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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속으로 떠난 페시미스트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천재는 요절하는 것이 운명이니까 나도 빨리 죽을지 모르오.’ 이런 얘기를 늘 했다고 전하는 미망인 이정숙(李丁淑) 여사의 음성은 차분했다. 나는 미망인의 이 말 한마디에 그의 죽음에 대한 지금까지의 통설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박인환은 스스로 천재로 여겼다는 사실. 그리고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의 암시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 것인가. 이 의문에 대해서는 그의 시의 도처에서 드러나는 허무와 좌절과 죽음의 이미지가 심상치 않게 받아드려진다. 이립(而立)을 막 넘어선 나이에 그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몹시 약하다. 평소에 그는 심장병 환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요절은 병사가 아니라 자살이 아니었을까. 하는 강한 의문이 뇌리를 스쳐갔다.
박인환은 달변이었고 영화배우 같은 용모를 갖고 있었으나 그의 심성은 허무주의와 염세관에 젖어 있었다. 그가 50년대 모더니즘의 기수로 활동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모더니즘 계열의 시라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페시미즘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흔히 도시적 서정을 말하지만 그의 서정은 죽음의 이미지로 변질 되었으며 허무의 늪에 빠져있었다. 모더니즘의 중요한 요소인 형식의 파괴, 모순된 의미의 결합, 서정의 거부 같은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처음부터 그가 서구 모더니즘의 시학에 충실하겠다는 의지가 없었으며 다만 겉옷만 걸친 감이 없지 않다. 외모만 멋 부리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의 시를 분석해 볼 때 부적절한 서구 언어를 빌려 도시적 분위기만 조성하는 정도에 멎었다. 모더니즘의 변질된 모습만 보여주었다. 대체로 이런 논리가 지금까지 그를 지배해 온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시에는 허무주의 내지는 염세관이 심도 있게 전개되고 있었다.
박인환은 모더니즘의 깃발을 들고 새로운 문학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김수영만은 달랐다. 김수영은 박인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나는 박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욕을 퍼부은 것은 박인환의 겉멋에 치우친 시가 거슬렸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김수영의 공격적 발언을 전적으로 받아드리기는 어렵다. 만약 박인환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수영의 현실부정 적이고 참여적인 시의 패턴에 오히려 비판을 가했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감정토로에 전념하는 센티멘털리스트였으며 봉건적인 사고의 잔
재를 채 털어버리지 못한 어설픈 서구식 의상만을 걸친 소시민적이었고
예술이란 것에서도 가십에나 열중하는 딜레탕트로서의 면모가 강했을 뿐
진정한 예술지상주의자가 갖추어야 할 투철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위의 인용문은 박인환을 비판한 김춘수의 시론이다. 김춘수의 비판논조를 전적으로 받아드리기엔 거부감을 느낀다. 그의 허무와 불안에 사로잡힌 이미지들이 어떤 중심으로 몰리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떠도는 산만함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쟁 후의 폐허의 도시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적 현실을 감안한다면 상대적으로 센티멘털한 감정토로의 시학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시들이 전후(戰後)의 혼돈과도 맞물린다. 미흡한 부분을 인정하더라도 그의 절망 과 염세관에 빠진 내면의 고뇌를 감안하지 않고 비판한 감이 없지 않다.
상고머리로 깎아 명동을 거닐던 사나이. 조니워커를 마셔가며 잔 콕토를 이야기하던 그였다. 겨울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고 했던 박인환. 그래야 바바리도 입고 머플러도 날리며 모자도 쓰고 다닐게 아니냐고 겨울을 기다렸던 인환이었다. 읽지도 않으면서 불어의 잡지를 끼고 명동거리를 걸어 다니던 부류들. 그 중 첫째를 꼽으라면 달변에 활달한 면모에 사교적이었던 박인환이 거기 있었다. 그런 그가 왜 죽음을 말하고 요절을 바랬을까. 박인환의 내부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던 죽음으로 가는 벼랑길이 트여 있었다고 봐야한다. 그의 모더니즘운동은 외적행동으로 꽃피었을 뿐 실제로 내부의 시 창작에서는 모더니즘의 색채가 드러나지 않았다. 허무와 불안과 염세사상이 시의 꽃잎을 형성하고 소리 없이 울다가 도시의 저문 광장과 벤치를 쓸쓸하게 남겨둔 채 떠나는 형상이다. 박인환이 자살했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그의 시를 접해보면 도처에서 그가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의 늪에 빠져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그가 죽음을 예찬한건 아니지만 그의 시속에는 죽음을 예견하는 섬뜩하고 불길한 시의 구절이 즐비하게 발견된다.
