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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동방의 진주
1984년 11월 12일, 영국 친구들과 해묵은 빚을 청산해야 할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은퇴를 선언한 제임스 캘러헌 총리의 후임으로 선출된 데이빗 오언 총리, 로이 젠킨스 외무영연방성 장관, 마이클 풋 하원의장이 선전 경제특구를 방문했고, 중국 측에서도 주요 인물들이 접견단으로 도착했습니다. 홍콩 문제는 지난 중영경제협력 이후 잊혀질 뻔 했으나, 영국인들이나 중국인들이나 이 상당한 상징성을 가진 지역을 그냥 잊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급속히 재냉각된 미소대결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오언 내각은 중국 대표단에게 다음의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1. 신계 지역을 2012년까지 15년간 추가 임대해 줄 것.
2. 2012년까지의 민주체제안착과도기간을 두어, 홍콩이 민주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체제를 배양할 것.
3. 홍콩 섬, 아우찜몽(구룡), 신계 지역을 2012년부터 영연방 하의 홍콩 자치령으로 재편하되, 영국군 및 그 동맹국의 군대는 모두 철수할 것.
4. 이 사항이 준수된다면 영국은 중국과 더욱 밀접한 친선관계를 수립할 것임.
…물론 화궈펑 주석은 분노했습니다. 저쪽도 일단 한번 질러보는 것이겠지만, 그것도 정도가 과하는 거였죠. 사절단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영국 대표단과의 첫 회동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적당한 선에서의 협력을 생각하던 중국 대표단은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였습니다. 조약으로 명문화된 1997년을 기한으로 한 신계지역 반환, 그리고 홍콩 섬 역시 반환받는 대신 그들이 만족할 만한 무언가를 제시하려고 했던 계획은 그대로 휴짓조각이 되었죠. 화궈펑은 후종밍에게 '준비' 싸인을 보냈고, 후종밍은 그 길로 광저우군구 병력을 대기시켰습니다. 본래 서방 세력과의 창구 역할을 도맡으며 최대한 유화적인 제스쳐를 보내던 '신사' 샤오나이마저 얼굴을 잔뜩 붉히며 분을 삭힐 정도로, 영국 대표단의 첫 제안은 선을 넘은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격앙된 분위기에서 톰페티가 점잖은 목소리로 "우리 쪽에는 인내심이 강한 인물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쪽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협조적으로 나오길 바란다"며 타일렀고, "우리 국민 1명이 죽을 때 당신네 국민은 100명이 죽게 될 것"이라는 후종밍의 강경한 발언의 영향으로 영국인들은 중국 측 제안을 먼저 받아보기로 합의했습니다.
덩샤오핑 총서기와 화궈펑 주석은 그리 매끄럽지 못한 사이임에도 오랜만에 의견이 맞았습니다. 영국의 최근 경기부양 및 저성장 해결은 거의 전적으로 중국 시장 진출에 의한 무역수지 증대와 생산 합리화, 금융 활성화에 기인했기에, 저들이 신뢰를 저버린 이상 우리 역시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죠. 홍콩을 그냥 반환받는 것을 넘어, 제국주의적 지배 자체에 대한 자기부정을 요구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겐 불행하게도) 중국은 그것을 강요할 상황적 능력이 있었습니다. "제국주의적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최초의 사례를 만들어낸다면, 중국은 제3세계를 보다 실체있는 세력으로 조직화해낼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류메이란은 이 초유의 파격 외교, 마치 1917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소비에트 러시아 대표단과 같은 충격적인 광경을 재현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에 그녀는 북한 출신 동지들과 작업해 '혁명외교'의 초안을 만들어냈습니다.
1. 영국 정부는 1840년부터 1901년까지 발생한 모든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이 침략의 과정에서 맺어진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한다.
2. 영국 정부는 영국령 홍콩에 대한 영유권을 비롯한 배타적 권리를 전부 포기하며, 143년에 이르는 영국령 홍콩의 '불법점거'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한다.
