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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 귀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대한제국의 첫 퍼스트래디였다.
고종을 경복궁에서 가마에 태워 정동 러시아공관으로 파천시킨 그 드라마의 주역이었다.
창덕궁과 경복궁 시절의 고종시대 고종 곁을 지킨 여인은 명성왕후 민씨이다.
엄 귀비는 명성왕후가 1895년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후 경복궁으로 돌아와 고종을 지근거리에서 섬겼다.
소설가 송우혜의 소설 '못생긴 엄귀비의 천하'를 통해 고종의 정동시대가 개막되는 순간을 살핀다.
1896년 2월 11일 하늘이 아직도 어둑한 늦겨울의 새벽
밤새 얼어붙은 공기가 코 끝에 맵게 달라 붙는데 "삐걱!" 하며 경복궁 동쪽 대문인 건춘문(建春門)의
우람한 대문이 조금 열리더니 두 대의 궁궐 가마가 살며시 빠져 나왔다.
무뚝뚝한 얼굴의 수문장 손으로 커다란 대문이 도로 닫힌 뒤 경복궁은 다시 고요한 어둠 속에 잠겨 들었고
수행원이 전혀 딸리지 않은 단촐한 두 대의 가마를 멘 가마꾼들은 일체의 소리를 죽인 채
도성의 남쪽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조선의 통치자인 고종과 그의 후계자인 황태자 (후일, 순종)가 두 대의 가마에 앉아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서
경운궁 뒷편 정동에 있는 아관(俄館)으로 탈출한 것이다. 이 사건은 엄청난 굉음으로 세상을 갈랐다.
아관파천은 엄 귀비가 러시아 공관과 친러파와 친미파와 은밀하게 연결하며 계획하고 실행했던 대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896년 정동시대 고종을 곁에서 모신 엄귀비를 조선의 막강한 실력자로 변신시킨다.
"뱃심이 강하고 정치감각이 뛰어난 엄상궁이 있어 아관파천은 가능했다."
엄상궁은 아관파천의 추진을 맡아 실행해낸 실무자이자 성공의 일등공신이다.
엄상궁은 평민 출신인 엄진삼(嚴鎭三)의 딸로 태어나 5살이 되던 해에 아기 나인(內人)으로 입궐하게 된다.
왕후인 민비(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그의 시위상궁으로 발탁되었다.
시위상궁이란 사가로 말하면 몸종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그 궁녀 엄상궁이 고종의 침소에서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왔다.
대궐 안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궁녀가 왕의 승은을 입게 되면
그 사실을 대궐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는 것이 관행이었다.
처음에는 궁궐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엄상궁은 못생기고(얼꽝) 뚱뚱한 외모(몸꽝)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나이 32살이었고 고종보다도 7살이 많은 나이이었다.
당시의 평균수명이 50살 정도 그리고 조혼 풍습이었음을 고려하면
그녀는 늙은 축에 들었던 여인이었다.
고종의 정비(正妃)이었던 명성황후도 믿지 않다가 끝내는 분노에 치를 떨게 되었다.
자신의 몸종이나 다름없던 시위상궁인 주제에 더구나 늙고 못생겨서 왕이 탐을 낼 까닭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가까이에 두었다.그런데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민비는 얼마나 분노했던지 자신이 직접 매를 치려고 형틀을 차리라는 명령을 내렸을 정도이었다.
아마 차라리 자신보다 어리고 예쁜 여자이었다면 민비의 분노는 덜 하였을지도 모른다.
가까이 두고 있는 늙고 못생긴 엄상궁을 남편인 고종이 건드렸다는 것은
엄상궁에 대한 배신감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마저 크게 상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결국 엄상궁은 궁궐 밖으로 쫒겨 나왔다. 그러나 이것으로 고종과의 인연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엄상궁이 궁궐에서 쫒겨나와 10년이 흐른 1895년 10월, 일본의 폭도들이 대궐에 난입하여
한 나라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다.