아 창백한 세상과 나의 생애에
종말이 오기 전에
나는 고독한 피로에서
빙화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을 위해
시를 써야한다.
-세 사람의 가족 일부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창백한 세상과 자신의 생애 동안 종말이 오기 전에 한 편이라도 시를 더 써야겠다는 다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암암리에 이미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거나 자살을 계획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것을 염세철학과 결부시킬 순 없지만 당시에 유행했던 염세사상 과도 무관하지 않았고, 그만이 간직하고 있었던 개인사와도 운명의 끈이 연결되어 있었으리라. 겨우 이립의 나이에 죽음을 감지한 허무의식이 세 사람의 가족과 어떤 관계가 있었던가. 죽음이 오기 전에 서둘러 써야 했던 시가 산만할 수밖에 더 있었겠는가. 다음과 같은 시를 읽으면 더욱 확실한 심증이 가기도 한다.
오늘 나는 모든 욕망과
사물에 작별하였다.
그래서 더욱 친한 죽음과 가까워집니다.
-불행한 神 일부
여기에 이르면 박인환은 종말이 오기 전에 시를 써야겠다는 의지가 한 차원 상승해서 죽음과 가까워지는 단계에 이른다. 죽음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자신의 심리상태가 극도의 절망에 당면했다는 뜻이다. 전후의 시대상황이 한 시인을 파멸로 이끌었다. 그게 아니면 사생활의 궁핍에서였을까. 요절한 시인에 대한 연민의 과잉반응에서였을까. 神을 불행하다고 진술한 암시도 의문으로 남는다. 박인환의 염세사상은 다음 단계로 옮겨간다.
철없는 시인
나의 눈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있다면 일부
결국 죽음과 가까웠던 그는 시체를 떠올린다. 이건 자신의 사후를 가상하는 상상의 세계지만 자신을 철없는 시인이라고 했다. 시에 입문해서 절망의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절망으로 봐야한다. 그가 죽음을 예견하지 않고서야 어찌 다음과 같은 시를 쓸 수 있었겠는가.
노래가 멈춘 다음
내 죽음의 막이 오를 때
오 생애를 끝마칠 나의 최후의 주변에
영주 값을/구두 값을/책값을
내가 들어갈 관 값을 청산하여 달라고
달려든 지난날의 친구들
-종말 일부
이상의 인용한 시를 종합해 볼 때 박인환은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죽음의 강박관념에서 시를 썼다고 보아야 한다. 무엇에 쫓기듯 즉흥적인 창작이 그러하다. “세월이 가면”의 시도 명동의 다방에서 즉흥적으로 썼으며 작곡가가 작곡을 하고 나애심이 즉석에서 불렀다고 했다. 세상을 희망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절망과 허무로 바라본 것은 전후의 처참한 현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박인환의 염세관에 있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언제 죽음이 닥쳐와도 받아드리겠다는 담담함, 그것은 그의 생활이 보여주었던 외형과는 달리 내부에 허무사상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시체로 보기도 한다. 이런 페시미즘의 애착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로 이어진다.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소설과 비평가로 다양한 문학 활동을 했으나 투신자살한 울프를 떠올린다는 것은 그의 염세사상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러나 시인은 죽기 전에 양주 값, 구두 값, 책값을 걱정하기도 하며 자기의 관 값까지 누가 청산해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상과 같은 시를 읽어보면 박인환이 중산층의 생활을 했다고는 하나 말년에 얼마나 비참한 곤경에서 허덕였는가를 알 수 있다. 박인환이 종로2가에서 “마리서사”란 서점을 2년간 운영했다. 그것이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인과의 교류와 문단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이용했다는 기존의 통념은 설득력이 약하다. 실제로 그는 별 상술을 갖지 못했으며 “마리서사”의 운영으로 생계 유지에 매달린 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문단진출의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더 이상 “마리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이동하의 지적은 사실과는 다르다. 그는 “집엔 쌀도 없는 시인” 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만치 말년엔 비참한 늪에 빠져있었다.
