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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읍 풍림리 720 ❏배향인물: 문다성(文多省) 문공유(文公裕) 문극겸(文克謙) 문유필(文惟弼) 문익점(文益漸) ❏창건연도: 1734년(영조 10) ❏향 사 일: (음)9월 중정 |
장연서원은 남평의 대표적 성씨인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시조인 무성공 문다성(武成公 文多省)을 비롯함 문공유, 문극겸, 문유필, 문익점 등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이 서원 건립의 유서가 마련된 것은 1734년(영조 10) 세워졌던 장연사(長淵祠)로부터이다. 이곳 장연서원이 자리한 풍림리는 장자지(長者池)가 있던 곳으로 시조인 문다성의 탄강설화가 구전되는 곳이다. 구전의 내용은 기록상 전거가 불분명하나 그 구전 시기는 매우 빠르다.
이 장연서원의 창건에 대해 문중사람들은 1734년(영조 10)이라 말하나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즉 ≪장연서원지≫내용 가운데 <영묘 49년 임진사실추록>조에 의하면 그 사실이 쉽게 확인된다. 1772년(영조 48)에 장흥, 능주, 영암, 보성, 광주 등 남평문씨 후손들이 순찰사(巡察使)에게 올린 상서에는 문다성을 건사치제(建祠致祭)함이 후손들의 당연한 도리이나 뜻만 있지 실행에 옮기지 못한지 오래임이 토로되어 있다. 또한 이보다 앞선 1770년(영조 46)에 만들어진 성균관의 통문과 관의 제사(題辭)에도 그 아쉬움이 천명되어 있고 각읍의 자손들이 남평 운흥사에 모여 건사의 통문을 올린 것도 이때였다.
결국 1772년(영조 48)에 올린 상서에 대해 순찰사는 협조와 지원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사우는 1772년 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8세기 후반경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71년(고종 8)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된 뒤 1923년부터 전반적으로 다시 세워지기 시작하여 규모를 일신하였고 1975년 대대적인 중개수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주벽-문다성(文多省)
문다성은 신라 제20대 왕인 자비 마립간 때의 인물로,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인 남평현 출신이었다. 신라 지증왕과 진흥왕, 진지왕 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지내고 남평 문씨의 시조가 되었다. 갓난아기 때 남평현의 장자못이라는 연못가의 높은 바위 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장자못가에 문암(文巖)이라는 전설 속의 바위가 남아 있다.
2) 문공유(文公裕)
1104년(숙종 9) 남성시(南省試)에 합격하고, 1112년(예종 7) 지공거 오연총(吳延寵)과 동지공거 임언(林彦)이 관장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인종의 즉위 후 이자겸(李資謙)과 대립하던 그의 장인 한안인이 살해되자 합문지후(閤門祗候) 문공유는 형인 문공인과 함께 유배되었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 1127년(인종 5) 합문지후(閤門祗候)에 복직하였다.
1129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33년 시어사(侍御史)로서 묘청(妙淸)의 도참설(圖讖說)에 현혹된 인종을 간하다가 충주목부사(忠州牧副使)로 좌천되었다.
1148년(의종 2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고,1149년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1150년 예부상서를 역임하였다.
1152년(의종 6년) 4월에 형부상서를 거쳐 12월에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었다.
3)문극겸(文克謙, 1122∼1189)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덕병(德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집현전대학사 경정공(敬靖公) 공유(公裕)의 아들이다.
