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걸음걸이 _ 윤대녕
내가 열한 살 때니까 1972년에 지어진 집이다. 집의 나이도 그새 만 스물다섯 살이 된 셈이다. 대지 오십 평에 건평이 삼십 평인 작은 슬레이트 집. 평면도를 그려 보면 다음과 같다.
가야나 발해의 집터 발굴 현장 도면처럼 그리고 싶었는데 누가 그렇게 봐 주기나 할는지. 마루 공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각개 배치가 약간 허술하더라도 전체 균형을 이루도록 그렸어야 했다. 그래야만 아침에 해가 떠서 저녁에 질 때까지 빛이 어디서 어떤 각도로 지나가는지를 어느 방 창문에서든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오염된 지구도 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색색깔로 아직 아름답듯 이 오래된 집도 경비행기나 기구(氣球)를 타고 보면 그렇듯 잘 차려놓은 밥상처럼 보일까? 혹시라도 그래 보이면 좋을 텐데. 거기엔 이십오 년 간 내 일가족의 과거와 현재가 고스란히 공존하고 있다. 가족이란 것도 하나의 소우주며 외로운 행성에 속한다는 걸 이즘 와서 깨달았다.
가계도를 보면 현재 부모(64세, 62세)가 있고 큰딸(38세)과 막내딸(33세)이 있고 중간에 독자인 내(36세)가 있으니 모두 다섯 식구다. 아버지가 스물일곱 어머니가 스물다섯에 첫애를 낳은 셈이다. 집을 지어 이사할 때 누나는 어여쁜 사춘기의 중학생이었고 나는 늘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는 초등학교 오학년이었으며 여동생은 흰 운동화만 세 켤레인 좀처럼 말이 없는 아이였다. 그때 넌 이학년이었어.
해바라기 방
처음엔 방이 세 개인 집이었다. 그러다 십 년 전 누나가 결혼을 할 당시 마당 한쪽에 약 육칠 평 정도의 문간방을 새로 들여 네 개가 되었다. 아무리 예식장에서 식을 올린다고 해도 큰일을 치르다 보면 시골에서 올라온 집안 어른들이 묵고 내려갈 방이 하나쯤 필요하다는 게 아버지의 오랜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큰일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닥칠 터이었다. 세월이 갈수록 집안 대소사는 잦아지게 마련이니까.
그 막사 같은 큰 방이 지어짐으로 해서 우리 가족은 아쉽게도 하나 잃어버린 게 있었다. 그 자리에 우리는 해마다 해바라기를 심었던 것이다. 그곳은 또한 철조망 없는 닭장이기도 했다. 봄에 해바라기 밭에다 병아리들을 풀어 놓으면 가을에 저마다 장닭이 되어 굵은 대궁들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 후 집안에 큰일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시골에서 올라온 수염 흰 사람들이 거기서 해바라기를 깔고 앉아 술을 마시거나 화투를 치다 누워서 잠을 자고 갔다.
어느 여름날 어머니가 대문 앞을 지나던 사진사를 불러 누나와 여동생과 나를 일렬 횡대로 세워 놓고 해바라기 밭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던가? 안 그래도 빛에 그을려 시커먼 데다 렌즈에 익숙지 않아 저마다 찡그린 얼굴들을 하고 있어 우리는 마치 유엔 식량기구에서 각국에 배포하기 위해 찍은 자료 사진처럼 나왔다. 게다가 나는 맨발이었던 것이다. 그때가 몇 시쯤였던가? 해바라기 대궁의 그림자가 이십 도쯤 일제히 서쪽으로 쏠려 있는 걸로 봐서 아직 오전인 모양이고 그렇다면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이거나 국경일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사진을 스무 살이 되어 집을 떠날 때까지 다락 사진첩 속에다 소중히 보관했다. 비록 흑백이나마 거기엔 잃어버린 내 유년의 해바라기 밭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그때 외롭게 렌즈를 투과해 들어간 빛이 우리 셋을 필름에 음각해 놓았으므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인화를 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며칠 후 집으로 찾아온 사진사는 우리에게 필름을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단 한 장 인화된 그 사진도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다락에 올라가 찾아보니 사진첩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누나 혹은 여동생이 가져갔을까? 일부러 버리지만 않았다면 누군가의 사진첩에 아직 꽂혀 있겠지.
|생략 부분 줄거리| 가끔 집에 내려와 새로 들인 방에 누워 있으면 ‘나’는 그 누런 사진 속에 서 있는 꿈을 꾸었다. 세월이 갈수록 집이 허술해지자 아버지는 집 수리를 하며 매번 지붕의 색을 바꿨는데 대문만큼은 빨간 색 그대로여서 사람들은 우리 집을 빨간 대문 집이라 불렀다. ‘나’는 갈수록 가족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들이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다.
