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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시
마선숙
역겨운 냄새에 눈을 떴다. 아내는 두꺼운 이불을 둘둘 만 채 부화중인 애벌레처럼 누워있다. 눈은 떴지만 동공이 텅 비어 있다. 섬뜩하다. 베토벤의 데스마스크 같다.
초임교사 때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텅 빈 교실에 들어섰는데 하얀 얼굴이, 그것도 표정이 전혀 없는 얼굴이 빤히 쳐다보았다. 섬칫해서 발을 멈추었다. 그 후로 베토벤에 대해 친근감이 들지 않았다. 특히 <운명>이 더 그랬다. 허지만 아내는 베토벤을 좋아했다. 서예를 배우고 싶지만 돈이 든다고 문화센터도 못 다니던 사람이 베토벤 판은 서슴없이 사 모으는 것을 보고 뜻밖이다 싶었다. 치매에 걸려서도(아내는 정신이 돌아올 때면 치매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정신이 돌아오면 알츠하이머 씨라고 해 줬다.) 피아노 협주곡 16번을 자주 들었다. 자리에 누워서 그거 틀어줘, 틀어 줘 ,했다. 그래서 피아노 협주곡 16번을 틀어주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금세 울려 울려 하면서 흐뭇해했다. 하지만 동공을 보면 텅 비어 있다. 정말 음악을 듣긴 듣는 건가? 그런데 요즘은 병이 깊어지면서 음악도 잊어버렸다. 베토벤이 누군지도 모른다
“당신이 처음에 의아해 한 거 알아요. 시골서 고등학교 나온 주제에 베토벤 좋아한다고”
아내는 클래식 판을 사 올 때마다 한마디씩 했는데 그 속에는 자기를 무시하고 있다는 서운함이 깔려 있었다. 허지만 그것도 오래 전 일이다. 이제는 음악은 관심사가 아니다.
하루의 시작이다.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을 뻗쳐 바지 위로 아내의 기저귀를 만지니 물컹하다. 밤엔 두 개를 채워도 아침엔 질퍽했다. 골이 지끈거려 상체를 일으켜 기저귀부터 뺐다. 비닐봉지에 넣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창문을 열었다. 반 토막의 창으로 찬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십일월 중순의 바람이 얼굴에 바늘처럼 와 박혔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울 거라고 예보하니 걱정이다.
아내를 욕실로 데리고 가 바지를 벗기고 오물을 말끔히 닦아주었다.
“ 최교자아앙.”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폐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온 몸의 잔털이 으스스 일어났다. 어머니가 내가 중학교 교장이 된 후 부르던 말투를 흉내 내고 있다. 콧소리를 섞어 부르던 어머니와 달리 약간 쇳 냄새가 섞이긴 했지만 그래도 비슷하다.
“물 아껴. 돈 새는 소리 안 들려.”
이건 또 예전에 내가 했던 소리다. 득의만면 비아냥조다. 요즘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다 제 정신이 들면 맺혔던 것들을 풀어놓는 재미로 사는 사람 같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어느 부분은 더 선명해져 무자비하게 나를 놀려먹었다. 교활하게 꼼수까지 부려 혀를 내두를 정도다. 언제 횡설수설했냐는 듯 공격이 논리정연하다. 앙금이 쌓인 걸 얼마나 더 풀어내야할까?
방으로 데려 와 새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빗겨 주었다. 그리고 침대 밑에서 화장품 케이스를 꺼내 앞에다 밀어놓고 주방으로 나갔다. 일 도와준다고 말썽부려 한 시도 마음 놓이지 않아 일거리를 만들어줘야 조용했다. 아내는 캔디나 쿠키를 받은 아이처럼 좋아하며 화장품 케이스를 열었다.
냉장고에서 콩나물을 꺼내 씻어 냄비에 앉혔다. 멸치가루를 넣고 마늘을 다지며 힐끗 아내를 보니 얼굴에 화운데이션을 펴 바르고 파우더로 톡 톡 두드리고 있다. 분가루 향이 주방까지 날라 와 코끝을 간질였다. 십 팔 평 아파트는 거실도 없이 한 사람 서서 일할 수 있는 주방 끝에 안방과 골방이 있는 구조로 허름하고 협소하다.
아내가 쓰는 립스틱은 주홍색이다. 명희가 쓰던 색과 같다. 계속 혀를 빨면서 립스틱 덧바르는 것을 보며 상을 차렸다. 아내는 볼도 시뻘겋게 칠 한 후 식탁에 와 앉았다. 늙고 주름진 얼굴에 분가루가 겉돌았다. 립스틱이 삐뚤삐뚤 칠해져 입술이 김치 국물 묻은 듯 지저분하다.
“어때요. 명희보다 젊어 보여요?”
