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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2월 8일 강화도령 철종이 승하한다.
더욱이 철종이 재위 14년 만에 후계자도 없이 서거하게 되자 조야(朝野)의 관심은 모두 왕위 계승에 집중되었다.
철종에게는 세자가 없었으며 왕실의 중심 인물도 외척 세력에게 박해를 받아 유능한 사람들이 자취를
감춘 후여서 왕위 계승 문제에 더욱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당시 막강한 세도정치를 휘두르던 안동 김문이 무너지고 권력이 이동하는 순간이다.
철종을 허수아비로 내세워 최고의 실세를 군림하던 안동 김문로서는 철종의 사후를 대비치 못한 것이다.
김동인는 <운현궁의 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그렸다.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 창덕궁 희정당 대왕대비 어전회의,
발 뒤에는 오늘의 절대 권리자 조 대비가 여관 여섯 명을 거느리고 임하였다.
순원 왕후와 대행 왕비 두 분, 김씨의 일문을 대표하는 김좌근 김병기 김병필 김병학
김병국의 모든 김족이며,헌종비 홍씨를 대표하는 홍순복이며 원로로 정원용 조두순 등,
그 밖에 홍안 소년 한 사람이 끼여 있는 것이 이채였다.조대비의 조카 성하였다.
몸은 한 개의 승후관에 지나지 못하나 오늘의 최고 권위자인 조 대비의 조카이며
흥선과 조대비에게 중대한 역할을 맡은 성하는, 대비 임어와 함께 대비의 뒤를 따라 들어온 것이다.
같은 외척이요, 헌종의 외사촌 동생이요,종실의 어른 조 대비의 조카로되,김씨 일문의 세력에
눌려서 겨우 승후관 한 자리로 명맥을 보전하여 오던 성하는 오늘은 조 대비의 일족을 대표하는
당당한 척신의 한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임한 것이었다.
"대왕대비전 마마,막중막대한 일이옵니다.마음에 계시오신 대로 하교해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원상 정원용이 끓어엎드려 아뢰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노파, 먼저 원로 대신들의 의견을 들읍시다."
<중략==========중략============중략================중략============중략====중략>
이번에 조두순이 아뢰었다.
"대왕대비전 마마, 이 일은 신들의 의향뿐으로는 결정하지 못할 중대한 일이옵니다.
마마의 심중에 계신 대로 하교해 주시옵기 바라옵니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잠시 있다가 겨우 입을 연 때는 오십이 훨씬 넘은 대비의 얼굴에도
약간의 붉은 흥분이 돌았다.이제는 수속상 대신들의 의향도 물었는지라 남은 것은
대비 당신의 의향을 말할 과정이었다. 말을 꺼낼 때는 대비는 음성조차 약간 떨렸다.
"대신들의 의향이 그러니,그럼 내 뜻을 말하리라.국정이 어지럽고 조정의 권위가 떨어진 지금,
한때도 국왕 없이는 지내지 못할 테니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재황이를 익성군으로 봉해서
이미 절사된 익종 대왕의 대통을 부활하게 하도록 하시오."
청천의 벽력이었다. 순서를 따지자면 대신들의 의향을 내고 대비는 단지 그 결정만 할 것이거늘,
여기서 대비는 나아가서 그 승통자를 지정한 것이었다.더구나 그 지정이 다른 사람도 아니요,
종실 친척 중 가장 영락되어 사람의 대접을 받지도 못하는 흥선군의 아들이었다.
대신들 가운데 감정의 동요가 분명히 일어났다.그것을 대표하여 김좌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왕대비전 마마,흥선군은 대행왕 전하의 육촌 백씨로서 그다지 먼 종친은 아닙지만
그 집안이 워낙 영락돼서 임금의 친가로서는 혹은 좀 부적당하지 않을까 하옵니다."
이 말에 대하여 대비가 대답하기 전에 가로뚫고 나선 것은 조성하였다.