6월 7일 토요일 정오
안방엔 오늘 아침 병원에서 퇴원한 어머니가 누워 있고 동쪽 건넌방에는 작년에 늦결혼을 한 여동생이 첫애를 낳고 산후 조리를 하기 위해 내려와 있다. 서쪽 건넌방에는 올 2월에 이혼을 한 누나가 곁방살이를 하고 있다.
6월이건만 지금 안채의 방 세 개는 지글지글 끓고 있는 참이다. 동쪽 방에서 산후 조리를 하고 있는 여동생 때문이다. 뒤꼍에 설치돼 있는 보일러 선이 안방과 양쪽 건넌방으로 연결돼 있어, 안방에 불을 넣으면 동쪽 방이나 서쪽 방에 한꺼번에 불이 들이게 돼 있다. 각 방에 열을 차단할 잠금 장치가 따로 설치돼 있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그리 지어 놨으니 구들장을 다 들어내지 않는 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나는 어젯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와 병원에 들렀다가 자정께 집으로 왔다. 어머니에게 몸살기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보름 전쯤의 일이었다. 지난달에 외조모 상을 치르느라 무리한 탓이라 믿고 가까운 보건소에서 주사를 맞고 돌아왔지만 발열이 계속되자 평소 협심증과 위경련으로 고생하는 아버지가 자주 가던 회사 근처의 내과에 데리고 갔다. 검사 결과는 신장염이었으나 대학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 전 늑막염으로 대학 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는 어머니는 진저리를 치며 가지 않겠다고 생고집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염증 치료만 끝내고 어머니는 한의원에 들러 엉뚱한 보약을 지어 가지고 기어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병원에 있는 게 왜 그렇게 힘들고 징그러운지 모르겠다며 어머니는 어젯밤 퀭한 눈으로 나를 붙잡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안 그래도 다음 주 화요일이 어머니의 생신이어서 내일 앞당겨 차리기로 한 아침상에 앉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내려와야 할 사정이었다. 하지만 몸져누워 있는 이에게 무슨 생일상을 들이민단 말인가.
누나는 부역하는 죄수처럼 동생의 산후 조리와 어머니의 병 수발을 함께 들고 있다. 오래간만에 온 가족이 모여 방 네 개가 모두 찼지만 분위기는 아무래도 어수선하다. 동생은 하필이면 이런 때 어머니가 아프다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지만 시댁으로 갈 형편도 못 된다. 시어머니란 사람이 심한 당뇨에 합병증까지 있어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 탓인지 아까부터 되레 된소리나 내고 있다. 그럴 때마다 마루엔 괴괴한 적막이 빈 항아리처럼 도사리고 앉았다 사라지곤 한다. 어머니를 퇴원시키고 회사에 나간 아버지는 오후 3시쯤에나 돌아올 터이다.
나는 지금 해바라기 방의 창문을 통해 거의 수직으로 화단에 내리붓고 있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다. 화단엔 철늦은 민들레 서너 송이와 석류, 대추나무와 패랭이와 용담과 작약과 달리아와 맥문동과 양귀비 같은 것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자라고 있다. 화단 한가운데엔 장독에 올라다닐 수 있도록 디딤돌이 몇 개 박혀 있다. 여름날에 선혈처럼 낭자하게 피어나는 양귀비는 어머니가 남몰래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식물이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만 되면 어머니는 대문 빗장을 굳게 닫아걸고 산다.
이윽고 정오가 되자 화단엔 검불만한 그림자만 몇 올 남고 크레파스를 마구 분질러놓은 것처럼 빛들이 화사하게 튀며 서로 엉킨다. 일순 귀에서 낮의 소란이 멎는다.