아내가 얼굴을 앞에다 바짝 들이대고 물었다. 발음연습 하듯 명희라는 두 글자를 강하게 내뱉었다. 섬뜩 한기가 올라왔다. 여자는 참 무섭다. 몇 십 년 전 일도 서리처럼 품고 있다. 못마땅했지만 심사를 건드려 놓으면 종일 마구잡이로 날뛰어 잠자코 수저를 쥐어 주고 생선 접시를 앞으로 밀었다. 아내는 굴비를 보더니 눈을 빛냈다.
“당신은 대가리 먹어. 나도 대가리만 먹었어.”
대가리를 잘라 내 밥그릇에 던져 주며 살을 입에 통째로 가져갔다. 고양이가 생선을 핥듯 남김없이 먹는 걸 보며 나도 굴비 대가리를 씹어 먹었다. 예전엔 내가 살을 먹고 아내가 대가리를 먹었는데 반대가 되었다. 모든 역할이 뒤바뀌었다. 껌처럼 붙어 평생 나를 돌봐준 아내대신 이젠 내가 아내 손발이 되었다.
몇 숟가락 뜨다 말고 수저를 놓았다. 내가 담근 깍두기도 서벅서벅 맛이 없고 콩나물국도 시원하지가 않다. 삼년 전 병이 들기 전까지 항상 입맛에 맞는 밥상을 받았다. 손맛이 좋아 된장 고추장은 물론 김장김치도 맛이 깊어 밥 한 그릇을 거뜬하게 비웠다.
처음에 이상하다 싶을 때 병원에 데려 가지 못해 후회스럽다. 정리정돈 잘하고 정갈한 사람이 집안 청소도 안하고 허공을 보면서 멍했다. 우울증이려니 하면서 감기처럼 자연스럽게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양순하고 순종적이고 다소곳하던 사람이 이기적으로 돌변했다. 구정 때 교직원들이 세배 왔을 때 부엌에서 떡국 끓이느라 바쁜 아내를 부르기가 뭐해 혼자 세배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걸 비꼬며 아무 때나 자기에게 세배를 하라고 호통 쳤다. 또 집 계약 할 때 안 물어 봤다고 이 집을 때려 부숴야 한다고 고함질렀다.
몇 년 전 욕실서 넘어져 머리를 다친 적이 있는데 그 때 무심히 넘어간 게 병을 부른 간접 원인 같기도 했다. 자기만의 방을 내어 놓으라 소리 지르고 신발을 껴안으며 자기편만 들어주는 남편을 찾으러 나가겠다고 악다구니를 써 검사를 받았을 땐 이미 늦었다. 치매가 중기를 넘어 약을 복용해도 크게 기대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최시인.”
설거지를 하는데 아내가 립스틱을 가지고 와 눈앞에다 흔들었다. 아내는 기분이 괜찮을 때 나를 최시인 이라 불렀다. 공립 중 고등학교 국어선생을 하면서 지방 신춘문예에 시가 붙어 당선되었다. 몇 작품 발표는 했지만 여태껏 시집 한 권 없는 시인 아닌 시인이다. 남보다 특출 난 게 없는 평범한 사람이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될 때까지 학교 일에 매달려 전력 질주하다보니 시간에 쫓겨 그걸로 끝이었다. 손 놓은지 오래되니 이젠 시인인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래도 시인의 아내라는 자부심이 있었는지 교장보다 시인이 높다면서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입 에 해봐요. 예쁘게 발라줄게.”
“저리 가.”
고무장갑 낀 손으로 아내를 떠다밀었다.
“왜 밀쳐?”
아내의 말투에 가시가 돋쳤다. 아차, 싶다. 알츠하이머 씨가 찾아 왔을 때 건드려 놓으면 덧났다. 고약하게 굴어도 웃어넘기자고 마음먹었건만 안 될 때가 있다. 아내가 발작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리기 전에 달래는 시늉을 했다.
“알았어. 잘 발라 줘.”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입을 오므려 입술 산을 만들었다 . 아내의 얼굴이 금세 펴지면서 립스틱을 입술에 페인트칠하듯 바르기 시작했다.
“거울 봐요. 젊어졌어.”
아내가 거울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제멋대로 그려진 입술이 정신과 병동에서 환자들이 무대 위서 연극하려고 분장한 것 같다.
“티브이에서 재밌는 거 하니 보구려.”
화제를 돌리며 은근슬쩍 아내 손을 잡고 안방으로 갔다. 침대 위에 앉히고 리모컨을 눌러주었다. 티브이로 눈 돌리는 것을 확인하고 주방 일을 마무리 한 뒤 대충 집안을 비질하고 걸레질했다. 살림이라고 해봐야 외짝 장롱과 침대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구식 문갑, 티브이, 때 묻은 소파, 냉장고가 전부라 청소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았다.
정리를 마친 후 욕실로 가서 세면기 물을 틀었다. 비누칠을 듬뿍 해 입술을 박 박 문지른 후 다시 안방으로 갔다.
