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교수님경영정보학부 20192814 김상엽입니다.
4월 6일 수업을 듣고 궁금한 점이 생겨 질문 드립니다.
1. 신라에서 불교가 처음에는 비난을 받다가 왕의 신임을 받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2. 화랑 출신이었던 김웅렴에게 왕비를 주었을 때, 왕위를 계승하는 문제에 신하들의 반대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3. 궁예는 도적 생활을 통해서 힘을 키웠는데 그 당시 도적을 토벌하는 군부대 같은 조직이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첫댓글 16번째. 3가지 좋은 질문 감사드립니다.신라는 왕권보다는 귀족의 힝이 더 강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자신들이 에전부터 갖고 있던 샤마니즘 신앙을 고수했구요.하지만 왕권 강화를 추구하는 왕에게는 불교가 더 좋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다음으로 김응렴으로의 왕위계승에 불만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실제로 삼국사기 경문왕대를 살펴보면, 귀족들의 반란이 여러 건 보입니다.궁예와 견훤 및 왕건이 활동하던 당시에, 신라 중앙정부의 공권력은 거의 와해된 상황이었구요.신라의 공권력은 경주 일대를 벗어나면 거의 맥을 못추는 상황이었습니다.그러다보니 지방의 호족(도적으로 표현되기도 함) 세력들이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도세력으로 등장했다고 보시면 됩니다.좋은 질문 감사드리구요.앞으로도 많은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역사저널 그날 - 고대사 인물열전 ‘선택’ 5부작 제 2편 - 김헌창, 반란 혹은 혁명; 2.29.
첫댓글 16번째. 3가지 좋은 질문 감사드립니다.
신라는 왕권보다는 귀족의 힝이 더 강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자신들이 에전부터 갖고 있던 샤마니즘 신앙을 고수했구요.
하지만 왕권 강화를 추구하는 왕에게는 불교가 더 좋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김응렴으로의 왕위계승에 불만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삼국사기 경문왕대를 살펴보면, 귀족들의 반란이 여러 건 보입니다.
궁예와 견훤 및 왕건이 활동하던 당시에, 신라 중앙정부의 공권력은 거의 와해된 상황이었구요.
신라의 공권력은 경주 일대를 벗어나면 거의 맥을 못추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방의 호족(도적으로 표현되기도 함) 세력들이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도세력으로 등장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좋은 질문 감사드리구요.
앞으로도 많은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역사저널 그날 - 고대사 인물열전 ‘선택’ 5부작 제 2편 - 김헌창, 반란 혹은 혁명; 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