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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가을호를 펴내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하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결합이 다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소외되고, 대립되고, 억압된 자연이 자기의 잃어버린 탕아蕩兒인 인간과 다시금 화해의 제전祭典을 축하하게 된다. 대지는 자기의 선물들을 보내고 암벽과 황야의 맹수들은 유순히 다가온다. 디오니소스의 수레는 꽃과 꽃다발로 지붕을 엮고 그 멍에를 끼고 표범과 호랑이가 걸어간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바꾸어 보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가득 차 먼지 속에 엎드릴 때, 상상력을 버리지 말고 움츠려 들지 말아보라. 그러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싹터 나올 것이다.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이제 곤궁과 자의恣意와 뻔뻔한 작태들이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강한 적대적 거리를 모두가 청산해 버린다. 이제 우주조화의 복음 속에서 각자는 자기 이웃과 결합되고 화해하며 융합되어 있는 것을 느끼는 것 뿐만 아니라, 마치 마야의 면사포가 갈래갈래 찢어져 신비로운 근원적 일체 앞에서 펄럭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며 인간은 스스로가 보다 높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명하고, 걷는 것도 말하는 법도 잊어버린 채 춤추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려 한다. 그가 마법에 감염된 것이 그의 몸짓에 나타난다. 이제 짐승이 말을 하고 대지는 젖과 꿀을 흘리는 것처럼 인간으로부터도 초자연적인 것의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는 자기를 신으로 느끼며, 그가 꿈 속에서 신들이 산책하는 것을 본 것처럼 그도 스스로 감격하여 황홀하게 헤매다닌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며, 그는 예술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원적 일체의 최고의 환희의 만족을 주기 위하여, 전체 자연의 예술적 힘은 도취의 소나기 아래에 자신의 모습을 제시한다. 가장 값진 대리석이 이제 끌에 쪼여 세워지고 디오니소스적 우주예술가의 끌 소리에 맞추어 가장 고귀한 음조가 울려퍼진다. 인간은 엘레우시스 밀의密儀의 외침을 발하는 것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무릎을 꿇는가? 세계여, 너는 창조주를 예감하는가?”
----니체, {비극의 탄생}에서
추천의 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1844년 프러시아 삭손州 뢰켄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그는 일생내내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으로, 모든 가치들의 전복을 기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超人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라고 그가 부르짖었을 때, 바로 그 부르짖음 속에는 ‘신의 사망선고’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그의 반기독교주의와 반형이상학주의, 그리고 그의 반이상주의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가 있는 것이다. 초인은 신을 섬기지 않은 사람이며, 하늘 나라의 이상적인 천국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초인은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인간이며, 그는 이 땅에 두 발을 튼튼히 내리고 있는 짜라투스트라이다. 짜라투스트라(니체)는 칸트 이후 비판철학의 완성자이며, 우리 인간들의 삶의 본능의 옹호자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글은 니체의 처녀작인 {비극의 탄생}이며, 이 {비극의 탄생}은 그의 스승인 리츨에게 받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스승인 니츨은 니체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무상----니체는 대학원을 다니지 않은 것은 물론, 어떠한 박사 학위의 논문을 쓰지 않았는데도----으로 박사학위를 수여했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24세에 불과한 니체가 스위스 바젤대학교의 교수가 되고 고전문헌학 박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스승인 리츨의 은총 때문이었던 것이고, 따라서 니체는 그의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이 {비극의 탄생}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더없이 딱딱하고 재미가 없는 고전문헌학 논문을 마치, 프랑스 소설처럼 아름답고 재미 있게 쓸 수 있었던 니체, 토마스 만이 독일 산문가의 거장으로 제일 먼저 손꼽았던 니체, 이 니체에게 석, 박사 학위의 과정을 생략한 채 대학교수가 될 수 있게 했었던 것은 독일의 교육제도의 위대한 성과였다고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니체가 정식화시킨 예술가의 두 유형이 있는 데, 그 하나가 아폴로 유형의 인물이고, 나머지 하나가 디오니소스 유형의 인물이다.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조형 예술의 신이며, 예언의 신이고, 디오니소스는 포도재배의 신이자 축제의 신이다.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은 우리 인간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하여 눈을 감아버리지만,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인들은 자아를 망각한 존재의 무근거 상태로서, 그러한 고통과 슬픔마저도 풍요롭게 살아가고자 한다.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은 과도함과 지나침을 요구하지 않고 아름다운 꿈과 가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고자 하지만,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인들은 죄를 짓고 죄악을 정당화할 수 있는 황홀한 도취의 세계를 살아가고자 한다.