정년퇴임 할 때만도 노후가 불안하지 않았다. 연금이 나오니 근교 전원주택으로 옮긴 후 꽃이나 가꾸며 말년을 느긋이 보내려 했다. 큰 아들은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정형외과의고 작은 아들도 벤처 기업에 다니며 앞가림은 하기에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매사 여의치 않았다. 큰 아들이 병원을 개업하겠다면서 퇴직금을 주면 생활비를 후히 준대서 일시불로 내주었다. 처음 일 년은 흡족하게 돈을 줘 만족했는데 옆에 뼈 전문 대형병원이 들어서 환자가 줄자 나 모르게 병원을 정리한 후 식솔을 끌고 미국으로 가 버렸다. 황망해서 정신을 추스를 새도 없는데 작은 아들이 또 손을 내밀었다. 직장을 관두었다면서 치킨 집이라도 차리게 돈 좀 보태 달라고 호소했다. 형만 아들이냐며 따지기에 삼십오 평 아파트를 팔아 반을 내주고 지금의 소형 아파트로 옮겼다.
그래도 그리 궁색하진 않았다. 평교사 일 때 죽어라 과외 해 식구들 모르게 모아둔 돈이 있어 잘 굴리면 살아지려니 했다. 그런데 둘도 없는 절친이 집 잔금 치룰 날짜가 안 맞는다고 며칠만 돌려 달래 오천만원을 주었는데 고만이었다. 알아보니 이혼한 후 외국으로 이민 가 버렸다고 했다.
그 뒤 교장 재임 때부터 입맛을 들인 보이차도 맘 놓고 마시지 못했다. 사업하다 부도가 나거나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 한 것도 아닌데 늘그막에 빈곤층이 되었다. 증권을 해 큰돈을 날리거나 다른 여자를 곁눈질 한 적도 없건만 초라해졌다. 삼십 팔년이란 세월을 하얀 와이셔츠 입고 출근하며 정상적으로 살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인생이 하루는 긴 데 칠십 삼년은 짧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아내가 일흔이 되고 자신이 일흔 셋이 된 것 같다.
오른 쪽 어깨가 쑤셔왔다. 허리도 시원치 않고 무릎도 그렇다. 종일 치다꺼리 하다보면 온 몸이 욱신거려 요양 보호사에게 하루 서너 시간이라도 부탁하고 싶지만 그 돈이나마 아껴야 할 처지다.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걸 확인 할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아내가 요구하는 것 외엔 나를 위해선 담배도 끊고 휴대폰도 없앴다.
아내가 동의해 아침에 치매 데이케어 센터에 가서 잘 지내다 저녁에 오면 좀 수월 할 텐데 죽어라 싫어하니 어쩔 수 없다. 처음 며칠은 억지로라도 해 봤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기에 더 이상 나 편하자고 아내의 불안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미국 큰 아들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 했다. 아내가 치매에 걸렸다고 하니 요양원으로 모시세요, 하고 성의 없이 말해 맥없이 수화기를 놓아버렸다, 작은 아들에게도 해봤지만 형한테만 큰 돈 줬으니 미국으로 들어가세요. 하고 발뺌을 했다.
그 뒤 죽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잘못되면 아내가 어찌될지 막막해 내 목과 아내 목을 눌러보는 연습을 했다.
그런데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목을 매면 목이 까지거나 피멍 들어 자식 체면이 말이 아닐 것 같았다. 투신해도 높은 데서 떨어진 충격으로 몸속의 뼈가 조각조각 부서져 염습하다가도 알 것 같아 걸렸다. 자연사 같은 죽음이 뭘까 궁리하다가 일단 급하면 쓰려고 치사량의 수면제 이백 알을 찬장 깊숙이 숨겨 놓았다.
또 희망이 없으면서도 버티어내는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저수지에 몸을 던졌기에 2대에 걸쳐 자살을 대물림 할 수는 없었다.
배변 볼 시간이 되어 아내를 욕실 변기에 앉혔다. 배변은 중요했다. 볼 일을 못 보면 기저귀에 실례하기에 뒤 처리가 힘들었다.
“미안해요.”
변이 나올 때까지 아내의 배를 손으로 문지르는데 내 기색을 살폈다. 이렇게 온순 할 때가 하루 몇 번 있다. 아내가 눈치를 보니 마음이 저려 와 말없이 손을 잡아주었다. 손이 거칠다. 손마디에 거무죽죽한 굳은살이 메주콩처럼 달려있다. 어머니를 모셔주고 동생들 치다꺼리를 한 손이다. 한 이불 덮고 사십 육년을 살았지만 고생하는 아내에게 고맙다고 한 적이 없다. 폭력을 쓰거나 주정을 한 적은 없지만 병들기 전에 좀 살갑게 대할 걸 하는 후회가 스쳐갔다.