3. 홍콩 총독부는 즉각, 지체 없이, 영국령 홍콩 전역의 경찰 및 소방대, 행정부를 해산하고 홍콩의 치안과 방위, 사회안전, 시민행정에 대한 권한을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성정부에, 홍콩의 영유권과 통치권과 방위권을 국가 정부에 이양한다.
4. 홍콩에 주둔중인 영국군은 즉시 무장을 해제할 것이며,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성정부와 국가 정부가 홍콩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을 때 군 병력이 남아있다면 이는 군사 도발이자 중국의 영토에 대한 불법침략으로 이해될 것이다.
5. 영국 정부는 홍콩에서 머무르는 모든 외교관, 관료, 민간인을 즉각, 지체 없이 철수시킬 것이며, 이에 응하지 않는 영국 국적자는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정부와 국가 정부에 의해 불법 월경자로 취급될 것이다.
이 제안을 받은 영국 대표단은 아연실색했습니다. 이들이 국제법을 내세우며 말도 안되는 조건이라고 항변하면, 중국 측은 "제국주의는 말이 되냐"며 대꾸했습니다. 애초에 논리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틀려먹은 상황이었죠. 외교적 타협이라는 길을 포기한 대가는 뼈아팠습니다. 영국은 중국에게 홍콩의 사실상 영유를 인정받겠다는 교만한 태도는 어디갔는지 치졸하게도 미시적인 조항 하나하나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불법'이라는 단어는 '비정규'로 고쳐야 하느니, 철수 기한은 5년은 줘야 하니, 그런 걸 가지고 말이죠. 심지어 오언 총리는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 이래의 국제법 관습"을 언급했는데, 이는 당연히 씹히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샤오나이가 주 광저우 포르투갈 대표부에서 받아온 "마카오 반환에 관한 의견서"를 내밀자 영국 측의 논거는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수정에 수정을 거쳐, 다음과 같은 선언문이 발표되었습니다.
홍콩 문제에 관한 중영공동선언.
1.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과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이하 영국)은 ‘영국령 홍콩’의 할양 및 조차에 관한 조약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
2. 영국 정부는 1989년 12월 20일을 기한으로 영국령 홍콩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모두 포기하며, 비정규적(irregular)인 점유에 따른 해당 지역에 대한 정책적 미비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3. 홍콩 총독부는 상기 날짜를 기한으로 그들이 관할하는 모든 영토, 영공, 영해에서의 치안, 방위, 사회안전, 일반행정에 대한 권한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 이양한다.
4. 홍콩에 주둔중인 영국군은 1987년 8월 31일을 기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반환기일을 기준으로 군경 병력을 더 이상 영내에 배치하지 아니하기로 한다. 단, 경찰 및 헌병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아니한다.
5. 영국 정부는 홍콩에서 머무르는 모든 외교관과 관료를 상기 기일까지 소환한다. 홍콩에 계속 거주를 원하는 영국 국적의 민간인의 경우 의향에 따라 복수국적을 인정할 수 있다.
6. 영국 정부는 1985년 1월 31일까지 철수를 감독할 홍콩 주권이양과도위원장을 새로 파견한다. 중국 정부는 임시행정장관을 파견해 과도위원장과 논의 하에 철수에 관한 사무와 과도기간 간의 행정을 총할한다. 이 기간동안 홍콩 주민들은 ‘그 어떤 변함없이(without any revision)’ 영국령 홍콩의 현행법을 적용받으며, 그 누구도 법외로 체포, 구금, 처벌, 구류되지 아니한다.
7. 본 선언은 법적 구속력을 지니며, 국제연합 사무국에 조약으로서 기탁한다.
8. 본 선언은 영문과 중문으로 각각 작성되었으며, 각각 동등한 해석의 권한을 가진다. 조약의 해석에 관한 분쟁은 중재절차 또는 국제사법재판소의 절차에 따라 해결하기로 한다.
