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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차가운 심장, 뜨거운 심장
- 마커스 보그의 <기독교의 심장>
“기독교의 심장에는 심장의 길, 곧 우리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변화시키는 오솔길이 있다. 기독교의 심장에는 하나님의 마음, 곧 우리가 변화되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열정이 있다. 기독교의 심장에는 하나님의 열정에 참여하는 삶이 있다.”(340)
• 패러다임 변화
욕먹는 게 아픈 게 아니라, 욕을 먹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더 아프다.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는 어느 교회가 수천억을 들여 교회를 짓는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온다. 사정이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 사정이 바깥사람들에게는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 소설가 이승우의 <연금술사의 춤>에 나오는 공본영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너희들, 십자가를 끌어내려 목에다 걺으로써 탐욕스런 육체를 장식하듯 음란하고 부패한 영혼에다 종교를 장식하는 너희들, 예배 행위를 무슨 친교 모임이나 고상한 취미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는 너희들. 신(神)이, 너희의 썩어문드러진 영혼의 무덤을 은폐하기 위한 회(灰) 외엔 아무것도 아닌, 너희들의 타락을 더 어떻게 참으랴." 신랄하다. 그런데도 유구무언이다. 소설에서 이야기의 화자는 황금빛 십자가를 보며 “'십자가'가 지향하는 초월성과 '황금'이 가리키는 속물성간의 저렇듯 무리 없는 접합, 그 부조화한 간통”이 이 시대의 초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이 땅에서 쇠퇴하고 말 것인가? 많은 이들이 내놓는 전망은 우울하다. 겨울숲보다 더 황량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세상 구석구석으로 나르는 살아있는 유기체를 보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심장이 차가워졌다는 말이다. 멎기 직전이다. 차가워진 심장을 뜨겁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말(末)을 붙좇던 삶에서 돌이켜 본(本)을 꼭 붙들어야 한다. 그 본을 붙잡기 위해서는 좋은 길 안내자가 필요하다.
오레곤 주립대학의 종교와 문화 교수이면서 예수 세미나의 대표적 성서학자인 마커스 보그의 책 <<기독교의 심장>>(The Heart of Christianity)은 우리가 참고해도 좋을만한 지도이다. 역자가 'heart'의 번역어로 '핵심'이 아닌 '심장'을 택한 것은 어쩌면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절박함과 아울러 교회를 새롭게 할 길을 찾았다는 기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의 심장은 무엇인가? 오늘날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9) 이 책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2부 11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제1부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신앙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 차원들을 밝히는 동시에 성서, 하나님, 예수라는 기독교 전통의 심장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제2부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핵심적인 내용은 중생, 하나님의 나라, 죄와 구원, 수행, 다원주의의 문제 등이다.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저자는 '보수주의적 기독교'와 '자유주의적 기독교'를 나눴던 지금까지의 구분법은 급변하고 있는 이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본다. 현대 이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과학, 역사학, 종교 다원주의,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지평 가운데서 사고할 것을 요청받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시대마다 재구성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런 과제를 수용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해서 저자가 채택한 용어는 '과거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두 패러다임을 가르는 기준은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성서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 본다. 성서무오설은 이런 관점의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관점을 가진 이들은 성서를 '사실적-문자적'으로 이해한다. 신앙도 내적인 변화보다는 '믿는 것'이 중심이 되고,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내세에 집중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패러다임이 기독교 고유의 전통이라는 사람들의 통념을 뒤집는다. 이러한 기독교 이해 방식은 사실은 현대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 분기점이 된 것은 계몽주의이다. 계몽주의는 '사실성'을 참됨의 기준으로 보았기에 성경의 참됨을 주장해야 하는 이들은 성경의 언어를 '사실'의 언어로 제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의 패러다임은 기독교 고유의 전통이라기보다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여러 방식 가운데 하나라 말할 수 있다(30). 저자는 이런 기독교 이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성서에 대한, 그리고 기독교적 삶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특색을 '역사적', '은유적', '성례전적', '관계적', '변혁적'이라는 다섯 가지 형용사를 가지고 설명한다.
• 새로운 신앙의 세 기둥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전에 저자는 '신앙'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다양한 층위의 의미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는 동의로서의 신앙(faith as assensus)이다. 이것은 교리나 신조 등에 대한 동의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반대어는 '의심' 혹은 '불신앙'이다. 둘째는 신뢰로서의 신앙(faith as fiducia)이다. 신뢰는 '철저한 맡김'이다. 불안과 공포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신뢰하는 것”(55)이 곧 신뢰이다. 반대어는 ‘불신(mistrust)’이지만 이것은 늘 ‘걱정’과 ‘염려’로 나타난다. 셋째는 충실함으로서의 신앙(faith as fidelitas)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책임적 신앙으로 표현된다. 반대어는 ‘배신(infidelity)’이고 성서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상숭배'이다. 넷째는 보는 방식으로서의 신앙(faith as visio)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관련된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의 궁극적인 무대를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은총이 넘치는 것으로 본다. 이 네 가지 이해방식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서로를 보충해 주기도 한다. 신앙의 중층적 의미를 천착하고 있는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이다. 흔히 '믿음'이란 불확실한 주장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나는 믿는다'에 해당하는 라틴어 '크레도(credo)'는 "나의 심장을 바친다'(69)는 뜻이다. 믿는다는 말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차원을 봉헌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믿는다'는 말이 어떤 선언이나 명제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한정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이다.…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신앙은 심장의 길이다."(71)
성서는 기독교인의 기초 문서이고 정체성 문서이고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기독교 전통의 심장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성서가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 곧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이라고 본다. 따라서 성서는 상대적이며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진 문서이다. 성서는 기록될 당시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언어와 개념들을 사용했기에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접근이 필요하다. 해석자들은 본문을 산출하고 전승해온 공동체에게 그 이야기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신앙 공동체는 '역사적 기억'과 '은유적 이야기'를 결합시켜 자기들의 하나님 체험을 전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은유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은유를 통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은유적 언어 속에 내포된 사람들의 내밀한 체험을 읽어내는 해석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성서는 또한 성례전적으로 읽어야 한다. “성례전이란 거룩함을 전달해주는 유한하며 물질적이며 눈에 보이는 매개물(visible mediator)”(96)이다. 성서의 말씀은 "성령이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말씀하시는 수단이 된다"(97).
저자에게 있어 하나님은 실재의 심장이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확고한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 '그 이상', 실재의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이 종교적 세계관의 핵심이다. 하지만 신을 원본 없이 존재하는 그림자, 곧 시뮬라크르로서 이해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는 "하나님이 실재하는가?"라는 물음에 아주 확고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신의 실재를 증명하는 일이 불가능하기에 그는 신의 실재를 암시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신의 실재를 집단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세계 종교들, 다양한 종교 체험에 대한 보고가 그것이다. 현대 물리학도 '그 이상'의 세계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을 사람과 비슷한 인격적 존재로 보는 초자연적 유신론(supernatural theism)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이다. 그는 범재신론(panentheism)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을 둘러싸고 계신 영으로서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분이다. 저자가 보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보상으로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는 군주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그들을 자비의 길로 초대하는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다. 기독교는 요구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관계와 변화에 관한 것이다(129).
예수는 하나님의 심장이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색은 “하나님의 계시를 일차적으로 한 인격(a person) 속에서 찾는다는 점”(131)이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신앙의 예수 중심성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죽음을 통해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라고 믿는 과거의 패러다임은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부활절 이전의 예수를 유대교 신비주의자, 치유자, 지혜의 스승, 사회적 예언자, 하나님 나라 운동의 창시자로 본다. 그에게 부여된 기독론적 칭호들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진술이 아니라 부활절 이후의 예수 체험에서 비롯된 고백들이다. 기독론적 표현들은 실체에 대한 지시가 아니라 뭔가를 가리켜 보인다는 측면에서 은유적이다. 따라서 해석을 필요로 한다. 예컨대 "예수는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다"라는 고백은 "성전의 용서 독점권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의 독점권을 부정하는"(156) 체제전복적 은유이다. '주'라는 고백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정치적 차원을 잃어버린 한국교회가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 새로운 삶의 여섯 기둥
기독교 신앙의 심장을 붙든 기독교인들의 삶의 특색은 변화이다. 성경은 옛 사람에 대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가리켜 중생이라 일컫는다. 물론 중생은 일차적으로는 개인적-영적-인격적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보다 깊은 뜻이 있다. 그것은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고 주어지는 옛 자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체성과 존재로 이행하는 것과 관련된다. 저자는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중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나 자신에게 하나님의 실재를 환기시킴으로써 나는 때때로 존재의 가벼워짐을 느끼는데, 이것은 나의 자기집착과 짐처럼 느껴지는 감금상태에서 벗어남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무덤으로부터 나오도록 부름받고 있다."(189)
이처럼 거짓 자아로부터 벗어나 중생한 사람의 특징은 ‘함께 아파하는’(compassion) 연민이라 할 수 있다. 연민은 생명을 낳고, 양육하며, 포옹하는 마음이다(195).
마커스 보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나라는 공동체적-사회적-정치적 변화와 관련된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억압적이고 인습적인 사회 체제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예수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가 일상화되고 종교가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기존 체제를 부정한다. 하나님 나라는 탈세계적 비전이 아니라 이 땅의 현실을 변혁시키는 강력한 비전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옹호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담론은 오늘도 힘으로 지배하려는 제국의 담론에 맞서 의료 보장, 환경 보존, 경제정의, 힘의 남용 금지 등을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영적인 변화와 더불어 정치적인 변혁 모두를 강조한다(230).
기독교인의 삶이 관계를 맺는 삶이며 변화된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저자가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얇은 곳"(thin places)이라는 표현이다. 저자는 닫힌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간적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얇은 곳'이란 실재의 두 차원 사이의 경계선이 부드러워 서로 스며들고 투과할 수 있게 되는 장소(241)를 상징한다. '장소'라 말했지만 그것은 자연 혹은 광야처럼 지리적 공간일 수도 있고, 문학과 예술일 수도 있고, 인생의 한계상황인 질병이나 고통 혹은 애도의 순간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이런 얇은 곳을 통해 활동하신다. 예배는 얇은 곳을 창조하는 일이다. 신앙을 통한 마음의 변화, 곧 자아가 하나님과 신성함에 대해 열리는 것을 가리켜 저자는 '마음의 부화(孵化)(238)라 일컫는다. 부화된 마음의 특색은 공감의 능력이며,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저자는 죄와 구원이라는 전통적 가르침이 때로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죄는 휴브리스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멀어짐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인간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성서가 제시하는 이미지 곧 눈멂, 유배상태, 묶임, 닫힌 마음, 굶주림과 목마름, 길 잃음 등을 포괄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 죄에 상응하는 이미지는 '용서'인데, 용서라는 단어가 과연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일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행위의 결과인 경우도 있지만 사회에 의해 부과되거나 구성된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죄와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순간 우리는 구조의 문제에 대해서 눈을 감고 내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구원이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온전함’, ‘치유’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왔고, 성서에서 중심적 모티프가 되는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백성,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구원이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에 관한 이야기(276)라는 말이다.