그러다 문득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며 겸연쩍어졌다. 자신의 이중성이 진저리 났다. 아내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과 회한으로 잘 해주고 싶으면서도 속으로는 얼마나 도망가고 싶었나? 자책을 하면서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기를 은근히 바라지 않았던가?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태가 올 것이 두렵다. 벽에다 똥칠을 해도 감당할 자신이 있을까? 늘 두 마음에 시달리는 자신은 몹쓸 남편임에 틀림없으리라. 자신이 치매에 걸리면 아내는 정성을 다해 보살필 것이 틀림없기에 몰래 부끄러웠다.
“체시인”
아내가 볼 일을 봐서 기쁜지 내 옷깃을 잡아 다녔다. 다행이다. 옷을 입혀 안방으로 들어온 후 점심 준비를 했다. 상 차리는 게 번거로워 김치 넣고 밥을 볶아 아내 입에 한 입 넣어주고 나 한 입 먹고 했다.
“늙으면 밥이 힘이야. 밥 심으로 살아.”
아내는 밥을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다. 식욕이 좋아보였다.
“ 딸 갖고 싶어. 이번에 아이 낳을 땐 옆에 있어 줄 거지? 산후조리 제대로 해주고.”
아내가 갑자기 밥을 먹다말고 보챘다. 코끝이 찡하다. 아이를 낳은 후 일주일도 못 누워 있었다. 어머니가 자신도 할머니에게 일주일 밖에 미역국 못 얻어먹었다면서 부엌으로 내몰았다.
“알았소. 이번에 아이 낳을 땐 손 꼭 잡고 당신 옆에 있어줄게. 산후 조리도 세 달 하고.”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니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일광욕 할 시간이오.”
점심을 물린 후 아내에게 두꺼운 외투를 입혀 옥상으로 올라갔다. 꼭대기 층이라 옥상이 있어 다행이다. 햇볕을 쬐는 게 병에 좋대서 점심 먹은 후 옥상으로 올라가는 게 일과다. 복실이 밥도 줘야 하기에 겸사겸사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날이 더 추워지면 그나마도 못할 것 같아 아내를 평상 의자에 앉히고 해바라기를 시켜주었다.
옥상 한 구석에 매놓은 복실이가 꼬리를 쳤다, 이사 올 때 다른 짐들은 버렸어도 복실이는 데리고 왔다. 복실이는 나보다 아내를 좋아했다. 어머니 살아생전 개 똥구멍에서 금이 나오냐고 밥을 조금만 주라고 성화를 했지만 아내가 몰래 잘 먹여서 그런지 아내를 따랐다. 줄을 풀어놓으니 개가 아내의 무릎에 냉큼 올라앉았다. 아내가 복실이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에 온기가 엿보였다.
사과 궤짝에 배추 무를 심었는데 잘 자라고 있다. 서리오기 전에 뽑아 김치를 해야겠다. 아내가 성했을 때 담근 김치가 먹고 싶다. 퇴근해 돌아와서 손을 씻고 있으면 어느 새 밥상을 차려놓고 된장찌개 식어요, 빨리 오세요, 하던 말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내가 해 준 밥을 먹는 게 죽을 때까지 당연한지 알았으니 인생을 잘 몰랐다.
오늘은 새들이 아직 놀러오지 않았나보다.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곳에 올라 와 새나 나비를 보면 반가웠다. 여름엔 참새가 날아와 궤짝에 심은 깻잎을 부리로 콕 콕 찍어먹었는데 비둘기도 한두 마리씩 와 쌀을 뿌려주었더니 수 십 마리 날아들어 왁자지껄 소란스러웠다. 때로는 비둘기들이 빨래에다 배설을 해 난처할 때도 있지만 적적한 것보다 나았다. 오늘은 아침나절에 놀다 간 걸까?
항아리들이 놓인 곳으로 걸어갔다, 쌀 항아리에 애들이 학교서 타온 우등상장과 앨범을 넣어두었고 물 항아리엔 어버이 날 애들이 사 온 카네이션을 비닐에 담아두었다. 카네이션은 오래되어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지만 아내가 소중히 간직했던 것들이라 버릴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통풍을 시키려고 항아리 뚜껑을 열어놓은 후 앨범을 꺼내 아내 옆으로 가 앉았다.
“여보. 이 사진 좀 봐. 우리 혼인 사진인데 당신이 참 곱다.”
다정히 설명을 하자 아내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이건 식구들이 둘러앉아 수박 먹는 사진이네. 그때가 좋았어. 식구들이 다 당신을 좋아하고.”
“어릴 때 네잎 클로버 많이 찾았어. 그래서 행복하게 살지 알았어. 그런데 당신이 날 담임반 애들에게 하듯 호통 쳤어.”
아내가 역습하니 무안하다. 집에 와서도 선생처럼 굴었나보다. 엄하고 융통성 없는 잔소리꾼이었으리라.
