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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중 첫 번째로 담임목회자로 청빙 받은 교회가 한빛 교회였다.
한빛 교회는 월커힐 앞 한강 건너편에 있는 암사동에 있던 교회로 당시 대광 중학교 국어 선생으로 근무하시던 안재희 선생님(장로)이 교인 약 80명을 모아 놓고 당시 유행하던 베델 성서를 강의하고 계셨다.
그러던 중 교인들이 교역자를 청빙하여 교회를 세우자고 합의
하여 세원 진 교회였다.
교회는 안장로의 처제가 운영하던 유치원에서 시작하였다. 마루 바닥에서 예배를 드렸다.
교회에서는 때묻지 않은 신학 생(목사들에게 대한 인식이 좀 좋지 않았던 같다)을
모셔다 훌륭한 목회자로 만들자는 취지로 신학교 졸업반 학생 중에서 선택하기로
합의하여 필자를 선택하여 초대 교역자로 청빙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 교회에서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자세히 이야기하려면 1-2시간 이야기해도 모자랄 내용이다.
요약하여 간단하게 기록했지만 글이 좀 길다. 끝까지 읽으려면 인내심이 요구된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기록되어있다.
<첫 번째>는 100마리의 양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가 그 한 마리를 찾은 기쁨으로 잔치를 베푸는 목자의 이야기.
<두 번째>는 10개의 드라크마(동전)중에 한 개를 잃어버렸다 다시 찾아 기뻐하는 한 女人의 이야기.
<세 번째>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사업을 하다 실패하고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물을 다 탕진하고 돌아 온 아들을 껴안고 기뻐하며 잔치를 베푸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모두 귀하게 여기던 것을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기쁨이 너무 커서 친구들과 친척들 그리고 이웃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다.
다음 이야기는 4살 난 아들을 잃어버렸다 15일 만에 찾은 기쁨에 관 이야기다.
신학교 졸업반 때인 1978년 7월 24일에 한빛 교회의 첫 번째 담임목회자로
청빙을 받아 부임했다.
부임한 첫 주일에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주택가 한 가운데 있는 교회에 이웃에
살고 있던 교인의 아들과 저의 4살과 6살인 두 아들을 어린이 예배에 보냈다. 그
런데 어린이 예배가 끝나서 아이들이 돌아 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오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오겠지”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큰 아들이 혼자 돌아왔다.
“동생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니까 모른다고 했다.
동생을 혼자 교회에 놓고 온 것으로 생각하고 교회로 갔다.
그러나 교회에도 없었다.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물었더니
“예배 시간에 밖으로 나가기에 화장실에 가는 줄 알았다”고 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곧장 동네 이 구석 저 구석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저녁 예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아이가 돌아오질 않았다.
저녁 예배를 마치고 광고 시간에 아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사실을 교인들에게 알렸다.
밤 늦도록 찾아 다녔지만 아이를 찾지 못했다.
하루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새우고 이튿날(25일) 새벽부터 동네를 돌아다니며 찾아 보았다.
교인들도 사방으로 아이를 찾아보았으나 아이를 보았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파출소에 가서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미아 신고를 했다.
그리고 동사무소에 가서 아이를 찾는 방송을 내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만 해도 동사무소에서는 방송으로 공지 사항을 알릴 때였다.
3일째 되는 날(26일>에는 근처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들을 찾아가서 교인들에게
아이를 찾아 달라는 광고를 부탁했다.
그날 오후에는 KBS T.V 방송국에 아이 찾는 광고를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인터뷰하러 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서 방송국에서 방송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사연인즉 그 당시 방송국장이 [임택근] 아나운서였는데 회의 결과 아이 찾는 방송을 한 번 내보내면 아이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다 방송해주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4일째(27일)>되는 날에는 아이를 찾는다는 전단(傳單)을 만들었다.
전단에는 아이의 사진과 이름, 생년월일, 아이가 할 수 있는 말, 입고 있는 옷,
외모의 특징 등을 기록하여 뿌리기 시작했다.
7월인 그 때의 날씨는 섭씨 31-33도를 오르내렸다.
