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윤정구/ 김춘수, 무의미 시의 깊은 뜻, 혹은 반짝거림

[한작가]

무의미 시의 깊은 뜻, 혹은 반짝거림
―김춘수 시인을 찾아서
윤정구

김춘수 선생님의 강의는 몇 번 받아 보았으나, 이렇게 사적으로 찾아뵙기는 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에 명일동 선생님댁을 향하는 나는 소년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열네 권의 시집과 열 권이 넘는 시선집의 어마어마한 양적 성취는 물론이려니와, 선생님의 독특한 시세계는 미당에 이어 한국 현대시의 한 봉우리를 이루고 獵?것을 이미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이고 보면, 오늘의 방문은 주로 시인의 非詩的 궤적에 초점을 두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둔재인 나는 그런 나름대로의 꾀를 가지고, 달밤을 달려 대시인의 일생을 깜냥껏 조명해 보기로 한다.

김춘수 시인은 1922년 11월 25일 동양의 나포리라는 충무에서 여유있는 지주 집안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석꾼이었던 할아버지가 9남매 를 두었는데, 그 중 여덟번째 아들이었던 아버지 金永八옹은 삼천 석을 하였다 한다. 「處容斷章」을 읽어보면, 첫구절부터 섬세했던 시인의 감성에 새겨진 고향을 상상하도록 해준다.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로 시작된 「처용단장」은 계속하여, 눈이 오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어가고, 산다화가 피어나고, 물개의 수컷이 우는 고향 바다, 늙은 홰나무와 탱자나무 울이 쳐진 호주 선교사네 빨간 벽돌집,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사이 피어 있던 샛노란 죽도화, 모과나무 그늘로 달려가는 외발 달구지, 숭어새끼가 살던 바다와 거기 닻을 내린 커다란 군함 한 척, 팔다리가 뽑힌 게 한 마리, 은종이의 천사로 이어지며, 식민지의 암울함 속에서도 돋아나는 생명의 싹이 시인의 맑은 동심에 비쳐 하나하나 뚜렷한 모습으로 살아나온다.
그러나, 이렇게 고향이 의식 속에 암각된 이외에는 충무시 북쪽 뒷산인 여황산 기슭의 통영보통학교 시절에 교지인 『여황의 푸른 빛』에 작문을 실은 기억 외에는 전혀 시인이 될 만한 징후가 없었다고 한다. 고향의 일부가 되어버린 호주 선교사의 기억과 함께 미션계의 유치원에 다닌 것도 낯선 것을 설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좋은 ‘눈뜸’의 계기가 되었으리라. 서양적인 ‘낯섦’을 거부하지 않고 완전 육화하여 오히려 새롭게 보여주는 작업이 성공적으로 일생동안 나타나게 되는 것도 어린 시절에 무심히 암각된 기억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어린 춘수 소년은 총명하고 공부도 잘 해서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열네 살의 시인은 경기중학교에 합격하여 집안의 기대를 모으며 상경한다. 입학기념으로 아버지는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고, 이듬해에는 아들을 위해 명륜동에 집까지 한 채 마련하여 준다. 그러나 소년은 부모의 기대와는 다르게 엉뚱한 방황을 시작하는데, 예를 들면 수업을 빼먹고 학교 뒷산 정자에 드러누워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든지, 종로 2가 시립도서관에 가서 이런 책 저런 책을 읽는 일이 빈번해졌다.
“글쎄, 지금도 왜 그랬나 몰라. 합리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자연스럽게 했으니까. 그러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고나 할까? 학교로 들어서면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혔으니까. 급우들이 휴식시간 10분이 아까와 영어단어를 외우는 것이 우습게까지 생각되었으니까.”
결국 소년은 뒷산 정자에서 누워 유명한 계동 호떡집에서 사 온 호떡을 입에 넣었다가 일본인 교사에게 꾸지람을 당한다. 일인 교사는 그것을 크게 문제삼지 않고 가볍게 야단쳤을 뿐인데도 소년에게는 큰 창피로 기억하게 된다. 더구나 5학년 때는 운명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엉뚱한 일이 발생한다. 상급학교 입학원서에 담임교사의 소견을 적는 난이 있었는데, 그 교사가 민주적이었던지 학생들에게 그것을 스스로 기록하도록 했는데, 소년은 엉뚱하게 ‘不穩’이라고 써서 제출하여, 교무실에 불려 갔다가 엉뚱하게 자퇴서를 써내고 나와버렸던 것이다.
