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멜로드라마의 문화적 컨텍스트 읽기
'맨발의 청춘', '남과 북', '애수','사랑할 때와 죽을 때', '상하이부르스'
윤보협(영화연구가/동국대 영화과 박사과정 수료)
멜로드라마의 주제는 '사랑'이다 그 사랑이 모성애이건 이성애이건 그것은 숭고하고 운명적인 희생과 관련되어 있다.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과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회가 미리 마련해 놓은 자리'와 갈등 관계에 처하여, 소극적으로 저항하고 현실적으로 타협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유행가 가사처럼 미련만 남겨둔 채 떠나야만 한다. 이렇게 멜로드라마는 대중가요처럼 우리네 인생을 과장해서 감정에 호소하기에 언제나 사랑 받는 장르로 남아있는 것일 것이다. 장르.
관객이 장르영화에 익숙해지는 것은 그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 때문이 아니라 '특정한 유형의 행위 및 캐릭터와 연관된 드라마 상의 갈등'과 결말을 인지하는 것에서 누적된다. 멜로드라마에서 '갈등'은 언제나 주인공-보통 여자나 연인-과 억압적이고 부조리한 문명 사회 사이에서 전개되며, 결말은 항시 주인공이 공동체의 요구에 굴복하게 되는 패턴으로 반복된다. 반복.
만일 영화장르를 교회에서 매주 반복되는 주기도문이나 찬송가처럼 의식(儀式)적인 체계로써 이해한다면, 장르영화의 그 흔한 스토리와 그 뻔한 캐릭터들은 다른 의미를 부여받는다. 관객이 반복해서 보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는 것을 시청케 하는 장르의 힘, 그것은 분명히 죽음과 연관된 반복 충동이다. '차이'와 '타자'가 두려워 모든 것을 동일하게 묶어 반복하는 욕망들이 장르의 '공동체'와 '캐릭터'를 구성한다. 반복해서 애창되는 노래처럼 각 장르영화는 공동체의 특정한 문화적 컨텍스트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문화적 컨텍스트.
멜로장르는 다른 장르에 비해서 훨씬 보편적이다. 눈에 콩깍지가 낀 청춘 남녀의 집착(執着)과 광기(狂氣)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안정되고 편안해 보이는 공동체, 그러나 콩깍지 캐릭터가 살아가는 문화적 컨텍스트는 온통 관습과 이데올로기가 전횡하는 금기와 배제의 장소이다. 이곳에서 멜로의 캐릭터들은 갱스터나 웨스턴 장르에서처럼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문제로 고민한다. 멜로영화는 캐릭터들이 세상 밖으로의 탈주가 불가능한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멜로영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들의 모습들이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반성케 해주는 것인 지도 모른다. 너무나 당연했던 관습들, 너무나 진지하게 다가왔던 문제들, 이 모두가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래된 우리 멜로영화를 통해 캐릭터와 공동체의 속성을 조회해 보는 작업이 재미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우리 멜로드라마.
우리 멜로드라마의 기원은 일제 강점기에 수입된 신파극(新派劇)에서 찾을 수 있다. 1950년까지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신파극에 기반한 통속 연애물이거나 비극물이었다. '신파성(新派性)'이란 이야기 구조에서 ' 감정들이 반복적으로 강조될 때, 사건이 별다른 개연성 없이 반전될 때, 인물의 심리 자체가 극적 맥락과 관계없이 유난히 강조될 때 ' 생긴다. 해방을 전후하여 침체기를 맞았던 우리 멜로드라마는 60년대 다시 그 인기를 되찾게된다. 60년대 한국의 멜로는 어느 정도나 신파성을 띠었을까? 60년대 멜로영화 텍스트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며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다른 나라의 멜로드라마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러한 질의는 멜로텍스트의 무의식을 읽는 '징후적 독해'를 향한 기초공사 정도는 될 것이다.