매일 저와 아내는 땀으로 목욕하듯 하면서 아이를 찾아 다녔다.일 주일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찾아 다녔다. 캄캄한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올 때는 지친 몸으로 돌아와 저와 아내는 마주 앉아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7일이 8일이 9일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서울 시내 16곳이나 되는 미아보호소, 영아원, 고아원을 다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매일 “새로 들어온 아이는 없느냐 ?” 전화를 걸었다.
아이를 찾아 다니다 보니 아이를 한 두 번 씩 잃어버렸다 찾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경험담을 많이 들었다.
하루는 아내가 “여보 나 行商으로 나서야 할 것 같아요”하고 말했다.
사과나 배등 과일 또는 가정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머리에 이고 이 집 저 집
팔러 다니며 아이를 찾겠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쏱아 졌다
전국에 있는 교회의 아는 목사님들과 친구들에게 전단을 보내고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다니는 동안 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1).유괴당하지 않았는가 ?. (2).뺑소니 차가 아이를 치어 죽여서 멀리 갔다 버리지 않았는가 ? (3).혹 하수구에 빠져 죽지 않았는가 ? (4).가까운 한 강 백사장 웅덩이에 빠져 죽지 않았는가 ?
하고 매일 경찰서에 가서 교통사고를 확인하고, 맨홀을 뒤지고, 근처 백사장을 샅샅이 뒤졌다.
필자는 3년간 신학공부를 하는 동안 워커힐 바로 아래 있던 신학교 근처인 광장동에서 방 한 칸을 세 내어 살면서 그곳에 있던 광장교회에 다녔다..
10일째 되는 날 광장동에 있는 광장교회 전도사님이 찾아와서 동네에서 채소 가게를 하는 아주머니가 지난 24일 천호동 시외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 아이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전 해주었다.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그분은 24일(주일) 오전에 천호동 채소 도매상에서 채소를 사가지고 리어카를 끌고 오는 중에 경기도 광주 방향 시외 뻐스 정류장에서 흰 치마 저고리를 입은 50대 여인이 울고 있는 우리 아이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분은 그때 “김전도사님의 아이가 왜 이 시간에 저기서 울고 있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냥 지나쳤다고 했다. 그 말은 들은 저는 “틀림 없이 시골 아줌마가 아들이 탐나서 데리고 갔구나”하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10일 째 되어서야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즉시 시외 버스 운전기사, 차장, 승객들에게 전단을 나눠주며 아이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13일 지나도 아무 소식 없었다 . (남대문시장 닭장. 이마피). (서울 역 빨간 벽돌집, 앵벌이-서울 부산 대구 교환) 이이야기는 지면상 생략한다.
14일째 되는 날. 훗날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2년 동안 부목사로 시무했던 천호동 광성교회 (당시 교인 2천 7백명)의 김창인목사님에게 중고등 학생 50명을 동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5일째 되는 아침에 교회 마당에 50여명의 남녀학생들이 모였다.
그들에게 전단을 나눠주고 둘씩 짝지어 교통비를 주면서 각 정류장 마다 한 조씩 내려서
파출소, 동사무소 찾아가 아이를 찾아 달라 부탁하게 하고
마을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전단을 붙이도록 했다.
학생들이 출발하기 전에 광성교회 부목사인 임은빈목님이 필자에게 기도하라고 했다.
그때 저는 “하나님 ! 오늘 아이를 꼭 찾아 이 학생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다.
학생들을 다 보낸 후 우리 부부는 교회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 기도하며
학생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두 시간쯤 지나니까 가까이 갔던 학생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오후 2시쯤 : 경기도 광주 방향으로 나갔던 여학생 둘이 교회 문에 들어서면서 우리 부부를 보자 손을 흔들며 “전도사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하고 외치며 뛰어왔다.
두 여학생에게 자세히 이야기를 들었다. 파출소를 찾아가 전단을 주며 아이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더니 경찰관이 며칠 전 이 아이와 비슷한 아이 둘을 군청 미아보호소로 보냈다고 했단다.
그리고 잠깐 기다리라고 하면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전단지에 있는 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을 하나나 물었다고 한다.
