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러시아어: Сталинградская битва, 독일어: Schlacht von Stalingrad)는 1942년 8월 21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스탈린그라드(현재 이름은 볼고그라드) 시내와 근방에서 소련군과 추축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약 200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인간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투는 독일 제6군과 다른 추축국 군대의 스탈린그라드 포위와 이후의 소련군의 반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의 전투력은 대폭 향상되어 독일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과 추축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략했다. 1941년 여름과 가을에 극심한 타격을 입은 소련군은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을 기점으로 반격에 나섰다. 탈진하고 겨울 장비가 부족한 데다가 보급로가 약해진 독일군은 모스크바에 대한 진격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봄까지 독일군은 전선을 안정화했다. 중부 집단군의 손실이 컸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대한 재공격은 기각되었다. 독일군의 군사 철학은 무방비한 곳을 공략하여 최대의 성과를 얻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은 적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봤다. 게다가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OKH)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히틀러는 미국이 유럽전에 참전하기 전에 동부 전선을 끝내거나 또는 최소하려고 했다. 그래서 코카서스의 대유전 지대를 점령하여 소련군의 연료를 고갈시키고 부족한 독일군의 연료 문제도 해결하며 가능하다면 북아프리카에서 동진하는 에르빈 롬멜군과 중동에서 합류를 꾀하기도 하였다.
러시아 내전에서 스탈린은 백군의 공세로부터 짜리친(당시 스탈린그라드의 명칭) 방위에 큰 공훈을 세웠다. 그 뒤에 스탈린이 산업화를 밀어붙이면서 이곳은 각종 산업시설이 건설되어 급속도로 개발되었고,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이름은 1925년 그 밑의 공산당 당수가 스탈린에게 선물한 결과이다.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카스피 해와 북부 러시아를 잇는 수송로인 볼가 강의 주된 산업 도시였고, 이곳을 점령하면 코카서스로 전진하는 독일군 좌익의 안전이 확보되었다. 게다가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도시를 점령한다는 것은 이념적으로나 선전 면으로 소련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스탈린도 이 점을 알고 있었고, 총을 들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이곳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1]
이 시점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 고도의 기동을 실행할 능력은 떨어졌다. 그러나 기갑부대의 전술보다는 짧은 소화기(小火器)가 위력을 발휘할 시가전에서는, 그러한 소련군의 단점이 많이 상쇄되었다.
독일 남방 집단군은 코카서스의 유전 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러시아 남부의 스텝 지대를 꿰뚫는 공세를 시작하였다. 히틀러에게 유전 지대의 점령은 다른 장군들이 권고하는 모스크바 점령보다 더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러시아 남부 전선에 더 많은 병력과 지원을 했다. 여름 공세의 암호명은 “청색 작전”(독일어: Fall Blau)이었다. 여기에는 독일 6군, 17군, 4기갑군, 1기갑군이 참가했다. 1941년 점령한 우크라이나의 각 지점에서 공세를 개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작전에 참견해서 집단군을 두 개로 나누었다.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남부 A집단군은 제17군과 제1기갑군과 함께 코카서스로 진격을 계속하도록 했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제6군과 호트의 4기갑군을 포함하는 남부 B집단군은 동진하여 볼가 강 연안의 스탈린그라드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B집단군은 막시밀리안 폰 바이크스가 지휘했다.
청색 작전의 원래 이름은 지그프리트 작전(독일어:Unternehmen Siegfried)이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5일, 히틀러는 이 작전명을 청색 작전으로 바꾸고, 각 부대에 명령서를 하달했다. 작전은 4단계로 나누어졌다.
청색 작전의 개시일은 원래 1942년 5월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이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포위에 참가 중이었기 때문에 6월에 세바스토폴이 함락될 때까지 몇 차례 연기되었다. 이 동안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소련군의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으나, 독일군은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하지 않고 이미 배치되어 있던 병력으로도 소련군 공세를 막아냈다. 그래서 2차 하리코프 전투에서 소련군의 돌출부를 잘라 버리는 전투가 행해져 5월 22일에는 소련군의 대규모 병력이 포위되었다.
