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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부문 수상작>
우담바라
-도다가의 종
남지심
“선생님, 사람이 미워요. 사람이 미워요.”
채련은 얼굴을 감싸고 울던 현지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가 밉다고 절규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서로 연계를 맺고 한 시대의 모순을 창출해내고 있다. 여기서 나만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채련은 탁자 위에 놓인 엽차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앉아서 자신의 생각 속에 잠겼다.
“벌써 왔구나. 오래됐어?”
이영이 목에 둘렀던 머플러를 풀며 채련 앞에 앉았다.
“좀 전에. 그런데 얼굴이 많이 못쓰게 됐구나.”
채련은 친구 얼굴을 보며 말했다.
토실하게 윤기가 돌던 그녀 얼굴은 까칠해졌고 눈가엔 잔주름까지 드러나 보였다.
“얼굴 못쓰게 된 건 너도 마찬가지야. 맛있는 것 찾아 먹고 마음 편하게 가져.”
이영은 안쓰러운 얼굴로 채련을 쳐다봤다.
“그렇게 하고 있어.”
채련은 들고 있던 엽차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친구 시선을 피했다.
“널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반찬 같은 거라도 해서 주고 싶지만 들락거리는 것 싫어하니까 그러지도 못하고…… 속으로는 니 생각 많이 했어.”
“네 마음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난 어린애가 아니잖어. 걱정하지 마.”
이영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 며칠 후면 떠나.”
“며칠 후가 언제야?”
채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열흘쯤 후.”
“그렇게 빨리?”
채련은 가슴 속이 허전해 옴을 느끼며 친구를 바라보았다.
“갈 거면 빨리 가는 게 낫지 뭐.”
“현지는?”
“걔 때문에 걱정이야. 처음엔 우울 증세만 보이더니 요즈음은 분열 증세까지 보여.”
“…….”
“현지가 그렇게 된 건 나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에 너무 괴로워. 어떤 땐 걔 무릎 밑에 엎드려서 빌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어.”
이영은 감정이 격해오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지가 고통스러울 때 위로해주지 못한 건 너한테도 책임이 있지만 그렇다고 너만이 잘못한 건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지. 어떻게 생각하면 살아 있는 우리 모두가 유기적으로 책임 져야 될 일인지도 모르고.”
“…….”
채련은 힘없이 앉아 있는 친구를 보다가
“너무 기죽지 마. 넌 끼 부리고 생글거리고 다닐 때가 가장 너다워. 미국 가서도 그러고 다니고 나중에 저승 가서도 그러고 다녀.”
하며 웃었다.
“나도 생명 있을 때까지는 끼도 살아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살다 보니 끼는 죽고 생명만 살아남았어.”
이영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속이 텅 비어 보였다.
“남편은 현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셔?”
“그 사람도 뾰족한 생각이 없지 뭐. 그냥 수속을 하나봐.”
“건강한 사람도 처음엔 적응하기 어려울 텐데 현지가 되겠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영은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 위에 놓으며 친구를 바라봤다.
“…….”
채련은 자신의 생각에 잠겨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엔 자신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며 행복해 하던 현지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현지 얼굴도 떠올랐다.
“지금 같아서는 아무것에라도 의욕만 가져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해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나는 뭐라도 하겠어. 이건 내 진심이야.”
이영은 친구한테 만이라도 자신의 진심을 믿게 해주고 싶은지 강조해서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니?”
채련은 고개를 들며 이영을 쳐다봤다.
“어떻게?”
“내가 현지를 데리고 있을게. 지금 외국으로 데려간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애.”
“…….”
“지금 상황으로는 네가 걔 옆에 있다 해도 별 도움이 안 될 거야. 그러니까 너는 예정대로 떠나.”
“…….”
“그렇다고 불쌍한 아이를 정신병원에 보낼 수도 없잖어. 내가 데리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방법을 생각해볼게.”
“…….”
이영은 그냥 멍하니 채련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그녀는 사리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어디 가서 저녁 먹고 술도 한 잔 하자.”
채련은 의식적으로 명랑하게 말했다.
“그래. 내가 사줄게.”
이영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채련보다 먼저 서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내가 살게.”
“아니야. 내가 산다니까.”
그들은 같은 말로 실랑이를 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이영은 자신보다 친구가 더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채련은 또 채련대로 자신보다 친구가 더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서로 상대편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바람이 차지? 이거 감어. 추워 보여.”
이영은 하늘을 쳐다보다가 목에 감았던 머플러를 풀어서 채련 목에 둘러주었다.
“울이라서 따뜻해. 하고 있어.”
“…….”
“혼자니까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
“고마워.”
“기집애, 정 떨어지게 무슨 인사니?”
채련은 기집애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속이 뭉클해졌다.
그래, 우린 서로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이였었지. 아주 옛날 어린 시절부터. 그때 우린 미래란 당연히 행복하기만 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마주 서 있으리라는 건 모르고…….
“가자. 춥다.”
이영이 친구 팔을 끌며 채근했다.
“그래. 춥지?”
그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차가운 인파 속으로 걸어갔다.
