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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1 마 8장 28-34절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한가로이 거닐기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스위스에 다녀와서 한 주 시차 적응하고,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나니 한 주가 지나갔습니다. 지난 화요일 교역자 회의에서 젊은 목사님들과 식사 후에 잠시 대화나누었습니다. 힘들어지는 목회의 현실로 인하여 마음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토로했습니다. 교회는 키워가야 하는데 점점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목회가 고되고 지치게 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도 하지 않은 30대 후반의 목회자가 느끼는 고단함에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너무 욕심내지 말고, 숨고르기 하면서 자신을 잘 지키며 천천히 가야한다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빨리 빨리’ 무언가 성과를 내야하고 키워야하는 이 시대의 조급함은 우리 모두가 피부로 느끼는 중압감인 듯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집단이 요구하는 삶을 자신의 삶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삶의 유일한 정답인 것처럼 살아가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집단적 가치에 뒤쳐진 사람은 우울감, 상실감에 젖어있습니다. 스스로 승승장구하는 이들은 스스로 팽창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삶 속에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저의 분석가이자 선생님이신 한수엘리 에터는 스위스에서 디플로마를 주시면서 3장의 긴 글을 쓰시고 저를 위해 읽어주셨습니다. 제가 세미나 소논문으로 쓴 오랜 전 장자의 소요유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Free and easy wandering' 하라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유롭게 노닐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마음 속에 일어날 조급증에 대한 하나의 처방을 주신 듯 합니다. 바쁘고 복잡한 세상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만은 한가롭게 거닐 수 있다면 그곳에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삶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을 밖에 귀신 들린 두 사람
오늘 본문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한 부류는 마을 밖에 있었던 두 사람과 또 한 부류는 마을 안에 있던 자들입니다. 오늘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다라 지방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라사’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거라사 지방은 가다라 지방보다 더 남쪽에 위치합니다. 가다라는 겟네사렛 호수에서 남동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마을입니다. 폼페이우스가 이 마을의 재건을 지시한 이래 데카폴리스(데가볼리)에 속했던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다라 지역에 가셨을 때 마을 밖에 있는 두 사람을 마주쳤습니다. 바로 귀신에 들린 자들입니다. 마을 밖에서 귀신들린 자들은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귀신에 들렸다는 것은 귀신에 사로잡혔다는 의미입니다. ‘들린다’는 말은 ‘possessed’ 사로잡힌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귀신의 힘에 압도되어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특징을 2가지로 적고 있습니다.
“무덤가에 살고 있다”(28절). 무덤가에 사는 자란 삶의 자리, 생명의 자리에 있지 않고 죽음의 자리에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어둡고 우울함 가운데 지내는 자입니다. 모든 생명의 활력을 잃어버린 자입니다. 사람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 속에서도 이렇게 무덤가에 사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생동감이 없고, 삶의 맛을 잃고, 외롭고 우울함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삶이 괜찮은데 막상 그의 내면의 삶은 사막과 같은 삭막함 속에 살아갑니다. 한국이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입니다. 이런 자살의 행태는 고통을 겪는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없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삶의 에너지의 고갈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자의 또 다른 특징은 너무나 사납다는 것입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은 사납습니다. 본능적 충동, 무의식의 파괴적인 콤플렉스가 그들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너무나 사납습니다. 쉽게 분노하고 화를 내고 파괴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군가 나를 공격하고 손해를 입히고 조금만 짜증나게 만든다 싶으면 분노의 불길에 휩싸이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중심을 상실한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저도 가끔씩 아이들에게 이렇게 하면 좋겠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럴 때 간섭한다고 짜증을 내는 아이들이 걱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나를 사로잡고 있는 사나움, 분노, 화, 충동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점점 그것에 길들여집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귀신의 정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뿔이 두 개 달린 것이 귀신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런 사나움의 특성들이 바로 귀신의 정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8-9 말씀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아서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우는 사자에게 사로잡히고, 삼킴 바 된 수많은 사람들을 TV나 신문등을 통하여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에서 우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충동적으로 절제하지 못하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들, 우울감, 관대하지 못하고 쉽게 화내고 분노하는 우리 자신 안에서 그 귀신들이 꽈리를 틀고 꿈틀대고 있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불을 밝혀 무엇이 내 안에 올라오고 있는지, 내 기분과 정서, 감정이 정체를 이해하고, 무엇이 나를 사로잡으려고 하는지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귀신의 정체 : 군대 Legio