청색 작전은 최종적으로 6월 28일에 개시되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넓은 스텝 초원에서 거의 저항을 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무질서한 패주를 시작했다. 저항선을 구축하려는 여러 시도가 다른 독일군 부대의 측면 포위로 좌절되었다. 소련군은 7월 2일 하르코프 북방의 포위망과 일주일 후 밀레노보와 로스토프 근방의 포위망에 갇혀 각각 섬멸되었다.
그동안 헝가리 제2군과 독일 제4기갑군은 보로네쥐 공세를 개시하여 7월 5일 함락시켰다.
스탈린그라드를 향하는 B집단군의 초기 진격은 매우 순조로워 히틀러는 이에 소속된 제4기갑군이 코카서스로 동진하는 A 집단군에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6군과 4기갑군이 같은 도로를 사용하게 되어 지역의 부족한 도로 사정과 맞물려 대규모의 교통 정체를 야기했다. 이 지연은 매우 길어서 적어도 1주간의 진격이 지체되었다. 이렇게 되자 히틀러는 다시 마음을 바꿔 다시 4기갑군에게 스탈린그라드 공략에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7월의 하순까지 독일군은 소련군을 돈 강까지 밀어붙였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은 동맹국인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을 이용하여 방위선을 구성하고 있었다.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로부터 수십 킬로미터까지 접근했고 그들의 남방에 있던 4기갑군은 시의 공략을 위해 북방으로 진격로를 돌렸다. 남방에서는 A집단군이 코카서스를 향해 돌진 중이었으나 진격속도는 둔화되었다. A집단군은 B집단군을 지원할 수 없는 먼 남쪽까지 진출하였다.
이제 독일군의 의도는 소련군 지휘관들에게 분명해졌다. 소련군의 7월 작전 계획은 스탈린그라드를 방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독일군의 공세 앞에 동쪽으로 후퇴하던 소련군 부대는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스탈린그라드의 동쪽은 폭이 넓은 볼가 강이었고, 강을 넘어 다른 소련군 부대들이 배치되었다. 이런 부대들이 새로 62군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인근의 64군(슈밀로프 중장 지휘)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이루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은 안드레이 예료멘코 대장이 지휘했고, 시내에 포진한 62군은 처음에 로파틴 중장이 사령관이었으나 그가 수비에 비관적이었고 병력을 볼가 강 너머로 후퇴시켰기 때문에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으로 교체되었다(결과적으로 이는 성공적인 것이었다.). 소련군의 목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스탈린그라드 시를 사수하는 것이었다.
전투는 시가에 대한 독일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도심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스탈린은 방위 부대의 사기를 위해 민간인이 시를 떠나 피난 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피난 행렬이 방위 부대의 소통에 방해되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방위망을 구성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8월 23일 단 하루의 대규모 폭격으로 많은 인명이 죽고 많은 건물이 돌과 잿더미로 변했다. 이날 독일 공군 폭격기 600대가 도시에 공격을 개시해서 불지옥으로 만들었고, 시민 약 4만여 명 이상이 사상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소련군의 초기 방어 임무는 제1077 방공 연대가 맡았는데, 이 부대는 주로 고사포를 보유하여 지상 목표에 대한 교전법은 거의 훈련받지 않은 여성 지원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 부대원들은 그들의 위치를 고수하여 진격해 오는 독일 전차와 교전했다. 독일군 제16기갑사단은 제1077연대의 모든 37개의 고사포를 모두 파괴하거나 우회할 때까지 이들과 싸워야 했다고 한다. 전투의 초기에는 직접적으로 군수 물자를 생산하지 않는 노동자들이 대거 도시 방위에 참가하였다. 한동안 탱크는 계속 시내의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도색도 되지 않거나 조준경도 없는, 갓 출고된 탱크를 공장 노동자 가운데 자원자들이 몰고 전선에 나갔다.
8월 하순까지 독일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볼가 강에 이르렀다. 남쪽을 향한 다른 진격도 이어졌다. 9월 1일까지 소련군은 독일군의 포병과 폭격에 노출되어 위험한 볼가 강 도하를 통해서만 스탈린그라드 내의 부대들에게 보급과 지원을 행할 수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 위에서 소련군 제62군과 제64군은 무너진 집과 공장을 이용하여 방어 거점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전투는 치열했고 잔혹했다.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예상 생존 시간은 24시간 미만이었다. 1942년 7월 27일에 내려진 스탈린의 227호 명령에 따르면 상부의 명령 없이 위치를 벗어나는 모든 자는 즉결 처분에 처해졌다. 사수 아니면 죽음이었다. 어쨌든 수많은 소련군 후퇴병과 탈주병이 이런 즉결 처분으로 사살되었다. 물론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독일군도 커다란 손실을 보고 있었다.
