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나눈 우정
최 화 웅
어느 날 친구와 나는 갓 난 친구의 아들 불알을 한쪽씩 나누어 갖기로 했다.
그 아들과는 성이 다르고 내 가족관계기록부에 등재되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한 지붕 밑에서 살지도 않는다. 어느 한 곳 닮은 곳이라고 찾아볼 수가 없다. 이름 하여 반쪽 아들이다. 서글서글하게 잘 생긴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건장한 모습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지금은 해운회사의 대리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청년이다. 올해로 33살이 된 그는 이제 장가를 보내야할 성숙한 나이가 되었다. 그는 1979년 8월 9일 저녁 8시가 좀 지나서 메리놀병원에서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고 세상에 나왔다. 그의 이름은 회강이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의 일이다.
세월은 참 빠르기도 하지. 1979년 8월 5일 부산수산대학 어촌민속연구회원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해 실습선 관악산호를 타고 먼 뱃길 따라 거가도로 떠났다. 사라져가는 낙도의 무형문화유산을 발굴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동료기자 정동길이 만삭의 몸이 된 아내 정임을 홀로 남겨놓고 소흑산도로 동행취재를 떠나게 된 것이다. 정 기자가 취재를 떠나기 며칠 전 퇴근길에 만나 정종 잔술로 유명했던 중앙동 항구센터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서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멀리 취재를 떠나야 하는 심사를 전해들은 나는 술김에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말고 다녀오라.”고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그 말이 씨가 되어 며칠 뒤 새벽 5시가 가까운 시각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기에서는 정 기자의 부인 정임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밤새 진통을 참으면서 먼동이 트도록 기다렸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광안리에서 양정으로 달려갔다. 진통하는 산모를 부축해 메리놀병원으로 향했다. 산모를 분만실로 들여보내고 수속을 밟는 과정에서 직원이 나에게 “이정임씨 보호자가 누구요?”라고 불러 세우고는 위급한 상황을 대비한 서약서에 서명을 하라고 다그쳤다. 내가 서명을 하기 시작한 이후 친구의 아내에 대한 생명을 책임질 서약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 손이 무척이나 떨렸다. 정임은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참 간도 작디라...”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그런 과정을 거쳐 회강이는 태어나고 나는 몇 차례 산고를 치른 산모들이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채 누워있는 병실과 새 생명의 울음 가득한 신생아실을 들락거리며 산모와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동길이 경남고등학교에 다닐 때 월래역에서 동해남부선 통근열차을 타면 버릇처럼 고개를 차창 밖으로 길게 빼고 두리번거렸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남여고에 다니는 정임이 일광역에서 타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꿈같은 고교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동길이 기자가 되어 방송을 타면서 서울에 살던 정임에게 소식이 전해져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숙직을 같이 하는 날이면 정 기자는 일찍이 메트리스를 깔고 누워 이불 속으로 전화기를 끌어넣고 밤새는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였다. 결국 기차통학으로 인연이 된 그들은 부부가 되어 슬하에 두 아들을 둔 단란한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이다. 같은 해 아홉 달 간격으로 입사한 우리는 형제 같은 친구로 지냈다. 둘은 대학을 다닐 때 당시 동아대학교 불어강사로 출강하던 김춘방 시인의 벨모르 도서관과 클래식만 고집하던 오아시스 다방을 열심히 드나들면서 차비도 한 푼 남기지 않은 채 막걸리를 퍼마시곤 했다.