박인환은 모더니즘의 깃발을 올리긴 했으나 허무주의와 염세관에 시달림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염세관이란 세상이나 인생에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보는데서 출발한다. 세인들이 흔히 말하듯 전쟁이 가져온 폐허와 고독 불안 우수 그리고 좌절이 박인환에게 허무주의를 심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가 남긴 책에 ‘죽음의 철학’이 발견된 것도 뒷받침이 되리라. 세상이나 인생에 실망하여 현세를 싫어하는 사상, 이것은 인간생활에서 참된 가치를 찾아내기에 절망한 때문이다. 인생의 고뇌의 원인이란 만족할 줄 모르는 무한한 의욕이기 때문에 이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욕을 근원으로부터 단절시켜야 한다는 염세관이 발생한다.
죽음과 친해지려는 행위에 대해 종교의 교역자들은 아무런 금지의 조항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오히려 죽음을 내세(來世)로 가는 길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인도인의 경우도 자살을 성스러운 행위로 보았다. 갠지스 강에 사는 악어에게 자기를 희생물로 바친다든가 자기 몸을 불에 태우기 위해 장작나무를 구해 갠지스 강가로 몰려드는 사람들, 그들은 자살이 해탈하는 길이라고 믿었는지 모른다. 박인환이 죽음을 예찬한 것은 염세관 때문이다. 박인환은 1955년에 그의 ‘選 詩集’을 내놓게 되는데 이것은 인생을 정리하기 위한 작업이었고 술이 약한 그가 폭주를 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가 투신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이야기한 것도 그의 요절을 미리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박인환이 李箱의 추모의 밤을 기획하고 준비했다. 그가 이상을 그토록 좋아한 것에는 어떤 이유기 있을 것이다. 박인환은 이상과 같은 심리주의나 초현실주의의 시를 쓰지 않았음에도 이상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이상의 문학에 심취했던 것이 아니고 요절한 시인에 대한 애착을 느껴서 일 것이다. “죽은 아폴론”의 시가 동아일보에 실린지 삼일 후에 박인환은 심장마비로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이상의 추모의 밤이 열렸을 때 박인환이 들려준 독백이 있었다.
‘棺 뒤에 누가 따라 오느냐-
죽어선 모르지만, 아
그래도 누가 올 것이다’
이것은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 남긴 명언이 된 셈인데 이것으로 보아 그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말은 의문점이 남는다. 1956년 3월 20일. 죽기 당일 날 그는 아침도 먹지 않고 하루 종일 술을 마셨다. 오후 8시 30분에 취한 상태로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워 ‘가슴이 답답하다. 생명수를 달라’고 한 후 30분 후에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엔 약물을 복용한 심증이 충분히 예견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추론(推論)이다. 박인환이 모더니즘의 기수가 되어 쌓은 문학에의 공적과 과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자(論者)의 견해가 있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다만 그의 마지막 불꽃으로 타오른 ‘木馬와 淑女’를 중심으로 그의 애달픈 詩學을 분석해 보려는 것이 본고의 의도였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生涯와
木馬를 타고 떠난 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대체로 박인환의 시는 절망과 허무로 일관된 경우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상적인 언어의 나열이 어떤 축을 향하여 중심을 이루지 못하고 산만하게 흐트러져 있다는 것이고 막연한 추상을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이런 결과는 생생한 체험에 의한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상에 의지한 채 현실을 직관하는 안목을 등한시 했다는데 기인한다. 이것이 박인환의 시가 정제와 통일을 형성하지 못하고 애수 띤 유행성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마와 숙녀’는 괴를 달리하며 시인이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이미지가 우선 떠오른다. 시인의 상태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나서 비로소 떠나간 것을 생각하는 권영민의 지적이 옳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술을 마신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기분이 좋아서 마시는 술이 아니고 떠나간 울프와 목마와 숙녀의 옷자락. 이런 기억 때문에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해서 술을 마시는 경우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이처럼 전개되는 애상은 목마를 탄 여자. 이젠 숙녀가 되어버린 사랑의 여인은 가을 속으로 떠났는데 그 여인은 어딘가에 살아있는 게 아니고 전쟁으로 죽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라는 명구를 빚어낸다. 그리고 그 별은 시인의 가슴에 부서지는데 낙엽의 속성은 떨어짐에 있고 그것은 떠남이며 죽음을 상징한다. 시인의 마음 상태가 극도의 불안과 절망에 빠져있다. 상심한 별은 실제로 하늘의 별이 아니라 시인이 추구했던 꿈이고 그 꿈이 허물어진 것이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지울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시인은 현실을 도외시 한 채 지난 날 자기가 알던 소녀의 품에 기댄다. 어쩌면 문학소녀 일지도 모르는 소녀. 