독일군의 군사 원칙은 기갑, 보병, 공병, 공군의 지상 지원이 잘 조화된 협공 작전이었다. 소련군은 여기에 대응하여 항상 독일군에게 가능한 가깝게 근접전을 시도했다. 추이코프는 이런 전법을 “껴안기”라고 불렀다. 이런 전법 때문에 독일군 보병은 홀로 화력 지원 없이 싸우거나 혹은 아군의 화력 지원에 따른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법은 독일군의 근접 지상 지원과 포병 지원을 무력화했다. 모든 거리와 공장, 집, 지하실, 계단에서 사람과 사람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이런 시가전을 농담 삼아 생쥐 전쟁(Rattenkrieg)이라고 불렀다. 부엌에서 쥐가 도망가면 또다시 거실에서 쥐잡기를 해야 하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마마이 언덕이었다. 이곳은 주인이 수없이 바뀌었다. 어떤 반격 때에는 소련군이 하루에 1개 사단을 잃기도 했다. 또한 거대한 사일로로 만들어진 곡물 저장소에서는 전투가 너무 근접전으로 벌어져 소련군과 독일군은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전투는 여기서 몇 주간 계속되었는데 독일군이 최후로 적을 소탕했을 때 겨우 40구의 소련군 시체를 발견했다. 그들은 저항의 규모로 볼 때 더 많은 소련군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소련군 병력이 후퇴했을수도 있다). 시의 다른 부분에서는 야코프 파블로프가 지위하는 소련군 소대가 한 아파트 빌딩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이 빌딩은 시의 중앙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병사들은 이곳을 지뢰밭으로 둘러싸고 창문에 기관총을 배치하였고, 지하실의 벽에 틈을 내어 통신을 용이하게 했다. 이 빌딩은 나중에 “파블로프의 집”이라고 불렸다.
양군의 손실은 막심했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부대가 시내로 투입되었다. 특히 소련군은 수천 킬로미터 밖의 시베리아나 극동에서 지원군을 끌어오기도 했고, 심지어는 해군의 수병까지도 동원했다. 시베리아에서 달려온 알렉산드르 로딤체프 지휘하의 제13근위보병 사단은 마마이 언덕을 비롯한 각종 시가전에서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대활약을 했다. 그는 생사기로의 위기에서 (15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 스탈린그라드 중앙역 벽에 “로딤체프의 친위부대원들이 여기서 조국(로디나)을 위해 싸웠고 잠들다.”라고 갈겨썼다.
독일군은 돌파구가 보이지 않자 중화기를 시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구경 800mm의 열차포(별명 도라)도 있었다. 한편 소련군도 독일군이 도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볼가 강 동안에 대규모의 포병을 배치하여 독일군을 계속 포격하였다. 독일군의 전차는 높이가 8미터가 넘는 폐허 더미 속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부서진 빌딩에 대전차포를 엄폐해 두었다가 전진해 오는 독일군 전차를 공격했다.
소련군 저격수도 교묘히 폐허를 이용하여 독일군에게 큰 손해를 입혔다. 가장 유명한 저격수는 제1122 보병연대의 이반 시도렌코인데,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500명을 사살하였다.[5][6]
다른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도 전투 기간 중 242명을 사살하였다. 그는 또 독일군의 악명 높은 저격수 하인츠 토르팔트를 사살했다고 알려졌지만(이것은 에너미 앳 더 게이트로 영화화되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하인츠 토르팔트(혹은 에르빈 쾨니히)는 소련 측이 만들어낸 가공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탈린과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는 실제 전략 목표보다 더 중요한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전략 예비군을 모스크바 방면에서 볼가 강 저지로 이동시켰고, 항공기도 모든 지역에서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동원했다. 양군의 지휘관들은 막대한 긴장에 시달렸다. 독일군 지휘관 파울루스는 눈가에 심한 경련이 생겼고, 추이코프는 습진 때문에 양손을 붕대로 완전히 감쌀 정도였다. 양측의 병사들도 근접 전투가 야기하는 심한 긴장감 속에 지냈다.