연탄
병든 어머니에게 죽을 가지고 들어갔던 누이가 어머니한테 상소리까지 들으며 호되게 야단맞고 나온다. 누이를 위로하러 부엌에 들어간 ‘나’에게 누이는 어머니가 식구들 모르게 자신에게 모질게 대하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점심을 먹을 무렵, 젊을 때 바람을 피운 탓에 늙어서까지 연탄을 배달하는 벌을 치르는 박씨 아저씨가 연탄을 배달하러 왔다. ‘나’는 차곡차곡 쌓인 연탄 옆으로 서 있는 감나무를 보고 그 아래에서 몰래 수음을 하거나 담배를 피웠던 학생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귀
오후의 농익은 햇살이 장독으로 몰려가며 구름 한 자락이 마당과 화단 한쪽을 덮고 있을 무렵, 아버지가 돌아와 연탄을 들였냐며 소리를 질렀다. 오래 전부터 중이염을 앓던 아버지는 귀가 잘 안 들린다며 성난 소리를 했다. 그리고 담배를 끄고 있는 ‘나’에게 아직도 못 끊었냐고 핀잔하며 ‘나’의 방으로 들어왔다.
“하두 억지를 부려 일단 집으로 데려오긴 했다만 곧 큰 병원에 가 봐야 할 거 같어.”
“…….”
“니 에미 말이여. 봄부터 자꾸 승질만 느는 게 어째 심상찮어.”
“…….”
“게다가 큰년 소박맞아 내려와 있지. 넌 또 변변찮게 어디 한 군데 주저앉아 있질 못허지. 작은년은 귀신도 속을 모를 테니 말할 건덕지도 없고.”
하지만 그 완강한 자기 속엔 또 얼마나 괴로운 비밀들이 많을 텐가.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안방에서 마루로 또 어머니의 목소리가 냅다 튀어나왔다.
“누가 가서 저녁 참까지 연탄 좀 빼놓거라! 누굴 삶아죽일 작정이면 몰라두.”
서쪽 방에서 나온 누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루에 서 있는 꼴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헛헛, 마른기침을 하며 아버지가 끙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못 끊겠으면 은단이라도 써 봐.”
아직도 은단을 파나?라고 생각하며 나는 담장에 올라앉아 장독을 기웃거리고 있는 도둑고양이를 쫓아낼 양으로 손에 쥐고 있던 성냥갑을 집어던졌다. 성냥갑은 화단과 장독대 사이에 날아가 떨어졌다. 하지만 이 눈치 빠른 동물은 냐옹! 소리를 내며 곧 담 너머로 사라졌다. 뒤미처 아버지가 뒤란에서 파란 불이 이글대는 연탄을 빼내 대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동쪽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여동생에게 해바라기 방으로 옮기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러면 낮부터 안방에 불을 넣을 일은 없는 것이다. 그녀는 화닥 젖을 가리고 얼굴을 붉히며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쪽 방은 여동생이 출가해 집을 떠날 때까지 줄곧 혼자 쓰던 방이었다. 벽에는 그녀가 중학교 때 걸어놓은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란 복제 그림이 오랜 세월 문장(紋章)처럼 걸려 있었다. 여동생은 집을 떠날 때까지 서쪽 방이나 해바라기 방에는 좀체 얼씬거리지 않았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누에고치처럼 늘 제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저 모네의 그림 속에. 안개 서린 저 고요한 빛의 잔주름 속에.
여동생은 집이라는 곳을 그저 잠깐 머물러 있다 가는 장소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잠깐은 무려 삼십이 년의 긴 세월이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중학교 미술 선생이었다. 어머니의 친구 중매로 우기던 끝에 맞선을 본 자리에서 여동생은 꼭이 입양되는 아이처럼 결혼에 응했다고 한다.
여동생은 하루만 더 있다 내일 아침에 올라갈 거라고 내게 말했다. 그녀는 한국전력공사에 다니는 남편과 청주에 살고 있었다. 더 있으란 말을 할 처지도 못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로 마루로 나왔다. 어머니는 자리에 누워 옆으로 마당을 내다보고 있었다. 연탄을 버리고 들어온 아버지가 마루에 걸터앉자 어머니가 등을 좀 비켜 앉으라고 또 지청구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치매처럼 뜻 모를 소리를 웅얼웅얼 내뱉기 시작한 건 멀리서 웬 낮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였다.
“석류꽃이 네 개 폈고 패랭인 곧 진다. 달리아 양귀비 피면 장독 뚜껑을 열어야 하는데 여름내 또 얼마나 귀찮게 비가 올는지.”
“…….”
“그때 돌쩌귀의 개미들은 비를 맞고 다 어디로 갔지?”
“…….”
“킬킬, 채송화 속에 숨었네. 난 부처손 밑에 앉아 분홍바늘꽃 보고 있지.”
화단은 상기 모네의 붓질처럼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변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화답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어, 저기 내 귀가 지나가네.”
그 말에 언뜻 놀라 화단을 쏘아보니 바람 한 자락이 슬쩍 화단머리를 핥고 지나가고 있었다.
