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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산 허균, 난설헌 허초희 관련 대담글
*덧붙여:이 글은 지난 2010년 9월 20일 강릉에 "홍길동전 박물관"이 문을 연 것에 즈음하여 강릉 KBS에서 "시사 강원"이란 프로그램에서 한가위 특집으로 마련한 대담방송을 위하여 미리 받았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의 글입니다. 방송은 10월 2일(금) 오후 3시 10분~55분에 나갈 예정입니다. 방송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이야기를 충분히 나눌 수 없었던 부분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질문에 답하는 글을 구성해 본 것입니다.
방송 멘트는 빼고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하였읍니다.
1. 원래는 '홍길동 박물관' 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려고 했지만 결국 '홍길동전 박물관' 으로 이름을 변경하게 된 곡절이 있긴 합니다만, 어쨌든 박물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다만 굳이 박물관이 아니더라도 이곳 강릉의 인물인 허균과 홍길동전을 널리 알리는 일을 좀더 일찍 시작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는데, 이번 홍길동전 박물관 개관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처음 생각했던 대로 "홍길동박물관"으로 문을 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교산 허균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인 "홍길동"에 관련된 폭넓은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 놓은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홍길동박물관"이 옳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홍길동전 박물관"이라고 했을 경우는 소설 홍길동전에 국한되어 그 폭이 매우 좁을 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준비한 박물관 본래의 모습을 제대로 담을 수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먼저 밝히면서 님께서 물으신 박물관 개관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읍니다. 지금 개관을 한 것은 교산 허균과 난설헌 허초희의 선양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사)교산·허난설헌선양회(이후 선양회)"라고 하는 단체에서 문을 연 것으로 지방정부 즉 강릉시 차원에서 지역의 인물을 선양하는 다양한 사업 중의 하나로 추진되어야 했었는데 손을 놓고 있자 여러 가지로 열악한 조건 가운데서도 힘을 내어 민간단체인 "선양회"에서 박물관의 문을 연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고 여겨 집니다. 다만 보다 다양한 자료를 모아 박물관으로서의 손색이 없는 내용을 채워야 하는데 그러자면 자연히 예산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런 가운데 말 그대로 홍길동에 관련된 모든 것(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과 관련되)을 간직한 이름에 걸맞는 "홍길동 박물관"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 있음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교산 허균과 그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 가치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지만 교산 허균의 사상 그리고 홍길동전의 문화적 가치는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홍길동박물관"의 문을 연 것은 어쩌면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2. 우리나라든 세계 어느 나라든 특히 문학 분야에서 보면 작품보다는 작가가 더 알려진 경우, 대표적으로 세익스피어가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반대로 허균 선생처럼 작품에 비해서 작가가 너무 안 알려진 경우도 있잖습니까? 어쨌든 홍길동전이 워낙 유명한 작품인 것이 이유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허균이 우리지역의 인물인 점으로 본다면 그 동안 우리가 허균 선생을 알리는데 너무 소극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된 것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저희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교산 허균에 대하여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권위주의시대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권위주의시대란 것은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서슬이 퍼렇던 독재권력의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산 허균의 삶과 생각은 당시의 권위주의시대에는 입에 담을 수가 없었지요. 교산 허균은 광해군 시대에 왕권을 거부하고, 극심한 차별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만민평등의 기치를 내 세우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즉 혁명을 꿈꾸다 발각되어 사지가 찢겨 죽었던 삶을 살았었기에 당연히 독재권력의 시대에는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에 대한 이해와 연구보다는 그 반대로 교산 허균이 쓴 한글 소설 홍길동전에 대한 이해와 연구에만 국한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역에서도 교산 허균을 알리는 데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지요. 그 외에도 우리지역을 이끌고 있는 대부분의 님들이 개혁적이지 못하고 보수 편향적인 관계로 인하여 율곡 이이에게만 매달리고 교산 허균에 대해선 감정적으로 접근을 피하고 있었던 점 때문에 교산 허균을 널리 알리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3. 그럼 본격적으로 허균 선생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죠. 허균의 부모는 어떤 분이고, 강릉하고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는 겁니까?