이 글은 공인된 멜로영화 '맨발의 청춘(64)' 과 그 영화의 감독 김기덕이 연출한 '남과 북(65)' 그리고 '상하이부르스(69)'를 기본 텍스트로 한다. 또한 '남과 북'이 전쟁멜로물 임에 주목하여, 외국의 전쟁멜로물 '애수(40)'와 '사랑할 때와 죽을 때(57)'를 '남과 북'과 짝지어 참조한다. 특정한 시대와 감독 그리고 텍스트들을 설정한 것은 연구 범위에 효율적 경계를 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1. 맨발의 청춘(64년)-로맨틱 멜로드라마
1) 사랑과 이별
로맨틱 멜로드라마의 주제는 '사랑과 이별', '사랑과 배신'으로 분류된다. 전자의 갈등 구조는 '부모-남자-여자' 사이에서 후자는 '남편-여자-남자-남자의 아내' 사이에서 일어난다. '맨발의 청춘'은 전자의 이야기 공식에 들어맞는다. 그 공식과 '맨발의 청춘'을 비교해 보자.
ㄱ. 젊은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조직 깡패의 일원인 두수(신성일 분)와 대사의 딸인 요한나(엄앵란 분)가 사랑에 빠진다.
ㄴ. 두 사람의 사랑은 부모의 격심한 반대에 부딪힌다: 두수와 요한나의 사랑은 조직의 두목과 요한나의 엄마로부터 용납되지 않는다.
ㄷ.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한다: 두수와 요한나는 조직과 부모를 속이고 도피 행각을 버린다.
ㄹ. 두 사람은 부모에게 발각되어 강제로 헤어지거나, 두 사람 중 한 쪽이 죽는다: 두수와 요한나는 과천의 물레방아간에서 동반 자살한다.
2) 공동체의 이데올로기들
ㄱ. 계급 이데올로기: 남녀 주인공의 환경부터가 이항 대립적인데 이러한 대비는 이 영화에서 가장 성공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두수의 공간은 담배 연기 자욱한 소란스런 술집, 당구장, 레슬링 경기장, 허름한 동네인 반면 요한나의 공간은 고상하게 꾸며진 방, 넓은 집, 경치 좋은 별장이다. 못사는 쪽은 잘 사는 쪽을 동경하며, 열등하게 묘사된다. 신분에 관련된 대사는 이러한 공동체의 계급 이데올로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경찰서에서 고생하다 풀려난 두수가 중간 보스인 덕대(윤일봉 분)의 외제차를 부러워하는 대사:'나는 언제나 이런 차를 갖게 되나?'
*요한나의 엄마가 딸의 주장- 두수와의 교재 -을 나무라는 대사: '(요한나에게) 두수란 사람 부랑자 아니냐!'
*사랑에 빠진 두수의 앞날을 걱정하는 덕대의 대사: '(두수에게) 신분이 다르니 손을 떼라!'
*실의에 잠긴 두수를 위로하는 요한나의 대사: '(두수에게) 좋은 직업만 생기면 누구 못지 않게 훌륭하게 사실 분이에요'
*찾아온 요한나를 물리치는 두수의 대사: '(요한나에게) 난 이 사회의 암이란 말야!'
*선배의 방황을 잡아주려는 후배 아가리의 대사: '(두수에게) 올라가지 못 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어요, 송충이는 솔잎이나 먹기 마련이에요!'
라스트 씬에서 두수와 요한나의 시신은 합장되지 못한다. 요한나의 화려한 장례 행렬과 아가리가 끄는 두수의 초라한 달구지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영화는 죽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는 신분의 무거움을 보여주고, 계급을 초월한 사랑을 가벼움으로 날려버렸던 것이다.