독일군은 3개월 동안 수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느리고 값비싼 대가를 치른 전진 끝에 11월에 최후로 볼가 강의 강둑에 도달했고, 폐허로 변한 시의 90%가 넘는 곳을 장악하여 남아 있는 소련군을 두 개의 고립 지대에 가두었다. 더욱이 볼가 강의 유빙이 볼가 강 동안에서 시내로 보급을 실어 나르는 소련 배들의 도강을 방해했다. 그러나 시내, 특히 마마이 언덕과 북쪽의 공장 지대에서는 계속 전과 다름없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붉은10월 공장”과 “펠릭스 제르진스키 트랙터 공장,” “바리카디 대포 공장” 주위의 전투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소련군과 독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바로 옆의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전차와 무기를 수리했고, 공장 자체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도 있었다. 한편 코카서스(최종 목적지는 바쿠)로 향하는 A집단군의 진격은 청색착전 초기 몇달간의 진격속도와 다르게 11월 이후로는 눈에 띄게 진격속도가 느려졌다. 11월 이후 A집단군은 카프카스 산맥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가을에 스탈린그라드 방면의 전략적 작전 지도를 맡은 바실레프스키와 주코프는 시내로 병력을 축차 투입하는 것으로는 독일군을 격퇴할 수 없음을 깨닫고 대규모 공세를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일방적 공세 작전을 입안했다. 작전 계획은 독일군을 시내에 붙잡아두고, 양 측면을 공격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시에는 겨우 거점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만 병력을 지원했고, 시의 서북쪽과 서남쪽의 스텝 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천왕성 작전”으로 명명되었으며, 독일 중앙 집단군을 겨눈 화성 작전과 함께 실시될 예정이었다. 독일군은 특히 북쪽 좌익이 허점있는데, 이곳은 독일군보다도 약한 이탈리아군에 비해서도 덜 훈련되고 변변한 장비와 무기도 부족한데다가 사기도 엉망인 크로아티아군과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이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취약점은 소련군에게 간파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이 가능할 때마다 독일군 대신 주로 약한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돌파구를 뚫었듯이, 소련군도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비(非)독일 추축군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이 공세의 준비 기간 동안 주코프는 개인적으로 전선을 방문했는데 이것은 장군에게는 어쩌다 한번이었다.[7] 이 전투는 3년 전 주코프의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와 매우 유사했다. 주코프는 할힌골에서 두 갈래로 적을 돌파, 포위하는 협공 전법을 이용해 일본군 제23사단을 궤멸시켰다. 이는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자주 써먹었던 양 갈래 돌파 전법(독일어: Keil und Kessel)과도 거의 비슷함에 가까웠다.
치열한 시가전 동안 B집단군의 측면을 보호하는 독일군,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은 사령부에 계속 지원 요청을 했다. 장비가 불충분하고 훈련도가 낮은 헝가리 제2군이 스탈린그라드 북방의 정면 200킬로미터를 수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얄팍한 수비로 1~2킬로미터의 전선을 일개 소대가 맡는 꼴이었다. 소련군 부대들은 강의 남쪽 기슭의 여러 곳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것은 B집단군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시 자체만을 강조했고, 측면에 대한 지원 요청은 거부했다. 독일군 측면에 대한 소련군의 대폭적인 증강은 매우 비밀리에 수행되었지만, 각종 정찰과 포로 심문을 통해 독일 측에서도 이를 알고는 있었다.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는 측면에 대한 위험을 지적하며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히틀러의 집착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소련군의 병력 증강에 대한 정보를 허무맹랑한 일로 일축하면서 할더를 10월 중순 쿠르트 차이츨러로 교체하였다.