니체는 아폴로 유형(서사시인)의 예술가 아니라, 디오니소스 유형(서정시)의 예술가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주인도, 노예도,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어른도, 어린 아이도 모두가 다같이 하나가 되는 공동체 사회를 희원했던 것이고, 그 구체적인 예를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짐승이 말을 하고 대지는 젖과 꿀을 흘리는 것처럼 인간으로부터도 초자연적인 것의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는 자기를 신으로 느끼며, 그가 꿈 속에서 신들이 산책하는 것을 본 것처럼 그도 스스로 감격하여 황홀하게 헤매다닌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며, 그는 예술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원적 일체의 최고의 환희의 만족을 주기 위하여, 전체 자연의 예술적 힘은 도취의 소나기 아래에 자신의 모습을 제시한다. 가장 값진 대리석이 이제 끌에 쪼여 세워지고 디오니소스적 우주예술가의 끌 소리에 맞추어 가장 고귀한 음조가 울려퍼진다.”
아아, 어떻게 이처럼,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비극의 탄생}은 27세 때 출간되었다----에 지나지 않는 젊은 청년이 이처럼 아름답고 깊이가 있는 글을 쓸 수가 있단 말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문학이든, 역사이든, 철학이든, 수학이든, 물리학이든, 화학이든, 그 어떤 분야에서이든지 간에, 세계적인 대작가(학자)가 되려면 삼십 대 이전에 그 실력을 쌓아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이십 대 때, 세계적인 대작가의 실력을 쌓아 놓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그 경쟁의 대열에서 탈락한 어중이--떠중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니체를 생각해 볼 때마다 나는 우리 대한민국의 교육제도를 떠올려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오오, 태어나자마자 대한민국의 교육제도의 희생양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이여!
자기 아버지의 살해자 외디프스, 자기 어머니의 남편 외디프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자 외디프스. 이와 같은 운명적 행위의 신비스러운 삼면상三面相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일까? 태고적의, 특히 페르시아의 민간 신앙 하나가 있다. 현명한 마법사는 근친상간에 의해서만 태어날 수 있다는 이 신앙을, 우리는 수수께끼를 풀고 자기 어머니를 해방시키는 외디프스와 관련시켜서 곧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예언적이고 마법적인 힘이 현재와 미래의 속박을 풀고, 개별화라는 불변의 법칙을 깨뜨리고, 자연 고유의 마법까지도 어느 정도 깨뜨려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 단계에서는 그 원인으로서 거대한 非자연적인 사건이----마치 그 이야기 속의 근친상간처럼----선행해야만 한다라고. 왜냐하면 인간이 자연에 거역하여 승리를 거둠을 통해서, 즉 비자연성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인간은 자연이 자기의 심오한 뜻을 밝히도록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이 외디프스의 운명의 저 공포스러운 삼면상三面相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을 나는 보는 것이다. 자연의----저 이중성격의 스핑크스----수수께끼를 푼 사람은 아버지의 살해자이며 어머니의 남편으로서도 성스러운 자연질서를 파괴해야만 한다. 게다가 이 신화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이고 싶어 하는 듯이 보인다. 지혜라는 것, 게다가 바로 디오니소스적 지혜라는 것은 자연에 거역하는 하나의 만행이노라고, 자기의 지혜에 의하여 자연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자는 그 자신의 자연도 해체되어 버리는 운명을 맛보아야 한다고. “지혜의 칼끝은 지혜로운 자에게 향한다. 지혜는 자연에 대한 범죄이다.” 이러한 문구를 이 신화는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니체, {비극의 탄생}에서
추천의 말: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 자신의 삶(철학)을 따르라고 강요하고,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의 삶(철학)을 따르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스승)의 삶이지, 아들의 삶이 아니다. 새시대에는 새로운 삶(철학)을 요구하고, 새로운 삶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게끔 되어 있다. 아버지 살해는 모든 문화의 원동력이며, 따라서, 철두철미하게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만큼 어리석고 우둔한 바보는 없는 것이다.
