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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깊이와 원시안의 시선
-정해영론
이형권(문학평론가)
1. 진실한 거짓말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는 “예술은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게 만드는 거짓말이다”라고 말했다. 입체화(Cubism)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이 위대한 화가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예술가들을 거짓말쟁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예술과 거짓말이라는 이질적인 대상을 결합시켜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완성한 것도 피카소다운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피카소가 말한 거짓말은 미적 영역의 허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술적인 상상의 다른 이름이다. 거짓말 같은 상상, 혹은 진실한 거짓말, 그것은 객관적 사실 이면의 본질이나 현실 너머의 이상 세계에 다가가기 위한 첩경이다. 예술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본질이나 이상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런 일은 자유로운 영혼이 추구하는 창조적 상상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다. 때문에 위대한 예술가들이 한 편의 명작을 창조하기 위해 현실적 삶을 유예하거나 희생하면서까지 상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이다.
정해영 시인에게 상상은 현실적 삶의 이면에 가리어진 진실을 탐색해 나가는 통로이다. 치열한 경쟁과 속된 욕망으로 가득한 현실의 삶은 상상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위로 가득 찬 그러한 삶에 쫓기듯이 살아가지만, 인생에 대한 자의식을 간직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의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의 뿌리를 망각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삶에 대한 자의식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혹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의식은 때로 현실과 상충되면서 갈등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인생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러한 갈등마저도 자신의 삶의 일부로 수용한다. 시인을 포함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자의식이 강할 뿐 아니라 그것을 탐색하기 위해 상상에 열중한다. 정해영 시인도 예외는 아니어서 삶의 진실을 찾아가기 위해 구심적 상상과 원심적인 상상을 두루 활용한다.
정해영 시의 구심적 상상은 일차적으로 존재론적 실존의식이나 내면 탐구를 위해 작동하고, 원심적 상상은 가족이나 지인과 같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성찰적 인식을 지향한다. 때에 따라서는 두 상상이 공존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상상의 과정에서 그녀가 마음을 두는 것은 ‘비움’과 ‘원시안’으로 표상된 진정한 가치의 세계이다. 현실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충만하게 채우고 가까이에서 근시안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적이다. 그러나 채운다는 것과 근시안적인 시선이 인생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렇게 많지 않다. 비움이 없는 채움, 원시안을 결여한 근시안은 삶의 외형을 충만하게 할지언정 그 내면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한다.
2. 비움으로 깊어지다
시인은 역설적 상상을 통해 삶의 진실에 다가가는 사람이다. 정해영 시인이 추구하는 비움도 궁극적으로 삶의 심오한 깊이와 초월적 인식에 도달하게 해 주고, 원시안은 마침내 인생에 대한 폭넓은 통찰을 가능케 한다는 인식도 역설의 영역에 속한다. 먼저, 비운다는 것은 정해영의 시에서 현실적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크고 정갈한 정신세계에 들어서기 위한 적극적인 인식 행위이다.
쓰레기통에서 튕겨 나온 빈 깡통 하나
어쩌다 여기까지 굴러 왔나
있다가 없어진 것들의 힘으로
참 못 볼 것 많이도 본 눈
어둡고 컴컴하다
듣지 못할 소리에 녹 슬은 귀
가늘고 멀다
몸의 군데군데에서 빈 소리가 난다
다 빠져 나간 모양이다
마음 가까이 배회하던 비단옷 입은
주인들도 나가고 없다
흔적 없이 비워
막힘없이 통하는
허공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버려진 깡통 속으로
달빛이 스며든다(「깡통 경전」 전문)
이 시의 중심 소재인 “깡통”은 비시적인 것이지만, 시인의 시선에 의해 의미 있는 시적 대상으로 태어난다. 중심 소재인 “쓰레기통에서 튕겨 나온 빈 깡통”은 아주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시인의 상상이 미치는 순간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난 뒤에 현실적 욕망을 초월한 존재로 격상된다. “참 못 볼 것 많이도 본 눈”은 그 우여곡절을 의미하며, “몸의 군데군데서 빈 소리가 난다”는 것은 그 초월적 상태를 암시한다. 현실적 욕망인 “비단옷 입은/ 주인들이 나가고 없”는 데서 나는 울림인 “빈 소리”는 맑고 깨끗한 존재의 자기 현현이다. 그리하여 “빈 깡통”은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라 “막힘없이 통하는/ 허공”이 된다. 여기서 “허공”은 상실의 자리이자 채움의 자리라는 역설적 의미를 포함한다. 내용물로서의 물질적 욕망은 다 버렸지만, 그 버린 자리를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로 채운 셈이다. 하여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버려진 깡통” 그 “속으로 달빛이 스며든다”는 결구에서, 무위적 “달빛”으로 인해 “깡통 속”은 한 없이 깊어지고 넓어진다. 물론 이때의 “깡통 속”은 인간의 정결한 정신의 차원을 비유한다. 그래서 그 비워진 “속”은 단지 공허한 공백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노자가 말하는 도의 속성과 상통한다. “도는 텅 비어 있어서 차 있지 않은 그것을 쓰는 듯하다. 그 깊음이여! 만물의 근원같구나.”(道 沖而用之惑不孕 淵兮似萬物之宗, 도덕경 제4장)라는 구절을 보라. 이렇듯 물질적, 현실적 욕망을 비운다는 것은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마음속에 채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채우는 것은 비우는 것이요, 비우는 것이 오히려 채우는 것’(“色卽是空 空卽是色”)일 수밖에 없다.
