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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리스도의 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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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2월9일(일) 이현래 목사님 주일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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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22~31]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들이 성경을 많이 읽으시기를 바란다. 18절부터가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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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복음서를 쓰게 된 것은 유대에서 시작된 복음이 헬라세계로 퍼지면서 당면하게 된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인의 관심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킬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었고, 헬라인의 관심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 진리를 찾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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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서를 쓰게 된 것은 유대에서 시작된 복음이 헬라세계로 퍼지면서 당면하게 된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제시하려고 쓴 것이다. 유대인의 관심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켜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언제 메시야가 올까 하는 것이었다. 헬라인의 관심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서로 찾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다. 이렇게 찾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를 전할까 하는 것이 당시 교회의 당면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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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좋아하는 사람과 떡 좋아하는 사람, 이 둘을 어떻게 만족시킬까 하는 것과 같다. 어렸을 때 동네에서 친구들이 많았는데 술 좋아하는 친구들이 한패 있었고 술을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이 또 한 패 있었다. 그래서 술 좋아하는 친구들은 만나면 술을 먹자고 하니까 술을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이 모여서 떡국을 해먹게 되었다. 그래서 떡국부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둘로 갈라져서 한 패는 만나면 술을 먹고 또 한 패는 만나면 떡국을 먹었다. 이 두 사람을 어떻게 다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할 것인가? 어떻게 이 두 사람이 다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 것인가 하는 이런 문제였다. 상당히 요리 기술이 필요한 그런 사항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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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은 술과 떡만의 문제가 아니고 술 좋아하는 성향과 떡을 좋아하는 성향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서로 화합이 안 되고 갈라져서 살게 된 형편이 되었다. 세상 어디를 가나 이렇게 취향이 다르고 또 목적과 의식이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한 예수를 구미에 맞게 전할 수 있겠냐는 것이 아주 고민이었고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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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도 그렇다. 그냥 하나님 말씀, 진리를 찾고 다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밤낮으로 사회문제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과 얘기를 해 보면 관심이 서로 다르니까 각기 다른 말을 해야 한다. 다른 말을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말을 해버리면 안 된다. 목적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해야 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이 많이 있다. 요한도 이럴 때 요한복음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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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쓸 때는 주후 100년경이었고 요한의 나이 90이 넘은 때였다. 유대인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교회가 소아시아 전 지역에 확산되었는데 교회 구성원의 비율에 있어서 희랍인의 수가 월등하게 많아진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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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쓸 때는 주후 한 100년경이었다고 한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한 100년경이었다고 한다. 요한의 나이는 90이 넘었을 때였으니까 아주 노인이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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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교회, 마가 다락방이라고 말하는 교회가 지금의 소아시아 지방 즉 전 유럽으로 확산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유대인들뿐이었다. 그런데 차차 이방인들의 수가 많아지니까 교회 구성원의 비율에 있어서 희랍인의 수가 월등하게 많아진 상황있다. 한 9:1정도가 되었다. 그러니까 교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취향과 의식구조가 전혀 다른 인종들이 모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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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유대인의 민족 종교적 관심과 역사적 필요 사상적 관념 안에서 전파되고 받아들여졌던 복음이 희랍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는 곤란한 점이 너무 많아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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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유대인의 민족종교적 관심과 역사적 필요 사상적 관념 안에서 전파되고 받아들여졌던 복음이 희랍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는 곤란한 점이 많았던 것이다. 술 먹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떡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쓴 소주를 먹으니까 쓴 것이 입에 맞아서 쓴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 희랍사람들이라는 것은 굉장히 방대한 철학사상 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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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크게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국문명, 희랍을 중심으로 하는 희랍문명, 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이렇게 세 개로 볼 수 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도 희랍문명이다. 그만큼 큰 문명 속에 있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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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라는 것이 아주 무서운 것이다. 큰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낮은 데 있는 사람들을 인간취급하지 않는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자기들의 문화가 많이 앞서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 핫바지를 입고 다녔던 시대였으니까 그들이 얼마나 우습게 봤겠는가. 지금 우리가 미개한 나라에 가서 보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그런 현상이다. 지금은 우리가 큰 소리하고 있지만 당시에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볼 때는 완전히 바지저고리 밖에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물론 선비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중국사상을 받아들여서 월등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다 그런 문맹상태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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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민족종교, 자기들을 구원할 여호와, 여기에 절대적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적 필요가 있다. 그들이 애굽에서 구원 받아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와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망해버렸다. 그러니까 오매불망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회복하느냐?’ 이것이 관심이었다. 우리가 일제 하에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독립하느냐?’이렇게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보다 그 사람들은 훨씬 더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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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봤던 사람들과 전혀 그런 것과 관계없이 ‘어떻게 하면 인생을 지혜롭게 살겠는가?’ ‘진리가 어디에 있느냐?’이렇게 찾는 아주 여유롭고 한가한 사람들은 아주 딴 판이다. 전혀 생각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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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가 누구이며 그가 언제 오는가라는 단순한 문제를 가지고 복음에 접근하였기에 예수라는 사람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만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메시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처형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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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그들을 구원한 메시야가 누구냐?’‘그가 언제 오느냐?’이런 단순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이고 복음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예수가 메시아냐 아니냐?’ 이것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냐 아니냐?’ 이것만 전부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다. ‘그리스도이어든 밝히 우리에게 말해라. 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느냐?’ 이런 말이 나온다. 요즘 같으면 ‘왜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 그 말이다. ‘왜 슬슬 빠져 나가느냐? 그리스도면 그리스도라고 확실하게 말해라.’ 이런 이야기다. 이만큼 이 사람들은 메시아인지 아닌지 이것만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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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십자가에 버리고 만 것이다. 여러 가지로 검토해 본 결과 ‘메시아가 아니다. 메시아가 아니면 이 사람은 백성을 현혹시키는 사람이다.’ 이렇게 될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예수를 그냥 십자가에 버리고 저주했다. 그가 아니라면 자기 민족을 조롱한 셈이다. 아무 것도 아닌 시골 청년이 나와서 자기가 메시아라고 했다면 그것이 유태인들의 자존심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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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우리말로 하면 독립운동 같은 것이다. 의병을 모집해서 로마에 대항하다가 초토화되고 죽고 이런 역사를 거듭해 온 사람들에게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 아무 정치적인 힘도 없는 사람이 메시아라고 하면 그게 받아들여지겠는가? 우리 같으면 ‘안 받아들이면 그만이지 왜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이 사람들은 분노가 극에 달했다. 우리를 조롱한다고 생각했다. 명분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조롱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최고형인 십자가형에 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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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하여 희랍인들은 인생과 우주에 대하여 철학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예수가 참 지혜자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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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해서 희랍사람들은 인생과 우주에 대해서 철학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다. 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 인생은 무엇인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이런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왕자로 태어나셨다. 그러니까 여유가 많은 사람이다. 유대인처럼 죽느냐 사느냐 이런 사람이 아니다. 왕자로 태어난 사람인데 한 번 시내를 나가 봤더니 인생을 사는 게 여러 가지로 괴롭고 힘드는 게 보인단 말이다. 그래서 생로병사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건 철학적인 문제다. 유대인들은 아예 이런 문제를 가질 수가 없다. 생로병사 이런 것은 관심도 없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 보면 이런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노예에서 어떻게 해방되느냐? 이 광야 험한 길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 이게 관심사지 사람의 생로병사가 어떻게 되느냐? 이것은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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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지혜자를 찾는 셈이다. 인생의 지혜를 말하는 사람을 찾는다. 철학이라는 말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philosophy다. 그래서 예수가 참 지혜자인가? 여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이 진짜로 인류에게 빛을 줄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사람인가, 그런 지혜로운 선생인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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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같은 사람도 지혜자를 찾아서 통 속에 있는 사람인 디오게네스를 찾아간다. 진리라는 것을 알아보려고 갔다가 ‘나는 지금 햇빛이 필요하니까 가라.’ 고 해서 돌아왔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이런 화두와 해답을 보면 이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유태인들과는 아주 다른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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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이와 같은 당면한 문제에 직면하여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 끝에 글을 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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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이와 같은 당면한 문제에 직면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 끝에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로 똑 같다. 그때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두 가지 흐름은 여전히 똑 같다. 그때 세상이나 지금 세상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지금 현재적인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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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이야기 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메시아다. 이것을 지금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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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 대하여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메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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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구체적인 민족사는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야곱 족속 70인이 양식을 따라 애굽에 내려갔다가 바로에게 노예가 되어 400년을 지낸 후,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모세에 의해 구원을 받은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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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구체적인 민족사는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된다. 성경에는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 이렇게 나온다. 그런데 그것은 선사시대라고 한다면 구체적인 역사이고 민족사는 출애굽기부터다. 야곱이 70인의 가족과 족속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갔다가 결국 바로에게 노예가 되어서 400년을 거기서 억류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모세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백성이다.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백성이 못되었다. 노예가 무슨 수로 바로의 힘을 물리치고 나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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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일 모레가 삼일절인데 처음에는 우리가 삼일만세 운동도 해 보고 했는데 태극기 들고 나간다고 되겠는가? 총칼을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태극기 들고 합 바지 입고 달려 나간다고 독립이 되겠는가? 그것은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다. 표현에 불과했다. 그런 시도를 몇 번 해 보다가 결국 우리는 그냥 시들어지고 일본 사람들의 동화정책에 따라서 흡수되고 말았다. 36년이라는 기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인데 그 시간에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일본의 문화에 흡수되고 일본의 동화 정책에 다 흡수가 되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일제시대에 살았다. 그때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을 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을 내 주변에서 못 봤다. 