ㄴ. 엽전 이데올로기: '엽전'은 사대주의와 패배주의에 다름 아닌 의식이다. 이 의식은 '요한나'와 '아가리'라는 캐릭터의 이름에 잘 함축되어 있다. 영화가 제시하는 '요한나 표' 시계, 자동차, 썬글라스, 위스키, 침대, 트위스트, 베토벤, 쥬스, 영자 스포츠 잡지, 성경, 나비넥타이, 트랜지스터, 케익, 비행기 등에서 우리는 60년대의 '아가리 표' 무력감을 애처롭게 감지할 수 있다. 조직이 시계 밀수에 목숨걸던 시대, 수사중인 형사가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고 평생 외국 한 번만 나가보았으면 하고 탄식하던 시대. 두수와 요한나는 최후의 도피처에서 고향의 봄을 부르며 고구마를 먹고 종이 학을 접을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캐릭터들의 '맨발 정신'은 공동체의 '엽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고향의 개 짖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ㄷ. 순결 이데올로기: '순결'은 남자는 '기분'이 여자는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성차별 의식에 다름 아니다. 주제가 중에 ' 그대를 태양처럼 우러러보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 줄 날 있으리라'라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사나이'는 '순결한 처녀'만을 좋아한다. 이것은 '맨발의 청춘'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의식이기도 하다. 아가리와 검시관의 대사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나가는 여대생들을 바라보는 아가리의 대사: '(두수에게) 저 깔치 궁둥이 좀 봐요.'
*조직을 위해 감옥에 가는 두수를 위로하는 아가리의 대사: '(두수에게) 3년간이나 여자 맛을 못 보면 미칠 거예요'
*형사가 두수와 요한나의 시체를 검시한 검시관과 나눈 대사:
형사: '(검시관에게) 두 사람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검시관:'(엄숙하게) 순결했습니다.'
이러한 순결 관은 지금까지도 우리 공동체에서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관점에 따른 다양한 '순수'가 아니라 여기서 '순수'는 소고기의 등급처럼 일방적으로 매겨진다.
3) 캐릭터와 멜로의 마력
로맨틱 멜로드라마에서 공동체의 핵심적 컨텍스트는 계급 차별의 이데올로기이다. 커플이 맺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두 사람의 계급 차이 때문이거나 한 사람이 신분 상승을 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신분 차별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결국은 불행한 결말을 초래한다는 함축된 주제는 그 기원을 비극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의 갈등을 내면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반면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은 평범한 인물로 자신의 갈등을 인습에 내맡긴다는 점이 다른 것이다.
'맨발의 청춘'은 낯익은 사회 평면- 이제는 낯이 설은 60년대 -속에 멜로의 캐릭터들을 그대로 방치한다. 극을 이끄는 것은 캐릭터들의 심리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사랑한다는 캐릭터의 기본 설정과, 흘러 넘치는 감정의 향연일 뿐이다. 플롯은 산만하고 평면적이며 문어체 대사와 배우들의 질질 끄는 신파적 연기는 협력하여 드라마의 해체를 돕는다.