소련 “천왕성 작전” 반격(9월 19일~9월 28일)
11월 19일 소련군은 드디어 천왕성 작전을 개시했다. 3개 야전군(1근위, 5전차, 21군)으로 이루어진 남서 전선군이 바투틴 대장의 지휘를 받으며 북쪽에서부터 내려오기 시작했다. 남서 전선군은 총 18개 보병 사단과 8개 전차 여단, 2개 자동차화 여단, 6개 기병 사단, 1개 대전차 여단의 대병력을 보유했다. 이 부대는 독일 제 6군의 북쪽 측면을 수비하던 루마니아군을 겨누었다. 루마니아군은 이전부터 계속 독일 측에 증원과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이는 거부되었다. 소련군의 맹공 앞에 병력도 열세였고 장비도 불충분했던 루마니아 제3군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11월 20일에서는 남쪽 방면에서도 두 개의 야전군으로 이루어진 로코소프스키 중장 지휘하의 돈 전선군의 공세가 시작되어 보병만으로 이루어진 루마니아 제4군단을 분쇄했다. 두 갈래의 전선군은 이틀 후 스탈린그라드 서쪽 칼라치에서 만나 독일 제6군을 둘러싸는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했다. 소련 측은 이 만남을 기록 영화로 찍어 선전했지만, 이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연출이었다. 당시에는 사용 가능한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군의 협격 포위로 25만여 명의 독일과 루마니아군 그리고 약간의 크로아티아 출신의 의용병 부대가 거대한 포위망에 갇혔다. 포위망 안에는 또한 1만 명에 달하는 소련 민간인과 전투 중에 독일군이 잡은 수천 명의 소련군 포로가 있었다. 독일 제6군 전체가 포위망에 갇힌 것은 아니고, 5만여 명은 포위망 밖에 있었다. 포위망 구성을 마친 소련군은 사주 방위선을 구성하여 안쪽의 탈출 시도와 바깥쪽의 구원 시도를 모두 대비했다.
히틀러는 9월 30일 대중 연설에서 독일군이 절대로 시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소련의 포위 직후 열린 회의에서 독일군 사령관들은 즉시 돈 강 서안의 전선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당시 공군의 총참모장인 한스 예숀네크와 함께 바바리아 지방의 오베르잘츠베르크 별장에 있었다. 히틀러는 예숀네크에 포위된 제6군에 공중 보급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는데, 그는 별생각 없이 공군은 “공중 가교”로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 “공중 가교”로 구원군이 구성될 때까지 독일군은 포위망 안에서 싸우게 될 터였다.
이런 “공중 가교”는 사실 처음이 아니었고, 규모는 작았지만 1년 전 모스크바 공방전 직후 데미얀스크 고립 지대에 갇힌 독일군에 성공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단, 데미안스크에서는 일개 군단이었지만, 이번 경우는 일개 야전군 전체였다. 또한 그동안 소련군 전투기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훨씬 개선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데미얀스크의 성공은 히틀러에게 확신을 주었고,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도 며칠 후 여기에 찬성했다.
제4항공 함대 (일명 루프트바페)(Luftflotte 4)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이 계획의 번복을 요청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독일 제6군은 공중 보급을 받게 되었다. 제6군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단위 부대였으며 거의 정규 독일 야전군의 두 배의 규모였다. 게다가 제4기갑군의 한 개 군단도 함께 포위되어 있었다. 고립 지대에 대한 공중 보급이 불가능함은 명백했다.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은 크레타 전투 이후 증원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일 수송 가능량은 최대 300톤 정도였지만, 고립 지대 안의 일일 필요 보급량은 500톤이어서 필요량에 훨씬 못 미쳤다. 그러나 히틀러는 괴링의 계획을 지지했고, 포위망 안의 부대에 “항복 절대 불가”의 명령만을 반복했다.