특별하게 많이 배운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나 좀 알았을 것이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 그러니까 동화된 것이다. 그들의 문화에 우리가 압도된다. 그들이 사는 것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 농사를 하나 지어도 우리와 전혀 다르게 짓는다. 공업이 발달했고 농업이 발달했다. 이런 사람들 앞에 우리는 그냥 꿀리게 되는 것이다. 일본말을 서로 잘 하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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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있는 우리 교포들에게 갈 때마다 그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리키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한국말을 해야 너희들이 미국 살 때 유리하다.’해도 콧방귀도 안 뀐다. 왜냐하면 그들이 미국 문화 속에 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하는가를 생각하지 한국어를 잘하느냐는 생각 자체를 안 한다. 그런데 우리보다 못한 나라에 가 있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TV에 보니까 자기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한국말을 절대적으로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문화가 우리가 앞서 있으니까 미개한 문화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 문화가 높아져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게 되고 우리 언어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고 그렇지 밑에 빌빌거려서는 아예 그런 생각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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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은 400년을 거기서 지냈다. 우리는 기껏해야 36년이 아닌가? 400년을 거기서 지냈으니까 당시 화려했던 애굽 문화에서 자기 민족성을 지킨다는 것이 다른 민족 같으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여호와를 믿는다는 특수한 믿음 때문에 이 사람들은 그 민족성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환경에 사는 다른 민족들을 다 흩어졌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똘똘 뭉쳐 있는데 이것이 그들의 가족제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종교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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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이후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이스라엘을 배우려는 시절이 있었다. 어떻게 소수를 가지고 모세 다이안이 인도하는 6일 전쟁이라는 유명한 전쟁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큰 대륙을 점령할 수 있는가? 어떻게 많은 아랍 인구를 제압할 수 있는가? 여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배워서 ‘이것은 종교의 힘이다.’ 이렇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전군신자 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제일 강한 종교니까 기독교를 다 믿게 하면 군대가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전군신자 운동을 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도 많이 생겼다. 무조건 다 놓고 세례를 줘 버렸다. 그러다 보니까 알맹이도 생기고 가짜도 생기고 해서 많이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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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민족사를 가지고 400년을 노예생활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모세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 모세라는 사람이 왔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우리도 사실은 우리의 힘으로는 해방을 받지 못했다. 중국에서 독립군을 만들어서 저항도 하고 했지만 그것을 가지고서는 일본을 대항할 수 없었다. 중국도 졌고 러시아도 졌다. 그래서 우리도 안방을 다 내준 것이다. 우리는 중국을 하늘같은 대국으로 생각하고 형님으로 모셨던 것인데 청국이 일본과 싸워서 청일전쟁에서 져 버렸다. 그래서 러시아로 붙으려고 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또 져버렸다. 그러니까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냥 ‘가져가십시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매국노라고 할 수도 없다. 누가 나라를 팔아먹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지금 와서 잘난 체 하지만 잘난 체 할 일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 오죽하면 그것을 팔아먹겠는가?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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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다행히 그 사람들이 욕심이 많아서 미국까지 넘보다가 결국 목에 걸려서 구역질을 하고 토해내게 되었다. 그 덕택에 그냥 우리는 엉겁결에 해방된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맥아더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세력으로 본다면 모세는 하나님이 세력이고 맥아더는 미국이 세력이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해서 일본이 지배하던 땅을 모두 내어 놓아서 우리가 해방되었지 우리 힘으로 해방된 것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것을 은혜로 해석해서 우리나라를 은혜로 시작하였으면 지금 얼마나 행복한 나라가 되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두 편으로 갈라져서 싸운다. 한심한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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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고난이 닥쳐오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고대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름부음 받은 종을 보내신다는 믿음이다. 이것이 그들의 메시야 사상이다. 그러므로 국권을 상실한 그들에게는 예수가 메시야인가만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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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고난이 닥쳐오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고대한다. 약한 백성이니까 그렇다. 강한 백성이라면 자기들이 무장을 해서 어떻게 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였다. 누가 자기들을 구원해 줘야 할 구원자를 고대하는 백성들이었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보내신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한 이상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고 자기 종을 기름 부어서 보낼 것이라고 믿었다. 기름 부어 보낸 자를 그리스도라고 했다. 이것이 그들의 메시아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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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을 상실한 그들에게는 예수가 메시아인가만이 문제였다. 예수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인가 아닌가가 문제였다. 지금의 유럽 사상에는 메시아사상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미국 사람들은 ‘메시아’하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다. 미국에서는 영웅이 나오면 암살한다. 자유국가, 민주국가에 영웅이 나오면 독재가 생기니까 없애야 된다고 생각한다. 케네디 암살도 그래서 일어났다는 말이 나온다. 케네디가 너무 인기가 올라가서 저래서는 안 된다고 암살했다는 사실인지 아닌지의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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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만 이런 메시아사상을 갖고 있다. 우리도 처지를 돌아본다면 이런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백성들이다. 조선 왕조 후기에 정감록 사상이 나온다. 그것은 정씨가 나와서 나라를 세우면 태평성대가 된다는 메시아사상이다. 정씨가 분배 정자 정씨인지 바를 정자 정씨인지 모르겠다. 은유적으로 비유적으로 써놓은 책이기 때문에 바를 정(正)자 일 것이다. 바른 왕이 나오면 나라가 평정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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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메시아인가만 문제였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아니었다. 예수는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아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보고 나라를 구원할 사람이라고 봤겠는가?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자꾸 더 이적을 원했다. 우리 같으면 그 정도 이적을 행했으면 굉장하다고 했을 것인데 그것 가지고는 양에 차지 않았다. 나라를 구원해야할 사람이니까 그것 가지고 나라를 구원 하겠는가 ?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다고 해서 나라를 구하겠는가? 모든 문제가 다 나라를 구하겠는가로 집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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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예수는 그들이 기대하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함이 아니었다(행1:6참). 