앨범을 또 넘기는데 누런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오래 되어 보푸라기가 일고 변색된 종이를 무심코 집어 들었다. 아내 필적이다. 낙서다.
남편이 시를 못 쓰는 게 안타깝다. 대식구가 남편만 바라보고 사니 짐이 무거워 시를 못 쓰나보다. 남편이 시 쓰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데 명희는 남편에게 어떤 의미일까? 시아버지의 편지를 몰래 보지 않았다면 명희를 진짜 시누이인줄 알 뻔 했다. 오누이간의 정이 특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편의 시가 명희라면 나는 뭔가?
편지를 부지불식간에 떨어트렸다. 망연자실했다. 명희와 피를 나눈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은 건 충격이었다. 언제 알았을까?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불태우려다 차마 없애지 못했는데 그게 불찰이었나 보다.
아내가 추운지 기침을 했다. 낙서를 다시 앨범에 끼워 항아리 속에 넣은 후 뚜껑을 닫고 아내를 일으켰다. 복실이를 줄에 매어 놓은 후 집으로 내려왔다.
아내가 낮잠 잘 때가 되었는지 끄덕끄덕 졸기에 침대에 눕혀 이불을 여며준 뒤 주방으로 나왔다. 찬장을 뒤지니 보이차 병에 찌꺼기가 남아 박박 긁어 차를 우려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아내는 잠이 들었는지 기척이 없다. 차를 천천히 목으로 넘기며 명희의 기억을 떠올렸다. 혀끝이 쓰다 . 떠올리기도 아픈 기억이었다.
명희는 아버지가 데리고 왔다. 나보다 아홉 살이 어린 열다섯이었다. 나이보다 키도 작고 얼굴도 작고 손발도 새처럼 작았다. 한 눈에도 병약하고 왜소한 체구에 다리를 약간 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뜻이 맞지 않아 따로 살았다. 아니 어머니한테서 이쑤시개 대접도 받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 온 아버지가 결기 있게 집을 박차고 나간 것이다.
엄마는 장사 수완이 좋은 여장부였다. 장터에서 순댓국집을 했는데 손님들이 미어터져 돈이 가득한 앞치마가 임신한 여인처럼 불룩했다. 아버지는 구부러진 등으로 어머니 가게서 허드레 일을 했는데 바보인지 내공이 대단한 사람인지 헷갈렸다. 어머니가 휘둘러 대도 나무토막처럼 화낼 줄을 몰랐다.
덩치부터가 어머니는 아버지를 압도했다. 엉덩이도 쌀 한가마니처럼 컸고 손바닥도 두툼하고 목소리도 우렁차고 걸걸했다.
초등학교 다니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새벽에 깨어 화장실을 다녀오다 안방에서 두 분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아버지 목소리는 한 마디도 새 나오지 않고 비웃는 듯 한 어머니 목소리만 쨍쨍했다.
“혼자 나가서 살 수 있으면 살아 봐. 한 달도 못되어 기어들어 올 걸.”
찢어진 창호지 틈 사이로 안방을 몰래 훔쳐보았다. 아버지 얼굴이 기도하듯 엄숙하고 경건해 불현듯 신기했다. 깊은 밤 몰래 술 마시던 아버지를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무기력하고 뼈 없어 보이는 모습이 머리에 남아 아버지도 사람은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그 다음날 집에 오니 아버지가 없었다. 이미 집을 떠난 뒤였다. 어머니는 태산처럼 요지부동 아무 내색도 안 했다.
얼마 후 아버지가 산꼭대기에 월세 방을 얻어 노점을 하며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일이년인가 지나서는 맹하니 모자라는 여자와 살림을 차려 딸을 낳았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그런데 십 오년 만에 아버지가 명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비가 몽둥이처럼 쏟아 붓던 여름날이었다. 아버지는 정물처럼 툇마루 끝에 앉아 하늘만 바라 보았고 명희는 기둥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명희를 보고는 코웃음 쳤다. 얼음처럼 일별도 안했다. 길길이 뛰지 않았고 따져 묻지도 않았다. 그래선지 아버지는 일주일 후인가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어머니와 나에게 각각 유서를 남기고.
내게 남긴 유서는 어머니 것 보다 두툼했다. 명희 에미는 평생 따돌림 당한 나를 사람으로 존중해준 유일한 여자다. 갑자기 그 여자가 종적을 감춰 해소 병이 깊어 진 내가 명희를 기를 수가 없다. 아래가 기능을 못 해 그 여자랑 잠자리 한 적이 없기에 명희가 핏줄은 아니지만 불쌍한 애를 잘 돌봐 달라고 간곡히 써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명희를 잘 키우지 못했다. 중학만 졸업시킨 후 식당에서 부려먹었다. 명희는 고분고분했다. 식당 일이건 집안일이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종일 다리를 절룩절룩 끝없이 허드레 일 하면서도 뭘 사 달래거나 요구 할 줄도 몰랐다. 몸도 성치 않은 열다섯 살짜리가 고등학교도 진학 못하고 손이 트도록 일만 하는 게 안쓰러워 몰래 입학원서를 쥐어주며 시험을 쳐 보랬더니 쓸쓸히 고개만 저었다. 어머니가 무서워서 그러냐니까 아니라고 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저렇게 욕심이 없을까 싶었다.