교산 허균의 가문은 고려 충열왕 때의 문신인 허공의 후손으로 알려 졌읍니다. 그 허공은 정직·청렴했으며 대원 방면의 외교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특히 전함을 건조하는 일에도 여러 번 참여했으며 그럴 때마다 끝까지 그 책임을 다하는 성실성을 보였다고 합니다. 또한 허균의 증조할아버지인 허종은 철저한 배불론자였다고 하며 그 허종의 동생인 허침은 연산군의 폭정에 앞장서서 반기를 든 의기에 찬 남아였다고 전합니다. 또한 할아버지 허한은 그 당시의 이름있는 선비로써 특히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답니다. 이러한 가문의 분위기에서 허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그의 가족을 소개하면, 동인을 이끌었던 아버지 초당 허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학자·문장가·외교가·정치가라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바른 말을 숨김없이 잘 했으며 공사를 엄격히 구분했다고 전해지며 모함으로 죽었던 조광조의 한맺힌 원한을 풀어줄 것을 청하고, 허자와 구수담의 무지를 주장하다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개혁적이고, 원칙을 지키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알 수 있읍니다. 또한 성리학에 밝았던 그는 학문계통이 다른 이퇴계의 칭찬도 받을 정도였다고 하니 학문도 깊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읍니다. 이러한 초당 허엽은 전처에서 난 두 딸(둘째 딸은 우성전의 아내)과 허성, 후처에서 난 봉, 난설헌, 균을 두었는데 교산 허균의 나이 열두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읍니다. 교산 허균의 어머니 김씨는 예조참판을 지낸 김광철의 딸로서 일찍이 남편을 잃고 이어 아들 봉과 딸 난설헌, 며느리(허균의 처)를 차례로 잃은 후 슬픔에 잠길 사이도 없이 임진왜란을 겪어야 했던 한 많은 이 땅의 어머니였지요. 아쉬운 점은 어떤 인연으로 강릉 초당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만 허엽의 호가 초당인 것으로 미루어 자신이 자리잡고 살았던 지역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뿐입니다.
그리고 미리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허균의 호가 교산이잖습니까? 이 교산이라는 호도 지역과 연관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교산은 외갓집(사천 애일당)인 김광철이 살았던 뒷 산줄기를 가리키는 말인데 거기에서 따 온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천면 판교리 운양초등학교 뒷산줄기로 마치 용의 모습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교룡을 닮은 산으로 여기에서 교룡은 뿔이 없는 즉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용으로 교산 허균 자신을 가리키게 된 것으로 여기게 되기도 하지요.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용이 바다에 떨어져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을 지닌 교룡암이 사천진리 바다에 자리잡고 있읍니다. 이러한 전설이 남게 된 것은 교산 허균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는 데요, 허균의 탄생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초당 허엽이 부인과 처갓집에 있었는데 마침 그날 저녁이 김씨 집안 제삿날이라 장인이 되는 김광철이 하늘과 때를 짚어 보니 집을 비우면 혹 부부가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갖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그 아이는 큰 인물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쩌면 커다란 풍파를 일으키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겨져 윗마을인 이설당으로 불리는 큰 댁으로 제사를 보러 가는 길에 사위인 초당 허엽을 함께 데리고 갔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자리를 피하여 돌아온 초당 허엽은 부인과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그 때 잉태하게 된 것이 허균이라는 것입니다. 교산 허균의 아버지인 초당 허엽의 호도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지역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지요. 이처럼 자신의 삶이 녹아 있는 그 지역의 이름을 호로 사용하는 것을 볼 때 이 두 님들이 얼마나 자신이 살아온 터를 깊이 사랑했던 가를 반증해 준다고 하겠읍니다.
4. 아버지의 호가 초당이라든가, 또 허균 자신도 호를 지역의 이름으로 지은 것을 보면 가족 전체가 이 지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허균의 형제관계는 어떻습니까?
가족은 교산 허균을 중심으로 말씀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분의 누이(둘째 누이는 우성전의 아내)가 있었고, 그 다음으로 큰 형인 악록 허성, 작은 형인 하곡 허봉, 작은 누이인 난설헌 허초희 그리고 막내였던 교산 허균입니다. 악록 허성까지는 전처에게서 나신 님들이고, 하곡 허봉부터는 김광철의 딸인 김씨 어머니의 자식들이지요.
형제들 중에 강릉에서 태어난 분은 누구 누구죠?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난설헌 허초희와 교산 허균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교산 허균이 12살 때 초당 허엽이 세상을 떠 났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초당 허엽이 조광조의 한을 풀어 주는 신원 요청으로 탄핵되어 벼슬길에서 물러나 잠시 한가로이 고향인 초당에서 보낼 때 난설헌 허초희와 교산 허균이 태어난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또한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교산 허균의 탄생에 관한 남아 있는 이야기를 보더라도 틀림없이 강릉에서 태어난 것으로 확신할 수 있지요.