모세는 바로에게 종이 된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예수는 사단에게 노예가 된 인류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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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 맞는 말이다. 예수는 그들이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왔다. 다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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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바로에게 종이 된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 때의 상황에는 모세와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예수의 상황도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그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한 번 바로에게 종 된 곳에서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이 오래가지 못하고 망했다. 그래서 역사적인 반성이 생겼다. 바로의 종 된 것을 해방시키는 것 정도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말한 사람들이 선지자들이다. 예수는 사탄에게 노예 된 인류를 구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 차원이 달라졌다. 예수님도 모세시대에 왔다면 바로를 제압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했을 지도 모른다. 모세는 당시의 예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는 로마에게 속국이 된 것이 문제가 아니고 사탄에게 노예 된 것이 근본적인 인류의 문제라고 했다. 역사가 발전하면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생각도 이렇게 점점 더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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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바로의 노예 상태에서는 해방이 되었지만 사탄의 노예 상태에서는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그들의 나라는 얼마가지 못해 도로 망하고 말았다. 세상 속에서는 다른 나라와 똑 같았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이 지켜주시니까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시험에 합격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학교에서도 시험은 성령도 어쩌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열심히 성령님께 기도했지만 시험지를 받으면 허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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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에게 노예가 된 것은 사탄에게 노예된 것의 표적이었다. 사람이 노예 되는 것은 저렇게 되는 것이다. 자기 맘대로 못 살고 끌려 다니면서 사는 것이 노예생활이다. 사탄에서 노예 된 백성도 저렇다는 것을 이렇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적이 바로였다면 인류의 적은 사단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라 하면 예수는 인류의 메시아라고 할 수 있다. 바로는 이스라엘의 민족국가를 훼방하는 자였지만 사단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하는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자다. 예수님의 목적은 인류를 사단에서 구원해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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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잠잠해 졌지만 1970년대나 80년대에 기독교인들 중에는 해방신학이라고 해서 불의한 세상을 고치고자 사회에 직접 뛰어 나갔던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천주교는 이것을 이용해서 큰 세력을 확장했고 그 덕택에 김수환주교는 추기경이 되었다. 그 때 당시 청년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독재를 타도하고 사회에 정의를 실현하는 가에 있었다. 이것을 주장하는 교회에 청년들이 많이 몰려갔지만 그 물결이 지나가 버리자 썰렁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천주교는 한 번 들어오면 썰렁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티칸에 등록을 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름까지 바꾸어 버리는 데 어떻게 빠져나가겠는가? 그 때 한국의 천주교 인구가 급격히 불어나서 로마교황청에서 한국에 추기경을 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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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목적을 두는가가 중요하다. 예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류를 사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자이지 나라 문제나 사회 문제로 오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 때 당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보다 세례요한이 더 위대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직접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예수는 그러지 않고 피해 다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고 말았다.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더라, 사람들이 많이 오면 딴 데 가시더라.’ 하는 것은 피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목적한 것은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을 찾아 왔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오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 앞에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또 피하시고, 피하시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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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최후의 재판정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셨고, 빌라도의 질문에는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오신 것이지, 인간들이 바라는 나라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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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최후의 재판정에서 유대인들의 제사장들이 묻는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리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에 예수님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너희가 말하였느니라.” 하는 것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유대백성들 앞에서는 왕이냐고 하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메시아냐 하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억장이 무너질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다. 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 보다가 몇 마디 전하는 것이다.’ 라고 말을 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네가 우리가 기대하던 왕이냐?, 네가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냐?’ 이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니까 이것은 죽여 마땅하다는 것이다. 분노해서 예수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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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의 질문에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너의 나라 사람들이 너를 지지하고 옹호할 것이 아니냐?” 이렇게 빌라도 물으니까 “내 나라는 여기 속하여 있지 않다.” 그래서 빌라도에게는 왕이 아니라고 하고 유대인들에게는 왕이라고 한 셈이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오신 것이었지 인간들이 바라는 나라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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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오신 메시아로서, 지금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전파하시고, 장차는 새 예루살렘에서 어린양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생명수가 흐르는 통치를 이루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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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오신 메시아이다. 지금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전파하고, 장차는 새 예루살렘에서 어린양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생수가 흐르는 통치를 하실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오신 분, 메시아, 그런데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교회의 머리되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전파하고 있다. 그리고 장차는 새 예루살렘에서 생명수가 흐르는 통치를 이루실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에 대한 대답이다. 오늘 우리도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예수를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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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인들에게