만일 60년대 관객들이 '두수'와 '요한나'의 사랑, 특히 '고향의 봄'이라는 멜로디에 맞춰 천진스럽게 종이 학을 접고 함께 자살한 순수한 사랑에 감동하였다면 그것은 텍스트 보다 컨텍스트에 기인하는 것이다. 30여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이 영화는 로맨틱 코메디가 되었다. 00년 이 영화를 관람하던 500 여명의 대학생들이 터트린 수 차례의 폭소는 이를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00년에도 영화배우 신성일의 인기는 여전히 높았다. 코메디의 왕 신성일? 험프리보가트의 '카사블랑카'가 지금까지 미국에서 인기가 좋은 것처럼 신성일의 '맨발의 청춘'도 한국 컬트영화의 원조가 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드라마의 기본은 캐릭터와 플롯이다. 할리웃이 '애수', '핑크빛 여인', ' 귀여운 여인', '사관과 신사' 등과 같은 '유사 신데렐라'이야기를 가지고도 관객을 감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드라마의 기본 기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잘 짜여진 완성도 있는 작품만이 관객에게 오래도록 사랑 받는 것은 아니다. 극적으로 느슨하고 내용은 편견으로 가득 차 있는 영화가 오히려 관객에게 시대마다 다른 재미를 제공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2. 남과 북(65년) -전쟁멜로드라마
1) 운명과 우연의 장난
전쟁과 관련하여 정형화된 멜로의 공식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영화 '남과 북'을 비슷한 유형의 외국영화-'애수(Waterloo Bridge, 40년)', '사랑할 때와 죽을 때(A time to love and a time to die, 57년)'-와 비교하여 자리 매김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ㄱ. 김기덕의 '남과 북': 동족상잔의 전쟁 중 인민군 소좌 장일구(신영균 분)가 애인 고은아(엄앵란 분)를 찾기 위해 국군진영으로 투항해 온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국군 대위 이해룡(최무룡 분)의 아내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장일구의 아들을 키웠고 배속에는 이해룡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장일구도 이해룡도 상대에게 고은아를 양보한다. 결국 이해룡이 특수임무를 자원해 전사하자 장일구도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장일구가 이해룡의 부대에 투항하고, 고은아를 호송하는 임무가 계속 지연되며, 예고 없이 수시로 술판이 벌어지는 우연성은 분명히 맥락 없는 해프닝들이다.
ㄴ. 머빈르로이의 `애수': 1차 대전 중 귀대를 앞둔 영국군 대위 크로닌(로버트테일러 분)이 발레리나 마이라(비비안리 분)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고 헤어지지만 마이라는 신문에서 그의 전사소식을 읽는다. 그녀는 매춘으로 생계를 꾸린다. 그러던 어느날 워털루 역에서 호객 하는 그녀 앞에 크로닌이 살아 돌아온다. 그는 결혼을 서두르지만 그녀는 자살하고 만다.
마이라가 장래의 시어머니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크로닌의 전사 소식을 접하며, 생환하는 크로닌을 기차역에서 발견하는 우연성은 관객에게 놀라움과 '다음은 어떻게 될까?'라는 기대를 제공하는 할리웃 멜로 내러티브의 효율성을 반영한다.
ㄷ. 더글라스 서크의 '사랑할때와 죽을 때': 2차 대전 중 휴가를 얻어 고향에 온 독일군 병사 그레버(존개빈 분)가 숙청된 의사의 딸 엘리자벳(릴로풀버 분)과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난관을 헤치고 결혼한다. 그레버는 전선으로 복귀하지만 엘리자벳의 임신 소식을 담은 편지를 받자마자 자신이 구해준 포로에게 총을 맞고 전사한다.
예고 없이 떨어지는 폭탄과 그 폭격을 둘러싼 소리들이 우연성일 뿐이다.
2)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들
ㄱ. 사나이 이데올로기 ; 사선을 넘어온 장일구는 자신을 로미오에 비유하고 있다. 사랑의 이름으로 이데올로기와 동료들 그리고 어머니까지 버리고 왔노라고 비장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를 취조하던 사나이 권중령(남궁원 분)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장일구 :'(권중령에게) 털어놓겠수다...당신같은 사람에게 반했수다!'
이 영화를 남성용 최루영화의 절정으로 이끄는 지점은 장일구와 이해룡이 펑펑 울면서 고은아를 서로에게 양보하는 장면이다. 관객은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 있지만 장일구는 그때 처음 고은아가 결혼했고 남편이 이해룡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관객은 장일구가 쏟아내는 감정의 폭포를 지루하게 참아야하지만 이해룡은 통렬한 교감을 느낀다. 두 남자의 사랑? 구경하던 참모중 한사람은 코러스- '정말 멋진 사나이들이야!' -까지 해줘 그들의 사랑을 승화시킨다. 어릴 때 친구들
을 불러모으기 위해서 동네를 돌며 목이 터져라 읊조린 소리- '여자는 필요 없고 남자 모여라'-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60년대 관객들에게는 당연하고 상식적인 정서였겠지만 지금은 향수를 자극할 뿐 감정이입이 되지 못하는 기표일 뿐이다. 사나이 이데올로기는 성행위가 금지된 동성애에 다름 아니다.