격식으로 말하자면 대신들의 의논에 어디 뛰쳐들 자격이 못 되지만,
오늘의 중대한 역할을 맡은 성하는격식을 무시하고 뛰쳐들었다.
"영상 합하!"
어디 감히 부르지도 못할 명사를 부르면서 성하는 한 무릎 앞으로 나왔다.
"재산이 없으면 가정이 영락되는 것은 정한 이치,영락되었다고 그 사람의 본질까지 더러운 바가 아니올시다.
대행왕 전하께서도 본시 강화에서 한 미천한 생활을 합신 일은 대감도 모르시는 바가 아니겠습니다.
흥선군의 둘째 도령으로 만약 왕자의 그릇이 못 된다 하면 모르거니와,생활이 영락되었으니 좋지 못하다는 것은
일국의 수상의 말씀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대담한 말에 얼굴까지 검붉게 하고 성하를 노려본 것은 하옥 김좌근의 아들 병기였다.
"여보!"
'이놈'이라 부르지 않은 것은 병기의 최대 관용이었다.
"당신은 웬 사람이기에 이 좌석이 무슨 좌석이라고 외람되이 주둥이를 놀리오?"
"나 말씀이오?"
이때의 성하는 벌써 소인이 아니었다.
"나도 대감네들과 마찬가지로 외척의 한 사람."
"외척?외척이라도 이 좌석은 대비전 마마와 재상들이 중대한 의논을 하는 좌석, 잡인이
섞이지 못할 좌석이니 냉큼 나가오."
그러나 성하는 대척하지 않았다.
"나도 대비전 마마의 분부로써 오늘 이 좌석에서 한 마디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오."
차차 격론으로 되어 가려는 것을 발 안의 대비가 말렸다."
풍양 조씨의 조대비는 조카 조성하와 함께 안동 김씨를 밀어내고 흥선군의 둘째 명복이를 왕으로 결정한 것이다.
천하의 안동김문이 흥선군과 조 대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홍안의 소년' 조성하 앞에 처절하게 무너지는 순간이다.
김동인은 그 모양을 실감나게 묘사한 것이다.
흥선군 이하응은 지금의 헌법재판소 재동 조성하 집을 자주 찾아 철종 사후를 준비하고 조 대비에게
여러번 보고 확인한 내용을 이날 희정당에서 발표한 것으로 소설은 전하고 있다.
흥선군은 원로 정원용이나 조두순과도 의견 조율을 이미 거친다.
이들은 조성하와 안동 김문과의 막판 논쟁이 절정에 이를때 성하의 손을 들어줘
흥선군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다.
그는 일찍이 궁도령(宮道令)이라 별명을 부를 정도로 부시해 오던 몰락한 왕족에 불과하였다.
일반 정계에서도 장안의 부랑자로 취급해 왔기 때문에 장래 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우려하지 않았다.
이하응은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으로 왕권과 그다지 가까운 왕족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영조에서 이어지는 왕가의 가계에 편입된다.
그러나 당시 세도가인 안동 김씨는 왕의 재목으로 보이는 왕족들을 끊임없이 견제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야심 없는 파락호를 자처하고 ‘상갓집 개’라는 치욕적인 별명까지 얻으며
세도가들의 눈을 피한 이하응은 조대비와 연줄을 대어 자신의 야망을 이룰 기반을 마련한다.
북촌 재동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송이 있다.
조대비의 풍양 조씨는 영조 때 유명한 재상 학당 조상경(鶴塘 趙尙絅 1681년~ 1746년)이
북촌 재동 현재 헌법재판소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는 병조판서를 네 차례 이조판서를 다섯 차례 지냈다.순국한 조동범 등이 있으며, 현재 활약중인 바둑계의 천재기사 조치훈과 조순 전부총리도
이 가문에서 배출된 인물이다.
순조19년(1819년)에 그 조씨 집안에 다시 커다란 경사가 생긴다.
조만영(趙萬永)의 12살짜리 어린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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