“나 원 참, 꽃들이 귀가 멍멍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이 기묘한 화답은 조금 더 계속됐다.
“신발 신고 가우?”
“맨발에 짚신을 머리에 였는걸.”
“고봐요. 큰애 낳고 안 사준 신발이니 여태 맨발이지. 요새 누가 짚신 신어요. 그냥 들고 다니다 팔 떨어져서 머리에 였지.”
“그럼 당신도 방금 저기 지나갔나?”
“내가 먼저 갔더이다.”
“하면 어디 좋은 데로 갔나?”
“조금 더 여기 등 뒤에 누워 있다우.”
처녀 할머니·피와 두부
그때 아랫마을의 언청이 노파, 일명 처녀 할머니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겁에 질린 듯 왜 벌써 왔냐고 소리 지르며 누나에게 어서 쌀을 주고 내쫓으라고 했다. 누나나 아버지의 눈에도 불길한 기운이 덮여 있었다. 처녀 할머니는 화단에서 양귀비 모가지 하나를 똑 부러뜨리고, 누나가 내미는 쌀바가지를 바라보기만 한 채 오늘밤 니 에미 입에나 넣어 주라고 하며 집을 나갔다. 하오의 나른한 빛이 꾸물꾸물 담을 타넘고, 이불보 같은 어둠이 내려앉는 무렵이었다. 하루 일을 끝낸 누나가 내 방으로 건너와 폐병으로 이혼당한 사정을 얘기해 줬다. 또 누나는 어머니가 자기를 구박하는 것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며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누나에게 발리에 수잔이란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발리 서머 호텔
그녀는 끈 달린 하얀 신을 신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식당에 내려갈 때마다 그녀가 내게로 왔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나는 그녀가 도미구이를 식탁에 갖다 놓는 사이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밤새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노라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식탁 밑의 하얀 신발을 내려다보면서. 그 말에 여자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쟁반을 들고 왔다. 나는 그녀에게 한국엔 지금 눈이 많이 온다고 말해 주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눈,이라고 가까스로 되받았다. 당신 신발처럼 하얀 눈,이라고 나는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발을 안쪽으로 오므리며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식사를 끝낼 때까지 멀리서 나를 바라보았다.
발리 서머 호텔에서 닷새째 머물던 날 아침에 나는 과일과 커피와 토스트를 가져온 그녀에게 저녁에 와텔(사설 전화국)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야외 카페가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나는 그녀와 밤새 빈땅을 마시며 그저 아무 얘기나 주고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확 붉히곤 고개를 가로저으며 도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먼 데서 또 나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날 밤 그녀가 내 방으로 왔다. 와서 서먹하게 한 시간이나 코다이를 되풀이해서 듣다가 서로 입이 마를 즈음 슬그머니 옷을 벗었다. 그녀는 아기처럼 내 품에 안겨들며 서툰 영어로 말했다.
“눈 보고 싶어요.”
“그래, 눈이로군.”
“하늘에서 신발이 매우매우 떨어져요?”
웃으면서 나는 그렇다고 대꾸했다. 하늘에서 흰 신발들이 마구마구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어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너를 사랑했어. 이 말없는 애야.”
뜻을 알 리 없을 텐데 그녀는 묵묵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너는 지금도 모네의 붓질 속에 숨어 있겠지. 그 기묘한 빛의 그림자 속에. 이 벙어리 여자야.”
그녀는 가슴과 엉덩이의 선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였다. 창 밖에선 외등 불빛 속에서 야자수 잎이 쉼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눈을 감으니 야자수 잎이 저마다 커다란 물고기로 변해 이마 위로 천천히 떠가는 것이었다.
다음 날엔 정오에 그녀가 왔다. 그날도 그녀는 내게 눈[雪]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라 댔다. 나는 그녀의 벗은 등 너머로 열대 장미와 야자수를 훔쳐보며 줄곧 동쪽 방의 내 연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주일째 나는 그곳을 떠났다. 흰 신발과 코다이를 남겨 두고. 다시 돌아오리란 약속을 던져 두고.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울루와트에 가서 사흘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던 날 뜻밖에 그녀가 덴파사 우랄라이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내가 눈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며 불현 눈시울을 붉히고 말했다.