공중 보급 계획은 즉각 실패로 드러났다. 소련군의 밀집된 대공 포화와 전투기는 독일 공군의 수송기들에 심한 손실을 입혔다. 또한 악천후도 독일군의 수송 효율을 저하시켰다. 결국 평균적으로 일일 필요량의 10%만 보급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가끔씩 엉뚱한 수송 물자가 도착하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20톤의 보드카와 여름 군복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이 상황에서 전혀 필요 없었다. 안전하게 도착한 수송기는 돌아올 때 사령부에서 재능이 있다고 판단된 지휘관들이나 기술적 전문가들 및 부상병을 날라 왔다. 제6군은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고, 조종사들은 도착한 물자를 나르는 병사들이 너무 지치고 굶주려서 음식을 나를 수 없다는 것에 충격 받았다. 독일 총참모장 차이츨러는 스탈린그라드의 고난에 충격을 받아서 스스로 음식을 줄였다고 한다. 이렇게 몇 주간 계속해 수척해지자 이를 본 히틀러는 화를 내면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도록 개인적으로 명령했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주위의 위치를 공고히 했고, 포위망을 줄이기 위한 전투를 개시했다. 12월 포위를 모면한 독일 제4기갑군을 주축으로 구성된 돈 집단군은 만슈타인 지휘하에 포위된 독일군을 구출하기 위해 “겨울 폭풍 작전”(독일어 : Unternehmen Wintergewitter)을 개시하였으나 소련군은 이를 격퇴하였다. 다시 한 번 혹독한 러시아의 동장군이 찾아와 볼가 강이 결빙하여 소련군의 보급은 쉬워졌다. 그러나 시내에 포위된 독일군은 식량, 난방 연료, 의약품 부족에 시달렸고, 수많은 병사가 동상, 영양실조,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12월 16일 소련군은 다시 두 번째 공세인 토성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것은 추축군을 돈 강 너머로 몰아내고 로스토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것이 성공한다면 코카서스를 향해 진격하던 독일 A집단군까지 포위가 되어 독일의 남부 집단군 전체가 붕괴하는 꼴이었다. 독일군은 대규모 지원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남아 있는 소규모 부대로 “기동 방어”를 시도하였다. 소련군은 로스토프에 근접하지 못했지만, A 집단군을 코카서스로부터 후퇴시켰고, 만슈타인으로 하여금 스탈린그라드에서 250킬로미터 후방으로 물러서게 하였다. 게다가 소련군이 독일군의 공항을 겨눈 타친스카야 기습이 성공하여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은 상당히 감소되었다. 이제 독일 제6군은 모든 구원군의 희망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제6군에게 이를 알리지 않고, 계속 희망을 가지고 위치를 고수하도록 명령했다. 몇몇 독일군 장교는 파울루스에게 위치를 고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포위망을 뚫어 스탈린그라드를 탈출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명령 불복종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다. 또한 이러한 포위망 돌파는 포위 초기 몇 주에는 가능했지만, 그 이후에는 연료가 부족하여 불가능했다. 기아에 허덕이던 독일군이 혹독한 소련의 겨울에 걸어서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은 소련군의 맹공 때문에 시의 외곽으로부터 시내로 철수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공중 보급이 이루어지던 피톰닉과 굼락크 두 공항을 잃었다. 독일군은 이제 기아에 허덕일 뿐만 아니라 실탄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소련군이 포로를 처형할 것이라는 생각에 결사적 항전을 계속했다.
특히 히비라고 불리는 소련군 출신 독일 부역자들은 잡히면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결사적이었다. 그들을 공격하던 독일군을 역(逆)포위한 소련군은 포위망을 강화하여야만 했다. 다시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독일군이 볼가 강 강둑으로 밀려났다.
1943년 1월 소련군은 (1) 모든 포로에 대한 안전 보장, (2) 독일군 환자와 부상병에 대한 의료 지원, (3) 포로의 개인 소지품 소지 허가, (4) 정규 식량 지급, (5) 전쟁이 끝난 후 송환 등의 조건을 내걸고 파울루스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다. 이는 심리전 차원에서 선전 삐라로 만들어져 포위된 독일군에게도 뿌려졌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고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다.
1월 20일 크로아티아 의용군 부대를 이끌던 빅토르 파비치치가 전사하고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자신의 집권 10주년 기념일인 1월 30일에 원수로 승진시켰다. 지금까지 포로가 된 독일의 원수가 없었음을 상기시키며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자결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하지만 다음 날 소련군이 폐허가 된 백화점 건물에 차렸던 사령부로 진입하자, 파울루스는 이런 히틀러의 기대를 저버리고 항복하고 말았다.
2월 2일 항복한 독일군 포로는 22명의 장성급을 포함한 9만 1000명이었다. 이들은 기아와 질병에 싸울 기력을 잃어 도저히 더 싸울 수 없었다. 처음에 스탈린그라드에 갇혔던 25만 명의 추축국 병사 중 항복한 포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망했다. 파울루스의 항복에 대해 히틀러는 “그는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앞두고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택했다.”라며 화를 냈다.
