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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숲과 나무 공부를 하면서 다시 읽어 보시면 좋을 것같아 올립니다. 芝山
<나무를 심은 사람> 숲과 문화 1992.제1권3호8-14
장 지오노 지음 . 탁광일 옮김
한 인간의 독특한 성격은 오랜 기간에 걸쳐 그 인간을 관찰할 수 있는 다행스런 기회가 있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극히 희생적이며, 그가 행한 행위에 대해 전혀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물질적 이득을 구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다면, 그는 진정으로 기억 될 만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약 사십 년 전 나는 여행자들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알프스의 높은 산간 지방으로 하이킹에 나섰었다. 그곳은 알프스의 오래된 산들이 프로방스쪽으로 뻗어 내리는 곳이었다. 남쪽으로는 듀랑스 강이 시스테롱에서 미라보까지 흐르며, 북쪽으로는 드롬 강이 원류로부터 디마을까지 흐르고, 서쪽으로는 콩타베네상 평원과 몽방토의 산기슭이 있는 곳이었다. 이 지역은 또한 서로 다른 세 지방의 일부가 함께 만나는 곳이기도 한데, 바스알프스의 북쪽 일부, 드롬강 남부 및 보클루즈의 삼각지가 포함되어 있다.
나의 긴 여정은 해발 천이삼백 미터쯤 되는 곳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곳은 라벤다 외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무미건조하고 살풍경한 곳이었다. 등산로는 이 지방의 가장 넓은 지점을 가로질러 나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폐허가 된 마을 부근에 캠프를 치고 전날 떨어진 물을 보충하러 나섰다. 폐허에 있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마치 오래된 말벌집을 연상하게 했으나, 틀림없이 샘이나 우물이 한때는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짐작대로 그곳에는 샘이 있었으나 말라 있었다. 지붕이 없고 비바람에 낡은 대여섯 채의 집들과 반쯤 허물어진 종탑이 있는 성당이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와 같이 서 있었으나 살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날은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유월이었으나, 황량한 이 고산지대 위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나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골조만 앙상히 남은 집들 사이로 바람이 스쳐 지나칠 땐 그 소리가 마치 먹이를 놓고 싸우는 맹수들의 으르렁거림과도 같았다.
나는 캠프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섯 시간을 걸었지만 물은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물이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갖게 할 만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가나 똑같이 메마른 땅에 거친 잡초뿐이었다. 그러자 먼발치에 작은 검은 물체가 실루엣으로 보였다. 나는 그것이 홀로 서 있는 나무인 걸로 착각했으나 어쨌든 그것을 향해 걸어가 보았다.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양치기였다. 그 곁에는 삼십 여 마리 양들이 뙤약볕을 쬐며 앉아 있었다. 양치기는 그의 물주머니의 물을 한 모금 마시게 해준 다음 평원이 약간 내려 앉은 곳에 있는 그의 목양장으로 나를 인도하였다. 그는 그 위에 간단히 설치한 두레박으로 깊은 천연의 샘으로부터 물을 길어 올렸는데, 그 물은 매우 맑고 깨끗했다.
양치기는 말수가 매우 적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이렇게 삭막한 환경에선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는 통나무집에서 살지 않고 돌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집의 벽을 보니 예전에 허물어졌던 집을 복구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지붕은 튼튼하게 잘 지어졌고 기와에 부딪히는 바람은 마치 해안의 파도 소리와도 같았다.
