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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탐방 - 신수현(사회81)
2월 27일. 부산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신수현(사회81) 선배를 만나기 위해 KTX열차에 올랐다.
신수현선배를 만나러 간다고 하니 부산에 살고 계신 많은 민동 동문들께서 함께 모이기로 했다는
전언을 들은지라 마음이 설레이고 흥분되었다.
동문탐방이 곧바로 민동 부산지부 모임이 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박선오 민동회장께서 사업이
바쁨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부산왕복 항공편을 예매하셨단다. 부산에서 민동회원들이 10명이상
모인다는데 꼭 같이 가야 한다는 의지를 보이신 것이다. 이래저래 동문탐방이 일을 크게 만들었지만
기분 좋은 일이다.
나는 신수현선배와 대학 1학년 시절 첫 만남을 가졌다. 1984년 제기동 한옥의 신춘근선배 자취방에
얹혀 살던 때에 신수현선배가 자주 그 곳에 들리셨다. 1983년 11월 12일의 소위 1112 애기능대첩의
주인공!
교내에서 시위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 네 시간을 잡히지 않고 시위를 주도했던, 그것도 중증 신체장애
를 가진 상태에서 시위주도를 했던, 전설의 선배였다. 그러다 자취방 선배가 민정당사 점거로 검거된
후 자취방도 사라졌고, 그 후 신수현선배의 안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민동 사무국장이 된 후 동문탐방을 통해 꼭 신수현선배를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묻고 싶었다.
그리고 전설로만 들었던 1112 애기능대첩 이야기도 직접 듣고 싶었다. 다소 개인적 욕심이 깔린 동
문탐방 기획이었으나 그 내용이 많은 동문에게 알리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28년 만에 만난 신수현선배의 인생역정과 투쟁의 삶은 역시 나를 감동시키셨다.
이제 신수현선배의 삶과 투쟁 속으로 들어가 보자. (취재 이준영 민동 사무국장)
Q. 먼저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나는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소외계층의 권익을 늘 생각하면 활동한다. 그래서 나는 가
난하다. 가난해도 비굴하게 살지 않고 일관된 원칙을 지키며 산다. 학생운동과 사회운동 과정에서 굳혀진 나의
신념이기도 하다.
대학에 들어갔지만, 대학을 포기하고(집시법 위반 구속, 퇴학, 복학 거부), 노동운동, 장애인복지운동, 시민사회
연대운동을 해왔고, 지금은 장애인의 인권과 자립을 위한 정책의제와 프로그램을 개발, 기획, 제안, 교육 등의 활
동을 하고 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할 때는 나를 장애인으로 보지 않았다.
1996년 장애인 비례대표 국회의원 보좌관 활동을 하면서 장애인이 처한 현실과 요구사항에 대해 알게 되었다.
노동계급보다도 더 처참하게 살고 있는 한국 장애인의 현실을 접하고서 나도 장애인이니 여생을 장애인들과 함
께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장애인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대학에 들어가 사회복지사, 보육교사,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오늘도 장애인 당사자로
서 ‘나는 사회복지사다’라는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Q. 선배님의 나의 학생운동 시절을 소개해주십시오. 특히 83년 애기능대첩에 대한 설명도 부탁드립니다.
A. 학생운동은 나를 바꿔놓았다. 그 당시 나를 돌이켜보면, ‘단순’ ‘무식’ ‘과격’한 학생운동가였다. 생각하는대로
자유롭게 행동하고 살았으니까. 학내에서는 이념서클과 학회활동을 하고, 밖에서는 타 대학 학생운동가들과 함
께 진하게 어울려 기독학생운동을 했다. 학생운동을 통해 고교시절의 소심함과 내성적인 성격을 극복하고 자신
의 존재가치를 발견했던 것이다. 모든 게 자신만만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대학은 죽어 있었다. 대학은 지식인이란 상품을 만들어내고, 그 지식인은 사리사욕만 챙기는
시대였다. 광주시민들이 학살당하고 노동자 농민이 처참하게 생활하더라도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공부한다는
사실을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학생운동은 사회변혁운동의 꽃봉오리에 불과하다’며 복학을 거부하고 바로 노동
운동에 투신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됐다.
