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정현 신부 ‘애타는 사모곡’
〈이 글은 인권·통일 운동가인 문정현 신부(64·전북 익산 ‘작은자매의집’)가 어버이날을 맞아 지난 1일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장순례 여사를 그리며 경향신문에 특별 기고한 것입니다. 문신부는 어머니가 평소 개인의 안일보다 사회 헌신의 길을 강조해 4남3녀를 신부 2명, 수녀 1명 등으로 올곧게 키우셨다며 자식으로서 임종을 못한 죄스런 마음을 나이든 소년으로 돌아가 쓴 편지로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엄마, 당신께서는 이미 먼저 가신 김후상 신부님과 아빠가 하늘에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아들 딸은 물론 며느리, 사위의 이름까지 또렷하게 부르시고, 임종이 아주 가까워서는 “주여, 저희를 구해주소서”를 연거푸 염송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저 둘째 정현이의 이름도 또렷이 부르셨다는데, 저는 엄마의 눈앞에 나타나지 못하였습니다. 엄마, 저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셨어요? 엄마, 이 순간 저는 너무도 안타까워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글을 씁니다. 긴 세월 이렇게 눈물을 흘릴 것만 같습니다. 엄마, 저는 마지막까지 엄마를 애타게 해드렸습니다.
그런 아픔 하나 하나가 제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 1975년 늦은 봄 안기부원과 경찰이 느닷없이 닥쳐들어와 저를 연행하려 했을 때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타도’라는 문건을 찾는다며 텃밭까지 팠으니 엄마의 애간장은 다 녹았었지요? 엄마는 그 이후 연행의 기미만 있어도 문건이라는 문건을 다 태우며 아들을 위하셨습니다.
1976년 3월1일 삼엄한 분위기 속에 그날 저녁 명동성당 시국미사를 마치고 늦은 밤에, 아주 늦은 밤에 돌아와 엄마의 품에서 잠을 자던 중 새벽 4시 경찰들이 들이닥쳐 저를 끌고 갔습니다. 얼마나 놀라셨어요? 그러나 엄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의연하셨습니다.
-품안의 아들 빼앗기고도 의연한 당신-
그러고 나서 5월3일 셋째 규현이(전북 부안성당 신부)가 서품(敍品)을 받았습니다. 저는 당연히 서품식에 참석해야 했습니다만 감옥에 있어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서품 다음날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둘째 저를 처음 면회하셨습니다. 엄마, 저는 엄마가 저를 보시자마자 실신하실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눈물은커녕 “우리 아들 김대건 신부님 되어야 해” 하시며 도리어 아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그 이후 김대건 신부님의 작은 상(像)을 제 머리맡에 놓아주셨습니다. 간혹 치워져 있으면 다시 찾아 놓으셨습니다.
1989년 셋째가 저쪽 ‘금기의 땅’ 이북을 임수경 수산나와 함께 방문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온갖 비난의 목청이 높았을 때 엄마는 골방에서 보시던 텔레비전을 끌어안고 오열하셨습니다. 그때 엄마의 모습은 진짜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떼어낸 엄마는 저의 바지 가랑이를 잡고 얼마를 우셨습니까. 엄마, 저만 아는 일입니다. 제가 “엄마, 엄마의 아들은 역사에 기념비가 될 것입니다”라며 위로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엄마는 “나는 그런 것 몰라”라고 하셨죠. 세상 무엇보다 아들이 더 큰 것이었지요? 그렇게 아끼시는 아들을 사제로 내주셨습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을 내주셨습니다. 엄마 아빠는 진정 아브라함의 믿음을 간직하셨습니다.
몇 개월 후 셋째 규현 신부의 첫 면회에 엄마는 본 모습을 감추셨습니다. 수갑을 찬 아들을 보시고도 당당하셨습니다. 수갑을 찬 아들 곁에 앉으시자 제게 말씀하신 대로 “우리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되어야 해.” 당당하신 저희 엄마이셨습니다. 엄마, 그 눈물을 어디다 감추셨는지요. 아~ 당당하신 우리 엄마, 벌써 뵙고 싶습니다.
-믿음으로 두아들 사제의 길 허락-
문규현 신부가 공주교도소에 갇혀 있을 때 남북 고위급회담에 참석했던 연형묵이 김일성 주석의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당시 통일부 직원이 전달하였습니다. 그 직원은 선물의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려 했습니다. 사흘간 옥신각신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 싸움을 가까이 지켜 보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작은 아들 신부는 감옥에 갇혀 있고 큰 신부는 정부와 싸우고. 이 모습을 보시던 엄마의 속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아픈 위를 다스리려 ‘안티플라민’을 ‘겔포스’로 아시고 마셨지요. 엄마가 돌아가시는 줄만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 때도 저를 찾으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를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한데, 엄마의 위암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80객이신 엄마의 몸에 수술을 할 것인지 옥신각신 끝에 수술을 받고 다행히 나으셨습니다. 수술에 겁을 먹는 환자들에게 이 늙은이도 수술을 받아 살았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엄마는 4남3녀 자식을 위해 매일 묵주 알을 굴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저희의 복을 빌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서서 옳은 일을 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찾아오는 분들께 따뜻하게 해주셨습니다. 서품식·생일·대축일·명절, 이런 구실을 찾아 잔치를 마련해주셨습니다. 엄마가 제 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엄마,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제 사제 생활 반은 엄마가 해주셨습니다. 멀리서 찾아온 분들께 당신 친히 지으신 농산물을 직접 캐다 나누어 주셨습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아들이 사제가 되는 것을 그렇게 원하셨습니다. 아들을 강박하신 일은 없습니다. 본당 신부님을 통해 아들 자신이 스스로 택하여 사제직을 향하여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지나고 보니 험난한 길인데 그 길을 원하셔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묵묵히 지켜주셨습니다.