9. 본 선언은 비준서를 교환하는 즉시 효력을 가진다.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총리 데이빗 오언 (서명)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자오쯔양 (서명)
본국으로 돌아간 영국 대표단은 일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심대한 우려’를 듣고, 웨스트민스터에서 보수당 및 노동당 좌파의 집중포화에 시달렸으며, 국민적 반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보수당이 내놓은 조기총선안에 SNP, 자유당 등이 동참하면서 결국 영국의 노동당 내각은 붕괴를 맞이했습니다. 1985년 1월 21일 열린 영국 총선에서 총 650석 중 마이클 헤젤타인이 이끄는 보수당이 459석을 차지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들은 온정적 보수주의에 기반한 정책을 약속했습니다. 한편 노동당은 사분오열, 정통 좌파를 자처하는 토니 벤의 ‘노동당’과 제3의 길을 지지하는 닐 키녹의 ‘민주당’으로 갈라졌습니다. 민주당은 역시 보수당에서 탈당한 마가렛 대처의 ‘국민당(BNP)’, 그리고 이제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자유당과의 합당을 논의하게 되었죠.
그야말로 반제국주의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이는 서방과의 관계를 경색시켰지만, 반대급부로 제3세계 중립국들이 중국을 중심으로 뭉치는 확실한 계기로도 작용했습니다. 이렇게 반환을 약속받는 홍콩은 자오쯔양과 톰페티의 제안으로 '경제적으로는 특구화, 정치적으로는 자치구화'라는 조치를 적용받았고, 그 말인즉슨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자치권을 부여받는다는 의미와 거의 동일했습니다. 이후 톰페티는 자오쯔양과 함께 홍콩을 방문, 임시행정장관을 맡은 야오이린 정치국원과 의논해 홍콩과 마카오, 자치구의 미래를 구상했습니다. 헌법과 중앙법률을 근거로 한 반당사상의 예방을 기틀로 하여 자치구 내에서의 광범위한 자치를 보장하는 안이 마련되었고, 이는 국내의 여러 씽크탱크조직에 흘러들어갔습니다.
또한 홍콩에서의 승리는 중국 내 중화패권주의의 지지를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특히 군정권을 가진 뤄칭창 국방부장이 그 대표적인 예시였죠. 베이징 근교 모처에서 뤄칭창을 만난 후종밍은 자신의 원대한 꿈을 설명했습니다. 소련과의 강력한 연계를 바탕으로 하여 서방세력을 장기간에 걸쳐 서태평양에서 구축한 뒤, 중화의 패권을 위한 백년대계를 세운다는 전략이었죠.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와 당원 동지의 '불필요한' 피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신뢰한 뤄칭창은 군에서 기습 인사를 단행, 사실상의 숙군작업으로 덩샤오핑과 보수파들의 군내 끄나풀들을 모두 좌천시키거나 보직해임했습니다. 베이징 군구에서 후종밍이 이끄는 '선양방'의 영향력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큰 승리를 뒤로 하고, '왕좌의 게임'은 차차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8. 1개의 연방, 6개의 공화국, n개의 문제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국부 요시프 브로즈 티토 주석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미국과 소련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비동맹 중립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 최근까지 큰 문제없이 번영해왔습니다. 문제는… 티토가 없이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1985년부터 재개된 “제3세계비동맹운동연합” 총회에 도착한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은 각 공화국에서 보낸 각 대표들로 구성되어 서로 결의안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를 두고도 회의장에서 격론을 펼치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이에 화 주석 동지께서는 여러분을 베오그라드에 파견해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만약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해결하고,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으면 포기해도 좋다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유고슬라비아에게 닥친 문제는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첫째,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준동. 아직 최악의 상황까지는 아니었지만, 티토 사후 이반 스탐볼리치를 비롯한 세르비아 공산당의 지도부는 보이보디나 자치공화국 및 코소보 자치공화국의 지도부를 간접적으로 장악한 채 유고슬라비아의 운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각종 악재들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티토의 유산은 점차 갈기갈기 쪼개지고 있었습니다. 둘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경제위기였습니다. 오일쇼크 이후 국가부채의 폭증 및 만기불일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티토 서거 직후의 지도부는 이른바 '충격요법'이라 불리는 고강도 긴축정책을 펼쳤고, 이는 오히려 민간의 소비를 위축시키고 생산자들의 성과를 급격하게 저하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왔죠. 노동자 자주관리체계를 채택하던 유고의 입장에서 기업들이 휘청거린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일이었습니다. 무려 200억 달러(유고 GDP의 1/3)에 이르는 채무, 그리고 연 50%에 육박하는 인플레이션율은 민생을 더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었죠.