나의 학생운동의 절정은 ‘애기능대첩’이라고 부르는 1983년 11월 과학도서관 시위였다. 과학도서관 6층 화장실
난간서 4시간 가까이 수백 명의 학우들이 지겹도록 시위를 한 그 날을 떠올리면 지금 내가 숨 쉬고 생활하고 있
는 것이 신기하다. 한 쪽 다리에 보조기를 착용한 다리병신이 난간도 없는 50cm 정도의 난간뜰에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학내시위를 주도했으니 밑에서 지켜보고 있던 학우들은 내가 떨어져 죽을 것이라 생각했단다.
사즉생. 나는 살아있다. 그리고 고대 학생운동도 살아났다. 서슬 푸르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시대라서 대학교마
다 ‘짭새’들이 사복을 입고 설쳐댔다. 고려대는 더 심했다. 학내시위하는 순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주도자는 잡
혔고, 시위대오는 바로 무너져버리고, 그때마다 학우들은 허탈해하며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 당시 학내시위의 모
습이었다. 학교 앞 고모집, 이모집, 학사주점, 주막 등 술집에 삼삼오오 모인 학우들은 짭새들에게 질질 끌려가던
학우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고래고래 질러대야만 위안이 되던 때가 그 당시였다.
“내가 학내시위를 주동한다면, 담배도 피워가며 1시간 이상 여유롭게 할 것이고, 그래야 학생운동이 살아난
다.”고 학우들한테 장담했다. 때가 왔다. 나와 강신(사학과 81), 고인이 된 유재관(사학과 81) 이렇게 데모 주동자
가 모였다. 학생회관과 홍보관 철탑을 찍었다. 시위하면서 필 담배 한 갑과 확성기, 화염방사기로 에프킬러를 마
련하고, 시각효과를 살리려고 유인물은 오색지로 등사했다.
홍보관 철탑으로 올라가는 문이 잠겨 있어 망설이고 있는데 전령역할을 맡았던 이재권(신문방송학과 81)이 와서
는 “학우들이 학생회관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시간 지체하지 말고 바로 디(D,데모의 약칭)치라”고 하기에 오더를
거부했다. 곧바로 잡혀가기 싫으니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과학도서관으로 정해졌다. 몆 년 전에 이재권은 이런
나의 일방적 결정을 두고 “니는 용맹한 투사가 아니라 겁 많은 자유주의자였다.”고 해서 한바탕 언쟁이 있었다.
과학도서관 6층 화장실에 가니 유재관이 먼저 와 있었다.
“수현아 여기 너무 위험하다. 너가 죽을 수도 있다.”
“죽긴 왜 죽어 화염방사기도 있는데. 죽을 각오도 없이 데모 어케 하노?”
“투신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자.”
“걱정마라!”
화장실에서 나눈 유재관과의 그 당시 긴박한 대화 내용이다.
페퍼포그 차에서 발사되는 최루탄 가스가 난무하고, 그 최루가스는 구름이 되어 내 앞에 펼쳐졌다. 화장실의 조
그만한 창문으로 짭새가 진입하려들기에 에프킬러로 계속 화염을 쏘아대고 담배도 한 갑 다 피우고 그렇게 시간
은 가고 있는데, 짭새가 고개를 내밀며
“어이~ 학생! 이제 그만하지?”
“뭐? 학생?, 민주학생이라 해!”
“그래 민주학생, 이제 그만하자”
“고대 교정에 있는 페퍼포크 차 다 철수하면 그만둔다!”