비움의 시학은 또한 부재를 통한 존재의 소중함을 밝히는 원리이기도 하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있고, 행복한 인생이라는 것은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그들을 곁에 두고 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보통의 사람은 이런 현실을 아쉬워하고 비극적으로 여기는 데 머물고 말지만, 현명한 사람은 이 부재의 상황을 통해 그들의 의미를 마음으로 고양하는 계기로 삼는다.
먹이를 구하는 하이에나의 눈
렌즈의 중심에는
세상이 있다
그 속에 살지만
당신은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서 주세요
끝에 계신 분 안 나올지 모릅니다’
그곳은 프레임의 밖이다
후미진 외곽이다
찰칵!
올해는 앞사람의 머리에 가린
얼굴 속의 이름이거나
맨 앞줄 맨 끝
무심한 항해의 귀착지처럼
한 해의 사진에
당신이 없을 지도 모른다
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포즈를 만들었지만
신선한 먹이가 될 수 없는 당신이
없는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게 될지도 모른다(「한 해의 사진을 찍다」 전문)
이 시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한 해 동안 살아온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시의 화자는 한 해 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사진 속에 “당신”의 부재를 깨닫는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하나는 “당신”은 누구인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부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의문이 동시에 풀리는 시구는, ”먹이를 구하는 하이에나의 눈“들이 번뜩이는 ”세상“에서 ”신선한 먹이가 될 수 없는 당신“이라는 부분이다. “당신”의 정체성은 아마도 약육강식의 비정한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는 고졸하고 순수한 존재일 터,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항상 ”당신은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을 때도 있“거나 사진의 “프레임 밖” 혹은 “후미진 외곽”에 존재할 뿐이다. 행여 사진의 “프레임” 안에 들어온다고 해도 “앞 사람의 머리에 가린/ 얼굴”과 같이 존재할 뿐이다. 애초부터 ”당신“은 “하이에나”들이 우글거리는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의 장에서 살아갈 속물적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만일 “신선한 먹이가 될 수” 있는 “당신”이라면 사진 속에 쉽사리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부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부재는 오히려 마음속에서 “당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계기이다. 하여 화자는 “당신이/ 없는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며,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당신”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그래서 현실(사진) 속에 “당신”의 자리를 비움으로써 마음속에는 “당신”이 충만해지는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 사람은 대개 세상과 인생에 대한 관조적인 시선을 갖게 마련이다. 비움은 마음의 집착과 현실적 욕망의 찌끼들에서 자유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뜻밖에 나에게로 와서/ 내 마음의 방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비좁고 옹색하여// 떠나보낼 양으로/ 따뜻하게 먹이고 입혀/ 등을 밀어 보냈지만/ 할딱이며 되돌아오는/ 눈 먼 어린 것/ …(중략)…/ 바라 보아야할 어둔한 것/ 누추하게 살아있는 것이 안아야할/ 생명, 혹은 애완동물 같은”(「걱정, 애완동물 같은」 부분)과 같은 시구도 마음을 비우는 것의 편안함을 노래한다. 이 시의 중심 소재인 “걱정”은 인간이면 누구나 멀리 하고 싶은 부정적인 것이다. “걱정”을 끌어안고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시인은 “걱정”을 “안아야 할/ 생명, 혹은 애완동물 같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인식한다. 이것은 마음속에서 “걱정”을 무조건 몰아내야 한다는 강박감을 비운 높은 도량의 마음 상태에서나 가능한 발언이다. 시인은 마음을 비우면 “걱정”도 한 몸처럼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라는 넉넉하고 높은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3. 원시안으로 보다