큰아버지 공인(公仁)의 음보(蔭補)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 된 뒤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다가 의종 때 급제하였다. 여러번 자리를 옮겨 좌정언(左正言)이 되어서 전횡을 자행하던 환자(宦者) 백선연(白善淵)과 탐욕을 일삼던 술인(術人) 영의(榮儀) 등을 탄핵하다가 황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왕 측근자의 모함으로 다시 진주판관으로 좌천되려다가 “직신(直臣 : 국정이 혼란할 때에 기탄없이 임금의 과실을 말하는 자)을 외관(外官)으로 좌천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라는 유사(有司)의 상주(上奏)로 안으로 들어와 각문지후(閣門祗候)가 되었고 다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앞서 좌정언으로 있을 때 백선연 등의 비행을 탄핵해 좌천된 것이 직신으로 알려져 화를 면했으며, 의종이 거제도로 추방될 때 문극겸의 말을 따르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명종이 즉위하자 이의방(李義方)의 추천으로 우승선(右承宣)·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이공승(李公升) 등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무신들에 대해 고사(故事)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뒤이어 용호군대장군(龍虎軍大將軍)을 겸하였다. 그 뒤 재상이 되었을 때에도 상장군을 겸해 무신정권기에 문신으로 문무를 겸하는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딸을 이의방의 아우 인(璘)에게 출가시켰으며 이 때문에 계사의 난에 일족이 다 화를 면하였다. 다시 대부소경(大府少卿)에 이어 예부시랑이 되었으며, 1173년 예부시랑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윤인첨(尹鱗瞻)과 함께 최시행(崔時幸) 등 진사 32인을 뽑았다. 뒤에 추밀원사가 되었는데, 1179년(명종 9) 송유인(宋有仁)과 틈이 생겨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좌천되었다. 1180년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고, 이듬해 수태위(守大尉)가 되었으며, 1183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었고,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가 되어 금극의(琴克儀) 등 진사 31인과 명경(明經) 5인을 선발하였다. 1185년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어 아상(亞相)이 되었으며, 다시 수국사(修國史)·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거쳐 1187년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명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4)문유필(文惟弼, ?∼1228)
고려 후기의 문신·재상. 본관은 남평(南平). 의종 때 지문하성사 집현전대학사(知門下省事集賢殿大學士)를 지낸 공유(公裕)의 손자로, 명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를 지낸 극겸(克謙)의 아들이다.
벼슬에 나아간 시기와 방법은 확인되지 않으며, 1216년(고종 3)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이미 재추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1220년 독직사건(瀆職事件)에 관계되어 안서부사(安西副使)로 좌천되었으나, 다음해 곧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승진하였다. 그뒤 순탄한 관로를 밟아 1222년 지문하성사, 1227년 참지정사 판예부사(參知政事判禮部事)가 되었으며, 다음해 지문하성사로 있다가 별세하였다.
5)문익점(文益漸, 1329∼1398)
고려 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남평(南平). 첫 이름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강성현(江城縣: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출생. 숙선(淑宣)의 아들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啓稟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였고,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해 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는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문익점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문익점은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했던 것이다. 문익점은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追贈)되었고, 1440년(세종 22)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또한 그의 고향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있으며, 이 책은 규장각도서에 있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인 상덕사(尙德祠)가 있고, 문익점 선생의 영정(1928년 蔡龍臣 作)을 모신 영당과 내삼문인 양춘문(陽春門), 강당인 악강당(嶽降堂), 오사재(五思齋), 외삼문인 영호루(永壺樓)가 있다. 이외에 오선생기적비, 장연서원창건기념비, 광산군화수회비 등이 외삼문 밖에 있다.
<五先生紀蹟碑>(1975), <장연서원창건기적비>, <光山郡花樹會碑>
문공유묘지명(文公裕墓誌銘)
문공유(文公裕)는 뒤에 이름을 고수(顧壽)로 고쳤고, 자는 항적(亢逈)으로, 남평군(南平郡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사람이다. 아버지는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익(翼)이다. 15세에 남성시(南省試)에 합격하고 25세에 과거에 우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자겸(李資謙)이 집권할 당시에는 모함을 받아 형 공인(公仁)과 함께 양주(梁州) 등으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복직하여 1129년에는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33년 시어사(侍御史)로서 묘청(妙淸)의 도참설(圖讖說)에 현혹된 인종을 간하다가 충주목부사(忠州牧副使)로 좌천되었다. 의종 때는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 등을 지냈으며 벼슬이 검교태자대보 중대부 지문하성사 형부상서(檢校太子大保 中大夫 知門下省事 刑部尙書)에 이르렀다. 그는 풍채가 당당하고 문장이 활달하고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묘향산 보현사 창사비명(妙香山普賢寺創寺碑銘)』이 남아 있다. 형인 문공인(文公仁)과 문공원(文公元)을 이어 삼형제가 모두 재상이 되었다.
해동 고려국(海東 高麗國) 검교태자대보 중대부 지문하성사 형부상서(檢校太子大保 中大夫 知門下省事 刑部尙書)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문공(文公) 묘지
검교태자대보 승무랑 행시상서공부시랑 지제고(檢校太子大保 承務郞 行試尙書工部侍郞 知制誥)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사위(史偉)가 짓다.
