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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림에 놀고 쉬며 내 마음을 즐기노라 | ||||||||||||||||||||||||
| 다산 정약용의 예술세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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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어떤 사람일까. 그 전체상을 말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려진 서로 다른 초상화만 해도 7개가 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다산은 주로 경학(經學), 경세학(經世學) 등 182책 503권이라는 전무후무한 방대한 저술에다 인정사정없이 탐관오리를 고발하는 목민관이다. 이런 다산은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공부밖에 모르는 차가운 사람으로 보이기 일쑤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 다산의 전체적인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시·글씨·그림 같은 문예가 증언하는 다산은 자유분방한가 하면 비분강개하고, 다정다감한 기질의 소유자다. 우선 '죽란시사'(竹欄詩社)를 보자. 이 모임은 다산이 중심이 되어 만든 남인 계열 초급 관리들의 사교 모임이다. 다산은 출사 초기, 즉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직에 나갈 때인 30대 초반에 채홍원·이주신 등 친구 13명과 형님 약전 등 모두 15명으로 죽란시사를 조직했다. 다산의 서울 집인 명례방에 모여 정원에 만발한 꽃을 감상하며 술과 시화로 우의를 다졌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 재미있는 사실은 모임 시기가 더 시적이다. 다산이 쓴 죽란시사 서문에 의하면 살구꽃 필 때, 복숭아꽃 필 때, 국화 필 때, 늦여름 연꽃이 한창일 때, 오이가 익을 무렵,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세모에 분매(盆梅)가 필 때 등이다. 다산의 놀음놀이가 어떤지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1797년 여름, 36살의 다산은 근무지를 무단이탈한다. 그가 조정의 휴가 결재 없이는 도성을 못 나간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공무상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알고 보니 약전·약종 형님, 친척들과 함께 고향 소내(초천·苕川)에서 고기를 잡아 탕을 해먹고, 천진암에서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며 날을 보내다 사흘이 지나서야 돌아온 것이다. 이때 지은 시가 20수이고, 고사리·두릅 등 먹은 산나물이 56종임을 <유천진암기>에 기록하고 있다. 딱딱한 목민관 이미지와는 달리 자유분방한 기질에, 풍류가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운림에 놀고 쉬며 내 마음 즐기노라
"갑신년(1824) 9월 13일에 내가 열상(洌上)에서부터 배를 타고 청탄(靑灘)에 이르러 잤는데, 다음날 현계(玄谿) 승지와 함께 사천사에서 놀았다. 대탄(大灘)과 묘곡(妙谷) 여러 벗과 이윤오(李潤五) 형제들도 이르러 절에서 잔 사람은 열아홉 사람이었다. 흩어지고 모임이 일정하지 않음과 깃들고 그침에 자취가 없음을 생각하니 감개스러웠다. 인하여 시를 지어 기록하고, 나이에 따라 차례를 짓고, 그 이름을 적어 뒷날 고증하도록 했다. 사언사구를 지은 것은 시를 짓는 것으로 그 신령을 가리지 않으려는 때문이다. 열수(洌叟) 적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다산이 기약 없는 만남에 자취가 없음을 생각하여 시를 지어 뒷날 고증하도록 했다는 대목이다. 200여 년 후 오늘을 생각하는 실학자 다산의 세심한 역사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사언사구의 시로 작자의 신령을 가리지 않는 배려다. 