정해영 시가 비움의 역설적 의미를 통해 삶의 깊이와 넓이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시의 주체 혹은 시인이 세상을 거시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는 일은 때로 미시적인 관찰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사소한 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망원경적 통찰력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정해영 시인은 세상사를 원시안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멀리 있는 풍경이 선명하다
손가락 가까이
활짝 핀 것들은
흐물 흐물한 안개껍질 뒤로
몸을 숨긴다
멀어서 닿을 수 없는
어찌 할 수 없는 것만이
환하게 보인다
태평양을 건너
조지아주 라그란지 시티에
살고 있는 핏줄
삐뚜름하게 한 짐 진
서른 살의 슬픔이
너무 잘 보인다(「원시안」 전문)
이 시는 일차적으로 멀리 타향에 있는 자식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작품이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읽어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의 모두에 등장하는 “멀리 있는 풍경이 선명하다”는 진술도 단지 “원시안”이라는 생리적인 상태를 지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좀 더 크게 가지면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확보된다는 의미를 함축한 것으로 읽힌다. “원시안”은 본래 시력이 약하여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하는 질병을 의미하지만, 이 시에서는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먼 곳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의미한다. 겉으로 화려한 “활짝 핀 것들은” 언제나 “흐물흐물한 안개껍질 뒤로/ 몸을 숨긴다”는 시구와, 멀리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만이/ 환하게 보인다”는 시구가 그러한 의미를 뒷받침한다. 인생의 내공이 쌓이면 눈앞에 있는 것보다는 멀리 있는 것들, 작은 것보다는 큰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까이 사는 가족들보다도 “태평양 건너” 멀리 “살고 있는 핏줄”의 “슬픔”이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고 한다. 이것은 오랜 세월 자신의 삶을 “슬픔”으로 채워본 사람, 부단히 눈앞에 보이는 것 너머의 세상을 꿈꾸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적 혜안이다. 하여 “원시안”은 현상적 세상 너머의 본질을 파악할 줄 아는 지혜로운 시선이라 말할 수 있다.
정해영 시인의 “원시안”은 시간적으로도 멀리 통찰하는 시선을 갖추었다. 예컨대 “이웃 사람들 자꾸 올려다보던/ 오래된 기억속의 목련꽃// 아버지 읍내에서/ 사진사 부르시던 날/ 자욱이 만개한 식구들/ 가운데 꺼칠한 기둥이신/ 아버지 곁에/ 젖다가 마르고 마르다/ 젖은 어머니도/ 활짝 고우시다// 바라보면/ 허물어진 한 생애의/ 빛나던 꼭대기만 남아/ 아득히 눈부시다"(「가족사진」 전문)에서 시인은 오래된 기억을 끌어내어 오늘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로 삼는다. 그 매개 구실을 한 것이 ”가족사진“이다. 오래된 가족사진에는 ”목련꽃“같이 아련하고도 애잔한 사연이 담겨 있다. 근대적 아버지들이 대개가 그러했듯이 ”꺼칠한 기둥이신/ 아버지“의 모습이 그러하고, 그 ”곁에“ 예전의 어머니들이 다 그러했듯이 ”젖다가 마르고 마르다/ 젖은“ 정한의 세월을 살아오신 모습이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시인이 보기에 그러한 모습은 가난하고 힘겨웠던 날들의 어두운 기억이 아니라 ”빛나던 꼭대기“와 같이 소중한 삶의 자양이라고 여긴다. 시인이 과거의 애잔한 기억들이 ”아득히 눈부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지나간 세월과 오늘의 시간과 함께 보는 지혜로운 ”원시안“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한편으로 “원시안”의 시선은 잠시 세상을 중심에서 벗어나 세상을 관조하면서 세상의 실상을 통찰하는 방식이기도 한다. 이때 "원시안“은 마음의 눈이라고 할 수 있을 터, 그 눈은 세상을 길게 크게 넓게 볼 줄 아는 혜안이라 할 만하다.