5. 허균이 6남매 중 막내였군요. 누이 난설헌 얘기는 잠시 뒤에 하겠습니다만, 허균의 형들도 아주 뛰어난 분들이라고 하던데,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교산 허균의 둘째 누이는 우성전의 아내가 되었는데 남인을 이끌었던 우성전은 퇴계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임진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읍니다. 또 큰형인 악록 허성은 유희촌의 문인으로 아버지와 비슷한 성품을 지닌 그는 문장가·외교관·정치가로 활약한 당대의 이름난 선비였답니다. 특히 동인이였던 악록 허성은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후 그들이 일본의 침략은 없을 것이라는 동인인 김성일의 주장에 반박하고 일본의 침략은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서인인 황윤길의 주장에 같은 입장을 취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당파를 초월하여 바르게 보고, 바르게 주장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또한 그는 선조가 죽을 때 어린 영창대군을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할 정도로 믿음이 두터운 선비였다고 전합니다. 또한 작은 형 하곡 허봉은 악록 허성과 같이 유희촌의 문인으로 박희립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후 동인의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며 박근원과 함께 병조판서 이율곡이 이론만 내세우고 군정을 게을리 한다고 탄핵하다 도리어 유배를 당하였지요. 그후 이조판서가 된 이율곡의 통 큰 아량을 기대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홍문관 동기생인 유성룡의 수고도 헛일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영의정 노수신의 노력으로 삼년만에 풀려나 벼슬이 주어졌지만 이미 그의 가슴은 사나이의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배 지식층의 좁고, 나약한 흐름을 거부하고 있었읍니다. 그의 유랑생활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지만 큰 가슴을 활짝 펴 보지도 못한 채 금강산에서 서른 여덟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치고 말았지요. 그리고 작은 누이 난설헌 허초희는 허균과 같이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웠는데 일곱 살때부터 훌륭하게 시를 지었다고 하니 신동으로 소문이 날만 했읍니다. 남편 김성립이 당시의 사회가 그렇듯이 술과 여자에 빠지고, 아내에게 열등감을 갖는 등 의좋은 부부로서의 생활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따라서 난설헌 허초희는 언제나 고독 속에서 한 많은 청춘을 시를 통하여 달랬을 뿐이었는데 아깝게도 스물 일곱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일찍 뜨고 말았읍니다.
교산 허균이나 난설헌 허초희이나 공통점은 글을 잘 쓰고 또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혹시 형제 중에 이 두 사람의 스승 역할을 하신 분이 있습니까?
교산 허균의 나이 스무살에 형 하곡 허봉을, 스무 한 살에 누이 허난설헌 허초희를 잃은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교산 허균은 작은 형인 하곡 허봉에게서 가장 큰 사상적 영향을 받았고, 누이 난설헌 허초희에게서는 다정 다감한 핏줄의 뜨거움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한 인물이 성장되어 가는 과정에서 가정이 미치는 영향은 가장 바탕이 되는 것으로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사고의 틀은 이때 이미 그 자리를 잡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읍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교산 허균은 작은 형 하곡 허봉과 작은 누이 난설헌 허초희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하곡 허봉을 통하여 손곡 이달의 문하에서 누이 허난설헌과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고, 사명당도 만나게 되어 불교의 깊이에 눈뜨기 시작했을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많은 뛰어난 인물들을 접하게 되었읍니다. 또 열 다섯 살 때 누구보다 교산 허균을 이해하고 아껴주던 형인 하곡 허봉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율곡 이이님을 탄핵하다 도리어 귀양을 가게 되어 교산 허균의 가슴은 찢어질 듯이 아팠었는데 귀양을 간 형이 보내준 여러 편의 시를 읽고 하곡 허봉을 찾아가 다시 만나기도 했었지만 그때는 이미 형인 하곡 허봉의 마음은 방랑의 길을 택하여 또 다시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금강산에 있는 형을 찾아가 삶과 시대와 역사를 얘기하고 학문의 바른 자리를 논하기도 했다고도 전해지지요. 형인 하곡 허봉은 불만스러운 현실에 저항하면서 사나이로서의 기개와 포부를 펴지도 못하고 응어리진 가슴을 지닌 체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형인 하곡 허봉의 죽음을 지켜본 교산 허균의 가슴에는 불같은 사회개혁의 의지가 싹트지 않을 수 가 없었을 것입니다. 기존의 질서, 기존의 학문, 기존의 사고, 기존의 틀에 대항하여 반의식 사상은 이렇게 해서 궂건하게 자리를 잡아갔던 것이지요. 교산 허균의 삶을 투영해 보노라면 이러한 사상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답니다. 또한 앞에서 얘기를 했지만 시집을 간 누이 난설헌 허초희의 삶을 지켜 본 허균은 형에게서 느낀 것과는 또 다른 사회의 모순과 질곡에 대하여 반의식을 갖게 되었고, 남존여비로 얘기되는 사회적 신분 차별에 강한 반발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난설헌 허초희의 경우도 작은 오라버니인 하곡 허봉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좋을 듯 합니다.
허봉은 당시 율곡선생하고도 이런저런 인연이 있었다면서요?
친분이라고 하기 보다는 잘못된 만남, 악연이라고 보면 좋을 듯 합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지요. 병조판서 이율곡이 이론만 내세우고 군정을 게을리 한다고 탄핵하다 도리어 유배를 당하였지요. 이 일로 지금까지도 우리 지역에서는 율곡 이이를 따르는 많은 님들이 교산 허균을 비롯한 난설헌 허초희를 기리는 일을 크게 환영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6. 특히 허균에게는 또 한 분의 유명한 스승이 있죠? 이 분이 어떤 분이고, 이 분한테서는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두 분의 스승으로 하곡 허봉과 친분이 두터웠던 손곡 이달이라는 님이 계시지요. 교산 허균과 난설헌 허초희는 서류 출신 시인인 손곡 이달의 문하를 드나들면서 시뿐만이 아니라 문학·인생·역사를 깨우쳤고 그 영역을 넓혀갔읍니다. 손곡 이달은 원주사람으로 일찍이 문장에 뛰어났지만 서류에게 벼슬길이 막혀 있음을 알고 술과 방랑으로 저려오는 가슴을 달래며 살아갔다고 합니다. 불행한 손곡 이달의 삶은 교산 허균으로 하여금 서류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했고, 개혁의 의지를 다지도록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7. 자료를 보면 허균이 아홉 살 때 가족이 전부 한양으로 이사를 가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때까지 허균의 강릉에서의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게 있습니까?