공의 이름은 공유(公裕)이나 뒤에 고수(顧壽)로 고쳤고, 자는 항적(亢迪)으로, 남평군(南平郡) 사람이다. 15세에 남성시(南省試)에 응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의 아래에서 2등으로 합격하고, 25세가 되자 학사(學士) 오연총(吳延寵)과 임언(林彦) 등의 아래에서 (과거에) 우등으로 합격하였다. 29세에 급전녹사(給田錄事)가 되고, 한 해가 지나 장릉(長陵, 仁宗)이 태자로 있을 때 첨사부녹사(簷事府錄事)로 옮겨가 『논어(論語)』,『맹자(孟子)』,『상서(尙書)』를 강독함과 아울러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쳤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주부(主夫, 簷事府注簿)가 되고, 임인년(인종 즉위, 1122)에 임금이 즉위할 때 수행한 공으로 각문지후(閣門祗候)에 임명되었다.
마침 권신(權臣, 李資謙)이 권력을 장악하여 충신과 의사(義士)들을 모두 유배보내었다. 공은 장인(外舅, 韓安仁)의 잘못에 연좌되어 양주(梁州)로 귀양갔다가, 가덕도(加德島)로 유배지를 옮겼다. 병오년(인종 4, 1126)에 권신이 내쫓겼다가 죽으니, 임금이 공의 곧음을 알았다. 무신년(인종 6, 1128) 봄에 전중내급사 지제고(殿中內給事 知制誥)를 제수받고, 그 해 겨울에는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郞)이 되었다. 기유년(인종 7, 1129) 겨울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청주목부사(淸州牧副使)가 되고, 임기가 다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불러 좌사원외랑 충사관수찬관(左司員外郞 充史舘修撰官)이 되었다.
임자년(인종 10, 1132) 겨울에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이 때 서경(西京)의 승려 묘청(妙淸)이 사도(邪道)[左道]를 행하면서 정치에 간여하려 하였다. 공이 같은 지위에 있는 이인실(李仁實)과 함께 궁궐에 머리를 조아리며 간언하였으나, 임금의 뜻에 거슬려 고공원외랑 충주목부사(考功員外郞 忠州牧副使)로 좌천되었다. 서경 임원(林原)에 새로이 궁궐을 짓고 태화궁(太和宮)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임금이 공이 불러 궁궐 현판의 글씨를 쓰라고 명하니 공이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신이 지난 번에 묘청 등을 마땅히 멀리 쫓아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의 말에 따라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 만일 현판의 글을 쓰게 되면 한 마음으로 임금의 뜻을 받드는 일이 아닙니다.”
임금이 장차 새 궁궐에 가보고자 하여 먼저 서경으로 행차하였다. 묘청이 무리들과 함께 그들의 주장을 신비롭게 하려고, 몰래 떡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기름을 넣었다. 그것이 대동강 바닥에 가라앉으니 기름이 새어나와 수면으로 떠올랐는데, 이것을 상서로운 기운이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새 궁궐로 행차하자 이에 그 남쪽 바위굴에 등을 밝혀 놓으면서, 수성(壽星)이 상서로움을 바쳐 새 대궐을 만든 왕의 뜻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새 궁궐 인근에 벼락이 쳐서 소와 말과 나무가 하룻밤 사이에 이삼십 군데나 상하였으며 임금의 말 두 마리가 죽었다.
임금이 대신들의 의논에 따라 황급히 서경으로 행차를 옮겼다가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그제야 임금이 공의 충성과 의로움을 알고, 호부낭중 동궁시독사 지제고(戶部郎中 東宮侍讀使 知制誥)로 발탁하였다. 병진년(인종 14, 1136) 겨울에 조정에서 청주에 재직할 때 임기를 다 채우지 않았다고 하여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황주목부사(黃州牧副使)로 삼았으며, 임기가 차자 예빈소경 태자좌찬선대부(禮賓少卿 太子左贊善大夫)에 임명하였다. 경신년(인종 18, 1140)에 비서소감 동궁시강학사(秘書少監 東宮侍講學士)가 되고, 신유년(인종 19, 1141)에 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었으나 나머지는 이전과 같게 하였다. 2년이 지나 우간의대부 형부시랑 동궁시독학사(右諫議大夫 刑部侍郞 東宮侍讀學士)가 되고, 승진하여 상서좌승 지어사대사(尙書左丞 知御史臺事)에 이르렀다.