로고스가 육체가 되신 분(요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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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인들에게 로고스는 우주적 이성이며 최고의 이성으로서 우주와 인생을 좌우하는 정신이다. 그들은 인간을 움직인 것이 이성인 것과 같이 이 우주도 우주 자신의 이성이 좌우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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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헬라인들에게는 예수가 누구인가? 로고스가 육체가 되신 분이라는 이것을 전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맨 처음에 말씀이 육체가 되어 라고 했는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는 것은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는데 이 로고스는 하나님이다. 이 말이다. 이 로고스가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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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요한은 헬라인들에게는 여호와니 이런 말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런 것은 소용이 없으니까 로고스가 육체가 되었다고 말을 했다. 아주 독특한 용어를 찾아내게 되었다. 희랍인들에게 로고스는 우주적인 이성이다. 그러니까 최고의 이성이다. 그 사람들은 우리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사람도 이성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이 우주도 우주의 이성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로고스가 그 이성이 우주와 인생을 좌우하는 정신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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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자기들처럼 생각을 한 것이다. 자기들은 이성적인 사람들이니까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고 이성적인 사람들이니까 내가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을 해서 한다. 그와 같이 이 우주에도 그런 정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로고스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로고스가 지금 사람이 되어서 왔다는 것이다. 아주 묘한 말이다. 그들은 인간을 움직이는 것이 이성인 것처럼 우주도 마찬가지로 우주의 이성이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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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이성은 비인격적이었기에 사람과는 무관한 어떤 원리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성이 육체가 되어 우리 중에 왔는데 그가 온 것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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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이성은 비인격적인 이성이다. 우주를 움직이는 이성은 비인격적이다. 봄여름가을 겨울이 왜 움직이냐? 그것은 우주의 이성이 있어서 그렇다. 그런데 그 우주의 이성이라는 것은 비인격적인 것이다. 어떤 원리이다. 자연의 원리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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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주의 이성이 헷가닥한 판이라 입춘이 지났는데 눈이 쌓여서 동해안에는 폭설이 눈 폭탄이 터졌다고 한다. 우주의 이성이 헷가닥한 것이다. 인간들이 하도 불을 많이 태워서 연기를 많이 올려서 하늘이 뻥 뚫어지고 나니까 하늘의 이성이 헷가닥해서 봄인지 여름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과는 무관한 어떤 원리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희랍인들도 이성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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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성이 자기 안에는 있지만 우주 안에 있는 이성과 자기는 어떻게 교통할 것이냐? 하는 이런 것이 아쉬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성이 육체가 되어서 왔다는 것이다. 너희가 생각하는 그 이성이 우주를 움직이는 최고의 이성이 지금 사람이 되어서 왔다는 것이다. 그가 온 것을 보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것이다. 말이 된다. 그 이성이 하늘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원리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인격이 되어서, 사람이 되어서 왔다. 바로 우리 옆에 지금 왔다. 우리 가까이 왔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보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이 사람들도 은혜와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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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사람을 영접하면 그 이성과 인격적으로 함께 함으로써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은혜는 인격을 완성하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며, 진리는 그들이 완전하게 살고자 하는 최고 지혜의 원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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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사람을 영접하면 그 이성과 인격으로 함께함으로서, 우주의 이성이 인간이 되어 온 사람이니까 이 사람을 영접하면 우리 인간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사상과도 아주 흡사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은혜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혜택이 아니라 인격을 완성하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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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라는 것은 카리스, 카리스마로 아름답다는 뜻이다. 이 사람들은 미를 사랑한다. 진선미의 미인대회를 하는데 그 진선미이다. 미의 상징인 비너스가 있다. 희랍의 신전에는 모두 그렇게 예술이 발달한 이유가 미를 좋아하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인격적인 완성도 미 라고 본 것이다. 최고의 미다. 그래서 은혜는 인격을 완성하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진리라는 것은 그들이 완전하게 살고자 하는 최고의 지혜가 흘러나오는 곳, 그 원천을 진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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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심이고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되고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자기들의 관심이니까 요한이 여기에 먹이를 던진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이 사람을 영접하면 너희가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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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디를 소개해야 되겠는가? 미장원을 소개하든지 피부과를 소개하든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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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완전함에 도달하려고 지혜를 찾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는 절대자에게 도달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였다(요14:6). 이런 말들은 희랍인들에게는 알아들을 만한 용어이기는 했겠지만 과연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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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완전함에 도달하려고 지혜를 찾고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는 절대자에게 도달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냥 보통사람들에게 한 말이 아니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는 말은 바로 그것을 배경에 깔고 있다. 이 사람들은 완전함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항상 불완전하다.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말은 누구에게서 나온 말이냐 하면 희랍인들에게 나온 말이다. 인간은 어떤 완전함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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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한은 한수 더 떠서 내가 길이요 내가 진리요 내가 생명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희랍인들에게는 알아들을만한 용어이다. 이 사람들은 항상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이렇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고 또 그렇게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지적인 충족을 이루었겠지 믿음을 통해서 예수를 따를만큼은 될 수 없다. 