잠시 후 페퍼포그 차는 철수하고 나는 잡혔다. 성북경찰서에 가니 팔에 깁스를 한 짭새가 보이고(학우들한테 각
목에 맞아서), 이때부터 고문이 시작됐다. 각목으로 살점이 떨어지도록 허벌라게 얻어터지고 물고문에 수면고문
까지 당했지만 오더라인을 지켰다. 사선에 있다가 왔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기에 고문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가두시위로 이어졌던 ‘애기능대첩’으로 인해 고대학생운동은 물론이고 서울지역 학생연대투쟁도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이듬해 이른바 ‘유화국면’이라는 정국을 맞이하고 교도소에 갇힌 학생운동가들은 모두 석방되고 복학하
면서 학생운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 시작했다.
Q. 노동운동과 부산으로의 귀향 그리고 이어지는 노동운동에 대해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나의 노동운동은 ‘남서울노동운동연합’(의장 최규엽, 고대 74학번), ‘부산노동자연합’(의장 김진숙, 현 민주노
총 지도위원),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의장 김승호, 현 전태일노동연구소 이사장) 등 노동운동조직과 서울 구
로공단, 인천, 부산에서 전개된다.
출감 후 학내에서 反복학활동을 거쳐 ‘알기 쉬운 한국노동운동사’ 편찬에 참여하면서 구로공단에 있는 ‘서광’에
서 현장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서광 구로공장 축구팀을 만들어 제1회 구로공단 친선축구대회도 개최하고 노동법
학습모임도 조직하고 노조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활발하게 노동운동을 펼쳐나갔다.
1985년 6월 구로노동자연대정치투쟁의 여파로 현장조직이 드러나 해고된 후, 학생운동가와 노동운동을 접목시
키는 공장활동학습모임을 잠시 이끌기도 하고 남서울노동운동연합 지하신문 발간에 간여하기도 했다. 남서울노
동운동연합의 해체로 고 유인식(철학과 82)과 함께 교회를 거점으로 노동자를 조직하는 운동을 하다가 유인식의
뜻하지 않은 주검 앞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부산으로 귀향했다.
1987년 8월 1일 인천지역 기독노동자연합 금강수련대회에서 규율책임자로 활동했던 유인식은 수영도 하지 못하
면서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노동자들을 구하려다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는 강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그
때 6명인가 익사한 걸로 기억). 인간사슬을 엮어 물에 들어가는 거라 안전하다는 인식이의 말만 믿고 적극 만류
하지 못한, 유인식을 지켜주지 못한 못난 선배로서의 자책과 유가족에 대한 죄의식으로 인천지역 현장 노동자들
만 보면 인식이 생각에 도저히 인천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아직도 유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고인의 유골과 추모
비가 있는 곳(샘터교회)을 찾아갈 수가 없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던 애처로운
그 눈이 지금도 선하다.
1년 넘게 방황하다가 1989년 4월 부산노동자연합의 창립회원으로 가입, 선전부장으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부산
의 노동운동현장소식을 알리는 ‘주간노동’을 매주 발간하였다. 1992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로 파견되기 전
까지 3년 동안을 매주 발간했으니 그때만 해도 획기적인 선전활동이었다.
부산노동자연합은 전투적 민주노조운동(파업투쟁)과 현장조직을 이끌고 있었기에 김진숙 의장의 구속과 압수수
색이 잦았다. 그때마다 압수수색을 피해가며 지켜온 ‘주간노동’ 전권은 3년 동안의 부산지역 노동운동의 흐름이
생생하게 기록된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아 부산민주공원에서 영구 소장하고 있다.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에 와서도 ‘주간정세동향’ 주간지와 ‘노동운동’ 계간지 발간이라는 선전활동에 주력했
다. 나의 노동운동사에서 제일 힘들었던 시기였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고 연일 기획토론에
취재활동, 편집인쇄활동으로 인한 스트레스 누적으로 병원에 2번이나 갔을 정도였으니.