신발
자정이 지나 잠자리에 들려고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아버지가 밖으로 따라나왔다. 아니, 나를 따라나왔던 게 아니다. 오줌을 누고 도로 방으로 들어가는데 아버지가 마루 앞에서 손에 무얼 들고 시커멓게 서 있었다. 다가가 보니 어머니의 신발이었다. 감히 왜냐고 묻지를 못하고 나는 아버지의 얼굴만 그저 뜨악하게 마주보고 있었다.
“어째 이걸 가지고 들어오란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웬일인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신발을 든 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집 안의 모든 불이 다 꺼졌다.
밤의 걸음걸이
얘야, 오늘 난 우리 집의 평면도를 그려 놨어. 언젠가는 햇빛을 받아 누렇게 색이 바래고 두루마리처럼 안으로 말려 버릴 테지. 우리들 인생처럼. 그러고 나면 이 집과 함께했던 우리 세월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지겠지. 하지만 나중에라도 왠지 너만은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 해바라기 밭에서 찍은 사진도 네가 가지고 있다는 걸 난 알아. 어느 여름날 우리는 해바라기 푸른 대궁 사이에 숨어 겁 없이 입을 맞췄지. 너는 그 큰 눈으로 일생(一生)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혹은 내가 너를.
며칠 후 난 또 너를 만나러 갈 거야. 아주 먼 열대의 섬이지. 그래, 열대. 거기서 내 서른여섯 살에 다시 너를 만나게 될 줄이야.
신발도 없이 밖에서 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해바라기 지붕을 밟고 지나 화단을 밟고 지나 장독대를 밟고 지나 상기는 담을 타넘어 가고 있다.
밤의 발자국 소리가 도로 돌아와, 내 머리맡에 바투 와서 어깨를 흔든 건 아마 새벽 3시나 4시쯤이 됐을 시각이었다. 그녀와 열대 안락의자에 앉아 코다이를 듣다가 한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밤이 내 귀에다 대고 하는 소리를 캄캄히 엿듣고 있었다.
“갔어!”
조용히 말해도 될 텐데 그는 굳이 외쳐 말하고 있었다. 이토록 고요한 밤에도 귀가 어두운가. 일어나서 내가 불을 켜려고 하자 그가 내 손목을 차갑게 거머쥐었다.
“냅두고 나와!”
나는 그에게 손목이 붙들려 방 밖으로 나갔다. 마루로 막 올라서려다 말고 그가 해바라기 방에서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네 에미가 갔다고!”
그제야 나는 안방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퍼뜩 깨달았다. 서쪽 방과 동쪽 방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고 안방으로 들어섰을 때 맨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머니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흰 고무신이었다.
윤대녕(尹大寧, 1962 ~ )
충남 예산 출생.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단편 「어머니의 숲」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주로 존재의 시원(始原)에 대한 탐구를 다룬 작품을 썼다.
주요 작품으로는 「은어 낚시 통신」, 「남쪽 계단을 보라」,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추억의 아주 먼 곳」,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등이 있다.
작품 투시도
포인트 ‘우리 집’의 평면도 - 각 공간의 대표적 이미지
작품 해설
건평 30평 집의 평면도 제시
이 작품은 5인 가족이 대지 50평에 건평 30평인 집에서 25년 간 살았던 세월, 곧 유년 시절과 현재, 그리고 죽음의 과정을 섬세한 문체로 그려 낸 작품이다. ‘나’와 그 가족들에게 스며들어 있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현재 삶의 모습 등을 건평 30평의 평면도 그림을 작품 도입부에 제시함으로써 시각화하여 현장감 있게 보여 주고 있다.
빛, 시간, 이야기가 어우러진 한 폭의 인상화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 빛과 어둠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인상화를 보는 듯한 기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작품 전반에 걸쳐 사건 전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기보다 ‘나’와 가족의 하룻동안의 삶의 모습을 미묘한 빛의 흐름을 통해 섬세하게 드러냄으로써 감각적, 정서적 교감을 이루어 내고 있다.
핵심 정리
갈래단편 소설
배경시간 - 1990년대공간 - 어느 고향집(지방 소도시)
시점일인칭 주인공 시점
주제빛의 흐름을 통해 바라본 유년 시절의 기억과 삶과 죽음
작품 내용
36세로서 이 작품의 서술자. 한 직장에 오래 머물지 못함.
64세. 협심증, 위경련, 중이염을 앓고 있음.
62세. 동네 의원에서 신장염 진단을 받고 집에서 죽음을 맞음.
38세의 이혼녀. 폐병으로 이혼 당하고 동생의 산후 조리와 어머니의 병 수발을 들고 있음.
33세의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 산후 조리를 위해 집에 머물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