ㄴ. 술 이데올로기 : 사나이 이데올로기의 필요조건이라고 할만큼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괴로워서 마시고 달래준다고 권하고 전쟁 중에 군기가 실제로 그랬을까?
*아직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이해룡이 사랑에 대한 연설을 한 장일구에게 하는 대사: '당신 정열에 경의를 표하면서 이 술을 마시겠소'
*이해룡의 딱한 처지를 배려하는 권중령의 대사 : '(김소위에게) 이 대위를 가둬놔라, 술은 골아 떨어질 때까지 주어라'
*괴로워 하는 이해룡을 위로하는 권중령의 대사 : '(이해룡에게) 판가름은 아내가 하겠지, 술이나 하자'
*장일구의 불안과 기다림을 달래는 권중령의 대사 : '(장일구에게 술을 권하며) 쭉 들어요'
사나이들의 우정은 숫컷들 사이의 눈싸움과 성관계가 없음을 전제한다. 여기서 술을 마취제로 작용되는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거세된 숫컷끼리의 사랑은 게이들의 사랑보다도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ㄷ. 성차별 이데올로기 : 장일구는 고은아를 향한 일편단심 순정으로 넘어 온 사나이, 이해룡은 고은아가 생명의 은인이기에 미혼모인 그녀를 책임진 사나이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영문도 모르고 호출 당해 불려와 눈물의 상봉을 하는 고은아는 사나이 가슴을 울리는 신라면인가? 영화는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다. 고은아는 부대로 호송되는 여정에서 폭풍우와 여자를 태우기 싫어하는 비행사를 만나 영화 후반부에 도착하게 된다. 그녀는 장일구와 이해룡의 회상장면에서 사랑 당하는 모습으로 잠시 나올 뿐이다. 이 공동체에서 과거를 딛고 새 출발한 여자는 용납되지 않는다.
3) 퇴행적 캐릭터와 반성적 케릭터
ㄱ.'남과 북': 사나이 이해룡이 특수 임무를 자원해 전사하고 사나이 장일구 마저 '이 대위 죽게 한 새끼들 내가 , 총 좀 빌려 주시구레' 라고 외치며 달려나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장면은 그야말로 너무나 작위적으로 보인다. 그의 마지막 말은 '오마니' 였다. 우리 멜로드라마의 정서적 본질은 '자학적 퇴행성' 에 있다. 등장인물의 내면으로부터 기인한 결함만이 자학적 퇴행의 정서로 이어진다. 결국 우리 멜로의 사나이 캐릭터는 싸이코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영화 '남과 북'은 인과적 논리가 아닌 장일구와 이해룡 그리고 감독의 주관적 감정에 의존함으로써 드라마를 망쳐 버렸다.
ㄴ. '애수': 캐릭터 `크로닌'은 군인정신이 투철하고 현명한 신사로, `마이라' 는 명랑하고 솔직한 숙녀로 묘사된다. 관객은 두 사람의 사랑이 거짓말처럼 그들의 신분차이를 극복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객은 방황하다 자살하는 마이라와 그녀를 애타게 찾아 나선 크로닌에게 자연스러운 연민을 느낀다. 이것은 잘 만들어진 캐릭터가 잘 짜여진 플롯과 잘 조화를 이루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놀랄 필요는 없다. 할리웃은 드라마가 특기니까! 얕잡아 얘기하면 `애수'는 매력적인 배우들에 의존한 통속적인 '여성 멜로드라마' 일 뿐이다.