한편 2월 2일 대부분의 추축군 병사들이 항복했다는 공식적인 소련군의 발표와는 달리, 독일 측의 기록 영화 《스탈린그라드》에 따르면 11,000명이 넘는 독일군과 추축국 병사는 항복을 거부하고 계속 저항했다고 한다. 싸우다 죽는 것이 소련의 포로가 되기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그랬을 것이다. 이들은 파울루스의 항복 이후 약 한 달이 지난 1943년 3월까지 지하실이나 하수도에 은신하며 저항했다. 소련군의 소탕 작전으로 이들의 수는 계속 줄어들었고, 3월까지 거의 소탕되거나 항복하였다. 이 기록 영화에 나온 소련군 문서에 따르면 이렇게 저항한 2,418명이 사살되었고 8,646명이 포로로 잡혔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전투였다. 이 전투는 199일간 지속되었다. 전투의 범위가 광대했고, 사상자 수가 지나치게 많을 것을 두려워 한 소련 정부의 금지 때문에 정확한 집계도 어려웠다. 전투 초기에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심한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소련군이 독일군의 측면(주로 루마니아군)을 돌파하여 독일 제6군의 나머지를 포위하기 전에도 독일 제6군은 이미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어떤 때는 독일군이 시의 90%를 장악하기도 했으나 소련군 장병들은 독일군의 점령 지구 안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독일 제4기갑군의 일부도 스탈린그라드 주변의 소련군의 반격 때 심한 손실을 입었다.
많은 학자는 이 전투에서 추축국의 병력 손실(전상 및 전사, 포로 등 포함)이 85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다. 독일이 40만 명, 루마니아가 20만 명, 이탈리아가 13만 명, 헝가리가 12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본 것이다.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9만 명도 1943년 봄에 대부분 티푸스로 사망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소련에 억류되어 전후 복구 사업에 강제 동원되다가 최종적으로 1955년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자는 5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독일도 소련군 포로를 가혹하게 다루긴 마찬가지였다. 5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 출신 독일 부역자(히비(Hiwi))들도 소련군에 사살되거나 잡혀 처형되었다. 각종 문헌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의 손실은 총 1,129,619명이라고 한다. 478,741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650,878명이 부상당했다. 이 수는 작전의 범위를 넓게 잡아 추산한 것이다. 또한, 독일 제6군과 제4기갑군이 시내로 진격해 온 첫 주의 공습에서 4만여 명의 소련 민간인이 시내나 교외에서 사망했다. 시 이외의 민간인의 총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소련과 추축국의 전체 인명 피해는 170만에서 200만으로 추정된다.
마마이 언덕에 세워진 85미터 높이의 “모국 러시아”상
영웅적인 방어전을 기념하여 스탈린그라드는 1945년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았다. 전후 1960년대에는 시를 내려다보는 마마이 언덕에 “모국 러시아”를 상징하는 거대한 입상이 세워졌다. 이 근처에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념관이 세워졌으며, 오늘날까지 당시에 부서졌던 건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소련 62군과 64군을 지휘했던 추이코프와 슈밀로프도 사후 이곳에 묻혔다. 곡물 저장소와 2개월간 독일군의 포위에 견딘 파블로프의 집도 보존되어 현재까지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오늘날까지 마마이 언덕에서는 뼈나 조각난 쇳조각이 발견되곤 한다. 이것들은 전투의 치열함과 독일 침략자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독일군은 포위된 가운데서도 주목할 만한 군기를 보여주었다. 독일군이 이런 규모로 악조건 아래에서 포위된 것은 처음이었다. 포위 말기에는 식량과 의복이 부족하여 많은 독일 병사가 동사하거나 아사했다. 그러나 군기는 엄정히 지켜졌고, 상관에 대한 복종도 저항이 의미 없어질 때까지 지켜졌다. 파울루스 원수는 빨리 포위망을 빠져나오라는 다른 독일 장군들(특히 구원군을 이끌었던 만슈타인)의 권고나 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실탄과 식량이 고갈될 때까지 위치를 고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래서 장군이었던 파울루스의 항복 이전에 소련군에게 항복한 독일군의 수는 매우 적었다.
이후 독일군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1943년 초봄, 만슈타인은 `스탈린그라드의 승리에 고취되어 너무 깊숙이 추격해온 소련군`을 섬멸하여 일시적으로 공세를 취하기도 하지만(제3차 하르코프 전투 참조), 독일군의 병력과 자원은 이미 스탈린그라드에서 지나치게 소모되었고 더는 소련군을 압도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소련군은 초기의 패배를 딛고 이 전투를 기점으로 병기와 전법을 대폭 개량하여 독일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전력을 확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