역모로 죽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료를 없어지고 말았지요. 따라서 님의 당시의 행적에 대한 것은 자세하게 알 수 없답니다. 다만 아버지 초당 허엽이 형조 담당의 왕명을 출납하는 동부승지, 왕의 간쟁을 맡은 대사간, 왕의 자문을 맡았던 부제학을 거쳐 동서로 분당된 당시 동인을 이끌면서 실력자로 떠올라 있었고, 그 후 뜻하지 않은 병을 얻어 임무가 주어지지 않고 예우차원에 있었던 관직인 동지중추부사로서 가족과 떨어져 있기보다는 가족들과 함께 있기를 원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8. 그리고는 임진왜란 이후에 허균이 다시 강릉으로 내려오게 되잖습니까? 이때엔 어떤 이유로 내려오게 되고, 또 이땐 강릉에서 어떤 일을 하고 지냈습니까?
임진왜란이 1592년(선조25년)에 일어났는데 당시 교산 허균의 나이는 24살입니다. 25살 때에 "학산초담"을 썼고, 그의 나이 29살인 1597년에 10년에 한번씩 왕이 직접 참관하여 치르는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를 한 것으로 보아 교산 허균이 학문의 깊이를 더해 가던 때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향 강릉에서 용맹정진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게 되니 머릿띠를 동여매고 열심히 공부를 하셨던 교산 허균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네요. 또한 남편과 딸과 며느리를 줄줄이 저승으로 먼저 보내고 힘들어 하시는 어머니를 고향에서 편안하게 모실 생각도 들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즉 고향 강릉에서 편안하게 어머님을 모시면서 공부에 용맹정진했던 시기라고 보면 좋을 듯 싶습니다.
9. 과거에 급제한 건 몇 살 때죠?
초시 즉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한 것은 그의 나이 17살 때인 1585년(선조 18년)이었으며, 급제 후 김대섭의 둘째 따님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21살 때인 1589년에 유교의 경전 중에서 사서오경을 통하여 생원을 뽑았던 생원시에 급제를 하게 되지요. 그 후 26살 때에 정시 을과에 급제하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29살 때에 최고의 영예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과 중시, 요즘 같으면 사법고시보다 더 위인 나라 최고의 시험에 합격을 한 셈이지요.
벼슬은 어디까지 올라갔고, 벼슬살이는 순탄한 편이었습니까?
교산 허균이 오른 벼슬은 정2품의 형조판서를 거쳐 그 이듬해 1617년 님의 나이 49세에 의정부에 속한 정이품 문관 벼슬로 삼정승을 보좌하면서 국정에 참여하였던 좌참찬에 올랐었읍니다. 벼슬살이는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학문에 대해서도 당시가 유교로 꽉 짜여져 있었는데 이것을 저는 유교 교조주의라고 합니다만 다른 그 어떤 학문도 폭넓게 받아 드리지 않는 분위기에서 교산 허균은 불학(교) 뿐만이 아니라 도학, 천주학에 이르기까지 깊이 있고, 폭넓게 공부했고, 실천했던 이유로 이단으로 몰리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으며 따라서 여러번 파직을 당했던 것으로 알려 졌읍니다.
10. 혹시 벼슬살이를 하는 과정에서 백성으로부터 탐관오리로 지탄을 받았다거나 아니면 도덕적으로 부정한 일에 연루됐다거나 한 적은 없습니까?
백성들로부터 탐관오리로 지탄을 받은 적은 없으며 도덕적으로 부정한 일에 연루된 적도 없읍니다. 다만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유교라는 교조적 독단주의에 빠진 당시의 지도층에 의하여 이단으로 몰리고, 계생, 무옥, 추섬과 같은 기생을 가까이 하고, 더구나 그들에게 존대말을 하며 예를 갖추는 등 인격적으로 대한 것이 당시 사대부의 눈에는 점잖지 못한 것으로 양반의 체통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으로 왕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11. 거의 알려지지 않은 얘깁니다만, 허균이 기방을 출입하고,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일기장에 기록하는 등 특이한 면모도 보였다고 하는데, 이걸 보면 허균의 여성관이 당시대의 일반 사대부들하고는 달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습니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산 허균은 기생들과도 인격적인 교류를 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그가 평등 박애사상을 주장하고, 주장한 것 뿐만이 아니라 실천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읍니다. 당시 양반사회에서 기생들을 천하게 취급했지만 교산 허균님은 그들에게 존댓말을 쓰며 예로서 대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참선을 권유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의 이름을 일기장에 기록해 놓았다는 것은 잘못된 이해와 짐작이라고 보여 집니다. 기생의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은 자신과 인격적인 교류가 가능했던 소중했던 님들이라 그랬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 양반으로 부르는 사대부들의 여성관과는 분명하게 다르다고 보아야 합니다. 교산 허균은 요즘 우리가 주장하고 있는 남녀 즉 양성평등사상에까지 이르렀다고 보면 틀림이 없읍니다.