정묘년(의종 1, 1147)에 국자감대사성 보문각학사 지도성(國子監大司成 寶文閣學士 知都省)이 되고, 무진년(의종 2, 1148) 봄에 산기상시 보문각학사(散騎常侍 寶文閣學士)가 되었으며, 기사년(의종 3, 1149) 겨울에는 형부상서 수문전학사 지제고(刑部尙書 修文殿學士 知制誥)가 되었다. 천덕(天德) 3년(의종 5, 1151) 여름 서경지유(西京知留)가 되어 여섯 달 동안 근무하였으며, 불려와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고, 또 고쳐서 병부 권삼사사(兵部 權三司使)가 되었다. 계유년(의종 7, 1153) 정월 일에 지금의 임금이 태자를 위하여 부(府)를 세우니, 임금이 특별히 공에게 대자좌첨사(大子左詹事)를 제수하고 책봉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 해 여름에 드디어 형부상서 집현전학사 지제고 겸 대자빈객(刑部尙書 集賢殿學士 知制誥 兼 大子賓客)에 제수되고, 관례에 따라 검교태자대보(檢校太子大保)가 되었다. 을해년(의종 9, 1155) 여름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면서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이 하였으며,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병자년(의종 10, 1156) 여름 지금의 관직을 받았다.
공은 풍채가 당당하고 문장이 활달하였으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다. 병신년(예종 11, 1116)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중국 조정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사신의 행차를 잘 도울 사람을 뽑으니 공이 임금의 뜻에 따라 사신을 수행하였다. 일찍이 사신이 되어 금(大金)에 들어갔었는데, 다시 금자광록대부 상서좌복 지추밀원사(金紫光祿大夫 尙書左僕 知樞密院事)로 남평군개국자(南平郡開國子)가 되어 식읍(食邑) 300호를 받으면서, 금나라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었다. 일찍이 안▨(按察?)이 되었고 동북·서북 양계병마(東北·西北 兩界兵馬)의 도통(都統)이 되었다.
공의 선조는 문반직과 무반직으로 조정에 벼슬을 하였는데, 조부, 증조부, 고조부에 대해서는 가첩(家牒)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다시 적지는 않는다. 아버지 익(翼)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냈으며, 네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공인(公仁)이고, 차남은 공원(公元)인데, 모두 총재(冢宰)가 되었다. 3남 가관(可觀)은 조계종(曹溪宗)의 대선사(大禪師)가 되었고, 공은 막내이다. 맏아들과 작은 아들, 막내아들이 서로 차례로 재상이 되니, 세상이 재▨(宰▨)라고 부르면서 대단히 영예롭게 여겼다.
공이 추밀(樞密)에 있었는데, 천문(天文)에 변고가 일어나자 일자(日者)가 추부(樞府)에 상응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공이 숙직하는 동안 홀연히 몹쓸 병을 얻어 끝내 회복하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이 크게 쓰이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다.
공에게는 아들이 세 명이 있다. 장남 극겸(克謙)은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관직이 7품에 올랐다. 둘째는 극순(克純)이고, 막내는 극역(克易)인데 모두 음서를 받아 이미 관직을 가지고 있다. 딸은 세 명이 있으니, 큰 사위 정증(鄭拯)은 지금 내시(內侍)로서 관직이 형부원외랑[秋部外郞]이고, 둘째 사위 윤자고(尹子固)는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막내 사위 이세창(李世昌)은 역시 가음(家蔭)를 받아 조정에 이름을 올렸다.
태세(太歲) 기묘년(의종 13, 1159) 2월 12일에 임금이 관리에게 명하여 도구를 갖추어 장례를 돌보라고 명하니, 백학사(白鶴寺)
<뒷면>
서남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공의 아들들과 사위들이 묘지를 지어줄 것을 부탁하니, 내가 이에 명(銘)을 짓는다.
공의 두 형에게는 하늘이 그 후사를 아꼈으나
나머지 복이 모여져 공은 이에 아들을 두었다.
뉘라서 그 뒤를 알리요, 그 가문이 커지리라는 것을,
충효와 학문으로 근원을 삼았도다.
영원히 좋은 땅으로 들어가려고 무덤이 이미 이루어지니
아들과 사위들이 훌륭한 공의 자취를 기록하였네.