언젠가는 부뚜막 앞에서 울고 있기에 소리 없이 다가 가 두 어깨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명희의 심장이 바르르 떠는 게 전해져왔다. 더 따뜻하게 깊이 껴안으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때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에 고개를 드니 아내였다. 아내는 소리 없이 우리 둘을 물끄러미 보다 역시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졌다.
그 뒤 교원 발령 받고 서울로 올라와서도 명희가 밟혔다. 그 감정이 무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남들은 명희가 빈약하다는데 자신에겐 가득 차 보이는 이유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인생은 불가해하다더니 납득할 수 없는 일도 종종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동정과 연민과 안타까움이라고 하기엔 스펀지에 잉크가 빨려들 듯 아이의 텅 빈 눈빛이 가슴 속에 가득 들어앉았다.
스물일곱에 세 살 아래 아내와 맞선보고 혼인 말이 나왔을 때도 명희가 걸렸다. 무덤에 갈 때까지 오빠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에서 명희를 뽑아 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명희와 한 집에서 칠년을 살았다. 식당이 안 되어 어머니가 시골집을 정리 한 후 서울로 오게 되어 조그만 단독주택을 사서 살림을 합쳤다.
“당신네 오누이는 특별해. 서로 교감 하는 것 같아.”
결혼한 뒤 몇 해 지나서 아내가 지나가는 말처럼 교묘한 말을 했다. 허긴 그랬다. 명희는 아내보다 나에 대해 잘 알았다. 사소한 예로 내 바지 밑단이 뜯어져 있으면 그걸 제일 먼저 알아채는 사람은 명희였다. 술이 취해 들어오면 슬그머니 약을 사다 손에 쥐어주고 꿀물을 타다 줬다. 또 겨울이면 쉬지 않고 목도리와 장갑 조끼를 뜨개질 해 소리 없이 내 방에 갖다 놓곤 했다.
명희는 그러다 스물다섯에 세상을 떴다. 폐렴이었다. 명희의 마지막 날 병원을 찾아갔었다.
“오빠, 그동안 잘 해줘서 고마워요.”
명희의 얼굴은 하얬다. 푸른 정맥이 드러난 가냘픈 목을 창밖으로 돌렸다. 조심스럽게 명희를 병상에서 일으켰다. 얼마나 야위었는지 사그라져 가는 몸이 재 같았다. 핏기 없는 입술이 안쓰러워 명희의 백에서 주홍색 립스틱을 꺼냈다.
“입술이 창백해.”
명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끝에 힘을 모아 수를 놓듯 정성껏 입술을 칠 해 주었다. 명희는 애기 살결처럼 피부가 깨끗해 립스틱을 바르니 얼굴이 꽃 같아졌다. 거울을 손에 쥐어주자 안간힘 쓰듯 배시시 웃더니 통장을 살그머니 손에 쥐어주었다. 부수입이 있을 때마다 아내 몰래 명희 손에 비상금을 주었는데 그것을 안 쓰고 모았나보다.
갑자기 명희가 숨을 헐떡이며 손을 허공으로 올렸다. 내가 그 손을 꼭 잡아주자 안심하듯 숨소리가 평화스러워지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명희의 숨이 끊어진 것을 알면서도 명희를 꼭 안고 내려놓지 못했다. 내가 퇴근해 올 때까지 명희가 생명을 연장하며 기다린 것 같아 더 가슴이 시렸다.
명희가 떠난 뒤 오빠하고 부르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와 밤에라도 납골당을 찾아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있었다. 자리에 눕는데 베개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 꺼내보니 부적이었다.
“이게 뭐요?”
“당신 속에 들어있는 환영을 떼버리려는 거예요.”
아내는 애써 담담하게 대꾸했는데 나는 어색해져서 고개를 돌리며 못들은 척 해버렸다.
그 뒤 알츠하이머 씨가 찾아오자 아내는 명희와 같은 주홍색 립스틱을 발랐다. 머리도 명희와 같이 단발머리를 했다. 명희의 기억이 문신처럼 각인되어 떨어지지 않나보았다. 평생 아내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진 걸까?
나는 바닥에 조금 남은 보이차를 마저 마셨다. 오래 되어 그런지 향기가 덜했다. 아내는 꿈을 꾸는지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걱정스러워 어깨를 흔드니 희미하게 눈을 떴다.
“잘 잤소?”
“당신 내가 죽기를 바랐지?”
아내가 돌연 내쏘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꿈에 당신이 나보고 죽으라고 했어.”