12. 허균이 스물 여섯에 처음 벼슬에 오르고, 이후 여러 차례 벼슬을 오르내리는 과정을 격지만 어쨌든 죽기 직전까지 벼슬을 했는데, 홍길동전이라는 소설은 언제 쓴 거죠?
1612년 그러니까 님의 나이 44살 때에 쓴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기에서 교산 허균이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쓰셨다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홍길동전에 오롯이 녹아 있는 교산 허균의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몫이라고 여겨집니다.
13. 그리고 홍길동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아닙니까? 허균이 굳이 당시 사대부의 문자가 아닌 언문으로 소설을 쓴 이유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렇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고 알려졌었지요. 설공찬전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 어느 것이냐 하는 것은 질문의 본질이 아니므로 접어 두기로 하겠읍니다. 다만 교산 허균이 언문이라고 낮추고, 없이 여겼던 한글로 이 소설을 쓰신 것에 문제의 중심을 두어야 하겠지요. 교산 허균은 엄처사전, 손곡산인전, 장산인전, 장생전, 남궁선생전 등 많은 소설을 한문으로 쓰셨읍니다. 그런데 님께서 물으신 대로 홍길동전을 왜 한글로 썼을까요? 교산 허균의 사회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았던 것이며 나아가 극심한 신분차별제도 아래에서 평등, 박애정신의 실천과 의지를 홍길동이라는 주인공을 통하여 강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사대부들이 독점하고 있던 문자의 지식 무기화를 부수고 민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언문인 한글로 소설을 썼다는 것은 만민 평등을 주장하고, 실천한 것임을 알 수 있는 뚜렷한 하나의 증표인 것입니다.
실제로 허균이 당시의 천한 신분인 서얼들과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허홍인, 박치의, 김경손, 박응서 등 이들은 서류출신으로 서얼금고를 없애 달라고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던 이들입니다. 교산 허균은 이들에게 상소문을 직접 써 주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를 아끼지 않았읍니다. 나중에는 이들과 혁명을 함께 도모하기도 했었지요. 앞에서 밝혔던 대로 평등, 박애정신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그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어졌다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14.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허균이 정 2품이라는 상당히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지만 결국은 역모죄로 걸려들어 죽음을 맞게 되는데, 어떤 사건에 연루된 겁니까?
이 점은 어느 한 사건으로 결정되었던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여러 일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고 설킨 가운데 이루어 졌다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그들 사건을 따로 떼어서 순서별로 엿보기로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칠서지옥:처지가 같은 일곱명의 서류 출신인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허홍인, 박치의, 박응시, 김경손은 서류출신에 대한 신분차별의 폐가 심한 서얼금고를 없애 달라고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으나 묵살된 후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소양강변에서 술과 시로 달래며 한편으로는 교산 허균과 혁명을 모의하던 중 부족한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문경새제에서 은상을 턴 것이 탄로가 나 이듬해 이들은 붙잡히게 되었는데 이를 칠서지옥이라 하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대북파인 정인홍·이이침이 이들을 도와 주는척하면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일에 쓰일 자금을 모으려 했다는 거짓자백을 유도하였는데 자신들이 도모한 것을 숨기려는 의도와 맞아 떨어져 거짓 자백을 했지요. 그러나 결국 이들은 물론 이용당하여 죽음을 당했으며 이로 인하여 영창대군이 죽음을 당하고 김제남 등 소북파가 참변을 당했던 계축옥사로 번졌던 것이다. 이때에 교산 허균은 이들과 혁명을 도모하였고, 모의를 돕기 위하여 거기에 사용될 격문을 지어 이경준을 통하여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2)대북파에 가담:계축옥사로까지 번진 사건으로 교산 허균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읍니다. 칠서들이 끝까지 허균과의 관계를 얘기하지 않은 것은 교산 허균에게 있어 무척 다행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교산 허균은 불안을 떨치지 못했지요. 어쩌면 지금까지 생각해 온 사회개혁 의지에 대한 실현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를 위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위치한 이 모순된 사회의 실상을 바라보면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하나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요. 순간의 폭발로 인한 산화냐 아니면 좀더 때를 기다려야 하나를…… 즉 반대되는 모든 세력을 적으로 삼아 당장 맞서 싸울 것이냐 아니면 그들 속에 스며들어가 때를 기다려 민중의 힘으로 엎을 것인가를……