기독교인의 삶이 관계를 맺는 것이고 또 변화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꼭 필요한 것은 ‘수행’(practices)이다. 신앙과 행위를 구분했던 개신교 전통은 수행을 소홀히 해왔다. 하지만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고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서, 기독교인의 정체성과 성품을 형성하기 위해서, 양육되기 위해서, 함께 아파하며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그 길’을 살아내기 위해서(288) 수행은 필수적이다. 저자는 매우 실천적인 수행의 길을 제시한다. 수행의 기본은 교회에 소속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현대 문화가 제시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삶의 비전을 확증하는 기억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기도, 명상, 묵상, 독서, 봉사, 일상의 성화에 참여할 때 비로소 새로운 존재의 길로 접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 다원주의 시대
이제 남은 질문이 있다. ‘내적 변화의 길’을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면, 믿음이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왜 하필 기독교인인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다른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다양하다. 하지만 거칠게 범주화하자면 종교에 대한 절대주의적 이해와 종교에 대한 환원주의적 이해로 나눌 수 있겠다. 종교에 대한 절대주의적 이해는 구원은 오직 우리에게만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은 자기 경전과 교리들을 절대화함으로써 종교적 배타주의의 길을 걸어간다. 그들은 다른 종교를 대화의 파트너로 보기보다는 개종의 대상으로 본다. 종교간의 충돌은 당연하다. 종교에 대한 환원주의적 입장은 “종교를 인간이 만들어낸 것(invention)”으로 간주한다. 사람들이 종교를 만든 것은 “강력한 심리적 및 사회적 필요성 때문”(319)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종교는 오류일 따름이다.
저자는 종교를 성례전적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종교는 인간의 구성물이지만 신성한 하나님체험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에서 환원론과 구별된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전제가 있다. 그에게 “오래된 종교들은 모두 ‘절대적인 것’의 매개자이지, ‘절대적인 것’ 자체가 아니다”(325). 이 말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종교가 신성한 실재를 가리키고 참된 삶의 ‘길’을 가리킨다면 왜 우리는 꼭 기독교인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객관적인 대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대답을 할 뿐이다. 기독교전통과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도와준 오솔길인 동시에 친숙한 생활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는 고백은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헌신과 사랑의 표현이다. 신앙의 언어는 고백이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논란의 소지가 많지만 이것이 마커스 보그의 고백이다.
반지성적이고 독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오늘의 교회는 어쩌면 니체가 말하는 ‘신의 무덤’인지도 모른다. 예수의 뜨거운 심장이 ‘교리와 신조’라는 차가운 심장으로 대체되면서 기독교는 삶의 변화와 역사 변혁의 종교가 아닌 비정치적인 종교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커스 보그는 상투적인 신앙언어의 외피를 벗기고, 그 언어 속에 담긴 생동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매우 도전적이지만 개인의 신앙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적실하게 느껴진다. 신학적 토론이 증발되어 버린 채 상투적인 신앙 언어만이 앵무새처럼 되뇌어지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보그의 <<기독교의 심장>>은 이제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 정직하게 재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서평 / 김기석
1장
변화하는 시대에서 기독교의 심장
기독교의 "심장"은 무엇인가? 기독교와 기독교인의 삶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마다 제기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우리 시대에 특히 중요한 질문이다. 기독교를 새롭게 보는 방식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이 세계 교회 속에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은 지난 몇 백 년 동안 기독교를 이해했던 지배적인 방식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우리 시대는 갈등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런 변화와 갈등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심장"은 무엇인가?
모든 훌륭한 은유들과 마찬가지로, "심장"을 뜻하는 영어 단어 heart도 여러 의미가 있다. 우선 가장 중심적인 것을 뜻한다. 기독교의 핵심, 골자는 무엇인가? 기독교와 기독교인의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만일 '핵심'과 '본질'이 너무 추상적이며 생기가 없는 것이라면, '심장'을 뜻하는 heart는 유기적 은유로서, 살아 있으며 박동을 치는 생명의 근원이다. 기독교의 심장, 그 생명과 활력의 원천으로서 그것 없이는 기독교가 죽고 마는 것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머리와 가슴"이라는 말에서처럼, heart는 지성과 사고의 세계보다 더욱 깊은 무엇을 가리킨다. 기독교에서 그 특정한 사상과 믿음체계보다 더욱 깊은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우리의 '가슴'의 차원에 도달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슴은 자기의 가장 깊은 차원으로서 변화의 '장소'이다. 이처럼 기독교에서 사람들을 '가슴'의 차원에서 변화시키는 힘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변화와 갈등의 시대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심장에 관해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큰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즉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심장을 새롭게 이해하는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에 과거의 기독교 방식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도 수백만 명에 달하는데, 이들은 흔히 과거의 기독교 형태가 "전통적" 기독교이며 유일하게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이라고 우긴다.
나는 이처럼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두 가지 방식을 무엇이라 부를까 고심하다가 "과거의"(earlier) 방식과 "새로운"(emerging) 방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가 이런 명칭을 붙인 의미는 이 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동안 "보수주의적" 기독교인과 "자유주의적" 기독교인으로 구분했던 익숙한 방식은 이제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이 두 용어가 모두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적" 기독교인들에는 미국의 부흥사 제리 폴웰과 패트 로버트슨에서부터, C. S. 루이스와 (아마도) 칼 바르트까지 포함될 것이다. 루이스와 칼 바르트는 제리 폴웰과 같은 부흥사들을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한편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 강하게 인식하며 기독교 전통에 대해 깊이 헌신하는 기독교인들로부터, "전통"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비유신론적(nontheistic) 기독교를 주창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보수주의적"이란 용어와 "자유주의적"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제대로 구분하는 용어가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새로운 방식에는 보수주의적이며 전통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다. 즉 새로운 방식은 기독교 전통을 회복하며 새롭게 전망한다는 점에서 전통을 유지한다. 또한 과거의 방식에도 혁신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다. 즉 과거의 방식이 보여주는 가장 특징적인 요소들은 지난 몇 백 년 동안 만들어진 것들이다. 사실상, 과거의 방식과 새로운 방식 모두가 현대의 산물인데, 이런 사실은 조금 있다가 설명할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유일한 기독교 전통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과거의 방식과 새로운 방식 모두는 기독교 전통을 이해하는 방식들이다.
기독교를 이해하며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과거의 방식과 새로운 방식 사이의 차이점들은 구체적인 갈등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보다 기본적인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즉 성서, 하나님, 예수, 신앙, 기독교인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우선 오늘날 교회를 분열시키는 구체적인 문제들부터 살펴보자.
* 여성 안수: 기독교인의 과거의 방식은 여성에게 성직자 안수를 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많은 집단에서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은 여성에게 안수를 하고 있다. 개신교 주류 교단들에서 여성 성직자(감독 혹은 주교를 포함해서)의 숫자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주류 교단 신학교에서 학생들의 과반수 이상이 여성들이다.
* 동성애자: 기독교의 과거 형태는 계속해서 동성애를 죄로 간주한다. 그 안에서 동성애 기독교인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금욕하거나 이성애로 전환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새로운 형태에서는 성적으로 활발한 동성애자들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다. 지금 논쟁이 되는 문제는 동성애자들이 파트너와 헌신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그들이 혼인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그들이 성직자로 안수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데, 이런 논쟁은 몇 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문제이다.
* 기독교 배타주의: 세상에는 단 하나의 참된 종교만 있으며,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뿐인가? 아니면 참된 종교는 여러 종교가 있으며 구원에 이르는 길도 여럿인가? 기독교의 과거의 방식은 기독교가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하고 있다. 미국에서 2002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단 17%만이 "나의 종교만이 유일하게 참된 종교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했다. 이들 대부분은 과거의 기독교 방식을 주장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78%는 동의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새로운 기독교 형태에 전형적인 대답이다.
이처럼 구체적인 차이점들 밑에는 성서와 그 권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보다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갈등이 깔려 있다. 기독교의 과거의 방식은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진리"로 보아 절대적이며 불변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이들은 위에 설명한 변화들을 성서의 구절들에 도전하는 것으로 본다. 즉 (1) 여성 안수 문제는 여성들의 종속과 남성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금지시킨 성서 구절에 위배되며, (2) 동성애 문제는 동성애 행위를 죄로 선포한 성서 구절에 위배되며, (3) 기독교 배타주의 문제는 예수를 구원의 유일한 길로 선포한 성서 구절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성서 구절들이 모든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은 성서의 권위와 해석 문제에서 매우 다른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도 매우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통계 증거가 있다. 1963년 미국에서 실시된 갤럽조사에서는 거의 2/3 (65%)가 성서 문자주의(biblical literalism)를 지지했다. 즉 "성서는 하나님의 실제 말씀이며 축자적으로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약 40년 뒤, 2001년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이 주장에 동의한 사람들이 27%로 떨어졌다.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성서 문자주의가 북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새로운 방식은 이런 발전을 환영하지만, 과거의 방식은 이것을 전통 기독교를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오늘날 이런 변화와 갈등의 시대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종교개혁"이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견줄 만큼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물론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중요한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이다.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대
이런 종류의 중대한 변화를 일컬어 패러다임(paradigm)이 바뀐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용어다. 패러다임이란 "전체"를 보는 방식, 곧 종합적인 이해 방식(a comprehensive way of seeing)을 말한다.