ㄷ. '사랑할 때와 죽을 때' : 캐릭터 `그레버'는 섬세하며 사색적으로 `엘리자벳'은 자존심 강하고 지혜롭게 그려진다. 두 사람의 캐릭터를 잘 드러내는 장면들이 있다. 두 사람이 데이트하다가 반은 죽어 있고 반은 살아 있는 나무를 발견했을 때 그레버가 * '(엘리자벳에게)우리도 이렇다면 삶의 반은 신뢰할 수 있을 텐데. '
라고 말하는 장면과, 결혼 첫날 밤 두 사람이 술잔을 비우고 관행에 따라 잔을 바닥에 던져 깨뜨렸을 때 엘리자벳이
* '(그래버에게) 영화에서는 잔을 던진 후 깨진 유리 조각들을 누가 치우는지 보여주지 않아! '
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여기서 관객은 삶과 영화에 대한 반성적 관점을 즐거이 만나게 된다.
더글라스 서크는 이러한 지적인 캐릭터를 위해 개연성 있고 세련된 플롯을 마련한다. 감독은 그레버가 시종일관 실종된 가족과 엘리자벳의 숙청된 아버지를 찾도록 함으로써 황폐한 도시와 고통받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데, 이는 관객이 극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서도 존재를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만드는 전쟁 그 자체와 만나게 한다. 그레버가 만난 두 사람은 의미심장하다. 한 사람은 동창생 '오스카'이고 다른 사람은 선생님 '폴만'이다
오스카는 지구당 위원장으로 게슈타포의 앞잡이지만 그레버에게는 무척이나 친절하고 호의적이다. 그러나 감독은 미장센으로 캐릭터의 표면을 가격한다. 오스카의 집 거실에 걸려있는 수많은 박제된 사슴 머리들은 오스카의 미소를 역겹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폴만은 나찌에게 반체제 인사로 몰려 감시 받으며 살고 있다. 그레버는 폴만에게 여러 가지 고충을 털어놓고 충고를 받아들이는데 그들의 대화는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자신이 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전쟁에 관여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전쟁터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래버는 폴만과 진지하게 이야기고 이야기한다. 그 중 한 대사:
그레버:'믿을 게 없어요!'
폴만: '하나님을 믿어야지!'
더글라스 서크는 '폴만'이라는 캐릭터에 이 영화의 원작자 에리히마리아아레마르크를 캐스팅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반영적 배역은 언급한 감독의 히스테리한 미장센과 함께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예사롭지 않은 드라마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ㄹ.비교: 언급한 세 편의 영화들은 비슷한 줄거리로 요약될 수도 있겠지만 결과물의 관람에서는 판이하게 다른 감상을 제공한다. 거칠지만 '남과 북'을 신파극에 '애수'를 멜로극에 그리고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비극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3. 상하이부르스(69년) -잡탕 멜로드라마
1) 효, 사랑과 배신, 모성과 타락
ㄱ. 두 아들과 어머니 : 상하이에서 상하이 잭(박노식 분)은 병석의 어머니와 어린 동생 현( 김희라 분) 돌보지 않고 나쁜 짓만 일삼는 치사한 깡패였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성장한 현은 부산에서 깡패가 된다. 한편 형인 상하이 잭은 신부가 되어 동생을 찾는다. 그들은 상봉하지만 동생은 형을 경멸하고 용납하지 않는다. 라스트 씬에서 상하이 잭이 동생을 대신해 죽음을 맞이했을 때 형제는 눈물로 화해하게 된다. 영화 '상하이부르스'는 효를 주제로 한 `가족 멜로드라마'의 변형이다. 불효자 상하이 잭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어머니가 아닌 동생의 품에 안기는 것이 다를 뿐이다.