그의 집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릇들은 잘 닦여져 있어 깨끗했고, 마룻바닥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으며, 엽총은 기름칠되어 잘 손질되어 있었다. 국이 난로 위에서 끓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깨끗이 면도질되어 있었으며, 옷단추는 단단히 바느질 되어 있었고, 그의 옷은 전혀 티가 나지 않게 잘 수선되어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국을 나누어 먹고 나서 담배를 권했더니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개는 그와 같이 조용했으며 아양없이 반가이 나를 맞아주었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는 거의 이틀 동안 걸어가야 하는 관계로, 내가 그날 밤을 그의 집에서 지내야 하는 것은 처음부터 양해가 되었다. 나는 또한 그 마을들의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들 중 네다섯 마을은 마찻길이 끝나는 곳의 산비탈 백참나무 숲 가운데 흩어져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 마을에는 숯가마지기들이 살고 있었으며 매우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과 여름 날씨 아래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이 마을의 가정은 개성과 개성의 끊임없는 갈구가 어떤 때는 광기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남자들은 쉴 새 없이 수레에 숯을 싣고 마을에 나가 팔았다.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라도 그러한 무자비한 생활환경 아래에선 정신분열 상태에 이를 지경이었다.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서로 적대감을 키워 나가면서 모든 것에 대해 따지고 싸웠다. 생산한 숯의 판매에서부터 성당의 의자 가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놓고 싸웠다. 그들은 선의의 또는 악의의 경쟁을 했으며, 또는 선의와 악의의 대립으로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곳에는 항상 바람잘 날이 없었으며, 이 바람은 끊임없이 신경을 건드렸다. 자살은 유행병처럼 번졌고, 많은 미치광이가 생겼으며 끝내는 모두 자살로 이어졌다.
양치기는 도토리가 든 조그만 자루를 가져와, 식탁 위에 수북히 쏟아 놓았다. 그는 그 도토리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검사한 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갈랄 놓았다. 나는 파이프에 불을 붙여 입에 문 다음 그 일을 같이 하겠다고 했으나, 그는 자기가 할 일이라면서 나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그의 일에 기울이는 세심한 주의력을 보니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것이 그날 밤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간 대화의 전부였다.
질 좋아 보이는 도토리가 제법 크게 한 무더기 되었을 때 그는 열 개씩 따로 세는 한편 크기가 작은 것이나 껍질이 갈라진 것은 따로 골라냈다. 이번엔 지난번보다 좀더 세밀하게 검사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흠이 없는 도토리 백 개를 골라내고 나서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니 매우 평화로왔다. 그 다음 날 아침 나는 하루 더 쉬어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것이 매우 당연하고 오히려 전혀 지장이 없다는 인상을 풍겼다. 나는 하루 더 쉬어가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양치기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 그를 좀 더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 그는 양들을 데리고 풀 먹이러 나갔다. 그는 나가기 전 전날 골라 놓은 도토리 자루를 꺼내 물통 속에 담구었다. 나는 또 그가 내 엄지손가락만한 굵기에, 길이는 내 어깨 높이의 쇠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가지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슬슬 바람도 쐴 겸 재미삼아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쫓아갔다. 그는 계곡 아래서 양들을 저희들끼리 풀을 뜯도록 그의 개에게 맡겨두고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걸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의 뒤를 너무 쫓아 뭐라고 할까 봐 걱정이 되었으나 그것은 기우였다. 내가 서 있던 곳은 마침 그가 지나려던 길이었다. 그는 오히려 내가 달리 할 일이 없으면 함께 가자고 권하기까지 했다. 그는 언덕 꼭대기를 향해 좀더 걸어 올라간 다음 가져간 쇠막대기를 땅에 내리꽂아 구멍을 내어 도토리를 심고 흙으로 다시 메꾸었다. 그는 참나무를 심고 있었다. 나는 그가 그 땅의 주인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면서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그 땅이 공유지이거나 성당 소유이거나 아니면 소유권 등엔 관심이 없는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것은 그에게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모든 정성을 다 쏟아 가져간 도토리 백 개를 심어 나갔다.