패러다임은 때로 전체적 형태(gestalt)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모든 사물을 보는 커다란 해석의 틀로서, 특수한 것들을 그 전체 속에서 자리매김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갈등의 시대는 구체적인 갈등 이상이다. 왜냐하면 이 갈등은 기독교 전통과 기독교인의 삶을 "하나의 전체로서"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생겨나는 변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문학의 역사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16세기와 17세기는 프톨레미(Ptolemy)의 패러다임에서부터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패러다임으로 변화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이 두 가지 패러다임은 각각 태양계 전체와 그 속에서 지구의 위치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미의 이름을 따라 지어진) 프톨레미의 패러다임은 약 1500년 동안 서양의 과학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지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 패러다임은 행성들과 별들의 움직임을 고정된 중심인 지구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 했다. 반면에, 코페르니쿠스 패러다임은 폴란드의 수도승이며 수학자였던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1543년에 출판한 책에서 그는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를 보는 방식을 주장했다. 즉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행성들의 움직임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으며, 심지어 우주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대한 생각들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이처럼 프톨레미의 패러다임에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패러다임으로 바뀌게 된 것은 세부적인 한 두 가지 사실의 변화가 아니라, "전체"를 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 두 패러다임 모두 똑같은 현상을 보는 방식(이 경우에는 태양계를 보는 방식)이지만, 그 현상을 다르게 보는 방식이다. 또한 "전체"를 보는 방식이 바뀌자, 그 모든 세부적인 것들을 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현재의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기독교 "전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변화다. 똑같은 "현상들"(하나님, 성서, 예수, 교리, 신앙 등)을 보지만, 다르게 보는 것이다. 물론 천문학의 변화를 기독교에서 벌어지는 일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 과학은 종교보다는 다른 법칙들에 의해 발전하며, 코페르니쿠스의 패러다임은 "증명된" 것인 반면에 프톨레미의 패러다임은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증명과 반증은 종교에서 그처럼 신속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천문학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타당하고 말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인들은 지금 패러다임의 변화와 갈등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갈등은 기독교 신학이나 행동의 단지 몇 가지 조항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하나의 전체로서 보는 종합적인 방식 사이의 갈등이라는 말이다.
두 패러다임의 이야기
"기독교의 심장"을 전체로서 보는 것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관련되어 있다. 첫째는 기독교 전통(the Christian tradition)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다. "기독교 전통"에는 성서와 더불어 성서 이후 시대의 전통으로서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런 요소들이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사도신경과 같은) 신조들이며,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자기 교파의 교리적 선언들이다. 둘째는 기독교인의 삶(the Christian life)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이다. 기독교인의 삶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믿고 행하는 것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에 관한 것인가?
기독교에 대한 과거의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40대 이상만이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도 대부분 이 패러다임과 더불어 성장했다. 이 패러다임은 지난 몇 백 년 동안 기독교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였다. 오늘날 이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근본주의자들, 많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 그리고 오순절 운동의 많은 기독교인들이다. 또한 이 패러다임이 기독교 텔레비전과 방송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기독교와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대중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형태다.
기독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백 년이 좀 지났다. 지난 20∼30년 동안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주류"(mainline) 개신교 교단들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 하나의 중요한 풀뿌리운동이 되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연합교회, 성공회, 연합감리교회, 제자회, 미국 장로교, 미국 침례교,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또한 가톨릭 교회 속에도 존재한다.
과거의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기독교인들 역시 주류 교단들 안에 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의 과거 비전을 고집스럽게 강요하는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교단이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항의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처럼 고집스럽게 강요하지는 않지만 그 패러다임과 더불어 성장했고 여전히 자신들에게 의미를 준다고 믿기 때문에 바꿔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다른 대안을 모르기 때문에 과거의 방식에 머물러 있다.
일부 주류 교단들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기독교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일부 교단들에서는 거의 절반씩 나뉘어져 있다. 따라서 주류 교단들 안에서 갈등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그 차이점들은 단순히 구체적인 문제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훨씬 큰 문제들에 관한 것이다. 두 패러다임은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한 매우 다른 비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이 두 가지 방식을 설명하면서, 내가 짧게 설명하면 부득이 중요한 것들을 많이 빼놓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각각의 방식에서 공통적인 것과 그 기본 골격을 이해하는 것, 그 구조와 형태에 대한 요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각각의 패러다임을 설명하면서 그 구조가 여러 측면에서 드러날 것이다. 내가 여기서 설명하려는 것은 각각의 패러다임의 "메타 신학"(meta-theology)으로서, 기독교와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그 나름의 비전을 형성한 틀이다.
과거의 패러다임: 기독교 전통에 대한 비전
과거의 패러다임은 기독교가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권위가 성서 속에 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권위가 성서 속만이 아니라, 교황은 틀릴 수 없다는 교황무오설(papal infallibility) 개념에 특별히 잘 표현된 것처럼, 교회의 가르치는 권위 속에도 있다.
개신교인들과 가톨릭 신자들 모두에게 성서가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과거의 패러다임이 성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우리들 대부분에게 매우 친숙한 것을 설명하려고 할 것이다. 교회가 이런 과거의 패러다임을 노골적으로 가르쳤던지 아니면 은연중에 가르쳤던지 간에, 이것은 최근까지 교회 안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갖게 된 인상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성서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 본다. 과거의 패러다임에서는 성서가 다른 어느 책과는 달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독특한 계시이다. 이런 믿음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이라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표현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인상이다. 이런 믿음 때문에 성서는 "거룩한 책,"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책이다. 또한 이런 믿음 때문에 성서는 권위 있는 책이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보증하신 책이다. 따라서 거룩한 책으로서의 성서의 위상과 그 권위 모두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처럼 성서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 보며 하나님께서 보증하신 책으로 보는 입장에는 보다 굳어진 형태와 보다 부드러운 형태가 있다. 보다 굳어진 형태는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 biblical infallibility), 즉 성서 안에 있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결과라는 것을 주장한다. 성서가 무엇에 관해 말하든 간에, 예를 들어, 지구 행성의 기원과 초기 역사, 하나님, 예수, 윤리와 행동에 관해 말하는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진리"이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시는 방식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결과적으로, 성서무오설이라는 굳어진 형태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다"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성서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the words of God)이다"로 이해한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탁월한 지적처럼, 이 입장은 성서를 일종의 거룩한 백과사전으로 간주하여 우리가 그 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성서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 보는 입장의 보다 부드러운 형태는 성서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말이 틀림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이 성서 기자들을 인도하여, 예를 들어 우리들의 구원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에서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부드러운 형태는 성서 안에 전근대적인(premodern) "과학"과 케케묵은 율법을 포함해서 고대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보다 굳어진 형태와 보다 부드러운 형태는 모두 성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이처럼 성서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것과 그것이 진리라는 점은 함께 간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이 패러다임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사실로(literal-factual) 해석하는 것을 강조한다. 내가 "문자적으로 사실로"라는 단어를 결합해서 사용한 것은 과거의 패러다임이 갖고 있는 문자주의는 대체로 성서의 사실성(factuality)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성서무오설(biblical infallibility)과 성서문자주의(biblical literalism)는 보통 함께 가지만, 그 둘이 본래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그 둘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시적인 언어나 은유, 신화를 통해서도 틀리지 않게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은 문자주의자여야만 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난 몇 백 년 동안에는 그 둘이 연결되어 있었다. 성서무오설 개념처럼, 성서문자주의 역시 현대 세계에서는 보다 굳어진 입장과 보다 부드러운 입장이 존재한다. 보다 굳어진 입장은, 예를 들어, 천지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이야기와 극적인 사건들을 보도하는 성서 이야기들을 포함해서, 성서 전체를 문자적인 사실로 해석할 것을 주장한다.
문자주의의 보다 부드러운 형태는 성서 이야기들 전체를 문자적인 사실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꺼이 인정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엿새 동안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은유적인 것으로, 아마도 지질학적인 시대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낸 요나의 이야기는 사실적인 역사라기보다는 비유일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부드러운 문자주의는 성서에서 정말로 중요한 사건들은 다소간 성서에 묘사된 것대로 일어났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출애굽할 당시에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인들로부터 도망치도록 하기 위해 바다가 실제로 둘로 갈라졌으며, 예수는 실제로 처녀에게서 태어났으며, 실제로 물 위를 걸었으며, 빵 몇 개로 수천 명을 먹였다고 믿는다. "극적인 사건들"의 이야기들은 굳어진 문자주의와 부드러운 문자주의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사실상 기독교 문자주의는 대체로 극적인 사건들에 대한 문자주의적인 해석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에서는 "기적적인 사건들"이 기독교의 진리에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성서문자주의는 또한 전형적으로 성서의 가르침의 절대성을 주장하는데, 교리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 모두에서 그렇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성서는 신앙과 윤리 모두를 위해 궁극적인 권위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믿기를 원하시는지 하는 것과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하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서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것이 아닌 무엇으로 간주하는 것은 "카페테리아"식 기독교인, 즉 성서 안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믿음들과 윤리적 가르침들만을 "취사선택하는" 카페테리아식 기독교인으로 만들 따름이다.
신조들을 중심적인 것으로 가르치는 교단들에 속한 과거의 패러다임의 기독교인들로서는 성서를 이런 방식으로 보는 것을 신조들에도 적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그들은 신조들이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들을 요약한 것으로 이해한다. 신조들은 분명히 은유적 언어들로 표현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조들을 흔히 문자적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그 신조들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나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과거의 패러다임에서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의심을 품지 않고 신조들을 고백하는 것, 혹은 신조들을 고백하는 가운데 어느 조항에서는 입술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지 않게 되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신조의 모든 조항들이 사실적으로 참되다고 믿는 것이다.
과거의 패러다임: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비전
굳어진 형태이건 부드러운 형태이건 간에,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대한 과거의 패러다임은 기독교인의 삶을 보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미친다. 다음 세 가지 특징이 특별히 중요하다.
신앙은 믿는 것(believing)이며 중심적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성서와 전통을 바라보는 과거의 패러다임은 믿기 어렵기 때문에 신앙을 필요로 한다. 물론 신앙은 항상 기독교에서 중심적이었지만, 내가 2장에서 설명할 것처럼, 참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현대의 산물, 곧 지난 몇 백 년 동안의 산물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에서는 기독교인의 삶이 물론 믿는 것 이상이다. 그 믿음에 따라서 사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믿는 것이 그 기초이다.
내세(afterlife)가 중심적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에서는 내세가 그 약속과 동기 모두로서 중심적이다. 궁극적으로 내세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소년시절의 끝 무렵에 배웠던 과거의 패러다임의 형태에서는 천당에 대한 약속과 지옥에 대한 공포가 크게 부각되었다. 실제로, 만일 당신이 열두 살 먹은 나에게 내세가 없다고 확신시킬 수 있었다면, 나는 내가 왜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내세는 중심적이었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또한 이생에서의 변화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특별히 더욱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정말로 중요한 질문은 당신이 영원히 머물 곳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요구되는 것들과 보상에 관한 것들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에서는 기독교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들과 보상받을 것들의 관계이다. 가장 중요한 보상은 물론 내세의 축복이다. 요구되는 것들은 이처럼 내세에 대한 강조에서 직접 도출된다.
