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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질문
첫 번째 질문. 노벨평화상을 받은 유누스 박사의 그라민은행은 1976년도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600만명 정도에게 20만원 정도를 빌려주어 소규모 창업을 지원했고 현재 자산은 3조원 정도이다.
그런데 1970년대 초반 고리사채 금리가 연 70%를 넘어설 때 상대적 약자를 대상으로 소액의 돈을 빌려주어 1천만명 이상이 경제활동을 하도록 지원한 협동조합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2개의 협동조합의 자산을 합하면 200조원 정도에 이른다. 이 협동조합들과 그라민은행을 비교하면?
두 번째 질문. 일본의 농협은 1990년대 중반까지 농가에서 출하하는 농산물의 90% 정도를 취급하였다. 연합회 조직을 통해 도매시장에 체계적으로 출하하여 개별농가가 출하하는 것보다 더 높고 안정적인 가격을 보장했다.
하지만 그 후 15년간 농협은 현단위로 통합하면서 조합원과 관계가 멀어지고, 대형유통업체가 전업농과 직접 거래하면서 지금의 매출액은 당시의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반면 우리나라의 농업협동조합은 아직 읍면단위 농협이 대다수인 조건에서 소매유통에 뛰어들어 농식품 소매유통 시장점유율은 6%, 농가 생산량 점유율은 40%로 끌어올렸다. 현재 농협의 취급액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일본 농협과 한국 농협 중 미래가 더 밝아 보이는 곳은 어디인가?
세 번째 질문. 협동조합 관련 법이 만들어지고 난 후 10년동안 매출액이 15배로 경이적인 성장을 이룬 협동조합이 있다. 이 협동조합은 많은 시민운동에 참여했으며, 지역의 시민운동과 다양한 방식으로 협력하고 있다. 협동조합들을 모두 합하면 약 50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농식품 소매유통 시장점유율은 1%에 불과하다. 이 협동조합은 너무 커져 버렸나?
어떤 눈으로 평가할 것인가?
앞에서 제시한 3가지 기준은 모두 사업의 규모나 성과 측면에서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상황의 일부를 설명한 것이다. 질문만 보면 당연히 호의적인 답변이 나오기 쉽다. 그라민은행보다 더 높은 성과를 만들어낸 우리나라 협동조합금융은 무시할 수 없다. 우리나라 농협의 자산과 조직에 숨어 있는 잠재력은 매우 크다. 생협은 크게 성장한 것 같지만 협동조합 선진국의 생협에 비해 규모도 작고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물어본 질문이 제대로 된 질문인가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운동은 단순히 사업적 성과만 가지고 잘잘못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며, 협동조합운동이 처했던 정치·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동일한 성과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잘했으면 100조원의 규모를 만들 수 있는 여건에서 10조에 머물렀다면 잘못한 것이지만, 1조원을 만들기도 어려운 여건에서 10조원을 만들었다면 큰 성과다.
결국 협동조합운동의 평가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필자는 ①조합원 나아가 동시대인들의 필요와 요구를 협동조합이 얼마나 충족시켰는가? ②지역사회 경제에 얼마나 기여하였는가? ③협동조합의 정체성인 조합원 중심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잘 발전시키고 있는가? ④시대의 변화에 얼마나 잘 대응하고 있는가?라는 네 가지 기준을 가지고 협동조합운동을 평가하려고 한다.
농수협과 중소기업협동조합 : 제도를 통해 육성된 협동조합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농협법과 수협법,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을 거의 동시에 만들어 냈다. 농협중앙회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군농협조합장은 중앙회장이 임명하는 방식으로 농협은 만들어졌다.
이런 태생의 한계로 인해 농협은 조합원들의 아래로부터의 자조와 자립의 자율적인 조직이 아니라 준국가기관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농민을 잘 살게 하겠다는 열정으로 농촌에 들어간 많은 농협운동 지도자들은 농협의 제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을단위의 이동조합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동시에 제도적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가톨릭농민회 등 외곽에서는 농협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쌀수매제도를 대행하거나, 1973년부터 상호금융을 취급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을 바탕으로 농협은 점차 자립적 경영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아가고, 도시의 자금을 모아 대부분의 농민조합원에게 영농자금을 저리로 공급하여 농민들의 고래사채 부담을 덜어주었다.
20년간 지속된 농협민주화투쟁은 1987년 농협조합장 직선제를 쟁취하여 조합원들이 직접 조합장을 뽑을 수 있도록 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농업경영인연합회와 농민회가 주도하는 농협개혁운동으로 농협중앙회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 분리를 관철함으로써 운영민주화와 경제사업활성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또한 이런 운동에서 성장한 지도자들이 농협의 조합장이 되면서 모범사례를 만들어 가고 있다.