“개꿈이야. 정신 차려.”
“내가 다 알어. 날 속이지 마.”
아내가 앙칼지게 다시 추궁했다.
“고만두지 못 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악을 쓰니 아내가 갑자기 훌쩍훌쩍 울었다. 가슴이 저릿하다.
“아들들 보고 싶어.”
아내가 말머리를 돌렸다.
“다들 미국 갔다고 했잖아? 잊어버려.”
짐짓 화를 내며 더 하고 싶은 말을 꿀컥 삼켰다. 자식 얘기만 나오면 마음이 수십 가닥이 다. 속이 텅 빈 대나무처럼 다 비우고 살자 해도 쓸쓸하다. 아내는 아직도 아들 둘에 대한 집착을 어쩔 수 없나보다. 뱃속에 열 달을 품어 키워 낸 자식들이니 그리움을 떨쳐 내기가 쉽지 않으리라.
아이들 키울 때 힘들었다. 큰 아들 학원비를 마련하느라 스물 네 시간을 쪼개 과외를 했다. 작은 아들은 아토피와 발육부진으로 병원을 끼고 살았다. 고 삼, 대학 입학. 대학 졸업. 군대 . 취직. 결혼까지 마음 놓을 새가 없었다. 결혼시켜 한시름 놓았더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결국 자식도 떠나고 친구도 떠나고 아내만 남았는데 그 아내가 온전치 못하다. 이런 게 인생일까?
“나 칼국수 먹고 싶어.”
“날씨가 꾸물거리니 나도 뜨거운 거 먹고 싶네. 나갑시다.”
아내 말에 선선히 동의했다.
“나가면 립스틱도 하나 사줘요. 백화점에서 제일 예쁜 걸로.”
“알았소. 나갈 채비 합시다.”
아내 기저귀를 갈아주고 겉옷을 입혀주었다. 따뜻한 목도리를 귀까지 둘러주고 아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해가 설핏 지려하고 있다. 저녁이다. 공기 속에 비가 섞인 것 같은 날씨다. 한 차례의 바람이 불자 나무에 매달려 있던 나머지 잎들이 맥없이 떨어졌다. 인파에 섞여 아내 손을 꼭 잡았다. 빌딩 숲과 꼬리를 무는 자동차들 사이를 긴장하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백화점이 저만치 보였다.
“명희와 똑같은 거 사줘야 해.”
아내가 상기된 얼굴로 또 명희 얘기를 했다. 역시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게 상책이다.
“다른 것도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삽시다.”
아내의 관심을 다른 데로 유도하며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품 코너 쪽으로 걸어갔다. 아내는 립스틱을 한 달이면 두세 개를 썼다. 병이 든 뒤 부러트려서 못쓰게 만든 것만도 수 십 개가 넘었다.
아내의 발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진열해 놓은 립스틱 중에서 예전 것과 같은 주홍색 립스틱을 집었다. 명희가 바르던 그 색이다. 똑같은 색의 립스틱을 집어내는 게 불가사의다. 아내는 립스틱이 맘에 드는지 눈 깜작할 사이에 주머니에 넣었다. 순식간의 일이다
“그거 주세요. 계산부터 하셔야죠.”
여직원이 짜증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순간 아내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우악스럽게 여직원의 손등을 물었다. 여직원이 기겁을 해서 비명을 질렀다,
“미안합니다. 여기 카드 있으니 계산해줘요.”
아내의 주머니서 립스틱을 꺼내 카드와 함께 여직원에게 내밀었다. 사인을 하고 카드를 받아 몸을 돌렸다. 그런데 아내 모습이 없다. 근처를 훑어봐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부랴부랴 일층을 샅샅이 돌았다. 여전히 아무 곳에도 없었다. 안내원에게 신고 한 후 이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없다. 미친 듯 삼층에서부터 십층까지 오르락내리락 했다. 아내의 행방은 묘연했다. 지하 주차장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식은땀이 나왔다. 혹시라도 사고가 났을까봐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번화한 네거리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을까? 실성했다고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우는 건 아닐까? 혹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차에 태워 낯모르는 곳으로 끌려간 건 아닐까?
불길한 상상을 하니 피가 곤두박질하는 것 같아 억지로 숨을 고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횡단보도 근처를 헤맸다. 육교 위로 올라가봤다. 역시 없다. 아내의 의미가 태산처럼 다가왔다. 아내 없는 세상을 살아낼 것 같지가 않았다. 아내는 세상의 전부다. 내 곁에 있을 사람도 아내뿐이고 아내 옆에 있을 사람도 나뿐이다. 나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평생 나를 지켜준 사람도 아내였다, 기쁜 일 슬픈 일을 공유하며 반세기 가깝도록 살아왔다. 아내와 비교될 건 이 세상에 없다. 애증이 섞인 사소한 나날이 소중했다. 일상의 소소하고 나직한 삶들이 보석이었다.