이 논리는 단순하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만일에 천당이라는 축복받은 내세가 있다면, 사람들이 무엇을 믿었던지 어떻게 살았던지 누구나 천당에 간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천당에 갈 사람과 가지 못할 사람들을 구분할 무엇인가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중예정(二重豫定, double predestination)이라는 가르침, 곧 하나님께서 천당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을 각각 미리 예정해놓으셨다는 가르침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그 두 종류의 인간들을 구분하는 것이 우리가 믿거나 행동하는 무엇임에 틀림없다. 이런 상식적인 결론은 기독교를 요구와 보상의 종교로 둔갑시킨다.
과거의 패러다임 안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천당에 가기 위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것이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성서는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세례를 받는 것 이상을 뜻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사실은 단순한 종교의식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한다. 훌륭한 기독교인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은 다양하게 받아들여진다. 흔히 과거의 패러다임에서는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예수에 대한 핵심적인 주장들을 믿는 것을 뜻한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으며,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다시 살리셨으며, 언젠가는 다시 오실 것임을 믿는 것을 뜻한다. 또한 성서의 윤리적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애쓰며,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용서를 구하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물론, 과거의 패러다임은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와 사랑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내적인 논리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요구되는 것을 실천하는 삶과 그에 대한 보상으로 바꿔놓음으로써 은총의 개념을 훼손시킨다. 실제로 과거의 패러다임은 은총을 무효한 것으로 만드는데, 그 이유는 (천당에 가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충실하게 이행해야만 보상한다는) 조건들이 붙어 있는 은총은 더 이상 은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처럼 매우 간략한 형태로 설명한 성서와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비전은 과거의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메타 신학"이다. 그 요소들은 서로 얽혀 있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자면, 과거의 패러다임은 기독교인의 삶을 우리가 죽은 후에 구원받기 위해 현재 기독교를 믿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패러다임은 성서를 하나님의 구원(축복받은 내세)의 메시지로 보며, 기독교인의 삶을 그 메시지를 믿고 그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것으로 이해한다. 믿는 것이 핵심적인 요구사항이다. 우리를 구원할 것은 바로 믿음(believing)이다.
현대의 산물: 현대성(modernity)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대성이란 17세기 계몽주의 이후 서양의 문화사를 뜻하는데, 무엇보다 현대 과학과 과학적 사고방식의 탄생으로 특징지어진다. 계몽주의를 기초로 해서 현대성은 성서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성서의 많은 부분이 문자적-사실적 진리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중요한 사실은 현대성을 받아들이고 통합시키려 했던 기독교 형태에 현대성이 영향을 미친 것만이 아니라, 현대성을 강하게 부정했던 기독교 형태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특별히 기독교의 과거의 패러다임은 현대성의 산물이다. 비록 과거의 패러다임이 많은 사람들에게, 곧 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절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전통적인 기독교처럼 들리지만, 그 핵심적인 특징들은 지만 몇 백 년 동안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그 현대적 특징들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 성서무오설이라는 개념은 1600년대에 처음 나타났으며,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끈질기게 주장하게 된 것은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교황무오설은 187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타났다.
* 성서에 대한 문자적-사실적 해석을 강조하는 것 역시 현대적인 것으로서,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계몽주의 이전에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성서의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 이상의" 의미였는데, 이것에 관해서는 잠시 뒤에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대체적으로 진리를 사실성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 누군가 "그 이야기는 진짜인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 질문자가 "그것이 사실인가?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진리와 사실성은 함께 간다. 따라서 과거의 패러다임에서는 성서의 진리를 수호하는 것은 성서의 문자적-사실적 진리를 수호하는 것임을 뜻했다.
* 기독교 신앙이 "믿음"을 뜻한다는 생각 역시 현대적인 생각으로서,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겠다.
이처럼 과거의 패러다임은 "기독교 전통"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을 이해하는 특수한 방식이며 비교적 최근의 방식으로서, 지난 몇 백 년 동안에 걸쳐 현대성과의 갈등에 의해 생겨난 방식이다. 기독교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패러다임 역시 현대의 산물이다.
나로서는 과거의 패러다임이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는 것을 굳이 감출 이유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패러다임이 여러 세기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삶을 양육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하나님의 영은 그 패러다임을 통해서 역사하셨으며 지금도 역사하신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삶을 창출했다. 이 사실에 관해서는 잠시 뒤에 좀더 설명하겠다. 지금으로서는, 이 패러다임의 비전이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신빙성을 상실했다는 사실만을 지적하겠다.
새로운 패러다임: 기독교 전통과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그 비전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한 세기가 좀 지났다. 과거의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적 특징들 역시 계몽주의에 대한 응답이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설명은 내가 하는 것이지만, 그 패러다임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된 것은 내가 아니다. 기독교를 이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보는 방식은 오늘날 신학교 교수들과 성서학자들 사이에 폭넓게 공유되고 있으며 점차 주요 교파들 안에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는 이처럼 잘 발전되어 왔으며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 모두가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성서와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 다섯 개의 형용사를 사용하여 두 문장으로 설명할 것이다. 처음 세 개의 형용사는 성서(와 기독교 전통 전체)를 보는 방식을 설명하는 역사적(historical), 은유적(metaphorical), 성례전적(sacramental)이라는 형용사들이다. 다음 두 개의 형용사는 기독교인의 삶을 보는 방식을 설명하는 관계적(relational)이며 변혁적(transformational)이라는 형용사이다.
나는 특히 3장에서, 처음 세 개의 형용사를 사용한 의미를 좀더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잠시 후에 할 그 설명에 기대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 성서(와 기독교 전통 전체)를 보는 방식으로서의 역사적, 은유적, 성례전적 방식이란 무엇인지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역사적: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성서가 고대 이스라엘과 초기 기독교 운동이라는 두 가지 옛 공동체의 역사적 산물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혹은 우리를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그 성서를 만들어낸 고대의 공동체를 위해 쓰여진 것이다. 역사적 접근방식은 이 고대의 문서들을 그 고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해야 그 의미를 잘 드러내는 힘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 은유적: 새로운 패러다임은 성서를 은유적으로 본다. 이 말은 성서의 "문자 이상"의 의미, "사실 이상"의 의미를 뜻한다. 이 패러다임은 성서 이야기들의 역사적 사실성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지만, 그 의미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예수의 출생과 부활 이야기들이 문자적으로 사실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은유적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난처해하지 않는다. 이 패러다임이 묻는 방식은 이렇다. 즉 "그 사건이 그런 식으로 발생했던지 발생하지 않았던지 간에, 그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 성례전적: 새로운 패러다임은 성서를 성례전적으로 보는데, 이 말은 성서가 신성한 것을 매개할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성례전은 눈에 보이고 물질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영이 우리에게 임재하게 된다. 성례전은 은총의 수단이며, 거룩한 영의 도구 혹은 그릇이다.
과거의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패러다임 역시 성서를 신성한 경전으로 보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신성하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성서는 그 위상(status)과 기능(function)에서 신성하지만, 그 기원(origin)에서 신성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요점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성서와 기독교 전통, 곧 신성한 것의 은유와 성례전으로서, 거룩한 영이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수단으로서의 성서와 기독교 전통 안에서 살아가는 일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독교인의 삶을 관계와 변화된 삶으로 이해한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내세에서의 보상을 받기 위해 요구되는 것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며, 굳이 믿는 것에 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의 삶은 현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를 믿는 것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신성한 것의 은유와 성례전으로서의 기독교 전통 안에서 살아내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또 다른 특징을 미리 살펴보자면,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기독교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의 특수한 문화적 흐름 속에서 하나님 체험에 대해 반응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특수성은 잃어버리지 않는다. 내가 앞으로 특히 마지막 장에서 주장할 것이지만, 기독교 전통의 독특성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두 패러다임 사이의 차이점 요약
기독교에 대한 이 두 입장이 이처럼 다르기 때문에, 이 두 입장은 똑같은 성서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두 개의 종교를 만들어낼 지경이다. 두 패러다임이 함께 존재하는 우리 시대는 실질적으로 두 개의 기독교 이야기를 전하는 셈이다. 그 차이점들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독교인이 되는 이 두 가지 방식은 흔히 서로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심지어 적개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과거의 패러다임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독교를 축소시킨 것이며 성서의 믿음을 모두 내팽개친 것처럼 보인다. 성서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은 성서의 권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빈 무덤이 역사적 사실이던 아니던 별로 개의치 않는 태도는 예수의 신성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의 유일한 독특성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를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내던지는 것은 기독교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처럼 중요한 믿음들 가운데 어느 하나 혹은 모두를 내팽개치고도 여전히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패러다임은 반지성적(反知性的)이며 딱딱하게 (그러나 선택적으로) 도덕주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성서문자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과학이 문자주의와 충돌할 때마다 과학을 거부하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특히 과거의 패러다임이 여성을 종속적인 신분으로 간주하며 동성애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사회정의의 문제보다는 보수적인 정치적 문제들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대해 답답해하며 견디기 힘들어한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연민과 정의보다는 개인적인 의로움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배타주의, 곧 다른 종교는 부적절하거나 틀렸다고 거부하는 태도는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떻게 하나님이 오직 한 종교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으며, 더군다나 아마도 그 종교의 "옳은" 형태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는 말인가?
차이점들을 다리 놓는 작업
교회 안에 이런 분열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기독교의 심장에 대한 이런 차이점들은 날카로우며, 이 책 마지막까지 우리가 그 차이점들과 대면할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이 되는 이 두 가지 방식을 흔히 대조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그 격차를 다리 놓을 수 있는 길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의 다양성: 다리를 놓을 수 있는 하나의 요소는 기독교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또한 문화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방식은 많이 있으며, 기독교를 해석하고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방식도 많이 있다. 기독교인이 되는 방식이 오직 하나의 올바른 방식만 있다는 관념은 기독교 역사에 나타났던 다양한 형태들을 생각해볼 때 불가능한 관념이다.
기독교 예배에도 다양한 형식과 스타일이 있다. 한쪽에는 오순절운동의 열광주의로부터 다른 쪽에는 퀘이커 교도들의 침묵예배까지 다양하다. 그 중간에는 성례전적이며 예전적인 예배 형태들이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이런 다양한 예배 형태 중에서 어느 것은 올바르고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단지 서로 다를 뿐이다.
우리는 또한 기독교의 다양성을 기독교가 택했던 다양한 문화적 형태 속에서 파악할 수도 있다. 이 사실에 대한 종합적인 설명은 아니지만 몇몇 사례를 살펴보자면, 기독교인이 되는 방식에는 2세기의 시리아 방식, 8세기 아일랜드 방식, 12세기 동방정교회 방식, 15세기 중국 방식, 19세기 스칸디나비아 농민들의 루터교 방식(나 자신의 유산)이 있다.