점심을 먹고 난 후 그는 계속해서 도토리를 심었다. 그가 대답을 선선히 했기에 나는 그에게 궁금한 것을 계속 질문했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삼 년 전부터 이 황무지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동안 이런 식으로 십만 개의 도토리를 심었으며 그 중 이만 개만 싹이 텃다고 했다. 싹이 난 이만여 그루의 묘목 중 반쯤은 작은 동물이나 예기치 못한 피해로 잃어버리게 될 거라고 했다. 그래서 결국 만 그루의 참나무만 황무지였던 곳에서 자라나게 될 거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이 양치기의 나이가 궁금했다. 그는 분명 쉰이 넘어보였다. 그는 쉰다섯이고 이름은 ‘엘지에 부피에’였다. 그는 한때 산 아래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외아들과 아내를 차례로 잃고 이곳 적막강산으로 들어와, 양들과 그의 개를 벗삼아 만족해 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 땅이 나무가 없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장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 문제를 개선해 보기로 작정했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고독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고독한 사람들을 요령 있게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어려서 내 자신의 행복만을 생각했지, 남의 행복 등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들 만 그루의 참나무는 때가 되면 훌륭한 숲이 되겠지만, 그러려면 삼십 년이나 지나야 할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만일 신께서 그에게 삼십 년을 더 살게 해 주신다면, 더 많은 나무를 심어 지금의 만 그루는 백사장의 모래 한 알만큼이나 표도 안 나게 될 것이라고 담담히 말하였다. 그는 이미 너도밤나무의 생장에 관해 연구를 하고 있었고 종자로부터 싹을 틔워 기른 묘목이 가득한 너도밤나무 묘목장을 갖고 있었으며, 양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철사줄로 울타리를 쳐 놓고 있었다. 그 묘목들은 매우 아름답게 잘 자라나 있었다. 그는 또한 계곡의 골짜기엔 표토층 밑에 수분이 많을 것이라면서 자작나무를 심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다음 날 나는 그 곳을 떠났다. 그 다음 해에 1차세계대전이 발발했으며 나는 그 후 오 년간 군에 복무하게 되었다. 보병으로 복무하며 나무에 신경을 쓸 틈이 전혀 없었다. 사실 양치기와의 만남은 그 때까지 내게 별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나는 도토리를 심는 일은 마치 우표수집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취미라고 생각하고, 양치기와의 일은 잊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 군에서 제대하면서 약간의 전역비를 받고 나니,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별다른 목적 없이 그 때의 황무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그 곳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버려진 마을 너머 언덕 꼭대기에 잿빛 안개 같은 것이 융단처럼 깔려 있는 것을 보았다. 나무를 심던 오 년 전의 그 양치기가 전날부터 생각이 났다. 그때 심은 만 그루의 참나무가 지금쯤은 꽤 많이 자라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나는 지난 오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는 걸 보았기 때문에, ‘엘지에 부피에’도 죽었으리라고 쉽사리 상상하였다. 특히 나와 같은 이십 대의 젊은이에겐 오십대 노인은 죽는 길만 남은 고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었을 뿐 아니라 예전보다 더 원기가 왕성했다. 그는 옛날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서른 마리 남짓 되던 양들은 네 마리만 남아 있었고, 대신 백여 개의 벌통을 갖고 양봉을 하고 있었다. 양들이 어린나무들에게 피해를 입혀 양 기르는 일은 포기했다고 했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실제로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은 그가 전쟁에 전혀 방해받지 않고 묵묵히 나무심기를 계속한 것이었다.
1910년에 심은 참나무는 이제 십 년생의 어린 나무로 성장했으며 부피에나 나의 키보다 더 크게 자라나고 있었다. 참나무들이 자란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으며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가 말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침묵 속에서 그의 어린 참나무 숲 속을 걸었다. 그 숲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길이가 십일 킬로미터, 폭은 제일 넓은 곳이 삼 킬로미터나 되었다. 그 모든 것이 기계의 도움 없이 한 사람의 뜻에 의해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룩된 것을 알았을 땐, 인간은 누구나 파괴가 아닌 건설적 행위에서도 신과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의 꿈대로 너도밤나무를 심어, 이제 그 나무들이 어깨높이만큼 자랐고 눈길이 끝닿는 데까지 키작은 수풀을 이루고 있었다. 참나무는 이제 빽빽한 숲을 이루고 튼튼하게 자라나, 더 이상 작은 야생동물의 피해를 염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신의 섭리에 의해 부피에의 창작품이 파괴되어지게 되어 있다면 앞으로 몇 차례의 태풍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만큼 튼튼한 숲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는 내가 1915년 ‘베르둥’ 전투에서 싸우고 있을 때 심은 오 년생의 자작나무 숲도 내게 보여주었다. 그 자작나무 숲은 모든 골짜기를 덮고 있었는데, 그 곳은 이미 그가 지표 근처에 수분이 많을 것이라고 정확히 짐작했던 곳이었다. 그 숲은 자라나는 어린아이와 같이 튼튼하고 생명력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자연은 주기에 따라 차례로 변모하였는데, 그는 그런 것엔 신경을 쓰지 않고 단조로운 그의 작업만을 묵묵히 계속하였던 것이다.