동락에 있어 배움의 높고 낮음을 관계치 아니하였다. 서문에 이은 첫 수는 다음과 같다. 窈彼雲林 조용한 저 운림은 靑窅深沈 푸르고 깊숙하네. 於焉游息 여기서 놀고 쉬며 聊樂我心 나의 마음을 즐기노라. 그야말로 생애의 모든 풍상고절(風霜苦節)을 다 감내해낸 후, 관조하듯 한강의 운림과 다산의 마음이 하나 되어 노닐고 있다. 이런 다산의 성정 기질은 글씨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보기에는 제자들이 '농묵초서(濃墨草書)를 조금만 덜 했더라면 도학이 더 높아졌을 것'이라고 증언하는 퇴계 이황(1501~70)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다산의 글씨는 걷거나[해서] 뛰거나[행초서] 흐트러짐이 없는 퇴필(退筆)의 엄정단아한 짜임새와 미감과는 딴판이다. 자유분방한 기질의 소유자 굵고 가늘기가 뚜렷하게 차이 나는 명조체(明朝體)의 활자 골격과 미감이 다산의 해서라면, 행초서에서는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다산 53살(1814년) 때인 강진 유배 시절에 지은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필치를 보자. 활자로 박아내듯이 엄정하게 한 자 한 자 적어내고 있다. 물론 전통적으로 소해(小楷)의 기준이 된 왕법(王法·왕희지체)하고는 거리가 멀다. 퇴계가 해서나 행초의 차이 없이 왕법을 토대로 둥글고 납작한 필획과 구조로 일관했다면, 다산의 뚜렷한 태세 변화에 변화불측의 해행으로 구사된 글자 짜임새는 아무리 성정 기질의 개인 차이나 변화된 시대 서풍을 감안하더라도 다산만의 독자적인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다산이 병객(病客)이라고 능청(?)을 떨며 일필휘지로 단숨에 구사한 행초 <사언고시> 6폭 병풍을 보자. 원필(圓筆)에다 파격적인 글자 짜임새는 물론 화면 경영에서도 크고 작은 글자를 극단적이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자유자재로 구사한 이 작품은, 글씨를 넘어 유장한 남도의 육자배기 노래 가락을 듣는 듯하다. 특히 제4폭의 '정관'(靜觀)의 결구는 파격과 조자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 행초서 중심의 다산 글씨의 맥락 한 줄기는 원교 이광사(1705~77)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원교는 강진과 가까운 신지도에서 23년간 유배를 살면서 글씨만 쓰다 생을 마감한 사람이다. 이른바 '동국진체' 맥락을 거슬러가면 시발점인 공재 윤두서(1668~1715)와 옥동 이서(1662~1723)와 맞닿아 있다. 다산은 글씨에 관한 한 원교를 통해 외증조부인 공재, 같은 성호학맥인 옥동과 삼중으로 거슬러 만나는 셈이다. 다정다감한 아버지 다정다감한 '인간' 다산의 성정은 유명한 고려대 박물관 소장 <매조도>(梅鳥圖)에 잘 그려져 있다. 그림만이 아니라 다산의 시서화가 하나된 이 작품은 52살(1813년) 때 만들어졌다. <매조도>의 시를 보자. 翩翩飛鳥 파르르 새가 날아 息我庭梅 뜰 앞 매화에 앉네. 有烈其芳 매화 향기 진하여 惠然其來 홀연히 찾아왔네. 爰止爰棲 여기에 둥지 틀어 樂爾家室 너의 집을 삼으렴. 華之旣榮 만발한 꽃인지라 有賁其實 먹을 것도 많단다. 향기 만발하는 정매(庭梅)에 앉은 한 쌍의 새에게 다산은 둥지를 틀어 집 삼기를 권한다. 이 장면은 감옥 아닌 감옥에 갇혀 딸을 그리는 아버지 다산과 오버랩되면서 애틋함을 배가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매화는 더 이상 군자가 아니라 펄펄 나는 저 새가 쉬는 정원의 매화나무다. 새 두 마리가 시집 가는 딸을 염두에 두고 그렸다면 비유컨대 신랑과 신부라 할 수 있고, 그렇다면 매화는 그들이 깃을 드리우고 사는 집인 셈이다. 그래서 이 그림에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기원, 그리움이 구구절절 박혀 있다. <매조도>는 잘 알려져 있지만 다산의 전체상 속에서는 보지 못했다. 차갑게만 느껴지는 경학자 경세가로서 다산과는 달리 따뜻한 아버지로 볼 필요가 있다.