또한 신학적인 다양성도 있다. 그 차이점을 설명하지 않은 채 몇 가지 신학적 다양성을 나열하자면, 초기 기독교 시대로부터 아리우스 기독교와 아타나시우스의 기독교, (그리스도의) 단일 본성(신성) 기독교와 이중 본성 (신성과 인성) 기독교, 예정론 기독교와 비-예정론 기독교, 유아 세례 기독교와 성인 세례 기독교 등 다양했다. 기독교인들은 매우 다양하게 믿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올바르게" 하는 것에 관한 것일 수 없다. 비록 우리는 흔히 그렇게 행동하지만 말이다.
요점은 기독교를 이해하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식이 있는 것은 아니며,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단 하나의 올바른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KKK 단과 백인 아리안 족의 국가를 세우려던 집단들처럼, 증오를 합법화하기 위해 기독교 언어를 사용하는 식으로 잘못된 기독교인 방식들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서로 다르며 적절한 많은 방식이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과거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 사이의 갈등을 생각하게 되는 상황이다. 이 두 패러다임 중에 어느 하나는 올바르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두 패러다임 모두 기독교인이 되는 방식들이다.
두 패러다임이 공유하고 있는 것: 이 두 패러다임은 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확신들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내가 설명한 것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은 하나님의 실재, 성서의 중심적 위치, 예수의 중심적 위치,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 그리고 우리들(과 세계)이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한다. 명백한 점은 이 모든 점들이 과거의 패러다임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두 패러다임이 공유하고 있는 한 요소를 강조하자면, 두 패러다임 모두가 기독교인의 삶의 관계적인(relational) 비전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비록 과거의 패러다임이 믿는 것을 강조하지만, 그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하나님과 예수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믿음은 그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와 맺은 개인적 관계가 관건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믿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삶에 활력을 주고 양육하는 것은 그 믿음들을 통해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이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패러다임이 기능을 발휘하는 이유는 그 패러다임이 신자들을 하나님과 예수와의 관계로 이끌기 때문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깊은 경건과 신앙과 사랑의 삶을 양육해왔으며 지금도 계속 양육하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그 패러다임을 통해 역사할 수 있으며 역사하신다. 수세기 동안 그래왔으며 지금도 그렇다. 과거의 패러다임이 하나님의 실재와 은총에 대한 강력한 느낌으로 이끌고, 예수를 따르는 생활로 이끌며, 자비와 정의를 위한 열정으로 가득찬 생활로 이끌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주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말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그토록 중요한 믿음들은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북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과거의 패러다임은 장애물이 되었다. 따라서 성서와 기독교인의 삶을 보는 과거의 방식은 기독교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며 현대의 방식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다르게 이해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양육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두 가지 패러다임 가운데 어느 하나는 올바르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기능성으로서, 그 패러다임이 "작동하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 하는 문제다. 수백만 명의 신자들에게는 과거의 패러다임이 아직도 그 기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만일 과거의 패러다임이 당신에게 그 기능을 발휘한다면, 만일 그 패러다임이 장애물이 되지 않고 진정으로 당신의 삶을 하나님과 더불어 살도록 양육하며 당신 안에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더욱 키워준다면, 당신은 패러다임을 바꿀 이유가 없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혹은 우리의 패러다임)을 "올바르게" 만드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패러다임이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설득력이 없는 과거의 패러다임은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문자주의자나 배타주의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메시지는 무엇이며 기독교의 복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가? 중요한 의미에서 이것은 전도의 문제이다. 이들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독교와 기독교인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결론: 끝나지 않는 대화
기독교의 심장을 알아들기 쉽게 설명하는 작업에는 "주어진 것"(given)과 상황(context)이 관련되어 있다. "주어진 것"은 기독교 전통 자체로서, 성서, 하나님, 예수, 신조, 종교의례 등이다. 우리는 이것을 과거로부터 물려받는다. 상황은 문화적 상황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장소이며 그 상황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의 우리가 된 상황을 말한다. 기독교 신학의 과제는 "주어진 것" 우리가 물려받은 전통을 현재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신학의 과제는 언제나 그랬다.
물론, "주어진 것"은 단순히 현재에 순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의 목소리를 내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나 "주어진 것"은 때때로 변화된 문화적 상황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다시 형성되어야만 한다. 이런 일은 기독교 역사에서 많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같을 수 있거나 똑같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문화적 상황은 항상 변한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기독교 전통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기독교 전통에는 종교의례들과 수행이 포함되지만, 이것들 역시 일종의 언어이다. 핵심적인 질문은 이처럼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이 언어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심장을 분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끝나지 않는 대화"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나는 이 은유적 표현을 케네쓰 버크(Kenneth Burke)로부터 빌려왔는데, 그는 20세기 대부분에 걸쳐 살았던 미국의 지성인이다. 버크는 주로 언어와 문화,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 즉 언어에 의해 문화가 창조되는 방식에 관해 글을 썼다. 역사는 버크가 "역사의 드라마"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언어를 통해 문화와 공동체를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역사는 그가 "끝나지 않는 대화"라 부른 것의 산물이다.
역사의 드라마는 어디에서 그 재료를 얻는가? "끝나지 않는 대화"로부터인데, 그것은 우리가 태어난 시점부터 계속되는 것이다. 당신이 응접실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해 보라. 당신은 늦게 도착했다. 당신이 도착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당신보다 앞서서 오랫동안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그들로서는 너무 열띤 토론이라서 당신에게 그 정확한 내용을 말해주기 위해 잠시 쉴 틈도 없다. 사실상, 그 토론은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아무도 그 토론이 어떤 단계를 거쳐왔는지를 모두 말해줄 수가 없다. 당신은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당신이 참견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대답을 하면, 당신이 그에게 대답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 당신을 옹호하면, 또 한 사람이 당신에 맞서, 당신의 반대자를 당혹스럽게 만들거나 그를 만족시키거나 하는데, 당신과 같은 편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토론은 끝날 수 없다. 시간이 늦어져 당신은 떠나야만 한다. 그리고 당신이 떠나도 그 토론은 여전히 활기차게 진행된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서, 기독교 전통, 그리고 서로에 대해 끝나지 않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단순히 "대화"하는 것 이상이다. 다른 전통들은 때때로 우리들을 가리켜 불쌍하게 "말만 많이 하는"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 언제나 우리의 "교리들"이 올바른 것이라고 떠들고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기독교의 심장을 분별하는 일과도 관련되어 있는데,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끝없는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많은 대화들은 과거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 사이에 벌어진다. 우리의 과제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 성서는 개인적이며 또한 정치적이다.
● 인생에 대한 성서의 비전,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삶에 대한 성서의 비전은 개인적이며 또한 정치적이다.
● 구원에 대한 성서의 이해는 개인적이며 또한 정치적이다. 구원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 관한 것이며, 영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모두에
관한 것이다. 구원은 개인들로서의 우리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며, 우리들이 개인들로서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관한 것이다. 구원은 또한 정치에 관한 것이며, 우리들이 사회에서 함께 사는 생활에 관한 것이며, 정의에 관한 것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및 경제적 정의에 관한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런 변화들의 첫 번째 변화를 "중생"(born again)이라는 은유를 통해 강조하고자 한다. 내가 이 은유를 사용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중생이라는 은유가 신약성서에서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중생이 보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은 두 패러다임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은유이다. 만일 주류(mainline) 기독교인들이 중생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교회 안에서 이처럼 서로 나뉘어 있는 기독교인들이 함께 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불행하게도, 주류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좀 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만이 "중생"을 독점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중생이라는 말이 부흥회와 "열광적인" 기독교를 연상시켜 너무 뜨겁고 무거운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중생이라는 말이 때로는 너무 좁게 정의되고 있다. 어떤 기독교인 집단에서는 중생이 일정한 믿음 체계, 특정한 보수적 신학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흔히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개인적인 주님과 구원자로 믿는가?" 하는 식의 구원에 관한 질문으로 표현된다. 성령의 은사(선물, gifts)를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중생이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 특히 방언을 하는 것을 뜻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남겨진 자들"의 앞부분에서는 중생이 더욱 좁은 의미로 정의되어, "휴거"와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믿는 것과 거의 똑같은 것으로 나온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은 중생했다는 사람 가운데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을 최소한 한 사람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중생이 그처럼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히거나 남에 대해 쉽게 심판하며 내부인과 외부인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식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중생 체험도 아니며 비난받기 십상이다.
중생: 신약성서의 중심
그러나 올바로 이해한다면, 중생은 매우 풍부하며 포괄적인 개념이다. 중생은 신약성서와 기독교인의 생활의 중심에 놓여 있다. 우리는 중생을 다시 고백할 필요가 있다.
고전적인 본문
"중생"의 필요성은 요한복음 3:1-10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예수의 이야기의 주제이다. 요한복음은 역사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십중팔구 예수와 니고데모의 실제 이야기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즉 예수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요한공동체의 목소리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 이야기는 예수의 메시지와 신약성서 전체의 중심적인 내용을 말해준다.
요한복음의 대부분의 본문들과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 역시 상징적인 것이 매우 많고,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는 점들, 그리고 이중적인 의미가 많다.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였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의 뒷 부분에도 다시 등장한다(7:45-52; 19:38-42). 그는 부자이며 지배계층의 한 사람인데, 지배계층 사람 가운데 최소한 예수운동에 매력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초기 기독교에 관해 지배계층이 주목할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왔다." 여기서 이 이야기의 이중적 의미들 가운데 첫 번째가 나타난다. 밤이다. 즉 니고데모는 어둠 속에 있다. 빛과 어둠이라는 상징은 요한복음에 많이 나온다. 즉 예수는 어둠 속에 빛나는 빛이며, 이 세상의 빛이며, 모든 사람들을 깨우치는 참된 빛이며,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는 분이다. 비록 니고데모가 빛에게 왔지만, 그는 아직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에게 아첨하듯 듣기 좋은 말을 한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앞뒤가 연결되지 않게 만드는 것처럼, 주제를 바꾸어 말한다. 마치 니고데모의 말을 듣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의 말의 밑에 깔린 마음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다음이 이 이야기의 핵심적인 구절이다. 즉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나지(born from above)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밤"이라는 말처럼, 여기서도 이중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즉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그리스어는 "다시 태어난다" 혹은 "새로 태어난다"고 번역할 수도 있다. 번역하는 일은 불행하게도 그 둘 가운데 한 단어를 선택해서 번역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요한복음 기자는 그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뜻하고자 했다. 즉 "다시/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으로서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는 요한복음의 다른 많은 인물들처럼 문자주의자다. 예수의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그는 요점을 파악하지 못한 채,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말한다.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요점을 다시 반복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여기서 "물"이라는 말도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 요한복음 독자들에게는, 물이 세례를 환기시키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물"이 "육"의 병행어로서 양수를 가리킨다. 비록 우리가 "물에서," 곧 "육에서" 태어나지만, 우리는 또한 "영에서" 태어나야만 하는데, 이것은 새롭게 위로부터 태어나야만 한다는 말이다.