“참, 무모한 짓이었지. 왜 그랬는지 몰라.”
“혹시 마음 속에는 반일이라든가, 일본인에 대한 저항감이 숨어 있다가 폭발한 것은 아닐까요?”
“반일 감정이 있었다 해도 그렇게 나타낼 필요가 없는 건데. 아마 그것보다는 먹을 것, 입을 것, 어려움 없이 살아서, 이거 해달라고 하면 해주고, 멋대로 자랐으니, 상급학교 들어가 뭐 하느냐 그런 생각이었을 거야.”
뜻밖에 운명적 사건으로 선친 희망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려던 소년은 동경으로 건너가서 영수학관에 다니면서 수험 준비를 하게 되고, 자연스레 고서점가를 드나들며 문학서적을 섭렵하게 된다. 일역판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손에 든 김춘수는 더이상 열여덟 소년이 아니었다. 감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청년은 라스콜리니코프, 소오냐, 이봔, 드미트리, 알료샤 등 『죄와 벌』 『까라마죠프 형제』 주인공들에게 매료되어 갔으며, 문학에 대해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마침내 청년은 1940년 니혼대학 예술대 창작과에 입학하게 된다. 학점도 따고, 문학, 철학에 대한 독서도 계속하며, 이른바 습작을 하였다.
“한번도 시를 쓴 기억은 없어. 산문이라고나 할까, 옳게 수필이라 할 수도 없는 산문들을 쓰곤 했지. 그때까지도 문학에 대해서 매료되었을 뿐, 미분화된 시기였으니까.”
사람이 사는 데는 운명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술대학 3학년 말인 1942년 12월, 시인은 엉뚱한 운명에 휩싸여 다시 한번 벼랑으로 추락한다. 하숙집 이웃에 목포에서 건너온 고학생 두 명이 살고 있어 친하게 지냈는데, 그들을 따라 가와자끼 공사장으로 함께 일을 하러 간 일이 며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공사판에서 쉬는 시간이면 한국 학생들끼리 모여 잡담을 하곤 했는데, 젊은 혈기에 총독정치를 비난도 하고, 천황을 욕하기도 하였는데, 安田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학생이 일본 헌병대의 끄나풀이어서 낱낱이 고해 바치는통에 불경죄로 헌병대에 잡혀가게 된다. 그때 평생 처음 물리적인 고통과 만나게 되었다. 죽도로 맞고, 포승줄에 묶여 비틀리면서, 고문에 대한 협박을 당했는데, 핏자국이 있는 시멘트 방에 세워 놓은 몽둥이와 물이 가득 채워진 수조만 보고도 와락 겁이 나서 순순히 죄를 인정하였다 한다.
“나중엔 아마 취조관도 알았을 거야. 어린 학생들이 쓰라는 대로 쓰긴 썼지만, 사실 뭐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결국 요꼬하마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고, 43년 서울로 송치되게 된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요양을 마친 시인은 중매로 마산의 지사 明道奭옹의 따님 明淑瓊과 결혼한 것이 1944년, 시인의 나이 스물 셋이었다.
“학교를 퇴학하여 학병으로 끌려가는 일은 면했지만, 요시찰 인물로 빨간 줄이 그어졌으니, 징용 걸릴 확율이 높아 선친께서 서둘러 결혼을 시킨 것이었지.”
해방이 되자 충무에서 르네쌍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시인 유치환, 음악가 윤이상, 시조시인 김상옥, 화가 전혁림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결성, 매일 어울리며 문화운동(?)을 하였다. 나름대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과 함께 분위기에 젖다보니, 자극을 받게 되어 그때부터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통영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조향, 『문장』 추천 시인인 김수돈과 함께 <魯漫派> 동인을 결성하여 제1집을 내고 그후로 조향과 둘이서 2·3집을 내게 된다. <노만파>는 조향 시인이 주장하여 결정하였는데, 浪漫이 ROMANCE의 일본식 표기이므로 <로망>이 오히려 마땅하다는 뜻에 따른 것이라 한다.