채련은 식탁 위에 아침상을 차려놓고 현지가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현지가 있는 방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채련은 현지를 부를까 하다가 현관에 떨어진 신문을 주워들고 와서 의자에 앉았다. 무심한 얼굴로 신문을 뒤적이던 채련은 문화면을 펼쳐든 순간 몹시 긴장하며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피리를 불고 있는 담시의 사진과 함께 원효대사〉에 관한 기사가 3분의 2 정도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막이 내린 후에도 관객은 극에서 받은 감동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때 무대 뒤에서 피리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관객을 쓸쓸한 허무 속으로 끌고 갔고 사람들은 저마다 늦가을 들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허허로움에 잠겨들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이어지던 피리소리는 마침내 용틀임하듯 몸을 뒤척이더니 지옥의 맨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처절한 절규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지옥의 절규로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다시 몸부림치고 신음하면서 혼돈과 애증과 탐애의 늪을 지나 서서히 천상의 열락 속으로 잠기어갔다. 마치 육도의 다리를 다 건너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관객들은 지금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희한한 감동에 젖어들며 자기 자신들을 돌아다보았다. 죽어 있고, 잠들어 있고, 스스로 포기하기까지 했던 자신의 인성(人性)이 다시 깨어나 무대 저편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와 끝없는 화답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에 의해 완전히 이해받고 있는 것 같은 희열 속으로 젖어 들어갔다. 한 뼘 대나무 속에 지옥의 절규와 천상의 열락을 함께 담을 수 있는 사나이, 그는 대체 누구일까?
채련은 읽고 있던 신문을 접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디에선가 담시의 피리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현지가 밖으로 나왔다. 채련은 고개를 들고 현지를 바라보았다. 몇 발짝 걸어 나오던 현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상을 찡그리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실제로 머리가 아픈지, 아니면 괴로운 환상을 보았는지 채련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채련은 들고 있던 신문을 의자 위에 놓고 얼른 현지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그녀 손을 잡아서 일으키며
“잘 잤어?”
하고 짐짓 밝게 웃었다.
“…….”
“아침 먹어야지.”
“…….”
“버섯찌개 맛있는데 우리 이거하고 밥 먹자.”
채련은 찌개 냄비 뚜껑을 열며 명랑하게 말했다.
“…….”
그러나 현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현지가 좋아하는 게 버섯찌개라며? 버섯 사려고 어젯밤에 시장까지 갔다 왔어. 슈퍼에 가니까 벌써 문을 닫았잖어.”
채련은 관객을 웃겨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희극 배우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를 보기 위해 열심히 지껄였다.
“아침 먹고 시내에 나가 꽃 좀 사올까? 식탁에 프리지어를 꽂아놓으면 향기가 참 좋겠지?”
“…….”
“지금 현지 얼굴이 어떤지 알어? 거울 한 번 들여다봐.”
채련은 식탁 곁에 걸려 있는 작은 거울을 내려서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현지 앞에 내밀었다.
아무 표정 없이 거울 속을 들여다보던 현지는 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거울을 밀쳐냈다. 그 순간 찌개 냄비가 엎질러지고 거울은 바닥에 떨어져서 쨍그렁 하고 깨졌다.
“내 얼굴이 벌레 같아요. 아유 징그러워.”
“…….”
채련은 깜짝 놀라서 현지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얼굴도 벌레 같아요. 밥도 벌레 같고 보이는 게 전부 벌레 같아요.”
현지는 머리를 움켜쥐며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녀 이마 위엔 땀이 배어나왔고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채련은 잠시 현지를 바라보다가 옆으로 가서 현지 어깨를 감싸 안고,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내 얼굴을 다시 한 번 봐. 지금도 벌레처럼 보여?”
채련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오.”
현지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현지 얼굴은 예뻐. 창백하긴 하지만 창백한 대로 아주 예뻐. 절대로 벌레 같지 않어.”
“…….”
“벌레가 우리 욕하겠다. 기분 나쁘게 비교했다구.”
채련이 웃자 현지는 어깨로 숨을 몰아쉬었다. 안도의 숨 같았다.
“나가려면 화장을 해야지. 얼른 세수하고 와. 우리 연지도 칠하고 루즈도 바르자.”
“…….”
“나는 인도 여자처럼 이마에 빨간 인디를 붙여보고 싶었어. 현지는 그런 생각해 본적 없어?”
채련은 흡사 모노드라마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혼자 열심히 지껄였다.
“찌개 냄비를 엎질러서 아침도 못 먹었잖어.”
채련이 화난 표정을 짓자 현지는 눈을 치켜뜨고 채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현지부터 세수해. 난 이거 치우고 할 테니까.”
채련은 엎질러진 찌개를 쓸어 담으며 말했다. 그러자 현지는 순순히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채련은 싱크대 옆에 걸려 있는 타월에 손을 닦고 수화기를 들었다.
“최길성입니다.”
“웬일이세요, 최 선생님?”
채련은 불안한 예감이 들어서 다급하게 물었다.
“교수님이 갑자기 말을 못하셔서…… 전혀 소리를 내지 못하시는군요.”
“네?”
“오 선생이 좀 왔으면 좋겠는데…… 지금 바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
“네. 곧 가겠어요.”