“지혜의 칼끝은 지혜로운 자에게 향한다. 지혜는 자연에 대한 범죄이다.”
하지만, 그러나, 살부와 근친상간을 범한 외디프스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또한, 어떻게 이 세계와 전인류를 구원해낼 수가 있었단 말인가?
거인의 경지로 드높아 가는 인간은 스스로 자기 문화를 전취戰取하며, 신들에게 인간과 결속하도록 강요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얻어낸 지식을 가지고 신들의 목숨을 수중에 넣고 그들을 규제한다. 그러나 그 기본 사상으로 미루어 보아 불경不敬의 찬가讚歌인 프로메테우스의 노래 중 가장 경탄할 만한 것은 ‘정의’를 향한 아이스퀼로스의 깊은 경도傾倒인 것이다. (......)
거인적 예술가 아이스퀼로스는 인간을 창조하고 올림프스 신들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반항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그의 지혜에 의하여 알아내게 된 바, 그 지혜의 대가로 그는 영원한 고통이라는 것을 받아야 했다. 영원한 고통을 받음으로써도 충분히 그 대가를 치뤄내지 못할, 위대한 예술가의 위대한 능력, 예술가라는 쓰디 쓴 자부심, 이것이 아이스퀼로스의 문학의 내용이자 영혼이다. 이에 비해, 소포클레스는 외디프스 속에서 성자 聖者의 승전가勝戰歌를 연주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스퀼로스가 신화에 대해 내린 저 해석으로도 이 신화의 무시무시한 공포의 깊이가 제대로 측량되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가의 생성의 기쁨, 어떠한 불행에도 굽히지 않는 예술적 창조의 명랑성 등은 비애의 검은 호수에 비치는 밝은 구름과 하늘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의 전설은 아리안계 민족사회의 근원적 재산이며 심오하고 비극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재능에 대한 기록이다. 게다가 이 신화가 아리안 종족의 본질에 대하여 갖는 의미는, 득죄신화得罪神話가 셈 족의 본질에 대하여 갖는 특징적 의미와 같다는 사실과, 두 신화 사이에는 누이와 오빠 사이 같은 친척 관계가 성립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전제가 되는 것은 발전해 가는 문화의 진정한 수호신으로서의 ‘불’에 대하여 원시 인류가 부여했던 엄청난 가치성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자재로 불을 다스린다는 것과, 사물을 태우는 번갯불이나 따뜻한 태양열 등등의 하늘의 선물에 의하지 않고도 불을 얻어낸다는 것은 저 명상적 원시인들에게는 신적인 자연에 대한 모독이며 약탈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철학적 문제의식은 인간과 신과의 사이에 귀찮고 풀 수 없는 모순을 설정하고 이것을 모든 문화의 입구에 하나의 바위덩어리처럼 세워놓게 된다.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최선, 최고의 것을 인간은 모독행위에 의하여 얻어내었고, 이제 다시금 그 대가, 말하자면 홍수 같은 비애와 고뇌 모두를 받아야 하게 되었다. 모욕당한 하늘의 신들은 발전하고자 숭고히 노력하는 인류를 이것을 가지고 괴롭힌다. 이는 매우 신랄한 생각이다.
----니체, {비극의 탄생} 에서
추천의 말:
만일, 불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들은 호랑이나 사자, 또는 풀을 뜯고 있는 사슴이나 양떼들에 지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불은 모든 문명과 문화의 원동력이며, 이 불에 의하여 우리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올림프스 신들만의 귀중한 특권인 불을 훔쳐다가 준 프로메테우스, 그 결과, 카우카소스의 바윗산에 묶여서 제우스의 신조神鳥인 독수리에게 하염없이 간을 쪼아 먹혀야만 했던 프로메테우스----, 바로 이 프로메테우스가 우리 인간들의 ‘문화의 수호신’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일까?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일까? 프로메테우스는 우리 인간들의 상상력의 산물이며, 그는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의 걸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거인의 경지로 드높아 가는 인간은 스스로 자기 문화를 전취戰取하며, 신들에게 인간과 결속하도록 강요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얻어낸 지식을 가지고 신들의 목숨을 수중에 넣고 그들을 규제한다”라는 말이나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최선, 최고의 것을 인간은 모독행위에 의하여 얻어”낸다는 말은, 득죄신화를 옹호하는 아이스퀼로스의 사상적인 신념이기도 했던 것이다.