마침내 시인은 1948년 첫시집 『구름과 薔薇』를 상재하게 된다. 목월 선생이 신문에 간곡한 신간평을 써주고, 지훈 선생이 병석에서도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는 엽서를 보내주었다. 마침 유치환 선생이 시집 『울릉도』를 펴내어 함께 서울 나들이를 오게 되었는데, 김동리, 박목월, 조지훈 등의 <청년문학가협회>에서 합동출판기념회를 열어주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목월 선생이 사회를 보고, 오상순, 박종화, 모윤숙 등의 대선배를 모시고 축하를 받아―물론 청마를 위해 나온 것이지만―시골의 20대 시인으로서는 얼떨떨하면서도 감격스러웠다고. 청마는 다른 시인의 시를 거의 읽지 않는다고 고백한 일이 기억되어 여쭈어보니, 국어사전, 옥편 등의 기본적인 책 이외에는 별로 장서를 가지지 않고, 독서하는 것도 거의 본 일이 없고, 문학 얘기도 거의 하지 않으셨다 하니, 특별한 경우라 하겠다. 독학의 思惟만으로 그렇게 심오한 시의 경지를 개척했다니 타고난 시인이었던가, 아니면 남몰래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열심히 쓰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마산고 교사로 재직중이던 49년에서 52년까지는 피난내려온 구상, 김윤성 선생과 함께 <시와 시론>이라는 동인활동에도 참여하고, 부산대학교 강사로 계시던 56년 무렵에는 김종길, 김성욱, 고석규와 동인지 『시연구』를 발행하여 조지훈, 유치환, 김현승, 송욱 등의 시를 게재하였다. 시인은 58년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을 받고, 이듬해에는 <자유아시아문학상>까지 수상하여 유명시인의 대열에 들어선다. 제1회 시협상을 받은 김수영 시인을 만난 일은 없지만, 유일하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셨다고 하니 치열한 시의식에 자극을 받으신 것일까? 선생님은 시인으로서 일생을 통한 시적 성취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력도 다양해서, 해인대를 거쳐 경북대학에서 18년간 후학을 지도하다가, 영남대학장을 거쳐, 국회의원, 예술원회원, 방송심의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하였으며, 86~88년에 한국시인협회장을 맡으셨다.
국립도서관에서 찾아본 김춘수 시인에 대한 연구 목록은 하도 많아서 나는 감히 일일이 읽어볼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잠깐 그 제목들만 훑어보면, 「김춘수 시의 변모 양상」 「김춘수 시의 심상과 시의식」 「김춘수 시의 주제비평적 연구」 「김춘수 시의 현상학적 연구」 「김춘수 시의 기호학적 구조 연구」 「김춘수 시 연구―물의 이미지와 상상력을 중심으로」 「김춘수의 시적 대상에 관한 연구」 「김춘수와 김수영 시학의 대비적 연구」 「김춘수 시와 김수영 시에 나타난 시간의식의 대비적 고찰」 등등이 전국 각 대학에서 발표된 학위논문의 제목들이어서 시인의 시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점에서 시인의 시는 李箱의 시와 마찬가지로 끝없이 새로운 탐험자의 발굴을 기다리는 寶庫로서, 언제이고 새롭게 조명되고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깊고 신비한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 많은 연구 논문 중에서 김춘수 시의 열렬한 찬미자이며 가장 탁월한 분석자인 이승훈―그는 자신의 시적 위치를 이상, 김춘수 다음으로 줄세울 정도이다 ―의 분류를 따라가 보자. 첫째 시기는 ‘꽃’으로 대표되는 존재에의 탐구기이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의 「꽃을 위한 서시」나,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의 「꽃」,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의 「不在」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둘째 시기는 이른바 ‘무의미의 시’가 태어나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의 시기이다.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 한다.’의 「눈물」이나,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슬라브 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의 「나의 하느님」,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의 「處容斷章」 등의 절창이 이 시기에 특별히 많이 만들어진다.
“무의미의 시를 쉽게 설명한다면 한마디로 무엇일까요?”