현지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냥 약속을 했다.
“가능한 한 빨리 오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최길성은 다시 한 번 채근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채련은 현지 생각이 나서 급히 욕실로 들어갔다. 세수를 하러 들어간 현지는 물도 틀지 않은 채 욕실 벽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서 있었다.
“왜 그러고 서 있어?”
“…….”
“얼른 세수해. 그래야 같이 나가지.”
“…….”
현지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 대신 싫다는 표시로 고개를 저었다.
“혼자 집에 있을래?”
“…….”
“같이 나가. 아까 같이 가기로 했잖아.”
“…….”
현지는 귀찮다는 얼굴로 다시 머리를 저었다.
“그럼 혼자 있다가 시장하면 밥 챙겨 먹어.”
“…….”
현지는 아무 대답 없이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찰칵 문을 잠가버렸다. 채련은 막막함을 느끼며 잠시 현지 방을 바라보다가 외출 준비를 하고 거리로 나왔다. 아침임에도 그림자를 드리운 아파트 골목은 깊게 응달이 져 있었고, 하늘도 사람도 스산한 얼굴로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채련이 노 교수 댁 골목에 들어섰을 때 교수 댁 대문 앞에는 최길성의 차가 서 있었고, 차 옆에서 최길성이 초조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떻게 되셨어요?”
채련이 다가서며 묻자 최길성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며
“오늘 아침 방송국에서 대담이 있다고 하시길래. 길도 미끄럽고 해서 모셔다 드리려고 왔더니……. 혹시 실어증이 아니신지 모르겠습니다.”
했다.
“네?”
채련은 너무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드는군요.”
“…….”
“어서 들어갑시다.”
최길성이 앞장을 섰다.
그들이 방 안에 들어섰을 때 노 교수는 흰 두루마기를 입은 채로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흰 수염에 가린 노쇠한 얼굴은 몹시 지쳐 보였다.
“선생님.”
채련은 노 교수 옆에 앉으며 울먹이는 소리로 그를 불렀다.
“…….”
“어떻게 편찮으세요, 선생님?”
채련은 노 교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그러나 노 교수는 채련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채련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와야 할
“오 군인가?”
하는 말을 끝내 듣지 못한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 선생은 방송국에 다녀오시죠.”
최길성이 서두르며 말했다.
“네?”
“녹화 시간이 다 돼 가는데 담당 프로듀서가 자리에 없어서 아직 통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어떡허죠, 그럼?”
“다른 사람으로 대체라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럴 형편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최길성은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제가 얼른 다녀오죠.”
“저도 교수님 모시고 병원으로 가야겠습니다. 참, 담시한테 연락을 해야겠는데…….”
담시는 연극 공연이 끝난 뒤 몰려드는 기자들을 피하고 싶었는지 곧바로 도다가로 떠나갔다.
“선생님, 저하고 병원으로 가시죠.”
최길성은 두 팔로 노 교수를 싸안고 몸을 일으켰다.
“키를 주세요.”
채련은 자동차 키를 받아들고 그들 앞에서 뛰었다. 일요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차가운 골목길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열흘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내과와 신경외과 그리고 정신과 병동을 돌며 얻어낸 노 교수의 병명은 ‘대인 대화 기피증’이라는 이상한 이름이었다.
“평소 대인 관계에서 말을 하시는 것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껴 오신 것 같습니다. 그 결과 말을 하지 않으려는 본능이 생기고 그 감정이 극대화되면서 실어증을 유발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신과 의사의 해석이었다.
“그건 아닐 거예요. 교수님은 15년이라는 긴 은둔생활을 청산하시고 말을 하시기 위해 세상 속으로 되돌아오신 분이에요.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말을 들려주기 위해 동분서주하셨구요. 그분은 말을 하는 그 자체를 자신이 감당할 본분처럼 생각하고 계셨어요.”
채련은 의사의 해석을 부정했다.
“제 판단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의사도 자신 있게 말했다.
“이상하군요. 왜 그런 판단이 내려졌는지요.”
채련은 믿어지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선생님은 평소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껴왔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있던 담시가 의사의 말을 긍정했다.
“……?”
채련은 의아한 얼굴로 담시를 쳐다봤다.
“사람들은 그분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청중 앞에서 늘 외로웠고 돌아오실 때는 몹시 허탈해하셨습니다.”
담시의 설명을 듣고 채련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실어증에까지 이른 노 교수의 심경이 이해될 듯싶었다.
“말은 이미 힘이 없습니다. 너무 낡아 있고, 허접쓰레기처럼 더러워져 있고, 그리고 갈기갈기 찢어져 있지요. 교수님은 원효대사의 화쟁사상을 공존의 원류로 받아들이셨지만 그것 역시 말로는 전달이 불가능합니다.”
팔짱을 끼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최길성이 말했다.
“그럼 무엇으로 그 전달이 가능한가요?”
담시와 최길성을 바라보며 묻던 채련은 속으로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것은 바로 소리…… 태초의 원음 같은,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뿌리박고 있는 하나의 소리……. 그것은 말이 아니라 소리여야 함을 채련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제야 알 것 같군요. 두 분이 종을 만들고자 하는 뜻을.”