교산 허균이 가고자 했던 길은 나중에 있었읍니다. 그가 대북파에 가담한 사실을 이해하려면 위와 같은 당시의 급변한 상황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교산 허균은 글방 친구였던 이이침에게 벼슬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 전에는 찾는 일도, 부탁한 일도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 허균은 이이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벼슬을 하게 되어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두고 오늘의 우리는 그를 나약한 지식인으로서의 전락 등으로 아까와 하면서도 나무라지 않을 수 없는 격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의 삶을 좀 더 뒤따라가 보노라면 앞서 얘기한 대로 허균이 가고자 했던 길은 분명히 나중에 있었던 것임을 다시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3)경운궁 문서사건:이이첨은 글 잘하기로 이름난 교산 허균을 자기의 편으로 삼았다는 생각에서 또 교산 허균을 이용하여 자기의 지지기반을 구축하려는 생각에서 허균을 도와주었고 그래서 교산 허균의 벼슬길은 한동안 순탄하기만 했었읍니다. 나중에 광해군으로부터 존호까지 받을 정도로 많은 칭찬과 신임을 받기에 이르렀지요. 그러나 허균에게는 불안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읍니다. 이것은 교산 허균이 중심이 되어 삼청동에 무리를 모으고 거사를 꾀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실이 소문으로 점점 널리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읍니다. 광해군의 신임을 받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소문을 소문으로 잠재워 자신이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김윤황으로 하여금 아무도 몰래 인목대비가 거처하는 경운궁에 '왕을 배척하고 누군가가 삼청동에 무리를 모아 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내용의 괴문서를 화살에 달아 쏘게 한 후 그것을 주워 광해군에게 보였던 것입니다. 교산 허균은 이 괴문서를 보이면서 소문은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굳히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의 뜻대로 되었읍니다. 그러나 이 일로 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지요. 광해군은 누가 괴문서를 던졌나에 관심을 나타내며 사나운 성질을 그대로 폭발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광해군의 노여움은 이 흉계를 꾸민 자를 찾게 하고 있었읍니다. 이에 광해군의 즉위를 도와 영의정까지 오른 기자헌은 자기의 세력이 약해짐을 느끼고 왕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허균을 반대편으로 삼고 이 흉계를 꾸민 것이 허균임을 주장했읍니다. 그러나 턱없는 소리라고 하며 기자헌을 길주로 유배시킬 정도로 당시 광해군의 허균에 대한 신임은 상당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얽히게 되었읍니다.
4)인목대비의 폐비사건:교산 허균은 광해군에게 붙어 놀아나는 기자헌을 좋게 생각했을 리가 없었고 더욱이 인목대비 폐비문제를 놓고 기를 쓰며 싸우는 꼴에 속이 뒤틀렸을 것입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이첨이 중심이 되어 인목대비를 폐비시키려고 했는데, 여기서 기자헌은 반대로 폐비의 불가를 주장했읍니다. 교산 허균은 잠시 광해군의 절대 신임이 필요했고, 자신의 정체를 짐작하고 반대하는 기자헌을 누르기 위하여 인목대비 폐비를 주장하는 이이첨의 무리에 자연히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은 그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하여 어떻게든 교산 허균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읍니다. 즉 교산 허균의 조카사위요, 선조의 왕자인 의창군을 왕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자신의 아버지인 기자헌이 반대하여 성공하지 못하여 광해군이 등극하게 되었다는 것과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이용하여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운 후 군사통솔권을 잡아 김제남까지 제거한다는 것, 그리고 과거에 칠서들과 역모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격의 상소에 교산 허균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인목대비 폐비주장에 대해 선봉에 서게 되었고, 이 일로 일은 점점 꼬이게 되었읍니다. 교산 허균에게 있어서는 그의 개혁의지 실현이라는 최대의 목적을 위하여 다른 문제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이 인목대비 폐비문제로 인하여 허균은 오히려 기자헌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점점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읍니다. 또한 실질적인 권력자이면서도 자기에게 쏟아지는 반대파의 거센 비난을 교묘하게 교산 허균한테로 돌려버린 이이첨의 교활함에서도 허균의 불리함은 증폭되고 있었읍니다.