그 소녀는 목마를 타고 간 淑女와 맞물린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소녀일 것이다. 한때 연인이었던 사랑의 사람. 그 덧없음의 회상이 시를 지탱하고 있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었다는 극도의 流行性에 빠져들었고 그의 서정은 모더니즘과는 관계없이 도시적 서정으로 기울어졌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여기서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의 이미지의 번득임은 그것이 무엇을 암시하는지는 몰라도 예상 밖의 재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시인의 가슴엔 희미한 의식만 남아 있어서 여전히 죽은 여류작가의 이국적 비애에 묻혀있는 것은 정열과 신념을 저버린 허망한 표정을 노정시키고 말았다. 어떤 재기의 의지와 다짐이 없고 빈곤과 시대적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전후환경이 만든 것이리라. 자포자기 상태에서 마셔야 하는 술이 정신과 육체를 흠집투성이로 만든 독약임이 분명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 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걸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출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시인은 생각을 바꿔본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역설이다. 자칭 천재로 자부심을 가졌던 박인환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자신을 비로소 발견했던 것이다. 이런 좌절감은 어디서 온것일까. 쌀값 마련이 어렵게 된 현실과 전후의 폐허 속에서 느꼈던 불안과 좌절이 그로 하여금 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얻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그의 애수 띤 감미로운 시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도 그의 종말을 재촉했으리라. 따라서 어디에 의지하고 위로받을 수 없었던 그는 빈 술병을 스치고 가는 가을 바람소리에서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木馬와 淑女’란 시의 제목은 ‘木馬와 少女’의 다른 이름이다. 이 시는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불행한 시인의 요절을 떠올릴 때마다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추억의 詩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시가 素月의 ‘招魂’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죽은 여인에 대한 사랑의 회상은 ‘초혼’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보여 진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은 아니지만 ‘목마를 타고 간 숙녀’에 대한 그리움은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이 詩는 그 제목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염두에 두고 정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로서는 의외로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몇몇 거슬리는 구절은 이 시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傷心한 별’ ‘애증의 그림자’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서도 박인환은 이 시에서 그가 바라보는 세계를 예외 없이 염세적으로 색칠한다. 현실을 희망 없는 좌절로 체념하면서 죽음의 관념에 매달린다. 구체적으로 그는 울프의 생애, 즉 투신자살한 종말을 제시한다든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문학이 죽었다고도 하고 인생이 죽고, 라는 통속적인 얘기도 한다. 그리고는 평소에 그가 간직했던 페시미즘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인 운명을 두 번 씩이나 되풀이해서 진술하는 이유를 알것 같다. 그리고 숙녀와 소녀에 대해서도 규명해야 한다. 그가 알던 소녀는 숙녀와 동일인 일까 아니면 소녀와 관계없는 다른 인물일까, 하는 문제다. 시인이 알던 소녀는 시인 자신이 소년이었을 때 목마를 함께 타고 놀았던 소녀 일지도 모른다. 그 소녀가 시간이 흐르면서 숙녀가 되었는데 그 숙녀를 그는 사랑의 사람이라고 했으며 그 숙녀를 생각할 때마다 울프를 떠올리는 것은 지금은 가고 없는 숙녀의 생애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금 죽은 숙녀의 슬픔에 잠긴 채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김병택은 木馬를 ‘비인간화 된 시대’를 상징한다고 했다. 나는 여기에 다른 의미를 붙인다면 목마는 잃어버린 과거를 의미하며 유년시절의 평화를 상징한다고 보고 싶다. 따라서 목마와 숙녀는 목마와 소녀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 평화스럽던 시대의 놀이터가 전쟁으로 파괴된 현실 속에서 가을을 맞는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비애에 젖는다. 여기서 그는 목마를 타고 하늘을 나르던 시절을 회상한다. 목마를 타면 꿈을 펼쳤다. 그런 희망의 과거가 술병에 별이 떨어지는 절망의 현실로 추락하고만 것이다. 술병에서 별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젠 술병마저 바람에 쓰러지는 상태다. 그의 의식이 이끌고 가는 종착지는 어딘가. ‘두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애매모호한 표현을 씀으로서 막연한 우수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의 시학은 종교적 이념도 없고 도시적 센티멘털리즘에 의탁한 허무주의로 드러난다.