ㄴ. 한 남자와 두 여자 : 난희(안인숙 분)은 현과 정을 맺은 후 그의 주변을 맴돌지만 현은 클럽마담 혜정(남정임 분)만을 가까이 한다. 현의 아이를 임신한 난희는 그의 배신에 자포자기하지만 상하이 잭의 도움으로 안정을 찾아간다. 마지막 장면에서 현은 죽어 가는 형을 업고 엉엉 울면서 난희가 있는 성당으로 향한다. 이러한 스토리 라인은 사랑과 배신이 주제인 `로맨틱 멜로드라마'의 그것과 유사하다.
ㄷ. 한 여자와 두 남자 : 혼자서 아들 지훈을 키워온 혜정은 연하의 현과 사랑하는 사이지만 클럽을 양도받기 위해 클럽주인 백호(독고성 분)와 내연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녀는 백호에게 클럽의 소유권을 넘겨받자마자, 현에게 백호를 제거하라고 사주한다. 그러나 혜정은 이를 엿들은 백호에게 살해된다. 이러한 스토리는 모성을 주제로 한 `가족멜로드라마'와 여성의 타락을 그린 `여성멜로드라마'의 이야기 공식을 혼합시킨 것이다. 아들에게 새 아버지를 만들어 주려 했다는 점에서 전자를, 두 남자와 통정하는 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후자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단지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과 그녀의 타락이 두 남자 중 하나를 유사남편으로 설정할 때만 성립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아무튼 공동체에서 합법적인 `어머니'와 '아내'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혜정은 `요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2) 공동체의 이데올로기들
ㄱ. 안티머니 이데올로기 : 표면적으로 '상하이부르스'의 인물들에게 돈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러나 심층에 깔려 있는 정서는 돈은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젊은 시절 돈에 눈이 멀어 주먹을 함부로 쓴 상하이 잭과, 난희를 돈으로 정리하려하고 재물을 탐한 혜정이 결국 죽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믿음의 반영과 궤를 같이 한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라는 공동체의 상식적 이데올로기는 지금까지도 사랑 받는 영화의 주제임에 틀림없다.
ㄴ. 안티요부 이데올로기 : 난희와 혜정의 처지는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마련해 놓은 어머니와 아내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무소속인 두 사람의 갈 길을 따로 마련한다. 난희의 멍청한 방황과 타락은 작위적으로 막으면서도 혜정의 강한 생활력에는 심한 모욕까지 더하고 있는 것이다. 난희는 홍길동 같은 현의 친구 태석(이일웅 분)과 상하이 잭의 도움으로 성당에 안착하는 반면에 혜정은 현과 상하이 잭의 웃기는 충고를 들어가면서 파멸의 길을 걸어간다.
*혜정의 생활력을 질타하는 양아치 현의 대사 : '(혜정에게) 이런덴 혜정이 같은 사람이 오래 있을 곳이 못돼, 혜정인 자기자식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 본 적이 있어?'
*혜정을 짜장면 집으로 불러내 사랑의 해결사 노릇을 하는 시간 많은 신부님 상하이잭의 대사: '(헤정에게) 현을 난희양에게 돌려주십시오'
*모성의 사나이 현이 혜정의 시신 앞에서 카바레 주인 백호에게 하는 멋진 대사:
'(백호에게) 어차피 계집은 악녀라고 치자, 그러나 지훈이-혜정의 아들-! 지훈이! 용서할 수 없다'
3) 휘파람과 눈물
영화 '상하이부르스'는 60년대와 부산 그리고 그 당시의 삶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국적불명의 작품일 뿐 아니라 캐릭터와 내러티브 논리를 내세우기에도 부끄러운 3류 영화이다. 그저 상투적인 이야기들을 통속적인 감정에 호소하여 짜 집기 식으로 들려주는 데 그치고 있는 것이다. 현이 등장할 때마다 나는 휘파람소리(맥락상 현이 부는 휘파람이지만 입 모양과 전혀 맞지 않는다.), 불량학생의 교복 같은 상하이 잭의 신부복, 당구장에서 현을 엄숙하게 만드는 '어머니날 노래', 라스트 씬에서 현의 대성통곡 그리고 바로 그때 울리는 종소리 등 모든 세부들이 역겨움과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당시에는 이 영화가 심각한 드라마였을 지 몰라도 지금은 분명히 똥폼 잡는 캐릭터들이 여러 이데올로기들을 드러내어 희화화하는 난센스 코메디로 보인다. 이것은 '맨발의 청춘'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대중영화의 저자가 문화적 컨텍스트임을 역설해 준다.
