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6년9월20일 8시출발
장소 : 명성황후생가유적지. 신륵사. 영릉
배경음악 :운경교가
영릉에 얽힌 이야기
현재의 영릉자리에 조선시대의 성군이라 불리우는 세종대왕의 무덤이 들어서게 된 재미있고
신비로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지금의 영릉자리는 세종대왕의 무덤이 들어서기 전 이미 둔촌 이집의 손자인 우의정
이인손의 묘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인손이 세상을 하직하자 다섯 아들은 갈처사 (명당의 터를 잡아주는 지사)로 하여금
천선강탄형의 길지에 예장을 하였답니다.
여기에서 천선강탄형이란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오는 형상이라하여 아주 좋은
묘터를 말하는 것인데,
그 갈처사는 명당터를 잡아주며 자신이 일러주는 사실을 비단에 유언으로
쓰지 않을 경우 묘터로 쓸수 없노라는 조건을 걸었고 결국 그렇게 따르겠다고 하여
광주 이씨의 묘터가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첫째, 묘택 앞을 흐르는 개울에는 절대로 다리를 놓지 말것.
둘째, 아무리 자손이 번창하더라도 절대 이곳에 재실이나 사당의 건물을 짓지 말것.
유언의 내용에 따라 이와같은 내용은 광주 이씨 가문의 불문율로 지켜져 내려오고
있었으며,
대명당의 터 였으므로 그의 자손들은 정승, 판서와 고관대작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손들중에 높으신 양반들이 많다보니 가을마다 성묘를 할 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겠지요.
양반체면에 냇가를 건너야 하지를 않나 멀리서 온 자손들이
재실이 없어 마땅히 지낼 곳이 없어서 불편한 점이 많아 문중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그 결과 유언을 따르자는 쪽과 다리를 놓고 재실을 짓자는 쪽으로
의견이 나뉘게 되었으나 결국 대의 명분이 현실주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그리하여 돌다리를 놓고 재실을 짓게 되었으나 그후
광주이씨 가문은 그 다리와 재실을 그 후 오직 한 해 밖에 사용할 수 없게 될 줄을
그들은 미처 몰랐던 겁니다.
이무렵 예종의 명을 받들고 세종의 새로운 능자리를 보러 팔도로 지관들이
파견되었고 그중 안효례는 여주 이천쪽으로 능자리를 찾아 헤매이고 있었습니다.
안효례가 북성산(275미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서쪽 산기슭을 따라
맑은 정기가 흐르고 있었고 그리하여 그 방향을 따라 걸어 내려왔으나
숲이 울창하여 위에서 본 그곳이 어디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었겠지요.
더구나 때마침 한차례의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숲속에서 비를 만난
그는 물에 빠진 새앙쥐꼴이 되어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자탄하고 있던 바로 그 때,
그의 눈앞에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 건물이 한채 보이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는 비를 피하고자 걸음을 바삐하여 그리고 다가갔으나
바로 앞에 작은 냇가가 불어난 물에 흙탕물이 기세 좋게 콸콸 흐르고 있어
도저히 건널 수가 없어 두리번 거리던 중 아래쪽에 돌다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곧장 건너 비를 피할 수 있었답니다.
그가 비를 피한곳은 공교롭게도 바로 광주 이씨의 재실이었던 것이지요.
결국 광주 이씨 후손들은 조상의 유언을 지키지 않아 그들의 무덤을
스스로 파고 말았던 겁니다.
한 참만에 비가 그치고 안효례가 처마 밑에서 비를 털고 나와 야트막한
산언덕에 있는 묘택을 바라보니
그곳이 바로 북성산위에서 바라본 천하의 대명당인 천선강탄형 길지였던 것이었지요.
이런 명당터는 조선땅에 다시는 없으리라 확신하며 궁궐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기를
"풍수법에 이르기를 산이 멈추고 물이 구부러진 곳은 자손이 크게 번성하고
천세 만세 승업을 이어간다고 하였는데 신이 본 바로는 그곳이 바로 이곳으로
사료 되옵니다."하고 복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이 명당은 이미 광주 이씨의 묘소 였으므로
왕으로서도 어찌 할 수가 없어 여러날을 고심한 끝에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큰 아들을 불러 인간적인 호소를 다음과 같이 하게 됩니다."
경은 참으로 복이 많구려. 선친의 산소를그리 좋은 자리에 모시었으니 말이오.
짐은 삼천리 강산을 갖고 있으되 조부 세종대왕을 편히 쉬게 할 곳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저 경이 한 없이부러울 따름이오."
결국 이극배는 예종의 협박(?)에 선친의 묘소를 예종께 양보하였고
왕은 기뻐하며 삼천리 방방곡곡 원하는 곳은 어디에나 이인손의 묘를
써도 좋다는 사패지지를 하사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인손의 묘를 파서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비기를 새겨넣은
글귀가 나왔는데,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연을 날리에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그 연이 떨어진 곳에 이 묘를 옮겨라." 라고 씌여 있었으니 말입니다.
결국 장례를 할 때 이미 이장을 하게 될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것이지요.
광주 이씨 후손들이 신기하게 여기어 그렇게 하니 과연 연은 바람을 타고 날리어
서쪽으로 약 10여리쯤 가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어제의 이야기를 마무리 해보겠습니다.-
그리하여 이인손의 묘는 영능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으로 옮겨졌으니
그곳을 이름하여 연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연주리라 했으며, 바로 지금의
새미실(샘실;신지리) 이 그곳입니다.
지금의 신지리 황새물쪽으로 가다보면 그곳에 광주 이씨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 무렵 신지리에 임씨 성이 집촌을 이루며 살게 되었고 북성산의 왼쪽 자락에
그들의 종중산이 자리 잡고 있으니 북성산의 오른쪽자락에 잠들어 있는 세종의
무덤과 좌우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세종의 무덤이 대명당이라면
팽성(평택)임씨의 종중산 또한 명당에 자리 했다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평택 임씨에서는 큰 인물이 나지 않았을 까요?
그건 여러분이 잘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으로 부터 150년전에 임학선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우리나라가 아주 혼란했던 시기였죠.
구한말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등장하던 그 시절입니다.
이 분은 일찍이 동학에 몸을 담고 당시 동학의 2대 교주이신 해월 최시형신사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신 분이었습니다. 신사께서 쫒기는 몸이 되었을 때 바로
곁에서 모시고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을 다니시며 생사고락을 함께하셨답니다.
당시 대접주로서 수만여의 동학군을 함께 이끌고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전하여 백성을
착취하던 부패한 정권과 우리나라를 삼키려던 교활한 일본군과 맞서 혈전을 벌였으나
아쉽게도 패퇴하여 인내천의 큰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당시 함께했던 동지들은 3대 교주가되는 의암 손병희, 백범 김구,녹두 장군 전봉준,
그리고 나중에 일진회를 조직하여 친일파로 변절하는 이용구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동학혁명이후에 살아남아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지만,
임학선이라는 분은 최시형선생이 처형된 직후 그를 쫒던 일본순사의 총탄에의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시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분은 지금 북성산 거치랭이 임씨 종중산의 아래자락에 잠들어 계십니다.}//
일설에는 이인손의 묘를 파내자 신라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대사의 비기가
나왔는데 이렇게 씌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나라의 재상이 삼 년동안 임시로 묻혀 있을 곳이지만, 단족대왕이
영원히 쉴 자리이다." 라고 말이죠.
여기에서 단족대왕은 세종을 일컫는 말인데 실제로 세종은 한쪽 다리가 짧아
절룩거리며 걸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