죄를 짓고 죄악을 정당화하지 않으면 우리 인간들의 삶은 없게 된다.
기획특집: 논쟁의 문화의 장’은 마흔 다섯 번째로 반경환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문장들]과 니체의 {도덕의 계보}의 서문을 내보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문장’들은 세계적인 대사상가(대작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도 저자의 영혼이 살아 있듯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문장’들은 우리 인간들을 살아가게 하는 비옥한 삶의 텃밭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이 비옥한 삶의 텃밭 속에서, 칸트가, 셰익스피어가, 니체가, 소포클레스가, 프로이트가, 생떽쥐베리 등이 탄생했고, 또한, 미래의 대사상가와 대작가들이 태어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의 서문은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글이며, 따라서 우리 한국인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었던 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번 호의 ‘애지의 초대석’에서는 송재학 시인과 황학주 시인, 그리고 애지문학회 회원들을 초대했다. 송재학 시인은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고, 1982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기억들}, {진흙얼굴}, {내간체를 얻다} 등이 있으며, ‘김달진문학상’과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황학주 시인은 1954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고, 1987년 시집 {사람}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 {갈 수 없는 쓸쓸함}, {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저녁의 연인들}, {노랑꼬리 연} 등이 있으며, ‘서울문학대상’과 ‘서정시학작품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송재학의 시 [갈대]와 조재룡의 작품론 [ᄉᆞᆯ어리 ᄉᆞᆯ어리ᄅᆞᆺᄃᆞ Rhythmᄋᆡ ᄉᆞᆯ어리ᄅᆞᆺᄃᆞ], 황학주의 신작시 [이 둥근 별의 수조] 외 4편과 이형권의 작품론 [ 칼끝 위의 둥근 모음]을 다같이 읽고 감상해 주기를 바란다.
‘애지의 초점: 이 시인을 주목한다’에서는 이혜미 시인과 황경숙 시인, 그리고 한보경 시인의 시들을 내보낸다. 이혜미 시인은 2006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고, 황경숙 시인은 2009년 {애지}로 등단했으며, 한보경 시인은 2009년 {불교문예}로 등단했다. 이혜미의 신작시 [보라의 바깥] 외 4편과 김태선의 작품론 [만남을 위한 사라짐의 언어들]과 황경숙의 신작시 [그러는 사이] 외 4편 금은돌의 작품론 [어둠과 빛, 그 경계의 오류], 그리고 한보경의 신작시 [중독] 외 4편과 권경아의 작품론 [시에 중독되다]를 다함께 읽고 감상해 주기를 바란다. 본지는 이번 호에도 [별사과 풍년] 외 9편을 응모해온 김바다 씨와 [사랑의 속도] 외 9편을 응모해온 이시경 씨를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내보낸다.
애지의 기획연재로 정재분의 ‘침묵을 엿듣다’가 더욱더 절찬리에 연재되고 있고, 이번 호부터는 새로운 기획연재로 ‘이순구의 그림을 보다’와 ‘애지문학회 카페에서’를 내보내게 되었다.
지혜사랑 시인선 46번 안정옥의 {헤로인}이 출간되었고, 지혜사랑 47번 양해열의 {영산수궁가榮山水宮歌}가 곧 출간될 예정이며, 그리고 황학주 시인의 새시집이 또한 출간 대기 중에 있다. 강병길의 시집 {도배일기}가 안정옥의 {아마도}와 송수권의 {달궁 아리랑}에 이어서 문화예술위원회의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지난 6월 11일에는 이향란의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과 조영심의 {담을 헐다}에 대한 출간기념회가 이곳 대전 유성에서 조촐하지만, 매우 화기애애하고 따뜻하게 열린 바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필자 선생님들과 독자 여러분들의 뜨거운 성원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고 있다.
비판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비판은 당신의 존재증명이다. 당신은, 누구를, 무엇을 비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