본문이 계속되면서 예수는 성령과 연결되는 것을 강조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여기에도 또 다른 이중적 의미, 실제로는 삼중적인 의미가 있다. 즉 그리스어로 "바람"을 뜻하는 말은 또한 "숨"과 "성령"도 뜻한다.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성령이 새로운 출생의 원천이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성령을 통해,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 새로운 삶은 하나님의 성령을 중심으로 한 삶이다.
이 고전적인 본문의 요점은 분명하다. 즉 니고데모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으로 새로운 출생, 내면적인 새로운 출생, 개인적인 변화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임을 밝히겠다.
중생: 죽고 다시 살아남
"중생," 곧 "다시 태어난다"는 표현은 신약성서에 단 한번 나온다(벧전 1:22-23). 그러나 이 개념은 흔히 죽고 다시 살아남(dying and rising), 곧 죽음과 부활이라는 언어로 표현되는데, 초기 기독교와 신약성서 전체에서 매우 중심적인 개념이다. "죽고 다시 살아남"과 "다시 태어남"은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개인적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뿌리 이미지"이다. 즉 다시 태어나는 것에는 죽음과 부활이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과거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죽는 것과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과거의 정체성에 대해서 죽는 것과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하며, 신성함, 성령, 하나님을 중심으로 존재하며 정체성을 갖는 방식을 말한다.
복음서들과 그 나머지 신약성서에서, 죽음과 부활,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반복적으로 개인적인 변화,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영적 과정을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되고 있다. 그 중요성 때문에 우리는 이 주제를 중심으로 신약성서의 핵심적인 증언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공관복음서들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
공관(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들에서 죽음과 부활의 길은 예수 자신이 가르친 "길"(the way)이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8:34). 마태와 누가에 나오는 말씀 가운데 마가에 의존하지 않은 말씀에서도,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누가 14:27 = 마태 10:38).
이 말씀은 초기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를 따르는 것, 곧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을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본다. 1세기에는 십자가가 처형과 죽음의 상징이었다. 아직 십자가가 느슨한 은유, 곧 사람이 맞닥뜨리게 되는 관절염이나 법적인 곤경처럼 어떤 고통이나 불편함을 나타내는 것이 되기 이전이었다. 즉 십자가는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를 따라 죽음의 길을 간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이 십자가를 분명히 은유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 누가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 앞에 "날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9:23).
공관복음서들은 예수가, 죽는 것을 새로운 삶의 길로서 말했다고 보도할 뿐만 아니라, 그 복음서들의 문학적 전체 구조 또한 죽음과 부활이 예수의 "길"이라는 주제를 토대로 하여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마가복음의 이 구조를 살펴볼 것인데, 마태와 누가도 이 패턴을 따랐다.
마가복음의 중심 주제는 "길"(the way)이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는 첫머리 부분에서 선언한다. 즉 자신의 복음서는 "주님의 길"에 관한 것이다(1:3). 그리고 치밀하게 구성한 자신의 복음서 중심 부분에서 "예수의 길"은 예수가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이 여행의 과정에서 세 번이나, 예수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과 부활에 관해 말한다. 수난(passion)에 대한 이 세 차례의 예고에서, 매번 예수를 따르는 것에 관한 가르침이 이어진다. 그 첫 번째 가르침은 이렇다(8: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예수 자신]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8:34)
이 구절은 똑같은 요점을 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즉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8:35).
세 번째 수난 예고에는 가장 자세한 내용들이 나온다. 예수와 그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이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리고 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10:33-34)
그리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 "잔을 마시고" "세례를 받는 것"은 모두 죽음을 뜻하는 은유이다.
이처럼 마가에게는 예수의 "길"이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이다. 그 여행의 종착지 예루살렘은 죽음과 부활의 장소이며, 끝과 시작의 장소로서, 무덤이 자궁이 되는 장소이다. 마가에게는(마가의 패턴을 반복하고 확대시킨 마태와 누가에게도), 이 길, 즉 개인적 변화의 길은 죽음과 부활의 길이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마가가 이 중심적인 부분을 하나의 틀 속에 넣은 것인데, 그 틀의 앞과 뒤는 모두 눈먼 사람이 눈을 뜨게 되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즉 벳새다의 한 눈먼 사람이 점차 그의 시력을 회복하는 이야기(8:22-26)로 시작해서,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그의 시력을 회복하여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를 따라 나선 이야기(10:46- 52)로 끝난다. 이런 틀 속에 넣은 것은 사람이 시력을 회복하여 볼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는 그의 여행을 따르는 것이 바로 그 "길"임을 깨닫는 것, 곧 변화의 길은 죽음과 부활에 이르며 그 길을 통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연관된 것임을 암시한다.
바울의 편지들 속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
이것은 바울의 편지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개인적 변화를 나타내는 은유이다. 바울은 이 은유를 사용하여 자신의 체험을 말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그의 공동체에게 편지를 쓰면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2:20)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도 초기의 것으로서 50년대에, 어떤 복음서도 기록되기 이전에 고백된 것이다. 이 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이 내면적인 십자가 처형을 겪었다고 말한다. 과거의 바울은 죽었다. 그 결과는 새로운 생명이다. 새로운 바울이 태어났으며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
바울에게 이것은 단지 그 자신만의 체험이 아니라, 그 공동체가 부름받은 삶이기도 했다.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세례와 연결시켰는데, 세례라는 입회의식(入會儀式)은 죽음과 재창조의 물밑으로 잠기는 것과 연관된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롬 6:3-4, 이 구절 전체는 11절까지 계속된다.)
이처럼 종교의식으로 구체화된 세례의식은 과거의 존재 방식에 대해 죽고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내면적인 변화를 상징한다.
개인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은유로서의 죽음과 부활, 곧 중생은 이처럼 새로운 생활을 가리키는 바울의 고백의 토대인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생활인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라는 말을 그의 편지들에서 165회나 사용하고 있으며, 이 말은 그가 20회 정도 사용한 "성령 안에"(in the Spirit)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인 셈이다.
"그리스도 안에," "성령 안에" 거하는 결과는 새로운 존재 방식과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창조이다. 고린도의 기독교인 공동체에게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모든 것이 새 것이 되었습니다"라고 썼다(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는 또한 인습의 날카로운 경계선들을 없애버리는 새로운 공동체의 정체성을 갖게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은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갈 3:26)라고 썼다. 그들은 죽음과 부활을 구현하는 세례의식을 통해 그렇게 된 것이다. 즉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갈 3:27). 그 결과는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즉 1세기 로마와 유대인의 사회에서의 뚜렷한 분열이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것은 바울의 가장 유명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의 토대이다. 그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수사학적으로 묻는다. 그의 대답은, 어떤 것도, 즉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8-39)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며, 하나님은 죽음과 삶, 천사들과 권세자들, 현재 일과 장래 일, 그 모든 피조물 너머에 계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게 되는가? 바울에게는 그 방법이, 과거의 삶 곧 "아담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 길은 죽음과 부활, 죽음과 재탄생의 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만 설교"하려고 결심했을 때, 이것이 그가 뜻한 바 가장 중심적인 것이었다. 즉 십자가는 기독교인의 생활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개인적 변화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
요한복음은 단순히 중생에 대한 고전적인 본문만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공관복음서들과 바울과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역시 죽음과 부활을 새로운 삶에 이르는 길의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 전체가 이 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요한복음은 이 주제를 간략하게 한 구절로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12:24).
실제로 이 주제는 흔히 기독교인들의 배타주의의 기초로 이용되는 유명한 구절, 곧 "나는 길(the way)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 14:6)는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이 구절을 요한복음의 성육신 신학의 맥락 속에 넣어보면, 예수가 "육신이 된 말씀"인 것처럼, 예수는 육신이 된 "길"(the way)이다. 즉 한 사람의 일생 속에 구체화된 길이다. 그렇다면 핵심적인 질문은, 예수가 성육한 그 "길"은 무엇인가? 예수 자신인 그 "길"은 무엇인가? 요한복음은 신약성서 일반과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서 구체화된 그 "길"이 바로 죽음과 부활의 길이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기독교인들의 배타주의는 이 구절을 오해하여, 마치 당신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에 관해 알아야만 하며 예수에 관한 특정 교리들을 믿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는 "길"은 예수에 관한 교리들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길"은 예수 안에 성육한 길로서, 죽음과 부활의 길이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길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내가 다음에 제시하겠지만, 이 길은 세상의 모든 중요한 종교들이 말하는 길이다.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그 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길"이다. 그 길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알려진 독특한 계시라기보다는, 예수의 삶과 죽음이 모든 참 종교들을 통해서 알려진 보편적인 길을 성육한 삶과 죽음인 것이다.
십자가와 중생
십자가는 신약성서, 기독교인의 예배와 실천, 서양 문화 안에 나타난 기독교의 가장 보편적인 하나의 상징이다. 모든 상징들과 마찬가지로 십자가 역시 많은 의미들을 갖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서 적절하게 많은 의미들을 찾았다. 문자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십자가는 예수의 처형이었다. 당국자들이 그를 죽였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그를 처형했다. 그러나 5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초기 기독교 운동은 그 십자가에서 많은 의미를 찾아냈다.
특별히 초기 기독교 운동은 십자가를 그 "길"의 상징으로 보았다. 십자가는 그 "길" 곧 변화의 길, 중생의 길을 구현한 것이다. 기독교의 중심적인 상징인 십자가는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과정,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중생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따라서 바울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떤 것"도 설교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면서도, 여전히 놀라운 일이다. 복음서들이 예수의 길을 십자가의 길로 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면서도 여전히 놀라운 일이다. 성 금요일과 부활절에서 절정에 도달하는 사순절 기간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에 관한 절기라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면서도, 여전히 놀라운 일이다.
