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원 시집 {뼈 없는 뼈}
박정원 시인은 1954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고, 1998년『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세상은 아름답다』,『그리워하는 사람은 외롭다』,『꽃은 피다』,『내 마음속에 한 사람이』,『고드름』등이 있고, 여섯 번째 시집인『뼈 없는 뼈』는 언어 이전의 단계에서 형성되는 시적 직관의 맥락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물의 근원을 사유하는 편편마다 그의 안과 밖에서 피어오르는 역동적인 시세계를 만끽하게 해준다.『함시』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언어 이전의 세계는 한 편의 시에서 여백으로 존재한다. 그 여백은 커다란 공백으로 나타나 그것을 메우지 못하는 존재의 내면을 뒤흔들어버린다. 언어로 사유하는 존재의 비극은 실상 이러한 여백에 대한 공포에서 뻗어 나온다. 여백은 언어로 채워져야 하지만 동시에 언어로는 채울 수 없는 흔적을 내장하고 있다. 여백은 이 지점에서 시의 역설적인 자리로 드러난다. 채워야 하되, 채워질 수 없는 여백의 미학은 박정원 시의 역설적 세계가 펼쳐지는 시적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다. “신났어, 뼈 없는 찻잔이라나 유리컵이라나/ 가만히 주워 모아 탁자에 놓으면/ 끼리끼리 뭔 말들이 그리 많은지/ 왔던 바람도 잽싸게 창밖으로 물러나곤 하지/ 뒤집어봐 물이 쏟아지잖아/ 뼈와 뼈를 이어주는 것도 물렁뼈잖아/ 물이었군, 내 몸에서 요동치는 것도/ 뼈가 아니라 뼛속 깊이 채워졌던 눈물이었군/물이나 먹어 라고 말하지 말았어야했군/ 무심코 내뱉는 말이 곧 뼈였군”([뼈 없는 뼈]) 에서와 같이, 역설적 공존의 의미망을 통해 시로 구현되는 내면에는 그의 시적 ‘여백’이 고통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언어 이전에 대한 시적 묘사는 언어 이후의 정치적(윤리적)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것은 그의 ‘깊은 마음’의 시학으로 사물들의 세계를 제3자적 입장에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실 의자가 마당 한쪽으로 치워져 있다/ 오랫동안 몸을 내주었던 그가/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다/ 자리에 연연치 않겠다더니/ 왜 목숨을 놓았을까/ 수사기관에서는 그의 주검을 부검키로 했다/ 아무나 앉아도 되었던 의자/ 그 자리를 위해 끼니를 거르는 것도 예사였고/ 해진 방석을 안은 채 다리 하나가 빠진 의자처럼/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일수록/ 그의 집 기둥은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갔다/ 설상가상, 지난해 유방암으로 아내와 하직했고/ 한 해에 두 번쯤 발표되는 승진자명단엔/ 그의 이름이 빠지곤 했다/ 이틀 후 자살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가 앉았던 책상 서랍 속에서/ 유서도 발견되었다 공개되지는 않았으나/ 동료직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들이 떠돌았다/ 어린 자식들은 누구 어깨에 얹혀사느냐고/ 그가 지킬 자리가 꼭 그 의자뿐이었느냐고
----[바보 의자] 전문
그가 얼마나 섬세한 감각의 사람인지는 1,2부의 시들이 유감없이 보여줍니다만, 인생의 시고 떫은 고비를 낮은 포복으로 넘어본 사람이 아니고는 쓸 수 없는 3부 시편들- ‘바보의자’ ‘거미와 놀다’ 등-의 자조와 울분 앞에서 나는 더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시쓰기에 대한 날로 더해지는 그의 열정으로 보건대, 그의 시가 머지않아 ‘대기만성’의 옛말을 반드시 높은 수준에서 재현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김사인(시인)
「눈물이 말라 뜨는 별, 깊은 환부를 드러낸 감, 적막 한 장의 낙엽, 생리혈 한 무더기의 개어귀…」, 작품 곳곳 시안을 새롭게 눈뜨게 하는 언어의 질감은 서로 조율하며 만개하여 우리가 접하지 못했던 진경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촘촘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그의 울혈(鬱血)은 가시지 않은 채 멍 자국에 갇혀 있음을 본다. 새들도 퇴근하는 저녁, 바보의자에 않아 옥고를 메워가는 그의 울음이 아직 그치지 않았음이리라. 독자로서 아프다.
-이영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