위안차이나와 샤오나이가 자료들을 책상에 늘어놓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던 그 때, 재정부의 관료 '장더장'이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미국에서 주류 경제학을 배운 그는 "경기는 실물의 투입 외에도 '경제주체의 기대'에 따라 변동한다"는 실물적 경기변동이론의 명제를 바탕으로 해결책을 제시했죠. 200억 달러의 빚을 대납해줄 수는 없지만, 그 일부인 약 20억 달러를 투입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고, 이것이 적절한 홍보와 정치적 움직임을 거치면 경기를 침체의 악순환에서 꺼내 부양의 선순환으로 이끌 수 있다는 간단한 논리였습니다.
이는 소련의 로마노프 서기장과 통화를 연결한 류메이란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만약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금전투입과 적절한 정치적 개입으로 유고슬라비아를 살릴 수 있다면, 두 가지 문제는 어쩌면 한번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일 지도 몰랐습니다. 유고슬라비아가 다시 소련의 품에 안긴다면? 물론 그 외에도 해결해야 할 세부적인 문제들이 여럿 남아있었지만, 어차피 모스크바에서 처리할 일이었습니다. 메이란은 과감하게 "유고를 제3세계의 영향력에서 포기할테니 이 문제를 소련에서 해결해달라"는 딜을 제안했고, 로마노프는 즉시 수락했습니다. 이로써 중국은 유고가 여전히 가지고 있던 제3세계 내에서의 상징적 권력까지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톰페티의 유고-아프리카-중국 삼각무역 제안으로 인프라사업 수주가 결정되었고, 그 외에도 중국은 약 2억 달러 상당의 자금원조를 제안했습니다. 소련은 코메콘 명의로 15억 달러를 원조했죠. 스탐볼리치 역시 국가안전부의 공작으로 정치적 권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코메콘에 복귀한 유고의 경기는 다시금 활력을 되찾았고, 경제문제 역시 서서히 해결될 조짐을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고무적이었던 것은 유고 인민들의 얼굴에 생기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가 사망하면서 그 후임인 라미즈 알리야가 친소노선을 재천명했고, 동구권의 단결은 전례없이 굳건해졌죠. 냉전의 승기가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초유의 선거인단 비과반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공화당의 존 베이어드 앤더슨 후보가 232인, 민주당의 조지 월리스 대통령이 260인, 민주당 진보파의 별도 정당인 자유민주당의 제시 잭슨 후보가 46인을 확보한 것이었죠. 결국 의회에서 자유민주당이 공화당의 편을 들면서 앤더슨 대통령이 고작 전체 국민의 40%의 득표만으로 승리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들은 태생적인 정통성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제3세계의 광대한 성장동력을 노리고 중국 측에 손을 내밀었지만... 중국은 굳이 서방과의 협력을 강화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협상단 고위급대표 위안차이나는 공동선언문을 그저 화려하기만 한 수사로 채웠죠. 오히려 남미에서 반미 진보주의 세력이 성장하며 미국이 세운 독재정권들이 하나둘씩 붕괴하자, 중국은 톰페티를 전권대사로 보내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주요국들을 '메르코수르'의 이름으로 제3세계운동에 동참시켰습니다. 손을 내밀었더니 뺨을 맞은 이 상황에서 앤더슨 대통령은 취임 2년차가 시작되기도 전에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리게 되었고... 오히려 론 폴과 조지 월리스 전 대통령, 로스 페로 등을 위시한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세력만 키워주고 말았습니다.