5)남대문 격문사건:이러한 때에 이이첨의 딸인 세자빈이 아들이 없어 다른 후궁을 간택하였는데 마침 교산 허균의 딸이 내정되었지요. 교산 허균은 교산 허균대로의 계산에 의하여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 마지막 기회로 은근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대북파에 속하는 같은 무리였던 이이첨에게는 문제가 달랐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뜻에 잘 따르는 동지로 이용하려 했던 허균에게 상당한 의심을 품게 되었고, 동지가 아니라 권력의 경쟁자로서 결국은 내부의 적으로 단정짓고 허균을 대하기에 이르렀읍니다. 그런 가운데 북쪽에서 오랑캐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장안에 퍼지면서 사회상황은 불안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읍니다. 교산 허균은 이러한 뒤숭숭한 사회상을 그의 거사에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선 민심을 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권력의 무능함을 폭로하기 위하여 조직적인 선동에 힘을 쓰기 시작했지요. 동지들로 하여금 남산에 올라가 피난을 가도록 외치게 했고 알게 모르게 당시 사회상황의 모순성과 권력의 부패성을 선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찍부터 몰래 승려와 장사들을 모아 병서를 익히게 하고 궁안의 사정을 알도록 하는 등 훈련을 시켰던 것입니다. 아마도 허균은 거사의 결정적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허균의 충실한 동지인 서얼출신의 현응민이 남대문에 장차 강남대장군이 이른다는 내용의 격문을 붙여 분위기를 고조시키려고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심문을 받던 중 그 주동자가 허균으로 밝혀지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돌아갔던 것입니다. 허균의 거사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요. 교산 허균은 민중의 힘을 몰아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고 시도했었읍니다. 즉 우선 위기를 넘기고, 다음을 위하여 대북파에 가담했고, 절대적인 신임을 위하여 폐비를 주장했으며 자기의 딸이 후궁으로 간택되도록 했으나 그의 속뜻은 이런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모두의 관심은 폐비의 싸움에 있었고, 사회는 뒤숭숭한 가운데 놓여 있었던 시기를 이용하여 자신이 뜻한 개혁의 의지를 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김진세님은 교산 허균이 이이첨의 사주를 받아 인목대비를 폐하는 척하면서 역모를 하려 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이첨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은 잘못이며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교산 허균은 당시의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던 이이첨을 이용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15. 하지만 교산 허균은 끝까지 자신의 역모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죠? 그러나 역모죄 때문에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후대에 허균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원인이 되는데, 진짜로 허균이 역모를 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에는 흔히 있던 일처럼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인지....... 어떻게 봐야 할까요?
교산 허균이 광해군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광해군에게 "할 말이 있다"고 말하며 끝까지 자신을 신임하고 있는 광해군의 힘을 빌려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지가 찢겨지는 능지처참을 당했던 형장에서도 그들이 말했던 죄에는 결코 수긍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말하는 문제의 본질은 충분히 피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즉 이러한 교산 허균의 행동은 많은 준비를 하고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을 만회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보면 좋을 듯 싶습니다.
16. 허균에 대한 얘기를 매듭짓기 전에 잠시 누이인 난설헌의 얘기를 조금 하고 넘어가죠. 자세하게 얘기할 수는 없구요, 대표적으로 난설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일화가 있으면 몇가지 소개를 해 주시죠.
일화로 남아 있는 것은 자세히 잘 알 수 없고요. 다만 난설헌 허초희가 남기신 문장과 시를 통하여 헤아려 볼 뿐입니다. 그 중 하나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으로 난설헌 허초희가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지었다고 하는 믿기 힘든 것으로 이 상량문을 짓고 난 후 신동이라 불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목판본『난설헌집』에 유일하게 전하는 산문으로 동생인 교산 허균이 1605년 충천각에서 석봉 한호에게 부탁하여 그의 글씨로 써서 1차로 간행되었읍니다. 이 목판본은 1606년 우리나라에 왔던 중국 사신 주지번에 의해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1608년 4월에 간행된 『난설헌집』에 실려 있을 뿐, 원본 글씨나 목판을 찾을 수 없고 탁본만 국내에 전합니다. 그 내용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새벽에 봉황타고 요궁에 들어가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도다.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못 물 마신다. 은평상에서 잠자다가 꽃그늘 짙은 한 낮에 일어나, 웃으며 요희를 불러 푸른 적삼 벗기네. 어영차, 서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푸른 꽃 시들어 떨어지고 오색 난새 우짖는데, 비단 천에 아름다운 글씨로 서왕모 맞으니, 날 저문 뒤에 학 타고 돌아가길 재촉한다. 어영차, 북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북해 아득하고 아득해 북극성에 젖어 드는데, 봉새 날개 하늘 치니 그 바람 힘으로 물이 높이 치솟아 구만리 하늘에 구름 드리워 비의 기운이 어둑하네. 어영차. 위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이러한 훌륭한 글과 주옥같은 시(詩)를 남긴 난설헌 허초희는 오라버니인 하곡 허봉과 동생인 교산 허균의 어깨 너머로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져 다시금 그져 놀랄 따름입니다.
17. 어쨌든 난설헌이 동생 허균보다도 더 일찍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자신의 뜻을 더 크게 펴지 못한 게 아쉬운데, 난설헌의 시문학의 수준은 어느 정도로 평가되고 있습니까?
