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천천히 걸어서 다닐 여유도 없이 이동을 할 때에는 뛰거나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야만 얼마 전에 새롭게 주어진 과업의 예상치 중 오늘의 목표량과 내일로
연결되는 일을 준비 할 수가 있고 한달 전부터는 휴일을 이용해 계속해오던 일도
회사에서 추진 중인 일이 끝날 때 까지는 잠시 보류를 해놓았다.
항상 상반기에는 순간적으로 물량이 쏟아져 나오지만 몇 달 후에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인력을 채용하는 것 보다 스스로 자원을 해서 진행 중인 기존업무에서 별도로
설계팀에 합류하여 현장실사를 통해 발주자의 의도를 청취하고 반영하여 설계도와
시방서에 옮겨 놓는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오늘 게시판에 올려야 할 글을 미루다가
어제 저녁부터 급히 준비를 하는 중이다.
1965년도 국민학교 5학년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독립문옆 영천시장 부근에 있는
금화국민학교에 전학을 해서 6학년을 마치고 중학교는 부산에서 다녀야 했기에
중학교 시험준비 차 부산으로 내려와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 국민학교
시절의 졸업앨범과 졸업장이 없어 몇 회 졸업생인지 알지 못한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오엠님들 중에 금화국민학교 동문이 계시면 “1967년 2월”
에 졸업식을 치른 졸업생의 졸업기수를 알려 주시면…///
어머니는 부산에서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외항선이 부산항에 들어오면 깡깡이를
하는 여자일꾼들을 통솔하는 총책임자로 일을 하면서 어머니가 관리하는 일꾼들은
부산시내 전역에 많은 인력을 관리하시며 선박의 녹슨 곳에 깡깡이(Chipping)와
페인트칠 등을 하셨기 때문에 당시의 벌이로서는 상당한 것으로 기억 된다.
벌이가 좋았기에 어머니는“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된다는”
속담에 따라 자식들을 서울로 보내 조기유학을 시켰지만 당신의 뜻대로 자식들은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머니의 생각은 외사촌형님이 서울의 일류대학을 어렵게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형님의 대학등록금과 생활비를 부담하는 대가로 “형과 나”를 과외공부를 시켜
좋은 중학교로 진학시킬 목적으로 시골에 계시는 외할머님을 설득하셔서 서울에
보내어 가사일을 하시도록 하면서 생활비를 매달 보내 주셨지만 외사촌형님의
책값과 용돈을 주고 나면 항상 생활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친손자와 외손자를
차별하면서 외사촌형님에게는 새로 지은 밥을 아랫목에 넣어 이불로 보온하여
챙겨주시곤 했지만 가끔 상한 밥으로 죽을 끊여 우리에게 먹어라 하시고,
냄새 난다고 투정을 하면 할머니는 “니 코는 개 코가 무도(먹어도) 괜찮다”라며
짜게 만든 반찬과 함께 먹어도 두세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 오시지만 실제상황을 외할머니가 무서워서 사실대로 일러주지 못했다.
장조림과 여러 가지 밑반찬을 준비해서 오실 때에는 맛있는 반찬을 먹어보지만
어머니가 부산으로 내려 가시면 반찬은 외사촌형님의 몫이고 반찬이 오래되어
맛이 변할 무렵에 우리들에게 주셨지만 한마디의 불평도 못하고 지냈지만
서울생활이 싫어져서 꾀병을 부리는 날이 많아지고 수시로 죄 없는 콧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벼서 파다 보니 코피가 멈추지 않자 병원에 입원을 하여 코피가
멈추면 다시 코를 후벼 코피를 났지만 담당 의사선생님은 원인을 모르고
요즘처럼 의료기계가 향상되어 카메라로 콧속을 들여다보면 들통이 났겠지만…
콧구멍 사건 후 6학년 여름방학이 다가올 무렵에는 일부러 귓구멍을 후벼서
귀에 염증을 만들어 꾀병으로 부산에 내려가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외할머니의
차별화된 생활을 어머니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다.
