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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서는데, 낮은 구름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다.
2주만에 만나는 가불산과의 데이트, 비는 오지 않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내일부터 전국적으로 비가 내릴거라는 기상청의 발표를 믿고 싶어진다. 천수경 독경이야 경전을 보고 따라 읽으면 되지만, 회장님의 불교에 대한 해박한 설명을 미흡한 방송시설 탓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 해 좀 아쉬움으로 남는다. 버스는 생초에서 고속도로를 버리고 좁은 국도로 들어서는가 싶더니, 이내 지리산 외곽 일주도로를 타나보다. 차창으로 비껴가는 이정표에 적힌 지명이 함안군에서 남원으로 바뀌고, 눈에 익은 지명들이 나타난다. 마천, 칠선계곡, 백무동, 한신계곡, 세석, 실상사, 벽소령, 뱀사골, 심원계곡..... 좌우로 녹음이 절정에 달한 초록 숲이 이어지고, 왼편에는 경호강에 합류되는, 마천에서 발원한 엄천강과 심원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만수천이 그 폭을 넓혔다 좁혔다를 반복하며 우르릉 쾅쾅 소리를 내며 시원스레 흘러 내린다. 11시경 드디어 해발 1,070m 성삼재주차장에 도착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기상대의 발표가 무색하게 남부지방에는 마른장마가 일주일째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어느덧 하늘은 구름을 조금씩 닦아내며 파란하늘이 얼핏얼핏 초여름 햇빛을 내비치는 맑은 날씨를 보인다. 휴게소 앞마당에서 간단한 상견례 후, 삼삼오오 무리지어 둥글둥글 머릿돌길을 따라 노고단으로 향한다. 모두들 기대와 설레임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하는 표정들이 아름답고 발걸음이 가볍다. 안면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능선마루에 올라서니 오른편으로 노고단 봉우리 돌탑이 보이고, 그곳까지 뻗어나간 나무계단을 따라 한무리의 등산객들이 오르고 내린다.
키 큰 나무는 누가 뽑아 내리기라도 했는가. 잔디밭 동산처럼 거칠 것 없이 시원스레 노고단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신라시대 화랑도들이 말을 달리며 훈련했고, 일제시대에는 네덜란드 선교사들이 별장지로 이용했다더니 이 높을 곳에 완만한 구릉모습을 하고 있는 양이 여성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진입로 문을 통과하려니, 지난해 가을 이곳을 통제하던 관리공단 직원과의 말다툼하던 일이 상기되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에누리 없이 100명만 잘라서 들여보내겠다는 직원과 몇 명 안되는 사람이니 추가로 좀 들어가자던 내가 옥신각신 했던 것이다. 결국 규칙을 고수하던 직원에게 졌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언성을 높였던지, 이렇게 흐르는 시간과 더불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을.... 그런 경험으로 인해 오늘의 이 노고단 밟기가 더 가치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산상의 화원이라는 이곳에는 수십종의 야생화가 서식하며 운해와 어우러져 지리산 10경에 속한다고 했다.
북동쪽으로, 엎두린 여인의 둔부를 닯았다는 반야봉은 쉬 눈에 들어오건만 천왕봉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구름속에 파묻혀 버린다. 산아래 구례읍내와 섬진강은 희뿌옇게 보이지만, 무등산도 보이지 않는다. 정상을 밟은 회원들은 저마다 늙은 시어미(老姑) 정상석에 안겨 기념사진을 남기고..... 목재난간에 기대어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에 온 몸을 맏겨본다. 이시간 이곳에 서있는 나, 그 무엇이 부러울게 있으랴. 잠시나마 한량없는 행복감을 느껴본다. 혼자서......
코재, 중재를 지나는 화엄사로의 5.7(?)Km 계곡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물소리가 함께 해 주었다. 그 길은 돌길이었고, 그늘 길이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는데, 깨끗하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풍류에 젖어들거나 머리를 푹 담가 땀을 씻어내는 회원들도 보인다. 모두가 동심이라도 되찾은 듯, 화사한 표정이다.
천년고찰 화엄사 경내는 적지않은 관광객이 모이지만, 전혀 혼잡하거나 소란스럽지 않은 고즈넉한 모습이다. 각황전, 대웅전을 비롯한여 국보로 지정된 석등, 석탑, 일주문, 금강문, 돌계단과 양 옆의 소나무까지 무엇하나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귀중한 문화재들이다. 회장님의 말씀마따나 어느 한군데, 한구석 지극정성이 안들어간 곳이 없어보인다. 자귀나무꽃이 화사하게 연이어 핀 포장도로를 따라 주차장에 닿으니,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음식을 퍼주고 계신 회장님, 총무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보시가 따로있나, 저분들이 보여주는 저모습이 바로 상구보리하는 자세려니..... 하산주를 마치고, 지리산의 동,북쪽을 돌아 입산했던 우리들은 서,남쪽으로 지리산을 한바퀴 빙 감아 돌아 귀가 길에 올랐다.
200여리 길을 조용히 흘러 내려온 섬진강은 남도의 서산 넘어로 지는 해가 부시지 않을 정도로 반짝거리고, 차밭을 스치고, 솔밭을 스치며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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