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년 (AD 921) : 봄 정월에 김률이 왕에게 아뢰었다.
[번역문]
5년(921) 봄 정월에 김률이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 왕이 저에게 묻기를 ‘듣건대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三寶]이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대(聖帶)가 그것이라고 한다.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아직도 있으나 성대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 그것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聖帶)라는 것이 어떤 보물인가?” 그러나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황룡사에 나이가 90세 넘은 사람이 있어 말하였다.
“제가 일찍이 그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배로운 띠는 곧 진평대왕이 착용하던 것인데, 대대로 전해져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왕이 마침내 창고를 열도록 하였으나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날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그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된 것으로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론(史論): 옛날에 명당(明堂)에 앉아서 나라에 전해져 오는 임금의 인장(印章)을 쥐고 구정(九鼎)을 진열해 놓는 것을 마치 제왕의 장한 일인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한공(韓公)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하늘과 사람의 마음을 돌아오게 하고 태평한 터전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세 가지 기물[三器]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세 가지의 기물을 세워 놓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을 과시하는 사람의 말이 아닐까?』
하물며 이 신라의 이른바 세 가지 보물이라는 것도 역시 인위적인 사치에서 나왔을 따름이니, 나라를 다스림에 어찌 이것이 필수적이겠는가? 맹자에 이르기를 『제후의 보배는 세 가지가 있는데, 토지·인민·정사(政事)가 그것이다.』라 하였으며, 초서(楚書)에 이르기를 『초나라는 보배로 여기는 것이 없고, 오직 선(善)을 보배로 여긴다.』라고 하였다. 만약 이것을 나라 안에서 행한다면 한 나라를 착하게 하기에 충분하고, 그것을 밖으로 옮긴다면 온 천하를 윤택하도록 하기에 충분하니 또 그 밖에 무슨 물건을 말할 것인가? 태조는 신라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것을 물어보았을 따름이지 숭상할 만하다고 여긴 것은 아닐 것이다.
2월에 말갈 별부(別部) 달고(達姑)의 무리가 북쪽 변경에 와서 노략질하였다.
그때 태조의 장군 견권(堅權)이 삭주(朔州)를 지키고 있었는데,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려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글을 전하여 태조에게 감사하였다. 여름 4월에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가을 8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고 가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