마을을 거쳐 내려오는 길에 나의 생생한 기억엔 항상 말라 있었던 개울에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메말랐던 대지가 소생하는 자연의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였으며, 나는 그렇게 인상적인 자연의 힘을 본 적이 없었다. 아주 먼 옛날엔 이 개울에 물이 흘러 넘쳤었다고 한다. 내가 앞서 언급했던 불행한 마을 중 몇몇은 고대 로마의 취락지였던 곳들인데, 이 곳에서 고고학자들이 폐허를 발굴하던 중 낚시바늘을 발견하기도 했었다. 오늘날엔 얼마 되지 않는 물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물탱크를 써야 할 그러한 곳이었다. 개울에 물이 생기자 바람에 날린 씨들에 의해 버드나무, 갈대가 생겨났고 초원과 꽃밭이 형성되었으며, 이와 함께 삶의 의미도 되살아났다.
이런 모든 변화들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서히 진행되어, 사람들에겐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토끼나 멧돼지를 찾아 이 높은 지대까지 올라온 사냥꾼들은 어린나무들이 갑자기 많이 늘어난 것을 눈으로 보았으나 자연이 변덕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 어느 누구도 부피에가 하는 일에는 개의치 않았다. 만일 사냥꾼들이 그런 변화가 사람이 한 일임을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 방해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것이 부피에의 작품이라고 생각했겠는가.
마을이나 관청의 사람들 중, 그 누가 그같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엄청난 행위를 끊임없이 하는 사람을 상상인들 했겠는가. 나는 1920년 이후 매년 부피에를 찾아갔다. 나는 그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낙담하거나 도중에 그만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부피에의 시련은 종종 신만이 아는 그러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좌절을 상상해 보진 않았으나, 그가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즉 그가 가지고 있는 강렬한 뜻을 성취하기 위해선 절망과 싸워 이겨내야만 했을 것이다. 어느 해인가 그는 일만 그루 이상의 단풍나무를 심었다. 어느 날 하나도 남김없이 깡그리 죽고 말았다. 그 이듬해 그는 단풍나무는 심지 않고 대신 너도밤나무를 심었는데, 참나무보다 더 잘 자라났다.
부피에의 예외적인 성품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고독 속에서 일하며 살아온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고독은 처절해서 그의 인생 말년쯤엔 말하는 습관마저 잃어버릴 정도의 것이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말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1933년 부피에는 어리둥절해진 산림관리관의 방문을 받았다. 산림관리관은 천연림(사실은 부피에가 조림한 것)에 산불이 날까 봐 옥외에서 불을 피우는 것을 금지한다는 통지를 하러 온 것이었다. 산림관리관은 손대지도 않은 산에 저절로 숲이 자라나는 것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순진하게 말했다. 마침 그 당시 부피에는 집에서 십이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너도밤나무를 심고 있던 중이었다. 일흔다섯 살이었던 부피에는 나무 심는 곳까지 왔다갔다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묘목장 근처에다 돌로 탄탄하게 오두막을 하나 지을 생각을 했었는데 그 이듬해 그 뜻대로 실행했다.
이 년 후인 1935년 일단의 관리들이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이 천연림을 보러 왔다. 산림청의 고위관리 한 명, 국회의원 한 명, 몇 명의 기술직 전문가가 그들이었다. 무의미한 대화들이 많이 오고갔다. 결국 무언가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유익한 것은 한 가지밖에 행해지지 않았다. 그 한 가지는 그 지역의 모든 숲을 정부의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숯가마 작업을 금지시킨 것이었다. 그곳의 어린나무들은 왕성하게 잘 자라, 누구도 그 아름다움에 매료당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같이 온 국회의원마저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그 시찰단에 함께 따라온 여러 명의 산림관들 중 한 사람은 나의 친구였는데 나는 그에게 천연림으로 알려진 그 숲이 생겨난 수수께끼를 설명해 주었다. 그 다음 주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엘지에 부피에를 찾아갔다. 부피에는 공식시찰이 행해졌던 곳에서 약 이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산림관 친구는 내게 친구다운 친구였다. 그는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음미할 줄 아는 능력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남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선물로 가져간 달걀을 건네고, 셋이 앉아 함께 점심을 먹은 뒤, 말없이 주위 경관을 감상하며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었다.