오늘날도 어려운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진리에 대해서 수긍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그것을 따라가는 사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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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요한이 이런 절묘한 대답을 주었지만 이것을 듣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 후로 이것을 알아듣고 예수를 따랐다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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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후에 전파된 기독교를 보면 요한이 의도했던 것과 같은 예수가 전파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복음이 희랍사상을 흡수했는지 아니면 오히려 흡수당했는지, 기독교의 역사는 많은 문제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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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전파된 후에 사정을 보면 요한이 의도했던 것과 같은 예수가 바로 요한이 만났던 그 예수가 전파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 예수가 아닌, 예수가 변질되었다. 복음이 희랍사상을 흡수했는지, 아니면 오히려 흡수당했는지 기독교 역사는 많은 문제를 남기고 있다. 기독교의 교리의 대부분이 다 희랍사상이다. 기독교의 문화, 그 모든 것이 전부 희랍화 된 것이다. 그러니까 희랍사상으로 각색한 예수, 희랍 사상으로 포장한 예수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오히려 흡수당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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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문화라는 것이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문화에 흡수당한다. 엄청난 문화이다. 중국을 넘볼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중화사상이라는 문화가 엄청난 사상이다. 그래서 이민족들이 무력을 가지고 침략해서 들어가면 결국 흡수되어버리고,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 자기들의 어떤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몽골이든지 거란이든지 이런 변방의 오랑캐들이 총칼을 가지고 중원을 침략해 들어가면 그러면 자기들 문화를 전파할 수 있느냐 하면 자기들 문화가 없다. 결국은 문화인데 그러니까 도로 중국의 문화에 흡수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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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거기에 들어가면 블랙홀처럼 먹혀버리고 만다. 문화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그 거대한 문화 속에 들어가서 결국은 흡수되는 그런 사정이었다. 그래서 오늘 기독교 안에서 요한이 전파하려고 했던 그 예수를 찾아내기가 아주 어렵게 되었다. 옥석을 가리기가 어렵게 되었고 모래알 속에서 금을 찾아내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게 되었다. 왜 말씀이 필요한가? 이것을 골라내서 먹으려니 말씀이 필요하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문제가 있지만 희랍인들은 희랍인들대로 문제가 있다. 예수하고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요한이 전파하려고 하는 사람이랑 다른 사람, 다른 예수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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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풀이지만 소가 먹으면 소고기가 되고 양이 먹으면 양고기가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같이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소가 받아들이면 소복음이 되고 양이 받아들이면 양복음이 된다. 그러니까 이것이 많이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생명에 삼킨바가 되면 되지만 오히려 생명이 삼켜버리게 되면 소고기만 생산해주고 끝나는 것이다. 지금 현대문명, 서양문명은 거의 기독교 문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를 모르고 서양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만큼 기독교는 (서양문화에) 깊은 영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독교의 영향이지 예수의 영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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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누구인가?
유대인들에게는 많은 표적들을 제시하심으로써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했으나 그들이 믿지 않았고, 결국 자칭 하나님이라 하여 하나님을 모독하고 안식일을 범하고 성전을 멸시한 자라고 하여 사형에 처한 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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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예수는 누구인가? 이것이 문제다. 유대인들에게는 많은 표적(標的)을 제시했다. 그래서 메시아인 것을 증거(證據)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니까. 조금 전, 여기 22절에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라고 했다. 표적을 구한다는 말은 능력(能力)을 구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이것을 찾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표적을 제시했다. 아무리 좋은 말도 소용없고 진리고 뭐고 다 소용없고 하여간‘너가 (이스라엘)나라를 구원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그것만이 문제였다. 그래서 여러 가지 표적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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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표적을 행하셔도 그들이 도무지 믿지 않았다. 왜 믿지 않았는가? 우리가 볼 때는 굉장한 표적이지만 유태인들이 볼 때는 그것으로는 로마를 정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세례 요한이 옥중에 갇혀서 예수에게 사람을 보낸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이를 기다려야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왜냐하면 자기 목숨이 일각(一刻)에 달려있는데 과연 이 사람이 메시아인지 아닌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 물었다. 그런데 예수님 대답이 무엇인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뜬다고 해라!”고 하셨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그 말을 듣고‘아! 메시아가 왔구나!’이렇게 생각하고 죽었는지 아니면 절망하고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성경에는) 써져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 곳을 떠나셨다고 한다. 그러면 분명히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先驅者)로써 먼저 와서 그 길을 탄탄하게 하는 자(者)였지 만은 예수님은 그 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유태인들은 끝까지 유태인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그래서 (예수께서) 증거를 제시했는데 그 증거로는 (유대인들에게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과 병자가 고쳐지는 것으로는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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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말을 타고 들어와도 시원치 않고 대포를 들고 와도 시원치 않은 판 인데 그 때 만일 기관총만 하나있었으면 메시아가 된다. 로마 군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것(기관총)만 걸어놓고 갈기면 (로마군대가) 당해내지 못한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 시대에 기관총 하나만 있었으면 세계를 다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총하나가지고 시범을 보였으면 대번에 메시아라고 따라왔을 것이다. 그 동안에 (이스라엘사람들은) 독립운동 하다가 많이 실패했다. 그러니까 어지간해서는 믿지 않는 것이었다. 어지간한 사람이 와서 나라를 구한다고해도 믿지 않는다. 그런 상태였다. 우리가 생각하던 것처럼 그 이적을 보고‘메시아다!’라고 할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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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도 사실은 좋아서 따라왔지만 마지막에 사도행전에 가서 보면 또 물어본다.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때입니까? 아니면 또 기다려야 됩니까?’ 라고 했다. 그 유태인의 끈질긴 소원을 마지막까지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또 물어본다. 그러니까 믿을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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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칭(自稱)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독한다. 안식일을 범(犯)하고 성전을 멸시(蔑視)한 자다. 이래서 사형(死刑)에 처해졌다. 문제는 종교적인 이유로 처형을 했지만 실(實) 내용은 그것이 아니다. 그 국민의 소원, 민족의 소원이 채워지지 않고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증오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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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희랍인들에게는 말씀이 육체가 되신 분으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절대자에게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전파하였지만 그들의 사상적인 기질대로 종교적으로 예수를 미화시킴으로써 숭배하게 하였고, 교리화시킴으로서 생명을 굳어지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혼란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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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희랍인들에게는 말씀이 육체가 되신 분으로써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절대자에게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전파했다. 이 보다 더 완벽하게 어떻게 얘기하겠는가? 