“시 쓰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것인데, 사실 소월시같이만 쓰라면 나는 안 쓰겠어. 시 쓰는 재미가 있어야지. 시 쓰는 것도 행위이니 당연히 스릴이 있어야 하거든. 무의미란 그것만 딱 떼어놓고 얘기하면 안 되지. 正反의 테제·안티테제처럼, 새로운 의미를 위한 무의미를 의미하지. 새로 지향된 의미, 보다 세련된 의미가 바로 무의미야. Nonsense의 Sense이지. 의미를 제거하는 충격을 노린다 할까? 길들여 있는 타성에 따끔한 침을 놓는 거지. 야! 이렇게도 말할 수 있구나 하고 느끼도록.”
셋째 시기는 무의식의 탐구에서 한발 더 나아간 ‘탈이미지의 세계’이다. 적나라한 실존의 불안이 노출되는 탈이미지의 세계는 예컨대, 처용단장 제2부들에서 보이는 주술과도 같은 양상을 띠게 되며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예컨대 「處容斷章」 제2부의,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라든가, ‘내리는 눈잔등에 여치 한 마리, 여치 두 마리,/ 앉아다오.’ ‘북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 북을 살려다오.’ ‘달나라에 달이 없고/ 인형이 탈장하고/ 말이 자라서 사전이 되고/ 기중기가 올라갔다 내려오고, 올라갔다 내려오고’ ‘구름 발바닥을 보여다오. 하늘을 돌려다오./ 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 여자를 돌려주고 남자를 돌려다오./ 쟁반 위에 별을 돌려다오./ 돌려다오.’ ‘구름 발바닥을 보여다오./ 풀 발바닥을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를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의 하얀 눈을 보여다오.’와 같이 시인의 말씀대로 따라가기에만도 계속 진저리를 쳐가며 따라가야 하는 충격을 준다.
넷째 시기는 80년대에 들어 시인이 보여주기 시작한 ‘미적·종교적 성찰의 세계’로 전개된다. 예컨대, 李仲燮 연작시들이 그렇다.

바람아 불어라,
西歸浦에는 바다가 없다.
남쪽으로 쓸리는
끝없는 갈대밭과 강아지풀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
西歸浦에는 바다가 없다.
아내가 두고 간
부러진 두 팔과 멍든 발톱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
가도 가도 西歸浦에는
바다가 없다.
바람아 불어라,

‘달은 西天을 가고 있고/ 많은 별들이 아직도/ 어둠의 가슴을 우벼파고 있다./ 저쪽에서 하느님은 또 한 번/ 나를 부르신다./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가까이/ 가끔 千里香이/ 홀로 눈뜨고 있는 것을 본다.’의 「西天을」에서나, ‘그 鳴沙山 저쪽에는 十年에 한 번 비가 오고, 비가 오면 돌밭 여기저기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 봄을 모르는 꽃. 朔雲 白草連. 西紀 紀元前 百二十年. 胡의 한 部族이 그 곳에 戶千 五百 七十, 口 萬 四千 百, 勝兵 二千 九百 十二甲의 작은 나라 하나를 세웠다.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의 「樓蘭.」 혹은 ‘흐린 날은 무너지는 하늘 한쪽에/ 유카리나무 그늘에/ 마리아, 막달라의 마리아,/ 너는 아직 너의 잠을 깨지 않고 있나니,’의 「둘째번 마리아」 등에서 보는 성찰의 세계는 헤아릴 길 없는 종교의 저편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시편들을 쓸 때의 심경을 아래와 같이 토로한 일이 있다.

“시는 존재에 대한 감각, 이를테면 덧없음에의 감각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이중섭과 같은 화가를 생각하면, 존재에 대한 무상감이 숙명으로서, 역사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초역사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시는 말하자면 이 숙명에 깊이 사로잡힌 자의 슬픈 표정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시는 역사나 윤리보다는 力學이나 심리학과 더 근접해 있는 듯이 보인다. 예수와 유다가 하나의 역학관계에 있는 것, 그것이 진실 즉 시가 아닐까?”

인용이 조금 길어지더라도 혼자 읽기에는 너무나 향기로운 시인의 산문 「아만드꽃」을 보면,

중동의 하늘은 마분지처럼 두텁다. 마티엘도 두텁다. 맑게 갠 날에도 하늘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듯이 보인다. …골란고원에서 내려다본 갈릴리호수는 바다처럼 짙푸르다. 색지를 오려서 붙여놓은 듯하다. 하늘빛과는 어울리지가 않는다. 하늘은 잿빛이 되는 수가 많다.