우리가 올라갔었던 더 높은 곳의 산비탈엔 우리 키보다 네 배 정도 큰 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이 1913년 당시에는 무척이나 황량했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평화로운 가운데 규칙적으로 일하고, 생명감에 충만한 산의 분위기, 검소한 생활,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화가 이 노인에게 놀라운 건강을 가져다 주었으며 원래 건강한 체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또한 신이 내려보낸 역사(力士)였다. 나는 그가 앞으로 몇 헥타르나 더 나무를 심을지 궁금하였다. 우리가 그곳을 떠나기 앞서 산림관 친구는 부피에에게 그곳 토양에 적합할 것 같은 수종에 대해 작은 제의를 했으나 무리하게 강요하진 않았다. 그 노인이 자기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산림관 친구가 나중에 내게 말했다.
그는 그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었는지 한 시간 정도 거닌 후 “그는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런 것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어” 라고 말했다. 결국 이 산림관 친구 덕분에 그곳의 산림뿐 아니라 부피에의 행복도 보전되었다. 이 산림관은 세 명의 산림순찰원을 임명하여 그 곳의 산림을 감시케 하였다. 그는 숯가마지기들이 제공하는 어떠한 뇌물공세도 뿌리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엄중경고 하였다.
부피에가 심고 가꾼 숲이 한때 중대한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는데, 그것은 2차세계대전 중 발생했다. 당시 자동차는 목탄을 이용한 발전기에 의해 동력을 얻었기 때문에 이를 위한 연료목이 항상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런 사정을 개선키 위해 1910년에 심은 참나무 숲부터 벌채를 시작했었는데, 운반로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관계로 재정상 수지가 맞지 않아 벌목계획 전체가 백지화되었다. 부피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 당시 1914년 1차세계대전 때와 같이 1939년 2차대전때에도 전쟁에 아랑곳 하지 않고 삼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그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부피에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45년 유월이었다. 당시 그는 여든일곱살이었다. 나는 그때 그 황량한 산지를 다시 찾아가고 있었는데, 전쟁으로 인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듀랑스 계곡에서부터 산간지방 안쪽까지 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예전에 걸어다닐 때 마주치던 장소들을 통 분간할 수 없었던 것은 빠른 교통수단이었던 버스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버스가 전혀 새로운 곳으로 우리를 태우고 가는 것 같기도 했다. 마을의 이름을 알고 나서 비로소 그 곳이 한때 방치되어졌던 지역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베르공에서 버스를 내렸다.
내가 엘지에 부피에를 처음 만났던 1913년 당시엔 열두 가구가 채 되지 않았던 이 작은 산촌에 주민이라곤 덫꾼 세 명 밖에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는 야수와도 같았으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원시인이나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쐐기풀에 덮여 방치된 집들뿐이었다. 그들에겐 희망이라곤 없었으며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어서 아름다운 행위를 고무할 만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그 곳의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심지어는 숨쉬는 공기조차 달라져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거칠고 건조한 바람은 사라지고 대신 향기 머금은 감미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꼭대기로부턴 물 흐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것은 바람이 숲 속에서 살랑거리는 소리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진짜 물 소리가 들려왔고 샘물이 솟아 조용히 물거품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감동케 한 것은 그 샘가에 누군가가 보리수 나무를 심은 것이었다. 이제 한 사 년생 정도 되었으며 나뭇잎이 무성하게 나 있었다. 그것은 죽은 생명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였다.