나를 통해 공의 명성을 더욱 알려주고자
공의 평생을 ▨(기록하여?) 영원히 전하려 하네.
내가 솜씨가 없다고 사양하였지만 끝까지 거부하지 못하여
소매를 걷어 얼굴을 씻고 붓을 들어 서술하노라.
충성은 훌륭한 덕인데 공은 실로 그것을 지녔고
문장은 나라의 아름다움인데 공이 실로 그것을 갖추었으니
천만세에 전해지도록 산자락에 묘를 남긴다.
海東高麗國檢校太子大保中大夫知門下省事刑部尙書致仕文公墓誌」
檢校太子大保承務郎行試尙書工部侍郞知制誥賜紫金魚袋史偉撰」
公諱公裕後改名顧壽字亢迪南平郡人也年十有五擧南省試政堂文學」
鄭文下中二等至二十五學士呉延寵林彥等下中優等二十九爲給田錄」
事閱歲長陵在儀宸改爲簷事府錄事以論語孟子尙書進讀幷進書法累」
遷主夫壬寅以隨龍功授閤門祗侯屬權臣用事忠臣義士並皆流竄公坐」
外舅之累謫梁州移配加德島至丙午權臣放殛上知公直戊申春授殿中」
內給事知制誥其年冬授尙書戶部員外郞已酉冬以禮部郞中爲淸州牧」
副使未考績宣召授左司員外郞充史舘修撰官壬子冬授侍御史時西京」
僧妙淸執左道以干時公與同列李仁實叩闕以諫因忤旨左遷爲考功員」
外郞忠州牧副使西京林原立新闕號太和宮上召公命書宮額公辞之曰」
臣曩以妙淸等爲當遠逐今以其言創立新宮▨若書額非一心事上之義」
及上將御新闕先幸西京妙淸與其黨欲神其說乃潜以餅作囊盛油其中」
沈于大同江底油洩而浮於水面以爲瑞及上幸新闕乃於其南逮岫置燈」
以爲壽星呈祥圧新闕旨傍近震牛馬樹木一夜三二十所御廐馬二死上」
用大臣議遽移御西遂還御上京俄而西京作乱然後上知公忠義擢爲戶」
部郞中東宮侍讀事知制誥丙辰冬朝廷以淸州考未滿以礼賓少卿爲黃」
州牧副使官滿爲禮賓少卿太子左賛善大夫庚申授秘書少監東宮侍講」
學士辛酉授兵部侍郞餘如故閱二歲爲右諫議大夫刑部侍郎東宮侍讀」
學士遷 尙書左丞知御史臺事丁卯爲國子監大司成宝文閣學士知都」
省戊辰春爲散騎常侍宝文閣學士己已冬爲刑部尙書修文殿學士知制」
誥天德三年夏爲西京知留甫六朔召爲刑部尙書又改爲兵部權三司使」
癸酉正月日今上爲太子立府上特授公大子左詹事以管封冊事其夏遂」
授刑部尙書集賢殿學士知制誥兼大子 客以例爲檢校太子大保乙亥」
夏授同知樞密院事餘並如古判三司事丙子夏授今官公風釆堂 文章」
磊落尤善隷書歲在丙申本朝遣使 朝中國妙選輔行公以內知從之甞」
爲使入大金又以金紫光 大夫尙書左僕射知樞密院事南平郡開國子食」
邑三百戶爲金國賀登極使甞爲按▨及都統東北西北兩界兵馬公之先」
世以文虎膴仕於朝皇祖曾高 在家牒此不復錄至皇考翼爲左散騎常侍」
生四子長曰公仁次曰公元並爲冡宰次曰可觀爲曹溪宗大禪師公其季」
也伯仲季相次爲相世以爲宰▨而甚榮之公在樞密時天文有變日者云」
應在樞府公直廬忽被末疾遂至不起世嘆不至大用云有子三人長曰克」
謙今已捷第官至七品仲曰克純季曰克易並蒙資蔭已接朝纓有女三人」
長壻曰鄭拯今以內侍官至秋部外郞仲壻曰尹子固早歲云亡季壻曰李」
世昌亦以家蔭得齒朝名太歲己卯二月十二日主上命司具喪事白鶴寺」
참고-나주시지1, 200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남평문씨 홈페이지 http://www.npmoon.com/swhh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