4.세련된 멜로드라마를 바란다
멜로드라마가 낯익은 사회구조 속에서 있음직한 공동체의 갈등을 표현함으로써 대중의 사랑을 받고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고 할 때 그것은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보유한다. 전자는 모순과 불합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신화나 종교가 해온 것과 같은 사회 통합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후자는 사회 변혁을 바라지 않는 세력에게 안전한 현상유지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멜로드라마가 사회의 계급 성차별 갈등을 집안 문제와 개인의 정체성 문제로 축소 은폐시키며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한다는 주장은 이미 진부한 것이 되었다.
대중영화로서 멜로드라마는 분명히 당대의 문화적 컨텍스트를 반영한다고 할 때 한 사회의 문화 수준은 드라마의 질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의 멜로드라마는 진화를 거듭하여 더글라스서크의 영화에서 보듯이 50년대 이미 사회와 문화를 비판하고 멜로드라마 형식 자체를 반성할 정도로 성숙했다. 그에 비해 우리 멜로드라마는 80년대에 와서야 겨우 신파극의 수준에서 벗어났다고 평가된다. 반공 전시 이데올로기 속에서 어떻게 문화적 성숙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서구에서 멜로드라마 장르는 60년대 이후 사라졌다. 장르로서 멜로드라마는 이미 TV드라마로 옮겨갔고 그 내용-형식만이 모든 영화에 감초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영화가 멜로드라마이건 멜로성을 띤 드라마이건 분명한 것은 그것이 한 공동체의 중심적 갈등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읽을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 멜로드라마는 인류의 보편적 갈등 뿐 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만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컨텍스트 속에서 읽어야 한다. 예로써 분단과 유교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컨텍스트에서 만 읽을 수 있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기덕의 작품이 완성도 있는 드라마가 되는데 실패했다 하여 그의 영화들이 폐기처분되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소중한 그 영화들을 통해서 60년대와 온통으로 만나는데는 실패하겠지만 최소한 그 당시 공동체의 관심과 이데올로기와는 조우할 수 있는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필요에 따라 파괴적 혹은 도피적으로 기능 했다. 결국 멜로드라마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문화가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을 포용하여 강해질 때 수준 있는 드라마도 양산될 것이며 그 진가도 널리 인정받게 될 것이다. 서구에서 드라마는 극의 완성도를 논하는 리얼리즘 단계에서 형식 그 자체를 유희하는 모더니즘 단계를 지났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명칭아래 장르혼합과 해체를 들먹이며, 그 논의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해왔고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문예사조를 단계적으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얻을 것이 있다면 얻어 가면서 우리 문화적 컨텍스트에 다원화되어 존재하는 개개 소수집단들의 소수문화들에 걸 맞는 드라마를 만들면 족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 관객이 지구촌의 보편적 소비자가 되어 가는 현실을 문화적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볼 필요가 있다. 소비자로서 관객은 보편적으로 재미있고 공들인 영화를 원한다. 이렇게 볼 때 다양한 문화가 넘쳐, 영화적 소재가 풍성한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드라마를 만드는 기술일 뿐이다. 더구나 백남준의 말처럼 예술의 목적이 폭력으로 연결되지 않는 소비의 창출'에 있다고 한다면 멜로드라마'야 말로 우리의 영원한 볼거리이자 건강한 소비의 왕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