27살이라는 짧은 삶을 마감한 난설헌 허초희는 213편의 시를 남겼읍니다. 이것은 동생인 교산 허균이 누이가 죽은 후 중국 사신인 주지번을 만나 자신의 누이인 난서헌 허초희의 시를 소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읍니다. 난설헌 허초희의 시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으려는 자유혼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매우 아름답고, 깊은 종교적인 신선세계를 소재로 자신의 시 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읍니다. 또한 현실적인 아픔을 그대로 느끼고 그 아픔을 아름답게 삭여 내는 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하지요. 여기서 잠시 난설헌 허초희님이 남기신 "봉숭아 꽃잎 물들이며"라는 시(장정룡님 풀이)를 소개하겠읍니다. "달빛어린 저녁이슬 규방에 맺히면 / 예쁜 아씨 섬섬옥수 곱기도 해라 / 봉숭아 꽃잎 찧어 숭채잎에 말아 / 등잔 앞에서 꼭 매다보니 귀고리도 울리네 / 새벽에 일어나 주렴 걷어 올리며 / 열 개 붉은 별 거울 비춰 보고 혼자 웃네 / 풀잎에 손 닿으면 호랑나비 나는 듯 / 아쟁을 뜯으면 복사꽃 놀라 떨어지는 듯 / 두 볼에 분 바르고 비단 머리 손질하면 / 소상강 대나무 피눈물로 얼룩진 듯 / 이따금 그림 붓 잡아 반달 눈썹 그리면 / 붉은 비가 봄 동산을 뿌리고 간 듯" 참으로 아름답지요. 또다른 한 편을 소개하겠읍니다. "대나무숲의 노래"로 세 번째 단락을 소개하겠읍니다. "집은 강릉땅 돌쌓인 갯가에 있어 / 문 앞의 개울에 비단 옷 빨았지요 /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배 매어 놓고 / 짝지어 다니는 원앙 부럽게 바라만 봤어요"
18. 허균이나 누이 난설헌이나 개인적인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두 사람은 그들이 남긴 문학 작품으로 인해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그들의 사상을 지금 이 시대와 관련해서 재해석해 볼 여지는 없는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님께서 말씀하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즉 두 분의 문학작품에 서린 정신, 사상을 오늘에 오롯이 살려 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난설헌 허초희의 경우는 한마디로 "자유혼"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여자로서 현모양처의 삶이 전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나 아닌 남 또한 귀한 존재로 인정하며 나아가 삶과 자연이 어우러져 아름답게 채색되고, 승화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교산 허균의 경우 님의 삶과 사상은 유교의 교조주의에서는 이단으로, 신분차별제도에서는 평등과 박애로, 문화에서는 파격으로, 정치에서는 반역으로 나타났던 것이지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허균의 사회 개혁사상인 호민론을 민중론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즉 백성인 무지렁이가 진정 주인인 민주주의 세상을 열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완성이지요. 다음으로는 평등과 박애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목표로 하고, 가고자 하는 것이 복지국가로 볼 때 이것이 바로 교산 허균의 평등과 박애사상의 정착점입니다. 나만 잘 살자는 것이 아닌 더불어 잘 살자는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을 돕고, 실천으로 옮기자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사는 이 땅에 천국과 극락을 바로 세워 보자는 것이 교산 허균의 꿈인 것입니다. 이 외에도 탁월한 국방정책을 들 수 있읍니다. 교산 허균은 찌그러진 사회상에서 어찌 훌륭한 장수가 나올 수 있을까를 물으면서 이러한 군정의 현실을 개혁하려는 의지는 "병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읍니다.
교산 허균은
첫째 : 평등한 병역의무,
둘째 : 유능한 장수의 선택,
셋째 : 장수와 군사에 대한 절대적 신임,
넷째 : 철저한 군사 훈련,
다섯째 : 합리적 군정운영,
여섯째 :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군기확립을 주장하면서 당시 절대의 권력을 쥐고 있던 임금에게 그 책임이 달려 있음을 역설하고 있읍니다. 또 "서변비로고시"에서 허균은 여진(청)의 침입 즉 병자호란을 예언했읍니다. 쳐들어오는 길목까지 우리가 침략당한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면서 지리적 여건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우리를 침략할 적은 압록강과 연평령으로 쳐들어 올 것이며 그 적은 여진이라고 단정했지요. 허균은 중국을 드나들면서 압록강 부근의 국경지역을 살피고 그곳의 지형과 그곳에 근무하는 관리들의 의견을 들어 대비책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 대비책은
첫째 : 유능한 장수를 택하고,
둘째 : 장수에게 상당한 권한을 주며,
셋째 : 군량을 충분히 공급하고,
넷째 : 성을 보수케 하며,
다섯째 : 요새를 설치하여 저지선을 만들고,
여섯째 : 식주·구성·안주 등 중요한 지점에 특히 중무장한 부대를 배치도록 했읍니다.
이 때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대략 20년 전으로 여겨집니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군정은 극도의 문란 상태였기 때문에 교산 허균의 또 다른 고민은 난이 일어나면 막기는커녕 제대로 피난도 갈 수 없는 혼란한 상태로 참화를 입을 것으로 짐작하여 바르게 피난을 갈 수 있도록 "관동불가 피난설"에 자신의 견해를 자세히 밝혀 놓기도 했읍니다. 물론 당시 집권층은 그래도 난이 일어나면 중국이 도와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사대주의에 찌들은 정치꾼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의 역사는 임진란 8년 전에 임진왜란을 예언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이이를 높이 평가하면서 왜 허균에 대해서는 바른 평가를 내리기에 주저할까요? 그의 탁월한 국방정책, 비상한 병자호란의 예언과 그 대비책, 그리고 바른 피난길의 제시, 이 모든 것은 예사로 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마땅히 교산 허균을 다시 바르게 평가하여 우리 역사의 귀중한 인물로 되살려내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