그들의 사상적인 기질대로 보건대 이것을 받아들이려고 무었을 만들었냐하면 종교적으로 예수를 미화(美化)시켜 놓았다. 그래서 예수가 아주 굉장한 사람이라고 미화시켜 놓았다. 그렇게 미화시켜야 자기들의 자존심상 그 사람(예수)을 숭배해도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나사렛 사람 예수를 숭배한다고 하면 자기 자존심 상한다. 그런데 예수를 절대자로 미화시켜놓아서 그래서 숭배하니까 자기들이 다 자존심이 생기는 것이다. 황제가 예수를 숭배하려면 실제로 거지같은 예수를 숭배하겠냐는 것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황제이상의 어떤 존재로 만들어야 숭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미화를 시켰다. 그리고 교리화 시켜서 아주 철통같이 믿게 만들었다. 생명을 굳어지게 하고 하나님 백성을 혼란하게 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차라리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을 때는 그런대로 특색이 드러났는데 희랍 문화 속에서 예수를 미화시키고 교리화 시키게 되니까 이게 헷갈려 가지고는 뭐가 뭔지를 모르게 되었다. 예수가 교황 같은 예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기독교 안에는 그런 사상이 흐르고 있다. 숭배의 대상이니까 예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뭐한 말을 하면 원수처럼 생각하고 자기 아버지를 잡아먹은 사람처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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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유대주의로 돌아간 사람들이나 희랍의 이원론으로 혼합된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그의 계시록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어린양 예수를 계시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모두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메시야를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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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한은 그의 서신(요한1,2,3서)에서 유대주의로 돌아간 사람들이나 혹은 희랍의 이원론으로 혼합된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 요한 1,2,3서를 보면 이 두 부류의 사람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계시록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어린양 예수를 계시하고 있다. 계시록이 만일 없었더라면 요한의 복음은 완성되기가 어려운 그런 복음이었을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모든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메시아를 계시록에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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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임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같이 되어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행하게 하고 인류를 자기의 조종 하에 두고 있는 사단을 멸하고, 그에게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계획하신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어린양-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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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임으로써 그들이 하나님 같이 되어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행하게 하고 인류를 자기의 조종 하에 두고 있는 사탄을 멸하고, 인류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사탄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탄이 멸해져야 되는 것이지 사람들만 가지고 이러저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항복을 받으려면 두목에게 항복을 받아야 한다. 일본에게 항복을 받으려면 천황의 항복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할 때는 상대편 나라의 왕을 안 죽이는 것이다. 그를 죽이면 누가 항복을 하겠는가? 그러니까 안 죽이고 살려놓았다가 그 사람이 항복 문서에 조인을 하게 해야 전 나라가 다 항복을 하는 것이다. 만약 천황을 없애버리면 누가 일본을 대표해서 항복을 하겠는가? 그리고 항복을 했다고 말 한들 누가 그것을 받아들이겠는가? ‘네가 누구인데 우리가 받아들이겠는가? 우리는 결사 항전하겠다.’ 이렇게 나설 수도 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가서 머리만 딱 없애버리면 될 것 같은데, 지금 우리가 만약 남북 전쟁을 한다면 김정은은 끝까지 살려서 항복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를 없애면 항복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산악지대에서 의병들이 계속 돌아다니면서 반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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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사탄을 멸하고 그에게 노예 된 인류를 구원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어린양-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이기 제일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어떻게 어린양-사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 이것이다. 사자-사람이 온다면 몰라도, 곰-사람이 온다면 몰라도, 다니엘서에 나오는 네 가지 동물들이 다 강대국을 상징한다. 그런 동물들의 이름이 붙은 사람이 와야, 사자-누구, 곰-누구, 표범-누구 이런 사람이 와야 세상(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어린양-사람이 와서 어떻게 구원하는가 하는 이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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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세상은 힘이다. 지금 소치에서 올림픽을 하고 있는데 그 도시는 해안지대는 지금도 야자수가 있고 산악지대에는 만년설이 덮여있는 아주 세계적인 관광지란다. 세상에 그런 나라에서 한번 살아 봤으면, 그렇게 좋은 항구란다. 이런 나라에서 올림픽을 하고 있는데 개막식을 보니 전부 힘의 자랑이었다. 조그마한 나라, 힘없는 나라에서는 선수가 1명만 온 곳도 있었다. 국가 전체의 인구가 2만명 밖에 안 되는 나라도 있다. 그런 반면에 미국이라든지 러시아라든지 이런 나라는 거대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이상하게 선수를 많이 안 보냈다. 13억이나 되는데 선수는 70명 정도 밖에 안 되었다. 아마도 캐나다 미국 소련 이런 쪽에서 1,2,3등을 할 것 같다. 많이 참가한 나라에서 메달을 많이 따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힘이다. 세상은 뭐니 뭐니 해도 힘이다. 정의니 자유니 해도 다 힘이다. 바탕에 힘이 있어야 그 것이 가능하다. 힘이 없으면 자유도 불가능하고 정의도 불가능하고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힘 있는 자의 세계가 세상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평정할 것인가 이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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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인류를 위한 구원하기 위해서는 죽고 다시 산 사람이 필요하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된 인간은 가르쳐서 되지 않고 깨닫게 해서 되지 않는다. 죽고 다시 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을 대표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고, 이방인을 대표한 빌라도에게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하나님 같이 된 사람은 죽고 다시 나야 진실해지고, 진실 안에 있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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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안에 있는 사람을 새 인류로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떤 메시아가 필요한가? 죽고 다시 산 사람이 필요하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된 인간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깨달으면 되는가? 깨달아도 안 된다. 가르쳐서 될 것 같으면 가르치면 쉽다. 얼마나 많이 가르쳐왔는가 유사 이래로 지금까지 가르쳐 왔다. 그래도 안 된다. 깨닫게 하는 것도 몇 천년 동안 깨달아 왔다. 그래도 안 된다.
그래서 이 사람은 죽고 다시 나야 한다. 이것이 영원한 진리다. 죽어야 할 사람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세상은 당연히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죽어야 할 사람이 지배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죽은 사람이 지배하고 죽어야 할 사람이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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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께서는 유대인을 대표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말 한 것이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대표자다. 유대인 중에서 가장 잘 된 사람, 유대인으로 상징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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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대표한 빌라도에게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이렇게 말 하니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묻는 데가 나온다. 하나님 같이 된 사람은 죽고 다시 나야 진실해진다. 여기서 지금 진실한 사람을 찾는다. 진짜 사람, 참 사람을 찾는다. 그렇다면 누가 참 사람인가? 하나님 같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 죽어야 진실해 지고, 죽고 다시 나야 진실한 사람이 나오지 하나님같이 된 사람을 갈고 닦고 포장하고 깨닫고 이렇게 하면 할수록 더 하나님같이 된다. 