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부터는 왠지 좀 버거워지는 느낌이다. 지나간 앞의 내용들 보다 좀더 집중력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예수마음 제자반을 하면서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이것은 늘 나에게 청진기를 대보는 것이다. 곧 정체에 대한 나 스스로의 진단이다.
당신의 행동을 진단한다 네번째에서 먼저 베드로를 살펴본다.
1. 베드로의 자기인식과 정체성
진짜 정체성을 알게되는것에는 예상밖의 긴급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정체성을 알 수있다 말한다.
한 인물의 예로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과 그로인한 예수님 배반 사건을 보게된다.(마26:75) 이를 볼때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정체성과 상황에서 잔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행동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슴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서 우리도 우리의 행동을 진단해본다. 정체성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기인식과는 별개로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의 결정과 행동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동기인 것이다. 우리는 정체성은 하늘의 속한 자라 머리는 생각하고 있으나 실제로 보이는 정체성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것이라 할 수있다. 지식으로 알고있는 자기의 신앙수준 곧 관념적인 신앙은 부족함이라기 보다 잘못된 신앙임을 말할 수 있다. 그 예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달리 삶의 모습이 다른 바리새인들의 정체성을 보면 알 수 있다. 지식은 있으나 그리고 말은 하되 삶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그 반대 행위를 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면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보이는 걱정스러운 특징이 아닐 수없다.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교육들이 이론중심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중심 그리고 실천 중심적으로 바뀌어야 할것이다. 이 말은 곧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말과 행위의 격차를 줄이는 일이 실제 정체성을 세워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있다.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 그 믿음은 곧 실천까지의 행위가 살아있는 믿음인 것이다.
2. 처음 사랑인가, 식었는가?
요한계시록의 주님께서 일곱교회들에게 보내라하신 편지의 내용으로 살펴본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전에 각 교회들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진단해 보라는 뜻으로 행하신것이다.
먼저 에베소교회를 보자면 그들의 정체성속에는 교회로서의 본질인 사랑 곧 처음사랑이 빠져있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빠진채 그저 종교활동만을 열심히 했던 것이다.(계2;2-3) 하나님은 에베소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과 그 행위가 쇠퇴해져가는 것에 대해 그 잘못을 찾고 다시 회복시키라는 뜻을 보여주신것이다.(계2:4-5) 이름은 교회이나 하나님이 바져있는 교회...
우리가 신앙을 갖고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고 교회를 섬긴다 한들 본질적인 처음의 사랑 곧 초심을 잃어버리면 이름만이 교회가 되고 세상 가운데 교회로서의 역할 다하지 못한다는 말이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것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3. 궁핍한가, 부요한가?
이 장에서는 서머나 교회와 라오디아 교회에 대한 내용이다.
서머나 교회
외적으로는 궁핍하고 환난이 많으며 가난한 교회였으나 훌륭한 정체성의 교회였던 것이다. 내적으로 마음이 부요한 교회였다고나 할까. 수준 높은 정체성 그리고 단단한 반석의 교회의 모습으로 겉과 속이 동일한 정체성의 교회로 평가되었다.(계2:9)
이에 하나님의 권면하시고 죽도록 충성하라 하시며 격려하신다.(계2:10) 이는 어떠한 상황이 닥쳐고 하나님께 충성할 교회임을 알고 계셨기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또한 서머나 교회와 우리 자신을 살펴본다. 서머나 교회의 부요함은 외적이 아닌 내적으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풍성하다는것을 말씀하신것이다. 성령충만이라 할까...
외적으론 풍부해 보이지만 정작 내적으로 영적으로 메말라있고 가나한 모습과 반대되는 모습을 말씀하신것이다.
CCM 찬양중에 '예수로 충만' 이란 곡이 있다. 이 곡이 지금 이 장의 내용을 말하고있는듯하다. 나는 매일 이 찬양을 듣고 흥얼거리거리는 가운데 실제로 풍성하게 충전되고 충만해짐을 매일 경험한다. 현실적인 환경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곧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부요해지는것이 얼마나 삶의 최고이며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정체성인지를 알게된다.
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떠한가
하나님은 이 교회를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는 교회로 보이나 실제로는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모습이라 지적하셨다.(계3:17)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부요함와 라오디게아 생각하는 부요함의 깊은 뜻이 상반되어 있는것이다. 이는 곧 엉망이 되어있는 하나님관계의 라오디게아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교회의 성공과 화려함에서 보이는 부요함은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 없슴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로인해 뜨뜨미지근한 신앙의 모습이 될 수 있을것이라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우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계 3:15-16) 이것은 곧 우리 현대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던지시는 우려의 말씀이기도하다.
결론적으로 서머나 교회의 부요함과 라오디게아 교회의 곤고함의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하는 이야기이다.
열심과 열정 그로인한 뜨거움은 자기중심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마음가짐과 행위인것이다.
우리는 겉으로는 하나님이 있으나 실제적인 삶의 모습에는 하나님이 빠져있는 헛된 신앙인이 되지 말아야겠다.
4. 발람인가, 이세벨인가?
이 장에서는 하나님이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신 말씀으로 발람의 교훈과 이세벨의 유혹의 문제를 다룬것이다. 이 두 교회는 하나님으로 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교회의 모습(계2:13)(계2:19)이였으나 문제가 되는것은 두 교회 모두 약점이 이었기 때문이다.
버가모 교회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게 만드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켰고,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함으로 행음(영적간음, 우상숭배)하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된것에 대해 회개의 기회를 주었슴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하기가지 했다.
결국 버가모 교회는 돈의 유혹으로 인한 발람의 이단설에 대한 문제점이 생기고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생존을 위한 우상숭배의 행위가 교회를 흔드는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이라 볼 수있다. 이를 볼때 두 교회의 공통점은 결국 생존을 위한 경제적인 부분 곧 돈의 유혹이었다는것을 알 수있다. 이 또한 현대 교회와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도 흔들리도 넘어지는 현실적인 부분이라 생각한다. 돈과 성공으로 인한 안전을 무기삼아 교회와 성도들을 유혹하는 사탄의 전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전략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겐 분별력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분별력의 지혜를 구하며 늘 깨어있어야한다. 더욱더 위험한것은 정의롭지 못한 세상과의 타협에 양보라는것이 생길때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 흔들리며 죽을때 까지 빼앗기지 말아야 할 그리스인의 신앙의 자존심이 무너지게되는것임을 잊지말아야 할것이다.
5. 살았는가, 죽었는가?
이제 행동진단의 마지막 순서를 살펴본다. 이는 어찌보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해석된다.
이번에는 사데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례를 다룬것이다.
사데 교회는 살아있으나 죽은 교회이고(계3:1),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으로도 주의 말씀 붙잡고 지키며 배반하지 않는 교회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계3:8) 이는 믿음의 증거로 평가되는것이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다.(약2:14)
그렇다면 무엇으로 우리의 믿음의 생과 사를 아는것일까?
야고보는 살아있는 행위의 기준을 종교행위만이 아닌 이웃에 대한 행위로 말하고있다.(약2:15-17)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보이는 삶의 열매를 두고 이야기한것이다.
사데교회, 비라델비아 교회 그리고 나머지 교회들을 보면서 공통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존재 유무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있고 궁핍함과 부요함이 있는것이다. 따라서 가장 가까운 예의 인물로 바리새인을 자주 보게된다. 이는 곧 이 시대의 교회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비교하며 실체를 파헤치며 경각심을 갖게하고자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인다. 아울러 내가 주일 예배때 설교 말씀에서 관걔맺음이란 말씀중 가장 첫번째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상기시켜주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