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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강론 03
디모데후서 2:1-6
은혜 가운데서 강함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는 상황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고,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하나둘씩 바울 곁을 떠나고, 특히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린 상태였고(딤후 1:15), 바울이 전한 진리의 말씀은 다른 교훈들로 도전을 받고 있었으며(딤후 3:8), 때는 겨울이 다가와 노구로 춥고 힘든 상태였으며(딤후 4:21), 더욱이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감지하고 있었다(딤후 4:6). 이런 상태에서도 계속 복음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의 생명의 약속 때문이었다(딤후 1:1).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1-2절). “내 아들아!”라는 부름은 단순히 영적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진리의 아들이 되었다는 차원에서의 부름이다(딤전 1:2). 복음은 언제나 세상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진리의 아들들, 즉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만 그 이름을 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
“강하고”라는 말의 ‘엔뒤나모오’는 현재 수동태로 표현되었으니 지금 강하게 된 상태에 있음을 말씀한다. 자기 힘과 능력으로 강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안에 강하게 세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강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은혜로 맡겨진 상태이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한 것은 앞에서 다른 교훈을 좇는 부겔로와 허모게네 같은 자들이 있는 반면 복음에 유익을 가져오는 오네시보로 같은 자가 있기에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서 강하게 붙잡혀 있어야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좇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다른 교훈, 영지주의적 이단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복음의 진리로 강하게 세워지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이다(요 1:14). 그렇다면 은혜 안에서 강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바울 사도는 육체의 가시로 인해 주님께 간절하게 구하였을 때 받은 응답이 이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충족하게 된 것은 바울 자신이 약함으로 인해 온전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은혜 안에 강하게 되는 것이란 이 땅에서는 연약하여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함 가운데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약해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강함이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라고 번역하였는데 “많은”의 ‘폴뤼스’는 ‘많은, 큰’이라는 뜻이고, “앞에서”라는 말의 ‘디아’는 ‘~와 함께, ~을 통해서’라는 뜻이고, “들은 바”라는 표현은 과거형으로 썼다. 직역하면 ‘그리고 네가 많은 증인을 통하여 들었던 것’이라는 말이다. 이때 “많은 증인”이란 단순히 주위에서 증언하는 여러 사람들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믿음에 이끌림을 받아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낸 자들을 지칭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구름 같이 둘러싼”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을 주신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다. “허다한 증인들”이란 구약에서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낸 자들이다. 그렇다면 허다한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언약의 실체로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만 충성된 증인이시다(계 1:5). 다시 말해서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는 증인으로 같은 부르심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가 증인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충성된 사람들”이란 ‘믿음이 된 자들’이다. “부탁하라”라는 말의 ‘파라티데미’는 ‘파라’(~의 곁에)와 ‘티데미’(놓다, 정하다, 배열하다)의 합성어로 ‘앞에 놓다, 곁에 두다, 넘겨주다, 위탁하다, 증명하다, 보여주다’라는 뜻이다. 즉 믿음이 된 자들과 복음을 나누는 것으로 함께 하나님 왕국에 제대로 배치되고 배열되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란 질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진리 안에서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상관이 없는 자들에게 진리를 넘겨주는 것을 지칭한다. 그렇게 진리로 넘겨주는 자를 병사, 운동선수, 농부로 세 가지 비유를 들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3절). “병사”라는 말의 ‘스트라티오테스’는 ‘군대, 군인’이라는 뜻인데 히브리어 ‘차바’나 ‘마하네’, ‘하일’의 역어로 쓰인다. “좋은 병사”란 ‘선한 병사’라는 말이다.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마하네)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창 32:2)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차바),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출 7:4)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하신 것은 그의 형 에서와 한 쌍을 이루는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과 한 쌍을 이루는 하나가 되어야 그것이 구원이고 생명이다. 그 언약을 친히 이루신다는 차원에서 야곱에게 하나님의 군대로 나타내셨고, 이스라엘로 만들어 애굽에서 구원을 이루심으로 “내 군대”, 곧 “여호와의 군대”(출 12:4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그 의미를 이렇게 나타내셨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하일)더라(겔 37:10)
에스겔에게 보여 주신 환상은 마른 뼈들이 있는 골짜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하나님의 군대로 살아나는 것이었다. 즉 진리의 말씀이 임할 때만 죽은 존재가 생명으로 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군대, 병사란 말씀이 임하여 살아난 자로 구원이 이루어지고 생명의 상태가 되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교회를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자”(몬 1:2), “함께 군사 된 자”(빌 2:25)라고 하였다.
결국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는 말씀은 바울 사도나 디모데, 믿음 안에서 진리의 아들이 된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어서 땅의 것,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악한 영들을 상대하는 싸움이기에(고후 10:3-4, 엡 6:12) 세상에서는 고난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음을 말씀한 것이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4절). “병사로 복무하는 자” 란 말의 ‘스트라튜오마이’는 ‘군인으로 복무하다, 전쟁을 하다’라는 뜻이다. “자기 생활”이라고 번역한 ‘비오스’는 ‘생명, 생활, (문자적으로) 존재하는 현 상태, 생계의 수단, 생의 기간이나 과정, 삶’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 15:12, 30에서 (재산 상속의) “살림”으로, 마가복음 12:44에서는 (과부의) “생활비”, 누가복음 8:14과 요한일서 2:16에서는 “이생”, 요한일서 3:17에서는 세상의 “재물”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대체적으로 ‘조에’(생명)와 대조된 개념으로 이 땅에서의 생애나 죄인이 의지하는 땅적인 것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된다. “기쁘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의 ‘아레스코’는 ‘기쁘게 하다, 화해하다, 화목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군대로 부르심을 받아 전쟁을 하는 자는 땅적인 것에 매일 수 없고 군대로 만드신 분과 화목하게 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5절). “법대로”라는 말의 ‘노미모스’는 ‘법대로, 규칙대로’라는 뜻이다. 고린도전서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전하였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4-25)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6절). “농부”의 ‘게오르고스’는 ‘포도나무 재배자’라는 뜻이다. 농부의 특징은 추수 때의 열매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농사를 짓지만(약 5:7)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전 3:7). 그래서 성경에서 포도나무의 농부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지 못한 존재였기에(렘 2:21)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열매를 맺게 하셨는데 그 열매가 구원이요 생명이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1-2)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병사는 군대로 부르신 분을 기쁘시게 하고 화목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 자들이고, 경기하는 자는 승리의 관을 향해 달려가는 자이고, 농부는 열매를 얻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군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오직 부르신 분을 위해 사는 것이고, 부르신 분을 위해 산다는 것은 죄에서 건짐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상태이며, 농부로서의 열매는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맺으신 열매, 곧 생명이다. 이는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어 이루신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농부로서 일하신 결과이다. 십자가 죽음으로 이 모든 일을 이루셨고 그 열매를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안겨주셨다는 것이 복음이다(2025021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