채련은 다소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환자분이 찾으시는데요.”
간호사가 링거병을 들고 나오며 말했다. 채련은 얼른 병실로 들어갔다. 노 교수는 환자복 속에 작은 몸을 묻고 마치 동면을 취하고 있는 사람처럼 깊게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쯤 그렇게 누워 있던 노 교수는 눈을 뜨고 침대 옆에 서 있는 채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쓰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채련은 머리맡에 놓여 있는 종이와 매직펜을 집어서 그의 손에 쥐어주다.
“담시와 최 군도 불러주게.”
노 교수는 종이에다 이렇게 썼다.
채련은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선생님께서 들어오시라는데요.”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주위에 둘러서자 노 교수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담시한테 시선을 고정시키고
“담시, 종을 만드시오.”
라고 썼다.
담시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 속엔 간절함이 깃들여 있었다.
“…….”
담시는 지그시 눈을 내리깔고 서 있었다.
“종소리 속에 내가 하고 싶었던 말도 담아주시오.”
그의 당부는 그대로 비원처럼 들렸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노 교수도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키려는지 한참 동안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가 최길성을 바라보았다. 최길성은 긴장하며 노 교수 가까이 다가갔다.
“최 군, 나는 영묘사로 되돌아가겠네. 나와 내 가족이 살았던 집을 처분해서 종을 만드는 비용으로 써주게. 담시가 종을 만든다면 자네가 원하던 종보다 훨씬 더 훌륭한 종을 얻을 수 있을 걸세.”
최길성은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눌렀다. 노 교수는 그런 최길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채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채련은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그를 마주 보았다.
“오 군.”
노 교수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펜을 들었다.
“담시를 도와주게. 담시는 오 군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네.”
“…….”
“컵에 물이 다 채워져도 한 방울이 모자라면 차지 못하는 법일세. 한 방울의 물은 컵의 물을 채워줌과 동시에 자기 스스로를 채우는 것이라네.”
“…….”
“담시와 자네는 이승의 인연만은 아니었을 걸세.”
“…….”
방 안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과거생생 동안 흘러온 세월의 부피 같은 침묵이……. 채련은 담시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처음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자네와 같이 있다는 그 여학생은 내가 데리고 감세. 영묘사 위에 비구니 암자가 있으니 거기서 거처할 수 있도록 부탁해보겠네.”
채련은 의아해서 노 교수를 바라보았다. 현지를 데려가겠다는 것은 너무도 뜻밖의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노 교수는 들고 있던 매직펜을 놓고 허공을 응시하였다. 그런 그의 눈엔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채련은 고개를 돌렸다. 가슴 속이 아려오고 통증이 느껴졌다. 노 교수는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키고 있는 현지를 통해 부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어슬어슬 해가 지기 시작하면 집을 나가 거리를 헤매고 다녔던 가엾은 아내. 현지와 사모님은 어떤 의미에선 같은 축을 밟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들은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대의 격류 속에 휘말려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그 격류 속을 떠내려갈 힘조차 잃은 채 강기슭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삶이 존엄한 것이라면 그들의 삶도 존엄하게 지켜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존엄하게 지켜지지 못했고 이 시대의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노 교수가 현지를 데리고 떠난 날은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렸다. 채련은 현지 목에 실크 머플러를 감아주고 그 위에 다시 두터운 목도리를 둘러서 그녀를 차에 올려 보냈다. 노 교수도 흩날리는 눈발 속에 서서 담시와 채련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차에 올랐다.
“고마우이. 정말 고마우이.”
그의 시선은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을 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돌아왔던 그는 이제 말을 잃고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말이란 허망하고 공허한 것. 그러기에 말을 잃었다 해서 서러워할 건 없다. 그러나 허망한 말일망정 그것을 잃게 했던 세상은 잔인하고 가혹했다. 두 사람을 태운 최길성의 차가 흩날리는 눈발 속으로 멀어져가자, 채련은 운동 기구를 진열해놓은 건물 담벼락에 이마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슬프고 고통스럽고 억울하기까지 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올라왔다.
“걸읍시다.”
채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담시가 그녀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
채련은 얼굴을 손질하고 담시 옆에 나란히 섰다. 그들 앞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사람이 오가고 있음에도 거리는 빈 들판처럼 황량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잠시 거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인파 속으로 끼여 들어갔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사람이 지나가고, 빌딩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그러면서도 빈 들판처럼 쓸쓸하고 황량한 거리. 그 거리를 걷고 있는 채련의 머릿속엔 동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수가 깃든 수려한 얼굴. 노재윤의 얼굴도 떠올랐다. 숱 많은 머리를 한 갈래로 땋고 다니던 귀티 나던 여학생. 우아하고 정숙했던 사모님 얼굴, 유령처럼 음울했던 한태서의 얼굴, 당당하고 위엄 있던 이씨 부인의 얼굴, 그리고 동미 얼굴…… 그녀의 모습도 지금쯤은 많이 변해 있겠지. 이영의 얼굴도 떠올랐다. 육감적이고 끼 많던 그녀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이상하게 공항 로비에 서 있던 멍한 얼굴만 그녀의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정의동 교수 얼굴도 떠올랐다.
