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수퍼들, '대기업 수퍼' 맞서 힘겨운 버티기
아무리 싸게 팔아도 밤새도록 문 열어도 손님 뚝, 매출 반토막…
"정(情) 넘치는 동네 사랑방이 악물고 버텨야지"
[기사인용; 조선일보; 09.7.10]
장맛비가 주택가 골목길을 두드렸다. 9일 오전 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인근 '장흥할인마트'. 이 동네에서만 35년째 장사해온 주인 손정임(61)씨가 132㎡(40평) 남짓한 가게에 앉아 수심에 찬 낯으로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비까지 퍼붓네."
참외와 자두가 달콤한 향기를 뿜었다. 찬거리와 과자, 냉동식품과 술안주, 주방잡화와 각종 음료가 진열대와 냉장고에 가지런히 올라앉아 있었다. 상품마다 값을 깎아준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500원짜리 초콜릿에는 '3개 1000원', 700원짜리 초콜릿에는 '2개 1000원', 3000원짜리 초콜릿에는 '1개 2200원' 하는 식이다. 그런데도 손님은 한 시간에 두어명 꼴이었다.
주인 손씨는 "지난 5월 근처에 대기업 수퍼 체인이 생긴 뒤 한달 매출이 35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뚝 떨어졌다"며 "밑질 것 각오하고 일부 상품 값을 깎아주며 호객을 하는데도 단골들마저 차츰 그쪽으로 옮겨가 얄밉고 야속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골목길마다 하나씩 있던 동네 수퍼들이 허덕이고 있다. 동네 수퍼의 악전고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 대형 할인마트가 전국에 문을 열면서 동네 수퍼의 입지는 차츰 좁아져 왔다.
그럼에도 본지 취재팀이 만난 동네 수퍼 주인들은 "힘들다 힘들다 했지만 요즘은 그야말로 막판에 몰린 느낌"이라고 했다. 발 디딜 곳이 송곳만큼 좁아져 숨이 턱에 차는 듯한 기분이라는 것이다.
동네 수퍼를 옥죄는 것은 대형 할인마트를 운영해온 굴지의 유통업체들이 속속 골목길에도 '작은 가게'를 열고 있는 까닭이다. 대형 할인매장 홈플러스를 운영해온 삼성테스코는 2004년 수퍼마켓 규모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4곳을 열고 동네 수퍼 시장에 뛰어들었다. 삼성테스코는 현재 전국에 156곳을 운영 중이다. 롯데마트를 거느린 롯데그룹은 아예 '롯데슈퍼'라는 독립 회사를 만들어 2001년부터 지금까지 전국 130여곳에 수퍼를 열었다. 경쟁업체들이 속속 골목길 시장에 뛰어들면서 이마트를 운영해온 신세계도 지난달 30일 수퍼형 매장 '이마트 에브리데이' 1호점을 서울 상도동에 열며 골목길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신세계는 연말까지 비슷한 점포 6~7곳을 더 낼 계획이다.
동네 수퍼 주인들은 대기업을 경쟁자로 맞아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전망이 어둡다"고 아우성이다. 영업시간을 연장하고, 물건값을 깎아주고, 배달 서비스에 나서고, 은행 빚을 얻어 가게 규모를 넓혀도 도무지 손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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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의 한 아파트단지에 있는 지하 수퍼마켓이 20% 할인행사를 하고 있다. 이 가게는 주변에 대기업 계열 대형 수퍼마켓이 들어온 이후 매출이 떨어져 점포를 정리하기로 했다./박동주 인턴기자(중앙대 사진과 3년)
대기업의 수퍼 체인들은 '적립 포인트제' '무료배달 서비스' '균일가 상품전' 등 각종 판촉행사를 대대적으로 열며 손님들을 끌어모은다. 베이커리, 정육, 생선코너 등을 깔끔하게 꾸미고 조명도 밝아 마치 고급 백화점에 온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가족 경영 체제의 조그만 동네 수퍼로서는 대기업 수퍼 체인을 당해낼 수 없는 상황이다.
경기도 수원 매탄동에서 14년째 'OK마트'를 운영 중인 정성용(57)씨도 지난 2월 근방에 유명 할인점 직영 수퍼마켓이 문을 연 뒤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달 매출이 100만원 이상 뚝 떨어졌어요. 대기업들이 꼭 구멍가게까지 해야 해요? 대기업이 서민들 먹고살 10원짜리 동전 한 닢까지 저인망으로 쓸어가는 것 같아요."
정씨는 "우리 가게 근처 대기업 수퍼측으로부터 '가게를 팔라'는 제안이 와 자존심이 상했다"며 "끝까지 버틸 생각이지만 가슴은 답답하다"고 했다.
인근 아파트 주민(48)은 "대기업 수퍼가 들어온 뒤 오래된 동네 수퍼 2곳이 문을 닫아 안타깝긴 하다"며 "그래도 대기업 수퍼에서 장을 보면 포인트 카드를 적립해 같은 계열사의 대형 할인매장에서 쓸 수 있어 주부들로선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동네 수퍼들 연합체인 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는 "대기업이 동네 수퍼까지 해선 안 된다"며 "대기업이 골목길에 수퍼를 낼 수 없도록 제도적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대기업 수퍼체인들은 "대형 할인매장 시장이 포화상태인 만큼 우리도 생존을 위해 새로운 사업 영역을 찾지 않을 수 없다"며 "대기업이 동네 수퍼를 열면 동네 사람들이 멀리 나가지 않고도 깔끔한 환경에서 포인트 카드를 적립하며 쇼핑할 수 있어 소비자들에게도 이익"이라고 했다.
정부는 어느 쪽 손도 선뜻 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지식경제부 유통물류과 김종호 과장은 "면적 3000㎡(약 900평) 이하의 수퍼는 관할 세무서에 알리기만 하면 자유롭게 개·폐업할 수 있는 업종이라 실제 동네 수퍼들이 얼마나 줄고 있는지 실태를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시장 경제 체제에서 정부가 기업들의 활동을 시시콜콜 간섭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골목길 수퍼들이 먹고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해주는 것이 전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도움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숙명여대 경영학부 서찬주 교수는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대기업이 지역 전통 상권을 붕괴시키지 않도록 일정 규모 이상의 유통업체는 동네 수퍼를 열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며 "우리도 대기업과 동네 수퍼의 공생을 위해 유럽 사례를 응용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온종일 한산하던 낙성대역 인근 '장흥할인마트'는 저녁 무렵부터 손님이 들기 시작했다. 주인 손씨의 굳은 얼굴이 조금 펴졌다.
손씨는 "남들 보기엔 작은 구멍가게지만 나는 이 가게로 3남매를 키웠다. 아침엔 기운이 쭉 빠졌다가도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저녁이면 다시 힘이 솟더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