농협의 협동조합운동은 이렇게 제도적 한계 속에서 농협의 자원과 조직을 활용하는 운동과 함께, 농협의 근본적인 문제점인 조합원 중심의 운영을 촉구하는 외부의 농협개혁운동으로 나눠서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수협은 개혁 주체가 미흡한 상황이다. 중소기업협동조합은 설립 후 중기협을 운영하는데 핵심적인 지원제도였던 단체수의계약제도가 1997년부터 점차 축소되다가 2007년 폐지되면서 자립적인 협동조합운동의 동력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정부가 주도하여 제도를 만들고, 적정한 지원정책을 통해 육성된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에게 지원제도를 전달하는 통로가 될 뿐이지 자체적인 문제해결력을 확보하는 노력은 미흡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구조에서는 조합원의 필요는 설령 충족시킨다고 하더라도 폐쇄적인 조합원 이익에 빠져버릴 수 있다.
서울우유협동조합이 사업적 성과는 높지만 전국적인 낙농협동조합으로 확대하지 않는다든지, 중소기업협동조합이 단체수의계약이란 보호막을 기존 조합원들의 이익으로만 한정하여 사회적 제도개선을 자초한 것 등이 그것이다. 다른 평가기준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신용협동조합의 성장과 좌절 : 고립되어 함몰된 협동조합운동
<!--[if !supportEmptyParas]--> 정부가 주도한 생산자협동조합과 달리 신용협동조합은 아래로부터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확산되어 갔다. 부산의 메리 가별(가브리엘라) 수녀와 서울의 장대익 신부가 주도한 신협운동은 1960년 각각 1개의 신협을 창립했다. 지도자 양성교육, 조합원 교육, 홍보, 조직지도 등 종합적 지원활동에 힘입어 1962년까지 신협은 21개소로 확대되었다. 1964년 50여개로 늘어난 신협운동은 신협법 제정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1972년 신협법 제정의 결실을 보게 된다. 신협법에 따라 1973년에는 277개 조합을 회원으로 하는 신용협동조합연합회가 공식 발족하였다.
이후 신협은 한국협동조합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협동조합관련 서적을 출간하고, 연수원을 설립하여 협동조합교육을 활발하게 추진하였으며, 생활협동조합 등 새로운 협동조합운동의 지원기지가 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경영이 안정되면서 오히려 ‘협동조합사상의 위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신협조합원이 확대되면서 조합원의 평균적인 의식이 낮아졌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육성할 임직원도 인재난에 허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1989년 신협중앙회가 “2천 년대를 향한 중장기 발전 구상”에서 당시 신협의 발전을 위한 과제로 1) 조합원의 참여의식 연대의식 저조 2) 민주적 관리의 쇠퇴 3) 교육의 미흡과 방법상의 부적합 4) 신협 본질에 대한 이해와 인식부족 5) 임원과 직원간의 갈등 6) 양적 성장에 따른 부작용 7) 조합 간 조합원간 격차 심화 인적 자원부족 9) 연합조직의 기능 강화와 재정자립 10) 신협 상호금융의 위상정립과 공신력 제고 등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은행과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협동조합은 점차 경영주의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충분한 자율적인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부실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IMF를 통해 극적으로 폭발했다. 방만한 대출로 인해 1997년말 1,666개 신협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영위기가 발생하였으며, 그 결과 433개소가 해산 혹은 청산하게 되어 2002년말 신협의 수는 1,233개소로 줄었다.
경영위기가 발생했지만 제대로 육성되지 못한 조합원은 일반 금융고객과 마찬가지로 신협에서 이탈했고, 그 결과가 조합원은 10% 감소, 조합출자금은 22%가 감소해서 위기를 심화시켰다.
결국 신협은 경영안정을 위해 예금보호공사로부터 4조8천억여원의 공적자금을 받게 되고 금융기관의 관리감독을 받게 되면서 협동조합운동의 불씨는 크게 줄었다. 정부의 관리는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입각하기 보다는 경영개선에 맞춰져 신협조사부가 폐지되는 등 협동조합적 발전의 길을 더욱 막아버렸다.
신협중앙회 사무총장을 지낸 강승희 선생은 최근 신협의 현황을 보면서 10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1) 비조합원 개방, 단순거래자로 전락 2) 1인 독제체제로의 위험수위 3) 조합원 교육 미실시 적절한 교육교재 부재 4) 신협 본질 인식 부족 5) 임직원간의 갈등 6) 대형화 추세 및 지점 과다 설치 7) 소형 신협 멸시풍조 신협 전문 지도자 양성 부재 9) 신협 임직원 신협역사 의식 희박 10) 농어촌 소형신협과 도시대형 신협 연대 상생의식 부족 등이 그것이다.