내가 입사한 1971년 겨울 어느 날 동길이 좌천 집에 가자는 것이다. 어머니께서 황구를 잡았으니 같이 와서 먹고 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우리는 부산진역에서 동해남부선 통근열차를 탔다. 송정을 지날 무렵 귀에 대고 모니터를 하던 소형트랜지스터라디오로부터 만화리 고개에서 시외버스 교통사고가 발생했다는 긴급뉴스를 듣게 되었고 우리는 사고현장으로 가기 위해 기장역에서 내렸다. 한참을 걸은 뒤 현장이 가까워지자 나뭇가지에는 숨진 승객들의 옷가지가 빨래처럼 늘렸고 피비린내가 진동할 만큼 인명피해가 큰 사고였다. 자정이 넘도록 취재한 기사를 송고하고서야 기차가 끊긴 텅 빈 철길 따라 기장에서 월래까지 침목을 밟으며 걷고 또 걸었다. 칠흑같이 어둡고 추운 밤 나란히 따라오는 31번 국도와 건너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해풍이 허기진 몸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검정물들인 군용 야전점프에 두 손 깊숙이 넣은 채 밤길을 걸으며 그림 같은 지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 정임과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낱낱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회강의 아버지, 동길과 나는 그렇게 젊은 날을 보냈다.
동길이 가거도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날.
취재뒷이야기를 듣는 자리에서 어촌민속발굴에 동행했던 애살 많기로 유명한 방송기자 출신 강남주 교수는 “소흑산도가 우리나라 국토의 최서남단에 자리 잡고 있어서 조용한 새벽이면 바다 건너 대륙으로부터 닭 홰치는 소리가 들렸어”라는 새빨간 거짓말로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강 교수로부터는 남해안과 서해안 도서지방에 남아 있는 ‘초분장(草墳葬)’의 전통과 멸치잡이 소리 등 어로요 채록에 얽힌 귀한 어촌민속발굴체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소흑산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리에 있는 섬이다. 기암괴석이 남성적인 웅장함을 자랑하는 해발 639m의 독실산이 우뚝 솟아있는 섬 전체가 소흑산도다. 이 섬의 이름은 일제 때 붙여진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 원래 이름은 ‘아름다운 섬’이라는 의미로 아름다울 가(嘉)자에 살 거(居)자로 嘉居島라고 불렀다가 그 뒤 ‘가히 살 만한 섬’이라는 의미로 可居島라고 불렀다고 한다. 가거도는 목포로부터 145Km, 제주로부터는 148Km의 거리를 두고 있으며 중국대륙으로부터는 약 300Km 떨어진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했던 일제 말기에는 일제가 가거도를 군사기지로 썼는데 아직껏 방커가 남아있다. 가거도는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늦게 지는 곳으로 낙조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으로 뱃사람들은 서해와 남해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라고 말한다. 정 기자의 현장르포로 서해의 외로운 섬, 가거도가 부산과 경남일원에 소상하게 알려지게 되었고 나는 덤으로 홍어회 맛과 함께 한쪽 불알만 차고 온 반쪽 아들을 얻게 되었다.
그 일이 있고난 뒤 술자리에서 나의 제안으로 회강의 오른쪽 불알은 동길이가 왼쪽 불알은 내가 갖기로 한 현대판 솔로몬 판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요즘도 가족끼리 어울리거나 회강이를 만나면 어디서나 왼쪽 불알을 가리키면서 거침없이 “이거 내꺼지!”하면 “예, 명심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좌중을 한바탕 웃긴다. 멀쩡한 친구의 아들에게 ‘왼쪽 불알은 내꺼’ 라고 하는 말이 때로는 생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흐르는 세월과 함께 반쪽 아들을 얻게 된 사연은 살아온 날을 돌아보게 하고 앞으로 살아갈 길을 비춰주는 것 같다. “정형! 우리말이다. 내년 봄쯤 회강이가 장가가기 전에 셋이서 대륙으로부터 닭 홰치는 소리가 들린다는 가거도 독실산에 올라 우리의 삶과 우정이 출렁이는 그 바다를 아들의 눈으로 함께 보자.”
첫댓글 참 특이한 추억을 갖고 계시는군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묵상 해봅니다, 우리의 삶과 우정,,,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진정한 수필가이신 선생님 글은 성모님카페를 환하게 해 주신답니다!
정겨운 글 웃음 속에서 잘 읽었습니다...^^*
곱게 간직하신 정겨운 사연이 출렁이는 바다같이 살아 움직입니다. 좋은 글 잘~보았습니다.
저의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께 부디 천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항상 함께 하옵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