마태복음에 나오지는 않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귀신의 정체를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귀신들의 이름을 물었을 때 귀신들은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귀신의 정체를 ‘군대Legio’ 라고 명시합니다. 그 군대라는 이름의 귀신들이 2천마리나 되는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 바다로 뛰어들어 몰살당합니다. 마태복음은 이를 “많은 돼지 떼”라고 표현합니다. 귀신의 정체는 군대입니다. 로마의 군대를 은유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로마군인들을 돼지떼로 비유하곤 했습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탐욕스런 돼지의 측면, 불결한 돼지로 로마 군인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처음 이 성경을 읽은 2000여년 전의 독자들은 몰살당하는 귀신들을 로마 군대의 몰살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식민지를 지배하는 탐욕스런 악한 힘이 패배하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서 더 깊이 묵상해야하는 것은 귀신의 이름이 2000명이나 되는 군대의 군단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폭력적인 힘을 가진 집단적인 세력을 가리킵니다. 부정적이고 탐욕스런 집단적 가치와 시대정신으로 인간의 문화와 사회를 사로잡는 것이 바로 이 귀신의 정체입니다. 여러분 이런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집단적 가치가 나라를 사로잡으면 그 나라는 집단적 광기를 드러냅니다. 세계사에서 대표적으로 독일의 나치즘입니다. 독일의 국민들은 나치즘이라는 집단적 가치에 사로잡히면서 피비린내는 학살을 감행하고 전쟁광으로 돌변해버렸습니다. 요즘은 여론을 조작하여 사람들의 생각과 동향을 바꾸어 집단을 조정하려 합니다. 국정원 댓글조작 뿐 아니라 기무사 댓글부대의 이런 일들이 눈먼 군중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집단적인 가치로 인하여 인간의 존엄과 생명이 말살되는 그곳에는 폭력적인 힘을 가진 귀신의 세력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괴적이고 탐욕스런 집단적인 가치가 판을 치는 곳에는 인간이 더 이상이 인간이 아니고 없애버려야 할 기생충이나, 하나의 물건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와 내 자신이 이 군대 귀신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늘 분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귀신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회복시키십니다. 진정한 예수의 분별력있는 말씀은 개인의 정신과 시대 정신을 사로잡는 귀신의 세력을 몰아내고 자유함을 얻게 했음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마을 안에 귀신 들린 자
오늘 말씀에서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 또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마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을 안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에 사로잡혀 있을까요? 물질입니다. 돼지 떼들이 바다로 뛰어들어 몰살당하자 돼지 치던 자들은 달려 마을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에게 벌어진 사건들에 대하여 소리칩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왜 떠나라고 했을까요? 돼지 떼가 물에 빠져 모두 죽었으니 또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면 큰 손해를 당할 까 걱정한 것입니다. 경제적 손실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마을에 절대로 들어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마을 안에서 돼지 떼를 기르던 자들이 누구인가요? 돼지고기는 유대인들이 먹지 못하도록 율법에 규정한 것입니다. 돼지 사육도 금지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에게도 돼지는 더럽고 불결한 대명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돼지고기가 이방신전에서 제사고기로 값비싸게 판매되었습니다. 불결한 짐승이었지만 비싼 값으로 팔렸기에 돼지를 길렀습니다. 이 돼지를 기른 사람이 불경건한 유대인이었는지, 이방인들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물질에 사로잡힌 자들의 눈에 예수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병, 어찌보면 인류가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물질주의는 인간을 가장 심각하게 병들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종교개혁 500주년을 위해 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교회는 더욱 물질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3000천 억짜리 교회를 짓고 여전히 분쟁가운데 있는 대형교회를 보면서 교회 안에 있는 물질주의의 극치를 보게 됩니다. 모든 교회의 문제 안에 돈의 문제가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오늘 우리시대가 물질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더 많은 것을 축적하고 쌓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맹신하고, 교회가 그것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질은 인간의 근본토대로서 필요한 삶의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주인행세를 하며 우리의 마음을 잠식하는 순간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마을 안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예수를 찾고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어디에 돈이 있는가가 진정한 물음이자 목표가 되어 버린 세상 한복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리라”
재물이 하나님처럼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같은 위치에서 섬김의 대상으로 비교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 물질이 아름답게 선용될 수 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고귀한 가치로 변할 수 있음을 늘 명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소유의 적음으로도 행복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소유의 많음으로 더욱 겸손하게 나누며 살 수 있는 자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앞에 평화의 길,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마을 안이든 밖이든 어디에서든 사로잡힌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 안과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파괴적이고 탐욕스런 집단적 가치나, 우울과 충동, 부정적 의견과 기분들을 분별하고,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더욱 단단히 묶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