내어 1876년에는 오스트리아-헝거리 제국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889년에는 그녀의 외아들 황세자 로돌프가 정부와 함께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 불행도 격었고 사랑하는 언니의 죽음도 전해 듣고는 항상 검은 복장의
모습으로 유럽전역을 여행하며 고통과 외로움을 달래다가 61세가 되든
1898년에 스위스의 제네바 호숫가에서 이탈리아의 무정부 주의자의 칼에
맞아 쓸쓸한 생을 마감한 가련한 황녀의 일생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르네상스식 그리스 조각상들로 장식된 미하엘 문을 나와서
미하엘 광장에서 Hofbrug를 바라보니 정말 아름다운 건축물로 느껴졌다
이것으로 함스브르그 가의 황궁을 관광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