명성황후의 살해 후 5일만에 고종은 엄상궁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다.
엄귀비가 궁에서 쩢겨 나간 후 10년동안 고종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엄귀비는 다시 궁궐로 돌아와 고종의 수발을 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보답이나 하듯 아관파천에서 웬만한 군사 전문가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고도의 전략가적 자질과
담력으로 사건을 성공시켰다. 엄상궁은 거사 며칠 전부터 심복 궁녀를 대동한 두 채의 가마로 거들먹거리면서
건춘문을 무시로 드나들어 수비병들의 눈에 익게 한 뒤에 바로 그 두 채의 가마 안에 임금과 왕태자를
나누어 모시고 앉아서 태연하게 궁궐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당시 엄귀비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친러파와 친미파 인사들과 연결하여 대사를 결행한 것이다.
성사된 결과 궁중 최고의 권력자가 된다.
엄귀비는 상궁의 지위에서 1897년 10월20일 러시아 공사관에서 건강한 아들을 낳았으니
곧 뒷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된 이은(李垠 후일 영친왕)이다.
아들 이은을 낳아 귀인(貴人)에 책봉되고 선영(善英)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900년에 순빈(淳嬪),순비(淳妃)를 거쳐 1903년에 황귀비(皇貴妃)로 진봉되어 경선궁(慶善宮)에서 살았다.
그리고 사망 후 이왕직장관이던 민병석의 제청으로 시호(諡號)를 순헌(純獻)으로 정하였다.
황제의 아들을 낳은 그녀는 나중에 궁중 내전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황귀비(皇貴妃)로 책봉되어
약칭 ‘엄귀비(嚴貴妃)’라고 불리면서 국모의 역할을 수행했다.
엄귀비의 죽음 역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엄귀비의 아들 영친왕은 조선총독 이토오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 황실에
볼모로 잡혀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엄귀비는 자신의 소중한 황태자 아들인 영친왕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겪기 힘든 훈련을 받는 도중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는 광경을 고종과 함께 대궐에서 활동사진(영화)로 보다가 얼마나 애통하였던지
입에 물고 있던 떡에 급체하여 이틀 후에 갑자기 죽었다. 그녀 나이 58세이었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실제는 장티푸스로 죽었다고 기록한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가 편찬한 기록이라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 기록에 의하면 순종 4년 7월23일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영친왕은 급거 귀국하지만
일제는 장티푸스로 죽어서 시신(屍身)을 보면 안된다고 접근을 막아버려서
영친왕은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도 보지 못하였다.
홍릉 일대로 장지를 정하고 죽은지 열흘 뒤인 8월2일 엄귀비의 상여가 대궐을 출발하자
고종과 영친왕은 영성문밖에서 통곡을 한다. 그날 엄상궁은 영휘원에 잠들게 되고
장례를 마친지 3일 후인 8월5일 영친왕은 일제의 재촉으로 다시 도쿄로 떠났다.
엄상궁은 생전에 모은 재산으로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는 교육에 큰 도움을주었다.
특히 여성들의 신교육을 위하여 진명여학교와 명신여학교(후에 숙명여자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양정의숙(양정의숙 양정중고등학교)이 재정난에 허덕이자 당시로서도 거금이었던 200만평의
땅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엄귀비가 있었기에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공관으로 탈출할 수 있었고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대한제국을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만방에 내세울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한다.
엄귀비는 정동시대 든든한 지원자이면서 아내로 고종을 지근거리에서 충실하게 모신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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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좋은 글과 사진 잘 보고 잘 읽고 갑니다. ^*^
잘읽었어요.감사합니다!
엄귀비가 1897년 10월 20일 러시아 공사관에서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고 하셨는데...
1897년 10월 14일 대한제국 선포일 1897년 2월 고종께서 인화문으로 해서 경운궁으로 오셨는데
엄귀비 혼자서 러시아 공사관에 남아 아들을 낳았을까요?
경운궁에서 아이를 낳았을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