그의 한국적 서정주의는 배격 되었지만 그렇다고 서구적 모더니즘의 수용도 아니었으며 피상적으로 외래어의 남용과 불필요한 한자의 애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기 스스로 천재라고 여기면서 요절을 예감하고 시의 도처에 죽음과 절망을 그려놓았다. 물론 그의 시는 기존의 시인들이 다루던 서정 일변도의 시와는 달랐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본질에 파고드는 현실 표현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깊은 염세관에 빠지면서 도시적 낭만주의로 변질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니까 그를 모더니즘의 시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서정적인 색채가 짙고 감상적이다. 새로운 언어를 시에 접목한 것이 오히려 애매모호한 비유를 가져 왔으나 대중적 인기 효과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너무도 이국적 취미와 유행 감각에 민감했으며 소위 예술지상주의에 들떠 있어 현실을 민감하게 응시하고 그것을 파헤치는 데는 등한시 했다. 하지만 그의 시가 말해주듯 허무 절망 불안 그리고 죽음과 친해지려는 염세 사상은 6,25 동란 이후의 한국적 현실을 표현한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목마와 숙녀’는 수작이며 역사의식도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옳다.
박인환의 염세사상은 전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동란 이전에 이미 ‘죽음의 철학‘을 탐독했다는 것은 전편에 지적한 바와 같다. 그것이 동란 후에 심화된 것뿐이다. ‘목마와 숙녀’는 그의 죽음을 예고한 유서에 다름 아니다.
‘내용에 있어서나 시적 형상화에 있어서나 공허한 작품이다. 이 시는 내실이
없이 요란스러운 언어들만을 나열하는, 올바른 시대 인식의 진통 없이 난
해한 시를 쓰고 있는 전후의 일군의 시인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된다.’
위의 인용문은 김규동의 ‘목마와 숙녀’에 대한 비판의 글이다. 그의 통일되지 못하고 현실을 아파하는 내면 추구가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가 이 시를 쓸 때는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10년 동안 시를 써 왔다. 이 시대는 세계사가 그러한 것과 같이 기묘한
불안정한 시대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 성장해 온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했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다.......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
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도 사회와 싸웠다.......나는 우리가 걸어온 길과 갈
길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분열한 정신을 우리가 사는 현실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내 보이며 순수한 본능과 체험을 통해 불안과 희망의 두 세계에서
어떠한 것을 써야하는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여기에 실은 작품을 발표 하였다.’
ㅡ‘選詩集’ 후기에서 [1995. 10. 15간행]
박인환이 ‘선 시집’을 서둘러 발행한 것은 죽음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목마와 숙녀’는 그가 죽기 전 해의 가을에 쓴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요절은 본인 자신이 예비하고 있었고 그래서 서둘러 작품집을 간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떠나간 숙녀. 버지니아 울프. 李箱의 추모의 밤을 열었던 일. 시의 도처에 산재한 죽음에의 이미지들. 그리고 평소에 ‘천재는 요절하는 것이 운명이니까 나도 일찍 죽을지 모르오.’를 말한 점 등을 분석해 볼 때 요절의 심증이 짙어 진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을 통해서 추측하는 것일 뿐이다. 인제시는 박인환 시인을 기리기 위해 지난 88년 인제읍 남북리 아미산 군립공원 내에 부지 일백평 규모에 높이 5미터의 박인환 詩碑를 세웠다. 그러나 95년 국도 44번의 확장공사로 철거되었으며 97년도에 인제읍 우회도로가 완공 되면 소양호 상류지역 시인의 생가 터가 바라다 보이는 합강교 부근에 공원을 다시 조성,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공사를 미루다가 98년 꽃피는 4월에 새로 복원했다는 소식이다. 박인환의 영혼은 죽어서도 편치 못했다.
‘棺 뒤에 누가 따라오느냐-
죽어 선 모르지만
그래도 누가 올 것이다.’
이 하찮은 말이 결국 그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천재는 요절하는 것이 운명이니까 나도 빨리 죽을지 모르오.’ 이 말의 의미도 재평가 되어야 옳다. 한 작품이 문학성이 강한가, 대중성이 강한가,를 놓고 담론이 격렬한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아직도 그의 시가 애송되고 있다면 무덤 속에서도 박인환은 후회 없는 시를 썼다고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박인환은 이제 술병을 안고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