저절로 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침통했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나는 갑자기 큰아들이 병원 하던 자리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백화점에서 멀지 않았다. 아! 아내가 거기 있었다. 커피 집으로 바뀐 가게 담벼락에 앉아 코를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 줄달음쳐 뛰어 가 아내를 와락 껴안았다. 아내가 얼굴을 들었다. 초점 잃은 눈초리가 나를 알아보더니 폭풍처럼 목 놓아 울었다. 나도 으스러져라 아내를 껴안았다.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아들은 미국 갔어. 여기 없어.”
아내를 일으켰다. 아내는 대답대신 소매 끝으로 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도 손으로 아내 눈물을 씻어주었다.
“고마워. 여보, 살아 있어 고마워.”
아내는 말귀를 다 이해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한테 립스틱 발라주고 싶어.”
주머니서 립스틱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아내는 기꺼이 입술을 내밀었다. 선을 따라 정성껏 그려주니 입술이 생동감 있게 피어났다.
“당신 입술이 시집오던 날처럼 예뻐.”
진심으로 아내를 칭찬했다. 마음속으로 새롭게 다가오는 아내가 배꽃처럼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자. 업혀. 집에 가자. 가서 칼국수 해줄게.”
“나 무거워요.”
아내의 차분한 말투가 다행이다. 고맙다.
“그래도 업고 싶어.”
아내를 업었다. 얼마 안 되는 몸피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무거웠다. 아내의 온기가 몸으로 느껴졌다. 그를 산처럼 떠억 믿고 있는 아내의 마음이 전달되어 왔다. 몇 발자국 걸었다. 전신으로 퍼지는 안도감에도 불구하고 발이 헛놓였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다리도 후들거려왔다. 오른 쪽 발목이 아릿하다. 가슴도 옥죄였다.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눈을 크게 떴다. 택시 정류장 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다. 아내를 업은 두 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여보.”
아내는 대답이 없다. 고단해서 잠이 든 걸까? 목을 감싼 아내 손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나의 시요. 내 시는 바로 당신이었어. 당신은 하늘 아래 가장 소중한 사람이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내는 완전히 잠들었는지 숨소리가 새액새액 고르게 들려왔다. 나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환한 불 빛 쪽으로 걸어갔다.
<수상소감>
구원처럼 짝사랑 한 소설
신 새벽 꽃망울 같았던 당선통지.
자주 고통스러워 절망했다. 소설을 구원처럼 짝사랑 하는데 왜 곁을 안 줄까? 그런데 왜 나는 평생 소설을 껴안고 있을까? 떨어지고 떨어지고 미끄러지고 그러면서도 늘 기어오르던 날들.
이 크고 무섭고 외로운 세상에서 나를 구원하는 건 문학이라고 믿었기에 누가 뭐라 해도 턱없이 경건하게 원고지 칸을 메웠다. 재능이 없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기에 남보다 몇 배 갈고 닦아야 한다고 자신을 부추기며 밤을 새웠었다.
하룻밤 자고나니 기쁨 끝에 미열과 멀미가 매달렸다. 뒷감당 할 수 있을까? 내가 세상을 읽어내고 인간을 두텁게 이해하고 있나? 나만의 세계 나만의 목소리로 인생을 풀어낼 수 있을까 두려워졌다.
그래도 앞으로는 작은 꽃망울이 신성한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갈팡질팡 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고 싶다. 그전에는 혼자 쓰고 혼자 읽었는데 이제 내 글을 누군가가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 읽어준다고 생각하면 단어 하나도 허투루 쓸 수 없을 것 같다. 공부가 덜 되어 미숙하니 욕심 부리지 않고 작은 산부터 하나씩 넘어 큰 산에 도달하겠다.
오래 산다는 것이 뭘까
이것이 요즘 나의 화두다. 고령화 시대의 사람 사는 얘기를 줄을 잘 골라 깊고도 담백하게 그려내고 싶다. 심금을 흔드는 가야금 한 곡조처럼.
문학이 뭔지 올곧게 가르쳐주신 숭의여대 문창과 교수님들께 꽃다발 올리고 싶다. 모른 척 지켜봐 준 옆지기와 가족들. 발판을 마련 해 준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던 윤후명 선생님. 늘 격려해주신 남지심 선생님. 좋은 기운을 불어 넣어주신 박몽구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어여쁜 도반님들( 종숙. 상숙. 하순. 용희. 현숙, 미숙. 형은. 미정)에게 맛있는 거 사고 싶다. <시와 문화> 문우님들과 그 외 내가 인연 맺어 온 모든 사람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한다.
심사해주신 선생님들 더 좋은 글 쓰라는 채찍으로 알겠습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습니다
마선숙/ 2013년 《시와문화》 시, 2014년 《불교문예》 소설 등단.
첫댓글 마선숙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
축하드립니다. 4월 19일 행사장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