이름이 뭐냐 ?. 아빠 엄마 이름이 뭐냐 ?. 어느 동네에 사느냐 ?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 ? 평상시에 이런 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또박 또박 이야기 하더란다. 그리고 경기도 수원 고아원으로 가보라고 했다고 했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즉시 뛰어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느리게 가는 택시는 생전 처음 타보았다. 고속도를 들어서서 운전기사에게 좀더 빨리 달리라고 했더니 기사는 “지금 100킬로가 넘어요. 더 이상 빨리 가면 티켓 먹어요”라고 했다.
수원 북문에서 왼쪽으로 가니 원호처가 나오고 거기를 지나 산 쪽으로 들어가니 고아원이 있었다. 사무실 찾아 원장님을 만났다. 원장님이 “어떻게 왔느냐 ?”물었다.
아이를 찾으러 왔다고 했더니 “이름이 뭐냐 ?” “김정윤 !” 그러자 “정윤이요 ?”하고 보모에게 “정윤이 데려와요.”하고 말했다.
순간 아 ! 아들이 여기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있다 3-4살된 아이들이 10여명 조르르 몰려왔다. 아이들 머리 똑같이 빡빡 깎았고, 옷도 거의 같은 것을 입혔기 때문에 모두 비슷 비슷해 보였다. 잠시 후 아들은 우리를 알아보고 엄마 ~ 하고 달려와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원장님이 “아이들이 여기에 들어와 15일 안에 부모가 나타나지 않으면 입양시키고 “일단 입양되면 비밀이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저의 아들은 이미 來日 이면 데려갈 부부가 있었다고 했다. 하루만 늦었더라도 아이를 영영 찾지 못할 뻔했다.
밤늦게 교회 도착하니 온 교인들이 나와 냉면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장로님께서 “살찐 송아지를 잡지 못하고 좋은 옷과 반지는 준비하지 못했지만 냉면으로 잔치하며 찾은 기쁨을 함께 나누자”고했다.
저희 부부는 15일 동안 겪은 이 사건을 통해 잃은 슬픔과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아들을 15일만에 찾았을 때 찾은 그 기쁨, 그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었다.
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동안
[가].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절감했으며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았다.
[나].금식기도는 강조하지 않아도 어려운 일을 만나게되면 자연히 하게 된다는 사실과.
[다].밤 새워 철야 기도를 하라고 하지 않아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연히 하게 된다는 사실 개달았다.
이 간증은 후에 영락교회 부목사로 시무할 때 두 번씩이나 했다.
한번은 영락 기도원에서 교구별 산상 기도회를 할 때 한 경직 목사님의 특별 강의 시간이 있었는데 사정에 의해 못하시게 되었다.
회의 결과 필자가 대신하기로하여 강단에 서서 교인들에게
"제가 교회사를 많이 공부했는데 이에대해 말씀드릴까요 ? 아니면 신앙 간증을 할까요 ?"하고 물었더니 "간증하세요"하고 외쳤다. 그래서 처음 이 간증을 하게 되었다.
얼마 후 교회 본당에서 금요일마다 철야기도회를 했는데 부목사들이 교대로 설교를 했다.
필자의 차례가 된 날 교인들에게서 청원이 들어왔다.
자기네 교구 교인들은 목사님의 "찾은 기쁨"간증을 못들었으니 설교 대신 간증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락교회에서 두 번째 이 간증을 하였다.
그 후 초청 받는 교회마다 이 간증을 했다.
이 간증을 하는시간이 되면 많은 교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잃은 양 한마리를 찾으시는 예수님
이 사진은 영락교회 부목 시절 교인 중의 한 분이 설악산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필자의 아들을 잃어
버렸다 찾은 사실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직접 그려준 그림이다.
한빛 교회 남선교회 수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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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 목사님 ,
이거 무슨 드라마 같은
얘기외까 ?
그런 엄청난 고난이 있으셨구려 !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보실피신 거예요 ! !
아 ~ 멘 ! ! !
이 사건을 고난이라한다면
또 있지요.
감옥에 갈뻔했던 사건
두 번의 스캔들(여자)
교통 사고 등등
앞으로 다 회고록에 나올 사건들입니다.
다음 회고록이 기다려 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