갈릴리호숫가를 예수는 하루에도 두어번은 거닐었으리라. 저만치 귀가 작은 노새가 가고 있고, 그 뒤를 주둥이 끝이 빨간 오리들이 떼를 지어 가곤 했다. 길가에는 드문드문 유카리나무가 서 있고, 먼지를 쓴 꽃들이 잿빛을 하고 있어 얼른 보아 그것이 꽃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길 건너 저쪽 언덕배기에는 포도밭이 이어져 있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포도나무를 손질하고 있곤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아만드꽃이라고 한다. 솜처럼 부피가 있고 따듯하게 보이는 꽃이다. 체구가 작아서 앙증스럽기는 하나 가련하지는 않다. 예수는 이따금 생각난 듯이 꽃 한 송이를 따서는 코에다 대보곤 한다. 양의 젖냄새 비슷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모양새와는 다르게 냄새는 소박하다.
예수는 꽃 한송이를 가지고 놀다가 언제나 하던 생각을 또 한번 되풀이한다. 자기가 죽을 때 ―숨이 끊어지는 순간, 이 호숫가에 이처럼이나 지천으로 피어 있는 이 많은 꽃들이 한꺼번에 서쪽을 바라고 시들어갈 것이다. 그것을 아마 어머니 마리아가 볼 것이다.

이글은 산문이지만 시인의 빼어난 상상력과 묘사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예컨대, ‘귀가 작은 노새’라든가, ‘주둥이 끝이 빨간 오리’라든가, ‘양의 젖냄새 비슷한 꽃 향기’라든가, 아주 구체적인 묘사 한 가지를 통하여 전체를 실제 본 것처럼 느끼게 하는 마술과 함께 서술적인 묘사를 섞어 놓음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시인을 따라 갈릴리 호숫가를 따라 걷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여 준다. 그리고는 이런 세밀한 장치 후에 서쪽을 향하여 시들어갈 것과 마리아가 볼 것이라는 신화적인 예언을 함으로서 원하는 쪽으로 스토리를 전개하여 가는 도저한 테크닉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나는 선생님의 강의를 떠올린다. 말씀하시는 대로 받아적으면 그대로 명문장이 될 간결하고도 핵심을 찌르는 김춘수 선생님의 강의는 항상 경외의 대상이었다. 어느 자리에서건 불쑥 한말씀 청하였을 때마다 마치 준비해오신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조리있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마다, 어눌한 나는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문단에는 그렇게 말씀을 잘 하시는 선생님이 몇 분 계신데, 예컨대 김종길 선생님이나 구상 선생님, 김남조 선생님 같은 분들의 말씀은 정말 주옥같이 느껴졌었다. 그럴 때는 나는 얼떨결에 그 다음에는 누가 있어 이런 감동을 줄 수 있을까 하고 주위를 돌아보곤 하였다. 그리고 이분들이야말로 평생 정신을 연마하고 언어를 다듬어온 시인의 참모습이 아닌가 하고 큰 바위 얼굴처럼 그분들을 우러러 보았었다.
“선생님은 크리스찬이시지요?”
호주 선교사로부터 갈릴리 호수까지 선생님은 당연히 크리스찬일 줄로 기대한 나에게 선생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서양을 알려면 기독교를 알아야 하데. 그래서 신학책을 읽고 성서를 공부했지. 나로서는 오랜 기간 상당한 지적 관심이 계속되었지. 과연 예수는 정말로 인류가 낳은 최고의 천재요, 위대한 사람이더라고. 맨발로 갈릴리 호수를 걸어간 기적이 사실이었으면, 그런 초인 하나 있었으면 싶은데, 내 간절한 소원과는 다르게 내 이성이 용납치를 않는 게야.”
결국은 신도가 될 수는 없었다 한다. 예수의 제자 도마가 로마쪽으로 걸어가는데, 어디서 “도마야!” 하는 예수님 목소리가 들렸더라지. 그럴 리가 없다고 도마가 그냥 걸어가니까, 다시 “얘! 도마야!” 하고 다시 부르시더라지. 돌아보니까 스승같은 분이 걸어오는데 죽은 스승이라.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다시 걸어가니까 “얘야! 도마야!” 하고 또다시 부르시더라지. 결국 도마는 ‘증거를 보여주세요’ 하고 손바닥에 못 박혔던 자국을 보고서야 믿었더라지.