<열상시축>(洌上詩軸) 1824-정약용 건축가이자 조경디자이너로서 다산 더 나아가 죽음을 대신한 유배형의 현장을 '다조'(茶竈), '약천'(藥泉), '정석'(丁石),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으로 다산초당을 지어내는 지점은 시(詩)·서(書)·화(畵)를 하나로 넘나드는 문인예술가를 넘어 건축가나 조경디자이너로서 다산을 만나게 한다. 초당은 다산이 유배생활 중 10여 년(1808~18년)을 생활한 공간이다. 또한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일표이서(一表二書)와 육경사서(六經四書)의 저술로 다산이 본말을 갖췄다고 자부하는 500여 권의 저작과 시작의 현장이다. 이것은 물론 강진 제자들과의 집체(集體)작업 결과이지만 이 맥락에서 초당은 조선의 학술 사상사의 기념비적 공간인 셈이다. 다산은 이곳 풍광을 노래한 시를 많이 남겼는데 <다산팔경사>(茶山八景詞),〈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다산십이승첩>(茶山十二勝帖)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을 보면 다산초당의 풍광이나 공간 배치의 변화 과정도 알 수 있는데, 초의가 그린〈다산도>(茶山圖)와 비교하면 흥미가 배가된다. <다산사경첩>의 <석병>(石屛)에서 "죽각 서편 머리에 바위가 병풍되니"(竹閣西頭石作屛)라거나 <다조>에서 "차 끓이는 부뚜막이 초당 앞에 놓였네"(烹茶小竈艸堂前), "다조는 지정 앞에 있다"(茶竈在池亭之前)고 하여 초당과 지정을 동일 공간으로 설명한 것이 그 예다. 차를 달이며 민중의 울부짖음에 귀기울이는
다산이 강진 들판에서 자행되는 탐학 현장을 "내 살가죽 네가 벗기고/ 내 뼈까지 부순 네 놈…"(<전가기사>)으로 고발하는 지점은 감사 수령 아전과 같은 목민관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백성을 하늘로 여긴' 유교 정치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산의 시처럼 현실 참여는 그림에서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문인의 여기로 그리는 그의 그림에서 풍자나 고발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지만, 그렇다고 여느 문인들의 그림처럼 취급하는 것도 온당치 못하다. 실학적 사실주의 화풍의 단초 다산의 매화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그림 그리는 계기가 매우 현실적인데, 앞서 본 <매조도>는 15살에 시집온 부인이 입고 온 빛바랜 분홍치마가 캔버스가 될 뿐만 아니라, 이를 마름질해 적중(謫中)에서 딸에게 남겼다. 매화나 새를 그리는 기법도 사실적이다. 매화 하면 은연중에 사군자와 바로 통하지만 채색과 흰색 호분으로 새의 부리와 꽃송이를 선명하게 담아내는 <매조도>의 묘사기법에서 다산 그림은 실학적 사실주의 화풍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요컨대 다산의 매화는 더 이상 퇴계가 형님으로 부르던 군자가 아니라 그냥 뜰의 나무다. 이것은 동시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서 난초를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유(儒)·불(佛)의 불이선(不二禪)과 성중천(性中天)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도의 관념 세계로 노래한 것과 다르다. 이런 측면에서 같은 경학자의 시·글씨·그림이 동시대의 다산과 추사는 물론 조선 중기 퇴계와 후기 다산이 다른 것이다. 문예로 보는 다산의 인간상은 이지(理智)와 감성이 하나되는 지점에서 그려진다. 오는 7월 2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천명, 다산의 하늘'전에서 그런 다산을 만날 수 있다. 글•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관,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1989년부터 예술의전당에서 서화사 및 현대서예 전시를 50여 차례 기획했다. *사진제공: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