때로는 이런 죽음의 내면적인 과정을 "자기에 대한 죽음"(dying to self) 혹은 "자기의 죽음"(death of self)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20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에 대한 죽음"이라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기에 대한 죽음"은 자기를 억제하고 자기의 적절한 욕망들을 억압하기 위한 말로 사용되어졌다. 사회와 가족 안에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꼴찌에 놓으라는 말을 듣곤 했다. 이렇게 받아들일 경우에는 십자가의 메시지가 억압적인 권위와 자기포기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의 해방과 재연결의 수단이다. 십자가는 자기를 종속시키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 대한 죽음"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나는 십자가를 과거의 정체성과 새로운 정체성, 과거의 존재 방식과 새로운 존재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좀 더 정확하게 사용하기를 원한다. 즉 십자가의 길은 과거의 정체성에 대해서 죽는 일과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과거의 존재 방식에 대해 죽는 것과 새로운 존재 방식, 곧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존재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이해는 "자기에 대한 죽음"이라는 말의 부정적인 의미를 피할 뿐 아니라, 우리가 자기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창조에 대한 성서적 이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자기가 되도록 창조되었다(we are created to be selves). 문제는 우리가 자기들이라는 점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자기인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자기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왜 우리는 중생이 필요한가
왜 우리는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는가? 왜 우리는 과거의 존재 방식과 과거의 정체성에 대해 죽고 새로운 존재 방식과 새로운 정체성, 곧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의 인생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 안에서 생겨나, 성장 과정을 통해 더욱 강하게 되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초기에 생겨나는 것은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이다. 이것은 단순히 자아인식, 곧 자아와 세상 사이에 구분이 있다는 인식이다. 이런 자아인식이 얼마나 초기에 생겨나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언어를 배우기 이전 단계에 생겨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갓난아기는 아직 자아를 인식하지 못한다. 부모가 잘 돌볼 때, 아기들은 우선 이 세상을 자신들이 연장된 것으로 경험한다. 즉 자신들이 배고프면 먹여주고, 똥오줌을 싸면 갈아주고, 울면 안아준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아기들은 걸음마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들과 세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몇 년 전에 나는 어떤 세 살 먹은 여자아이에 관한 이야기들 들었다. 그 여자아이는 첫 아이였으며 그 가족의 외동딸이었는데 그 엄마가 또 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 여자아이는 새로 동생이 생긴다는 사실에 매우 들떠 있었다고 한다. 그 엄마가 병원에서 남자아이를 낳아 사흘만에 집에 데려왔는데, 몇 시간도 지나기 전에 그 여자아이가 부모에게 요구하기를, 자기가 잠시 방문을 닫은 채 새로 태어난 동생과 단둘이만 있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부모는 방문을 닫고 갓난 동생과 단 둘이만 있고 싶다는 딸아이의 요구에 약간 불안했지만, 갓난아기가 올 것을 예상해서 인터컴을 설치한 것을 기억하고, 만일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즉시 갓난아기 방으로 달려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딸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모는 딸을 갓난아기 방으로 들어가게 한 다음 방문을 닫고, 인터컴 수화기로 달려갔다고 한다. 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에, 아마 아기 침대 위에서 갓난 동생을 들여다보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딸아이가 태어난 지 사흘된 동생에게, "너 내게 하나님에 대해 말해줄래. 나는 이제 거의 다 잊어버렸단 말이야!"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야기는 내 머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 이야기이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우리를 보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매우 어렸을 때에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의 과정은 이 세상에 관한 배움의 과정으로서,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주셨고 언제나 그 품에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을 점차 잊어버리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아의식이 생겨나고 그것이 강화되는 과정은 점차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아의식이 생긴다는 것은 분리된 자아가 탄생된다는 뜻이다. 이 자아의식이 생겨날 때, 당연히 생겨나는 결과는 자기관심(self-concern)이다. 이 둘, 곧 분리된 자아와 자기중심적인 자아는 언제나 함께 간다.
자아의식의 탄생, 분리된 자아의 탄생은 에덴동산 이야기의 중심적인 의미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다. 낙원에서 살았던 아담과 이브는 정반대되는 것, 곧 선과 악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 결과로 두 가지가 생겨났다. 즉 그들은 자신을 가림으로써 더 이상 벌거벗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또한 삶이 고생과 짐이라는 것을 체험하면서 낙원에서 추방되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창세기 이야기는 그들이 (또한 우리가) "에덴의 동쪽"에서 서로 멀어진 상태로 유배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분리된 자아의 탄생은 우리가 "타락"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우리 인생의 초기 단계에 겪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경험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아담과 이브가 이 자아의 탄생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우리는 자아의식 없이는 성숙한 인간으로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타락"인 것은 이것이 자아의식과 자기중심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서로 멀어져서 유배생활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리의식과 자기관심은 성장을 하면서 점차로 더욱 강해진다. 일반적으로 "사회화"라 불리는 이 과정은 자기 안에서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받은 중심적인 "메시지들"을 내면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회화 과정에는 기본적으로 언어가 포함되는데, 이 언어를 통해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개념화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세상을 나누어버리게 된다. 또한 사회화 과정에는 세계관이 포함되는데, 세계관이란 무엇이 실재하며 무엇이 가능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화 과정에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과 같아야 하는지에 관한 메시지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부모의 메시지, 문화적 메시지,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종교적 메시지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 결과 우리는 더욱 깊은 자아의식과 자기관심의 세계 속으로 내려가게 된다.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 방식은 "세계"에 의해 더욱 분명하게 형성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성장과정에서 세계를 내면화한다는 뜻이다. 아이들의 세계, 그 신비하고 주술적인 세계는 점차 더욱 더 우리의 뒤에 남게 된다.
미국의 계관시인 빌리 콜린스(Billy Collins)의 시 속에는 아동기가 끝날 때 경험하게 되는 상실의 아픔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시의 제목이 "열 살이 되면서"(On Turning Ten)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 생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내게
무언지 모를 것과 함께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
배 아플 때보다 더 싸르르하게 기분 나쁜 그 무엇
희미한 불빛 아래서 책 읽을 때 아팠던 머리보다
더 어질거리며 기분 나쁜 그 무엇
정신의 홍역 같은 것
마음이 시무룩해지는 것
흉측한 영혼의 수두(水痘)보다 더 볼성사나운 기분 나쁜 그 무엇.
당신은 내게 뒤돌아보기에는 아직은 너무 이르다고 했지요.
그러나 그건 당신이 하나의 완전한 단순함과
둘이 함께 하는 아름다운 복잡성을 잊었기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나는 내 침대에 누워서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답니다.
네 살 때 난 아라비아의 마법사였지요.
내가 우유 한 잔을 요령껏 마시면
나는 날 안 보이게 만들 수도 있었답니다.
일곱 살 때 난 군인이었고, 아홉 살 땐 왕자였지요.
그러나 이제 난 창가에 마냥 앉아서
오후의 늦은 햇살을 바라봅니다.
옛날에도 햇살이 나무 위에 지은 내 집 곁을
이토록 진지하게 비춘 적이 있었던지요
내가 타던 자전거도 새파란 속도가 다 빠져나간 채
오늘처럼 이렇게 차고 곁에 팽개쳐진 적이 있었던지요
나는 내게 말합니다 이게 슬픔의 시작이라고.
운동화를 신고 이 세계를 스쳐가면서
이제는 내 상상 속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할 시간
열 살이라는 큰 숫자가 되는 시간
내 몸 속엔 온통 빛밖에 없다던 생각이 바로 어제일 같은데
당신께서 나를 베어내면 빛이 눈부시게 내게서 빛났을 터인데.
이제 나 삶이라는 길 위에 넘어지면
무릎이 깨질 뿐입니다. 피를 철철 흘리며.
우리가 청소년기 초기에 도달할 때까지는, 아마도 그보다 더 일찍,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우리의 의식은 점차 문화의 산물이 되어간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우리가 내면화시킨 메시지들의 정도에 따르게 된다. 우리의 문화에서는 이런 메시지들이 외모(appearance), 성취(achievement), 재산(affluence)을 중심으로 한다(3A's라 한다). 즉 청소년들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문제들은, 우리가 충분히 매력적인가? 우리는 충분히 잘 나가는 사람으로 보이는가? 우리는 돈 씀씀이가 괜찮은가? 하는 문제들이다. 어른들이 되면, 매력의 문제는 계속되지만 성취와 재산의 문제만이 아니라, 친밀성, 예민함, 돌보는 자세도 문제가 된다. 나는 넉넉한가? 나는 충분히 괜찮은가?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더 분리와 소외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자신과 타인들을 비교하고 판단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이 "거짓 자아"(false self)라 부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거짓 자아란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며 주어지는 자아를 말한다. 프리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내면이 밖으로 나아가는(from the inside out)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외부가 내면으로 들어오는(from the outside in) 삶을 살고 있다.
우리가 유배상태로 타락한 것은 그 뿌리가 매우 깊다. 인간의 조건에 관한 성서의 묘사는 처절하다. 인간의 자아는 분리되고 자기에게만 관심을 기울여, 눈이 어두워지고, 자기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으며, 교만하고, 근심이 많고, 집착하며, 불쌍하며, 둔하며, 분노하고 폭력적이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위대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그럴 따름이거나 "신통치 않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장님이며 깨닫지를 못한다. 우리는 이집트의 노예로 살거나, 바빌론에 포로가 되거나 하며, 때때로 우리 자신이 이집트와 바빌론이 된다. 우리는 심지어 희생자이며 동시에 억압자가 될 수도 있다. 특별히 집단으로서는 우리가 잔인하며 억압적일 수 있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저지르지 못하는 죄악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이며 신비주의자인 파스칼(Blaise Pascal, 1623-62)은 인간의 선과 악의 능력에 대한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의 위대함과 우리의 비천함은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그 놀라운 모순을 설명해야만 한다." 우리의 놀라운 모순에 대한 성서의 비전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에덴의 동쪽," 그 낙원 바깥에서 소외와 자아집착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장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자기가 되는 과정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우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무도 이런 인간 조건을 회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다. 중생은 우리가 유배된 상태로부터 되돌아오는 길이며, 우리의 참된 자기를 회복하는 길이며, 외부가 내면으로 들어오는 삶이 아니라 내면이 외부로 나아가는 삶을 살기 시작하는 길이며, 우리의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이기심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거짓 자아에 대해 죽는 일, 그 정체성과 존재 방식에 대해 죽는 일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중심을 잡는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이것은 자아에 대한 새롭게 정의하는 내면적 과정으로서 그 과정을 통해 우리들 속에 참 사람이 태어나는 과정이다.