“선생님이 믿고 계시는 역사는 살아 있는 것입니까?”
“그야 물론 살아 있지. 천 년의 역사는 천 년 동안 살아 있고 만 년의 역사는 만 년 동안 살아 있는 것이라네. 어제는 오늘 속에 살아 있고 오늘은 내일 속에 살아 있듯이 말일세.”
“그런데 선생님은 왜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지 못하는 것입니까?”
“…….”
노 교수의 실어증은 정의동에 의해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채련으로선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마치 화형식이라도 치르듯 스승의 면전에서 스승이 지니고 있는 일체를 부정하고 나섰던 정의동, 그 자신은 역사 속에 살아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노 교수의 얼굴과 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들은 점점 크게 확대되더니 마침내 대형 스크린처럼 그녀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우린 모두 어디로부터 와서 이렇게 서럽게 만났다가 서럽게 헤어져야만 하는가? 채련은 걸음을 멈추고 서서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때 담시가 채련의 손을 꼭 잡았다.
“채련.”
채련은 고개를 들어 담시 눈을 쳐다보았다. 가슴이 뜨거워지며 그에게 기대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채련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코트 주머니 속에 넣고 맨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황량하고 쓸쓸한 이 거리에서 자신의 피부로 그의 체온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들 머리 위로는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천 년 세월이 흰 꽃송이로 부서져 내리듯이. 그들은 부서져 내리는 세월을 헤치며 아득한 기억 저편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로변을 지나고 골목을 지나고 강변을 지나고, 다시 대로변을 지나고 골목을 지나고…….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끝없이 거리를 배회했다. 마치 천 년 세월 속을 배회하듯이. 가끔은 빛처럼 빠르게 세월이 걷혀갔고, 때론 농무 속에 가리어져 한치 앞을 내디딜 수 없었다. 그럴 때면 그들은 찻집에 마주 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며 자신들 앞에 펼쳐진 농무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하기를 몇 번, 긴 여정을 끝내고 그들이 강가에 이르렀을 때 하루 종일 내리던 눈은 멎고 밤하늘엔 상현달이 높다랗게 떠 있었다. 채련과 담시는 강둑에 서서 달빛 속에 잠긴 강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두껍게 얼음이 언 강은 자신의 몸 위에 흰 눈을 싸안고 마치 정지된 시간처럼 누워 있었다. 강을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은 몸을 돌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강은 그들의 생애 위로 흘러간 세월, 바로 그것이었다.
“종을 만들고 싶소. 이제는 종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소.”
담시는 긴 팔을 펴 채련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의 몸을 꼭 껴안았다. 그 순간 뜨거운 감동과 함께 눈물이 솟구쳐 올라 채련은 담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울었다. 푸른 달빛은 그들 정수리를 내리비추고 강은 달빛을 싸안은 채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담시가 도다가 마을로 떠나간 후, 채련은 마치 금禁줄을 쳐놓듯 아파트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이 밖으로 나가지 않음은 물론 외부의 어느 누구도 자신이 거처하는 공간 속에 들여놓지 않았다. 그리고 고행승처럼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체의 안락을 배제하고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은 담시의 영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높고 푸른 창공으로 날던 귀한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자신에게로 날아온 것 같은 기분. 채련은 자기 자신이 그 새를 받아들임에 모자람이 없는 한 그루의 나무이고 싶었다. 채련은 하루에 몇 번씩 향을 피우기도 하고 향유를 뿌린 물에 긴 머리를 감기도 하면서 자신 속에 맑은 기운이 차오르기를 빌었다.
그런 어느 날 아침, 채련은 반쯤 열린 커튼 틈으로 비쳐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보았다. 그 빛은 광명처럼 느껴졌고 그것을 본 순간 그녀의 몸속엔 미열이 돌며 알 수 없는 흥분이 일기 시작했다. 채련은 창가로 가 세워둔 나무판을 가져다가 밑그림을 그리고 조각칼로 그것을 파나가기 시작했다. 조각칼이 지나간 자리에는 긴 머리와 부드러운 어깨와 탄력 있는 유방과 가는 허리와 매끈하고 긴 다리를 가진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탐스러운 머리 타래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하늘을 향해 공양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엔 헐렁한 옷을 입은 맨발의 남자가 소매 속에 바람을 잔뜩 넣고 피리를 불며 구름 위를 떠가고 있었다. 그들 남녀는 하늘의 묘음妙音과 땅의 비원悲願으로 서로 화답하며 영원한 시공 속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절묘하도록 아름다웠다.
조각이 완성된 순간, 채련은 그것을 가슴에 싸안고 소리 죽여 울었다. 아픔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라와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각을 완성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그녀로선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가 분별할 수 없는 의식 밖의 허공과 같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튿날 새벽 채련은 그 조각을 포장해서 들고 도다가 마을로 떠났다. 그녀는 도다가 마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오직 담시만을 생각했다. 아니, 담시만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지순한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석양을 받은 나목들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는 저녁 무렵, 채련은 도다가 마을에 도착했다. 호숫가에는 중절모자를 쓴 허수아비 하나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고 허수아비 머리 위에는 참새 한 마리가 앉아 무심한 얼굴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채련은 허수아비와 참새가 연출하는 평화스러운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잠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상극으로 만났지만 이미 그것을 뛰어넘어 서로 친근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아니, 오 선생. 언제 오셨습니까?”