힘의 균형이 한 쪽으로 기울었지만, 개혁개방정책의 수장 자리가 기존 친소파에게 돌아가는 일은 없었습니다. 부총리급인 국가발전개혁평의회 의장의 자리는 고작 43세의 샤오나이에게 돌아갔죠. 그는 주룽지와의 계약으로 의장 자리를 차지하는 대신 차기 당대회에서 그를 국가주석 자리에 추천하기로 약속했고, 남은 후보인 보수파의 리펑은 중전회에서의 경제학 토론으로 제껴버렸습니다. 이공학에 특화된 기술관료인 리펑으로서는 샤오나이가 제시하는 각종 경제 현안에 대한 질문들에 제대로 답할 수 없었고, 결국 장렬하게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중국의 대권은 더 이상 70대, 80대의 늙은 원로들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세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지가 주목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19. '균열'
1986년 8월 6일, 네 윈 장군이 이끄는 버마 사회주의연방공화국 정부는 기습적으로 화폐개혁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옆나라들인 태국 및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이 발전을 이루는 동안 버마의 경제는 나락에 쳐박히고 있었기에, 인민들은 몹시 분노한 상태였습니다. 검은 돈을 회수하고 화폐가치를 바로잡겠다는 명목 하에 진행된 화폐개혁작업이 곱지 않게 보였음은 당연합니다. 인민들은 처음엔 산발적인 시위와 평화적 저항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네 윈의 군부는 이를 폭력적으로 짓밟아댔고, 이는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일이었습니다. 민간의 불만여론이 통제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자, 버마 군부 일원들은 중국에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이는 작은 나라의 작은 소동에 불과했지만, 큰 파급효과를 불러올 전주곡이 될 것이었습니다...
국가안전부장 류메이란이 후치리, 차오스, 후진타오, 원자바오, 리커창 등 공청단 계열의 인사들을 규합해 "천윈의 사회주의 융합경제 노선과 톰페티 라마의 정치개혁 노선을 따르는" 새로운 정치계파를 만드는 한편 동독 슈타지의 자문을 받아 당정군 곳곳에 정보당국의 끄나풀을 꽂아넣고 나서, 그 중요성에 비해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국가안전부의 위상은 점점 높아져만 갔습니다. 전인대 상무회와 정협 상무회 양쪽의 동의를 받은 국가안전부 확대개편안이 통과되었고, 조직은 더욱 풍부한 해외첩보역량과 국내방첩역량을 갖게 되었죠. 이는 주변국에서 발생하는 소요사태에 관한 정보가 더더욱 정확하고 빠르게 제공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버마 군부정권의 사절들이 변명과 얼버무림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동안 류메이란은 친중 사회주의 세력을 지원해 레짐체인지를 시도,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을 확실한 영향권으로 두는 작전을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청두군구 집단군 부사령원 왕젠민 소장을 비롯한 군부 내 중화패권주의자들은 북부 소수민족을 포섭해 버마에 대한 직접군사행동을 실시하는 안을 제시했죠. 화궈펑 주석은 두 의견이 모두 타당하다고 판단, 우선 정보당국 차원의 비밀공작으로 친중세력을 반정부 시위대에 합류시켜 네 윈 정권을 무너뜨린 뒤 주도권을 잡도록 노력하되 그것이 불발될 경우 군사개입을 적극적으로 고려한다는 방침을 의결했습니다.
