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으로 보는 역사
이북聖公會이야기 (3)
평양성공회 창전리교회
북에 우리 성공회를 짓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삵 바느질도 많이 했구요, 고생 참 많이 했지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역사 자료실에는 미사에 여성 교우들이 머리에 쓰시는 미사보 100개가 한 박스에 정성스럽게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박 마리아 할머니께서 손수 만드신 것입니다. 대한 성공회선교 100주년에 즈음해서 할머니께서는 손수 만드신 미사보를 통일이 되면 북에 계신 교우들에게 꼭 보내 달라는 편지와 함께 봉헌하신 겁니다.
(성공회와 역사 11호)
영등포성당 박마리아 할머니
박도묵(마리아) 할머님은 올해 88세십니다.
평양성공회 창전리(평안남도 평양시)에 있던 성공회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계십니다.
평안남도 강서(마을 이름:도마메)가 고향이신데 창전리는 결혼을 하시면서 사시던 시댁이십니다.
대략 1932년 할머니가 15세 되던 해에 교회를 나가셨고 18세 되던 해에 결혼을 하셨다고 합니다.
“ 교회에서 삼종을 쳤었는데 하루 세 번씩 치는 그 종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예요.
참 궁금했어요 그 소리가 뭘까?
그 때만 해도 남 녀 내우가 심해서 젊은 처자들이 밖에 나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빨래를 할 때도 소매를 걷고 하지 않을 때 였거든요.”
“한 세 번 그렇게 궁금해서 교회에 가서 기웃거리게 되었죠.
성당안을 들여다 보니까 여자 교인들은 미사보를 쓰셨더라구요.
미사보가 그때는 지금 수녀님들이 쓰시는 것처럼 머리 전체를 가리는 것이었거든요.
처음엔 너무 떨려서 잘 못보고 왔는데 그 다음에 가보니 어머니들이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미사를 드리고 계시더라구요.
그래 한 세 번쯤인가 교회를 들여다보는 데 누가 어깨를 탁 치는 거예요.
그래 깜짝 놀라 보니까 그분이 나중에 알고 보니 신도회장님이셨어요.
그 신도회장께서 교회에 나와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그리고 집에 허락을 받았는데 밤에는 위험하니 낮에만 갔다 와라........ 그래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죠.....”
“길에서 보면 교회 안이 들여다보여요.
남자와 여자 교우가 양쪽으로 앉으셔서 미사를 드렸지요.
회장님들은 흰 한복을 입으셨고 회장님 사모님, 전도부인과 영국선교사님들을 많이 볼 수 있었죠.
개신교는 교회도 크고 그랬지만 우리 교회는 작았어요.
온수리 옛날 성당보다 작은 것 같았어요. 한 4-50십 여분 있었죠.
터는 참 넓었어요. 작은 동산에 있었는데 그래도 대동강과 평양시내가 다 보였어요.
사제관은 그에 비하면 참 컸어요. 차 신부님이 사셨는데 교회보다 큰 집이었어요.
벽돌로 지었는데 교회보다 더 좋았던것 같아요. 붉은 벽돌인데 차신부님 혼자 계셨어요.
헬레나 전도 부인이 계셨죠. 전도부인 사택과 부제님들 사택이 있었어요.”
“전도부인이 중매를 하시겠다고 나서셨는데 잘 안 되었고 신부님 사모님의 권유로 18세 되던 해에 중매결혼을 하게 됐었죠.”
창천리교회에서 혼배 사진
차애덕 주교님이 주례를 서셨다고 합니다.
창전리 성공회는 도로 옆에 있었는데 교회건물은 한옥은 아니었지만 사택은 상당히 컸던 것으로 기억하십니다.
교회 마당도 상당히 넓었던 것으로 기억하십니다.
결혼사진의 배경도 바로 성당 마당입니다.
“제가 결혼할 때 주장훈 신부님은 평양에 부제로 계셨고 사제서품 받으시고 자산이라는 곳으로 가셨다가 다시 순천으로 옮겨 가셨죠.
그 당시 보급단을 착출하는 바람에 징용을 피해서 해방 전(43년 11월)에 남편과 강화 길상면 온수리로 넘어 왔다가 선두리(동들머리)로 가서 살았는데 사내 아이들과 남편을 잃게 되었어요.
그 후 한 삼십년은 교회를 다니질 못했어요.
늘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보냈죠. 제가 60세 되던 해에 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어느 날 꿈에 ‘ 마리아야 마리아야 ’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환자들은 다 잠들어 있는데 주신부님이 갓을 쓰고 계신 거예요.
그래 아 신부님이 나를 데려 가시려나 보다 생각하고 꿈을 깼죠.
그래 성경을 가져다가 읽기 시작했죠.
그 후 딸의 수소문 끝에 영등포 교회를 알게 되었죠.
그 때는 돌아가신 김엘리야 신부님이 계셨어요.“
“제 병은 병원에서도 포기한 병이었는데 저는 하느님께로부터 치유의 은사를 받았어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그 후에 이제부터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를 어떻게 봉사할까 생각하다가 제가 처음교회 다닐 때 미사보를 쓴 교인들이 부럽기도 하고 천사로 보였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 미사보를 만들기 시작했죠.
제 손으로 직접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생각하다가.....그러던 것이 지금까지 만들었어요. ”
“대천덕 신부님이 기운 바지를 입고 다니시는 것을 보고 그때도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참 좋은 분인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1979년도에 예수원을 가셨을 때 대신부님(Reuben Archer Torrey,한국명:대천덕,미국성공회선교사,1957년 성공회성미카엘신학원장역임,예수원설립)이 기운 바지를 입고 다니시는 것을 보시고도 많은 은혜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예수원을 위해서도 틈틈히 적금을 모아 건물도 지을 수 있도록 봉헌하시면서 다른 교우분들과 함께 예수원을 돕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셨습니다
박마리아 할머니께서는 지금도 하느님께서 주신 그 은혜를 늘 보답하며 사실 수 있는 길을 찾고 계셨습니다. 예수원을
돕는 일에서 지금은 성공회 해외선교를 위한 기금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개척교회를 돕는 일뿐만 아니라 성공회신학교를 위해 수의를 만들어 판매하시기도 하고 ‘사랑의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매달 모임에 빠지지 않으시고 나와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의료선교를 위해서도 아낌없는 후원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수원교회에 약사이신 데레사 교우가 있었는데 한의사 자격증을 얻어 현재 의료선교를 위해 중국에 가계신데 그분을 돕기 위해 지금도 정성을 모으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 뜻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그 병원 사진 찍은 게 있는데 보여드리고 싶네요...저는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꼭 보답하며 살고 싶어요.
이북에도 가보고 싶고 ...그 분은 이북선교를 위해 노력하고 계시거든요.....이 사진은 완공되기 전에 사진이예요.. 많이 도와주고 싶어요.....”
“하느님의 은혜로 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생각을 많이 하고요.
그저 굳은 땅에 물이 괸다고 딸들과 함께 근검 절제 하며 살면서.....한 세상 잘 살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여생을 조금이나마 북한 선교를 위해 쓰게 된다면 그것이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북한에 교회를 짓고 싶은 게 제 소원이예요.....
하느님께 다 돌려 드리는 마음으로 늘 감사하며 살지요....
저는 성공회 밖에는 모르게 때문에 ....
우리 신부님들 보면 마냥 이쁘고 좋구여....
저는 그저 빈몸으로 왔다가 하느님의 은혜로 살고 하느님께 모든 것 다 바치는 것을 최고로 알고 살아요.... "
유재근 옮김 (성공회와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