칡덩굴을 한 아름 안고 산에서 내려오던 최길성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지금요. 그건 뭣에 쓸 건가요?”
“내형틀 겉에 감을 겁니다.”
최길성은 안고 있던 칡덩굴을 길섶에 내려놓고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오 선생 만난 김에 좀 쉬어 가야겠습니다.”
하면서 길섶에 주저앉았다.
채련은 최길성 옆으로 가 앉으며 호수를 바라보았다. 지난 가을, 푸른 하늘 한 조각을 떼어다가 펼쳐놓은 것처럼 보이던 호수는 두꺼운 얼음 이불을 싸안고 깊은 동면을 취하고 있었다.
“오 선생이 오시지 못할까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오셨군요.”
최길성은 채련이 들고 온 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도 올 수 없을 줄 알았어요. 도저히 조각을 해낼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담시도 작업을 시작한 지가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은 두 손을 모아 인(印)을 맺고 계속 관觀만을 하더군요. 자리에 누워 자는 것은 물론 음식을 먹는 일도 잊은 채 말입니다.”
“…….”
“가끔 앞에 놓인 물그릇을 들어 입에 댔는데 그것도 입술을 축이는 정도고 한 모금도 삼키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
“그런 그를 보고 있노라니, 그가 마치 자신의 몸을 녹여 종 속에 부으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제로 밤에 보면 그의 몸은 내면에서 뿜어내는 열로 뻘겋게 달아 있기도 했습니다.”
“…….”
“들어가십시다. 담시는 지금 외형틀에 흑연을 바르고 있는데 마침맞게 조각이 도착했습니다.”
“최 선생님이 먼저 보세요. 쓸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데요.”
도다가 마을에 도착하고 보니 채련은 어쩐지 자신이 한 조각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아닙니다. 귀한 작품을 제가 왜 먼저 봅니까?”
최길성은 사양하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채련은 무릎 위에 놓았던 작품을 들고 그를 따라 일어났다.
“어서 갑시다. 오 선생이 온 걸 알면 담시도 기뻐할 겁니다.”
두 사람은 호숫가를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걸어가자 푸른 소나무 사이로 검은 기와지붕이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안에 담시가 있다.’
담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 세상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들이 마당 안에 들어섰을 때 백토로 빚어 만든 외형틀 안에 흑연을 바르고 있는 담시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치 신부 얼굴에 분을 바르듯 정성을 다해서 흑연을 바르고 있었다.
“담시, 오 선생이 오셨습니다.”
최길성은 몇 걸음 앞에서 걸으며 담시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담시는 들고 있던 붓으로 이마를 가리며 채련을 돌아다보았다. 채련도 걸음을 멈추고 그를 마주 바라봤다. 반가움과 설렘이, 그보다 더 진한 아픔과 비애가 서로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그냥 마주 보며 그렇게 서 있었다.
“조각을 좀 봅시다.”
최길성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채련은 들고 온 조각을 그들 앞에 펴놓았다.
“이건 상대예요.”
채련은 비상하는 새의 날개를 들어 보였다. 두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연하게 날개를 펄럭이며 비상하고 있는 새의 날개를 바라보았다.
“이건 유곽이구요.”
채련은 긴 줄기 위에 떠받혀 있는 둥그런 연잎을 보여주었다. 크고 작은 연잎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한 채 고개들을 숙이고 있었다.
“이건 유두예요.”
채련은 다시 연꽃을 들어 보였다. 연꽃은 가운데 동그란 씨를 박고 일렬로 배열돼 있었다.
“이건 비천상이에요.”
채련은 하늘의 묘음과 땅의 비원으로 서로 화답하고 있는 남녀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의 입에선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음에 드시는가요?”
채련은 긴장하며 물었다.
“신비롭군요. 절묘합니다.”
최길성이 먼저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담시는 묵묵히 서서 가만히 채련을 응시했다. 채련 역시 같은 모습으로 그를 응시했다.
“채련, 당신은 나의 소리입니다.”
담시는 채련의 어깨 위에 두 손을 얹고 그녀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봤다. 그녀에게서 울려오는 모든 소리를 자신의 시선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처럼. 오래도록 그렇게 마주 서 있던 두 사람은 서서히 조각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하늘의 묘음과 땅의 비원으로 서로 화답하는 두 남녀로…….