반정부 시위대의 정신적, 실질적 리더는 독립운동가 아웅 산의 딸 '아웅 산 수치' 여사였습니다. 그의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와의 친분을 통해 그녀와 접촉한 톰페티는 약 2시간 가량의 전화통화를 거친 뒤 '부적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일각에서 의심하는 것처럼 적극적인 친서방주의자까지는 아니지만, 충실한 친중국가를 세우는 데에는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이었죠. 당 간부들은 아쉬워하며 미국에 망명중인 우 누 전 총리 등 비주류 사회주의자들을 끌어모아 '반파시스트 민주해방동맹(AFPFA)'을 결성, 버마 군부정권의 자금줄을 사보타주하며 봉기를 지원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봉기 자체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네 윈 군부정권 축출 이후 미얀마 연방공화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급조된' 친중파들의 연합전선은 정치적으로 큰 힘을 낼 수 없었고, 아웅 산 수 치 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이 민주총선에서 과반의석을 점하게 되었습니다. 신정권은 제3세계 운동에도 옵저버로 참여했지만, 미국과 EC 등 서방세력들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함으로써 경제재건책에 나섰습니다. 버마, 아니 미얀마는 '진보적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졸지에 친서방 국가를 (물론 미얀마가 위치 상 서방세력의 동맹국이 될 수는 없었지만) 턱밑에 두게 된 상황에 대해 '일부 세력'들은 큰 불만을 표했습니다. 화 주석이 의결한 사항이었던 "주도권 장악 불발 시 군사작전 검토" 역시 조용히 잊혀진 상황이었죠. 정보부의 수장들과 군부의 수장들은 미묘한 알력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류메이란이 구축한 '공청단파'는 주룽지 당 서기국장의 킹메이커로 활동하며, 내륙 저개발지대의 인프라 구축사업을 매우 성공적으로 마친 샤오나이와 한국 등지를 활발하게 돌아다니며 역시 엘리트 고위관료의 길을 걷는 위안차이나 부총리를 양대 브레인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또한 국가보안위원회(구 국가안전부)는 베이징 요충지를 방위하는 병력을 통솔하는 '국가경위실'을 구축해 쿠데타의 위협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반대편의 '선양방'은 '태자' 후종밍을 중심으로 각 군구의 중화패권주의자 지휘관들, 그리고 꽌시로 맺어진 선양군구의 요인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며 야망을 키워나갔죠. 후종밍은 소련의 로마노프 서기장과 면담해 그들의 암묵적 지지마저 얻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스탈린이 되려는, 욕망의 폭주기관차 위에 올라탔습니다. 한편 정협 의장으로서의 임기가 끝나가던 톰페티는 자신의 최종적이자 사실상 유일하게 진정한 목표였던 소수민족 자치구의 권리 확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을 준비를 마쳤습니다.
모든 것을 결정지을 단 하루의 순간이,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1.
- 이름: 류메이란(刘梅兰)
- 플레이어: 렌지파일
- 생년월일: 1942년 3월 16일
- 성별: 여성
- 민족: 혼혈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러시아어, 영어
- 능력치:
통솔(8)/체력(10)/지능(10)/지혜(12)/매력(17)
- 기술:
지휘(2)/관리(0)/사격(1)/격투(0)/조사(3)/연구(0)/설득(3)/토론(2)/기만(3)/협박(0)/선동(4)/심문(1)/매혹(3)
- 트레잇:
#Fake News / 집단 간 갈등을 증폭시키고 이간시키는 데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0
한때 혁명의 아이돌이었고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적 급진 민주주의자'였던 류메이란은 문화대혁명의 광기와 참상을 목격한 뒤 대중의 광기와 '폭군'의 폭정에 대한 극심한 혐오를 내재화하게 되었습니다. 문혁을 전후하여 그녀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천윈은 화궈펑 통치 하에서 신중국의 경제 사령탑 역할을 훌륭하게 끝마쳤고, 메이란 역시 이제는 국가보안위원회의 위원장이자 국무위원의 직함을 달았습니다. 그녀가 따랐던 천윈과 화궈펑 두 사람이 모두 은퇴를 선언한 지금, 메이란의 목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대중의 광기와 폭군의 폭정 중 그 어떤 것도 다시 겪게 하지 않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카드로 만든 집'이 '튼튼한 벽돌집'으로 거듭날 때까지 말입니다.