6·25전쟁 때 하느님의 뜻에 따르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기도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봐 저희를 한 이불 속에 품어 안으시고 순교를 가르치셨습니다. 감옥살이를 하면서 엄마 아빠가 가르쳐 주신 대로 위기가 오면 순교를 생각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 정변에 쇠창살문이 열릴 때마다 벌떡 일어나 당당하게 순교의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이불속에서 순교 가르쳤던 당당함-
엄마, 제가 고등학교 3년, 대학 6년, 유학 2년을 배웠어도 엄마한테 배운 것만 남아 그대로만 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신앙의 삶을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엄마이십니다. 그리고 평생 제 곁에서 지켜주셨습니다. 엄마, 엄마는 아직도 저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바라보시는 엄마의 눈매가 두렵기도 합니다. 엄마는 가난한 이와 병자를 사랑하시던 본당 신부님을 존경하셨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가난한 집에 쌀을 가져다 솥에 넣어 주셨습니다. 언제 일하시고 언제 초상집마다 가셔서 온갖 일을 도우셨는지 생각하면 기적과 같습니다.
병상에 누워계신 동안 마음으로는 자주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몇 주를 건너 뵙게 되면 “왜 인제 와?” 간절한 마음으로 혼을 내듯 말씀하셨습니다. “엄마, 저 그동안 바빴어요” 하고 말씀드리면 생각 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응, 그래 신부는 바쁘게 살아야 해.” 엄마를 뵙는 것보다 사제의 일을 더 중하게 여기셨습니다.
-聖母聖月에 가신 엄마 영원한 안식을-
엄마, 저의 익산 황등초등학교 시절, 겨울철 눈이 와도 눈썰매가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대나무 토막을 갈라 발 밑에 놓고 미끄러졌습니다. 대나무조차 귀했지요. 썰매를 타고 싶은 저는 남의 집 대나무를 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 정자네 집 대나무를 몰래 꺾었다가 아빠한테 들킨 일이 기억납니다. 남의 물건을 훔쳐 10계명을 어긴 자식에 대한 가르침은 가혹하였습니다. 꺾은 대나무를 들고 앞집 아저씨의 용서를 빌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아저씨한테 가 용서를 청하는 것은 할 수 있겠는데 그 분의 딸인 여자 동창생 정자의 눈길이 더 무서워 망설였습니다. 그 때 우리 엄마는 저의 천사였습니다.
온갖 위로의 말씀으로 용기를 주시며 제 손을 잡고 아저씨 앞에 데려다 주셨습니다. 정자는 문틈 사이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제 앞에 서서 정자의 시선을 막아주셨습니다. 용서를 청했습니다. 아저씨는 혼을 내기는커녕 아빠를 칭찬하시면서 좋은 대나무 하나를 더 꺾어 주셨습니다.
엄마, 저는 지금 눈물을 흘립니다. 엄마의 손길이 벌써 그립습니다. 그런 우리 엄마를 더 이상 부를 수 없습니다. 엄마~.
아빠는 세례명을 받은 제 본명축일(本名祝日) 전날 돌아가시더니 엄마는 셋째 규현이의 서품 기념일에 하늘로 떠나셨습니다. 우리 엄마는 성모성월(聖母聖月)인 5월의 첫날, 바로 노동절에 돌아가셨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엄마 아빠를 길이길이 기억하라는 배려가 아닌가 싶습니다. 엄마 아빠! 이 생을 다하도록 기억하겠습니다. 엄마,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문정현신부/전북 익산 ‘작은자매의집’〉
|
첫댓글 근래들어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눈물이납니다
추석 뒷날 찾아가 뵌 어머니는 좀 수척해지셨지요
아프다는 말도 듣기싫어할까봐 여사님을 비롯 간호사에게도 아무 말씀 안하신다는군요
주말마다 만나는데도 왜 돌아서는길엔 눈물이 날까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항시 제 곁에 계셔주세요
그리고 모시지못하는 불효를 용서해주세요
어머니......
그래요. 어머니는 오래 참고 끝까지 견디며 사랑을 완성하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그런 분이 오직 어머님 한 분 이시기에 그 분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쓰리고,미안하고, 죄스럽고 그리고 외롭고 쓸쓸하며 빚진 자가 됩니다. 그래도 용서를 빌 어머니, 부르면 '오냐' 하고 대답해 줄 어머니가 생존해 계심은 그것만으로도 하늘의 축복입니다. 영희 씨의 어머님, 함께 사랑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