그날부터 채련은 그들과 함께 있었다. 담시나 최길성은 물론 도다가 촌로들도 하루 종일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머리를 수굿이 숙이고 다니며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했고, 말을 해야 될 때에는 대개 표정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백토 위에 바른 흑연이 말랐을 때 담시는 채련이 조각한 조각품을 눌러 모양을 떴다. 그리고 내형틀 위에 칡덩굴을 감기 시작했다. 아래는 두껍게, 위로 올라가면서는 점점 얇게 감고 있는 그의 손길은 유연하고 매혹적이었다. 감기를 끝낸 담시는 내형틀 위에 외형틀을 씌웠다. 채련도 담시 곁에서 밀초를 깎아 용두를 만들었다. 그리고 용두에다 백토를 바르고 백토가 마른 후 밀초를 녹여 용 모양의 음관틀을 완성시켰다. 담시는 음관을 종틀 위에 얹고 불을 땠다. 그러자 칡덩굴이 타며 내형틀과 외형틀 사이에 종 두께의 공간이 생겼다. 도가니 옆에는 구리, 주석, 아연, 금, 은, 놋쇠, 인 등의 쇠붙이가 쌓여 있고 유리 조각과 청솔 가지도 함께 놓여 있었다.
“유리 조각과 청솔가지도 필요한가요?”
채련은 최길성에게 물었다.
“그것들은 음색을 곱게 해줄 뿐 아니라 수표와 불순물을 제거해주기 때문에 꼭 필요합니다.”
서쪽 하늘에 걸쳐 있던 노을도 걷히고 사방은 서서히 어두워져갔다. 그러자 도다가 촌로들은 화덕 앞에 모여 앉아 쌓아놓은 장작에 불을 댕겼다.
“쇠붙이는 왜 넣지 않는가요?”
채련은 의아해서 물었다.
“도가니를 먼저 달구기 위해서죠. 자정쯤 되면 도가니가 완전히 달구어질 겝니다.”
촌로 한 사람이 대답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빨갛게 달구어진 도가니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붉은 연꽃처럼 떠올랐다. 신비하고 황홀했다. 도가니 앞에 서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붉은 빛깔을 보고 있던 담시는 한 찰나를 포착하고 구리를 집어서 도가니 속에 던졌다. 그 순간 구리는 현란한 불꽃으로 몸을 사르더니 붉은 쇳물이 되었다. 이어 인이 들어가고 금, 은이 들어가고 주석이 들어갔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불꽃으로 타오르다가 시뻘건 쇳물로 몸을 바꿨다. 채련은 어둠 속에 서서 도가니 속을 들여다보았다. 끓고 있는 쇳물은 새로운 생명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고 절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한 덩어리의 화엄 세계를 보는 것처럼 장엄하고 엄숙하게 느껴졌다. 숨을 죽이며 도가니 속을 들여다보던 채련은 칡덩굴을 자르던 가위로 자신의 머리 타래를 잘랐다. 그녀의 손 안에는 부드러운 머리 타래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33년간을 살아온 생의 징표이기도 했다. 채련은 머리 타래를 들고 도가니 앞으로 다가가 그것을 붉은 쇳물 속에 던졌다. 담시의 염원에 자신의 생을 사르는 마음으로.
먼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쇳물은 음관을 타고 종틀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쇳물은 이제 단순한 쇳물이 아니라 범천을 나는 소리로 환생하기 위해 종틀 속에서 마지막으로 인고의 순간을 견딜 것이다.
願此鍾聲遍法界
鐵圍幽暗悉皆明
三途離苦破刀山
一切衆生成正覺
종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우렛소리였으며, 바람소리였으며, 산자락을 도는 물소리였으며, 꽃잎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였다. 그리고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천인(天人)의 피리소리였으며, 하늘 아래 있는 일체의 생명이 하늘을 향해 고하는 통한의 소리였다. 종소리는 파도소리처럼 굽이쳐 흘러가 하늘자락을 때렸고 그것은 다시 메아리쳐 돌다가 마을로 되돌아왔다.
종소리는 끊이지 않고 밤이 새도록 울려 퍼졌다. 하늘과 땅을 한 소리 속에 간직한 채. 채련은 그 소리 속에서 종이 완성되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는 소리도 들었다. 종이 완성되면 담시는 날개를 펄럭이며 다시 창공 속으로 날아갈 것이다. 아득한 과거세에도 그러했듯이.
“나무야, 새가 날아감을 서러워 말자.”
그 후 담시 소식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리를 놓는 공사장에서 그를 본 사람이 있다고도 했고, 추수를 하는 들판에서 그를 본 사람이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담시가 남쪽 어느 마을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그를 찾아오는 학자와 예술가들의 발길이 그의 오두막집 앞에 끊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확인해본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가 만든 종만은 도다가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종소리를 듣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은 지금도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줄을 잇고 있었다. 그 종은 소리를 듣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만 가지고 있으면 그 염원에 응해 언제나 울어주었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는 너무도 애절해서 소리를 듣고 있으면 모두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한이 크면 클수록, 고통이 깊으면 깊을수록 종은 더욱 애절하게 울어주었고, 그 종소리를 들으면서 실컷 울고 나면 무엇인가로부터 깊이 위로받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마음은 한없이 평화스러워지고, 그리고 생에 대한 새로운 희열에 젖어든다고 했다.