2.
- 이름: 위안차이나(袁彩䛔)
- 플레이어: dear0904
- 생년월일: 1939년 9월 1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영어, 노어, 프랑스어(약간)
- 능력치:
통솔(18)/체력(10)/지능(14)/지혜(10)/매력(9)
- 기술:
지휘(3)/관리(4)/사격(1)/격투(0)/조사(0)/연구(4)/설득(2)/토론(2)/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웃는 사자 / 당원 및 동지들에 대한 설득과 매혹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0
화궈펑의 동향 출신 후배이자 그의 최측근. 주석의 복심. 위안차이나는 화궈펑이 지닌 몇 안되는 '직접 측근'입니다. 마오 주석과 홍위병의 시대가 저문 뒤 화궈펑 주석은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획책하기보다는 적절한 인물을 적절한 곳에 배치하고 다양한 당내 의견들을 수렴해 조율하는 역할에 몰두했습니다. 위안차이나는 그런 주석을 가슴 깊이 존경했으며, 1987년에 예정된 그의 은퇴 및 퇴임 이후 그 뒤를 이을 자 역시 화 주석의 전철을 밟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이제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의 부총리로서 화궈펑의 유지를 수호하기 위해 온몸을 바칠 것입니다. 그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3.
- 이름: 샤오나이(肖奈)
- 플레이어: 카라멜 마끼아또
- 생년월일: 1942년 10월 1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북방계)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헝가리어,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 능력치:
통솔(12)/체력(10)/지능(12)/지혜(12)/매력(12)
- 기술:
지휘(0)/관리(4)/사격(0)/격투(0)/조사(3)/연구(1)/설득(3)/토론(4)/기만(1)/협박(2)/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데이터 사이언스 / 현 상황의 파악과 조사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0
친가와 처가가 문혁의 광기에 쓸려나가는 동안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며 '안전하게' 지냈던 샤오나이는 가슴 깊은 곳에 죄책감과 책임감을 묻어두었습니다. 그 감정들은 마오 주석 이후 화궈펑 주석을 보좌하면서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죠. 베이징이 인민복 입은 장삼이사들로 꽉 차있을 때에도 그가 고수했던 양장 차림은 자유와 박애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국가발전개혁평의회 의장, 개혁개방의 사령탑이자 중국 최고의 경제관료. 샤오나이는 국내외의 혼란상을 대비하며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를 믿는 인민들을 위해 봉사할 길을 찾을 것입니다.
4.
- 이름: 라싸더챠오(拉萨的橋) (본명:톰페티)
- 플레이어: 하일레 셀라시예
- 생년월일: 1910년 10월 4일
- 성별: 남성
- 민족: 티베트족
- 모국어: 티베트어
- 사용가능언어: 중국 보통화, 영어, 산스크리트어, 힌디어
- 능력치:
통솔(7)/체력(8)/지능(18)/지혜(7)/매력(16)
- 기술:
지휘(0)/관리(1)/사격(0)/격투(0)/조사(0)/연구(0)/설득(5)/토론(5)/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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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짓는 부처 / 성적인 상황을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매혹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3
붉은 수도승, '생불', 좌파 인권운동가, 불교 사회주의자. 모두 톰페티 라마를 지칭하는 말들이지만, 그의 관심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단 한 곳에 꽂혀있습니다. 톰페티는 티베트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가 된 1950년대, 그리고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광기에 갈기갈기 찢기던 1960년대를 목격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고향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중국에서 살아가는 여러 소수민족들이 핍박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감수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들은 그 하나의 동기를 위해 행해진 것이었으니까요. 설령 그 과정에서 자신이 평생 쌓아온 개인적 명예와 일신의 안녕을 모두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의 신념을 꺾을 수는 없을 텝니다.