필자는 한국신협의 역사는 초기의 성공한 협동조합운동이 내외부적인 문제로 인해 훼손되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국가경제의 성장에 따른 규모화와 경쟁력 강화 논리가 경영주의적 접근과 함께 신협 내부적으로 협동조합정신을 갉아 먹었으며, 확보된 예수금을 지역사회의 협동조합기업으로 대출해 줄 수 없었던 제도적 미비 속에서 아파트 담보대출을 중심으로 실제 수익구조가 은행과 비슷하게 되어 버린 점이 그것이다.
또한 신협의 발전을 위해 도입된 소액예금의 이자소득세감면 상품이 시대가 변하면서 오히려 조합원의 질을 떨어뜨리는 아이러니를 가져온 것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계속 제기되는 인적자원 부족에서 1980년대 초반 이후 우수한 인적자원이 신협운동과 연결되지 못했다는 점은 전체 운동 차원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1970년대까지는 우수한 대학의 졸업생들이 신협운동에 대거 참여했지만, 이후 협동조합은 중요한 사회진출의 통로로 인식되지 못했다. 협동조합은 장기적으로 조합원의 수준만큼, 중기적으로는 지도자의 수준만큼 발전하며, 이를 위해 지속적인 지도자의 양성과 조합원의 교육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협동조합운동사의 교훈을 우리는 신협운동의 성장과 쇠퇴를 통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건강한 지역의 신협은 생협운동이나 지역운동과 연결되면서 다양한 새로운 사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주민신협이 지역공동체운동이나 공동체주택운동을 위해 자산을 활용하는 것, 밝음신협이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의 든든한 맏형으로 역할하는 것 등 지역의 협동사회경제의 활동이 활발한 곳에는 여지없이 건강한 신협이 있다는 점은 앞으로 신협의 새로운 발전전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운동 : 더 많은 연대를 바라며
협동조합운동은 운동과 사업이 균형을 이루면서 발전할 때 협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원칙을 제대로 실현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이런 점에서 생협의 그동안의 활동과 앞으로의 발전방향이 주목된다. 왜냐하면 생협은 건강한 협동조합운동을 지향하는 많은 협동조합운동가들이 있으며,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민간의 자원을 활용하여 경영적으로도 안정단계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협동조합운동의 평가 기준으로 제시한 4가지 기준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생협의 첫 출발로 1985년 무점포 생협사업 방식을 도입한 안양의 바른생협과 1986년 도농직거래를 위한 한살림농산의 사업시작을 들 수 있다. 이후 1999년 생협법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인 발전이 이뤄졌다.
생협법이 발효된 2000년 생협조합원은 모두 4만6천여명 정도였는데, 2010년에는 43만명으로 10배 정도 확대되었다. 전체 가구수로 따지면 약 2.5%이다. 공급액도 2000년에는 300억에서 2010년에는 5200억원으로 15배 정도 증가했다. 식품시장 규모 120조원에 비해보면 0.4% 수준이다. 하지만 친환경농산물 시장 4조원에 비해 보면 1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조합원의 증가와 공급액의 증가는 경영상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런 활동을 전개하면서 생협은 ‘윤리적 소비’, ‘로컬푸드’, ‘도농교류’와 같은 새로운 이슈들을 지속적으로 확산시켰다.
식품안전성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서는 직접 많은 수의 조합원들이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지역의 다양한 시민사회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건강하고 대중적인 시민사회운동을 지속하고 있으며, 4개 생협연합회를 합하면 매년 2천여건 이상의 지역모임과 1천여건 이상의 교육을 진행하여 대중적인 시민의식 함양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정치활동은 생협법상 금지되어 있어 자유롭지 못하며, 노동운동과는 여러 가지 모색이 있지만 이론적인 차원에서 연대해야 한다는 당위적 주장을 넘어서는 대중적인 연대활동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낮은 수준의 다양한 시민사회운동과 연대하고 있는 생협운동은 반면에 생협 내부적으로는 적극적인 연대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업구역이 이중 삼중으로 겹치는 구조에서 생협간의 연대보다 생협간의 경쟁이 더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2010년 생협법 개정으로 가능하게 된 일반 생활물품의 취급과 연합회의 공제사업, 전국연합회 설립 등의 중요한 과제들이 생협 진영의 충분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개점 휴업상태에 있다. 더 큰 시야에서 결합해야 할 노릇이다.
친환경농산물 위주의 소비자협동조합 운동은 현실적으로 중산층 이상의 소비자들이 조합원의 주요 대상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생협법의 개정으로 인해 다양한 생협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더욱 확장된 소비자협동조합운동과 노동운동이 어떻게 관계 맺을 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생협의 각 연합회들은 협동조합운동이 가지는 지역공동체의 활성화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사업적으로 시급히 정비하고, 진보진영에서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가진 조직력을 협동조합운동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심도있는 검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