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이니 오십 년쯤 전이다.
그때도 약사동 산동네의 언덕 위에는 망대가 있었다. 나는 한마을의 동급생인 P, Y와 함께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춘천에 나왔다가 우연찮게 이 망대를 처음 보았다. 춘천에서 교대를 다니던 P의 작은형이 시험기간 동안 우리들의 보호자 역할을 맡았는데, 어느 여관을 숙소로 정하려다 안 되겠던지 자신의 고교 동창 집을 찾아갔다.
약사리고개에서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하게 들어선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서 도착한 산동네의 조그만 기와집이었다. 마침 집에 있던 동창생은 갑작스런 불청객에 난처해하면서도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유숙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방을 우리에게 내주고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불비한 여건이었는데도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은 의리 있는 고마운 분이었다.
그날, 일찍 저녁을 먹고 마당으로 나가니 검은색 제복 차림의 아저씨가 연탄 한 장을 새끼줄에 꿰어서 들고 우리가 묵는 집 앞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낯설기도 했지만 시골 학생의 눈에 신기했다. 셋이 아저씨 뒤를 따라 조금 올라가니 정상에 사각형 통모양의 높다란 구조물이 나타났다. 약사동 망대였다.
아저씨는 궁금해 하는 우리에게 ‘화재를 감시하는 망대’라고 일러주고는 연탄을 들고 안으로 사라졌다.
주위는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우리는 망대의 언덕에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한겨울의 세찬 바람이 차갑게 스쳤다. 합격할 수 있을까? 셋은 다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처음 보는 낯선 도시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보다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중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무리한 응시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발아래 불야성을 이루며 반짝이던 시가지의 불빛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망대는 이렇게 시린 가슴을 졸이던 곳으로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후 학창시절은 물론이고 지금껏 춘천에 살면서도 망대를 가보지 못했다. 먼 곳에서나마 망대가 보이면 중3 때 며칠 묵었던 그 기와집과 비장했던망대의 언덕이 아련하게 떠오르곤 했지만 다시 가는데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나보다.최근에야 비로소 지척에 두고도 가보지 못했던약사동 망대를 만나러 나선 것이다.
망대마을의 전도사 격인 고교 후배 전종남 과장이 안내를 자처하며 약사동 산동네로 나를 데리고 갔다. 전 과장은 망대 소재지인 약사명동의 동장을 여러 해 지냈는데 그런 인연과 경력 때문인지 본인의 블로그를 통해 망대와 망대골목 이야기를 널리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활동 덕분이랄까, 망대 내부와 옥상까지 돌아보는 행운이 따랐다. 망대의 옥상에 서니 늦여름의 청명한 춘천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동쪽의 대룡산을 시작으로 금병산, 삼악산이 마치 병풍 같이 펼쳐 있고 공지천과 북한강의 정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춘천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망대의 설치시기를 전 과장에게 확인했으나 정확한 연대는 잘 모른다며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화재 감시를 위하여 지대가 높은 약사동 산꼭대기에 망대를 설치했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일설에는 인근에 있었던 형무소의 감시탑으로도 쓰였다고 하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현재는 민방위 경보시설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옛날과 달리 검은 제복의 아저씨를 따라 망대로 올라가던 길은 막히고 앞마당이 있던 자리까지 집들이 지어졌다. 지금의 망대로 오르는 계단 골목길은 또 다른 길인데 이마저 망대 밑에서 끝나고, 여기에 조그만 철 계단을 놓고 겨우 오르내리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망대 벽체 가까이까지 주택들이 꽉 들어서 있다.
망대에서 내려와 중3 때 묵었던 기와집을 찾았다.
예전의 모습이 오롯이 남아있는 동네였지만 그 집이 그 집 같아 찾기가 쉽지 않다. 기억을 더듬으며 몇 번을 오르내린 끝에 형태와 위치로 보아 확신이 가는 한 집을 지목했다. 나는 닫혀있는 대문 틈으로 집 안을 들여다보며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반세기의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작은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친구 집에 숙소를 정한 P의 작은 형은 우리를 약사리고개 길옆에 있는 목욕탕으로 데리고 갔다. 이를테면 목욕재계의 의미가 있었는데, 홍천 내촌의 산골에서 공중목욕탕이라고는 구경도 못했던 탓에 탈의장에서부터 부끄러워 옷을 다 벗지 않고 서로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했다. 그러는 중에 조카였지만 나보다 한 살 많은 P가 용감하게 내복 차림으로 욕탕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그제야 나와 Y도 내복을 입은 채 P를 따라 갔다. 그때 이 해괴한 광경을 목격한 목욕탕 주인이 쫓아왔다. 주의를 단단히 받은 후 하는 수 없이 내복을 벗고 알몸이 되어서야 욕탕 입장 자격(?)이 주어졌다. 그 상황에도 앞부분만은 손으로 가리고 엉거주춤해 탕으로 들어가는데 촌극도 그런 촌극이 없었다. 한바탕 망신을 떨고 목욕탕에서 돌아오니 농과대학생이던 P의 작은형 친구는 우리를 모아 놓고 시험 대비를 위한 문제 풀이를 시켰다. 당장 내일 시험을 보아야 하는데 수준이 걱정되었는지 답답해하면서도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애를 썼다.
얼마 뒤의 일이지만 셋 중 P만 합격을 하고, 나는 걱정했던 대로 보기 좋게 낙방을 하여 대학도 아닌 고교진학을 위해 재수를 하는 신세가 된다. 합격하여 춘천에 오면 인사드리러 오겠다고 했던 말은 구두선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게 오십 년 만인가….
전 과장이, 아리랑고개라고 불리는 또 다른 골목으로 가자며 한참 생각에 잠긴 나를 재촉했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좁다란 골목으로 이어지는 아리랑고개는 6, 70년대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망대와 함께 골목 투어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춘천의 중심가에 이런 골목이 남아있다니…’ 춘천에 수십 년 살았지만 처음 와보는 골목이었다.
약사동 망대마을은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땅의 주인이 없다시피 한 망대 주변으로 몰려들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춘천의 곳곳이 상전벽해라 할 만큼 변했건만 시간이 정지된 듯 아직까지도 반세기 전의 틀 속에 갇혀있다.
몇 년 전부터는 조합이 구성되어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에 반대하는 플래카드도 눈에 띈다. 언제까지나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일까, 춘천 소재의 공연기획사인 ‘사단법인 문화공작소 낭만’은 “춘천에서 오래된 건축물 중의 하나로 많은 세월과 사연을 간직한 ‘망대’,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주제로 휴먼건축다큐 독립영화 〈망대〉를 제작해 망대와 주변 골목의 모습 그리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주민들의 증언을 영상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제 재개발이 성사되면약사동 망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개발이 되어도 망대만은 그대로 두거나 원형대로 옮겨야 한다는 말도 들린다. 그럴만한 가치와 의미를 애써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땅을 강점했던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기나긴 세월 풍상을 맞으며 춘천 사람들의 애환을 지켜 본 망대가 아니던가.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되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부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책 없이 망대의 앞날이 걱정스럽다.
오십 년 세월의 뒤안길에 늘 마음의 한편에 담아두었던 춘천과의 첫 사연이 서린 산동네 언덕에서,
홀로 선 망대의 처연한 모습을 뒤로하려니 떠나는 발걸음이 더디기만 하다. (2018년 길 제3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