중생의 과정
중생의 체험은 갑작스러울 수 있으며 극적인 체험일 수 있다. 이 체험에는,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서 사울이 체험하고 바울이 되었던 것과 같은, 극적인 계시와 인생을 변화시키는 신의 출현이 관계될 수도 있다. 이런 극적인 회심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체험을 한 날짜와 시간까지 밝히곤 한다. 이런 "급작스런 회심"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윌리엄 제임스는 수많은 이런 체험들을 보고할 뿐만 아니라, 이런 체험들이 가장 두드러진 심리학적 현상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에게는, 다시 태어나는 중생 체험이 단 한번의 강렬한 체험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이다. 과거의 정체성에 대해 죽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태어나는 것, 과거의 존재 방식에 대해 죽고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태어나는 것은 일생 동안 계속되는 과정이다. 기독교인의 삶이 성숙할수록 더욱 깊이 성령을 중심으로 한 삶이며, 예수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성령을 중심으로 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이런 과정이 시간이 걸린다. 심지어 자신이 거듭난 시간을 밝힐 수 있는 사람들조차도 새로운 인생을 살아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물론 영혼이 진보하는 것이 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을 가로막기도 하며, 방해하기도 하며, 차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삶에서는 나이를 먹는 것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성령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의 삶이 더욱 깊어지는 길이 될 수 있다. 청년기와 중년기에 받은 메시지들과 유혹들이 약하게 되며,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으며, 더욱 쉽게 하나님과 더불어 침묵 속에 지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더욱 우리의 중심에 모심으로써 우리의 삶이 변화된다. 기독교인의 삶이 성숙하게 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는 데 동반되는 자기 망각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중생이라는 은유는 단 한번의 극적인 사건 혹은 평생의 과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보다 짧은 리듬에도 적용된다. 그것은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중요한 변화의 기간 동안에 여러 차례 일어날 수 있는 과정이다.
중생은 심지어 일상생활의 작은 리듬에도 적용된다. 나의 소년시절의 영적인 스승이었던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매일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에 대해 말하는데, 약간 옛날 투로 말하자면, "옛 아담에 대해 매일 죽는" 것, 곧 우리들 속의 옛 자아에 대해 매일 죽는 것을 뜻한다. 루터는 "매일"이란 단어를 덧붙임으로써 누가복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 과정이 "매일" 일어난다는 것은 나의 경험에 맞을 뿐 아니라 내가 아는 많은 사람의 경험에도 맞는다. 하루의 생활에서 나는 때때로 나의 짐이 무거운 것을 느끼는데 그 원인은 내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나 자신에게 하나님의 실재를 환기시킴으로써 나는 때때로 존재의 가벼워짐을 느끼는데, 이것은 나의 자기집착과 짐처럼 느껴지는 감금상태에서 벗어남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무덤으로부터 나오도록 부름받고 있다.
이 과정은 기독교만의 심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참 종교들의 심장에도 있다. "길"을 따른다는 이미지는 유대교에도 흔한 이미지이며, 그 "길"은 새로운 심장,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새로운 자기와 관련되어 있다. "이슬람"이라는 말의 뜻 가운데 하나는 "항복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심으로써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항복하는 것이다. 무하마드는 "너희가 죽기 전에 죽어라"고 가르쳤다. 당신이 육체적으로 죽기 전에 영적으로 죽어라. 당신이 문자적으로 죽기 전에 은유적으로(또한 실제로) 죽어라. 불교의 길의 중심에는 "내려놓음"이 있다. 이것은 과거의 존재 방식에 대해 죽고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똑같은 내면적인 길이다.
도교와 선불교 모두의 기본 문서인 {도덕경}에 따르면, 노자는 "당신이 가득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 자신을 비우도록 하라. 당신이 다시 태어나고 싶으면, 당신 자신이 죽어라"고 말했다.
이처럼 개인적인 영적인 변화의 과정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중생,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 성령 안의 생활이라 부르는데, 이런 과정은 세계 종교들에 중심적인 것이다. 이것을, 예수는 "길"이라고 가르친 요한복음의 고백과 연결시키면, 예수가 성육한 길은 보편적인 길이지, 배타적인 길이 아니다. 예수는 오랜 역사를 거친 종교들을 통해 알려진 변화의 길을 구현하고 성육한 분이다.
예수의 길과 세계 종교들의 길 사이의 이런 공통성을 인식하는 것은,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친 교회 역사를 볼 때, 때로는 기독교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통성은 놀랄 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외침대로, 성령이 무슬림들, 불교도들, 유대인들, 힌두교도들에게도 주어졌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독교인의 길을 철저하게 독특한 것으로 간주하면 그것은 미심쩍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다른 곳에서도 보편적으로 말해진 길을 성육한 분으로 이해하면, 그분 안에서 우리가 깨닫는 길은 훨씬 더 큰 신빙성을 갖게 된다.
중생: 의도성
중생은 성령의 역사다. 중생이 갑자기 일어나든지 아니면 점진적으로 일어나든지 간에, 우리는 강렬한 욕망과 결심에 의해서나 혹은 올바른 믿음체계를 배우고 믿는 것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도록 우리 스스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의도할 수는 있다. 비록 우리가 중생이 일어나도록 만들 수는 없지만, 그 중생 과정의 산파(産婆) 역할을 할 수는 있다. 이것이 영성의 목적이다. 즉 새로운 자기가 태어나고 새로운 삶을 양육하기 위해 돕는 것이다. 영성은 산파인 셈이다.
영성은 인식, 의도, 수행을 결합한 것이다. 나는 영성을 정의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식하며 더욱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가도록 의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정의는 매우 치밀한 단어 선택을 통한 정의이다. 우선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의식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 관계 속에서 살아왔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 속에 계신다. 영성은 이처럼 이미 존재하는 관계에 대해 의식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의도하게 되는 것이다. 즉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은 "신비"이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는 신비한 것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즉 그 관계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전념하며, 생각을 깊이 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수행을 통해서 하는데, 집단적인 수행과 개인적인 수행, 곧 예배, 공동체, 기도, 성서, 경건의 시간 등의 수행을 통해서 한다. 수행에 관해서는 10장에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과 더욱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친숙한 주제가 된 것처럼, 기독교인의 삶은 믿음의 조항들을 믿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분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며 움직이며 존재하는 분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는 것이다. 이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가 변화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이루어야 할 목표이다. 즉 "실재"(what is) 곧 "그 이상"(the More)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영성은 다시 (또 다시 그리고 또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에 놓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또한 교회로서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기독교 전통의 풍부한 영적인 수행들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수행들을 배우고 그런 수행들을 이용할 것을 격려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교회라는 공동생활을 하는 중심적인 목적들 가운데 하나는 중생의 과정의 산파가 되고 그 과정을 양육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주류 교회들 안에서 영성과 영적인 수행을 회복하는 것은 기독교 문명의 고무적인 신호다. 이것은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신앙과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좀 더 관계를 맺는 관점과 체험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을 강조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새로운 삶
중생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실제로 새로움은 중생의 결정적인 특징이다. 이런 체험을 가장 극적으로 체험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곧 잔인한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갇혔거나, 노예 상인으로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작사한 존 뉴턴(John Newton) 같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는 이미지는 희망이 넘치며, 끝장난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서 새로운 시작을 나타내는 이미지다. 항상 은총과 중생이 가능하다.
또한 중생은 다른 종류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에는 결과가 뒤따른다. 중생은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중생은 "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 불리는 계속적인 변화의 과정이 시작되는 변화다. 신약성서는 한결같이 새로운 삶에 대해 말한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삶은 열광적(rhapsodic)이며 동시에 현실적(realistic)이다. 새로운 삶의 현실적인 모습은 복음서들, 서신들, 요한계시록 모두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문제들에 대해 노골적인 혹은 암시적인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새로운 삶의 열광적인 측면이다. 새로운 삶이란 무엇과 같은가? 그것은 무척 매력적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다시 연결된 삶이다. 집을 떠나 유배자를 떠돌던 탕자가 집에 되돌아와 환영받는 삶, 귀신에 사로잡혔다가 고침을 받아 제 정신을 차리게 되고 다시 공동체 안에서 회복된 삶,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살던 여인이 일어나 건강을 회복한 삶, 자신의 사랑을 통해 구원받은 여인의 삶,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삶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해 가장 특별한 표현으로 말한다. 새로운 삶은 바울이 가장 즐겨하는 네 단어, 곧 자유, 기쁨, 평화, 사랑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이다. 즉 우리 인생의 모든 가짜 수령들(lords)의 음성들로부터 자유를 얻은 삶이며, 풍성한 삶의 기쁨, 하나님과 다시 연결된 평화로서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들 속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삶이다.
바울을 비롯해서 신약성서의 다른 저자들은 중생한 사람의 이런 새로운 삶의 특징을 한결같이 성령의 "열매"와 "선물"로 이해한다. 그것은 인간이 수고한 열매가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존재 방식의 열매다. 즉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삶의 열매인 것이다.
바울이 새로운 삶에 대해 묘사한 가장 유명한 대목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데, 이 장은 흔히 바울의 "사랑의 찬송"이라 불린다.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맥락 자체가 사랑이 "성령의 선물들"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해준다. 이 선물들에는 예언, 지혜, 치유, 방언, 방언의 해석이 포함된다. 그리고 13장에서는, 불행하게도 흔히 그 맥락에서 따로 떼어내어 읽기는 하지만, 바울은 사랑에 관해 성령의 다른 선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말한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13:1-3)
이런 고백은 13장 끝에서 바울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세 가지에 대해 기억하기 쉽게 말한 것에도 다시 나온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바울에게는 사랑이 성령의 일차적인 선물이며, 실제로 가장 결정적인 선물이다.
이것은 예수도 마찬가지다. 예수에게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삶의 일차적인 특징은 '함께 아파하는'(compassion) 연민이다. 예수는 자신의 신학과 윤리를 간략히 요약하여, "너희의 아버지께서 함께 아파하시는 것 같이, 너희도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되어라"(누가 6:36, 옮긴이 私譯)고 말씀하신다. 바울이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한 곳에서 예수는 "함께 아파함"이라는 말을 사용하신다. 이 말이 아람어와 히브리어에서 연상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일깨운다. 즉 함께 아파하는 연민을 갖는다는 것은 "자궁과 같은" 것이 됨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낳고, 양육하며, 포옹하는 마음을 뜻한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사랑 안에서 상장하고 함께 아파하는 연민 속에서 성장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의 삶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것은 또한 진정으로 중생한 체험과 단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체험을 구분하는 가장 일차적인 기준이다. 이것은 또한 윌리엄 제임스가 "그들의 열매를 보아 그들을 안다"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여 주장한 실용적인 테스트이기도 하다. 그 열매는 사랑이다. 실제로 그런 열매는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