그 해 5월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20연대는 강원도 간성에서 고성, 속초, 강릉에
설치 되어있는 벙커 보수작업과 새로 구축되는 신규벙커 작업을 하기 위해 부대는
강원도 고성의 산골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여 25인승 대형 텐트(막사)를 치고
보병들이 작업하는 동안 사단과 통신망을 유지하면서 병영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보병들의 일과는 새벽6시에 기상을 하여 아침점호를 취하고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군용 더불백에 자갈, 모래 또는 시멘트포대를 짊어지고 벙커공사를 하는 산꼭대기에
옮겨주고 돌아오면 점심시간 그리고 식사 후에 한번 더 벙커공사 현장을 다녀오면
저녁시간으로 하루 두 차례 공사자재를 짊어지고 길도 생기지 않은 험난한 산속을
병사들은 개미처럼 부지런히 옮겨 날아야 했다.
CW병으로는 장기하사(무전반장) 1명과 후임으로 2명의 조수를 두고 일과 시간에는
사단본부와 매시간 감도확인과 대기상태를 유지하면서 업무는 무전반장과 조수에게
맡기고 실기시험 준비를 하면서 1977년 10월 서울에서 무선통신사 2급 실기시험을
치르고 11월 초순경 에는 합격통지서를 받는다……
필기시험을 준비하고 자격증을 손에 넣기까지 약1년 반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 되고
앞으로 10개월 후에는 제대해서 상선을 탈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생활을 하면서
부대는 어느덧 6개월간의 벙커보수 작업이 끝이 나면서 홍천으로 이동을 한다.
/// 그 당시 무선통신사 2급 이상 실기시험은 서울에서만 치렀음 ///
얼마 남지 않은 군 생활을 마무리 하면서 제대하기 전에“을종선박통신사”해기면허와
승선에 필요한 각종 교육 필증을 준비를 해놓았다.
1978년 9월 19일 제대를 한 며칠 후 취업등록을 위해 선박통신사협회를 방문하여
협회에 가입을 하면서 구직등록을 하는데 모 선박회사직원이 통신장1명을 급히
추천 해달라고 담당자에게 사정을 하던 중 내가 취업 등록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협회장에게 이야기 하고는 승선 차 입사서류와 출국허가서를 준비 하라고 한다.
오후 늦게 부산병무청으로 가서 출국허가서를 신청하니 제대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9보충대에서 서류가 넘어오려면 보름에서 한달 가량 소요되기 때문에 출국허가서의
발급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 정문을 나서려는 순간 방위병 1명이 쫓아와서
담당자가 오라고 해서 가보니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안되고, 내일 오전에 방위병
한 명과 함께 9보충대로 가서 병역기록부와 개인이 소지하고 있는 병역수첩을
복사해서 가져오면 출국허가서를 발급 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다음날 출국허가서를
발급받고 출국 준비를 한다.
처음 상선에 승선하면서 사무장업무인 출,입항시 세관, 법무부, 검역 등의 서류작성
및 수속하는 요령과 외국 무선국과의 특이한 교신 방법 등 상선에서 해야 할 업무를
몇 시간동안 서류의 Sample을 복사한 자료를 놓고 선배로부터 간단하게 들었지만
업무에 대한 자신감 없는 마음으로 승선을 하기 위해 바쁘게 준비를 했다.
제대를 하고 열흘 만에 승선을 하면서 주변의 지인과 친구들을 만나 보지도 못한 체
9월 30일 김해공항에서 일본 오사카에 입항해 있는 해외송출선을 타기위해 수속을
밟는 중 법무부 출국심사 확인을 받을 때 법무부 직원은 문제가 있어서 심사가
불가능하니 일단 법무부 사무실로 가라는 명령(?)을 듣고 중죄를 지은 죄인처럼
무겁게 발걸음을 법무부 사무실로 향해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