“결국 나도 도마인 셈이지. 종교나 내세 믿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고, 희안하기도 하고, 나는 그런 감각 하나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어.”
“우리 나라의 내세관에는 천당이나 지옥이 따로 있지 않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듯이 죽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있다고 믿는 소박한 얘기도 있습니다만, 사실 사람이 죽음 후를 알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그냥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살다가, 흔적없이 돌아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요? 그렇다면 정말 사람이 사는 의미는 뭘까요?”
“젊었을 적에는 죽음이 실감되지 않았어. 죽음이란 말이 있었지만 관념어로 있었지. 이제 늙으니까 내가 바로 죽음 곁에 있지. 나에게도 죽음이 있구나. 나 자신의 문제로 다가온 게야. 솔직히 두려워. 미지의 세계라 불안하고. 그것뿐이야. 내 추리력으로는 죽음 후는 상상할 수가 없어. 물론 생의 의미 를 부여하고 싶지. 그러나 내 정신상태로는 허무야. 갈망하지만 가치 형성 안되어. 자식, 부모, 생활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세계에 대해 의미 부여는 실패했어. 과도하게 분석한다 할까, 너무 지적이라고나 할까, 죽음을 초월한 듯한 사람을 보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여.”
일흔여섯 살 노시인의 형형한 눈빛을 보며, 나는 문득 어릴 적 벽에 붙여놓았던 헤밍웨이라던가, 톨스토이, 뚜루게네프 등의 눈빛을 생각해낸다. 그러면서 김현의 ‘김춘수는 서성거리고 있다. 그것이 그의 매력이다. 그는 끊임없이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이렇게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서성거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生成의 시인이다’라는 말을 생각해낸다. 결국은 시인이 젊은 날부터 운명적으로 방황해 온 것은 이런 근본적인 허무로 이루어진 세상의 비밀을 일찍부터 눈치챘던 것이 아닐까?
“요즘 들어 인간이 비극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인간의 의식이 완벽해서 의문을 해결하게 해야 하는데… 그러면 행복할 수도 있을 텐데… 의식의 한계 안에 고민만 하게 하거든. 자기 존재나 운명에 순응하는 게 좋을 텐데,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아. 돌멩이를 지고 오르는 시지프스이지. 아마 싸르트르나 까뮈들이 다 같았을 거야.”
간혹 정서적으로는 새가 우연히 창에 날아와 울면 할머니다, 죽은 조카다 하고 느끼기도 하고, 저 별은 누구다 하고 읽을 때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존이란… 모르고 또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선생님께 있어서 시란 한마디로 뭘까요? ”
“시가 무엇인지 열마디로도 말할 수 없어. 밥이 무엇인지, 아내가 무엇인지 한마디로 할 수 없는 것과 똑같지. 얘기해 놓으면 다 거짓말이고, 말을 위한 말이야. 그래도 억지로 말한다면, 태양이라고나 할까? 살아가는 중요한 보람의 하나라고나 할까?”
“요즈음 후배들 시를 보시면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세대 차이도 있고, 시대의 흐름도 있으니까, 주제넘게 이렇다 저렇다 할 얘기는 없으나, 요즘 세대는 방황하는 것같아.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내면 고백이 중요한데. 물론 아주 놀랍게 잘 쓰는 시인들도 많고, 여류 중에도 좋은 시인이 많아. 하!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지. 그러나 많다보니 함량 미달도 많지. 혀 짧은 소리도 많고. 그런 때는 뭣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하고 있누 하고 혼자 웃지. 하하하….”
아직도 표정이 소녀같은 일흔둘의 사모님과 함께 집 가까운 야산으로 매일 한 시간씩 산책을 하신다는 선생님의 서재에서 얘기를 듣다보니 벌써 두 시간이 넘었다. 안개 자욱한 밤 어디선가 아만드꽃 향기가 날아오는 것 같았다.
몽유처럼 나는 시와 시인에 취해 연신 돌아보면서 시인의 집을 떠난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 일흔여섯이 되어도 전혀 때묻지 않은 마음 향기로운 시인이 있기 때문에. 나는 자꾸만 뒤돌아보며 속세를 향하여 내려왔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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