가르쳐서 많이 알면 알 수 록 더 하나님같이 되고, 깨닫는 것도 많이 깨달을 수 록 더 하나님같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같이 된 사람이다. 그러니까 죽고 다시 나야 진실한 사람이 된다. 왜 우리가 거듭나야 된다는 말을 하는가! 그것은 진실한 사람 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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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새로 지으려면 싹 헐고 새로 지어야지 있는 집을 놔두고 새 집을 지울 수 없다. 수리해 놓은 집은 새 집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고 다시 나지 않으면 진실 할 수 없다. 그리고 진실 안에 있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진리라는 것이 어떻게 진실 없는 진리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진실 안에 진리가 있는 것이지 진실을 벗어난 진리는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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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된 새로운 인류의 나라는 죽고 다시 나서 진리(진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러므로 최종적 메시야의 표적은 모든 인간의 목적과 의도에 어긋남으로서 십자가에 처형 되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맞는 사람으로 다시 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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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된 새로운 인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죽고 다시 나서 진실(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갖는 나라다. 자금 우리는 그런 나라가 언제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 현실에서 우리 집안에서 내 자신에게서 생각해 보면 아주 쉽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안에 내 세계라고 생각하나다면 그런 세계를 누가 누리겠냐는 것이다. 그런 세계는 죽고 다시난 사람만 누릴 수 있다. 십자가 안에서 진실한 그 사람만 이런 세계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것을 지금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가 전 세계에 대해서 알겠는가 모른다. 우리에게서 그렇다면 앞으로 오는 세상도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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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서 내가 출발한 자리가 어디라고 하면 나를 따라오는 사람도 다 그 자리로 가게 된다. 그르므로 누가 진실한 사람인가? 죽고 다시난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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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믿음만 좋으면 천당 간다고 이렇게 소리 지르는 사람이 많이 있다. 믿음만 좋다고 천당에 간다면 그것은 진실이 없는 것이다. 믿음도 필요하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이 진실 안에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 안에서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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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최종적 메시야의 표적은 무엇인가? 참 인간을 구원할 메시아는 어떤 사람이냐 그 표적은 모든 인간의 목적과 의도에 어긋남으로서 십자가에 처형 되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맞는 사람으로 다시 난 예수 그리스도가 맞다는 말이다. 모든 인간의 생각에 딱 맞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메시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도로 아담이다. 사람들은 지금 전부 아담을 바라고 있다. 깨달은 아담, 많이 아는 아담. 아담을 찾고 있다. 그런 아담이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거기에서는 처형되고 - 세상에 대하여는 죽고 -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맞는 사람. 여기에서 다시 산 사람. 이 사람이 필요하다. 이 사람이 바로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 예수보다 지식이 더 많은 사람도 있고 깨달음이 더 깊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 이 사람밖에 없으니까. 말을 탄자도 아니고 지혜자도 아니고 세상에 대해서는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자. 이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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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 사람 밖에는 우리가 희망이 없다. 역사를 보면 암담하다. 있을 수 없는 일 같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 역사를 뒤바꾸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개인에게서 이렇게 보면 또 교회 안에서 이렇게 보면 가능하단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 가능하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엇인가? 도로 인간이다. 새로운 나라가 무엇인가? 다 인간이다. 단지 확대되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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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사람이 확대된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죽고 다시 난 사람이 확대된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사람. 이 사람이 죽고 다시 난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된다. 죽고 다시 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에 쓰일 수가 없다. 위대하지만 쓰일 수가 없다. 자기 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나라가 더 확고하게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 쓰일 수가 없다. 죽고 다시난 사람만 자기 나라가 따로 없고 하나님 나라만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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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나님이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들어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들어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한다.(고전1:27-29)’고 되어있다. 왜냐하면 아무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무 육체라도’하는 말은 바로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지혜 있는 사람도 있고 지식 있는 사람도 있고 깨달은 사람도 있고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육체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 육체라도 - 지혜로운 육체, 깨달은 육체, 강한 육체 등 모든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한 것이다. 그래서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1:31)’ 우리도 자랑하려면 주안에서 자랑해야지 자기의 지혜로운 것 자기의 강한 것 이런 것을 자랑해서는 천국이 안 된다. 이런 것 때문에 오히려 싸움만 한다. 분쟁만 일어나지 하나님 나라가 안 된다. 죽고 다시 난 것만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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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자랑한 것만 하나님 나라가 가능하다. 주 안에서 자랑하지 않는 다른 것들은 모두 교회를 오히려 어지럽게 만들어버린다. 순모임이 안 되게 만들어버린다. 간증이 안 되게 만들어버린다. 흐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상하다. 죽고 다시 난 것만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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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바로 이 사람을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은 유대인의 이유로 거부했고 희랍인들은 희랍인들의 이유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까 거부한 것도 문제가 되고 자기화 시켜버린 것도 문제가 된다. 예수를 거부한 것도 문제가 되고 예수를 자기화 시킨 것도 문제가 된다. 죽고 다시 난 사람 이 사람만 인류의 희망이다. 그리고 교회의 희망이고 우리 가정의 희망이고 또 내 자신에게도 그것이 희망이다.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하셔서 주님 예비하신 나라에 모두 다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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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도 ]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아담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준다 해도 우리가 다 왜곡시키고 우리 생각에 맞도록 만들어 버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주님 안으로 인도하셔서, 죽고 다시난 사람 안으로 인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시고 새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죽고 다시 난 사람들만 하나님 나라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볼 수가 있고 들어갈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이 우리에게 아멘입니다. 당신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모든 일이 다 아멘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의 노선 안에, 주님께서 이끄심 안에 영원히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