5.
- 이름: 후종밍(胡中明)
- 플레이어: 세르게이 비테
- 생년월일: 1930년 8월 8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러시아어, 진어
- 능력치:
통솔(18)/체력(9)/지능(9)/지혜(11)/매력(10)
- 기술:
지휘(5)/관리(5)/사격(2)/격투(0)/조사(0)/연구(0)/설득(4)/토론(0)/기만(1)/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잔여 포인트: 0
- 트레잇:
#물은 답을 알고 있다 / 적에 대한 심문에 +1 모디파이어.
'동북왕', 급진적 과격주의자, 전쟁광, 냉혹한 마키아벨리주의자. 후종밍은 젊을 적부터 이러한 오명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별칭들에 공감하면서도, 그는 "남자로 태어나서 지존의 꿈을 꾸지 않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다"는 신념에 충실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후종밍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명예욕' 그 자체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영도인이 되어 국가를 좀먹는 이들을 제거하고 중화 패권을 달성해 천하의 패자가 되겠다는 그의 원대한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어도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몇 사람의 피는 대의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령관 동지?"
◎중국의 상황
- 미국과의 관계: 2(적대적)
- 소련과의 관계: 8(밀월)
- 냉전의 판도: 소련에 매우 유리함.
- 중국의 위상: 제3세계의 명실상부한 리더.
※당내 세력구도
- 학림방(주요 인사 없음, 6%)
공청단의 신노선 발표 이후 그에 반발해 떨어져나온 급진적 개방세력입니다. 일부 독립적 학생조직을 기반으로 하나, 현재는 정보당국의 조직적 와해공작으로 점점 그 세를 잃고 있습니다.
- 공청단파(주룽지, 39%)
공청단 또는 공청단 출신 인사들을 기반으로 한 당파입니다. 물론 샤오나이처럼 공청단 출신이 아닌 인사들도 포함되며, 자치개혁-사회주의융합경제-동독모델을 지향합니다. 위안차이나, 샤오나이, 류메이란, 후치리 등이 포함됩니다.
- 선양방(후종밍, 37%)
선양군구와 동북지방을 기반으로 실력을 양성한 계파입니다. 비공식적으로 태자당이라고도 불리며, 반서방적 중화패권주의와 강력한 단합노선, 공산권 통합을 지지합니다. 톰페티의 후계자인 톈무친, 장쩌민, 리펑, 류화칭 등이 포함됩니다.
- 중핵파(덩샤오핑, 12%)
뤄칭창 국방부장이 주도한 숙군사업을 계기로 분리된 파벌입니다. 노장파라고도 불립니다. 공산권 통합은 지지하는 등 선양방과 큰 정책적 차이점은 없지만, 정치공학적으로 이들을 극히 불신합니다. 덩샤오핑, 리셴넨 등이 포함됩니다.
- 무당파(6%)
세계세력도(1986년 12월)
마지막 이벤트가 1월 1일 오후 1시에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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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ㅋㅋㅋ... 제목이 내중문. 그 뒤를 소제목으로 하시려는줄 알았는데, 그 반대면... 줄이기 쉽지 않긴 하죠. 타도 문혁도 좀 이상하네요.
(내.중.문.없) (?)
我的中国不需要文革 ..!
그런데 이거 쓰고싶은걸 다 넣어서 쓰다보니까 양이 엄청나게 많네요 ㅋㅋㅋㅋㅋ 아예 신 4대가족을 만드는 지경에 이른....
그냥 제목을 패러디해서 누가봐도 알 수 있는 형태로 올렸습니다 ㅋㅋ
그러고보니... 마지막화는 내일 쓰시나요? 오늘 나올줄 알았는데 10시까지 안 올라올거라곤 예상 못해서 ㅎㅎ...
반쯤 써놨는데, 뭔가 마음에 안들어서 이것저것 고치느라 좀 늦네요.. ㅠㅠ
늦어도 내일 밤까지는 올려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