베르공 마을엔 희망이 다시 찾아들었다. 또한 희망이 있어 무언가가 탄생되기 전의 산고와도 같은 것도 엿보였다. 폐허는 말끔히 치워졌고 허물어져 가고 있던 담들은 다 뜯겨져 없어지고 다섯 채의 집들이 그 위에 서 있었다. 이제 이 산골 마을엔 모두 스물 여덟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그 중 네 가구에는 젊은 부부가 들어와 살고 있었다. 새 집들은 이제 막 단장을 끝냈고 집 주위엔 뒤섞여 있긴 해도 채소가 질서있게 자라나고 있는 밭과 뜰이 있었다. 장미와 양배추, 금어초와 부추, 아네모네와 샐러리가 심어져 있었다. 이젠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그러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계속 걸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새 생명이 만개하기엔 일렀지만 죽은 라자로가 부활하듯 새 생명이 소생하고 있었다. 산기슭엔 조그만 보리밭과 호밀밭이 있었으며, 좁다란 계곡 바닥엔 파란 초원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로부터 팔 년 사이에 그 지역 전체에 걸쳐 건강미와 풍요로움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1913년 당시 폐허의 집들이 있었던 곳엔 이제 막 벽칠을 끝낸 깨끗한 농가들이 서 있었다. 행복하고 안락한 삶이 찾아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랫동안 말라 있었던 샘들이 이젠 숲에 의해 함양된 눈과 비에 의해 물이 고이고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단풍나무 숲 속의 농가에는 샘이 있었으며 샘물들이 넘쳐 싱그러운 박하 풀밭 위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마을들은 서서히 재건되어 나갔다. 땅값이 비싼 산 아랫동네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러 올라오면서 그들의 젊음, 활기, 모험심 등도 함께 따라 올라왔다. 길에선 생기발랄한 남녀들과 웃음소리 가득한 소년 소녀들을 볼 수 있었으며, 모두들 산간 지방의 순박한 생활의 기쁨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크게 달라진 옛 주민들과 새로 정착한 사람들을 합쳐 모두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엘지에 부피에에 의해 이룩된 행복에 감사하고 있었다.
사막과 같은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단지 한 인간의 몸과 마음만으로 충분했음을 생각할 때, 나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경탄할 만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엘지에 부피에는 1947년 바농의 한 요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
작가 장 지오노(Jean Giono, 1895 ~ 1970)는 프랑스 남부 프로망스 지방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은행원으로 18년간 일하다 1929년 첫 작품을 발표한 후, 앙드레 지드의 즉각적인 후원에 힘입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장 지오노는 앙드레 말로 등 당대의 손꼽히는 대표적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1954년엔 콩쿠르 문학상을 수여하는 아카데미 콩쿠르의 10인 위원 중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전쟁과 복잡한 도시생활을 거부하고,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그의 작품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또 ‘나무정치학’의 개척을 주장했으며 식목 권장은 그의 생애의 가장 중심되는 테마가 되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1953년 미국의 한 출판사가 장 지오노에게 평생 만난 사람 중 잊을 수 없는 인물에 대해 써 달라고 하여 쓴 것인데, 출판사의 조사 결과 바농에 <엘지에 부피에>란 인물이 산 적이 없음이 확인되어 출판이 거부되었다. 1년이 지난 후 1954년 미국의 패션 잡지인 ‘보그’(Vogue)지에 ‘희망을 심고 행복을 가꾼 사람’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지오노는 추후 엘지에 부피에 이야기를 만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무 심기를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최소한 12개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식목운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숲과문화제 1992.1권 제3호 8-14)
첫댓글 프레데릭 벡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생각납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파스텔화인듯 스케치인듯 묘사한 유려한 풍경. 터웨이(特偉)의 수묵 애니매이션만큼이나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장 지오노의 원작이 물론 좋으니까 애니도 성공을 거둔 것이겠지만 벡의 작품도
도로 다루어져야 할만큼 훌륭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영상도 많으니 한번 찾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린 날, 정부의 사방사업으로 집집마다 부역을 한다고 어른들을 따라서 깊은 산에 나무를 심으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만 해도 지금같은 푸른산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어딘가에 나만의 올곧은 나무 한 그루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해봅니다.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는 글...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