Q. 부산에서 장애인 관련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장애인운동을 한 지 15년이 된다. 장애인실업극복사업, 중증장애인가정봉사원파견사업, 장애인바다축제와
낚시대회, 장애인취업알선센터 개설, 장애인청년회 조직, 장애인생활체육 활성화, 장애인비례대표국회의원 당
선지원, 장애경제인활동 지원, 장애인문화활동 등 이래 저래 많은 일을 한 것 같다.
3년 전부터는 부산지역 장애인정책의제 개발과 제안에 힘쓰고 있다. 중증장애인들의 사회활동을 보조하고 있는
비장애인 50~60명을 대상으로 장애인복지개관에 대해 매달 교육도 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중증장애인의 인권과
자립운동의 최전선에서 구속될 각오로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싶고, 중증장애인극단도 만들어 볼 계획이다.
Q. 향후 선배님의 운동과 삶의 비전은?
A. 나는 운동하면서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한테 마음의 상처를 줬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들
어주고 이해해주고 존중해주기를 바란다. 나의 지난 삶에서 이 부분이 아주 부족했다. 언제부터인가 몸을 낮추
고 마음 낮게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가운데 참나를 찾으려고 애쓴다(大吉祥下心).
사람은 욕망과 화냄, 어리석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어리석음이 탐욕과 성냄을 낳고 양심이 작아지게 이
른다고 본다. 나는 어리석은 행위를 참으로 많이 한다. 그때마다 “니 누꼬?” “니 뭐하노?” “니 어딘데?” 이 세 가지
질문을 나 자신에게 물어보다 보니 습관이 되었다.
험악하고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사회관계와 인간관계에 접하더라도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며 즐기면서 살자는
의미에서 “니 누꼬?”.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장애인, 빈곤아동, 이주민, 비정규
직 노동자, 독거노인 등-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 지에서 “니 뭐하노?”. 여기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나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인데, 지금 이 순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지에서 “니 어딘데?”, 차(茶)와
술을 즐기고 명상도 하고 산행도 즐기면서 마음공부하고 있다.
산속에 처박힌 도인을 거부한다. 세속인으로 잘못을 저지르면 그 즉시 고치고 생각을 바로 잡아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는 그런 맑은 기운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맑은 기운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과 청교(淸
交)하기를 좋아하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며 살아왔고, 그렇게 살고자 한다.
Q. 민동회원들께 하고 싶은 말씀과 부산 민동의 활동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A. 4.11총선 이후 고대 민동 부산지부 발기인 총회를 가질 계획이다. 사업계획과 회칙도 만들고 SNS도 활성화시켜
내고, 올해 안으로 90대 학번까지 회원을 넓혀볼 생각이다.
닥치고 민동!
인터뷰를 마치면서, 저와 함께 활동했거나 하다가 고인이 되신 분들(김두황, 유인식, 유재관, 조석현)의 뜻을 잊
지 않고 그 분들의 정신을 계승, 실천, 발전시켜 나갈 것을 굳게 다짐해 본다.
첫댓글 신수현씨가 열심으로 살고 계시는군요.
수현아, 고맙다~~~
형 반갑습니다^^ 언제나 씩씩하고 호쾌하신 형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후앗팅
반갑습니다..유인식선배 누님은 지금도 가끔 만나고 있습니다..민동추모제때 오시는데 작년엔 일이 바빠서 못 오셨습니다. 저는 고인이 된 김신(정외83)과 잠시나마 인식형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너무 재미있다 !
제작자의 솜씨에 찬사를 보냅니다
유인식하고 그렇게 가까웠네
유인식 열사로 추모해온지가 사년 째 되는 데
장학금지급은 안하고 있지
자녀가 없는 것으로 알고있고
누님이 참석하시고
고인이된 동지의 일대기를 정리해주는 일을 한번 해주시면 싶네
천리만리 전해지고
백년 이백년 전해질 수 있는 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