세상에서 모습을 찾을 수 없는 담시는 소리 속에 숨어 도다가의 종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1부 끝〉
<소설 부문 수상소감>
글쓰기의 시작과 마무리
1980년 여름, 1300매 정도 되는 『솔바람 물결소리』원고를 조계사 부처님 앞에 놓고, 이 글이 당선이 되면 부처님 사상을 세상에 펼치는 불교문학을 하겠습니다. 하고 서원을 세운 후 108배를 드렸다. 그로부터 35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나는 내 자신에게 묻는다. 그때의 약속은 잘 지켜졌는가? 나는 이 질문에 그렇다, 하고 답하고 싶다. 최소한 부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다 바쳤으므로. 아니 대답을 하고 보니 꼭 그랬던 것 같지만은 않다. 나한테는 글을 쓸 수 있는 좋은 기능이 있었는데 그 기능을 완전히 산화시키지 못한 것 같아 회한이 인다. 만약 그랬다면 불교문학이라고 하는 장르를 빛내는 일에 좀 더 공헌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말에 망건 쓰자 파장이라는 말이 있다. 시장에 가려고 망건을 쓰고 보니 시장은 이미 파장이 됐더라는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이 딱 그 짝인 것 같아 마음 한 자락이 쓸쓸하다.
이 글을 쓰면서 혜관스님한테 가장 먼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불교문학의 불씨를 살려 보겠다고 긴 세월동안 노심초사 하셨을 스님에게, 같은 길을 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감사의 합장 올린다. 그리고 장영우 교수님께도 감사의 합장 올리고 싶다. 문학은 작가와 평론가가 마주 손뼉을 쳐야 소리가 난다. 지금 우리 문단에 불교문학을 논할만한 평론가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불교를 이해하고 불교문학에 애정을 기울이는 장영우 교수님이 계시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오현 큰스님께 감사의 합장 올린다. 문학이라고 하는 나무에 지속적으로 물을 주고 영양분을 주어 잘 자라도록 독려해 주시는 스님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있는가!
3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부처님 언저리에서 문학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든 것은 수많은 독자들의 미소가 있어서였다. 다음 생에서도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게 된다면 그 때 독자들에게 보다 나은 불교소설을 써서 보답하고 싶다. 글쓰기의 마무리 시점에 서고 보니 불교문학에 대한 애정이 더욱 뜨거워진다. 훌륭한 후배작가와 평론가 나와서 인류정신사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사상을 문학의 그릇에 담아 활짝 꽃피워주기를 열망한다.
남지심 |1944년 강릉 출생. 1980년 장편소설『솔바람물결소리』가 여성동아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장편소설『연꽃을 피운 돌』『담무갈』『청화큰스님』등. 수필집『욕심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톨스토이와 흰코끼리』『새벽하늘에 향 하나를 피우고』외 다수.『우담바라』는 90년대 초반대중적인 지지를 얻어 전 4권이 150만부 이상 판매되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소설 부문 심사평>
장영우
남지심은 1944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삼척, 강릉에서 성장한 뒤 서울 수도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12년 동안 교사 생활을 했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1980년 여성동아 장편 공모에 솔바람 물결소리를 응모하여 당선한 것은 무척 이레적인 일이다. 이후 그는 『연꽃을 피운 돌』, 『우담바라』, 『담무갈』 등 주로 불교소설을 창작하여 이 분야에서는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정받았다.
남지심의 등단작 솔바람 물결소리는 여성동아 별책부록으로 출간되어 8쇄를 찍었고, 단행본으로 재출간되어 43쇄까지 찍은 베스트셀러다. 우담바라는 여성문학 창간호 ‘여성동아장편공모당선작가 중편신작소설선’에 발표된 그 여자의 하늘을 모태로 한 작품으로 제1부 ‘도다가의 종’, 제2부 ‘비구니의 길’, 제3부 ‘마니주를 찾아서’, 제4부 ‘황금전당’ 등 모두 4부로 구성된다. 우담바라는 4부까지 약 150만부가 팔렸고, 이 작품을 읽고 출가한 이도 여럿 되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작 한국문단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소설 우담바라는 오채련‧한태서 부부를 중심으로 하여 최길성, 담시(백족화상), 현지(지효스님), 봉두, 이씨 부인(용화보살), 동화‧동미 남매, 융, 송강 등 다양한 인물들이 종횡으로 복잡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궁극적으로 수행적 삶을 통해 번뇌를 극복하고 진리를 깨우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우담바라 서사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연기법과 무애사상으로, 작품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과 갈등은 담시와 오채련 사이에서 태어난 융의 성불을 위한 모든 등장인물의 염원과 실천으로 수렴된다. 이와 함께 노교수, 담시, 최길성 등 재가나나 출가자의 모애행과 성실한 삶을 통해 수행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노교수와 담시, 동화와 융의 사제관계를 통해 현대물리학과 불교의 연관성을 평이하게 풀어내면서 현대과학이 종교의 의미를 해명해야 할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우담바라가 기존의 불교소설과 다른 점이 바로 이 부분일 터이다. 우담바라는 부처님 말씀이나 경전을 거의 인용하지 않으면서 불교의 정수와 현대적 의미를 가장 잘 형상화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오랜 동안 꾸준히 불교소설 창작에 전념해온 작가의 작품을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게 되어 기쁘다. 이 상이 작가의 노고에 대한 작은 보답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 이경자(소설가), 장영우(평론가. 동국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