일이 생겼다
밀봉되어
그 속을 모르는
며칠 밤
눈을 뜨고 밤의 둘레를 걸었다
판단의 날을 세우며
아파트 주위를 몇 바퀴
더 돌았다
지금 중심에서 먼 이곳
가파르고 아득하다
차겁고 미끄러운 길 위에
어둔하게 생각의 이빨을 물리며
둥그렇게 멀리 돌아서 간다
뚜껑이 열릴 때까지(「깡통 따기」 전문)
이 시에서 “깡통”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어떤 “일”을 표상한다. “깡통 따기”는 그 “일”이 해결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혹은 그 “일”이 왜 생겼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속 시원히 알고자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생각해 보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전후사정과 인과관계가 어떠한지 알 수 없는, “밀봉되어/ 그 속을 모르는” 수많은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때 그 “일”에 너무 집착한다면 오히려 그 “일”은 점점 오리무중으로 혼돈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원시안”의 시선이다. 그 “일”에서 한 걸음 물러나와 객관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눈을 뜨고 밤의 둘레를 걸었다”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그 “일”이 스스로 풀리기를 염원한다. 그래서 화자는 “지금 중심에서 먼 이곳”에 머무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어찌 보면 평탄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차겁고 미끄러운 길”을 가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둥그렇게 멀리 돌아서 가”는 길은 “일”을 자연스럽게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다시 말해 “깡통 따기”는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리고 공간을 많이 돌아다녀야 할지라도 그 “뚜껑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일을 억지로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결될 때가지 기다리는 이러한 태도의 바탕에는, 역시 눈앞의 것에만 집착하지 않는 “원시안”의 시선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겠다.
4. 의외성의 발견
시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세상과 인생의 굴곡마다 미만하게 퍼져 있는 의외성을 발견하여 서정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다. 잘 알 것 같은데도 막상 생각해 보면 알 수 없는 일, 잘 모를 것 같은데도 그 진의를 쉬 알게 되는 일이 세상에는 허다하다. 앞서 살펴본 시편들에서 ‘비움의 깊이’에 대한 인식이라든가 ‘원시안의 시선’에 의한 통찰도 그러한 의외성의 발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의 기본 원리 가운데 하나인 역설도 현실의 논리를 넘어서는 의외성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데, 시는 그 의외성을 발견하는 일을 통해 인생을 성찰하고 세상을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아래 시에 등장하는 “그”에 대한 재발견도 이와 관련된다.
문과 벽의 다른 점은 손잡이에 있다 그의 성격에는 유난히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생활의 방식이 직진 아니면 부러지는 쪽이라 일이 폭탄처럼 터진 날도 많았다 그런 날은 으레 귀여운 새벽별 하나 앞세우고 만취가 되어 산산이 부서져 돌아오곤 했다 그 유별난 내력이 쌓이고 쌓여 강하게 비틀거나 힘껏 잡아당기면 견딜 수 없다는 듯 강의 하류 같은 그의 속을 방류하곤 하였다
평생을 두고 고칠 수 없던 병, 어느 날 의사의 면도날 같은 말 한 마디에 그 부분이 쏘옥 들어가 버렸다 그를 열어 볼 손잡이가 없어졌다 평면처럼 조용하다 기고만장하게 불쑥 튀어나온 빛나던 단점, 그것이 그를 돌리는 손잡이였다는 것을.(「낡은 손잡이」 전문)
이 시는 평소에 “벽”처럼 보이던 “그”가 사실은 “문”이었다는 역설적 깨달음을 전한다. 이때 “벽”이 소통이 안 되고 이해도 안 되는 닫힌 존재를 표상한다면, “문”은 소통이 이루어지고 이해도 잘 되는 열린 존재를 표상한다. 처음에는 “벽‘이었던 존재가 ”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열리기 전에 시인의 마음이 먼저 열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대체 “손잡이”가 없어서 속을 열어볼 수 없는 존재였는데, 어느 날 “그”의 “기고만장하게 불쑥 튀어나온 빛나던 단점“을 ”손잡이“라고 생각하니, ”그“는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서 인간적인 속내를 간직한 ”문“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생각의 전환이 이전의 부정적인 선입관을 크게 바꾼 셈이다. 다시 말해 “유난히 튀어나온” 저돌적이고 열정적인 “그의 성격”이 “단점”이 아니라 인생을 “돌리는 손잡이”와 같이 소중한 역할을 한다는 의외성의 발견이 한 편의 시로 승화된 것이다. 이 의외성을 우리는 숨겨진 진실, 혹은 인간적 진실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평소의 선입관을 비워내고 그 본성 깊은 곳을 응시하는 지혜로움이 바로 정해영의 시를 존립시키는 소중한 근거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정해영의 시인은 비움으로써 깊어지는 시심과 원시안으로 멀리 보는 혜안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애지 2011년 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